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꽃향기 제8회

<h3>연몇일,김첨대감의 집은 아들을 맞이하는 준비로 야단법석을 떨었다.</h3><h3><br /></h3><h3>"향단아,서안은 이쪽에 옮기고 책장은 저쪽에 놓아라."</h3><h3>"어멈,어멈은 여현이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준비해놓게."</h3><h3>"마당쇠야,바닥이 왜 이리 지저분하냐?한번 더 쓸거라."</h3><h3><br /></h3><h3>당연히 야단법석은 송씨부인의 몫이었고 분주한 것은 행랑 식구들의 몫이었다.그와중에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몰라 여기저기 빈둥거리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사랑채 마당에 서있던 김첨대감이 말을 걸었다.</h3><h3><br /></h3><h3>"몸은 괜찮은 게냐?찬바람 쐬지 말고 안에 들어가 있으려무나."</h3><h3>"괜찮습니다.아버님...안은 오히려 갑갑합니다."</h3><h3><br /></h3><h3>대감과 둘이 도란도란 대화하는 게 눈꼴 시였는지 어느새 부인이 치마바람을 일으키며 우리쪽으로 다가왔다.</h3><h3><br /></h3><h3>"넌 할일이 없으면 어멈이나 도울 것이지 예서 뭘 하고있는 게냐?"</h3><h3>"어허...부인,부엌엔 행랑어멈이 알아서 할 것이니 굳이 며늘아가를 보낼 것 까지는."</h3><h3><br /></h3><h3>송씨부인의 말을 김첨대감이 받자 부인은 정색을 했다.</h3><h3><br /></h3><h3>"영감은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외다.저 아이가 이 댁에 들어온지도 십년 넘는데 지아비의 식습관 정도는 어멈에게 알려줄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누가 저 아이더러 음식을 하고 그릇을 나르라 했습니까.어찌 그리 감싸고 도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h3><h3><br /></h3><h3>나는 둘이 옥신각신 할가봐 얼른 부인에게 머리를 숙였다.</h3><h3><br /></h3><h3>"그럼 분부대로 부엌에 다녀오겠습니다."</h3><h3><br /></h3><h3>부인의 눈총을 뒤로 하고 부엌에 오자 행랑어멈이 분주히 돌아치다가 나를 보고 기겁을 했다.</h3><h3><br /></h3><h3>"아씨,왜 또 이리로 걸음하셨어유."</h3><h3>"걱정마세요.오늘은 어머님이 보내셨으니까."</h3><h3><br /></h3><h3>내 말에 비로소 시름을 놓은 듯 보이는 어멈은 행주치마에 손을 닦더니 내게 자리를 권했다.나는 어멈을 보았다.</h3><h3><br /></h3><h3>"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h3><h3>"아유,그런 말씀 하지 마셔유.저번에도 곤경을 치르시더니...이런 일은 저희가 알아할테니 아씨께선 가만히 앉아 계시기만 하셔유."</h3><h3><br /></h3><h3>어멈은 잠시 주밋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h3><h3><br /></h3><h3>"그런데 말이여유...제발 그 말투만은..."</h3><h3>"아..."</h3><h3><br /></h3><h3>나는 향단의 말을 떠올리고 민망한 미소를 지어보였다.</h3><h3><br /></h3><h3>"미안...내가 사정이 좀 있어서...금방 고치겠...네."</h3><h3><br /></h3><h3>어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h3><h3><br /></h3><h3>"아씨처럼 아래사람을 생각하고 마음이 비단결같은 분은 세상에 둘도 찾기 어려울거여유.서방님도 참..."</h3><h3><br /></h3><h3>어멈은 말하다 말고 자기 입을 손바닥으로 탁 쳤다.</h3><h3><br /></h3><h3>"에구.이젠 나이 먹고 주책이 들었는지...참 이 입이...아씨님은 제발 달리 생각지 마셔유.서방님도 이젠 들어오신다니 시름 놓았어유."</h3><h3><br /></h3><h3>나는 대답대신 빙그레 웃기만 하다가 몸을 일으켜 부엌쪽을 보았다.</h3><h3><br /></h3><h3>"무엇을 끓이고 있는가."</h3><h3>"마실 것이 단조롭기에 식혜를 만들어놓을까 해유."</h3><h3>"아직 여름이 아니니 식혜보다는 곶감맛을 뺀 수정과가 좀 더 낫지 않겠나."</h3><h3><br /></h3><h3>무심하게 한마디 했을뿐인데 어멈의 당황한 얼굴에 나는 현대식 수정과가 아직은 민간에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h3><h3><br /></h3><h3>"혹시 할줄...모르는가."</h3><h3>"네...곶감맛을 뺀다는 건 처음 듣습니다유."</h3><h3>"걱정 말게.내가 만들어 볼테니."</h3><h3><br /></h3><h3>소매를 거둔 내 시선이 한쪽에 있는 소쿠리에 가 닿았다.</h3><h3><br /></h3><h3>"주전부리들인가."</h3><h3>"네,먼저 만들어 마님께 시식용으로 올리려구요."</h3><h3>"쌀엿과 떡,파전...골고루 잘 갖추었네."</h3><h3>"좀 참신한 것으로 준비하라 하였는데 이런 것들밖에 몰라서..."</h3><h3><br /></h3><h3>어멈의 말을 뭉텅 자르며 송씨부인의 목소리가 밖에서 날아들었다.</h3><h3><br /></h3><h3>"어멈,엿,떡,전따위는 집어치우고 밥대신 요기될만한 간단한 음식으로 낮것상을 준비하게!"</h3><h3>"예,마님..."</h3><h3><br /></h3><h3>어멈은 대답하고나서 급기야 내게 울상을 지어보였다.</h3><h3><br /></h3><h3>"들으셨지유...이리 준비한 것은 다 못쓰게 되였어유."</h3><h3>"걱정마시게.일단 저것들은 향단이한테 갖다주고 오게.다들 하루종일 일하느라 고생이 많으니."</h3><h3><br /></h3><h3>어멈이 대답하고 나가자 나는 간단히 생각을 정리한후 서둘러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주전부리 소쿠리를 들고 나가서 한참후에야 돌아온 어멈은 눈을 크게 떴다.</h3><h3><br /></h3><h3>"이게 다 무엇인가유."</h3><h3>"일단 날 좀 도와주게.저쪽 계피와 생강을 우린 물에 설탕을 추가해서 차게 식혀주게."</h3><h3>"그다음에는유?"</h3><h3>"지금 다지고 있는 이 생선 흰살을 밀가루에 반죽해서 찐 다음 응고되면 내게 말해주게."</h3><h3><br /></h3><h3>둘이 한참을 돌아쳐서야 겨우 간단한 점심상을 준비할수 있었다.송씨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 부엌으로 날아들어왔다.</h3><h3><br /></h3><h3>"어멈...아까부터 준비해놓고 아직도 안되었는가?뭘 그렇게 꾸물거리고 있는가!"</h3><h3>"곧 나가유!"</h3><h3><br /></h3><h3>어멈이 대답하고 나를 쳐다보자 나는 시름 놓으라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어멈이 상을 들고 나가자 나는 그뒤를 따라 나갔다.송씨부인은 문밖에 버티고 서있다가 우리를 보고 눈을 치켜떴다.</h3><h3><br /></h3><h3>"여현이 와도 이렇게 지체할 셈이더냐!"</h3><h3>"거 참 구수한 냄새가 나는구려."</h3><h3><br /></h3><h3>언제 왔는지 김첨대감이 송씨부인의 등뒤에 다가섰다.부인은 금세 얼굴표정을 풀고 뒤를 돌아보았다.</h3><h3><br /></h3><h3>"아직 출타하지 않으셨습니까,영감."</h3><h3>"배가 출출하여 뭘 좀 요기하고 나가자 했는데 마침 잘되었구려."</h3><h3><br /></h3><h3>대감은 어멈의 손에 들려있는 상에 시선을 고정시켰다.</h3><h3><br /></h3><h3>"내가 맛 좀 보아도 되겠소?부인."</h3><h3>"별말씀을 다하십니다.영감께 드리라 새로 상을 갖추어올려도 될 판에 어찌 이리 내외를 하십니까."</h3><h3><br /></h3><h3>부인은 화사한 얼굴로 어멈을 돌아보며 말을 끝맺었다.</h3><h3><br /></h3><h3>"사랑채에 상을 올리게.곧 그리로 갈터이니."</h3><h3><br /></h3><h3>......</h3><h3><br /></h3><h3>"어허...내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산해진미는 처음 먹어보오.대체 어떻게 만들었기에 이렇듯 구미가 당기고 계속 손이 가는거요?어멈에게 톡톡히 상을 줘야겠소."</h3><h3><br /></h3><h3>사랑채 안에서 김첨대감의 찬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부인의 얼굴은 검으락 푸르락 해졌다가 겨우 원래 색을 회복했다.</h3><h3><br /></h3><h3>"한낱 낮것상일뿐입니다.어찌 그리 과찬을 하시는지."</h3><h3>"아니,이건 조석상에 올라도 전혀 손색이 없소.부인도 하나 맛보시구려."</h3><h3>"싫사옵니다.별로 당기지 않사옵니다."</h3><h3><br /></h3><h3>부인의 명으로 사랑채까지 따라와 대감과 부인에게 수정과를 따라주던 나는 속으로 가만히 웃었다.바로 곁에 앉은 부인의 배에서 분명 꼬르륵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h3><h3><br /></h3><h3>"이 국은 무엇으로 만든 것인데 이토록 구수한지..."</h3><h3><br /></h3><h3>부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나는 하는수없이 대감에게 대답했다.</h3><h3><br /></h3><h3>"어묵탕이옵니다.아버님."</h3><h3>"어묵이라...그건 무엇으로 만든 음식인가."</h3><h3>"생선의 흰살을 다지고 밀가루로 반죽하여 쪄낸 다음 응고된 것을 다시 양념을 넣고 우려 국을 만든 것입니다."</h3><h3>"오호...거 참 특이한 조리법이구려.어멈이 어떻게 알았을고."</h3><h3><br /></h3><h3>대감은 말하다말고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h3><h3><br /></h3><h3>"이는 분명 박학다식한 우리 며늘아가가 어멈에게 알려주었을터.내 듣자하니 왜국에서 생선이 쉽게 변하니 그리 만들어 시중에 판다고 하던데."</h3><h3>"아버님의 견문은 저희같은 아녀자들이 미치지 못할 듯 하옵니다."</h3><h3><br /></h3><h3>둘의 대화가 화기애애해지자 부인이 낯빛을 흐렸다.</h3><h3><br /></h3><h3>"어찌 감히 왜놈들의 음식을 대감마님의 상에 올린단 말이냐."</h3><h3>"그게 어떻소?부산포 왜관근처에 가면 왜국의 음식들이 수두룩하오만."</h3><h3><br /></h3><h3>대감이 내 역성을 들자 부인의 얼굴은 더 살벌해졌다.나는 아무 말없이 수정과를 그릇에 떠서 올렸다.대감이 다시 물었다.</h3><h3><br /></h3><h3>"그렇다면 이쪽의 이것은 무엇이냐."</h3><h3>"그것은 김밥이옵니다.아버님."</h3><h3>"김밥이라..."</h3><h3>"네,김으로 밥을 싸고 각종 야채와 어묵을 살짝 볶아 곁들였습니다.간단히 요기하기엔 편한 음식이옵니다."</h3><h3>"이것도 왜의 음식이냐?"</h3><h3>"왜국에도 비슷한 형태의 김초밥이 있긴 하나 그 맛은 전혀 다릅니다.김은 저희 조선에서 왜에 건너간 것이고 일찍 신라때부터 김을 식용하기 시작했으니 이건 왜의 음식이 아닙니다."</h3><h3><br /></h3><h3>대감은 머리를 끄덕이며 수정과를 한모금 들이켰다.그러던 대감의 눈이 부지중 크게 떠졌다.</h3><h3><br /></h3><h3>"이건..."</h3><h3><br /></h3><h3>......</h3><h3><br /></h3><h3>대감의 점심식사는 때마침 들어선 여현에 의해 잠시 중단되었다.실은 그냥 먹어도 되는 것이었지만 부인이 호들갑을 떨며 일어서는 바람에 대감이 하는수없이 수저를 놓는 게 보였다.나는 부인을 따라 사랑채를 나섰다.</h3><h3><br /></h3><h3>의외로 간단한 여현의 행장을 내가 받아들자 부인은 기다렸다는 듯 여현의 손을 잡아끌었다.</h3><h3><br /></h3><h3>"출출하진 않느냐?때마침 아버님께 낮것상을 들였다.올라와서 같이 들려무나."</h3><h3>"접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왔습니다."</h3><h3><br /></h3><h3>여현이 가볍게 부인의 제안을 거절했다.부인은 어정쩡해 있더니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채 그를 잡아끌었다.</h3><h3><br /></h3><h3>"그럼 들어와서 목이라도 추기거라."</h3><h3><br /></h3><h3>나를 따라 내당으로 가려던 참이었던 여현은 어쩔수없이 부인에게 끌려들어갔다.그러나 나는 부인의 명이 없으니 더이상 눈치없이 사랑채 마당에 서있기도 무엇하였다.그길로 안채로 돌아와 향단에게 여현의 행장을 넘겨준후 나는 말끔하게 정리된 여현의 서당을 잠깐 둘러보았다.뒤에 인기척이 나서 돌아보니 향단이 한창 여현의 행장을 정리하고 있었다.</h3><h3><br /></h3><h3>"그건 이리 주고 넌 가서 좀 쉬어."</h3><h3><br /></h3><h3>내가 손을 내밀자 향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h3><h3><br /></h3><h3>"어찌 쇤네가 해야 할 일을 아씨께 맡기겠습니까."</h3><h3>"이 집안에 네가 해야 할 일이란 게 따로 있니.너처럼 모든 일을 다 맡아하면 지쳐 쓰러진다.그리고 나도 시간이 남아도니 이러는 거야."</h3><h3><br /></h3><h3>향단은 풋 하고 웃더니 행장을 내게 밀어놓았다.</h3><h3><br /></h3><h3>"그럼...염치불구하고 아씨께 맡기겠사와요.쇤네는 가서 해볕에 말린 이부자리를 가져오겠습니다."</h3><h3>"그래."</h3><h3><br /></h3><h3>향단을 눈바램한후 나는 여현의 행장을 당겨 풀었다.옷가지 몇벌과 서책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옷을 장농에 넣고 서책들을 서안상에 올려놓는데 문득 책사이로 비죽이 뭔가 종이가 나와있는 게 눈에 띄였다.나는 별 생각없이 그것을 집어들었다.</h3><h3><br /></h3><h3>"지금 뭐하는 거요?"</h3><h3><br /></h3><h3>갑자기 날아든 목소리에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뒤이어 번개보다 더 빠른 속도로 여현이 내 손에서 종이를 채간후 급히 소매속에 갈무리 했다.나는 방금전 그의 거친 행동보다 그의 예민한 반응이 더 놀라웠다.</h3><h3><br /></h3><h3>"죄송해요...책속에 다시 끼워놓으려 했을뿐인데..."</h3><h3><br /></h3><h3>말하다 말고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쳤다.온지 몇일밖에 안되었는데 어느새 허초희의 입장에 내가 감정이입이 된 걸까.나는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눈안에 밀어넣었다.</h3><h3><br /></h3><h3>"그렇다고 그리 예민하게 굴 것까지는..."</h3><h3>"미안...난 누가 내 물건을 다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소."</h3><h3>"잘 알겠어요.그 누가에는...바로 제가 포함된 거군요."</h3><h3><br /></h3><h3>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의 방을 나서려 했다.문지방을 넘는 내 팔을 우악스레 당기는 힘에 뒤로 물러서지만 않았다면 말이다.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는 내 눈에 의혹이 서렸다.그런 내게 그가 나직히,그러나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h3><h3><br /></h3><h3>"그 누가는,당신이 포함된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을 지칭하는 것이요."</h3><h3><br /></h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