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3>이튿날 나는 아침일찍 일어나서 향단의 도움을 받아 남장차림을 했다.</h3><h3><br /></h3><h3>"아침부터 출타하시면 안방마님께서 하문하실터인데..."</h3><h3>"너도 모른다 하려무나."</h3><h3>"네에?"</h3><h3><br /></h3><h3>심드렁한 내 대꾸에 향단이 눈을 크게 떴다.하지만 이 착한 아이는 더이상 내게 묻지 않기로 생각을 굳힌 모양이었다.입을 다문채 부지런히 내 갓끈을 정리해주는 그녀를 향해 내가 물었다.</h3><h3><br /></h3><h3>"그런데 향단이 너,올해 나이는 어떻게 돼?"</h3><h3>"스물다섯이와요."</h3><h3>"저런...나보다..."</h3><h3><br /></h3><h3>나보다 언니라고 말하려다 말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올해가 기축년이라면 허초희의 나이는 스물일곱이기 때문이다.나보다 다섯살이나 이상인 허초희는 분명 나보다 훨씬 진중하고 성숙된 이미지로 향단의 머리속에 각인되었을 것인데...대체 이 아이는 왜 지금의 나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일까.</h3><h3><br /></h3><h3>"아씨보다 두살 적긴 하지만 혼기는 지났사와요.그래서 아씨께선 항상 좋은 자리를 알아봐주고 계셨사온데..."</h3><h3>"그런데?"</h3><h3><br /></h3><h3>담담한 표정으로 내 행색을 마무리 해주며 향단이 말을 이었다.</h3><h3><br /></h3><h3>"안방마님이 윤허하시지 않으셨어요."</h3><h3>"저런...왜?"</h3><h3>"글쎄요...근래에 와서 집에 부리는 사람이 적어지니 그러시는 게 아닐까요."</h3><h3>"상하 이삼십 행랑식구가 적은거야?"</h3><h3>"전에는 사오십도 훨씬 넘었사와요.대감마님께서 근래에 많이 내보내셨지요."</h3><h3><br /></h3><h3>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문장이 뛰어나 선조로부터 사가독서(賜暇讀書: 문예부흥을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까지 받았었던 김첨대감은 벼슬이 이조좌랑에 이어 교리에까지 올랐다가 6년전 율곡 이이를 탄핵한 이유로 좌천된후 그 이듬해 파직되었을 것이다.정계에서 물러난 대감이 집안살림을 간소화 하고 하인들을 내보내는 것은 인지상정의 일이었다.</h3><h3><br /></h3><h3>"대감마님께 네 사정을 여쭤보면 어떨까?"</h3><h3>"안방마님께서 따로 제 갈곳을 생각해둔 것이 있다 하셔서 대감께서도 묵과하신 걸요."</h3><h3>"그렇다면 다행이고.우리 예쁜 향단이 좋은데 시집가야 하겠는데."</h3><h3><br /></h3><h3>내 농에 향단은 얼굴을 확 붉혔다.</h3><h3><br /></h3><h3>"아씨님도 참...저같은 처지야 윗전의 분부대로 갈뿐이지요.그냥 사지 멀쩡하고 마음씨 착한 사람이라면 그나마 제 복이지요."</h3><h3><br /></h3><h3>빌어먹을 조선시대...라고 또 욕하고 싶은 것을 눌러담고 나는 내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무사히 빠져나왔다.파루(罷漏,조선시대 통행금지 해제시간,지금의 4:30분)의 이른 새벽이라 앞채는 물론 문칸방 마당쇠도 잠에서 깨지 못한듯 했다.나는 유유히 도성안 길목을 활개쳐 다녔다.</h3><h3><br /></h3><h3>"이게 얼마만의 자유인가..."</h3><h3><br /></h3><h3>향단이 알려준 저자거리에 이르러 희붐히 밝아오는 아침하늘아래 한창 시작되는 시전상인들의 분주한 움직임을 보며 나는 감탄했다.어제 부인과 선전포고를 내린후 나는 더이상 집구석에만 박혀사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불행한 삶을 이어가지 않으려는 결심을 내렸다.어차피 올해 겨울이 되면 나는 죽거나 떠나야 하는 운명인 것을.</h3><h3><br /></h3><h3>조선시대 도성 한복판은 현대의 번화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름 신기한 광경들로 북적거리는 재미가 있었다.저자거리에서 만두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후 나는 스적스적 다음 행선지로 걸음을 옮겼다.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잠시 대문밖에서 기웃거렸다.</h3><h3><br /></h3><h3>"어허...예가 어디라고 그리 기웃거린단 말이오?보아하니 유생 같은데 경을 치기전에 썩 물러가지 못하겠소?"</h3><h3><br /></h3><h3>문을 지키던 수문갑사 하나가 호통을 치자 나는 시선을 거두고 뒤로 잠시 물러섰다.돈화문,창덕궁으로 들어가는 궐문의 수비는 삼엄했고 나는 옥당(홍문관의 별칭)에서 여현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h3><h3><br /></h3><h3>내가 홍문관으로 직접 여현을 찾아온데에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었다.밤새 생각한 결과 나는 여현에게 내가 아는 앞일을 얘기해줄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그가 미래에 대해 다소라도 지각을 한다면 이에 대한 대비책이 있을 것이고,또 그러느라면 운명대로 정해진 것에 그 어떤 변화가 오지 않을까.즉 허초희-내가 올해 죽지 않아도 된다는 등...</h3><h3><br /></h3><h3>솔직히 아무리 내가 현대에서 별로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해도,뜬금없이 조선시대에 와서 이리 허망하게 죽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그러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했다.가만히 있기보다는 움직이는 것이 백배 나으니까.</h3><h3><br /></h3><h3>바로 그때 궐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말을 채찍질해 달려나왔다.한참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내가 미처 피할 새도 없는 상황이었다.다행이 말을 탄 사람이 바로 내 코앞에서 말고삐를 잡아당겼느니 망정이지,하마터면 올해안이 아니라 당장 지금 송장을 치를뻔했다.</h3><h3><br /></h3><h3>"괜찮소?"</h3><h3><br /></h3><h3>말을 탄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내게 물어왔다.나는 놀라서 잠깐 눈을 깜빡이다가 그를 향해 빽 소리를 쳤다.</h3><h3><br /></h3><h3>"야 이 꼬맹이야!누굴 보고 지금 반말..."</h3><h3><br /></h3><h3>문득 지금이 현대가 아니라는 사실이 뇌리를 쳤다.궐에서 막 나오는,그리고 평상복 차림이지만 감히 초면에 반말을 할수 있는 존재라면...열대엿살 되어보이는 앳된 얼굴이지만 준수한 용모에 침착하고 온건한 이 태도라면...</h3><h3><br /></h3><h3>"아,괜찮소.갈길이나 가시오."</h3><h3><br /></h3><h3>소매를 홱 저으며 말하자 소년은 오히려 말에서 내렸다.</h3><h3><br /></h3><h3>"괜찮다니 다행이오.혹 나보다 먼저 다른 사람들이 나오는걸 보지 못하였소."</h3><h3>"못보았소."</h3><h3><br /></h3><h3>소년의 귀티와 위용에 괜스레 기가 죽었지만 하필 나는 할말은 내뱉는 성미였다.</h3><h3><br /></h3><h3>"탐문보다 미안하다는 말이 우선일 것 같소만."</h3><h3>"아...미안하오.내 일시 사정이 급하여 그만..."</h3><h3><br /></h3><h3>소년은 민망한 웃음을 지어보인후 다시 말에 올랐다.</h3><h3><br /></h3><h3>"지금은 갈길이 바쁘니 나중에 다시 사과하리다.보아하니 유생 같은데 혹 이름을 알려줄수 있겠소?"</h3><h3>"균이요.허균."</h3><h3><br /></h3><h3>남장차림이라 대충 둘러댔는데 소년이 갑자기 말고삐를 당기며 돌아보았다.</h3><h3><br /></h3><h3>"허...균?"</h3><h3><br /></h3><h3>소년의 얼굴에 크게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허균이 벌써부터 문장과 시로 이름을 날렸었나?지금 시간대라면 허균은 아직 대과시험도 치르지 않은 애숭이 생원일텐데...</h3><h3><br /></h3><h3>"혹 여현스승님의 처남 되십니까?난설헌 허초희 여도사님의 동생..."</h3><h3>"김성립의 처남은 맞소만...뉘신지..."</h3><h3><br /></h3><h3>소년이 의외로 허초희의 가족관계를 꿰뚫고 있는 것에 나는 놀랐다.게다가 여현스승이라니...여현이 언제 제자가 있었을까.</h3><h3><br /></h3><h3>소년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우며 다시 말에서 뛰어내렸다.</h3><h3><br /></h3><h3>"인사가 늦었습니다.저는 광해입니다."</h3><h3><br /></h3><h3>......</h3><h3><br /></h3><h3>"스승님께서 어제 밤 퇴궐을 안하셨다구요?"</h3><h3><br /></h3><h3>번화가에서 좀 떨어진 어느 한적한 주막집에서 막걸리잔을 채워주며 광해가 내게 물었다.나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다행이 현대에서도 괜찮은 주량을 자랑하는 내 체질이 조선시대 막걸리를 그나마 순순히 받아들이는 듯 했다.</h3><h3><br /></h3><h3>"누님한테서 그리 들었습니다만."</h3><h3><br /></h3><h3>낯에 울기 하나 오르지 않은 모습이 광해에겐 마냥 신기해보였던지 그가 다시 내 잔을 꼴똑 채워주며 말했다.</h3><h3><br /></h3><h3>"과연 듣는 소문과도 같이 호방하고 소탈하십니다."</h3><h3><br /></h3><h3>나는 그의 이어지는 칭찬에 다시 잔을 들어 막걸리 한모금을 축냈다.후세에서 평가가 제일 엇갈리는 비운의 왕 광해군,허균이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대체 어떤 느낌이었을까.그 처지가 안쓰러워 지켜주고 싶었던 걸까.</h3><h3><br /></h3><h3>"그러는 왕자군마마께서는 어찌 평상복으로 궐문을 나서셨습니까."</h3><h3><br /></h3><h3>내가 묻는 말에 광해는 살짝 미간을 구겼다.</h3><h3><br /></h3><h3>"실은 어제밤 저하께서 순화군과 함께 비밀리에 출궁을 하셨습니다.오늘 강연도 그때문에 취소된 것이구요.해서 찾아나서는 길입니다."</h3><h3>"어디 가셨는지는 아십니까."</h3><h3>"짚이는 곳이 한군데 있습니다."</h3><h3>"어딥니까."</h3><h3>"명월관..."</h3><h3><br /></h3><h3>나는 그만 막걸리잔을 내려놓았다.저도 모르게 하아 하는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h3><h3><br /></h3><h3>"혹...육조거리 앞에 있는 의정부와 육조의 고위 관리들이 자주 들려 정사를 논한다는 그곳입니까."</h3><h3>"역시 명월관을 아실줄 알았습니다.같이 가주실수 있겠습니까?"</h3><h3>"제가요?"</h3><h3><br /></h3><h3>나는 뜻밖의 제의에 눈을 크게 떴다.광해는 허구프게 웃어보였다.</h3><h3><br /></h3><h3>"저 혼자서는 그곳 출입이 불가해 보여서요.형님께서 앞장서주신다면 한번 용기를 내볼까 합니다."</h3><h3>"형...님?"</h3><h3>"제게는 형님이지 않습니까.여현스승님께 들었는데 시와 경전,문장에도 뛰어나시다 들었으니 앞으로 분명 청운에 올라 옥당에 입적하실 것입니다.그때는 제게 스승이 될수도 있으니 이렇게 미리 안면을 트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h3><h3><br /></h3><h3>나는 헛기침을 하면서 광해의 진지한 시선을 피했다.역사에서 허균은 과연 광해의 스승이었지만 나중에는 역모로 몰려 억울하게 처형을 당하게 된다.30년후 광해는 왜 이처럼 아끼는 스승의 처결을 묵과했을까.</h3><h3><br /></h3><h3>"갑시다."</h3><h3><br /></h3><h3>나는 남은 막걸리잔을 깡그리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앞으로 허균과 광해의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었던간에 지금 나는 일단 허균의 역에 집중해야 했다.명색이 [홍길동전]의 저자인데 불의를 보고 움츠릴수는 없었다.</h3><h3><br /></h3><h3>......</h3><h3><br /></h3><h3>향단에게서 얼핏 들은대로 육조의 고위 관리들과 명문가의 자제들만 다닌다는 명월관은 과연 그 명성답게 수비가 철저하고 경계도 삼엄했다.다행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한 기녀가 안으로부터 마중나왔다.</h3><h3><br /></h3><h3>"어찌 이렇듯 발길이 뜸하십니까.잠시 도성을 떠나신 것이옵니까."</h3><h3>"그게 무슨 말인가.올때마다 자네가 딴 손님과 있더군."</h3><h3><br /></h3><h3>기녀의 이름은 모르지만 예쁘장한 얼굴이 퍼그나 인기가 많아보여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응수했다.</h3><h3><br /></h3><h3>"에이그,우리 허도련님이 삐치셨구나.앞으로는 도련님만 모실것이오니 이녁을 용서해주시와요."</h3><h3><br /></h3><h3>기녀의 애교를 건성으로 받아주며 나는 그녀가 안내하는대로 걸음을 옮겼다.광해는 눈을 크게 뜨고 내뒤를 바싹 따랐다.다행이 허균이 기방을 자주 들락거린 탓인지 누구도 우리 출입에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내지 않았다.그렇게 기녀가 안내하는대로 기방 깊숙한 안방으로 들어가려는 때였다.</h3><h3><br /></h3><h3>"준수한 외모도 드문 말씀도 소인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가까이 뫼시고 싶어도 기회가 없어 안타까웠습니다.있는듯 만듯,떠날듯 말듯한 나으리의 자태에 안주하지 못하는 외로움이 느껴져 불안합니다.천재시인 허초희도 밤새 나으리를 그리워 한다는 소문이 그른데 없는듯 합니다."</h3><h3><br /></h3><h3>뭐,허초희가 밤새 누굴 그리워해?나는 억이 막혀 옆방으로 바싹 다가섰다.</h3><h3><br /></h3><h3>"항상 먼발치에서 뵙다가 오늘 이렇게 뫼시게 되어 감개가 무량하옵니다.부디 명월이 올리는 술 한잔을 받아주시옵소서."</h3><h3><br /></h3><h3>은쟁반에 구슬 굴리는듯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나온다.조금 열린 문틈사이로 여인의 화려한 복색이 눈에 띄였다.명월이라...바로 명월관에서 미모와 음색으로 제일간다는 그 기녀가 아닌가.그녀가 이토록 정중하게 대하는 이는 대체 누구일까.</h3><h3><br /></h3><h3>궁금증으로 기웃거리던 내 시선이 방안의 술잔을 든 사람과 딱 마주쳤다.순간 나는 입안으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h3><h3><br /></h3><h3>"여현..."</h3><h3><br /></h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