<h3>병원에 들어설 때 사람들은 고통과 불안을 열병처럼 껴안고 두려움에 떤다. </h3><h3>그러나 막상 진찰이 끝나고 주사약을 받고 손등에 바늘을 꽂고 링게르병을 들고 이미 링게르를 맞고있는 사람들속으로 들어가 앉고나면 신기하게도 불안은 조금씩 사라진다. </h3><h3>나와 같거나 비슷한 증세로 앓고있는 사람, 나 같은 병은 병이라고 말하기가 송구스러워질 정도로 큰 병을 앓고있는 사람, 육신의 고통들이 모인 그곳에서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나의 고통에 대해 말하고 타인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준다.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값진 정보도 아낌없이 공유한다. 빨리 나으라고 축원하고 건강이 제일이라고 흥분에 젖은 목소리로 변호한다.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고통을 공유하다보면 주사바늘을 뺄 때쯤이면 육체적 상처의 호전과는 상관없이 마음의 부담이나 불안은 훌쩍 해소돼있는것을 발견한다.</h3><h3>타인의 고통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것, 소통하고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치유받을수 있다는것, 그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h3><h3>그 다행스러움을 믿고 그 다행스러움에 감사드린다.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것이다. </h3><h3>발밑에 밟히는 잡초같은 인생들이 있다. 본의 아니게 잡초로 태여났으며, 밟히우고 버림받는것에 길들여져있다. 누구나 상처주지만 상처를 줬다는것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상처입은 령혼은 자신의 상처를 공유할수 있는 다른 상처를 만날 때에야 위로받고 치유받는다. 그것마저 없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이 가슴 시린 상처들을 극복할수 있을가. 나의 소설이 존재할수 있는 리유는 바로 이러한 상처들때문이다. </h3><h3>나의 고통을 누군가에게 공유하고싶다는 절박함, 내 상처를 타인에게 내보여 내가 치유받을수 있다는 믿음, 타인의 상처가 나와 무관할수 없다는 이 목마름, 그것으로 나의 소설은 탄생한다. </h3><h3>상처는 여전히 존재하고 오늘도 무수한 상처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의 상처를 바라보며 그 상처에 무심하지 않는한, 상처는 아물것이고 위로받을것이고 치유될것임을 믿는다. </h3><h3>나의 소설은 상처가 있는 한 그냥 씌여질것이다.</h3><h3><br></h3><h3>김경화</h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