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꽃향기 제10회

<h3>"윤은 대체 누군데 내가 울면 안되는 걸까."</h3><h3><br /></h3><h3>중얼거리는 내 말을 들으며 향단은 떨리는 손으로 국그릇을 내앞에 놓았다.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하도 괴이하여 나는 그만 들었던 수저를 상에 내려놓았다.</h3><h3><br /></h3><h3>"혹시...정인?"</h3><h3>"아...아니에요.절대."</h3><h3><br /></h3><h3>향단이 머리를 흔들며 강력하게 부정했다.하지만 그녀의 눈에 맺힌 이슬방울이 나를 더 곤혹스럽게 만들었다.</h3><h3><br /></h3><h3>"향단아?"</h3><h3>"아씨...정녕 윤도련님도 생각나지 않으셔요?"</h3><h3><br /></h3><h3>향단이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나는 옆을 더듬어 손수건을 그녀에게 건넸다.그녀는 얼른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h3><h3><br /></h3><h3>"우리 아씨 불쌍해서 어떡해..."</h3><h3>"내가?불쌍하다고?"</h3><h3><br /></h3><h3>이도련님에 이어 윤도련님까지 썸을 타고있었던 허초희가 불쌍하다고?나는 허공을 쳐다보며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그러던 내 웃음이 입가에 그대로 굳어졌다.향단의 다음 말때문이었다.</h3><h3><br /></h3><h3>"아가씨에 이어 윤도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아씨께서 거의 실성할뻔 하셨는데..."</h3><h3><br /></h3><h3>아.</h3><h3><br /></h3><h3>이제야 생각이 났다.[곡자]라는 유명한 시를 탄생시킨 주인공,허초희의 아들 김희윤,윤이란 바로 그였구나.</h3><h3><br /></h3><h3>내 입가에 굳어졌던 미소가 서서히 일그러진 웃음으로 변한 건 향단의 이어지는 넉두리 때문이었다.</h3><h3><br /></h3><h3>"오늘이 바로 기일이잖아요...돌아가신지 삼년이 지났으니 살아계셨으면 다섯살이 되었을텐데."</h3><h3><br /></h3><h3>주르륵.</h3><h3><br /></h3><h3>입가를 타고 흐르는 이 짭짤한 것의 정체는...</h3><h3><br /></h3><h3>그러고 보니 아까 부엌에 쭈크리고 앉아 흐느끼던 나는 영낙없는 자식을 기리는 어미의 몸부림 그 자체였다.</h3><h3><br /></h3><h3>"그랬었구나."</h3><h3><br /></h3><h3>그래서 송씨부인이 그런 말을 했구나.오늘이 윤의 기일이었으나 나는 까맣게 모르는 얼굴을 하고있었으니.</h3><h3><br /></h3><h3>아무리 그렇다 해도 자식 잡아먹었다는 표현은 좀 심하지 않은가.</h3><h3><br /></h3><h3>"어떻게...죽었어?"</h3><h3><br /></h3><h3>겨우 입밖으로 말을 내뱉었다.얼굴에 흐르는 눈물은 일단 무시하기로 한채.</h3><h3><br /></h3><h3>오늘은 왠지 유난히도 눈물이 많은 날이라 했다.</h3><h3><br /></h3><h3>이런 슬픈 얘길 들으려고,이런 허초희의 불행한 과거를 들으려고,내 몸이 절로 반응하는 것이리라.</h3><h3><br /></h3><h3>"열병으로..."</h3><h3><br /></h3><h3>뭐.사인은 역사에 기재된대로가 맞네.그렇다면 송씨부인의 말은 무슨 의미일까.</h3><h3><br /></h3><h3>"내가...그때 무슨 잘못을 했어?"</h3><h3><br /></h3><h3>혹시나 해서 던진 물음은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못한다.향단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h3><h3><br /></h3><h3>"아니에요...아씨...그런 일은 없었사와요."</h3><h3>"잘못을...했구나."</h3><h3><br /></h3><h3>향단이 너무 정직한 반응을 보이는 게 탈이었다.나는 밥상을 한쪽으로 밀어놓았다.그리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h3><h3><br /></h3><h3>"자.준비되었으니 말해봐."</h3><h3><br /></h3><h3>......</h3><h3><br /></h3><h3>"대문을 닫고 빗장을 잠그거라."</h3><h3><br /></h3><h3>잠시 친정 외가에 내려갔다가 아기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온 허초희를 기다리는 것은 송씨부인의 이 무정한 한마디였다.품속의 아기는 이미 유모로 하여금 안아들어가게 한 후였다.비가 으슬으슬 내리는 날이었다.</h3><h3><br /></h3><h3>대문가에서 초희는 물 먹은 손뭉치마냥 허물어졌다.여현이 있었더라면 집에 들어갈수 있었을까.하지만 그는 과거시험을 준비하느라 지금쯤 접에 가있을 것이다.</h3><h3><br /></h3><h3>설사 그가 집에 있었다 한들 자신을 위해 목소리를 낼 일은 없을 것이다.초희는 지금쯤 한양에 무성하게 떠도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그 소문이 여현의 귀에 들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시어머니 송씨부인의 반응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h3><h3><br /></h3><h3>"아씨께서 허약하신데 저러다 병이라도 나시면..."</h3><h3>"왜,너도 같이 이 집 대문을 나가고 싶으냐?"</h3><h3><br /></h3><h3>송씨부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향단의 말을 꺽으며 대문을 넘었다.초희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한참 서있느라니 가랑비가 장옷을 적시고 속치마까지 흠뻑 젖는다.그렇게 자정이 지나고 새벽녘이 되자 대문이 삐걱 열렸다.</h3><h3><br /></h3><h3>"아씨,일단 이거라도 쓰고 계셔요.제가 접에 가서 서방님을 모셔오겠어요."</h3><h3><br /></h3><h3>두터운 장옷을 건네주며 속삭이는 목소리는 향단의 것이였다.여현의 몸종이었지만 초희에게도 더없이 살틀한 아이였다.초희는 괜스레 눈시울이 젖어들었다.</h3><h3><br /></h3><h3>"괜한 일 만들지 말아."</h3><h3>"그래도 이렇게 서계시면 쓰러지십니다."</h3><h3>"서방님을 모셔오시면 일이 더 잘 풀릴듯 싶으냐."</h3><h3><br /></h3><h3>초희는 조용한 어조로 향단의 발목을 잡았다.향단은 눈물을 글썽이며 되돌아섰다.</h3><h3><br /></h3><h3>"그럼 어떡합니까.대감마님은 마침 안계시고 안방마님의 화는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으니..."</h3><h3>"하루밤 서있는다고 죽진 않아."</h3><h3>"출산하시고 줄곧 몸이 좋지 않으셨습니다.이런 찬비에 어찌 견디시려고..."</h3><h3>"이걸로 집안에 평화가 유지된다면 보람있지 않겠냐."</h3><h3>"아씨..."</h3><h3><br /></h3><h3>둘의 실랑이는 대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그만 중단되고 말았다.항상 카랑카랑하던 송씨부인의 목소리에 왠지 당황함이 섞인 것을 듣자 초희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h3><h3><br /></h3><h3>"아가...이게 웬 일이냐?의원...어서 의원을 부르거라!"</h3><h3><br /></h3><h3>초희는 대문을 밀어젖히고 안채로 달려들어갔다.안채 옆방의 유모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가 얼굴에 군데군데 열꽃이 피어있었다.일년전 허망하게 가버린 딸애와 똑같은 증상이었다.초희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h3><h3><br /></h3><h3>"이리 주세요."</h3><h3><br /></h3><h3>와락 달려들어 아기를 안는 초희를 송씨부인이 서슬푸르게 막아나섰다.</h3><h3><br /></h3><h3>"누가 너더러 들어오라더냐?지금 네가 그러고도 어미 자격이 있다 생각되느냐?대체 애를 어떻게 보았기에 저렇게 고뿔에 걸려 왔느냐?!이제 내 손자는 내가 보겠다."</h3><h3>"제게 주세요.어머님...제가 보살피게 해주세요...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모두 제 불찰입니다.그러니 제발..."</h3><h3><br /></h3><h3>초희의 무릎이 꺽였다.두손을 모으고 오열하는 그녀의 모습에 유모와 향단이 어쩔바를 몰라하며 마주보았다.</h3><h3><br /></h3><h3>"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이런 뻔뻔한 년을 보았나..."</h3><h3><br /></h3><h3>송씨부인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초희를 내려다 보았다.부인의 냉랭한 얼굴에 뭔가 다져진 결심 같은 것이 보였다.</h3><h3><br /></h3><h3>"향단아!"</h3><h3>"네에...마님."</h3><h3>"당장 마당쇠를 데리고 접에 가서 서방님을 모셔오너라.오늘 아주 결판을 내자꾸나."</h3><h3>"네,마님."</h3><h3><br /></h3><h3>초조하던 향단의 얼굴에 오히려 잘되었다는 안도의 기색이 내비쳤다.아마 여현이 오면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고 생각해서였으리라.그녀는 장옷도 쓰지 않고 접을 향해 나는듯이 달려갔다.</h3><h3><br /></h3><h3>얼마 안지나 여현의 훤칠한 그림자가 안채 마당에 들어섰다.문지방에서 대치하고 있는 그녀들의 모습을 본 여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h3><h3><br /></h3><h3>"대체 무슨 일입니까."</h3><h3>"집안 꼴이 말이 아닌데 넌 심기가 편한 모양이구나."</h3><h3><br /></h3><h3>송씨부인의 비꼬는 말을 여현이 바로 잘랐다.</h3><h3><br /></h3><h3>"아이가 앓고있다 들었는데 어찌 이러고 있습니까.비바람이 차니 어서 방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으십시오."</h3><h3>"의원이 다녀간담에 보자꾸나."</h3><h3><br /></h3><h3>송씨부인이 차갑게 답하며 방문을 쾅 닫았다.그제야 여현의 시선이 초희에게로 향했다.석달 남짓이 보지 못한 부부였지만 여현의 얼굴에는 화기로운 기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수 없었다.</h3><h3><br /></h3><h3>"당신도 방으로 돌아가시오."</h3><h3>"하지만 윤이..."</h3><h3>"윤은 내가 알아서 돌볼터이니."</h3><h3><br /></h3><h3>여현의 말에 초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h3><h3><br /></h3><h3>"서방님."</h3><h3><br /></h3><h3>문밖으로 의원을 맞이하러 나가려던 여현이 걸음을 멈추었다.초희는 그의 뒷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h3><h3><br /></h3><h3>"전...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h3><h3>"..."</h3><h3>"전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손곡선생은 저의 스승입니다.일년에 서너번은 저의 집 사랑채에 길게 머물다 가십니다.이건 제가 어릴적부터..."</h3><h3>"장인댁에 머무는 것 가지고 뭐라 한 것이 아니오."</h3><h3>"..."</h3><h3>"임영의 외가까지 그가 또 걸음한 이유를 알고 싶었던 것이요.당신이 윤을 가졌을 때까지 합치면 벌써 두번이요."</h3><h3>"손곡선생은 그렇다 치고 서방님께서 정녕 저를 못믿으십니까."</h3><h3><br /></h3><h3>초희의 목소리가 떨렸다.여현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h3><h3><br /></h3><h3>"어머니가 아무리 당신에 대해 뭐라 하셔도,세상 사람이 다 이 여현을 천치라 웃어도,난 당신을 믿었소.하지만..."</h3><h3><br /></h3><h3>여현이 소매에서 종이 한장을 꺼냈다.비바람에 그것이 날려 초희의 발치에 와 떨어졌다.여현은 착잡한 얼굴로 한참 초희를 응시하다가 그대로 휭하니 대문을 나섰다.</h3><h3><br /></h3><h3>초희의 시선이 물끄러미 땅에 떨어진 종이에 머물렀다.</h3><h3><br /></h3><h3>"내게는 세가지 한이 있다.첫째는 조선에 태어난 것,둘째는 여자로 태어난 것,셋째는 수많은 남자들중 왜 하필 김성립의 아내로 살아가게 된 건가 하는 것이다."</h3><h3><br /></h3><h3>언젠가 방에서 무심히 끄적거린 글귀였다.이것이 왜 여현의 손에 있었을까.</h3><h3><br /></h3><h3>원래도 백랍같던 초희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뒤이어 갑작스레 방안에서 터져나오는 유모와 송씨부인의 울음소리에 그녀는 통나무처럼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h3><h3><br /></h3><h3>......</h3><h3><br /></h3><h3>"그로부터 아씨께선 식음을 전폐하셨지요...그래서 얼마 안지나 넉달 회임중인 아기씨까지 떠나보내고..."</h3><h3><br /></h3><h3>향단은 손수건으로 눈굽을 찍었고 나는 허초희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감당하지 못해 잠시 어리둥절해 있었다.</h3><h3><br /></h3><h3>"그래서...윤...은 그날,고뿔로 잘못되었 던거야?"</h3><h3>"실은 먼길에 가벼운 고뿔 기운은 있었으나 그것이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사와요.갑자기 어머니 품을 떠나 유모와 함께 지내게 된데다 음식을 잘못 드시고..."</h3><h3><br /></h3><h3>향단은 말하다 말고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h3><h3><br /></h3><h3>"아씨,쇤네가 잠시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입니다.의원이 고뿔에 열이 겹쳐 어린 도련님이 견디지 못한 것이라 하였사옵니다.쇤네는 그때 상황을 잘 모르는지라..."</h3><h3><br /></h3><h3>나는 향단이 말못할 사정이 있을줄 짐작하고 머리를 끄덕였다.</h3><h3><br /></h3><h3>"아까 네 얘기중에 윤 전에 내게 딸아기도 있었다는 건..."</h3><h3>"소헌아기씨 말씀이시죠...정말 이쁘고 귀여운 아기씨였는데 윤도련님 돌아가시기 전해에 같은 병으로..."</h3><h3>"초희...그러니까 내가 돌보았는데도?"</h3><h3>"아씨께서 그때 윤도련님 회임하시고 입덧이 하도 심해서 임영 외가에 내려가 계셨잖아요.아기씨 소식 듣고 급히 한양에 올라왔으나 그땐 이미..."</h3><h3>"아니,딸을 같이 데리고 가면 안되었나?"</h3><h3><br /></h3><h3>내가 미간을 구기자 향단은 탄식조로 대답했다.</h3><h3><br /></h3><h3>"안방마님이 윤허 하셔야죠?그리고 소헌아기씨도 내당도 아닌 거의 안채에서 자랐읍지요.아씨께서 아기씨 보고싶어서 지척에 두고도 매일 얼마나 우셨는데..."</h3><h3><br /></h3><h3>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불운의 운명을 살다간 허초희...그녀가 나를 만났을 때 왜 그리 슬픈 얼굴을 하고있었는지 이제야 나는 알 것 같았다.</h3><h3><br /></h3><h3>시어머니와의 불화,남편과의 갈등,자식 앞세운 슬픔,이 모든 것을 겪다보면 아무리 여덟살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었던 그녀의 천재성도 무참히 스러질수밖에 없었으리라.</h3><h3><br /></h3><h3>세상에 여인으로 태어나 사내를 만나고,그 사내의 부모를 공경하며 받들고,그 사내의 모습을 닮은 아기를 낳고...그게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그런데 왜 그녀는 불행해야만 했던 걸까.</h3><h3><br /></h3><h3>허나 이대로 그녀의 운명을 답습할수는 없다.주먹을 그러쥔 내 입에서는 또다시 그 한마디가 튀어나왔다.</h3><h3><br /></h3><h3>"빌어먹을 조선시대."</h3><h3><br /></h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