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꽃향기 제7회

<h3>"아씨...왜 그러셨어요..."</h3><h3><br /></h3><h3>사랑채 옆으로 줄느런히 놓인 이백여개의 장독들을 닦으며 향단이 혀를 찼다.나는 잠시 허리를 펴고 그녀를 보았다.아직은 이른 봄이었지만 어느새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h3><h3><br /></h3><h3>"안그러면 어떡하냐?나대신 다 혼나게 생겼는데..."</h3><h3><br /></h3><h3>나는 아침에 부엌에서 보았던 송씨부인의 얼굴을 떠올리고 새삼 진저리를 쳤다.생각해보니 현대의 내 엄마-최여사도 나를 대할 때엔 항상 그런 얼굴이었던 기억이 났다.</h3><h3><br /></h3><h3>"뭣들 하는 짓이냐!조반을 물리라 하였거늘 아무도 대기하지 않아서 와보길 망정이지."</h3><h3><br /></h3><h3>부인은 서슬 푸른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이사이로 한마디씩 내뱉었다.</h3><h3><br /></h3><h3>"너는 대체 예서 뭘 하고있느냐?"</h3><h3>"아네...어머님,보시다싶이 아침을..."</h3><h3><br /></h3><h3>나는 아무 생각없이 입을 열었다가 향단과 어멈의 얼굴빛이 파랗게 질린 것을 보고 말을 중단했다.잠시후 부인의 행동에서 나는 그들이 왜 그렇듯 공포에 질려있는지 비로소 이해할수 있었다.</h3><h3><br /></h3><h3>"짝!"</h3><h3>"짝!"</h3><h3><br /></h3><h3>살과 손바닥이 부딪치는 찰진 소리가 연거퍼 부엌에 울렸다.향단과 어멈은 금세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붙들고 바닥에 납작 부복했다.</h3><h3><br /></h3><h3>"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h3><h3>"일어나거라!"</h3><h3>"...?"</h3><h3>"일어나라 하였다.천것들이라 몸을 바로 세우는 법도 따위를 배우지 못한 게냐?"</h3><h3><br /></h3><h3>향단과 어멈이 일어나자 부인이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들의 앞을 막아나섰다.부인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내 뺨을 스치면서 거두어졌다.</h3><h3><br /></h3><h3>"뭐냐!"</h3><h3><br /></h3><h3>부인의 싸늘하고 선득한 눈길이 내 얼굴에 고정되었다.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h3><h3><br /></h3><h3>"저분들이 왜 맞아야 하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h3><h3>"저들의 죄는 만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거늘,이깟 뺨 한대가 무엇이라고 네가 체통을 잊고 이런단 말이냐."</h3><h3>"그 죄가 설마 조반을 물리라 하셨으나 문밖에 대기하지 않은 죄입니까?저분들도 아침 일찍부터 식사준비를 하느라 배가 고프지 않겠습니까.조반을 좀 늦게 물린들 무슨 큰일이 있겠습니까."</h3><h3>"오호..."</h3><h3><br /></h3><h3>부인은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주시했다.</h3><h3><br /></h3><h3>"네가 지금 내게 이 가문의 법도가 잘못되었다 지적하는 것이냐."</h3><h3>"그것이 아니라..."</h3><h3>"그래...그럼 양천 허씨 가문의 법도는 아랫것들과 한솥밥을 먹고 한구들에서 자는 것이냐?그렇다면 말리지 않을터."</h3><h3><br /></h3><h3>부인은 웃을듯 말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홱 몸을 돌렸다.</h3><h3><br /></h3><h3>"봄이 되니 장독관리를 해야 하겠구나.오늘 날이 풀렸으니 일단은 저 장독들을 다 닦아놓도록 하여라."</h3><h3><br /></h3><h3>부인의 얼굴은 향단과 어멈을 향했지만 시선은 나를 보고 있었다.그녀가 무슨 뜻인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수 있었다.하여 지금 나는 오전내내 장독들 사이에서 허리도 펴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그래도 일이 이쯤에서 끝났으니 다행이라고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h3><h3><br /></h3><h3>"아씨,이걸로 목이나 추기고 한쪽에 좀 앉아 계셔요."</h3><h3><br /></h3><h3>향단이 넘겨주는 찻잔을 단숨에 비운후 나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h3><h3><br /></h3><h3>"얼굴이 아직 부어있네.아프진 않아?"</h3><h3>"아씨야말로 얼굴이 해쓱하신데 지금 쇤네를 걱정하십니까.몸도 아직 쾌차하지 않으셨는데 이게 무슨 봉변입니까."</h3><h3><br /></h3><h3>향단은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나는 웃으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h3><h3><br /></h3><h3>"난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말어."</h3><h3>"어찌 멀쩡할수가 있단 말입니까.아무리 그래도..."</h3><h3><br /></h3><h3>향단은 말하다 말고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h3><h3><br /></h3><h3>"그런것 치고는 평소보다는 건강해 보이십니다.먼길 다녀오시더니 친정이 달라도 뭔가 다르신 모양입니다."</h3><h3><br /></h3><h3>나는 대답대신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현대에서 운동에 잘 단련된 내 몸이 이깟 허기와 막노동에 지칠리 없었다.다만 허초희가 실종전 태기가 있었다가 사라졌다 하니 지금 저 사람들은 나를 완연한 병자 취급하는 것이 틀림없었다.그리고 그런 며느리를 이렇게 막중한 노동을 시키는 송씨부인은 그야말로 온기 하나 없는 철석심장을 가진 사람인 것이 분명했다.</h3><h3><br /></h3><h3>나는 허리를 굽히고 다시 일손을 놀렸다.그리고 잠시후 고개를 든 내 머리위로 한 휜칠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h3><h3><br /></h3><h3>......</h3><h3><br /></h3><h3>"어찌 그리하였소."</h3><h3><br /></h3><h3>오늘따라 두번째로 듣는 질문에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여현을 따라 방에 들어온지 이미 한식경이나 지난 시간이었다.그가 장독대로 나를 찾아왔을 때,나는 그가 어머니를 편들어 나를 야단을 치거나,그렇지 않으면 벌받는 나를 가슴아파 하는 둘중 하나의 입장을 표현할 것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내앞에 앉아있는 그의 얼굴에는 씻은 듯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h3><h3><br /></h3><h3>"무엇을 말입니까."</h3><h3>"..."</h3><h3>"제가 행랑 식솔들과 아침을 먹은 일입니까,아니면 어머님께 대들어 장독관리를 하는 벌을 받은 일 말입니까."</h3><h3>"어찌 돌아왔는가 말이요."</h3><h3><br /></h3><h3>그의 말이 하도 뜬금없어서 나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그는 백자병에 꽃힌 난초꽃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h3><h3><br /></h3><h3>"손곡선생을 만나지 못한 것이요?"</h3><h3>"그게 무슨..."</h3><h3><br /></h3><h3>가만...손곡이라면 삼당시인 손곡 이달...허균과 허난설헌의 어릴적 스승...향단이 말한적 있는 그 이도련님...</h3><h3><br /></h3><h3>"네."</h3><h3><br /></h3><h3>에라,모르겠다.일단 만나지 못했다고 해두는 편이 낫겠지.</h3><h3><br /></h3><h3>"그렇군.만일 그분을 만났더라면 당신이 이런 곳으로 돌아올리 없을터."</h3><h3><br /></h3><h3>나는 이 말을 하는 여현의 눈빛이 문득 우수에 차있다는 느낌이 들었다.현대에서 그를 만났을 때에도 그는 이런 사연많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대체 무엇이 그를 이리도 슬프게 하는 것일까.</h3><h3><br /></h3><h3>"그래도 여기가 집인 걸요."</h3><h3><br /></h3><h3>할말이 없어 그냥 무심히 대꾸했을 뿐인데 그가 다시 경이로운 눈길로 나를 보았다.나는 민망해져서 고개를 숙였다.그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그 소리는 왠지 허한 웃음처럼 들렸다.</h3><h3><br /></h3><h3>"집이라...냉대받고 괄시받는 곳도 당신에겐 집이요?"</h3><h3>"그렇게 비꼬듯 말씀하시지 마세요.꼭 마치 그쪽과는 무관하다는 말투,듣기 불편하네요."</h3><h3><br /></h3><h3>젠장...망했다.</h3><h3><br /></h3><h3>허초희라면 절대 이런 태도,이런 어조로 여현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화가 나서 불쑥 내뱉었으니 주어담기도 글렀다.이건 내 입으로 내가 허초희가 아니라고 인정하는 것과 진배없었다.후회로 입술을 짓씹고있을 때였다.</h3><h3><br /></h3><h3>"시간을 되돌리고 싶었소."</h3><h3><br /></h3><h3>불순한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현은 얼굴 한가득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h3><h3><br /></h3><h3>"...?"</h3><h3>"당신과 나,언제부터 이리 되었는지...애초에 내 선택이 잘못된 건지...누구라 할것없이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소.하지만...내게 제일 중요한 건 그래도 당신이요."</h3><h3>"..."</h3><h3>"태기가 있었다는 걸 진즉 알았더라면,죽어도 당신을 그리로,그 사람에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요."</h3><h3>"..."</h3><h3>"허니 당신이 이리 돌아온 것은,내게 주는 한번의 기회라 받아들여도 되겠는지...나는 그것이 알고싶었소."</h3><h3><br /></h3><h3>뭐가 이리 복잡한가...현대에서 난 연애도 한번 안해본 허당인데 오자마자 이리 복잡한 치정에 휘말려들다니.</h3><h3><br /></h3><h3>허초희라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답했을까.</h3><h3><br /></h3><h3>燕掠斜簷兩兩飛</h3><h3>제비는 처마를 지나 쌍쌍이 날고</h3><h3>落花撩亂拍羅衣</h3><h3>떨어지는 꽃잎은 비단옷 어지럽히네</h3><h3>洞房極目傷春意</h3><h3>규방 눈 미치는 곳마다 넋을 잃고</h3><h3>草綠江南人未歸</h3><h3>풀 푸른 강남의 임은 돌아오지 않네</h3><h3><br /></h3><h3>秋淨長湖碧玉流</h3><h3>맑은 가을 호수 옥인 양 파란데</h3><h3>荷花深處繫蘭舟</h3><h3>연꽃 깊은 곳에 목란배 매였네</h3><h3>逢郞隔水投蓮子</h3><h3>임 만나 물건너로 연밥 던지고는</h3><h3>或被人知半日羞</h3><h3>혹 누가 알까 한나절 부끄러웠네</h3><h3><br /></h3><h3>후세에 전해진 허초희 그녀가 여현을 그리며 쓴 두수의 시였다.시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애틋한 마음,여현은 왜 감감 모르고 있는 걸까.</h3><h3><br /></h3><h3>"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h3><h3><br /></h3><h3>나는 허초희가 돌아올수 있을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긴 했지만,역사에 남겨진 그녀의 불행한 운명을 바꿔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녀 한사람의 운명이 바뀐다 하여,하늘이 내게 그 어떤 처벌을 내리지는 않겠지.그리 기도하며 나는 여현을 바라보았다.</h3><h3><br /></h3><h3>"그래도 여긴...제 집이라구요."</h3><h3><br /></h3><h3>여현의 눈에 서서히 물기가 번졌다.그것을 보자 어쩌면 불행한 사람은 단지 허초희뿐이 아니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쳤다.</h3><h3><br /></h3><h3>......</h3><h3><br /></h3><h3>"봄철 옷은 향단을 시켜 숙소로 보내드리겠습니다."</h3><h3><br /></h3><h3>사랑채앞 마당에서 여현을 바래며 내가 말했다.이미 허초희를 대신해 돌아갈 방법을 모색하기 전까진 여기서 생활하기로 한 나는 일단 내 역할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h3><h3><br /></h3><h3>"그럴 필요 없소."</h3><h3>"네?"</h3><h3>"집으로 들어올테니."</h3><h3><br /></h3><h3>오마이갓...</h3><h3><br /></h3><h3>순간 당황해진 내 얼굴을 들킬까 염려되어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여현은 이런 내 반응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듯 했다.</h3><h3><br /></h3><h3>"다소 성정이 변했나 했더니 아직 부끄러움을 타는 건 여전하구려."</h3><h3><br /></h3><h3>나는 애매한 저고리 옷고름을 쥐어 비틀었다.그런 내게 불쑥 고개를 숙여오며 그가 내 귀가에 속삭였다.</h3><h3><br /></h3><h3>"무얼 염려하는지 내 알고있소."</h3><h3>"제가 뭘 어쨌다고..."</h3><h3><br /></h3><h3>입속으로 우물거리며 간신히 얼굴을 들자 그가 낮게 웃었다.</h3><h3><br /></h3><h3>"기회를 주었다 하여 바로 들이댈만큼 몰렴치하진 않소.난."</h3><h3>"..."</h3><h3>"맞은켠 서당에 머물고 있을 것이요.걱정하지 마시오."</h3><h3>"제가 또 뭘 걱정했다고..."</h3><h3><br /></h3><h3>여전히 낮게 궁시렁거리자 그가 얼굴을 들며 빙그레 웃었다.</h3><h3><br /></h3><h3>"그럼..."</h3><h3><br /></h3><h3>"대체 너희 양천 허씨 가문은 우리 집안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남편의 출세길을 막으려 드느냐?서방이 공무를 떠나는 길에 왜 먼저 치마꼬리를 펄럭이는 게야?"</h3><h3><br /></h3><h3>등뒤에서 송씨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아침의 일이 다 끝났다고 여긴 것은 어디까지나 내 오산이었다.여현을 보았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린 것 빼고는 별다른 제스처가 보이지 않았다.나는 왠지 모를 허무한 감정을 추스리며 몸을 돌려 조용히 부인을 마주했다.</h3><h3><br /></h3><h3>"죄송합니다.어머님..."</h3><h3><br /></h3><h3>내 공손한 태도에 부인의 얼굴이 다소 누구러 들었다.나는 더욱 깍듯하게 허리를 굽히며 부인을 향해 말했다.</h3><h3><br /></h3><h3>"그럼 이번엔 마당을 쓸까요?아니면 처소 곳곳을 걸레질 할까요?"</h3><h3>"뭣이?"</h3><h3>"아참...그래도 저녁은 주셨으면 합니다.아시다싶이 육중한 막노동에는 원래 허기가 빨리 지는 법이니까요."</h3><h3>"네...네가 정녕 이 가문을 허술히 보는 것이냐!"</h3><h3><br /></h3><h3>부인이 눈섭을 곤두세우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하지만 그녀의 노기는 어이없게도 여현의 말 한마디에 바로 수그러 들었다.</h3><h3><br /></h3><h3>"...들어오겠습니다."</h3><h3>"뭐라?방금 무엇이라 하였느냐?내가 잘못 듣지는..."</h3><h3><br /></h3><h3>언제 화를 냈는가 싶게 부인이 급반색을 하며 물었다.그리고 여현의 담담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부인의 다음 말을 잘랐다.그동안 단단한척,강인한척 하던 내가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울컥하게 하는 말이었다.그러고보면 나는,부인의 괴롭힘을 받으면서도 어쩌면 나는 줄곧 그의 이 말을 기다려왔을지도 모른다.</h3><h3><br /></h3><h3>"집으로 들어오겠습니다.그러니 더이상 이 사람 괴롭히지 마세요,어머니."</h3><h3><br /></h3><h3><br /></h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