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3>내가 미처 마음의 준비도 안되었는데 드르륵 문이 열렸다.나는 가체를 바로잡으며 문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몽롱한 아침 안개속에 훤칠한 인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h3><h3><br /></h3><h3>"..."</h3><h3><br /></h3><h3>처음으로 허초희의 신분으로 여현을 마주하였지만 어떻게 입을 열어야 적당한지 몰라서 나는 말없이 고개만 숙여보였다.</h3><h3><br /></h3><h3>그가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섰다.그제야 그의 모습이 똑똑히 시선안으로 들어왔다.</h3><h3><br /></h3><h3>"난초..."</h3><h3><br /></h3><h3>나는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내뱉었다.그는 한손에는 향단이 가져온 겉옷을,다른 한손에는 놀랍게도 꽃가지를 들고 있었다.</h3><h3><br /></h3><h3>"어디서 난거에요?"</h3><h3>"오다 주었소."</h3><h3><br /></h3><h3>그가 무심한 듯 대답했다.나는 잠깐 그를 쳐다보았다.순간 킥 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급히 웃음을 갈무리 하였지만 그의 놀라운 시선이 느껴졌다.</h3><h3><br /></h3><h3>"왜 웃소?"</h3><h3>"아닙니다...아무것도."</h3><h3><br /></h3><h3>나는 입속말로 중얼거렸다.허초희가 난을 유난히 사랑했다는 것은 그녀의 호가 난설헌인 것을 보아도 충분히 알수 있었다.김성립과 허초희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잘못 기재된 역사사실이었을까.</h3><h3><br /></h3><h3>"고맙습니다."</h3><h3><br /></h3><h3>나는 두손을 내밀어 꽃가지를 받아들었다.그의 시선은 여전히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나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h3><h3><br /></h3><h3>"앉으시지요."</h3><h3><br /></h3><h3>그가 좌정하고 앉자 나는 난초꽃가지를 서안에 놓인 백자병에 정히 꽂았다.그는 여전히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 물었다.</h3><h3><br /></h3><h3>"균은 갔소?"</h3><h3>"아...네."</h3><h3><br /></h3><h3>마당쇠에게서 아침에 균이 왔다는 소리를 들었던 걸까.</h3><h3><br /></h3><h3>"잠시 두고간 물건이 있어 찾으러 왔다고..."</h3><h3><br /></h3><h3>다행이 그는 더 묻지 않았고 나는 눈앞의 상황이 불편하여 서안상에 놓인 종이를 뒤적거렸다.그가 다시 물었다.</h3><h3><br /></h3><h3>"아직도 시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오?"</h3><h3>"네?"</h3><h3><br /></h3><h3>그는 눈짓으로 내가 뒤적거리는 종이를 가리켰다.</h3><h3><br /></h3><h3>"붓을 놓은지 일년이오.이젠 다시 써도 될듯 한데."</h3><h3>"아...그래도..."</h3><h3><br /></h3><h3>대체 무슨 판국이란 말인가.허초희가 붓을 놓다니...후세에 남겨놓은 그녀의 주옥같은 시가 그렇게 많은데.</h3><h3><br /></h3><h3>나는 오리무중에 빠졌지만 무엇을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내가 허초희가 아니라고 이실직고하면 그가 믿어줄까?아니면 향단에게 둘러댄 것처럼 기억을 잃었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혹은 그에게 이제 당신도 곧 타임워프를 해야 한다고 알려줘야 하는 것일까.</h3><h3><br /></h3><h3>곤궁에 처한 나를 구해준 건 의외에도 송씨 부인이었다.</h3><h3><br /></h3><h3>"해가 중천에 떴는데 뭣들 하는 것이냐.이 집에는 아직 살림살이를 늙은 부모가 해야 한다더냐!"</h3><h3>"마님...아씨께서 몸이 불편하신데다가 아까 서방님께서 오셔서 잠시..."</h3><h3><br /></h3><h3>향단의 대답에 부인의 언성은 더 높아졌다.</h3><h3><br /></h3><h3>"여현이 왔으면 이 어미부터 볼 일이지 내당에 먼저 들리다니.이게 어느 가문의 법도더냐!"</h3><h3><br /></h3><h3>나는 여현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고 나갔다.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의 뒤를 따라나갔다.</h3><h3><br /></h3><h3>마당에는 서슬 푸른 송씨부인이 머리를 건뜻 쳐들고 서있었고 향단은 그옆에서 손을 치마폭에 싼채 전전긍긍한 모습이었다.여현이 송씨부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h3><h3><br /></h3><h3>"공무가 바빠 집에 자주 들리지 못해 죄송합니다.어머니."</h3><h3>"공무가 바쁘단 사람이 내당에는 들리셨구려."</h3><h3><br /></h3><h3>부인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있었다.여현은 얼굴에 작게 미소를 떠올렸다.</h3><h3><br /></h3><h3>"균이 와있다 하여 얼굴이나 보려던 참이었습니다."</h3><h3><br /></h3><h3>그제야 내게 시선을 준 부인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h3><h3><br /></h3><h3>"균도련님은 아직인가.아무리 친정 식구라 해도 남여가 유별하거늘 내당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은 법도에 어긋..."</h3><h3>"이미 하직을 고하였습니다.어머님께는 아까 뵈었으니 따로 작별인사 올리지 않겠다고 대신 여쭈라 하더이다."</h3><h3><br /></h3><h3>입을 열자 자연스럽게 대답할 말이 튀어나왔다.아까 앞채에서 한번 말을 섞었는지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여현이 힐끗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그의 시선과 더불어 송씨부인의 눈에도 경악의 빛이 잠시 스쳤다.</h3><h3><br /></h3><h3>"아니,지금 내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네가 감히 말대꾸를 한 것이냐!"</h3><h3>"하문하시어 대답을 했사온데 어찌 대꾸라 하십니까."</h3><h3>"너...너..."</h3><h3><br /></h3><h3>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부인이 뒷목을 부여잡았다.향단의 얼굴이 흙빛이 된 것을 보고 나는 눈으로 그녀에게 의문을 표시했다.그녀는 아무 말 말라는 듯 내게 급히 손짓을 했고 나는 알았다는 뜻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잠시후 부인은 자신을 부축하는 여현의 손을 뿌리치고 바로 냉정을 되찾았다.</h3><h3><br /></h3><h3>"되었다.내 너와 무슨 말을 더 하겠느냐.조반준비는 다 되었느냐?"</h3><h3><br /></h3><h3>나는 대답대신 향단을 바라보았다.역시 그녀가 구세주였다.</h3><h3><br /></h3><h3>"마님...아씨께서 출타하셨다가 돌아오신게 바로 어제인데 어떻게 점검을 하겠습니까.쇤네가 차질 없는 것을 확인했으니 어서 앞채로 가시어 진지를 드사이다."</h3><h3>"대감마님께 올릴 효종갱(조선시대 양반들의 해장국으로 배추속대, 콩나물, 송이, 표고, 소갈비, 해삼, 전복에 토장을 풀어, 밤새 끓여야 함)은 준비했느냐?"</h3><h3>"네,이미 대감마님께 올려드렸습니다.사랑채에서 드시고 계시니 마님께서도 얼른 가사이다."</h3><h3><br /></h3><h3>부인은 향단의 말에 드디어 몸을 돌렸다.그러더니 나를 돌아보며 냉랭하게 한마디 던졌다.</h3><h3><br /></h3><h3>"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뭣 하고있느냐.가서 조반시중을 들지 않고."</h3><h3><br /></h3><h3>조반시중...내가 아는 조선시대는 부모와 자식이 겸상을 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나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일단 따라나서기로 마음먹었다.여현과 향단이 부인의 뒤를 따라가는데 혼자 남아있을수도 없는 일이었다.</h3><h3><br /></h3><h3>부인이 향하는 곳은 사랑채였고,그곳에서 나는 이 집안의 제일 큰 어른-김첨대감을 만날수 있었다.간밤의 숙취에 정신이 그닥 맑아보이지 않은 김대감은 나를 보자 눈을 크게 떴다.</h3><h3><br /></h3><h3>"이게 누구냐...어찌 벌써 돌아온 게냐?"</h3><h3>"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하옵니다.아버님."</h3><h3><br /></h3><h3>어제 향단에게서 허초희가 객사한 오라버니 허봉의 부고때문에 친정에 다녀왔다는 것을 들었기에 나는 김대감의 물음에 그나마 자연스럽게 응수할수 있었다.대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h3><h3><br /></h3><h3>"내 아까운 벗이었는데...참으로 비통한 일이로구나."</h3><h3>"..."</h3><h3>"과도한 상심은 몸을 상하게 하느니...아무쪼록 몸조리를 잘하거라.그리고 내 언녕 말하지 않았느냐.문안을 아침저녁으로 할것 없이 내당에서 식사를 하라고."</h3><h3>"아무리 그래도 영감,집안의 법도는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h3><h3><br /></h3><h3>송씨부인이 김대감의 말을 받았다.</h3><h3><br /></h3><h3>"여현도 간만에 집에 들어왔는데 이런 기회에 서로 얼굴이나 보고 말이나 나누자 한 것이지요."</h3><h3><br /></h3><h3>부인은 말을 마치자 내쪽을 돌아보았다.</h3><h3><br /></h3><h3>"상을 다 들이면 내당으로 가도 된다."</h3><h3><br /></h3><h3>나는 향단이 넘겨주는 상을 받아서 부인과 여현의 앞에 내려놓았다.반가의 아침상답게 여러가지 정교한 반찬들이 그릇에 맛갈스럽게 담겨있었다.그것을 보고있느라니 나는 저도 모르게 배가 고파났다.생각해보니 여러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발생하였기에 적어도 이틀은 끼니를 거른 듯 했다.어쩌면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한 일이었다.</h3><h3><br /></h3><h3>잠시후 사랑채를 물러나온 나는 향단을 돌아보았다.</h3><h3><br /></h3><h3>"왜 너희 아침은 없는 거지?"</h3><h3>"아씨...쇤네는 대감마님께서 상을 물리시면 그때에야 남은 음식들을 먹을수 있사와요."</h3><h3>"이런...배고프겠다."</h3><h3><br /></h3><h3>나는 혀를 차며 그녀를 잡아끌었다.</h3><h3><br /></h3><h3>"가서 나랑 같이 아침 먹어.저분들이 식사 마치려면 한참은 걸릴 걸."</h3><h3>"아닙니다.쇤네가 어찌..."</h3><h3>"그렇다고 여기 서서 쫄쫄 굶을래?"</h3><h3>"아침내내 고생한 행랑 식구들도 다 굶고 있사온데 어찌 저 혼자 가서 아침을 먹겠습니까."</h3><h3><br /></h3><h3>향단의 말에 나는 그녀의 팔을 놓았다.문간방 마당쇠도 부엌의 행랑어멈도 다 상전들이 상을 물리기만을 학수고대 하고있었다.나는 속으로 가만히 욕을 내뱉었다.</h3><h3><br /></h3><h3>빌어먹을 조선시대.</h3><h3><br /></h3><h3>머리를 한번 가로젓고 나는 다시 향단을 보았다.</h3><h3><br /></h3><h3>"그럼...난 어디서 아침을 먹어야 하는거지?"</h3><h3><br /></h3><h3>내 질문이 뭐가 잘못되었는지 향단이 퍼그나 안쓰러운 눈길로 나를 보았다.그제야 뭔가 서서히 상황파악이 되기 시작했다.애초에 내당에서 따로 하는 식사 따위는 없었다.</h3><h3><br /></h3><h3>배에서 연신 꼬르륵 신호가 들려왔고 나는 억울하고 원통하지만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그러니까 허초희-바로 지금의 나는 향단이나 행랑어멈처럼 상전이 먹다 나머지를 가져다 먹을수밖에 없는 신세라는 것을.</h3><h3><br /></h3><h3>사랑채 안에서 식기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송씨부인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나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대체 허초희란 여인은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시재가 뛰어나 후세에서는 천재시인으로 불리는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대체 뭐가 부족해서 이렇듯 고된 시집생활을 하고있는 걸까.그리고 김대감과 여현은 어찌 이런 일을 간과하고만 있는 걸까.</h3><h3><br /></h3><h3>일단 여현에게는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그렇다고 이 최준희가 이대로 굶거나 남이 먹다남은 음식을 기다릴수는 없는 일이었다.잠시후 흥분을 눅잦힌 나는 팔을 거두어붙이고 행랑어멈을 돌아보았다.</h3><h3><br /></h3><h3>"부엌에 어떤 식재료들이 있나요?"</h3><h3>"네?아...아씨...효종갱을 끓이고 남은 배추,콩나물,표고,송이 이런것들만 있어유..."</h3><h3>"그거면 됐어요."</h3><h3><br /></h3><h3>말을 마치고 부엌으로 향하는 내게 행랑어멈이 달라붙었다.</h3><h3><br /></h3><h3>"아씨...어찌 귀하신 몸으로 부엌에까지..."</h3><h3>"어멈...어멈과 같이 저분들 상 물리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그리 귀한 몸은 아닐텐데요."</h3><h3><br /></h3><h3>나는 웃음으로 행랑어멈에게 답한후 그대로 쥉쥉 부엌으로 향했다.</h3><h3><br /></h3><h3>잠시후 우리는 부엌에 빙 둘러앉아 부엌에 남은 야채를 넣고 고추장으로 비벼서 만든 비빔밥을 먹기 시작했다.밥을 한입 가득 입에 넣은 행랑어멈이 눈을 크게 떴다.</h3><h3><br /></h3><h3>"이건 정말 별미인디유."</h3><h3><br /></h3><h3>나는 우걱우걱 밥을 퍼먹는 사람들을 보면서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향단이 뒤이어 물었다.</h3><h3><br /></h3><h3>"쇤네도 이런 맛있는 밥은 처음으로 먹어봅니다.대체 아떻게 만든 것이여요?"</h3><h3>"간단해.그냥 남은 야채들을 데쳐서 넣고 엿고추장에 깨소금,참기름을 넣고 남은 밥을 같이 비볐어."</h3><h3>"나중에 저희들도 이렇게 만들어 먹겠사와요."</h3><h3><br /></h3><h3>향단의 말에 나는 대답대신 미소만 지었다.비빔밥이 제일 일찍 나타난 때는 1592년 임진왜란 시기라고 한다.허초희는 임진왜란이 시작되기 전에 사망했다고 하니 그녀가 살아있는 지금은 1589년전이 틀림없었다.</h3><h3><br /></h3><h3>문득 한가지 불안한 생각이 뇌리를 쳤다.허초희가 사망하게 되면 그녀의 신분으로 이 시대에 와있는 나는 따라 소멸하는 걸까?아니면 허초희로 살아남아서 기존의 역사를 바꾸게 되는 걸까?원래의 허초희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암튼 허초희가 어떻게 되었든 나는 여기를 떠나야 하는 일이 시급했다.</h3><h3><br /></h3><h3>"대체 예서 뭣들 하는 짓이냐!"</h3><h3><br /></h3><h3>하마터면 묵상으로 망부석이 될뻔하였다.송씨부인의 추상같은 목소리가 머리위에 떨어지지 않았으면 말이다.</h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