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꽃향기 제9회

<h3>"저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군요."</h3><h3><br /></h3><h3>나는 여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아마도 그의 눈에 스치는 의심의 빛을 눈치챈 까닭이리라.</h3><h3><br /></h3><h3>"어찌 저를 그토록 경계하시는 것입니까.혹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h3><h3>"희."</h3><h3><br /></h3><h3>그가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나는 몸을 흠칫했다.현대의 녀석 말고도 나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또 있었던가.</h3><h3><br /></h3><h3>"네?"</h3><h3>"희...당신은 한번도 내 방에 걸음하지 않았었지."</h3><h3><br /></h3><h3>아...허초희를 부르는 것이었군.나는 허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다가 문득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차분하게 시선을 들었다.</h3><h3><br /></h3><h3>"어머님과 행랑 식구들이 연일 노심초사 하니 뭔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는가 하여 잠시 들렸던 것 뿐입니다."</h3><h3>"...또한 주방에 걸음하는 것은 물론,음식을 직접 한다는 것은 당신에겐 있을수 없는 일이었소."</h3><h3><br /></h3><h3>그가 나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었다.</h3><h3><br /></h3><h3>"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소?혹 친정에 가서 무슨 일이 있은 것이요?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항상 붓만 들던 당신으로 하여금 손에 물을 묻히며 수정과까지 만들게 한단 말이요."</h3><h3><br /></h3><h3>나는 동요하는 눈빛 하나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입술에 가만히 호선을 그리니 그의 얼굴이 더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h3><h3><br /></h3><h3>"사람은,변할수 있는 것입니다."</h3><h3><br /></h3><h3>생각의 정리를 마친 나는 천천히 숨을 불어 내쉬었다.</h3><h3><br /></h3><h3>"저는 어제의 허초희가 아닙니다."</h3><h3><br /></h3><h3>비운의 운명을 살다 간 허난설헌,나는 결코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h3><h3><br /></h3><h3>잠깐이라도,누구 대신 살아가야 하는 스쳐 지나가는 운명이라 할지라도.</h3><h3><br /></h3><h3>삶의 매 하루,매 한순간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그속에서 내 길을 찾으리라.</h3><h3><br /></h3><h3>"어머님이 저를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여인의 부덕을 지키지 않는다 생각하여 그러시겠지요.바느질이나 자녀양육 이런 것에나 신경을 쓸 사대부 가문의 여인으로서 허구한 날 시구만 뒤적이고 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하여 앞으로는 행랑에도 자주 들리고 집안 살림살이도 익혀볼까 합니다."</h3><h3><br /></h3><h3>그게 시를 쓰는 것보단 어렵지 않으니깐...그리 마음속으로 가만히 한마디 덧붙였다.</h3><h3><br /></h3><h3>"어찌...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요.그럼 시는 이대로 놓아버리는 것이요?"</h3><h3>"어차피 붓을 놓은지도 한참 되었으니까요."</h3><h3><br /></h3><h3>그러고보면,허난설헌의 많은 시들은 임종때 불타버린 게 아니라 애초에 미완성작이었을지도 모른다.</h3><h3><br /></h3><h3>"그리고 서방님도...제가 서화에만 묻혀 사는 게 그리 반가운 일만은 아닐테니까요."</h3><h3><br /></h3><h3>서당 김성립 역시 처음에는 허초희의 재기에 반했지만 후에는 많이 부담스러워 했다고...역사는 전했다.</h3><h3><br /></h3><h3>"당신이 언제 내 생각까지 하고있었소."</h3><h3><br /></h3><h3>그의 빈정대는 어조에 살짝 비위가 상했지만 나는 일단 너그러이 넘어가기로 했다.밴댕이 소갈딱지 양반.</h3><h3><br /></h3><h3>"그러면 이젠 이 손을 좀...놓아주시지요."</h3><h3><br /></h3><h3>향단이 올 때가 거의 되었는지라 나는 그를 보았다.그제야 그때까지 내 팔을 움켜잡고 있은 것을 보았는지 여현이 급히 손을 놓았다.나는 잠시 뻣뻣해진 손목을 놀렸다.</h3><h3><br /></h3><h3>"에이구머니나."</h3><h3><br /></h3><h3>때를 맞추어 문가에서 향단의 목소리가 들렸다.타이밍 역시 내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는군.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h3><h3><br /></h3><h3>"들어와.니가 생각하는 그런게 아니니까."</h3><h3>"쇤네가 눈치없이...두분 계속 말씀을 나누세요."</h3><h3>"얘기 끝났으니 들어오래두.난 이만 가봐야겠으니."</h3><h3><br /></h3><h3>나는 여현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후 그의 방문을 나섰다.등뒤에서 그의 집요한 시선이 느껴져 왠지 불안했지만 이 또한 넘어가기로 했다.저도 모르게 피곤함이 몰려왔던 것이다.</h3><h3><br /></h3><h3>......</h3><h3><br /></h3><h3>여현이 집으로 들어오면 송씨부인의 구박이 덜해질거라 생각했던 건 어디까지나 내 오산이었다.땅거미가 지기 비쁘게 부인은 또다시 향단을 시켜 나를 호출했다.</h3><h3><br /></h3><h3>"불러 계셨사옵니까.어머님."</h3><h3><br /></h3><h3>아무리 부인의 얼굴이 현대의 내 엄마와 같은 얼굴이라 해도,아무리 어릴 때부터 타지생활에 뼈가 굳어온 나라 할지라도,두렵지 않거나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그저 그것을 내색하지 않는 내공을 쌓고있을 뿐이었다.</h3><h3><br /></h3><h3>부인은 그러한 내 태도가 못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h3><h3><br /></h3><h3>"저녁이 다 되었는데 음식의 간도 보지 않고 종일 방에만 처박혀 있을 셈이더냐!"</h3><h3>"지금 곧 가보겠습니다."</h3><h3><br /></h3><h3>더이상 부인과 말을 섞는 것도 피곤해서 나는 주방쪽으로 몸을 돌렸다.바로 그때 바람결을 타고 부인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h3><h3><br /></h3><h3>"제 자식을 잡아먹은 년이라 독하기도 하구나."</h3><h3><br /></h3><h3>주방으로 향하던 내 발걸음이 잠시 주춤했다.하지만 이내 한번 머리를 가로젓고는 나는 가던 길을 계속했다.</h3><h3><br /></h3><h3>후세에 전한 허난설헌의 [곡자]를 본 사람이라면 연이어 자식을 잃은 한 여인의 애절한 슬픔을 모를리 없을 것이다.그런 허초희에게 자식을 잡아먹었다는 끔찍한 누명을 씌우다니...시월드도 이런 시월드가 따로 없었다.</h3><h3><br /></h3><h3>去年喪愛女 작년에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h3><h3>今年喪愛子 올해에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h3><h3>哀哀廣陵土 슬프고 슬프도다, 광릉 땅에</h3><h3>雙墳相對起 한 쌍의 무덤이 서로 마주하고 일어섰네</h3><h3>蕭蕭白楊風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 불고</h3><h3>鬼火明松楸 귀신불은 소나무와 오동나무를 밝히네</h3><h3>紙錢招汝魂 종이돈으로 너희들 혼을 부르고</h3><h3>玄酒奠汝丘 맹물을 너희들 무덤에 따르네</h3><h3>應知弟兄魂 알고말고, 너희 자매의 혼이</h3><h3>夜夜相追遊 밤마다 서로 따라 노니는 것을</h3><h3>縱有腹中孩 비록 배 속에 아이가 있은들</h3><h3>安可冀長成 어찌 장성하기를 바랄 수 있으랴</h3><h3>浪吟黃臺詞 헛되이 「황대사」를 읊조리니</h3><h3>血泣悲呑聲 피눈물이 나와 슬픔으로 목메네</h3><h3><br /></h3><h3>주방에 이르러 저녁준비가 다 되었는지 확인할 때까지 허초희의 진한 슬픔이 내 가슴을 후볐다.어멈이 상을 내간후 나는 맥없이 주방 한켠에 쭈크리고 앉았다.</h3><h3><br /></h3><h3>시야를 가렸던 뿌연 안개가,눈물로 되어 흘러내렸다.</h3><h3><br /></h3><h3>왜 갑자기 눈물이 날까.</h3><h3><br /></h3><h3>고개를 수그린 내 어깨가 끊임없이 흔들렸다.</h3><h3><br /></h3><h3>처음으로,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무기력함을 느꼈다.</h3><h3><br /></h3><h3>엄마가 끊임없이 해외로 나를 추방할 때에도,낯선 이국타향에서 외로움과 동반할 때에도,나는 울지 않았었다.</h3><h3><br /></h3><h3>우연히 여현을 만나고 타임워프를 한 후에도,아무리 송씨부인이 매정한 태도로 괴롭혀도 나는 울지 않았었다.</h3><h3><br /></h3><h3>그런 내가,씩씩하고 용감하던 내가,지금은 이처럼 무방비 상태로 숨어서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내고 있으니...</h3><h3><br /></h3><h3>이것은 피곤함인가,서러움인가.</h3><h3><br /></h3><h3>끅끅 흐느끼던 내가 드디어 이를 악물고 머리를 든 것은,주방 문어구에 드리운 한 익숙한 그림자 때문이었다.</h3><h3><br /></h3><h3>"역시 여기에 있었군."</h3><h3><br /></h3><h3>마치 혼잣말처럼,미간을 약간 구기며 여현이 말했다.나는 영문을 몰라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지금쯤 사랑채에서 대감,부인과 함께 저녁식사를 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서있는 걸까.</h3><h3><br /></h3><h3>그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와서 한쪽 무릎을 굽히며 바닥에 대고 앉았다.그제야 그와 눈높이를 나란히 한 나는 그의 눈동자에 오롯이 비친 내 모습에 경악하고 말았다.</h3><h3><br /></h3><h3>흐트러진 귀밑머리와 눈물범벅이 된 얼굴,빨개진 코와 충혈된 눈,게다가 선명하게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자국까지...민망함에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h3><h3><br /></h3><h3>부드럽게 내 턱을 잡은 그의 손이 살짝 떨리는 건 단지 내 착각이었을까.</h3><h3><br /></h3><h3>"윤이 생각나서 그런건가."</h3><h3><br /></h3><h3>윤...은 또 누구지?조심스레 기억을 훑던 내 시선이 드디어 그를 향했다.</h3><h3><br /></h3><h3>"죄송해요..."</h3><h3><br /></h3><h3>이미 손곡선생과 썸씽이 있어보이는 허난설헌이 알고 지내는 또 한명의 누군가를 위해 나는 일단 사과를 했다.</h3><h3><br /></h3><h3>"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h3><h3>"당신 탓이 아니야."</h3><h3><br /></h3><h3>그가 한손으로 내 턱을 잡은채,다른 한손을 들어올려 내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그 자상한 행동에 또 한번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나는 급히 고개를 돌리고 저고리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h3><h3><br /></h3><h3>"여긴 왜 오셨어요."</h3><h3>"당신이 지금처럼 청승을 떨고있을거 같아서."</h3><h3><br /></h3><h3>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몰랐지만 나는 일단 그를 재촉했다.</h3><h3><br /></h3><h3>"어서 가서 저녁식사를 하세요.어머님이 찾으시겠어요."</h3><h3><br /></h3><h3>그는 아무 말없이 잠자코 나를 바라보았다.그러던 그의 다음 행동에 나는 놀라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h3><h3><br /></h3><h3>"뭐하는거에요!"</h3><h3><br /></h3><h3>허공에 건뜻 들린 내 몸이 미처 어쩔새 없이 그의 품안에 쏙 들어가 버렸다.그가 걸음을 옮기자 나는 얼떨결에 팔을 내밀어 그의 목을 감았다.</h3><h3><br /></h3><h3>"내려주세요...누가 보면 어쩌려고."</h3><h3>"지금쯤 다 사랑채 쪽에 있으니 걱정할 것 없소."</h3><h3>"혼자 걸을수 있어요!"</h3><h3>"그런 사람이 부엌에 쭈크리고 앉았구려."</h3><h3>"그건..."</h3><h3>"울기만 하면 다리가 풀리는 습관이 이젠 고쳐진 것이요?"</h3><h3><br /></h3><h3>그의 말에 그만 입을 닫았다.아무리 금슬이 좋지 않다 전해졌어도 10여년의 부부 사이 감정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여현은 생각보다 더 많이 허초희의 일거수 일투족을 꿰고있었다.</h3><h3><br /></h3><h3>다행이 내당으로 오는 길에는 누구도 없었고 나는 방안에 들어와서야 여현의 품에서 벗어날수 있었다.그러고보니 그가 내 방에 들어와 앉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웠다.하긴 엄밀히 말하면 여긴 허초희의 방이었으니 말이다.</h3><h3><br /></h3><h3>"전 좀 쉬어야겠으니 이젠..."</h3><h3><br /></h3><h3>이불을 내리고,자리를 폈다.그러면 그가 방에서 나갈 것 같아서 취한 행동이었다.어쩌면 귀밑까지 달아오른 내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는 행동이기도 했다.</h3><h3><br /></h3><h3>그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자 나는 그 뒤의 행동을 어떻게 이어나갈지 고민했다.가체를 내리고 누우려니 짧은 머리카락이 들통날 것 같아 주저하고 있을 때였다.</h3><h3><br /></h3><h3>"이젠 잊으시오."</h3><h3><br /></h3><h3>그가 입을 열었다.대체 뭘 잊으라는 말인가.나는 입속으로 궁시렁 거렸으나 입밖으로는 순순히 대답했다.</h3><h3><br /></h3><h3>"네."</h3><h3>"더이상 오늘같이 울거든."</h3><h3>"..."</h3><h3>"가만있지 않겠소."</h3><h3><br /></h3><h3>밴댕이 양반이 질투의 화신으로까지 레벨업 되었는가.가만있지 않으면 어쩔건데...이 역시 속으로만 중얼거렸을 뿐이다.</h3><h3><br /></h3><h3>"쉬시오."</h3><h3><br /></h3><h3>이 말 한마디를 던지고 그는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가버린다.잠시 멍때리고 앉아있자니 문밖에서 향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h3><h3><br /></h3><h3>"아씨,저녁상을 들이겠습니다."</h3><h3><br /></h3><h3>엥?연 몇일 부엌에서 행랑식구들과 끼니를 떼운 나로서는 분에 넘치는 대우라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문이 열리더니 향단과 어멈이 풍성한 상을 받쳐들고 들어왔다.</h3><h3><br /></h3><h3>"서방님께서 오늘부터는 내당에서 식사를 하시겠다고 분부하셔서..."</h3><h3><br /></h3><h3>내 의아한 시선에 향단이 설명했다.나로서는 반갑다기보다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h3><h3><br /></h3><h3>"어머님께선 뭐라 하셔?"</h3><h3>"별말씀 안하셨사와요."</h3><h3><br /></h3><h3>그게 더 불안하거든.나는 향단에게 묻기를 포기하고 다시 상을 바라보았다.어멈이 나가고 향단은 내앞에 밥그릇을 밀어놓았다.</h3><h3><br /></h3><h3>"어서 드시와요."</h3><h3><br /></h3><h3>나는 고개를 들었다.아까부터 나를 곤혹케 하던 의문의 실체에 대해 나는 향단에게 그 답을 구해보기로 마음먹었다.</h3><h3><br /></h3><h3>"윤이 누구지?"</h3><h3><br /></h3><h3>국그릇을 옮기던 향단의 손이 허공에 멎었다.</h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