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3>"스승님..."</h3><h3><br /></h3><h3>광해의 부름에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한테로 쏠렸다.나를 발견한 여현이 술잔을 내려놓았다.</h3><h3><br /></h3><h3>"..."</h3><h3>"..."</h3><h3><br /></h3><h3>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나는 알수 있었다.전에 한밤중에 만난 것과는 달리 여현이 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는 것을.아마 나를 허균으로 보는 사람은 허초희를 만난적 없거나 허균에 대해 익숙치 않은 사람이었을 것이다.</h3><h3><br /></h3><h3>"여긴 어인 일이십니까."</h3><h3><br /></h3><h3>하지만 나를 깔끔하게 무시한 이 남자가 내뒤에 서있는 광해에게 물었을 때,나는 어디에서 나온 베짱과 용기인지 문을 밀어젖히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방안에는 명월과 여현을 제외하고 두어사람이 더 앉아있었다.</h3><h3><br /></h3><h3>"허 참,명월이 따르는 술을 어찌 그대로 내려놓는단 말입니까.마시지 않겠으면 이 처남이 대신 마시겠습니다."</h3><h3><br /></h3><h3>여현의 앞에 있는 술잔을 들어 술을 단번에 들이켜자 명월의 눈이 휘둥그래 지는 것이 보였다.</h3><h3><br /></h3><h3>"처남?"</h3><h3>"혹 교산 허균이오?"</h3><h3><br /></h3><h3>이놈의 허균이란 작자는 왜 겨우 약관이 되는 나이에 벌써 유명해진 건지...나는 미간을 구기며 여현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었다.다행이 그 사람들의 반응으로 보아서는 아직까지는 허균과 초면인듯 했다.</h3><h3><br /></h3><h3>"나는 이경전이오.여현형님의 매제되는 사람이오."</h3><h3><br /></h3><h3>여현의 오른쪽에 앉은 사람의 뒤를 이어 왼쪽 사람도 입을 열었다.</h3><h3><br /></h3><h3>"난 정협이오.오늘 동아리 모임이 있어서 이렇게 모인 것이오."</h3><h3>"성함들은 익히 들었습니다."</h3><h3><br /></h3><h3>나는 가볍게 머리를 숙여보인후 한쪽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광해도 주섬주섬 내 곁에 자리를 잡았다.</h3><h3><br /></h3><h3>"동아리 모임에 이리 불청객이 끼어 죄송합니다만,도저히 명월의 이름을 비껴갈수 없어서...양해 구합니다."</h3><h3><br /></h3><h3>이번에는 시선을 명월의 화려한 얼굴에 옮기며 말했다.명월이 고개를 숙이고 입을 막으며 살풋이 웃는다.</h3><h3><br /></h3><h3>"허도련님이 가끔 다녀가신다는 말은 소인도 들었습니다만,소인 또한 바빠서 뫼시지 못한 점 양해 구합니다."</h3><h3>"그런 의미에서 명월이 주는 술잔을 받을수 있겠소?"</h3><h3><br /></h3><h3>내가 스스럼없이 거는 수작에 명월은 여현의 눈치를 살폈다.여현이 드디어 살짝 미간을 구기고 내쪽을 보았다.</h3><h3><br /></h3><h3>"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소?"</h3><h3>"나비가 꽃을 찾아드는데 그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겠습니까."</h3><h3><br /></h3><h3>접선을 쫘악 펼치며 하는 내 말에 여현이 피씩 웃었다.</h3><h3><br /></h3><h3>"가끔은 꽃을 잘못 찾아드는 나비도 있어서 말이요."</h3><h3>"형님의 이 말인즉슨,눈앞의 이 상황은 대체 꽃의 잘못입니까,아니면 나비의 잘못이라 봐야 하오리까."</h3><h3><br /></h3><h3>여현이 시선을 들어 나를 주시했다.사뭇 팽팽해진 방안의 분위기를 완화시키기 위해 이경전이 헛기침을 했다.</h3><h3><br /></h3><h3>"어흠...이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 명월의 뛰어난 명성이 이런 결과를 불러온 것 같소.어서 한잔 올리시오."</h3><h3><br /></h3><h3>이경전의 눈짓에 명월은 기다렸다는 듯 술 한잔을 찰찰 따라서 내게 권했다.</h3><h3><br /></h3><h3>"성함은 우뢰같이 들었사온데 이렇게 뵈니 역시 호기와 재치가 남다르옵니다.부디 소인의 술을 받으시고 동락하시옵소서."</h3><h3><br /></h3><h3>나는 말없이 잔을 받아서 한번에 굽을 냈다.이미 내 주량을 아는 광해는 태연한 얼굴이었으나 여현은 금세 낯색을 흐렸다.</h3><h3><br /></h3><h3>"이젠 되었소?오늘은 동호회 모임이라 더이상 만류하지 않겠..."</h3><h3>"왜 이리 급해하실까.주인인 명월한테서까지 동락하라는 허락을 받은터에..."</h3><h3><br /></h3><h3>여현의 말을 자르며 내가 쌀쌀하게 웃었다.</h3><h3><br /></h3><h3>"안그렇습니까?나으리."</h3><h3><br /></h3><h3>고개를 돌려 광해를 보자 광해도 머리를 끄덕였다.</h3><h3><br /></h3><h3>"모처럼 어렵게 왔는데 모든 것을 형님 하자는대로 하오리다."</h3><h3><br /></h3><h3>광해의 신분을 분명히 아는 여현과 이경전,정협의 얼굴이 모두 사색이 되었다.이경전은 영의정 이산해의 아들이고 정협은 우의정 정언신의 아들로서 둘다 문장이 뛰어난 명문가 자제들이었고 종종 왕자들과 경연자리를 같이한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다만 아까부터 명월이 합석하고 있어서 광해에게 미처 예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광해가 나를 형님으로 부르는 걸 듣고 그들은 더이상 놀라움과 궁금증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 되고 말았다.</h3><h3><br /></h3><h3>"실례지만 두분은 어떻게 같이 오게 되셨는지..."</h3><h3><br /></h3><h3>이번에는 정협이 입을 열었고 광해가 대답을 했다.</h3><h3><br /></h3><h3>"실은 제 형님과 동생이 여기 계시는가 해서 교산형님을 졸라 오게 되었습니다만..."</h3><h3>"형님이시라면 세..."</h3><h3><br /></h3><h3>정협이 놀라서 하는 말을 여현이 막았다.</h3><h3><br /></h3><h3>"세간에서 사람을 찾으려면 기방과 세책방이 제일 빠르다 하였는데 용케도 그 방법을 알고 실행하시는가 봅니다."</h3><h3>"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스승님을 뵈올줄은..."</h3><h3>"아...오늘이 동아리 모임이 있어서 여기를 잠시 빌린 것 뿐입니다."</h3><h3><br /></h3><h3>이경전이 여현 대신 앞질러 대답했다.광해는 고개를 기웃했다.</h3><h3><br /></h3><h3>"무슨 동아리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당대 문장가분들이 모이셨으니 혹시 시회나 독서회 같은 것입니까."</h3><h3>"그게..."</h3><h3><br /></h3><h3>이경전이 말끝을 흐리자 여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h3><h3><br /></h3><h3>"춤 동아리입니다."</h3><h3>"춤...요?"</h3><h3><br /></h3><h3>전혀 예상밖의 대답이었는지 광해는 눈을 크게 떴다.나는 그제야 오늘 모인 사람들이 등등곡[임진왜란전 서울 지방에서 유행한 양가(良家)의 자제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이 집단적으로 모여 귀신 탈이나 무당 행장을 하고 노래하며 춤추며 전란전 흉흉한 민심을 대변했는데 이를 등등곡(登登曲)이라고 했다]의 주요 인물들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h3><h3><br /></h3><h3>"춤은 춤이되 미치광이 춤이겠지요."</h3><h3><br /></h3><h3>내가 심드렁하게 한마디 거들자 여현의 시선이 다시 내쪽으로 꽂혔다.이경전은 고개를 들고 하하 웃었다.</h3><h3><br /></h3><h3>"두분이 사이가 그리 썩 좋지 못하다는 건 알겠는데 오늘 이 자리는 명월을 봐서라도 자제하는 건 어떻겠소."</h3><h3>"그러게 말입니다.두분 다 출중하신 분인데 오늘은 어찌 그렇게 뼈있는 말만 골라 하십니까.부디 소인의 얼굴을 봐서라도 화를 푸시고 이 자리를 즐기시옵소서."</h3><h3><br /></h3><h3>명월이 다시 술잔을 채워 올렸다.나는 고개를 젖히고 연거퍼 술을 들이켰다.그렇게 술이 몇순배 돌았을 때,여현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h3><h3><br /></h3><h3>"미안하네만 오늘은 그만 자리를 파하는게 좋겠소."</h3><h3><br /></h3><h3>고개를 돌려 이경전에게 말하는 여현의 얼굴에 그늘이 꽉 덮혔다.</h3><h3><br /></h3><h3>"다음날 다시 자리를 만들겠소.죄송하지만 저분을 무사히 모시도록 부탁하겠소."</h3><h3><br /></h3><h3>광해쪽을 바라보며 하는 여현의 말에 이경전이 고개를 끄덕였다.뒤이어 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 여현은 내 손에서 술잔을 빼앗은후 상에 내려놓았다.</h3><h3><br /></h3><h3>"뭐하는 겁니까."</h3><h3><br /></h3><h3>고개를 들어 여현을 노려보자 여현은 내 팔을 잡았다.</h3><h3><br /></h3><h3>"누님이 만나면 데리고 오라 내게 부탁하였소."</h3><h3>"제 누님이요?그럴리 없습니다.이제 막 만나서 오는 길인데요."</h3><h3>"거짓말 마시오.누님은 그리 빨리 기거하지 않소."</h3><h3>"어젯밤 집에도 안들어오신 분이 그걸 어찌 아십니까."</h3><h3><br /></h3><h3>하도 팽팽하게 맞서자 다들 어쩔바를 몰라 우리쪽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이어지는 돌발상황에 이번에는 다들 큰 숨을 들이켰다.</h3><h3><br /></h3><h3>"이건 뭐하는 짓입니까!당장 내려놓으세요!"</h3><h3><br /></h3><h3>허공중에 건뜻 들린 내가 발버둥을 치자,나를 가로안은 여현이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h3><h3><br /></h3><h3>"남색으로 오해받는 게 나는 두렵지 않소만."</h3><h3>"따라갈테니 내려놓으세요!"</h3><h3><br /></h3><h3>당황해서 재차 소리를 치자 그제야 내 발이 땅에 닿았다.나는 분에 차 씩씩거리며 여현을 노려보다가 옆에 서있는 광해에게 시선을 돌렸다.</h3><h3><br /></h3><h3>"그럼 저는 이만..."</h3><h3>"네네...어서 가서 일을 보세요.저는 괜찮습니다."</h3><h3><br /></h3><h3>얼굴은 전혀 괜찮아보이지 않은 광해가 손사래까지 치며 말했다.나는 푸우 한숨을 내쉰후 여현을 따라 명월관을 나섰다.</h3><h3><br /></h3><h3>......</h3><h3><br /></h3><h3>곧추 집으로 향하는줄 알았던 여현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저잣거리의 포목점이었다.나는 다소 의아했지만 그 뒤를 따라 포목점 안으로 들어섰다.포목점 주인이 웃는 얼굴로 급히 마중나왔다.</h3><h3><br /></h3><h3>"오랜만이십니다.김도련님...이번에도?..."</h3><h3>"새로 나온 옷감들로 다 한벌씩 만들어 주시오."</h3><h3>"명에서 특별히 들어온 귀한 명주도 있습니다만..."</h3><h3>"그것도 한벌 주시고."</h3><h3>"네네,다 그 댁으로 보내드리오리다."</h3><h3><br /></h3><h3>포목점을 나와 여현은 다시 방물점에 들렸다.</h3><h3><br /></h3><h3>"이거랑 이거...그리고 저 나비접이까지...새로 나온 건 다 주시오.지난번과 같은 곳이요."</h3><h3><br /></h3><h3>주문을 마친 여현은 유유하게 앞장을 섰고 나는 가슴 한가득 의혹을 품은채 그를 따라 나섰다.한참 걸어서 한강 둔덕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가는 길이 완전히 집으로 향하는 길이 아님을 확인한 나는 더이상 참을수 없었다.</h3><h3><br /></h3><h3>"저어..."</h3><h3><br /></h3><h3>여현은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았으나 그의 보폭이 조금 작아지는감을 느낀 나는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잡으며 말했다.</h3><h3><br /></h3><h3>"집으로 간다면서요."</h3><h3>"..."</h3><h3>"진짜 거짓말은 내가 한게 아닌데...누님이 언제 당신보고 나를 데려오라 했습니까."</h3><h3>"이젠 좀 그만하시지."</h3><h3><br /></h3><h3>그가 홱 돌아섰다.정오의 태양아래였지만 그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졌다.</h3><h3><br /></h3><h3>"왜 날 속였소?"</h3><h3>"..."</h3><h3>"그날 새벽도,당신이었지?"</h3><h3><br /></h3><h3>나는 쉽게 정체를 들킨 것에 주눅이 들었지만 그날 새벽 일을 떠올리고 금세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h3><h3><br /></h3><h3>"내가 속인 게 아니라 그날 나를 균이라 오해한 건 서방님이 먼저였습니다."</h3><h3><br /></h3><h3>그가 고개를 들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h3><h3><br /></h3><h3>"그럼 오늘은 웬 일인지 어디 말해보시오."</h3><h3>"오늘은...옥당에 서방님 찾으러 갔다가 우연히 왕자군을 만나게 되어...그렇다고 왕자군에게 내가 여인이라 할순 없지 않습니까."</h3><h3>"명월관엔 어찌 온 것이요?"</h3><h3>"임해군과 순화군이 궐을 나온 모양입니다.광해군께서 명월관이 짚힌다 하여 동행했을뿐..."</h3><h3>"술은 왜 마신 것이요?"</h3><h3><br /></h3><h3>이 싸람이 진짜...아니 내가 지금 왜 추궁을 당해야 하지?분명 기방을 들락거린 서방을 현장에서 잡은 부인의 입장이었는데,왜 여기까지 끌려와서 오히려 죄인 취급을 당하고 있는 걸까.</h3><h3><br /></h3><h3>이렇게 당할수만은 없지.</h3><h3><br /></h3><h3>"그러는 서방님께선 왜 기방을 가신 겁니까."</h3><h3>"..."</h3><h3>"그리고 어젯밤 외박도 하셨구요.저보고는 오늘 왕자들 경연이 있다 하셨는데,경연은 부득이하게 취소했다고 들었습니다."</h3><h3><br /></h3><h3>그의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그리고 드디어 칼자루를 쥐었다...고 생각하려는 찰나.</h3><h3><br /></h3><h3>그가 웃었다.그것도 아주 기분 좋다는 듯이 환하게 웃는다.</h3><h3><br /></h3><h3>아니 왜 웃지?</h3><h3><br /></h3><h3>내가 질투 비스무리한 걸 해서 기쁘다는 건가?</h3><h3><br /></h3><h3>밝은 태양아래 탁 트인 강변,이른 봄 돋아나는 새싹과 이름모를 새들의 지저귐소리...아담한 둔덕에 자리잡은 이끼 푸른 초가집 한채,그 모든 다정한 풍경을 뒤로 한채 그의 웃음이 유난히 눈부셨다.그리고...이유 모르게 슬퍼서 괜스레 울컥해졌다.</h3><h3><br /></h3><h3>"아씨...얼마나 기다렸는데...오늘 드디어 오셨네요!"</h3><h3><br /></h3><h3>뒤에서 반가움에 찬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다면,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한 여인이 달려와 나를 와락 끌어안지만 않았다면...</h3><h3><br /></h3><h3>솔직히 그러지만 않았다면 나는 여현의 가슴에 종주먹을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h3><h3><br /></h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