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3>빌어먹을.</h3><h3><br /></h3><h3>나는 이미 몇번째가 되는지 모를 이 한마디를 속으로 궁시렁거렸다.방안에는 메뉴를 바꾼 정갈한 음식들이 갖추어져 있고 향단은 내 옆에 앉아 조심스레 시중을 들고있었다.하지만 나는 좀처럼 수저를 들지 못했다.</h3><h3><br /></h3><h3>"아씨,왜 연일 음식을 들지 못하시는 거에요?저희랑 주방에서는 잘도 드셨으면서..."</h3><h3><br /></h3><h3>향단이 말하다 말고 혀를 홀랑 내밀었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h3><h3><br /></h3><h3>"그러게나 말이다.그때에 비하면 진수성찬인데,그날이후론 도통 밥맛이 없어."</h3><h3>"그날이라면...제가 윤도련님에 대해 말씀드린..."</h3><h3><br /></h3><h3>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향단은 금세 머리를 조아렸다.</h3><h3><br /></h3><h3>"다 쇤네가 입이 빠른 탓이와요.그 일은 차라리 모르고 지내셨으면 더 편하실텐데..."</h3><h3>"그게 어떻게 니탓이냐."</h3><h3><br /></h3><h3>나는 입속말로 우물거렸다.시간은 그때부터였으나 내가 밥맛을 잃은 것은 그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h3><h3><br /></h3><h3>대체 그 빌어먹을 꼼생원은 그날 이후로 왜 그림자도 안비치는지...아 되었다.더 생각 말기로 하자.</h3><h3><br /></h3><h3>마지못해 숟가락을 들었으나 일초도 못되어 탕 하고 상위에 내려놓았고 향단이 와뜰 놀라며 나를 본다.</h3><h3><br /></h3><h3>"아씨..."</h3><h3>"연일 서당에도 안계신다 하였지?"</h3><h3><br /></h3><h3>향단의 부름과 내 말이 거의 동시였다.나는 즉각 후회했고 향단은 그제야 눈치를 챈듯 눈을 반으로 접어 웃었다.</h3><h3><br /></h3><h3>"서방님 말씀이세요?"</h3><h3>"..."</h3><h3>"쇤네가 접에 찾아가 볼까요?"</h3><h3>"그럴 필요는..."</h3><h3>"아참...이제는 엄연한 홍문관 저작이시니 공무가 더 바쁘시겠지요.접보다는 홍문관에 연통을 넣어볼까요."</h3><h3>"홍문관..."</h3><h3><br /></h3><h3>서당 김성립은 줄곧 과거시험에 탈락하여 송씨부인이 난설헌을 더 미워했다는 기재는 사실이 아니었던가.</h3><h3><br /></h3><h3>"과거에 급제하고 홍문관에 들어간 건가."</h3><h3><br /></h3><h3>내 중얼거림에 향단은 허구프게 웃었다.</h3><h3><br /></h3><h3>"아씨님 기억이 되돌아서지 않아서 그렇겠지만,서방님이 증광문과에 병으로 급제하고 홍문관 저작을 제수 받으신 일이 쇤네는 바로 엊그제 같은데...안방마님께서 이 일로 연일 대잔치를 벌리셨잖아요."</h3><h3><br /></h3><h3>잔치를 벌릴만하지...그 부인 성격으로는.허나 잠시만.</h3><h3><br /></h3><h3>뭔가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나는 향단을 쳐다보았다.</h3><h3><br /></h3><h3>"그럼...지금이 무슨 해지?"</h3><h3>"올해가 기축년이와요."</h3><h3><br /></h3><h3>드디어 향단은 내 뜬금없는 질문에 태연하게 대답하기로 한 모양이었다.하지만 향단의 대답을 들은 나는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h3><h3><br /></h3><h3>기축년,기축옥사,정여립의 난.</h3><h3><br /></h3><h3>정여립(鄭汝立)은 조선시대의 인물 중에서 가장 첨예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한 사람이었다.그는 조선시대 당쟁의 중심적 사건인 기축옥사(己丑獄事)를 불러온 장본인이었고,그 결과 기축옥사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조작과 진실의 양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사건으로 손꼽히고 있었다.</h3><h3><br /></h3><h3>향후 3년간 천여명의 선비들을 죽음에로 몰아간 기축옥사,그리고 3년후 임진년이 되면...아아...</h3><h3><br /></h3><h3>나는 진저리를 치면서 향단을 보았다.</h3><h3><br /></h3><h3>"그래,접이 아니면 홍문관이라도 사람을 보내서...서방님을 좀 불러줘.급히 할 얘기가 있으니까."</h3><h3><br /></h3><h3>......</h3><h3><br /></h3><h3>안일하게 보낼 일이 아니었다.미적거릴 시간도 없었다.</h3><h3><br /></h3><h3>내가 어떤 경로로 어떻게 이 시대에 왔든,돌아갈 길을 찾지 못한 이상은 나는 허초희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h3><h3><br /></h3><h3>처음에는 정체를 들키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앞섰다.그후에는 이 집 식구들과 허초희의 과거 이야기에 정신이 팔렸었다.하지만 지금 나는 내가 여기로 온 제일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h3><h3><br /></h3><h3>우선 올해가 기축년이라면,허초희는 올해안에 죽게 될 것이다.그녀가 죽는다면 그녀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나는 따라 죽거나 원래 시간대로 돌아가게 되는 두가지 경우가 있을 것이다.</h3><h3><br /></h3><h3>허초희가 죽으면 여현은 송씨부인의 명에 따라 남양 홍씨와 재혼을 하게 될 것이다...아아 이건 괜스레 싫다.</h3><h3><br /></h3><h3>3년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 여현은 식구들을 떠나보내고 의병장으로 싸우다 전사하게 될 것이다.이것도 싫다.</h3><h3><br /></h3><h3>결과적으로 나는,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허초희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고,주위 사람들의 비참한 최후 또한 묵과해야만 하는 것이다.</h3><h3><br /></h3><h3>과연 그게 가능할까.</h3><h3><br /></h3><h3>향단에게서 허초희의 지난 과거 얘기를 들었을 때,나는 그녀의 불행을 답습할수 없다고 생각했었다.그런 내가,주위 사람들의 불행 또한 보고만 있을수 있을 것인가.</h3><h3><br /></h3><h3>"사람까지 보내 급하게 부른게 고작 이런 넋 놓은 모습을 보라 함이요?"</h3><h3><br /></h3><h3>어찌나 골똘한 생각에 잠겼던지 머리위에서 여현의 목소리가 울려서야 나는 고개를 쳐들었다.홍색 단령차림의 그가 왠지 낯설게 보인 것은 단지 관복 때문일까.</h3><h3><br /></h3><h3>"오셨습니까."</h3><h3><br /></h3><h3>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에게 상좌를 권했다.이젠 이런 조선시대 예법에도 익숙해지려 한다.그는 좌정하고 앉아서 맞은켠에 앉는 내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h3><h3><br /></h3><h3>"연일 식사를 거른다 들었소.음식이 맞지 않는 것이요?"</h3><h3>"마음 써주신 덕분에 부족함이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h3><h3><br /></h3><h3>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나는 내당에서 식사를 하게 된것이 그가 공들여 송씨부인을 설득한 결과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h3><h3><br /></h3><h3>"안색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구려."</h3><h3>"실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모셔오라 하였습니다."</h3><h3><br /></h3><h3>나는 제잡담하고 본론에로 화제를 이끌었다.</h3><h3><br /></h3><h3>"혹 홍문관 정수찬어른이 지금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h3><h3>"정수찬어른..."</h3><h3><br /></h3><h3>여현이 의아한 눈빛을 보내왔다.</h3><h3><br /></h3><h3>"부인이 어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분을 다 찾으시오."</h3><h3>"더 묻지 마시고 혹 그분이 대동계라는 조직과 연관이 있다면 되도록 대동계를 멀리하라는 서찰 한통만 띄워주실수 있을런지요."</h3><h3>"..."</h3><h3>"외람된 부탁이긴 하오나 같은 홍문관 소속이고 또 한때는 서방님의 선배 되시는 분이 아닙니까."</h3><h3>"..."</h3><h3>"그분이 위험에 처하면 그분과 비슷한 이 세상 뜻있는 선비님들이 다 같이 위험에 처할수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그중에는 서방님의 절친과 지인분들도 많으실텐데 곧 큰 옥사가..."</h3><h3>"또 꿈을 본 것이요?"</h3><h3><br /></h3><h3>여현이 가볍게 내 말을 잘랐다.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h3><h3><br /></h3><h3>"꿈...요?"</h3><h3>"예지꿈 말이요.언제는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더니 이번엔 옥사요?"</h3><h3>"전쟁..."</h3><h3><br /></h3><h3>나는 금세 맥이 풀렸다.대체 허초희는 정체가 무엇일까.</h3><h3><br /></h3><h3>"초희...제가 그랬었나요?전쟁이 일어난다고?"</h3><h3>"3년후인 임진년에 큰 전쟁이 있어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질 거라고 얘기하지 않았소?이번 옥사는 또 언제요?"</h3><h3>"그게..."</h3><h3>"꿈 이야기라면 나중에 들으리라.내일 왕자들의 경연이 있어 가봐야겠소."</h3><h3><br /></h3><h3>여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엉겹결에 따라 일어선 나는 준비해둔 수많은 말들을 도로 삼킬수밖에 없었다.</h3><h3><br /></h3><h3>......</h3><h3><br /></h3><h3>"향단아.내가 전에 꿈을 얘기한 적 있어?"</h3><h3><br /></h3><h3>저녁상을 마주한채 나는 다시 숟가락을 들고 미적거렸다.향단은 고기반찬 그릇을 내쪽으로 옮겨놓으며 고개를 갸웃했다.</h3><h3><br /></h3><h3>"꿈요?글쎄요...아씨께서 지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이 바로 꿈 이야기를 시로 펴내신 것이 아니었던가요?"</h3><h3>"그런거 말고 다른 꿈...예를 들면 예지몽 같은거."</h3><h3>"그런건 들어본적 없었사와요."</h3><h3><br /></h3><h3>향단은 말하다 말고 불현듯 뭔가 떠오른 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h3><h3><br /></h3><h3>"딱 한번 그런 말씀 하셨어요.아씨께서 언제 어느때 가시게 되는데 슬퍼 말라고..."</h3><h3>"그게 언제라고 하던?"</h3><h3>"그게..."</h3><h3><br /></h3><h3>향단은 고개를 숙여 내 시선을 피했다.</h3><h3><br /></h3><h3>"언젠지 기억나지 않사와요.쇤네가 잊음이 헤퍼서..."</h3><h3><br /></h3><h3>그게 바로 기축년 올해겠지.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후 아무 내색 안내고 수저를 들었다.</h3><h3><br /></h3><h3>허초희가 예지꿈을 간혹 꾸었다면 일은 더 쉽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나는 내가 알고있는 미래의 상황들을 꿈내용을 서술하는 형식으로 여현에게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한두번은 모르지만 자주 얘기하다보면 어느정도는 먹히지 않을까.그리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홀가분해져서 막 반찬을 짚으려는 때었다.</h3><h3><br /></h3><h3>"대체 이놈의 집구석은 어떻게 되어서 허구한 날 남정네가 바깥으로만 도는 것이냐?네가 그러고도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h3><h3><br /></h3><h3>문밖에서 송씨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귀를 후볐다.밥 한끼 변변히 먹기는 글러먹었군.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후 수저를 놓고 일어서서 장지문을 열었다.</h3><h3><br /></h3><h3>"저녁진지는 드셨습니까,어머님..."</h3><h3><br /></h3><h3>다소곳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나를 넘어 부인의 시선이 방안의 상위를 한번 훓고 지나가는게 보였다.뒤이어 별로 색다른 반찬을 발견하지 못한 모양으로 부인의 어조가 방금전보단 조금 누그러 들었다.</h3><h3><br /></h3><h3>"초는 왜 아직 켜고있는 게냐!"</h3><h3>"아씨께서 아직 식사전이라..."</h3><h3><br /></h3><h3>향단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부인은 쌀쌀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h3><h3><br /></h3><h3>"밤늦게까지 초를 켜고 또 붓깨나 들고 설치려는 게 아니냐?내 전에도 말했거늘 한번만 더 이 방에서 글쓴 종이를 발견했다간..."</h3><h3>"다 불태워 버리시지요."</h3><h3><br /></h3><h3>덤덤히 말하는 내 어조에 부인은 바로 눈을 치켜떴다.</h3><h3><br /></h3><h3>"뭣이?"</h3><h3>"제 방에서 수색한 종이들은 서방님께 따로 주실 필요 없이 다 불태워 버리시라는 말입니다."</h3><h3>"너...그게 무슨!"</h3><h3>"제 말뜻인즉,어머님께서 불필요한 오해를 일부러 만드실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h3><h3>"너...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h3><h3>"제가 모를줄 아셨나보죠.여자의 세가지 한...그 종이도 어머님이 사람을 시켜 수색해 간 것이겠지요.아니면 그게 왜 서방님 수중에 있었겠습니까."</h3><h3>"그...그건."</h3><h3><br /></h3><h3>처음 본다.부인의 저런 버벅거리는 표정은.나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h3><h3><br /></h3><h3>"다만 전해주기보단 불태워 버리는게 더 쉬워보여서 말입니다.제 방 수색은 앞으로도 언제든지 환영해드리겠습니다."</h3><h3><br /></h3><h3>말을 마친 나는 몸을 돌려 향단을 불렀다.</h3><h3><br /></h3><h3>"향단아,내 식사 시중은 들 필요 없으니 어머님을 앞채에 모셔드리거라.초불을 바로 꺼야 하니 앞길이 보이지 않아 발목이라도 다치실까 내 심히 염려스럽구나."</h3><h3><br /></h3><h3>향단은 숨을 죽인채 감히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부인은 노기띈 얼굴로 한참 부들부들 떨더니 고개를 들고 향단을 향해 소리쳤다.</h3><h3><br /></h3><h3>"향단아,당장 튀어가서 서방님을 모셔오지 못할까!"</h3><h3>"아참...어머님께 미처 말씀드리지 못하셨나보네요.서방님께선 왕자님들의 경연준비를 하느라 오늘 밤샘을 하신다고 아까 말씀하시던데...그래도 뫼셔올까요?"</h3><h3><br /></h3><h3>향단 대신 내가 앞질러 대답하자 부인은 더 크게 충격먹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h3><h3><br /></h3><h3>"뭐?여현이 아까 들어왔었다고?"</h3><h3>"아이...서방님도 참...또 내당에만 들리셨나 보네요...앞으론 안채에도 한번씩 들리라 말씀드려 볼께요.어머님 섭섭하시지 않게."</h3><h3><br /></h3><h3>나는 얼굴이 검으락 푸르락 하는 부인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여보인후 방안으로 들어와서 초불을 훅 불어껐다.칠흙같이 깜깜한 마당에서 부인이 뭐라 야단치는 소리가 들려왔고,어둠속에서 나는 피씩 냉소를 지어보였다.</h3><h3><br /></h3><h3>3년후 임진왜란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h3><h3><br /></h3><h3>안동김씨 집안의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이였다.</h3><h3><br /></h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