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 들어가는 말:</div><div><br></div><div>현대시를 쓰는 방법은 워낙 이미지시 창작론이다 이방법으로 필자는 제자들한테 시를 가르쳤는지 배운지 오년사이에 연변작가협회지용문학상을 둘이 따내였고 연변일보CJ문학상도 한사람이 따내였다 나름대로 지도적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여 독자들에게 참고로 제공한다 <이미지시 창작론>은 연길시 서점에서 팔리고있다</div><div>제1장 이미지 정의</div><div></div><div> 이미지란 무엇인가? 필자는 시에 대한 리론서적을 많이 읽지 못하였지만 이미지에 대한 견해는 동양과 서양이 일치하다는 생각이 든다.</div><div> 미국의 루이스는 이미지를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묘사된 언어의 그림>>이라 하였고 영국의 시드니는 <<시는 말하는 그림>>이라 하였다. 한국의 문덕수는 <<오늘의 시작법>>에서 이미지에 대한 <<가장 쉽고 일반적인 대답은 <글로 그린 그림> 또는 <언어의 회화>라고 말할 수 있다>> 라고 하였다.</div><div> 종합해보면 이미지는 그림인데 언어로 그린 그림을 이미지라 하겠다. 그림이라는것은 눈으로 보게끔 선으로 그렸거나 색갈로 그린것이다. 그런데 시는 선이나 색갈로가 아니라 언어수단으로 그리게 되여있다. 이 이미지라는 그림은 돌이나 나무나 산처럼 누구나 다 볼수있는 일반적인 객관적존재인것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속의 형상(즉 상상속의 형상)이라는데서 특색이 있는 그림이라 하겠다.</div><div> 고금중외의 모든 시를 이미지시학으로 살펴보고 분석해 볼수있을 같다. 하지만 이미지라는 언어는 20세기에 와서 각광을 받았고 시인과 시비평가들의 추구와 탐구대상이 되었다. 그러니깐 이미지는 현대시가 산생하고 발전하면서 개입된 언어로 리해함이 적당할것 같다.</div><div> 시라는 문학쟝르는 고대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쟝르로서 부동한 시기에 부동한 주장과 표현방식이 있었다. 특정된 력사시기마다 시에 대한 추구가 달랐다. 처음에는 모방의 시관으로 시를 썼고, 그후에는 실용론의 시관으로 시를 썼고, 그후에는 표현론의 시관으로 시를 썼고, 또 그후에는 존재론의 시관으로 시를 썼다고 할수있다.</div><div> 이에 대하여 한국의 홍문표는 <<현대시학>>에서 이렇게 밝히고있다.</div><div> <<모방적시관의 시는 자연을 반영하는 거울로 설명되였고, 효용론적시관의 시는 독자에게 어떤 실제적효과를 주는것이라고 설명한다면 표현론의 시관은 시인의 내면적인 세계를 창조적으로 표현한다는 립장이다>></div><div> 우리의 시대의 시는 표현론으로 시를 쓰는 시대이다. 어떻게 쓰면 표현론의 시관으로 시를 쓰게 되는가? 그 대답을 나름대로 이미지라고 확인하고싶다. 이미지로 쓰는 시가 현대시의 핵심적인 방법이라면 방법이겠다. 현대시의 류파는 많았지만 어느 류파도 이미지라는 이 올가미에서 벗어난것을 보지 못하였고, 어느 시인도 벗어났다고 하기는 어려울것으로 알고있다. 이미지는 현대시인의 특허권으로서 현대시인의 목에 쓴 멍에이자 또 시인에게 자유를 주는 천사이다.</div><div> 구라파 이미지 선구자들은 이미지선언 여섯가지를 제기한적이 있다.</div><div> <<1. 일상어를 사용하되 정확한 말을 고르며 모호한 말이나 장식적인 말을 배척한다.</div><div> 2. 새로운 기분의 표현으로서 새로운 리듬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된다.</div><div> 3. 제재의 선택은 자유로워야 한다.</div><div> 4. 명확한 이미지를 제공한다.</div><div> 5. 모호하고 불확정한 것이 아니라 견강하고 명확한 시를 쓴다.</div><div> 6. 긴축되고 집중된 것만이 시의 본질이다.>></div><div> 이 선언은 <<흄의 영향을 받은 알딩턴이 이미지선언을 쓰고 로우월이 수정을 가했다>>고 홍문표는 <<현대시학>>에다 밝히였다.</div><div> 이미지선언은 언어문제, 표현문제, 리듬문제, 제재문제를 제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지의 명확성과 시의 명확성 및 함축성문제들에 대하여 언급하였다.</div><div> 이미지시의 리론적 지도자라고 불리우는 파운드(미국)는 이미지의 중요성을 수많은 작품을 쓰는것보다 일생동안 단 하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강조하였다 한다.</div><div> 현대시를 이미지시, 이미지시를 현대시라고들 하는데 이런 말의 래원이 파운드에게서 왔을거라는 짐작이 간다. 단 하나의 이미지를 표현한다는 말의 무게는 결코 가벼운것이 아니다. 시를 쓴다는것은 이미지를 창출하는 작업이며 이미지를 창출하는 작업이 시인의 피타는 노력이여야 함을 심각하게 각인시키는 파운드다.</div><div> 선이나 색갈로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언어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 그것도 누가 그렸던 그림이 아니라 새로운 그림이여야 한다는것은 누구나 다 할수있는 일이 아니다. 오직 천부적인 천재성과 각고의 노력의 결과일것이다. 천부와 노력에서 노력이 첫째겠다. 천부는 노력으로 키울수있지만 노력이 없는 천재는 존재하지 않을테니깐.</div><div> 이미지의 개념, 중요성, 필요성 및 력사에 대하여 거치르게나마 알아보았다. 아래에 이미지와 동양시의 전통과의 양상을 살펴보기로 하자.</div><div><br></div> 이야기하자.<div></div><div><br></div><div>제1절 중국고전과 이미지</div><div></div><div><br></div><div> 초나라시인 굴원은 중국의 최초의 시인이며 중국문학의 최초의 시성이며 대가이다. 그는 <<애타는 호소>>라는 장시의 13에서 이렇게 쓰고있다.</div><div>....................................</div><div>세월은 어지럽게 흘러가는데</div><div>또 어찌 머물수가 있을가?</div><div>난초와 어수리는 변해서 향기가 나지 않고</div><div>붓꽃과 혜초 또한 계절이 바뀌니 억새가 되었다</div><div>어찌하여 향기롭던 그 풀들이</div><div>지금은 쑥덤불처럼 되였는가?</div><div>그 이유는 달리있는것이 아니라</div><div>결백을 좋아했던 피해가 아닐가?</div><div>.......................................</div><div> 굴원이 여기서 떠올린 난초, 붓꽃, 혜초 ,쑥덤불 ,억새 등 풀들은 풀인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을 가리키고있는것이다. 인간들의 개성과 특점에 의하여 풀들로 둔갑시켜 놓은것들이다. 워낙 좋은 사람들이였는데 환경의 변화와 함께 나쁜 사람들로 되였다는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풀로 둔갑되였는가? 시적상관물을 리용하여 둔갑시켜 놓았다는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있다.</div><div> 당조의 대성이였던 리백의 <<촉도난>>을 보아도 이미지시색채가 짙다는것을 보아내기 어렵지 않다.</div><div></div><div> 아--</div><div>높고도 높아라!</div><div>촉도길 험난쿠나!</div><div>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려워라.</div><div>..............................................</div><div>지키는자 원쑤일진대</div><div>아침엔 사나운 범 피하고</div><div>저녁엔 큰 구렁이 피하건만</div><div>이를 갈며 피 빨려드나니</div><div>살인을 삼대베듯 하였다네</div><div></div><div> 리백의 촉도길은 결코 어떤 길을 말하는것이 아니고 당시의 가혹한 정치를 빗대고 비난한것이다. 범이요 구렁이요 하는것들도 범이나 구렁이를 말하는것이 아니라 탐관오리들을 가리키는것이다.</div><div> 언어란 원래 어떤 사물의 상징물이다. 당신의 이름을 영호라고 부른다 하자. 이것은 당신의 부모나 할아버지가 지어준 당신에 대한 대호이다. 그러나 당신이 태여났을 때 당신의 이름을 배추라고 하였다면 사람들은 지금 당신을 영호라고 부르지 않고 배추라고 부를것이다. 영호나 배추는 당신을 상징하는 언어일뿐이다. 시에서의 언어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상징물인것이 아니라 왕왕 시인자신이 창조한 상징물이다. 시인이 창조한 상징물로서의 언어가 될 때 비로소 시적언어라는 명칭에 값하는것이리라. 그래서 자고로 시인을 언어의 련금사라고 하였으리라. 시인이란 바로 이제까지 남들이 만들어 내지 못한 언어를 만들어냈을 때 자격증을 딸수있는것이 아니겠는가!</div><div> <<영스님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에서 한유는 거문고소리를 여러가지로 변형시키면서 화려한 시를 와르르 쏟아내고있다.</div><div>............................................</div><div>한번 긋자 가락소리 우렁차더니</div><div>장사가 적진에 돌진하는듯</div><div>흩날리는 버들꽃 떠도는 구름이라</div><div>드넓은 우주에서 자유로이 날아라</div><div>백천마리 뭇새들이 지저귀는가</div><div>갑자기 들려오는 봉황새소리</div><div>.................................</div><div> 한유는 거문고소리를 귀로 듣는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있는것이다. 소리를 어떻게 본단말인가? 현대시공감각이라고 하는 언어의 수법으로 청각을 시각으로 전의한것이다. 거문고 소리를 듣는 한유의 눈앞으로는 소리가 흘러가는것이 아니라 적진으로 돌진하는 장사의 용왕매진이 보이기도 하고, 흩날리는 버들꽃이 보이기도 하고, 하늘의 흰구름이 보이기도 하고, 지저귀는 수천마리의 뭇새들이 보이기도하고 봉황새도 보이고있는것이다. 시인이 보고있는것은 당연히 존재가 아니라 상상속에 떠오른 화폭으로서 허상이다. 사실 시인의 시재와 운명은 이러한 허상적화폭을 떠올리는 저력이 어느 정도에 이르는가에 의하여 가늠된다.</div><div></div><div>제2절 우리 고전과 이미지</div><div></div><div> 중국의 고전에 대하여 이만큼 말하고 아래에서는 우리 선조들의 시조를 보자. 시조는 우리 선조들만이 갖고있던 유일한 문체였다. 시조는 우리겨레의 얼굴이였고, 우리 문학의 고전의 얼굴이기도 하다. 이런 시조에도 이미지로 된것들이 많았다. <<조선고전문학선집3>>의 시조들을 보면 우리 선조문인들이 이미지를 어떻게 쓰고있었는가를 알게 된다.</div><div> 청구영언에 실린 송강가사에는 이런 시조가 있다.</div><div></div><div> 송림에 눈이 오니 가지마다 꽃이로다</div><div> 한가지 꺾어내여 님계신데 드리고저</div><div> 님께서 보오신후에 녹아진들 어이리</div><div></div><div> 눈이 와서 나무가지마다에 쌓인 눈을 보고 <<꽃>>이라고 한다. 시에서는 눈이 꽃으로 탈바꿈 하였다. 눈과 꽃은 확연히 다른 사물이지만 시인은 똑같은 사물로 보고있는것이다. 그래서 꽃을 한가지 꺾어다가 님한테 드리겠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김춘수가 지적한 <<짝>>의 당위성과 리처즈의 <<밸런스>>의 당위성을 보아낼수있는것이다. 시적상관물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색깔에 의한 시적상관물이라고 할수있다. 수사법각도로 보면 은유인 것이다.</div><div> 해동가요에는 이런 시조가 실려있다.</div><div></div><div> 초생에 비친달이 낫같이 가으다가</div><div> 보름이 돌아오면 거울같이 두렷하다</div><div> 아마도 인지성쇠 저리한가 하노라</div><div> 청구연언의 시조는 사랑을 노래한것이고 해동가요의 이 시조는 인생을 관조하면서 교훈을 주고있다겠다. 초생달이 낫가락이요 보름달은 거울이라고 한것은 달을 다른 사물로 만들어버린것이다. 그것을 통하여 시인은 울고 웃는 인생살이를 노래하고있는것이다.</div><div> 청구가요에는 이런 이런 시조 한수가 실려있다.</div><div></div><div> 리별이 불이 되니 간장이 타노매라</div><div> 눈물이 비되니 끌듯도 하건마는</div><div> 한숨이 바람되니 끌동말동</div><div></div><div> 이 시조에서는 리별이 불로 다시 태여나고 눈물은 비로 다시 태여나고 한숨은 바람으로 다시 태여나고있다. 은유적인 과정을 거쳐 언어들은 모두 자신의 원 뜻을 잃고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불>>, <<비>>, <<바람>>도 그렇거니와 <<타노매라>>, <<끌듯도 하건마는>>, <<끌동말동>> 용언들도 새로운 의미망속으로 들어가고있다. 이미지시 즉 현대시에서 언어가 새로운 이미로 태여나지 않으면 산문화경향을 두절할수 없을뿐만 아니라 생경한 언어라는 딱지를 이마에 딱 붙이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언어가 새로운 의미를 가지지 못하면 시적언어라고 말할수 없으며 그런 언어는 씌여있을뿐이지 죽은 언어의 운명을 면할수 없을것이다. 소위 시가 리해되지 않소 시는 아무나 쓰는것이 아니오 하는 말들이 나오는것은 시어들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다시 태여나기때문이다.</div><div> 이미지시에서는 모든 언어가 시라는 집을 짓는 건축에서의 재료이다. 언어들은 원래의 상징성을 버리고 벽돌이나 세멘트나 철근이나 나무들로 되어버린다. 시인은 이러한 재료들을 가지고 이제까지 남이 지어보지 않은 새로운 집을 지을 때만이 현대시를 쓴다고 자신있게 말할수있을것이다.</div><div> 따지고 보면 우리 고전에도 이미지시가 있었다는것을 간단히 알아보았다. 시에서 이미지는 동양이나 서양에서 다 추구하여 왔던것이다. 이미지시의 뿌리는 상징에 있다. 동서양의 시에 모두 상징이 있었다. 그러다가 20세기초 영국에서 이미지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이미지가 시대의 각광을 받게 되었던것이다. 그것은 실제상에서 형상주의 운동이였다. 이 신시운동은 윤곽이 뚜렷하고 이미지가 밝고 간결하고 암시적이여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후부터 시에서의 이미지화가 새로운 개화를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필자가 오늘 이미지시를 론하게 되는것은 서양의 이미지수법을 받아들여 우리 시를 한보 더 발전시키고 개화시키기 위하여 서이다. 현시점에서 우리의 시와 우리의 고전을 현대의 서양의 이미지시와 비교하면 사상성으로 보면 유치하고 예술적으로 보면 천박하고 언어적으로 보면 단조롭다는것을 승인하지 않을수 없다. 필자 나름대로 이 글을 쓰면서 함께 이미지숲을 걸어보고자 시도하고있다.</div> 제3장 이미지와 상상<div></div><div><br></div><div> 문학을 한다는 사람치고 상상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실상 다 아는것 같으면서도 모르는것이 상상이다. 안다는것은 누구나 상상의 초학자쯤은 되는것이고 모른다는것은 누구나 다 상상의 전문가는 아니라는것이다. 필자도 초학자 그물에서 벗어날것 같지는 못하다. 그저 상상이 없으면 시를 쓸수 없고 상상력이 약하면 좋은 시를 쓸수 없다는것쯤은 알고있을뿐이다.</div><div> 어느 책에선가 미국의 심리학자 제임스가 상상에 대하여 한 말이 떠오른다. 그는 과거에 느꼈던 <<원물의 모상을 재생하는 능력에 주어진 명칭이 상상>>이 라고 하였다. 원물의 모상을 재생하는 능력이라는것은 과거에 어떠한 사물에서 받았던 인상과 기억을 그대로 떠올리는것이 아닌가싶다.</div><div> 시는 시인의 상상을 언어로 그려낸 그림이다. 즉 이미지이다. 상상이 어떻게 이미지를 생성하는가?</div><div> <<문예비평의 원리>>라는 글에서 I.A.리처즈는 상상에 대하여 여섯가지방면으로 이렇게 밝히고있다.</div><div> <<1.생생한 심상 (보통은 시각심상)을 낳는다.</div><div> 2.상상력은 뜻하지 않는것이 단지 비유적인 용법만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div><div> 3.상상력을 타인의 정신상태, 특히 그 정신의 상태를 공감각적으로 재생하는것을 뜻하는 경우가 있다.</div><div> 4.보통 결합되여 있지 않은것을 결합하는것, 즉 발명력이라는 뜻이다.</div><div> 5. 보통 따로따로라고 생각되는것을 적절하게 결합시키는 과학적인 상상력에 례시되는 의미...</div><div> 6.상상력을 적용하는 통합적 마술적 힘은 ...상반되는 성질이나 불조화한 성질의 밸런스(균형) 혹은 화해로 되여나타난다>></div><div> 리처즈의 론술은 상상을 원물의 모상을 떠올리는데 그치는것이 아니라 한보 더 나아가서 비유적인 용법, 공감각, 발명력, 적절한 결합, 밸런스로 전개하면서 <<통합적 마술적 힘>>을 기대하고있는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시적상상력이란 어떠한것이라는것을 깊게 넓게 인식하게 된다.</div><div> 사람에게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가 있는것처럼 상상에도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가 있을것 같다.</div><div> <<원물의 모상을 재생>>시키는것을 할아버지라고 할수 있겠다. 이 할아버지는 아들인 아버지를 만들수있고 아버지는 또 아들인 손자를 만들어낼수있다. 이 과정을 리처즈는 여섯개 단계로 풀이 하면서 얕은데로부터 깊은데로 한발자국씩 들어가고있는것이다.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번 천착해 보기 바란다. 우리가 단일상상이요, 복합상상이요 창조적상상이요 하는것의 도리를 리처즈는 자세하게 가르친다고 하겠다.</div><div> 숱한 <<원물의 모상>>들이 집합되고 어울리고 변이되면서 새로운 상상을 만들어낸다. 바로 리처즈가 말한 <<2,3,4,5,6>>에 속하면서 새롭게 생성된 새로운 상상이 바로 현대시의 이미지라 하겠다. <<원물의 모상>>을 떠올리는것은 이미지가 아닌가? 이미지는 이미지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는 모방적이미지다. 모방적이미지들이 모이고 어울려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였을 때 그 이미지를 비로소 필자가 말하는 이미지라 하겠다. 현대시의 이미지는 단순한 상상(원물재생)이나 복합상상(여러가지 원물재생)이 아니라 생산적상상(새로운 이미지)이 낳은 비실재적인 새로운 허상을 말하는것이라겠다. 그래서 오늘의 시는 반영이 아니라 표현이라고 한다.</div><div> 책을 보면 코울리지는 실제를 떠난 공상을 비난하였다 하고 흄은 공상의 기능을 중시하였다고 한다. 이미지를 생성하는 상상은 전자가 아니고 후자이다. 이미지는 상상의 한계를 제한하지 않는다. 모든 기성론리와 기성법칙을 초월하는 상상만이 이미지에서 가치를 발생한다. 일반적이고 습관적이고 규례에 얽매인 상상, 그것들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상에 의하여 산생된 이미지는 현대시에서 설자리를 내여주지 않는다.</div><div> 왜서인가? 상상은 누구나 다 할수있지만 누구나 다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가 다 이미지를 떠올리수있지만 누구나 다 시를 쓸수 있는것도 아니다. 련상작용에 의하여 새롭게 태여난 허상, 그런 허상이 체현된 이미지, 그것이 비로소 시로 될수있는 이미지가 아니겠는가 단정하고싶다. 이미지는 오관에 반영된 원물의 모상인 것이 아니라 제6감각 즉 마음의 감각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그림이다.</div><div> I.A.리처즈는 <<상상력을 적용하는 통합적 마술적 힘은......상반되는 성질이나 불조화한 성질의 밸런스 혹은 화해로 되여나타난다.>>고 하였다. 시적이미지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이것이라고 말하고싶다. 김춘수는 <<시의 리해와 작법>>이라는 저서에서 <<리상적인 짝을 맞춰주는것이 상상>>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들은 서양의 리처즈와 한국의 김춘수가 똑같은 말을 하고있다는것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있다. 이미지란 쉬운 말로 하면 <<리상적인 짝>>을 맞추어준것이라겠다. 짝을 맞출 때 상상은 매파로서 이질적인 사물을 서로에게 소개하고 연분을 맺어주고 한집 (하나의 이미지)에서 살게 한다. 이질적인 사물 례하면 물과 불 혹은 소리와 나무같은것들이 서로 화해되면서 새로운 표현으로 결박되였을 때 이러한 이미지가 현대시의 이미지이고 이러한 이미지를 잘 만들어내는 시인을 이미지리스트라 부르리라.</div><div></div><div> 군중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div><div> 축축한 검은 나무가지 위의 꽃잎들</div><div></div><div> 이 시는 파운드의 시 <<지하철 정거장에서>>의 전문이다. 이미지리스트의 선언에 만족한 답을 주는 본보기시라고 할수있겠다. 비록 두줄이지만 이 시편에는 파운드의 7년간이라는 사색이 슴배인 시이고 워낙 30줄이 던데로부터 두줄로 함축하였다고 한다. 흄이 말한것처럼 <<명랑하고 메마르고 세련된것>>이라고 하겠다. <<군중>>, <<유령>>, <<얼굴>>, <<검은 나무가지>>, <<꽃잎>> 어느 하나도 <<모호하고 불확정적인것>>이 없고 <<긴축되고 집중>>되였다고 할수있다. <<유령처럼>>나타난 <<군중>>의 <<얼굴들>>을 <<축축한 검은 나무가지의 꽃잎들>>이라고 하였는데 <<얼굴들>>과 <<꽃잎들>>이 가장 주요한 언어인것같다. 시인의 결박을 통하여 <<얼굴들>>이 <<꽃잎들>>로 둔갑한다. 이 <<꽃잎>>은 허구로 생성된 <<꽃잎>>이지 실재하는 <<꽃잎>>이 아니다. 즉 변형시켜 만들어놓은것이지 현실적존재가 아니다. 상상속의 존재 즉 허상이다. 이런 허상만이 예술에 값하는것이며 현대시에 값하는 이미지일것이다. <<짝>>이 맞추어진 이 두 사물은 완연하게 성질이 다른 사물이라는것을 우리는 얼핏 보아도 알게 된다. 파운드는 <<짝>>을 훌륭하게 맞추고있다. 이런 이미지야말로 영원히 기억에 남는 절실한 감동을 주는 시가 아닐가.</div><div> <<시의 목표는 미지의것에 도달함이며 달리 표현하면 볼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수 없는것을 듣는 것이다>> <<알바트로스>>라는 책에 적힌 이 랭보의 말이 성립된다고 하면 남들이 다 알고 다 보고 다 들을수있는것을 시로 쓴다는것은 종이랑비 정력랑비 시간랑비로밖에 취급할수 없을것이다. 오직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여 내여야만 시의 목적, 예술의 목적에 접근할수있으리라.</div><div> 시를 쓴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고 누가 묻는다면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것이라고 대답하면 시험과은 만점을 매겨주리라 믿는다.</div> 제4장 이미지의 류형<div></div><div><br></div><div> 이미지 류형에 대한 설이 여러가지이다. 5관을 통한 감각에 기대여 나누는 류형이 있는가하면 수사법류형에 기대여 나누는 류형도 있고 이미지 생성과정에 기대여나누는 류형도 있다.</div><div> 필자는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류형으로 이미지를 나누어보고싶다.</div><div> 첫째로는 형태이미지, 둘째는 사물이지미, 셋째는 관념이미지, 넷째는 복합이미지등 네가지로 나누어 고찰해 보고자한다. 형태이미지라는것은 시 자체가 어떤 형태로 씌여졌는가 하는것이고 사물이미지라는것은 사물을 이미지화한것이고 관념이미지란것은 관념을 이미지화한것이고 복합이미지라는것은 사물이미지와 관념을 함께 리용하여 시를 쓴것이라겠다.</div><div></div><div></div><div></div><div> 아래에 한 류형씩 살펴보도록 하자.</div><div></div><div>제1절 형태이미지</div><div></div><div> 시를 읽기전에 우리는 먼저 시의 형태와 만나게 된다. 바로 <<오성의 최초의 가장 단순한 언제나 있는 어떤 표출은 현실세계의 직관이다>> 라고 한 훗살의 말과 같은 것이다. 홍문표는 <<문학작품은 그자체로서의 독립적인 내용과 형식을 지니>>고 있다면서 <<고유한 존재 양식과 구조를 통해서>> <<문학을 인식할수있다>>고 하였다.</div><div> 형태이미지란 시가 어떤 형태로 <<표출>>되였는가를 <<직관>>하는것이라고 하겠다.</div><div> 왜 시의 형태를 살펴보아야 하는가? 시도 태여나면 하나의 사물이며 하나의 객관존재이다. 추상적인 사물인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물이며 직관적인 사물이다. 시자체가 모양을 갖고 있다. 이 모양은 행과 련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행과 련의 구분이 여러 가지이듯이 시의 모양도 여러가지 형태이다. 시의 어떤 형태는 어떤 사물의 모양을 본딴것도 있고 지어는 기하학적 도형을 본딴것도 있다. 시의 이런 형태는 사람들에게 어떤 상태나 분위기를 느끼게도 하고 어떤 감각을 주기도 한다.</div><div> 나의 내부에도</div><div> 몇마리 새가 산다</div><div> 비유의 새가 아니라</div><div> 기왓골을</div><div> 쫑</div><div> 쫑</div><div> 쫑</div><div> 옮아 앉는</div><div> 실재의 새가 살고 있다</div><div> 박남수의 시 <<새>>(40)이다. 시인은 비유의 새가 아니라지만 실제는 비유의 새다. 상징적으로 씌여진 이 시에서 의태어 <<쫑 쫑 쫑>>세 글자를 각기 한행으로 함으로써 새가 정말 <<기왓골>>을 <<쫑 쫑 쫑>> 옮겨 앉는 모습을 보는것만 같다. 시작의 넉줄과 결속의 두줄사이에 <<쫑 쫑 쫑>>을 행으로 배치하여 새가 지붕의 기와장사이를 넘나드는 모습을 우리앞에 펼쳐주기도 한다. 또 맑고 가볍고 경쾌한 그것은 이 시의 형태와도 관계가 없지 않다.</div><div> 아폴리네르(프랑스)는 <<연무>>라는 시 2련을 이렇게 쓰고있다.</div><div> 그리고 또 나</div><div> 는</div><div> 태</div><div> 운다</div><div> 권련초</div><div> 를, 덧없</div><div> 이 탄다</div><div> 형태이미지라겠다. 연기가 타오르는 모양을 글자로 나름대로 그려놓은것이다. 밑에다 세글자씩 석줄 그다음 두글자, 그다음 한글자씩 두줄인데 글자위치가 다르다. <<그리고 또 나>>는 한줄로 위를 막고있다. 연기가 피여올라가는 모습이래도 좋고 우에서 뿜어내려오는 모양이래도 좋다. 아무튼 연기의 운동과 비슷하게 <<연기>>라는 시를 쓰고있는것이다. 한 사물을 쓰면서 그 사물의 형태를 그림처럼 밝혀보려는 시인의 마음 표현이라 하겠다.</div><div>산</div><div>그이는</div><div>산이였다사</div><div>시절푸른정기를</div><div>뿜어내는산이였다검</div><div>은구름은산을덮고번개로</div><div>정수리를치고우박은허리를갈</div><div>기고소나기는정갱이에서울부짖었</div><div>다소나기가지나가자맑은하늘아래산의</div><div>웅좌는생채기한오리없이드틴자리도없이</div><div>원점에올방자를틀고온건히오연히앉아있었다!</div><div>산</div><div> 그이는</div><div> 산이였다지</div><div> 각이파도쳐도닻</div><div> 을내린배처럼영원히</div><div> 침몰될수없는그런산세월</div><div> 의한자리를증언해우뚝엎딘그</div><div> 런산이였다산은갔다하루아침에터</div><div> 자리엔애기잔디밭눈시린이슬의꿈터파</div><div> 아란아침공기가안개처럼부서진답부서지며</div><div> 쨍ㅡ소리나는씨앗을마음밭에한알씩떨구어준다</div><div> 필자의 졸작 <<원점에 오연히>>라는 첫련이다. 김학철옹의 서거를 맞고 쓴 이 시는 모두 2개련인데 각 련은 11행으로 산모양을 그렸다. 가장 철저한 맑스주의 신봉자이며 사상가이며 문학가이며 로홍군의 최후의 분대장이며 우리 민족의 위대한 대표인 그이를 추모하는 시를 쓴다는것부터가 아름찬 일이였다. 그래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산의 형상과 <<짝>>을 맞추었고 언어로 산을 그리였다. 11줄로 두개의 련을 만든것도 그이의 한생은 누구와도 비길수 없는 홀로의 위대한 일생을 살으셨다는 감격을 표현하려는데 기인되였다. 11줄의 두개의 련은 산우의 산이다. 산우의 산은 높은 산이다. 김학철은 산우의 산 즉 일상적인 세태를 떠난 높은 산이다. 이런 추앙의 뜻을 기리느라고 산우의 산이라는 형태이미지를 직조하였다.</div><div>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평시조를 3행으로 썼는데 지금 시인들은 3행으로 쓰는것이 매우 드물다. 정형적인 3행시조형식을 파괴하여 2행 2행 3행으로 련을 구성하기고 하고 초장 1행, 중장 2행, 종장 3행으로 련을 구성하기도 하고 열두행으로 주르르 늘여쓰기도 한다. 시인이 시조의 모양을 자주 고치는것은, 형태이미지를 새롭게 만들어 시의 신선함을 기하기 위한 의식적인 작업이라겠다.</div><div></div><div>제2절 사물이미지</div><div></div><div> 시를 분류할 때 사물을 표현한 시와 관념을 표현한 시로 나누는 경향이 일반화되여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물이미지란 사물을 쓴 시이다. 그런데 그 이미지에는 개념이 개입되지 않는경우라고 해야 할것같다. 순수하게 사물만을 노래한 시이다.</div><div> 어떤 사물을 노래한다고 하여 그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쓰는 사물이미지가 아니다. <<짝>>을 맞추어 변형시켜야 한다. 변형을 통하지 않으면 새로운 이미지가 탄생되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지는 창조적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필자가 말하는 이미지에는 언제나 <<창조적>>이란 규정어가 붙은것을 말한다.</div><div> <<현대시구조>>에서 후고 프리드리히(독일)는 스페인 시인 살리나스의 이런 말을 절록한다. <<순수시의 전제조건은 시가 가능한 한 사물과 테마로부터 벗어나는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서야 비로소 언어의 창조적운동이 자유로운 공간을 가지기때문이다.>></div><div> 순수시란 사물이미지로 구성된 사물시쪽이고 관념이미지로 구성된 관념시는 이데올레기쪽이라고 알면 될것 같다.</div><div> 살리나스의 말은 사물이미지가 창조되려면 가능한 그 사물이나 테마에서 벗어난 상상을 해보아야 한다는것이다. 가령 나무라는 시를 쓸 때 나무는 땅에 뿌리 박고줄기가 있고 가지를 뻗치고 숱한 푸른 잎들을 키운다고 하면 설명이지 시적이미지는, 사물이미지는 못된다는것이겠다. 왜냐하면 이런 문장은 언어로 그린 그림의 일종이라고 부를수있겠는지는 모르지만 창조적상상으로 그려진것이 아니며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쓴것에 지나지 않기때문이다.</div><div> 사물의 새로운 이미지를 발굴하는 방법을 가리킬 때 문덕수는 19세기 영국의 코울리지 말을 례로 든다. 그 말인즉 <<서로 반대되거나 또 불일치한 성질들을 균형하거나 타협시키는 힘>>을 써야 한다고. 그 힘이란 바로 상상이라겠다.</div><div></div><div> 은빛 그리고 구리빛 마차들</div><div>강철의 그리고 은빛의 배머리</div><div>거품을 때리고</div><div>가시덤불들의 그루터기를 일으켜세운다</div><div>황야의 강들</div><div>그리고 거대한 썰물의 궤적이</div><div>선회하면서 동쪽을 향하여</div><div>숲의 기둥을 향하여</div><div>부두의 방파제를 향하여 줄지어간다</div><div>그 모서리에 빛의 소용돌이가 부딪친다</div><div> -랭보<<바다>>전문</div><div>언어는</div><div>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div><div>된다</div><div>언어는</div><div>소리와 뜻이 찢긴 기발처럼</div><div>펄럭이다가</div><div>쓰러진다.</div><div>꽃의 둘레에서</div><div>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div><div>불꽃처럼 타다가</div><div>껴져도</div><div>어떤 언어는</div><div>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div><div>된다</div><div> -문덕수 <<꽃과 언어>>전</div><div>푸른 잔디를 뚫고 서있는</div><div>체조장시계탑우에</div><div>파란 기폭이 바람에 부서진다</div><div>무거운 지팽이로 흰구름 헤치고</div><div>교회당 기울어진 언덕을 걸어가노라면</div><div>밝은 해빛은 화분인양 나려퍼붓고</div><div>거리는 함박꽃같이 숨을 죽였다</div><div> -김광균 <<가로수(1)>></div> 상기한 세편의 시는 모두 순 사물만 쓴 사물이미지이다. 세수가 다 사물과 사물을 <<짝>>을 맞추어주면서 <<균형과 타협>>을 이룩하고 있다. 어떤 개념과 주장도 드러내지 않고 사물만 노래하고 있다.<div> 랭보는 바다에 가보지 못하고 이 시를 썼다고 한다. 그의 상상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바다>>만으로도 알고 남음이 있겠다. 그는 <<바다>>에서 <<은빛 그리고 구리빛 마차들>> <<가시덤불들의 그루터기들>> <<숲의 기둥>> <<빛의 소용돌이>>등 언어를 창출하여 바다와 바다의 파도를 표현하고 있다. 기이하고 생생한 언어구사를 새로운 창조라고 아니할수 없다.</div><div> 문덕수는 <<꽃과 언어>>라는 짧은 시에서 언어를 <<나비>>, <<기발>>, <<밀물>>, <<불꽃>>, <<꿀벌>> 등으로 연해연방 변형시키면서 시를 끌고나간다. 일상적인 눈길이라면 아무런 련관성이 없는 이러한 사물들로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재구성해 낼수 없을 것이다. 어느 이미지도 낡투가 나거나 고로한 냄새가 전혀 없다.</div><div> 김광균의 <<가로수(1)>>도 읽을수록 멋이 돋는다. 가로수를 <<파란 기폭>>으로 이동시켰고 또 다시 <<흰 구름을 헤치는>> <<무거운 지팽이>>로 이동시키면서 이미지의 신선함을 추호도 죽이지 않고있다. <<화분>>같은 <<해빛>>, <<함박꽃>>같은 <<거리정적>>도 직설적이기는 하지만 사유의 독특성으로 이채를 뿌린다고 하겠다.</div><div> 세수의 시는 모두 특정된 사물의 한계를 뛰여넘어 새로운 사물과의 <<짝>>을 이룸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내는 공동성을 갖고있으며 그 어떠한 개념도 개입되지 않고 순수하게 사물이미지만으로 직조되여있다. 그리하여 원래의 사물인 <<바다>>, <<꽃>>, <<언어>>, <<가로수>>들은 원래의 의미보다 다른 새로운 의미로 확충되여 나가고있다. 원 사물들뿐만이 아니라 시인이나 독자도 새로운 에네르기를 주입받고있다고 하겠다.</div><div> 연변의 녀류시인 심예란씨가 사물이미지를 어떻게 쓰고있는가를 보자</div><div></div><div>가을.2</div><div>심예란</div><div></div><div>가을은 </div><div>어룽어룽한 범가죽</div><div></div><div>산이 들쓰고 으르렁</div><div>들이 들쓰고 으르렁</div><div></div><div>찬 바람이 락엽화살로</div><div>범가죽을 벗긴다</div><div></div><div>예란시인은 가을을 쓰느라고 하지만 실제 등장시킨 사물은 가을이 아니고 범가죽이다. 가을에 단풍든 산야를 보고 범가죽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떠올리고있다. 여섯줄의 시에는 개념이라고는 보이지 않을뿐만 아니라 시에다 시인의 어떤 의도를 부여하려는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사물의 운동만이 보인다. 이렇게 사물만을 떠올리며 이미지를 짜나가는 시가 사물이미지이다. 우리는 이 시를 보고 가을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맛보게 된다.</div><div></div><div>제3절 관념이미지</div><div></div><div> 사물이미지는 사물을 노래한 시이고 관념이미지는 의지를 노래한 시이다.</div><div> 관념이미지는 추상적인 관념에 기대여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 관념을 시로써 표현한다. 사랑, 고독, 리상, 그리움 하면 우리는 이런 언어들의 색깔도 볼수 없고 소리도 들을수 없고 모양도 볼수 없다. 또 살아가노라면, 더욱이는 시를 쓰노라면 이따금 새로운 사물적이미지가 아니고 추상적인 깨침이 올 때도 있다. 령감이라 하여도 좋을것이다. 이런 추상적인 깨침을 그대로 써놓으면 시가 안 된다. 그것을 이미지로 재구성해 놓아야 시가 되는것이다.</div><div> 사랑, 고독, 리상, 그리움같은것들은 시의 영원한 주제로서 많은 시인들이 가작을 써낸 텍스트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이러한 주제는 시인의 붓끝에서 다루어질것이며 새로운 가작들이 태여날것이다. 고리는 어떻게 쓰느냐이다. 길은 오직 한길- 상상의 날개를 훨훨 저어서 새로운 이미지를 짜놓아야 할것으로 알고있다. 이 짠다는 말은 물수건의 물을 짠다는 의미가 아니라 천과 같은것을 짠다는 의미이겠다.</div><div> 스페인 시인 로르까는 관념이미지로 세계의 명시를 썼다.</div><div></div><div>절규의 타원은</div><div>산에서</div><div>산으로 간다네</div><div>올리브밭에서</div><div>푸른 밤중에 일어서는</div><div>어두운 무지개 됐네</div><div>아아!</div><div>비오라이 현인듯</div><div>절규는 긴 바람줄을</div><div>울게 하였네</div><div>아아!</div><div>(굴속의 사람들이 등불을 드러내보이네)</div><div>아아!</div><div> -<<절규>>전문</div><div> 후고。프리드리히가 <<익명성령역의 거장>>이라고 명명한 로르까의 <<절규>>는 현대시사에서 한자리를 온건하게 차지하고 있는 가편이라겠다. 천재적인 시인 로르까는 <<절규>>를 천재적으로 변형시키고있다. 그는 <<절규>>를 <<타원>>으로 변형시켰다가 또 다시 <<무지개>>로 변형시키고 재다시 바이올린밭(비올라이밭)으로 변형시킨다. 세차례의 변형으로 시를 짜내려가면서 사람대신 동굴속의 불빛만 보이면서 현대시의 거대한 령역인 익명화의 대가적본질을 드러낸다. 추상적인 사물을 물화하여 구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는것은 현대시의 주요한 수법의 하나라고 하겠다.</div><div> 우리는 어떤때 령감이 뇌리를 치는 경우를 만나게 된다. 그 령감이 사물적이미지로 와닿는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느낌으로 와닿을 때가 많다. 버리기는 아깝고 쓰자니 깡깡 마른 언어의 느낌일뿐이다. 무조건 구체적인 형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함은 당연한 도리이다. 김현승의 <<절대의 신앙>>이 하나의 보기로 될것같다.</div><div>당신의 불꽃속으로</div><div>나의 눈송이가</div><div>뛰여듭니다</div><div>당신의 불꽃은</div><div>나의 눈송이를</div><div>자취도 없이 품어줍니다</div><div> -<<절대의 신앙>>전문</div><div> 시는 여섯줄 두개련으로 마무리되여있다. 절대자에 대한 믿음과 바람을 표현한 관념이미지라 하겠다.</div><div> 이 시에 대하여 문덕수는 <<오늘의 시작법>>에서 해석을 달고 있다.</div><div> <<이미지에 대한 사상적추구가 더욱 치렬한 모습을 보여주는같다. 단지 <불꽃>과 <눈송이> 련결이지만 <불꽃>은 신의 뜨거운 사랑을 <눈송이>는 믿음이 식은 약한 신앙을 상징하고있다. <불꽃>과 <눈송이>라는 대립이미지가 종교적상징을 내게 되기까지는 그것이 비록 직관적으로 이루어졌다하더라도 이 시인의 신앙적체험이 밑받침되여 있는것이다.>></div><div> 우리가 마땅히 류의해야 할 점은 절대신앙이라는 이 추상적명제를 한마디 추상적언어사용도 없이, 론리적인 풀이도 없이, 개념적인 해석도 없이 <<불꽃>>과 <<눈송이>>라는 두 사물의 물질운동으로 표현했다는데 있다. 실은 론리적인 개념이지만 론리적역설로 표현한것이 아니라 이미지로 예술화한 것이다.</div><div></div><div>장미여, 너의 빛깔은 슬픔이다</div><div>모발은 떨린다</div><div>청명한 정오에 미풍에 일렁인다</div><div>별의 고리가 바람에 떨린다</div><div>나의 마음도 보이지 않는 별과 함께 떨린다</div><div></div><div> 이 시는 일본의 니시자키준자부로가 쓴 <<슬픈 노래>>의 앞부분이다. 제목은 <<슬픈 노래>>지만 준자부로는 <<슬픔>>을 <<장미>>와 <<별의 고리>>의 움직임으로 대용하고있다. 관념을 물질화한것이며 관념을 관념으로 해석한것이 아니라 장미와 별이라는 사물로 해석하고있다. 관념적인것을 사물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관념이미지라겠다. 화학반응에서 볼수있는 이런 치환적인 방법은 추상을 구상화함으로써 형상이 화면처럼 눈앞에 떠오르게 한다.</div><div></div><div>마음이 문이 열린다</div><div>그러면 난</div><div>마음이 눈 뜨고</div><div>마음의 귀 열고</div><div>마음의 길을 간다</div><div>......</div><div>오늘밤 난 또 장님처럼</div><div>아름다운 세상을 볼수있겠지</div><div>아름다운 이야기 들을수 있겠지</div><div>그리고 별들의 목메이는 향기</div><div>맡을수 있겠지</div><div><br></div> 리성비씨가 관념적인 제목 <<명상>>이다. 시인은 명상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상적인 사물의 운동 즉 이미지로 표현하고있다. 추상어 <<마음>>과 <<문>>, <<눈>>, <<귀>>, <<길>> 등등의 구상어들이 조합되면서 명상이라는 개념을 이미지로 펼쳐보이고있다.<div> 관념이미지는 추상의 구상화에 의하여 산생된다. 이 이미지는 일상적인 론리나 개념으로 해석되는것이 아니고 습관적인 눈길로 보아내는것이 아니다. 오직 예술의 방법, 시적인 방법으로써만이 해석이 가능하리라 믿는다.</div><div> 관념이미지로 씌여진 시는 이데올로기 시쪽으로 나아가게 되고 사물이미지로 씌여진 시는 무의미시쪽으로 나가가 된다고 말하는 시인이나 비평가들이 많다. 전자는 밝아놓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하고 후자는 언어장난을 금하기에 류의해야 한다.</div><div></div><div>제4절 복합이미지</div><div></div><div> 사물이미지와 관념이미지에 대하여 어설프게나마 살펴보았다. 이제 이미지의 마지막 류형 복합이미지에 대하여 보기로 하자.</div><div> 현대시에는 사물이미지만으로 구성된 시가 있고 관념이미지로 구성된 시가 있는가 하면 이미지와 관념이 혹은 관념과 이미지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여있는 시도 있다. 이러한 이미지를 나름대로 복합이미지라고 지칭해본다. 복합이미지는 개념화된 시구와 이미지화된 시구가 호상 결합되여 이루어진 경우라 하겠다. 이런 이미지는 친절감이 들면서도 상징이나 은유의 빛깔로 하여 음미할 가치도 곁들어있다고 볼수있다.</div><div> 릴케의 <<가을날>>이란 시 한수를 보자</div><div></div><div>주여, 때입니다</div><div>여름에는 참으로 위대했습니다</div><div>해시계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div><div>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div><div>마지막 과실에 결실을 명하십시오</div><div>열매위에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div><div>그들을 완성시켜 주시고 마지막 단맛이</div><div>짙은 포도송이속에 스미게 하십시오</div><div>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div><div>지금 고독한 사람은 계속 고독하게 살것입니다</div><div>잠을 자지 않고 책을 읽지 않고</div><div>긴 편지를 쓰고</div><div>그리하여 락엽이 뒹구는 가로수길을</div><div>불안스러이 이리저리 헤매일것입니다.</div><div></div><div> 이 시에서 1련은 첫 두행은 관념, 3,4행은 이미지로 구성되였고 2련은 첫행은 관념, 두번째행은 이미지, 세 번째행은 관념, 네 번째행은 이미지로 구성되였고, 3련에서는 관념과 이미지가 교차적으로 혼용되고있다.</div><div></div><div>바다가 륙지로 되지 않는 까닭은</div><div>쉽게 사랑하고</div><div>쉽게 리별하고</div><div>그리움을 망각해 가고있는</div><div>무리들이 늘고있기 때문이다</div><div></div><div>바다가 륙지로 되지 않는 까닭은</div><div>섬마을 아이가</div><div>크레용으로 매일매일 그려가는</div><div>빨간 일력이 유난히</div><div>유난히 아름답기 때문이다</div><div></div><div>바다가 륙지로 되지 않는 까닭은</div><div>매일 꽃을 보고도 얼굴 붉힐줄 모르고</div><div>새벽의 맑은 공기를 활보하며</div><div>목마름이란 단어를 점점 잊어가기 때문이다</div><div></div><div>바다가 륙지로 되지 않는 것은</div><div>그리움이 그리움으로 피게 하고</div><div>아름다움이 아름다움으로 되게 하고</div><div>아픔이 아픔으로 되게 하고</div><div>기다림이 기다림으로 되게 하고싶기 때문이다。</div><div></div><div> 시인 리임원씨가 쓴 <<바다가 륙지로 되지 않는 까닭은>> 전문이다. 전형적인 복합이미지시라겠다. 제목부터가 관념으로 시작된다. 첫련과 마지막은 관념으로 서로 조응시켰고 가운데의 2,3련의 첫줄은 관념으로 시작하면서 시인의 고견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2, 3련의 내용이 아름다운 이미지로 구성되여 전형적인 복합이미지시를 이룩하고있다고 하겠다.</div><div> 북방문단의 로시인이라고 불리우는 리삼월시인이 사물이미지와 관념을 어떻게 결합시켰는가를 살펴보자.</div><div></div><div>나비.1</div><div></div><div>락엽이 한벌 깔려서</div><div>해빛 밝아진 땅에</div><div>노랑나비 한 마리 떨어지다</div><div></div><div>림종의 저린 경련에</div><div>몸을 떨지 않았던들</div><div>나비와 락엽을 분별할수 없는</div><div>노란색 나비 한 마리</div><div></div><div>안타까운 굼벵이의 허울을 벗고</div><div>몸을 곱게 치장하느라 들인</div><div>그간의 공력에 비기면</div><div>너무나 짧은 노랑나비의 한생</div><div></div><div>당금 저승길에 오르면서도</div><div>삶의 미련을 잊을수 없어</div><div>노랑나비는 마감 한번</div><div>보호색속에 몸을 숨긴다</div><div></div><div>꽃이 간 길을 밟고 가는</div><div>노랑나비 림종은</div><div>이렇듯 아름답고 슬프다.</div> 이 시에서 3련의 처음으로부터의 석줄과 4련의 첫두줄과 제일 마지막줄은 이미지인것이 안니라 관념이다. 그리하여 이 시는 복합이미지시에 속하는 경우라 하겠다. 시인은 나비의 아름다운 일생을 노래하면서 나비의 언어를 파보고있다.<div> 관념과 사물이미지가 어떤 경우에 어떻게 결합되여 복합이미지를 이루는가에 대답은 시를 쓰는 때의 시인의 나름에 관계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인의 몫이다. 시인이 어떻게 쓰고싶으면 어떻게 쓰면 된다. 사상성과 감각성이 결합된 이러한 시는 서로 보충하면서 정확한 효용을 리드하고있는것이라겠다. 복합이미지 시를 쓸 때 이미지도 새롭게 써야 하거니와 관념도 새로운것을 쓰기에 류의하여야 한다. 남들이 다 알고있는 관념을 쓰면 시가 고루하게 되면서 시의 낡투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div><div> 이로써 이미지의 네가지 류형을 살펴보았다. 어떤 류형의 시를 쓰든 중요한것은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것이다. 비슷하거나 남을 따라가는 아류풍의 이미지가 아니라 시 쓰는 시인의 내면을 파헤치면서 창출해낸 이미지, 이러한 이미지만이 시인을 시인이라 부르게 할 것이다.</div> 제5장 이미지의 특성<div></div><div> 세상에 천차만별의 사물들이 존재하고있는것은 사물마다 각각 자기의 특성이 있기때문이다. 이미지도 존재하므로 자기의 특성이 있기마련이다. 이미지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돌이나 나무와 같은 실물인것이 아니라 상상속에 존재하는 비실재적인 사물을 언어로 그려놓은 그림인것이다. 이 언어의 회화는 현실에 대한 파괴속에서 생겨나는 상상의 산물로서 그의 특성을 한마디로 규납하면 불협화 혹은 낯설기라고 할수있다. <<시는 친숙한 것을 고의적으로 낯설게 만들며 가까이 있는것을 먼곳으로 가져간다.>>(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그리하여 이미지는 사물을 떠나고, 관념을 떠나고, 인간을 떠나고, 언어를 떠나고, 현실을 떠나는 작업을 하고 문체도 때로는 파편문체라는 새로운 문체를 요구하기도 하기때문에 기성의 사상관념, 문체, 및 론리로서는 이미지시를 해석하기 어렵다.</div><div> 아래에 구체적으로 살펴본다.</div><div></div><div> 제1절 이미지가 사물을 떠난다.</div><div></div><div> 시인은 어떤 사물이나 관념에서 무엇인가를 느끼고 시를 쓰기마련이다. 하지만 시인은 <<사물을 보인 그대로,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보지 말고, 이렇게도 볼수있지 않을가하는 시각으로, 보이는 대로에서 있을수있는 사실로, 그리고 새로운 사실로 볼줄 아는 특수한 시력>>으로 보아야 한다고 박진환은 <<현대시를 이렇게 쓰자>>에서 밝히고있다. 요약해보면 원물을 그대로 쓰는가 아니면 변형시켜 새로운 사실로 쓰는가이다. 새로운 사실로 쓰는것이 이미지이며 현대시이다. 새로운 사실로 쓰면 당연히 원물을 떠나게 되는데 소위 사물을 떠난다는 함의가 여기에 있겠다.</div><div> 우리가 바위우의 소나무를 시로 쓴다고 하자. 그 소나무를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쓰는것이 아니라 그 소나무로부터 상상하여 낸 새로운 사실을 써야 한다는것이겠다. 새로운 사실을 상상해 낸다는것은 변형을 시킨다는것이고 변형시켜 얻은 사실이 바로 새로운 사실이라겠다. 이 새로운 사실은 소나무가 아닌 다른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사물을 떠난다는 론리가 서는것이다. 시를 쓸 때 사물-관찰-변형의 길을 걷게 되는데 시를 쓴다는 것은 변형으로 얻은 새로운 사물을 쓴다는 말이다. 새로운 사실이나 새로운 사물은 익숙한 것이 아니라 낯선것이다. 이 낯선것이야말로 시인이 창출해낸 이미지이다. 후고 프리드리히는 <<현대시는 그것들(사물이나 인간)을 익숙하지 않는곳으로 데리고 가서 낯설게 만들며 변형>>시키는 작업이라고 한바있다.</div><div> 백문불여일견이라고 한번 보기로 하자</div><div></div><div>작은 섬주위에</div><div>텅 빈 배가 서로 머리를 대고 있다</div><div>그리고 이제는</div><div>일요일이든 평일이든</div><div>화가도 모파상도 산보하러 오지 않는다</div><div>앞가슴이 불룩한 바보같은 여자와 함께</div><div>두팔을 걷어부치고 배를 타러오지 않는다</div><div>작은 배여</div><div>이 섬가에서 너는 나를 슬프게 한다</div><div></div><div>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가 쓴 <<개구리>> 전문이다. 보는바와 같이 제목은 <<개구리>>지만 시에서는 개구리라는 언어도 없고 그런 뜻도 전혀 나타나지 않고있다. <<개구리>>는 밀려나고 대신 <<텅 빈 배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있다>> <<화가>>도, <<모파상>>도, <<바보같은 녀자>>도, <<두 팔을 걷어부친>>남자도 오지 않고 작은 <<배>>가 <<작은 섬>>에 쓸쓸히 있으며 <<나를 슬프게 한다>>.</div><div> 망망한 바다, 작은 섬, 섬가에 놓인 쪽배 두개 이렇게 상상해보면 섬과 쪽배가 한마리의 개구리, 두다리를 벌리고있는 개구리를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개구리>>라는 제목을 달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개구리>>와 시적내용은 다른것으로 되여 시가 사물을 떠나고있음은 분명해졌다고 하겠다. 우리는 또 아무도 오지 않는 이런 환경에 홀로 서있는 <<나>>, 고독한 <<나>>를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는 고독을 이미지화것이라 해도 너무 틀린다고는 할수 없으리라. 현대시가 사물을 떠난다는 의미는 시인은 시적대상을 정면으로 노래하는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서 받은 느낌을 다른 사물이나 사실로써 노래한다는것을 알수있겠다.</div><div> 일본의 무라노시로오의 시 <<체조>>를 다시 보자</div><div></div><div>나에겐 사랑이 없다</div><div>나에겐 권력이 없다.</div><div>흰 셔츠속의것이다</div><div>나는 해체하고 구성한다</div><div>지평선에 와서 나하고 교제한다</div><div>나는 주위를 무시한다</div><div>하지만 외계는 정렬한다</div><div>내 목통은 피리</div><div>내 명령은 소리다</div><div>나는 보드라운 신바닥을 젖혀</div><div>심호흡을 한다</div><div>이때</div><div>내 형상에 꽂혀지는 한송이 장미</div><div></div><div> 시적대상은 <<체조>>이지만 시의 내용은 무엇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체조란 몸과 팔다리를 흔들어대는것인데 시에는 구런 의미의 언어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 동장하였다면 <<흰 셔츠속의것이다>>와 <<보도라운 신바닥을 젖혀>>이다. <<흰 셔츠속의것>>은 몸을 가리킬것이고 <<신바닥>>은 발을 가리킬것이지만 애매하다. 더구나 <<신바닥을 젖혀 심호흡을 한다>>하니 발로 호흡한다는 표현이 되고있다. 복합이미지로 구성된 <<체조>>는 <<체조>>와는 일만팔천리나 떨어진 형상을 구축하고있다.</div><div> 무슨 의미인가? <<체조>>가 결국은 <<내 형상에 꽂혀지는 한송이 장미>>이다. <<체조>>와 <<한송이 장미>>를 어떠한 해석을 붙이면 명료해질가? 그것은 독자나름의 해석을 따르는수밖에 없을것이다. 여러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있는것이 이미지시의 기능의 하나라고 할수있다. <<체조>>는 바로 이런 기능을 향유하고있다하겠다. 한편의 시가 무슨 뜻인가를 똑똑히 나타내던 시대는 랑만주의시의 결속과 함께 종지부를 찍었다. <<해체하고>> <<구성하고>> <<지평선>>과 <<교제하고>> <<신바닥을 젖혀 심호흡>>을 한후에 <<한송이 장미>>로 태어난 이 성과물은 내함이 다채롭고 풍만한것이여서 한마디로 규정짓는다는것은 무리이며 불가능한것이라겠다.</div><div> 이번에 한춘섭의 시조 한수를 보자</div><div></div><div>초이틀 서산마루</div><div>고운 이 은장도</div><div>봉긋한 젖가슴이</div><div>사려비칠 별빛같다</div><div>돌담에</div><div>들고난 물동이</div><div>희디흰 박꽃미소</div><div>떠난 사람 예전 일을</div><div>숯불 피고 보라한다</div><div>들길로 걸어가면</div><div>묏새알 잠들고야</div><div>촉촉한</div><div>천지 떠난채</div><div>잠이 들가 재촉하네</div> <<한 평생 단 한번만이라도 훌륭한 이미지>>를 만들어보리라는 야심을 품고 데뷔 35년만에 펴낸 시조시집 <<적>>에 실린 첫수 <<초승달>>이다.<div> 시조의 전편에 <<초승달>>>에 대한 직접적진술이 한마디도 없다. 있다면 <<초이틀 서산마루>>이다. 오라지 않아 천지간에서 사라질 <<초승달>>은 상징적의미로 쓰인것이다. <<초승달>>은 변형되여 <<은장도>>로 나타난다. 초장에서 나타났던 <<은장도>>는 중장에서 <<별빛같은>> <<봉긋한 젖가슴>>에 밀려난다. 종장에서 이 <<젖가슴>>은 <<물동이>>와 <<박꽃미소>>에 의하여 또 밀려난다. <<초승달>>은 연시조인데 두번째 시조의 초장은 <<떠난 사람 예전 일을 숯불 피고 보라한다>>고 쓰고있다. <<숯불>>에 의하여 <<물동이>>도 <<박꽃미소>>도 다 밀려난다. 중장에서 또 새로운 사물들에 잠든 <<묏새알>>이 나타난다. <<숯불>>빛에 의해 현현된것은 잠든 <<묏새알>>이다. 시인은 최후의 종장에서 <<잠이 들가 재촉하네>>로 끝을 맺는다. 왜 잠들지 말라는건가. 들의 <<묏새알>>이 묏새로 깨여나 자연속으로 날아가야 할 일이 아직도 남았기때문이라고 할수있다. 이 일의 몫은 <<초승달>>한테 있는 같다. <<촉촉한 천지>>이니 이슬이 내리는 새벽으로 시간이 흐르고있다. <<초승달>>이 <<묏새알>>을 새로 만들수있겠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초승달>>은 60고개에 오른 시인일지도 모른다. 전반 연시조가 파편문체로 되여있어 시인 자신이 아니고서는 철저한 리해 가능성이 배제되고있다. 우리는 상태와 기분만을 수용하여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한 인간이 걸어온 길은 빛나는 자국이였건만 아직도 할 일이 많아 자신을 채찍질하고있는 모습을 보는것쯤으로 받아들이면 어떠할가하는 사려를 굴려본다.</div><div></div><div>내 귀가에 얼음처럼 매달린</div><div>아버지 말소리를 뚝 따서</div><div>손바닥에 놓으면</div><div>숯처럼 검은 침묵이 된다</div><div>그것을 뜨겁도록 꽉 움켜쥐면</div><div>손가락새로 막 흘러나오는</div><div>피처럼 붉은 불길이 된다</div><div> </div><div> 최룡국씨의 시 <<아버지 말소리 >> 전문이다. 아버지 말소리는 아름답거나, 퉁명스럽거나, 귀청을 다치는 어떤 소리인것이 아니라 소리라는 사실을 떠나서 고드름이 되고 숯이 되고 붉은 불길이된다.시인이 쓰려는 사물을 떠나서 다른 사물로 표현된 이미지라겠다.</div><div> 이미지시인은 일상적인 개념이나 관념으로 말하는것이 아니라 이미지로 말한다. 이는 현대시의 근본이다. 시인은 시적대상을 잡은후 그 사물의 형상이나 의미를 떠나서 새로운 건축작업을 한다. 시인의 지적인 통제하에서 완성되는 이 건물은 시인이 홀로 기초를 파고 벽돌을 쌓고 지붕을 만들고 타일을 붙이게 된다. 이 건물은 력사에도 없었고 현실에도 없었던 시인만의 궁전이다. 타인이 이 궁전속으로 들어가자면 출입구문을 찾아야 하고 문열쇠를 지녀야 한다. 그 열쇠를 누가 만들어주는것이 아니다. 독자 본인이 벼려서만들 일이다.</div><div></div><div>제2절 이미지가 관념을 떠난다</div><div></div><div> 이미지가 시적대상인 사물을 떠난다는것을 살펴보았다. 이제 관념을 떠나야 한다는 명제를 살펴보자. 사물을 떠난다는것도 어찌보면 관념을 떠난다는 하나의 류형으로 볼수있겠다. 관념이란 무엇인가? 한 사물에 대한 판단이며 견해이다. 관념은 감각적인것이 아니라 리성적인 것이다.</div><div> <<현대시는 종래 의미의 인간성, 체험, 감상 그리고 심지어 시인의 개인적 자아마저도 도외시해 버린다>>고 후고 . 프리드리히는 밝히였다. <<종래의 의미, 인간성, 체험, 감상>> 및 <<개인적자아>>까지 버리면 무엇이 남는가? 남는것이 없다. 이 남는것이 없는 빈터에서 사물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가 산생되고 새로운 인간성, 체험, 감상이 산생되고, 새로운 자아가 산생된다. 이런 새로운것들은 시인의 상상을 통한 재구성속에서 이루어지게 된다.</div><div> 시를 보면 관념을 떠난다는 명제가 명확해지리라.</div><div></div><div> 밀턴은 우리를 위해 지옥의 문을 열어</div><div> 우리로 하여금 보게 했다</div><div> 단테도 동일한 일을 하였다</div><div> 이 두 지옥은 각각 특징이 있었으며</div><div> 하나는 밀턴의 지옥이며 또 하나는 단테의 지옥이였다</div><div> 밀턴은 지상에 있는 지옥에 모든 것을 넣어두었으며</div><div> 단테도 자기를 위해 지상에 있는 지옥에 모든것을 넣어두었다</div><div> 당신이 나를 위해 당신의 자물쇠를 연다면</div><div> 나도 당신을 위해 나의 지옥의 자물쇠를 열어놓겠소</div><div> 그러면 그 두지옥은 특징이 있지요</div><div> 우리들 각자는 지상에 있는 지옥을 우리를 위해 보이겠지요</div><div> 당신의 지옥과 나의 지옥은 각각 다른것이지요</div><div></div><div> 미국의 샌드버그 <<우리의 지옥>>의 전문이다. 우선 여기에 관계되는 세 인물이 어떤 사람들인가 보기로 하자. <<세계의 명시집>>을 펴낸 김희보는 이 세 인물을 이렇게 소개한다. 샌드버그는 <<산업국 미국현실에도 비로소 완전한 표현을 부여하였다고 일컬어지는 가장 미국적인>> 시인으로서 <<세계명시집시리즈 69권>>에 <<우리의 지옥>>이 실렸다고 소개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세계가 알아주는 샌드버그라겠다. 단테나 밀턴은 우리도 조금은 안다. 14세기 이태리시인 단테, <<신곡>>을 써서 세계 4대시성의 한 사람으로 된 단테. 17세기 영국시인 밀턴, <<실락원>>이라는 세계명작을 쓴 밀턴, 위대한 시인.</div><div> 샌드버그는 <<지옥>>이라는 무서운 언어로 단테와 밀턴을 론하고 당신과 나도 이런 <<지옥>>이 있다면서 <<열쇠>>이야기를 한다.</div><div> 지옥이란 불교의 언어로서 중생들이 살아서 죄를 지면 죽은다음 땅속에 들어가 형벌을 받는다는 곳이 지옥이다. 단테, 밀턴, 당신, 그리고 내가 지상에다 이런 지옥을 세우고 <<모든 것을 넣어두었다>>는것이다. <<지옥>>이란 원관념이 변했다. 땅속의 지옥이 아니라 땅우의 <<지옥>>이다. 형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모든 것을 넣은 >> 창고이다. 이 <<지옥>>은 보여주는 <<지옥>>이지 중생의 죄를 다스리는 지옥이 아니다. 단테의 <<지옥>>에는 <<신곡>>이 있을것이고, 밀턴의 <<지옥>>에는 <<실락원>>이 있을것이고, 샌드버그의 <<지옥>>에는 그가 쓴 세계의 명시가 있을것이다. 이러한 <<지옥>>도 <<지옥>>인가? 아니다! 인류의 찬란한 문화가 있는 보물고라고 함이 적당할것 같다. 샌드버그의 <<지옥>>은 반어적, 상징적 의미로 쓰였다함이 옳을 같다. <<지옥>>이란 관념을 떠났다. <<지옥>>이 관념을 떠났으니 <<열쇠>>도 잇따라 관념을 떠나게 되어있음은 자명하겠다. 샌드버그가 단테와 밀턴에게 <<지옥>>이라는 언어를 쓸수있은것은 <<신곡>>이나 <<실락원>>이 당시에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근거를 찾을수있을것이다. 사실 현대에도 아무나 읽어서 리해할수있는 책이 아니다. 그래서 <<지옥>>이라는 관념을 쓰지 않았을가 궁리해본다. 이 <<지옥>>으로는 중생의 죄인을 가둘수 없고 이 <<열쇠>>로는 어떠한 자물쇠도 열수 없다. <<지옥>>과 <<열쇠>>는 우리의 관념을 떠난 상상물이며 허상이다.</div><div> 헤세의 시 <<사랑의 노래>>를 보자</div><div></div><div>나는 사슴 당신은 노루</div><div>당신은 새 나는 나무</div><div>당신은 태양 나는 눈</div><div>당신은 대낮이요 나는 꿈이로다</div><div>한밤에 잠든 나의 입에서</div><div>황금새 한 마리가 당신에게 날아간다</div><div>티 없이 맑은 새소리, 화려한 날개</div><div>당신을 위하여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div><div>당신을 위하여 나의 노래부른다</div> 독일의 문호 헤세는 소설, 시, 수필, 평론, 우화 등 여러가지 쟝르의 문학을 다루어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현대작가이다.<div> 시의 첫련은 은유의 숲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사슴>>도 되고, <<나무>>도 되고, <<눈>>도 되고, <<꿈>>도 된다. <<당신>>은 <<노루>>도 되고, <<새>>도 되고, <<태양>>도 되고 <<대낮>>도 된다. 서로 <<짝을 맞추는>> 일이 한번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네번씩이나 변하여간다. <<나>>는 <<사슴>>으로 변하였다가 <<나무>>로 변하고, 또 <<눈>>으로 변하였다가 <<꿈>>으로 변한다. <<당신>>도 <<나>>처럼 련줄련줄 변한다. 결국 등장하는 두 인물인 <<나>>는 내가 아니고 <<당신>>은 당신이 아니다. 나와 당신이란 원관념을 떠난 <<나>>와 <<당신>>이다. 이런 <<나>>와 <<당신>>은 객관존재로서의 실상인것이 아니라 추상적존재로서의 허상이다. 모두 우리 관념밖의 인물이며 존재인것이다. 량자가 된다는 <<사슴>>, <<노루>>, <<새>>, <<나무>>, <<태양>>, <<눈>>, <<대낮>>, <<꿈>>들도 원관념을 떠난 상상속의 사물이지 실재적인 사물이 아니다. 모두 원관념을 떠났다. 이러한 사물들은 시적언어로 되는 순간에 자기의 의미를 버리고 새로운 상징적언어로 등용되여 시의 재료로 될뿐이다. 즉 새로운 관념으로 우리앞에 나타난다.</div><div> 2련은 더욱 신비스럽다. 1련에서 <<당신>>을 <<새>>라고 하였지만 <<새>>는 <<당신>>에게서 날아 <<나>>에게로 오는 것이 아니라 <<잠든 나의 입에서 황금의 새가 당신에게로 날아간다>>. 날아가서는 <<티 없이 맑은 새소리>>로 <<화려한 날개>>를 푸덕이면서 <<노래를 부른다>>. 론리와 현실을 초월한 이러한 시구들은 실재를 모방하거나 재현한것이 아니라 상상으로 직조한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며 <<당신>>을 사랑하는 <<나>>의 감정적 표현이다. 2련에서 <<황금새>>라는 황홀한 이미지를 떠올려 <<꿈>>에도 그리는 <<당신>>에게 보여주며 열렬한 사랑의 기분을 마련한다. 이 사랑은 누구와 누구의 일대일의 사랑이 아니라 <<사슴>>과 <<노루>>, <<새>>와 <<나무>>, <<태양>>과 <<눈>>과의 사랑이며, <<대낮>>과 <<꿈>>과의 사랑이다. 사랑의 의미가 확충되여 시에서 표현된 사랑은 일상적인 너와 나의 사랑이라는 것과는 완전히 틀리는 사랑이다.</div><div> 한때 우리 시단의 청년시인의 대표라고 불리웠던 석화의 시 <<나의 장례식>>이 관념을 어떻게 떠났는가를 살펴보자</div><div>나는 나를 위해 구슬픈 장송곡을 목메게 부르며</div><div>나는 나의 무덤을 판다</div><div>나는 나의 홁묻은 괭이를 던지고</div><div>나는 나의 안식처 나의 무덤에 드러눕는다</div><div>시커먼 구덩이는 구슬픈 기도 읊조리고</div><div>서리찬 기운은 쓰다듬어 안아준다</div><div>그러면 내가 쌓아놓은 흙더미 내 몸을 묻어주고</div><div>그러면 무덤은 둥그런 무덤이 된다</div><div>그러면 파묻힌 내 몸에서 심장만이 살아</div><div>아, 그러면 심장만이 살아서 싹 터오른다</div><div>심장은 한그루의 나무가 되어 하늘을 찌르며 자란다</div><div>그 나무에선 주렁주렁 새심장들이 가득 열린다</div><div> 석화시인이 쓴 <<나의 장례식>>은 장례식이 아니라 <<나의 행진곡>>이다. 이 시에 씌여진 모든 관념들은 실제적으로 합리한 관념인것이 아니라 반대로 합리성을 떠난 관념들이다. 인간이 자기절로 자기 무덤을 파고 죽어서 무덤을 만들 일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죽은 다음의 심장에서 그무슨 싹이 틀수도 없는 일이요, 심장이 나무가 될 일은 신화에서나 있을 일이요, 나무에 새심장이 주렁진다는것은 더구나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 시는 대단히 훌륭한 가편이다. 모든 일상을 초월한 상상과 관념을 떠난 언어들로 기틀을 잡고 이룩해 놓은 시이기때문이라고 할수있다. 시인은 시속의 <<나>> 자신의 죽음까지 밟으면서 자신의 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분투한 끝에 풍성한 열매를 따내는 눈물겨운 아름다움을 노래하고있다.</div><div> 언어가 원관념을 떠나지 않으면 새로운 이미지가 생성될수 없다는것을 현대시는 재삼 말하게 된다. 이런 도리를 잘 장악하고 능란하게 리용하는것은 이미지리스트의 지혜이다. 이런 지혜가 없는 시인은 결코 현대시에 득달한 시인이라고 말하기 어려우리라.</div><div></div><div>제3절 이미지가 인간을 떠난다.</div><div></div><div> 이미지의 특성의 하나인 관념을 떠난다는것은 따지고 보면 인간을 떠나는 일종 표현이라고 할수있다. 하지만 직접 인간을 떠나는 경향이 이미지특성의 하나로 되겠다. 허구 많은 현대시인들이 인간을 쓰지 않고 직접 사물을 이미지로 만드는것도 인간을 떠나는 표현이겠지만 여기서 살펴보려는것은 직접 인간을 쓰면서도 인간세상에서 인간을 따나게 한다는것이다. 즉 현실적 인간을 시속에서 축출해 버리고 새로운 인간을 내세우는 경향이라겠다. 시인들은 <<시는 감정의 해방이 아니고 감정으로부터 도피>>이며 <<개성적 표현이 아니며 개성으로부터 도피>>라는 엘리어트의 말을 신주처럼 모시고 시를 쓴다. 이미지가 추구하는것은 심정의 지각인것이 아니라 상상력의 지각이다.</div><div> 현대시의 거장 랭보에 대하여 후고.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지적한바있다. <<전하는바에 의하면 랭보는 <나의 우월성은 어떤 한도 가지고있지 않다는데 있다>라고 말한다. 랑만주의시의 느끼는 감정들은 그에게 역겨움을 준다.>></div><div> 랑만주의시는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는 시였다면 현대시는 <<감정으로부터>><<개성으로부터>><<도피>>를 꾀하는 시라겠다. 이미지는 감정의 개입을 억제하여 얼굴을 내밀지 못하게 한다. 현대시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의 하나인 탈인간화를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정의한다.</div><div> <<그것은 자연적인 감정상태를 배제시키고, 인간을 이제 그 가장 낮은 단계로 밀려나게 하며 종래까지는 타당했던 사물과 인간사이의 단계질서를 역전시키고 인간을 가능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시각에서 인간을 기술한다.>></div><div>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상태를 배제시키고>> 인간과 사물과의 타당했던 <<단계질서를 역전시키면>> 인간은 당연히 원래의 위치에서 밀려나고 일상적인 인간이하로 쫓겨나서 희미한 인간으로 전락되게 된다. 시인이 만드는 이미지는 일상적인 인간의 사상, 감정, 관념 등 여러 가지 의식과는 담을 쌓고 새로운 사물, 새로운 사실, 새로운 언어를 제작해내여 비실재적인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다.</div><div><br></div> 내 지극히 사랑하는 녀인은 알몸이였고<div>내 마음을 알기에 오직 요란한</div><div>보석만을 지녀 그 호화로운 노리개로</div><div>행복한 나날의 모르오의 노예처럼 의기양양하도다</div><div>노리개 흔들리며 쟁쟁 소리낼 때</div><div>금속과 보석으로 찬란한 그 세계에 나는</div><div>넋을 잃고 황홀하여, 음향과 빛이 뒤섞이는</div><div>물건들을 나는 미친듯이 사랑하네</div><div> -보들레르 <<보석>>1, 2련</div><div>황량한 골짜기로 피리 불며 내려가다</div><div>즐겁고 유쾌한 노래 피리로 불며가다</div><div>나는 보았네 구름우에 한 어린이</div><div>그 아이 웃으며 내게 말했네</div><div>어린 양에 관한 노래 피리로 불어주세요</div><div>그래서 나는 신나게 피리 불었네</div><div>피리아가씨, 그 노래 다시 피리 불어주세요</div><div>그래서 내 피리부니 그 아이 듣고 웃었네</div><div> -w. 블레이크 <<서시>> 1, 2련</div><div>가을 안개속에 오막살이 몇채</div><div>다리 굽은 농부가 송아지새끼를 끌고</div><div>안개속을 천천히 걷는다</div><div>농부는 걸어가며 노래한다</div><div>사랑과 변심의 노래</div><div>부서진 반지와 심장의 뜻을</div><div>아, 가을 가을은 여름을 시들게 했다</div><div>안개속을 희미한 두 그림자가 걸어간다</div><div> -아폴리네르 <<가을>>전문</div><div> 우의 세수의 시는 모두 프랑스 시인들의 작품이다. 세수의 시가 모두 인간을 배제하는 각도에서 인간을 노래하고있다. 보들레르의 화자는 <<지극히 사랑하는 알몸>>의 <<녀인>>을 앞에 두고 <<그녀>>를 사랑하는것이 아니다. <<그녀>>의 <<요란한>> <<보석>>만을 <<미친듯이 사랑>>하고있다.</div><div> 블레이크의 시에 등장하는 아이는 인간세상의 아이인것이 아니라 인간세상에서 추방된 <<구름위의 한 어린이>>이다. 그 아이가 듣고싶어하는 피리의 노래도 아빠나 엄마나 누이나 동생이나 친구에 관한것이 아니라 <<어린양에 관한 노래이다.>></div><div> 아폴리네르의 시에는 농부가 등장하는데 <다리 굽은 농부>>이다. 온전하지 못한 농부이다. 농부는 <<송아지새끼를 끌고 안개속을 천천히 걸어간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두곡인데 한곡은 <<사랑과 변심>>이고 다른 한곡은 <<부서진 반지와 심장의 뜻>>이다. 그런데 <<사랑>>을 부른다음 <<변심>>을 부른다. 그러므로 노래는 <<변심>>으로 끝난다. 그것은 <<부서진 반지>>이며 <<심장의 뜻>>이다. <<여름을 시들게 한>> 가을 안개속을 <<희미한 두 그림자가 걸어간다>>. 여기에 숙고의 가치가 있겠다. <<다리굽은 농부>> 자체가 완정하지 못한 인간인데 <<희미한 두 그림자>>로 변해버렸으니 양과 사람의 구분이 사라지였다. 사라진다는것은 존재의 상실을 의미하고 존재의 상실은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를 보여준다.</div><div> 이미지시에서 인간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서정시는 매우 희소하다. 있다면 어떤 상징이나 은유의 대상으로 쓰인것이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아닐것이다. 허구에 의하여 각색된 인간이며 상상에 의하여 제조된 인간이며 예술에 용해된 인간이라겠다.</div><div> 시는 일상적인 인간의 정서와 감정을 그대로 뿜기 위하여 씌여지는것이 아니다. 새로 지각되는 치렬한 극단에서, 쓰지 않고는 안되는 극한에서 변형의 작업을 하여 이미지화하는 일이다. 시인이 시를 쓸 때 론리적인 사유는 할수있겠지만 론리의 제한은 받지 않는다. 시인은 사물의 법칙을 존중하지만 사물법칙의 구속에서 시를 쓰지 않는다. 시인의 상상력은 현존하는 모든 계률과 관계없이 자유자재로 달아다니며 이미지를 창조한다. 시는 시인이라는 인간이 시를 쓰는것이 아니라 시인이라는 인간의 상상력이 그것도 이미지를 창출해 낼수있는 상상력이 시를 쓴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시가 완성된 다음에 보면 시인의 원래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시가 되여나오는 경우를 시인은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상상력이 시인을 차버리고 제멋대로 알을 까놓았다고 하여 시인은 자기의 원래의상상을 초월했다고 비난할 대신 오히려 즐거워하게 된다.</div><div> 시인을 물이라면 상상력은 수증기이다. 수증기는 물에서 태여나지만 물의 의도대로 날아가는것이 아니다. 물은 수증기를 만드는 모체일뿐 수증기를 지배하지는 못한다. 시인은 자기의 상상력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하지만 상상력이 엉뚱하게 제멋대로 달려나가는 때를 늘 만나게 된다.</div><div> 이미지가 창조될 때 상상력이 시인을 떠나는것은 최고의 아름다움의 산파라겠다</div><div></div><div>제4절 언어가 언어를 떠난다.</div><div><br></div> 앞에서 우리는 이미지가 사물을 떠나고, 관념을 떠나고, 인간을 떠난다는것을 알아보았다. 이러한 이미지특성과 기능은 모두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그것들이 그렇게 표현되는 주요한 원인은 또 언어가 언어를 떠나기때문이라고 해도 틀린다고 할수 없을것이다.<div> 옛날에는 언어이자 사물이였고 사물이자 언어였다. 세월의 흐름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언어도 발전해왔다. 이제는 언어가 사물을 떠날 수있을뿐만 아니라 언어가 언어를 떠날수있게 되였다. 시의 언어는 사물의 부착물인것이 아니라 독립적존재로 되었고 하나의 언어가 하나의 뜻으로 쓰이던데로부터 여러 가지 의미로 씌일수있는 자유가 있게 되었다.</div><div> 상징과 은유의 시에서의 보편화는 언어가 언어를 떠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div><div> 문법적규례와 론리적인 체계속에서 활동하던 언어는 현대시라는 이미지에 와서는 이런 규례의 사슬을 짓부셔버리고 자유자재로 조합되면서 새로운 사물을 제멋대로 생성해내고있다.</div><div> 영국시인 하디는 <<지나침의 길을 걷노라면 지혜의 궁전에 이른다>>는 시구를 쓴적이 있다. 언어가 이러하다. 지나치게 자유로와지면서 자신의 지혜로 새로운 궁전을 세우는것은 이미지시의 공로라 아니할수 없다.</div><div> 잠시 머물러 하디가 언어조합을 한 것을 간략적으로나마 살펴보자. 시인 하디는 <<진홍빛기쁨>>, <<금빛눈물>>, <<황금의 쾌락>> 등등 언어를 자기 시에 부여하고 있다. <<기쁨>>이란 추상어로서 만질수도 볼수도 없다. 기쁨앞에다 <<진홍빛>>이란 규정어를 씀으로써 시각화를 꾀하여 기쁨을 우리 눈앞에 환히 떠올리고있다. 이런 조합은 정상적이고 일상적인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두 사물의 강박적인 얽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겠다. 뿐만아니라 기존의 문법이나 론리로서는 해석되는것이 아니다. 오직 시적인 기분, 예술적인 기분으로 받아들여지는 <<지나침으로 이루어진 지혜>>의 산물이라겠다. 그 뒤의 <<금빛눈물>>, <<황금의 쾌락>>도 같은 지나침의 지혜이다. 이미지시는 이런 <<지나침의 길>>을 달갑게 걷게 되는것이다.</div><div> 처녀와 총각이 하번만 살놀이 하면 처녀는 더는 처녀가 아니고 총각은 더는 총각이 아니되는것처럼 언어도 일단 이미지의 재료로 충당되면 원래의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고 돼지는 돼지가 아니고 모기는 모기가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자기의 본의미를 떠나서 다른 그 무엇을 표현하게 된다.</div><div> 20세기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불리우는 발레리의 시 한 단락을 보자.</div><div>그렇다! 광란을 타고난 커다란 바다여</div><div>표범가죽이여, 숱한 태양의 영상으로</div><div>구멍 뚫린 희랍외투여</div><div>침묵과 같은 소란속에서</div><div>반짝거리는 네 꼬리를 물어뜯는</div><div>너의 푸른 몸뚱이에 취한 단호한 히드라여</div><div>바람이 인다...살려고 애써야 한다!</div><div>거대한 대기가 내 책을 폈다가 다시 접는다</div><div>가루같은 물결이 바위에서 솟아난다!</div><div>날아가거라 정말 눈부신 책장들이여!</div><div>부숴라 파도여! 즐거워하는 파도로 부숴라</div><div>돛단배들이 모이를 쪼고있던 이 고요한 지붕을</div><div> -<<해변의 묘지>>의 마지막 두련</div><div></div><div> 후고. 프리드리히는 이 시를 의식과 존재의 싸움에서 <<바다는 이제 자연적인 이름을 되찾는데 (파도 해양) 이것은 의식이 자연의 실재앞에 자신을 되찾았다는 증거이다>>고 평한다. 후고.프리드리히의 비평에 의하면 바다는 바다라는 의미에 앞서 <<의식이 자연의 실재앞에 자신을 되찾은>> <<증거>>로 나선다. 즉 <<바다>>는 의식의 <<증거>>로 충당되였다는것이다. 주제적으로 살필 때 <<바다>>는 바다를 떠나 <<증거>>로 되었다고 하는데 문장을 더 깊이 파고들면 <<바다>>는 <<표범가죽>>이나 <<희랍외투>>로 될뿐만 아니라 절로 <<제 꼬리를 물어뜯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대가리가 50개나 되는 괴상한 뱀-히드라가 된다. 결국 <<바다>><<표범가죽>> <<희랍외투>> <<히드라>> <<침묵>> <<꼬리>>...들은 모두 바다는 바다가 아니고, 표범가죽도 표범가죽이 아니고, 희랍외투도 희랍외투가 아니고, 꼬리도 꼬리가 아니고 침묵도 침묵이 아니고, 히드라도 히드라가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언어들은 언어를 떠나 시인이 새롭게 구축하고있는 이미지의 재료로 되었다고 할수있다. 이쯤하면 <<해변의 묘지>> 아래련의 언어를 더 분석해 보지 않아도 되리라고 믿는다.</div><div></div><div>한 개의 원이</div><div>굴러간다</div><div>천사의 버린 지환이다</div><div>그 안팎으로</div><div>감기는 별빛과</div><div>꽃잎들...</div><div>금빛의 수밀도만한</div><div>세 개의 원이</div><div>천개의 원이</div><div>굴러간다</div><div>신의 눈알들이다</div><div>어떤 눈알은 모가 서서</div><div>삼각형이 되어</div><div>쓰러진다</div><div>어떤 눈알은 가로 누운</div><div>불기둥이 되어</div><div>뻗는다</div><div>한 개의 원이</div><div>8월 한가위 달마큼</div><div>자라서</div><div>굴러간다</div><div> -문덕수 <<원>>전문</div><div></div><div> 시인은 원을 쓴다고 했지만 실상은 <<천사가 버린 지환>>을 썼고, <<신의 눈알들>>을 썼다. 기하학적인 원의 도형이 반복적으로 변하면서 우리 앞에 기이한 이미지를 련발하고 있다. 가락지만한 원이 보름달로 자라기까지 치른 여러가지 고역이 생동한 이미지로 우리 앞을 지나면서 고행을 치러야 성공한다는 뜻을 알려주는 같다. 혹은 원이라는것은 속이 빈것이니까 비우는 신념의 아름다운 결과를 이룩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는지도 모른다. 이미지의 뜻의 해독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나름에 달린것이니까. 이시에 사용된 <<지환>><<별빛>><<꽃잎>><<원>><<신의 눈알>><<불기둥>><<한가위 달>>들은 죄다 시인의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들로서 결코 이 언어들의 관습적인 의미와는 완전히 틀린 표현이라는것은 자명하다.</div><div> 지난 90년대초에 시어를 새롭게 태여나게 하였다고 말할수있는 김학송시인은 하늘에 뜬 두루미모양을 흰구름 한송이로 변형시키면서 이렇게 읊조리고 있다.</div><div></div><div>청청한 거울속</div><div>흰구름 한점</div><div>부풀은 소망</div><div>그린 듯이</div><div>꽃바람을 몰고 가는</div><div>하아얀 치마</div><div>그리움을 불태우는</div><div>노을 한쪼각</div><div> 간결한 필치로 깨끗하게 씌여진 한편의 시다. 맑은 하늘에 높이 떠있는 두루미, 하얀 두루미는 눈덩이같은 순수이다. 그 정갈한 아름다움을 우러르면서 시인은 두루미를 <<흰 구름 한점>>이라고 변형시키고있다. 흰 구름을 <<부풀은 소망>>과 <<꽃바람을 몰고가는 하아얀 치마>>로 승화시키고 그것을 다시 그리움이 사무치게 하는 <<노을 한쪼각>>으로 마무리를 짓고있다. 제목에 두루미라는 언어가 있을뿐 내용을 쓸 때에는 두루미에 대한 언어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고 두루미에 대한 변형물들만 진렬되여있을뿐이다. 중요한 것은 두루미를 흰구름으로 변형시킨다음 그 변형물을 리용하여 새로운 변형물을 파생시켰다는 것이다. 여기서 <<흰구름 한점>>이나 <<하아얀 치마>>나 <<노을 한쪼각>>과 같은 언어들은 원래의 언어의 뜻을 떠나서 완전히 새로운 상징적의미로 우리앞에 새롭게 태여나고있다고 하겠다.</div><div> 이만큼 살펴본다. 똑똑히 하여야 할것은 이미지특징의 하나가 언어가 언어를 떠난다는것만은 가슴에 각인시켜야 할 일이다.</div> 제5절 이미지가 현실을 떠난다. <div> </div><div> 현실은 구체적인 사물속에 있지 않거니</div><div> 말할수있는 공간에 가서 찾아야 하리</div><div> 벽과 벽사이로 뻗은 바다의 백사장을</div><div> 소리 없는 곳에서 소리 없는 바다의 음을</div><div></div><div> 당대영국의 유명한 초현실주의시인 차르스. 터무린썬의 <<미>>라는 시다. 차르스의 이 시를 보면 시의 <<현실>>라는것은 구체적인 사물속에 있는것이 아니라 말로 할수있는 <<공간>>에 있다는것이다. 말로 할수있는 <<공간>>이란 그 의미가 한이 없이 넓고 깊다. 그 공간은 상상의 공간이며 허구의 공간이다. 차르스 . 터무린썬이 말한것처럼 <<벽사이로 뻗은 바다의 백사장>>이나 <<소리없는 곳에서 소리 없는 바다 음>>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의 이미지는 현실자체 있는것이 아니라 시인의 상상속에 문학적허구속에 있다는것이겠다.</div><div> 우에서 우리는 이미지특성이 사물을 떠나고, 관념을 떠나고, 인간을 떠나고, 언어를 떠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제 우리는 차르스. 터무린썬의 시를 통하여 이미지가 현실을 떠난다는 새로운 명제를 떠올리게 된다.</div><div> 초현실주의시가 현실을 떠나 어떻게 이미지를 제조하고 있는가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div><div> 먼저 지난 세기 5,60년대에 영국에서 중요한 비평가로 활약하기도 한 영국시인 아르와레스의 시 <<실>>(失)을 보자.</div><div></div><div>실</div><div>아르와레스</div><div></div><div>내가 잠속을 거닐면 착한 마음이 꿈을 꾼다</div><div>하늘은 푸르디 푸르다.</div><div>당신이 손을 펴면</div><div>손은 하늘의 시계속으로 들어가고</div><div>나는 천천히 움직인다</div><div></div><div>같은 손목이 나의 얼굴에 놓인다</div><div>나의 손가락이 스치기만 하여도</div><div>같은 머리 하나가 내 가슴앞에서 가볍게 움직인다</div><div>나의 팔이 같은 몸을 안으면</div><div>같은 죽은 팔의 움직임을 느낀다</div><div>내 손가락이 죽은 머릿속으로 들어가면</div><div>같은 배가 죽은 허벅지를 움직인다</div><div></div><div>꿈은 때린다. 저며낸다 백주에</div><div>껌벅거리는 눈이 가볍게 움직인다</div><div>사랑하는 이, 그녀는 당신이 아니라 그녀요</div><div></div><div> 아르와레스는 현실을 완전히 떠나서 괴상한 꿈을 쓰고 있다. 꿈을 쓰는것은 영미 당대 초현실주의시인들이 즐겨쓰는 제재이다. 아르와레스의 이 시자체가 현실을 떠났다. 초현실주의라는 언어자체가 현실을 떠난다는 말인것이다. 꿈속으로 들어가 추출해낸 이미지는 현실일수가 없다. 사실 아르와레스의 시를 보면 한 인간이 거울을 앞에 놓고 동작하면서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움직임을 시로 쓰고있는같다. 같은 손목, 같은 팔, 같은 배, 같은 몸 등 움직임을 보면 거울속의 나와 현실속의 내가 함께 움직이고 있는것이 보인다. 첫련에서 하늘이 푸르디 푸르다고 한것은 맑은 거울을 말하는것이며 당신이 손을 들면 손이 시계속으로 들어간다는것은 거울속에 시계가 비치였는데 손을 드니까 시계의 일부가 가리워진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거울속에 비친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그림과 같은것이다. 아무렇게 따지여보나 이 시는 현실을 떠나서 이미지를 만들었다는것이 확연하다.</div><div> 1927년에 미국의 뉴욕에서 태여나 영국과 프랑스에서 전전하다가 1968년도에 미국으로 돌아가 초현실주의 시운동에 몸을 담구면서 많은 시를 써서 미국의 국가도서상과 영국의 대통령상을 받은 우.에쓰. 머원의 시를 한수 보자.</div><div></div><div>4월</div><div>우. 에쓰. 무원</div><div></div><div>내가 돌을 떠나면 노래가 멎는다</div><div></div><div>4월 4월은</div><div>내 이름의 사막에 까라앉았다</div><div></div><div>미래의 나날들은</div><div>별 하나도 없이 음페되였다</div><div></div><div>당신이 안녕하게 기다린다면 당신은 거기에 있으리</div><div></div><div>당신이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div><div>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리</div><div></div><div> 머원의 시는 제목은 4월이지만 시의 내용은 4월이라는 감이 추호도 없다. 시인은 4월을 떠나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있다. 이것은 이미지의 본질인 <<짝>>으로 하여 생기게 되는것이며 성질이 다른 사물의 배럴에 의하여 생기는것이라고 하겠다. 이미지의 특성은 제목과는 다른 사물을 끌어다 쓰는것이며, 제목의 의미와는 관계 없이 시인이 자유로이 허상을 만들어 쓰는것이며 , 어떤 때에는 그어떤 지적인 통제도 받지 않고 자유로운 이미지를 구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미지가 현실을 떠나게 마련되여있다. 현실을 떠나지 않는 시는 이미지시에 와서는 용납되지 않는것이다. 우리의 시들에서도 영미당대 초현실주의 시에 비하면 아직은 좀 유치하지만 현실을 떠나는 시들을 얼마든지 찾아볼수있다.</div><div></div><div>새벽</div><div>김승종</div><div></div><div>어머니</div><div>어머니</div><div>어머님은 ㅡ</div><div>남을 위한 종소리를</div><div> 그렇게도 많이 쳐주셨소이다!</div><div></div><div>어머니</div><div>어머니</div><div>어머님은 ㅡ</div><div>자신을 위한 종소리는</div><div> 단 한번도 못쳐보고 가셨소이다</div><div></div><div>어머님 ㅡ</div><div></div><div> 승종시인은 시제목은 새벽이라고 달았지만 그가 쓴 시내용은 새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어머니를 쓰고있으며 어머니가 남을 위하여 종을 쳐주셨다는것을 쓰고있다. 시제목은 <<새벽>>이지만 시의 이미지에는 <<새벽>>이라는 현실은 없고 어머니의 행동만 나타나고있다. 현실을 떠난 이 시는 대공무사하게 남을 위하여 자식을 위하여 자신을 다 바친 어머니 품성과 새날을 낳아주고 아무런 바람도 없이 사라지는 새벽에 등호를 치고있다.</div><div> 이미지시가 현실을 떠나는것을 즐기는 원인은 현실의 속박에서 벗어났을 때 사유가 자유로와지고 언어가 자유로와지고 이미지가 신기하고 새롭게 생성되기때문이다. 새로운 이미지는 현실 사물속에 있는것이 아니라 상상의 공간속에 있는것이다. 그것이 이미지시이고 이미지의 예술이겠다.</div><div></div><div>제6절 파편문체가 일으키는 혼돈</div><div></div><div> 이미지의 첫번째 특성-사물을 떠난다는것을 말할 때 한춘섭의 <<초승달>>을 살펴보면서 파편문체라는 개념을 떠올린적이 있다. 파편문체는 현대시문체론적 특성의 하나이며 파편문체로 하여 혼돈이 일어난다.</div><div> 파편문체란 어떠한 개념인가? <<현대시구조>>에서 지적한 후고 프리드리히의 말을 들어보자.</div><div> <<결합이 아닌 불연속성, 연결대신에 병렬, 이것들의 내적 불연속성, 불가능의 경계선상에 있는 문체적특성이다. 파편은 이룩되여가는 완정성의 상징이라는 지위를 획득한다. 파편들은 리념들의 결혼징표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미학의 근본명제이기도 하다>>. 말라르메와 발레리의 시학을 거론할 때 프리드리히는 또 다시 파편문체를 말한다. <<파편개념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이 개념은 가시적인것 속에서 불가시적인것을 최대한 예술적으로 현현시키는것이다. 이러한 현현은 바로 그 파편적인 특성으로 인해 불가시적인 우월성과 아울러 가시적인것의 불충분을 보여준다. 파편문체는 현대시의 특징이 되었다.>></div><div> 프리드리히는 파편문체의 중요성을 <<현대미학의 근본명제>>와 <<현대시의 특징이 되었다>>로 밝히고 있다. 필자는 현대시에 대한 살펴보기를 하므로 <<현대미학의 근본명제>>는 접어두고 <<현대시의 특징이 되었다>>는 명제만을 펼쳐보려고 한다.</div><div> <<파편문체는 현대시의 특징이 되었다>>고 했으니 이전에는 아니였는데 지금와서 되었다는 의미가 되겠다. 즉 시가 현대시로 발전하기전에는 파편문체가 시의 특징이 아니였다는 뜻이라겠다.</div><div> 후고. 프리드리히의 파편문체의 정의를 보면 핵심은 <<결합이 아닌 불연속성, 연결대신에 병렬>> <<내적인 불연속성>>과 <<불가능의 경계선상에 있는 문체>>이다. 이로 인하여 <<파편은 이룩되여가는 완정성이라는 상징의 지위>>를 얻게 되고 <<리념의 결혼징표>>로 된다. 이로 인하여 파편은 <<불가시적인 우월성과 아울러 가시적인것의 불충분>>이 나타나게 된다. 더 풀이해보면 이미지와 이미지가 내용상으로 련결되지 않고 단절된 상태이며 서로 성격이 다른 이미지라겠다. 시적인 대상을 변형하여 그려낸 이미지이므로 보이지 않던것은 단편적으로나마 보이게 되었으니 우월해지고 보이는것은 더 구체적인 진술이 없기에 불충분해지게 된다.</div><div> 파편문체는 현대시의 초월성을 체현한 초현실주의적인 문체라겠다. 현대시자체가 초월의 성격이 다분한데 전형적인 파편문체로 된 시들은 몽롱한것이 아니라 완전히 해독하기 어려운 난해시에 속한다. 파편문체에 대한 전문지식과 파편문체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고 현대시에 대한 연박함이 없으면 이 낯선 세계를 해설하기 어려운것이다. 우리가 리상이나 조향의 시를 처음 만났을 때 해석의 오리무중에 빠져 해설을 읽지 않고는 알수 없었던것은 그들의 시가 파편문체로 구성되였기때문이라겠다. 리상이나 조향의 스승이 구라파의 초현실주의 시인들이였는지도 모른다.</div> 가까운 신들이여 피투성이 신들이여① 채색되고 페쇄된 언론이여② 대낮같은 등화의 온상아래③ 가장 광대한 마음이 익는다④ 파도가 너의 페쇄된 덧창에 불어닥칠 때⑤ 기울어진 여름은 닻의 쇠사슬을 올리고⑥ 례배당의 유리를 향하듯 추분의 거대한 장비를 향해서 방향을 바꾼다⑦<div></div><div> 생종-페르스의 시 <<이국의 여인에게 바치는 시>>에서 임의로 한 련을 절록하였다. 모두 7개의 이미지로 되였는데 이 일곱개의 이미지들은 아무런 련관도 없이 병렬적으로 배렬되여있다. 각개의 이미지들은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뒤의 이미지가 앞의 이미지를 더 연장하거나 해석하거나 진술하지 못하게 밀어버린다. 출렁이는 물결이 흘러가듯 이미지들이 저마끔 흘러가면서 우리 눈에 스치운다. 생종 - 페르스의 시는 한 개 련에서 이러할뿐만아니라 련과 련사이는 더욱 이러하다.</div><div> 성격이 다른 이미지들로 구성되여 리해의 접촉을 단절시킨다 하겠다. 이질적인 이미지군이 시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서 독자들의 용이한 해득에 빗장을 지르고 들여놓지 않는다. 단테의 <<신곡>>이나 밀턴의 <<실락원>>처럼 <<지상의 지옥>>인것 같다. 그런데 이 <<지옥>>속에도 보물이 있는것이다. 이 <<지옥>>의 문을 여는 <<열쇠>>를 쥐기란 웬간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파편문체의 특징이라고 생각된다.</div><div> 후고. 프리드리히는 생종. 페르스의 시에 대하여 이런 결론을 내린다.</div><div> <<모든 이미지구성부분들은 감각적이다. 이미지들 자체는 결합할수 없는 결합에 의하여 비실재적이다.>><<주문과 같은 시구들이 장엄하게 울리면서 지나가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동시에 혼란스러운 새로운 이미지들을 조밀하게 전개한다.>></div><div></div><div>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div><div>-여보세요!</div><div><뽄 뽄 다리아></div><div><마주르카></div><div><디이젤 엔징에 피는 들국화></div><div>왜 그러십니까?</div><div>모래밭에서</div><div>受話器</div><div>녀인의 허벅지</div><div>낙지 까아만 눈동자</div><div>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div><div>그 위에</div><div>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div><div>나비는</div><div>기중기의</div><div>허리끝에서</div><div>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div><div> -조향의 <<바다의 층계>>전문</div><div></div><div> 이 시에 대한 한국 비평가들의 평가를 살펴보면 파편문체에 대한 리해가 깊어지리라 믿어진다.</div><div> 홍문표는 <<현대시학>>에서 리상, 리시우, 신백수 그리고 해방후의 조향, 김용구를 초현실주의 시를 실험한 시인들로 점찍으면서 조향의 <<바다의 층계>>는 <<우선 시행에 있어서도 다양한 변화를 주어 층계의 시각성을 보이고있거니와 여러 가지 사물들 즉 비둘기, 소녀, 기폭 등이 비론리적인 련결로 되어 강한 충돌감을 느끼게 한다>>고 하였다.</div><div> 김준오는 <<도시시와 해체시>>에서 <<낱말(이미지)이 자유련상대로 라렬됨으로써 문법적구문이 파괴되고 거의 모든 관련이 단절된다. 낱말이 <자유화> <절대화>되였다. 낱말의 인격과도 의미와도 아무런 관계없이 낱말이 지배한다는것이 그 구성원리이다>>고 하였다.</div><div> 문덕수는 <<시론>>에서 이렇게 지적한다.</div><div> <<이 시에서 <녀인+허벅지>와 같이 단어와 단어의 결합은 근접성에 의해 결합되여있지만, <모래밭에서+수화기>, <녀인의 허벅지+낙지 까아만 눈동자>와 같이 행과 행, 그리고 련과 련의 결합에서는 근접성이나 유사성을 찾아내기 어렵다. 이 경우는 근접성과 련결성을 고의로 파괴하고, 나아가서는 언어요소들의 결합에 의해서 발생하는 의미의 맥락까지 차단하고 파괴하는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시적 언어에 대한 해체를 시도하고있다. 일종의 무의미시라고 할수 있다.>></div><div> 김춘수는 <<시의 리해와 작법>>에서 이렇게 지적한다.</div> <<<모래밭> <수화기>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눈동자> 등이 이 시에서 차지하고있는 높이대로 강하게(짙게) 혹은 약하게(희미하게) 시인의 의식의 흐름속에서 명멸하는것을 활자배열을 통해서 시각적으로 보여주고있다. 이런 경우 이들 네개의 물체를 그대로 받아들여 <개념에 때묻지 않는> 어떤 상태를 느낄수있으면 되는것이다.>><div> 작자 조향은 화가 보라크의 말을 빌어서 이렇게 해석한다고 한다.</div><div> <<아름다운 레델이 붙은 통조림이 아직 부엌에 있는 동안은 그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일단 쓰레기통에 내버려져서 그 의미와 효용성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비로소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나는 무를 발견한 후에야 미를 알게 되었다>>는 말라르메의 말과 통하는것이라 하겠다.</div><div> 박진환은 <<현대시를 이렇게 쓰자>>에서 이렇게 평하였다.</div><div> <<기존의 시에서 볼수 없는 사물의 현실적배치가 아니라 자률적 이미지로 새로이 배치되는 전위와 변형의 수법에 의존되고있다. 그 때문에 이미지가 주는 인상의 피동적 수용에서 자률적이고도 내재적인 이미지가 외적사물을 능동적으로 지배하는 사고형태가 사물형태를 지배하고있다. 이러한 방식은 꿈과 무의식에 전능적특권을 부여함으로써 이미지의 결합의 이질화, 언어배치의 탐구성 등에 의해 사물을 완전히 현실위치에서 이탈시켜 현실에서는 있을수 없는 관계형태로 배치, 몽환상태와 같은 전율을 일으키게 한다.>></div><div> 한국 비평들은 파편문체의 작품은 비인간적이기 때문에 사람(작가)들이 작품에서 손을 떼는 순간에 이미 독자의 어떠한 접근도 용납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작품은 완전히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말라르메의 견해와 맥을 같이하고 있겠다 하겠다.</div><div> 파편문체의 상징들은 우선 현실과 재래의 의식에 대한 도전이며 파괴이다. 한편한편의 시가 비실재적인, 전례에 없던 창조물이기에 난해의 소용돌이를 몰고온다. <<몽환상태와 같은 전율>>(박진환)에서 <<어떤 상태를 느끼>>(김춘수)거나 <<강한 충돌감>>(홍문표)을 감수하면 되는것이다. 그것들은 <<인생론적의미가 없는>> <<무의미시>>이며 <<낱말들의 결합>>(문덕수)이며 <<효용성을 잃었을 때>>의 <<아름다움>>(조향)이다.</div><div> 우리 시단으로 말하면 파편문체의 시는 공백상태나 다름이 없다. 청년시인 김승종씨가 파편문체의 경향을 띤 시들을 조금 시도해 보았을뿐이다. 파편문체로 성숙된 시인은 필자가 보기에는 아직 없다.</div><div></div><div>제7절 이미지는 암시의 예술</div><div></div><div> 시는 암시의 문학, 암시의 예술이라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미지시는 암시의 예술을 기치로 내세우고있다. 상징, 은유, 함축의 옷을 입고 그림으로 독자앞에 나타나는 이미지, 이러한 시야말로 진짜 암시에 속하는 시이며 가치가 있는 시가 아닐까.</div><div> 이미지는 일상적인 개념, 사상, 감정, 리념을 모두 떠나서 낯선 땅 낯선 곳에서 자기의 그림을 그리고 이제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영상을 떠올린다. 현대시 시조라고 불리우는 프랑스의 보들레르는 <<알바트로스>>에서 이렇게 밝히였다.</div><div> <<근대적개념에 따른 순수한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체와 객체를 그리고 예술가의 외적세계와 예술가 자신을 동시에 내포하는 암시적인 마술을 창조하는 것이다.>></div><div> <<암시적인 마술을 창조>>하는것이 <<순수한 예술>>이며 현대시라고 밝힌 시인은 보들레르만이 아니다. 엘리어트는 시는 리해되지 않고도 전달될수있다고 하였고 말라르메는 시의 목적은 사물을 암시하는것에 있다하였고 장꼭도는 <<시는 비밀의 무기>>이며 때로는 <<헤아릴수 없이 먼거리의 목표물을 향해서만 쏘아지는 무기이다>>(<<몬마르또르의 축제>>)고 하였고 얀 무카로브스키는 <<시란 무엇인가>>에서 시적 표현의 목적은 <<의사소통>>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게 된다>>고 하였다...</div><div> 암시는 현대시의 정수이며 이미지는 이 정수로 만드는 과업을 자각적으로 짊어지고있다. 암시란 불러일으키는 것이며 자극하는 것이다. 깨우쳐주는것으로써 말한다는 의미이며 에둘러 말한다는 의미이다. 이미지시는 사물을 떠나서 관념을 떠나서 인간을 떠나서 언어를 떠나서 현실을 떠나서 이루어지므로, 일상의 냄새를 제거해 버리므로 이미지 자체가 암시의 잔치라 하겠다. 암시는 필연적으로 몽롱성을 초래한다. 몽롱성이 없는 시는 암시성이 희박한 시일것이다. 한번 읽고 다 알리는 시, 한두번 듣고 다 알리는 시, 그러한 시에서 암시성을 론한다거나 몽롱미를 론한다는것, 그리고 흔상의 가치를 론한다는것은 의미가 없을것으로 알고있다. 그러한 시는 일시적인 동감과 친숙성은 있으나 암시성이 없고 몽롱미가 없고 흔상가치가 없어 다각적, 다층차적인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div><div></div><div>하늘엔 천사와 또 천사가 있다</div><div>장교복을 입은 천사</div><div>료리사 차림인 천사</div><div>노래하는 천사</div><div>하늘빛의 제복을 입은 장교님</div><div>성탄절지나 따스한 봄이 오면</div><div>당신은 빛나는 태양의</div><div> 훈장을 달게 되겠지요</div><div>료리사는 거위털을 뜯는다</div><div> 아 눈이 내린다 내려라 눈아</div><div> 사랑하는 이</div><div>내 품안에서 멀어졌구나</div><div></div><div> 프랑스 아폴리네르시인의 <<흰눈>>의 전문이다.</div><div> 시에서 <<눈>>이 <<천사>>로 탈바꿈하고 <<천사>>는 또 <<장교>>와 <<료리사>>, <<가수>>로 탈바꿈한다. 이러한 탈바꿈이 바로 사물에서의 일탈이며 관념에서의 일탈이며 언어에서의 일탈, 인간에서의 일탈, 한마디로 말하면 일상적인 현실에서의 일탈이라겠다. 이러한 일탈이 바로 암시성을 갖고있다 하겠다.</div><div> 시는 <<장교님>>은 성탄절이 지나 봄이 오면 <<빛나는 태양의 훈장>>을 달게 될것이라고 한다. <<태양의 훈장>> 그것도 <<빛>>이 번쩍거리는 <<훈장>>이다. <<태양의 훈장>>이란 어떤것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흔상자에 따라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갑을론박할것이다. <<태양의 훈장>>이란 본 사람도 없고 우리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도 아니다. <<태양의 훈장>>은 시인의 상상속의 산물이며 암시의 상징물이다. 유감스럽게도 시인은 말하지 않는다. 사실 말할수도 없고 말해서도 안되것이 시인이다. 해석을 독자에게 맏기는것은 현대시 시인의 천직이니까. 료리사는 무얼하고있는가. <<거위털>>을 뜯고있다. 그뒤에 <<눈이 내린다>>고 하였으니 <<거위털>>은 <<눈>>을 표현하는 시적상관물이겠다고 생각되는데 시인은 또 다시 기지를 발휘하고있다. <<사랑하는 이/ 내 품안에서 멀어졌구나>>. 눈이 <<사랑하는 이>>인지 <<거위털이 사랑하는 이>>인지 아니면 료리사가 <<사랑하는 이>>인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내 품>>이란 언어도 료리사의 품인지 하늘의 품인지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불투명, 불명확성이 바로 암시라겠다. 시 <<흰눈>>은 한보 더 나아가서 큰 암시를 파묻고 있다. <<장교님>>이나 <<료리사>>에 대한 진술은 있어도 <<노래하는 천사>>에 대한 진술은 한마디도 없다. 대담한 생략, 끝나지 않은 시로써 끝을 냄으로써 암시의 력도와 흔상의 가치를 높이고있다.</div><div> 영국 로렌스 시를 한번 살펴보는 것도 좋을 같다.</div><div></div><div> 익은 열매 떨어질 때</div><div> 그 대지의 혈관으로 달콤함 스며나와 방울져 똑똑 떨어진다 온전히 산 사람들 죽을 때</div><div> 그들 체험이 살아있는 현관의 공간으로</div><div> 들어가 그 빛 더 한다.</div><div> 원자에 죽지 않는 혼돈의 몸뚱이에</div><div> 공간이 살아있어</div><div> 고니처럼 움직이고</div><div> 그 깃털 정제된 체험의 기름으로</div><div> 비단처럼 빛나기 때문이다</div><div> -<<익은 열매 떨어질 때>>전문</div><div><br></div> 한두번 읽어서 감이 잡히지 않는다. 여러번 읽으며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해독이 조금 가는 같다. 왜 그럴까? 시가 감정을 배설하지 않았고 언어들이 라체를 드러내지 않았고 이미지로 되었기때문이다. 얼핏 밑바닥이 보일듯 하지만 찬히 뜯어보고 사색해 보지 않으면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div> 우리는 1련에다 이런 의견을 들여본다. <<대지의 혈관으로 달콤함 스며나와 방울져 똑똑 떨어진다>>고 하였는데 <<대지의 혈관>>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대지는 가장 낮은 곳인데 거기에 <<스며나와 방울져 똑똑 떨어지면>> 어디로 떨어지는가? <<익은 열매가 떨어질 때>>의 <<익은 열매>>는 과일인가, 그때는 가을을 지칭하는가 아니면?</div><div> 2련에다는 이런 질문을 할수 있다.</div><div> <<온전히 산 사람>>은 어떻게 산 사람을 말하는가? <<체험의 살아있는 혈관의 공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혈관>>에 공간이 생기면 크게 생기면 생명이 위험한 것이다. <<빛>>, 혈관속으로 들어가는 <<빛>>이란 어떤 상징인가? <<원자에, 죽지 않는 혼돈의 몸뚱이>>는 어떤 사물을 가리킴인가?</div><div> 3련에다 이렇게 묻고싶다.</div><div> <<공간이 살아있어 고니처럼 움지이고>>에서 그 공간은 <<혈관의 공간>>이겠는데 <<고니처럼 움직>>일수 있으니 무슨 비밀을 말함인가? <<고니>>의 상징은 무엇을 표현하는가? <<비단처럼 빛나는>> <<정제된 체험의 기름>>은 무엇이기에 고니의 <<깃털>>에 바를수 있는것인가?</div><div> 시의 련마다에 시행마다에 주요한 언어마다에 의문을 제기할수 있다는것이 암시가 있기때문이 아니랴. 의문을 제기한다는것은 비밀이 있기때문이며 소통이 잘 안되거나 안되기때문이다. 시를 읽은후에 그저 그렇구나 하는 감이 들면 <<친절>>은 있어도 <<암시>>가 없게 된다.</div><div> 3련만 굳이 해설해 본다면 이런 의미가 아닐가 한다. <<공간이 살아있어/ 고니처럼 움직>>이고에서 <<공간>>은 <<혈관의 공간>>으로서 생명이 활동하는 공간쯤으로 설계할수있고 <<살아있다>>는것은 이 공간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겠다. <<고니>>는 작자의 리상적인 사물이라겠으며 아름다움의 징표라겠다. 우리의 생활속에서 백설같은 아릿다운 고니가 자유로이 날아옐수있는것은 <<정제된 기름>>을 바른 <<비단처럼 빛나는>> <<깃털이>> 있기때문이란다. <<정제된 기름>>은 생활이 주는 정면, 반면의 교훈이며 체험이라겠다. 그러기에 그것은 <<비단처럼 빛나는>> 인생을 가꿀수있는 <<깃털>>을 가진 <<고니>>를 떠올리는것이 아니겠는가! 필자 나름의 살핌이다. 아무튼 이미지시 해석은 수학이나 물리의 공식처럼 공식풀이를 해서 될 일이 아니다.</div><div> 이미지는 감정이나 관념같은 것을 어떤 사물로 대용해버리기 때문에 이방인으로서는 100%의 완정한 해석의 가능을 배제해버리기가 일수이다.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하는 낯선 작업, 에티오피아는 있어도 도착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감내하여야 하는 이미지시다.</div><div> 이미지는 어떤 의도에나 해석을 가하지 않으며 어떤 의도나 로출시키는 것을 꺼리는 암시의 시이다. 이제 우리는 루이스의 문장을 긴대로 참을성 있게 보기로 하자.</div><div></div><div>오, 장미여 너는 병들었도다!</div><div>울부짖는 폭풍속을</div><div>밤을 뚫고 날아온</div><div>보이지 않는 벌레</div><div>너의 분홍색 기쁨인</div><div>잠자리를 찾았도다</div><div>어둡고 비밀스런 벌레의 사랑</div><div>너의 생명을 멸망케 하리라</div><div> -블레이크</div><div>살아있는 동안 노래도 모르던 은빛 백조</div><div>죽음이 다가왔을 때 닫혔던 목이 열려</div><div>갈대 무성한 강가에서 가슴을 떨며</div><div>처음이자 마지막인 오직 한마디 노래를 부른다</div><div>기쁨이여 아녕, 죽음이여 다가와서 나의 눈을 감겨다오</div><div>현자보다 바보가 더 떠들 듯이 거위가 백조보다 더 떠드네</div><div> -엘리자베시대의 시(필자 불명)</div><div></div><div> <<시를 읽는 젊은이들을 위하여>>란 문장에다 루이스는 상기한 두수의 시를 써놓고 의미심장하게 자신의 관점을 피력한다.</div><div> <<어느 누구도 블레이크의 시를 단순하다고 할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나에게 던진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이처럼 불가해한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는 마치 전류의 쇼크처럼 세찬 감정이 나의 몸을 뚫고 지나가게 합니다. 이 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직도 난 확실히 모르지만 그 다음의 시는 이에 비하면 조용하고 지극히 단순합니다. 거기에는 조그만한 수수께끼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블레이크의 시처럼 순수한것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ㅡ이는 마지막 두행에서 이 시의 작자는 죽음에 림박한 백조의 입을 빌어서 생에 관한 인간적인 의견을 말하고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팔팔하고 기운 좋은 백조라도 사물을 생략하지 못한다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입니다.ㅡ하물며 세상은 말세가 되었다. 거위나 바보 따위가 백조나 현자보다 더 뽐내고 행세하는 세상이라면 차라지 죽어도 아까울것이 없다ㅡ이런 내용의 말을 할리가 없습니다. 마지막 두행에 포함되여있는 인생에 관한 의견은 불순한것ㅡ말하자면 시의 체내에 섞여든 불순한것입니다. 이 시의 전체의 형태를 무너뜨리지 않고 작자 자신의 이러한 의견을 시와 정서와 바탕속에 짜넣을수가 있었던것은 시인의 기교덕분입니다.</div><div> 블레이크 시에는 이러한 불순물이 끼여있지 않습니다...시인이...판단을 말하거나 자기 마음에 떠오른 하나의 사상을 짜넣는다는것을 사람에게 느끼게 하는 대목은 하나도 없습니다.>></div><div> 지루한 인용이지만 꽤 의미가 있다겠다. 백조를 의인화한것을 부정하는데는 무리가 좀 있다하겠지만 시는 <<자기 마음에 떠오른 하나의 사상을 짜넣는다는것을 사람에게 느끼게 하는 대목은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것은 모름지기 큰 계발을 주는것이고 <<불순물>>이라는 지적은 큰 충격으로 가슴을 울려주고있다. 사색의 가치가 있는, 두세번 다시 읽어볼 가치가 있는 견해라 겠다.</div><div> <<시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로만 야콥슨은 이렇게 쓰고있다.</div><div> <<만일 시인의 감동효과의 범위를 거부한다면 배타적인 시(상징주의와 같음)를 초래하게 된다. 시인이 영속성을 거부한다면 의도적으로 시사성이 강한 작품(례컨대 정치적시)를 낳게 된다.>> 이미지시는 배타적인 시라 하겠다. 이미지시는 선전을 위한것도, 계몽을 위한것도, 교육을 위한것도 아니다. 이미지시는 예술로 존재할뿐이며 대중가요인것이 아니라 교향악이다. 이미지는 모호함과 불일치로 암시를 일으킨다. 모호하지 않고 모두 일치되여 있으면 무엇을 암시하겠는가. 암시할것이 없다겠다. 이미지시는 표현의 수법으로 흔상의 가치를 창출하는 시이다.</div><div><br></div> 제6장 이미지와 언어<div></div><div> 시는 언어를 떠날 수 없으며 시인은 언어의 련금사라고 한다. 시속에서 마술을 피우는 언어를 우리는 시를 읽으면서 많이 만나게 된다. 언어가 언어를 떠난다는 테마에서 이미지와 언어와의 총체적인 관계를 더듬어보았다. 그것은 이미지와 언어간의 총적테마였다. 시인의 상상력이 언어를 다루는 기지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div><div> 시공부란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언어공부이다.</div><div> 시는 새로운것을 창조한다고 한다. 창조한다는것은 시적발견이 있어야 한다는것이다. 누구도 체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것을 체험하고 누구도 보아내지 못한 새로운것을 보아내고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것을 듣고 누구도 써먹지 않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이미지시 즉 현대시의 성스러운 과업이며 천직이며 의무라고 하겠다. 이 과업, 이 천직, 이 의무에 충실하자면 새언어만들기 작업을 하</div><div>지 않으면 안된다.</div><div></div><div> 제1절 성질이 다른 언어조합</div><div></div><div> 이는 모든 문법규칙과 론리를 떠나 성질이 다른 단어의 강압적 결합을 이야기하는것이다. 성질이 다른 단어의 강압적결합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언어사용인것이 아니라 새롭게 언어를 사용한다는 말이겠다. 현대시의 리스트들은 이 작업에서 우리들한테 많은 유익한 전범을 남기였다.</div><div> 일본의 다무라 류이지는 <<아름답게 미쳤다>> <<다갈색 운명>> <<꽃같은 상처>> <<참혹한 기쁨>> <<노을의 울림>> 등등 새언어만들기를 하였다. 스페인의 로르까는 <<달고드름>> <<활짝 열려오는 여자>> <<별들의 단검>> 등등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였고, 영국의 로렌스는 <<푸른 불빛>> <<장미가 매달리다>> <<황금빛 그림자>> <<검은 등불>> <<푸른 어둠>> 등등 새로운 언어조합을 해보았고, 미국의 포우는 <<달의 련옥>> <<별의 지옥>> <<달의 금빛 테두리>> <<달나라 산을 넘어>> <<빛이 펄럭인다>>...등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였다. 프랑스의 말라르메는 <<황금폭소>> <<멍청한 후렴>> <<황금빛 눈사태>> <<미소의 목동>>...등등의 새로운 언어조합을 떠올렸다.</div><div> 언어들에 대한 일상적인 의식과 관습적인 관념을 떠나서 이 단어와 저 단어를 새롭게 조합해 냄으로써 언어의 보물고에 별처럼 반짝이는 진주들을 저장하였다. 일상적인 사유나 관념으로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예기치 못했던 이러한 언어조합자체가 자연적이고도 펼연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생생하게 떠올리게 됨은 자명한 일이라겠다. 아무리 좋은 령감도 이렇듯 신선하고 생신한 새로운 언어만들기를 보여주지 않으면 시의 신선함을 맛보기 어려울것으로 알고 있다.</div><div> 사실 우리 시단에서 이미지를 중시한 시인들이 이런 언어조합을 많이 시험해보고있다. <<달빛의 언어>> <<살진 웃음>>(김정호) <<달빛이 펄럭이는 메산>> <<말씀의 시체>>(김학송) <<흙은 하늘>> <<해를 심는 감농군>>(김철) <<향기로운 깨침>>(박화) <<달의 사닥다리>> <<초원에서 질주하는태양>>(남영전) <<계절의 항구>><<젊은 장미가 불비를 쏟고>>(김파) 이외에도 많은 실례를 얼마든지 들수가 있다.</div><div> 이런 새로운 언어조합은 돌발적이고 기습적인 특징이 있어 갑자기 숲속에서 이슬을 머금은 함박꽃을 발견한것 같다. 이런 언어조합은 팽팽한 긴장성을 가지고 있어 튕기면 쨍-울릴것 같다. 이미지의 참신성과 언어의 치밀성을 확보하는 이런 단어조합은 성질이 반대되는 언어들의 조합으로서 현대시언어의 정수이다. 새로운 언어의 조합은 상상력의 독재적인 강제수단에 기대여 이루어진것이라 하겠다. 언어에 대하여 독재를 실시할수 있는것은 현대예술이 시인에게 베푼 은총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div><div></div><div> 제2절 사물사이 공간과 시간 메꾸기</div><div></div><div> 현대시 시인들은 새로운 단어조합이나 시구로써 두사물사이의 공간이나 시간을 가까이 하는 수법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내고 있다. 이런 이미지는 물속에서 금방 꺼낸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는 생명력이 약동한다.</div><div> <<하얀 별들의 내의가 물건을 나르는 어깨들을 연소시킨다>>(클라클), <<산의 몸뚱아리는 내 창가에 와 머뭇거린다>>(쉬페르비엘), <<별위에 바람이 일고 바람위에 돛이 있다>>(발레리), <<우리 둘이 그 안에서 잠자는 그대의 눈>>(엘뤼아르), 이러한 시구들은 두 사물사이의 공간을 제거해버림으로 하여 하나의 무대에서 두 사물이 동시에 운동하고 있다.</div><div></div><div>하늘중 높은 하늘</div><div>하늘중 푸른 하늘</div><div>사는 일 마음가짐</div><div>비춰보는 맑은 거울</div><div>새하얀 </div><div>구름수건이</div><div>닦아놓은 청보석</div><div>한자락 가을 하늘</div><div>가슴벽에 걸어두면</div><div>해뜨고 달이 뜨고</div><div>별 또한 총총해</div><div>고운 꿈</div><div>살지워가는</div><div>청심이 머리든다.</div><div> <<거리의 울음소리>>로 독자를 격동시켰던 시인 김동진의 시조 <<가을하늘 한자락>>이다. 시인은 높은 <<가을하늘>>을 <<맑은 거울>>이라 변형하고 구름을 <<수건>>이나 <<청보석>>이라 변형하였다. 가을하늘 한자락을 <<가슴벽에 걸어두니>> 가슴벽에서 <<해뜨고 달이 뜨고 별 또한 총총>>하다고 변형한다. 하늘도 우리와는 먼곳에 있고 구름도 해와 달, 별도 우리와는 머나먼 곳에 있지만 거울이나 수건이나 가슴과 련계시킴으로써 아주 가까운 지척에 있는것으로 표현하고있다. 이 시조는 두사물사이의 공간을 축소한 전형적인 실례라겠다.</div><div> 공간을 축소하는 방법이 있으면 시간을 축소하는 방법도 있다. 흔히 력사적제재를 시로 쓸 때 머나먼 옛날의 사물이나 사건을 현재의 사물이나 사건처럼 쓰거나 오늘과 련계시켜 쓰는 시들이 이 방법을 리용한다.</div><div> </div> 그네들의 살은 오늘의 흙이다<div>그네들의 뼈는 오늘의 바위다</div><div>그네들의 피는 오늘의 샘이다</div><div>그네들의 땀은 오늘의 강이다</div><div>그네들의 한숨은 바람이 되고</div><div>그네들의 눈물은 비가 되고</div><div>그네들의 분노는 우뢰가 되고</div><div>그네들의 웃음은 빛이 되고</div><div>.......</div><div>.......</div><div>그네들은 우리의 땅</div><div>그네들은 우리의 하늘</div><div>그네들은 우리다</div><div></div><div> 박화시인이 1000여년전의 고구려의 황성옛터를 찾아보고 읊은 황성교향곡이다. 1000여년전의 고구려사람들을 오늘의 여러 가지 사물로 변형시키면서 1000여년의 시간을 줄여버리고있는것이다. 관심있는 독자들은 시를 학습하면서 자기절로 찾아봐도 되기에 례를 더들고 설명할 필요까지는 없겠다고 생각된다.</div><div></div><div> 제3절 시구의 짝을 바꾸기.</div><div></div><div> 갑으로 묘사해야 할것을 을에 가져다 맞추고 을에 묘사되여야 할것을 갑에 가져다 맞춘다. <<고통에 찬 가지와 메마른 심장>>(히메네스), <<거대한 곰이여 내려오라 털이 더부룩한 밤>>(바흐만), <<슬픔에 잠긴 시계를 가진 황금의 로인>>(프레베르), 히메네스의 시구는 워낙은 <<고통에 찬 심장과 메마른 나무가지>>이고, 바흐만의 시구는 <<털이 더부룩한 곰이여 거대한 밤에 내려오라>>이고 프레베르의 시구는 <<슬픔에 잠긴 로인과 황금의 시계>> 혹은 <<황금의 시계를 가진 슬픔에 잠긴 로인>>이라고도 할수있겠다. 짝을 바꾸어 맞춤으로 하여 혼돈을 일으키며 그 혼돈속에서 새로운 감흥을 길어올린다.</div><div> 짝을 바꾸어 맞추는 작업을 우리 시인들은 지금 시탐해보고있는중인것 같다. 시에서 쓰이는 례가 아주 적다. <<바다깊이 타오르는 불/하늘 가득 따사로운 물>> 하고 박화 시인이 <<정이여 정이여>>에서 한번 썼고 필자가 <<시간.2>>에서 <<시간이 핥아먹은 뼈와 시간이 뜯어먹은 피>>라고 한번 써보았다. 가능하게 필자가 본 것이 적은데다가 이런 시구의 수집에 소홀하였을수도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아무튼 대상의 짝을 바꾸어 맞추는 작업을 하는 우리 시인이 아직 많지 않는것은 사실이다.</div><div></div><div> 제4절 추상어와 구상어화</div><div></div><div> 추상어란 색깔도 모양도 없는관념적언어이고 구상어란 볼수도 만질수도 있는 시각적인 언어라겠다. 이미지시에서 추상적언어라렬은 아마 금물에 속하는것으로 알고있다. 이미지를 창조한다는것은 어떤 심상을 창조한다는 말인데 추상적언어라렬은 이미지를 창조하는것이 아니라 론리나 이론을 만들어내게 되기때문이다. 추상적언어와 구상적언어를 결합시켜 시문을 작성하는것은 시각성을 강화하기 위한 작업으로서 새로운 맛과 멋 그리고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추출해는데 도움을 많이 준다고 하겠다. <<치욕의 새>>(생-종 페르스), <<변화가 너희들에게 손짓한다>>(벤), <<시든 애착이 바스락거림>>(쉐페르비엘), <<망각의 눈>>(엘리어트), <<희열의 가시>> <<차가운 꽃다발>>(노발리스), <<시간의 입술>>(토마스). 우의 례들에서 <<치욕>>, <<변화>>, <<애착>>, <<소리>>, <<망각>>, <<희열>>, <<차가운>>, <<시간>> 등 언어들은 모두 관념적인 언어이며 추상적인 언어이다. 그 뒤에 붙은 언어들은 모두 실물을 지칭하는 구상적 언어이다. 이런 묘사적인 동등한 배렬은 낯선 감각의 세계를 펼치고있다.</div><div> 우리 시인들도 이 방면의 언어작업에 열을 올리고있다. <<사랑을 키질한다던 봄바람>> <<빨간 기폭같은 꿈이/바다우에 락엽마냥 널리면>>(리임원), <<언젠가는 이 소망 /석류알 터질 것을>> <<철학의 껍데기를 벗기며>>(박화), <<전설의 구름협곡을 건너/묵묵히 걸어온다>> <<새벽녘, 춘정의 그물에 당겨올 때>>(김파), <<풀어헤친 시간은 망아지가 된다>> <<우린 이 무의 언덕우에/씨를 뿌리자>>(김학송), <<또 하루의 이야기가 눈물처럼 익는다>>, <<어제 꿈의 나무가지/뼈아피 불태우는데>>(김정호), <<가난을 벌목한다>>(김응준), <<한쪼박 평화의 이삭을 줏고있다>>(김철)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아도 관심있는 독자라면 알수있을것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추상어와 구상어를 동등하게 배렬하여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것은 시의 언어들을 베싼처럼 깡깡 마르게 다루는 것을 피면하고 우리 시언어들을 뼈가 있고 피가 흐르고 살이 지게 가꾸는 한가지 훌륭한 방법이라겠다.</div><div><br></div> 제5절 은유적언어<div></div><div> 현대시 자체가 상징과 은유를 기초로 한다고 많은 시인들과 비평가들이 념불처럼 외우고있다. 은유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쓰이고있다. 은유는 관습의 세계로부터의 탈출을 가장 유력하게 몰아부치고 낯선 감정의 세계에로의 진출을 가장 간단하게 완성시키는 수법이라겠다. <<혀는 그대의 목소리그릇에 담긴 붉은 생선>>(아폴리네르), <<교회, 돌 같은 여인>>(주브), <<얼굴, 소리내는 조개>>(엘뤼아르), <<10월, 정확한 프로필의 섬>>(기옌). 은유는 이질적인 사물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장치이다. 우의 례문들은 은유를 통하여 한 사물이 다른 사물로 이동하여 새로운 이미지로 생성된다는것을 증명한다. 이런 비 실재적인 사물들은 허구적인 이미지를 구성하면서 이미지의 새로움을 생신하고도 실감나게 안겨준다.</div><div></div><div>나의 시는 나의 얼굴이다</div><div>나의 얼굴은 당신들속의 하나</div><div>수천수만 농민형제들 마음에</div><div>내 얼굴의 거울이 있다</div><div></div><div>나의 시는 나의 거울이다</div><div>나의 거울은 당신들 마음의 한쪼각</div><div>쪼각이면 어떠하랴</div><div>나는 그것을 구걸하며 산다</div><div></div><div>내 거울을 찾아헤매이면서도</div><div>나의 거울을 보기는 싫어한다</div><div>초로한 거울에 비친것이</div><div>아직은 당신도 나도 제 몰골이 아닌것을</div><div> 우리 사실주의시문학의 한봉우리를 이루고 작고한 시인 김성휘시인의 시 <<나의 시>>의 앞의 세개련이다. 시인은 <<나의 시>>를 은유적인 수법으로 <<얼굴>>과 <<거울>>로 변형시키면서 서정을 열렬하게 토로하고있다.</div><div> 은유는 무엇은 무엇이다는 식으로 구사되는 언어조합으로서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만들어버리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다. 이 간편한 방법이 이미지생성과 쇄신에서는 거대한 위력을 과시하는 수법이라겠다.</div><div></div><div> 제6절 색갈 올리기.</div><div></div><div> 추상적인 사물이든 구상적인 사물이든 색깔과 새롭게 결합시킴으로써 언어를 언어의 진부함으로부터 해방시켜 새로운 감성을 획득하게 한다. <<청색전률>>(로르까), <<지구는 오렌지빛처럼 푸르다>>(엘뤼아르), <<산발을 한 기타들의 내는 록색침묵>>(디에고), <<록색의 태양 록색의 금>>(생-종 페르스), ...이러한 례들은 색채를 올림으로 하여 선명한 이미지, 생동한 이미지로 우리를 맞아주고있다. 사물에 색깔을 올린다는것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써오던 색깔을 올린다는 말이 아니다. 시인이 새롭게 색깔을 올린다는 뜻이다. 진달래를 우리는 붉은색이 아니면 연분홍색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우리 선조들로부터 써오던 말인것이다. 이런 말들을 시인의 눈으로 다시 살펴보면서 새로운 색채로 표현한다는것이다. 진달래를 <<하얀 진달래>> <<까만 진달래>> <<파란 진달래>>라고 시인이 새롭게 진달래의 색깔을 규명하면 새로운 언어의 탄생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쓸수있는가 ? 필자는 쓸수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달을 은빛달이나 하얀 달로만 쓰지만 서양의 시인들은 파란달, 빨간달, 노란달, 까만달이라고도 쓰고있다.</div><div> 우리 시단에서 언어의 새로운 색깔올리기작업도 비교적 활기롭게 진행된다고 하겠다. <<빨간 맛>> <<까맣게 타버린 태양>>(김파), <<검은 거짓말>>(김정호), <<생각이 파랗게 >> <<연분홍 고운시>>(리임원), <<검게 푸르게 일어서는 아픔>>(김학송)노란 아타까움 (김응준) ......이러한 례들은 얼마든지 찾아볼수있다. 문제는 우리가 시적장치로써의 새로운 색깔올리기작업에 품을 들이는가 안 들이는가에 달려있을뿐만 아니라 시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자각을 깨달아야 한다는데 있다.</div><div> 이미지와 언어는 물과 고기처럼 떨어져서는 안되는 관계이다. 진부한 언어 즉 항용적인 언어습관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유추해낸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겠다. 새로운 언어조합만이, 특히 강박성을 수용한 언어조합만이 새맛이 짙은 이미지 가공이 가능하리라 믿는다.</div><div> 얀 무카로브스키는 <<시적인 언어란 무엇인가>>에서 이런 지적을 하고있다.</div><div> <<시적 언어는 감정의 표현을 드러내는 언어인 정서적 언어와도 다르다...표현이 정감성에서 리탈하는 것이 문학에서 계획된 요구사항이 되는 시대조차 있었다.>> <<시적 언어의 갱신은 앞서 지나간 발전에 대하여 또 표준적인 문어체 언어의 규준에 비해보면 언어에 대한 일종 왜곡으로 드러나고 있다>></div><div> 얀 무카로브스키가 점찍었듯이 <<표현이 정감성에서 리탈하는>> <<시대>>가 현대시의 시대이며 이미지시대라고 긍정하고싶고 <<언어에 대한 일종의 왜곡>>으로 쓰는 시가 현대시이자 이미지시라고 믿고싶다.</div><div></div><div>제7절 언어공감각.</div><div></div><div> 시를 쓰는 모든 사람들은 늘 언어의 방벽에 부딪치군 한다. 모든 시는 언어의 집이라고 한다. 이미지시도 언어의 집이다. 이 언어의 집을 건축할 때 언어들의 공감각을 지혜롭게 다루는것을 이미지를 만드는 하나의 슬기라고 할수있겠다.</div><div> 공감각이란 어떠한 것인가? 문덕수시인은 <<시론>>에서 이렇게 정의하고있다. <<한 감각이 다른 감각으로 전이하거나 둘 이상의 감각이 결합되는 현상을 공감각이라고 하고 또는 공감각적의미저리라고 한다.>> 이 정의에는 두 가지 내용이 있다. 한가지는 <<한 감각이 다른 감각으로 전이>>하는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둘 이상의 감각이 결합되는 현상>>이다. 시인이 시를 쓸 때 이미지를 만드는것은 감각을 풍부하게 하고 새롭고도 진하게 하려는데도 목적이 있으므로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공감각을 중시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하겠다.</div><div> 일반적인 경우에 우리들은 감각이라 하면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다섯가지를 떠올리는데 문덕수는 이 외에도 <<통각, 냉각, 온각, 운동감각, 평형감각, 내부감각>>이라는것을 더 떠올리면서 여러 가지 감각중에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을 특수 감각이라고 부른다고 한다.</div><div> 이미지는 여러 가지 감각중에서 시각을 제일 중시하여 추구한다. 왜냐하면 <<언어로 그린 그림>>을 이미지라 하니깐. 그림이 보이자면 시각적이 아니고서는 안되기때문이다. 냄새를 표현하는 후각, 소리를 듣는 청각, 육체의 근육감각을 나타내는 촉각, 맛을 알아내는 미각은 뇌에 반영되여 추상적인 언어로 표현되기때문이다. 백번 듣기보다 한번 보기가 났다는 말이 있는것처럼 시각성은 회화적이기에 이미지를 선명하게 하는 제일 훌륭한 통로라 아니 할수 없다.</div><div></div><div>얼룩배기</div><div>황소가</div><div>해설피 금빛 게으름을 우는 곳</div><div>...</div><div>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div><div>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div><div> -정지용 <<향수>>에서</div><div>피아노에 앉은</div><div>녀자의 두 손에서는</div><div>끊임없이</div><div>열마리씩</div><div>스무마리씩</div><div>신선한 물고기가</div><div>튀는 빛의 물꼬를 물고</div><div>쏟아진다</div><div> -전봉건 <<피아노>>에서</div> 정지용의 <<향수>>는 이미지각도에서 그찰해보면 거리가 있지만 언어의 공감각 각도에서 보면 잘 쓰인 곳이 있다. <<금빛 게으른 울음>>이나 <<바람소리 말을 달리고>>는 청각을 시각화한 명구라 하겠다. <<울음>>은 청각이지만 <<금빛>>이란 시각적 색깔의 언어와 어울림으로써 이미지를 신선하게 만들었고 <<바람소리>>라는 청각적인것에다 <<말>>이 달린다는 시각적 언어를 붙임으로써 바람의 기세를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주고있다.<div> 전봉건의 <<피아노>>는 희한하다겠다. 피아노소리를 <<여마리씩/스무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튀는 빛의 물꼬를 물고/쏟아진다>>고 하였다. 청각을 시각화함에 있어서 너무 기발하고 낯설게 하여 읽는 사람의 감동이 <<물고기들>>과 함께 <<쏟아진다.>></div><div> 시는 상상의 감각화라고도 말하는데 공감각은 감각성을 강화하고 사상을 이미지화함에 있어서 불가결의 요소라 하겠다. 그래서 공감각은 현대시인들이 즐겨 쓰는 수법이다. <<보라빛 시간>>(엘리어트), <<진홍빛 기쁨>>(블레이크), <<황금폭소>>(말라르메), <<신음의 뿌리들이 썩고>>(엘뤼아르), <<공기의 물 빵의 고기>>(크롤로우). 서양의 시를 읽어가노라면 이러한 공감각언어들이 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떠있어 독자는 뭇별이 무성한 현란한 궁전으로 들어가는듯한 희한한 감회를 금할수 없다.</div><div> 공감각은 여러가지 감각을 새롭게 교제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산생시키고,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키며, 감성의 농도를 높이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수단의 하나이며, 현대시의 주요한 기법의 하나라겠다.</div><div> 아래에서 우리 시단의 공감각작업이 어떻게 진행되여가고있는가를 보기로 한다.</div><div> 청각---시각</div><div>소리소리 피가 듣는다 (남영전)</div><div>무반주 생음악으로 펄럭인다 (한춘)</div><div>시각---청각</div><div>지심깊은 혈맥의 아픈 종소리(박화)</div><div>먼 바다 철석이는 자장가(김파)</div><div>촉각---시각</div><div>아픔이 묻어나는 힘찬 열매(박화) </div><div>아리도록 애련한 하얀 선(정몽호)</div><div>시각---촉각</div><div>락엽 몇잎 발등 때린다 (김응준)</div><div>촉각---청각---시각</div><div>가려운 방울소리 바위에 돋힌 검버섯(김파)</div><div>후각---청각</div><div>풀내음 풍기네 귀뚜라미소리(정몽호)</div><div>후각---시각</div><div>젖내음 감아 올리네 뽀얗게(정몽호)</div><div>젖내나는 언덕(정몽호)</div><div> 실례지만 례를 들지 못한 공감각조합을 자의로 몇가지만들어 보이고싶다. <<들큼한 배맛이 하얗게 번져온다>>(미각+시각), <<얼굴빛이 소태처럼 쓰겁게>>(시각+미각). 종합해보면 다섯가지 감각을 모두 서로서로 전이시킬수있는데 도합 20가지다. 이 20가지를 능란하게 다루는 솜씨를 시인들은 모름지기 터득해야 하리라 믿는다. 이런 작업은 시인의 언어자각이 없으면 안되는것이다.</div><div> 시를 창작할 때 새로운 공감각을 획득한다는것은 기분나는 일이 아닐수 없다. 공감각은 시를 새롭게 만들고 신선하게 만들면서 시에 생기를 불어넣고, 시의 생명이 발랄하게 운동하게 함에 있어서 불가결의 장치의 하나라고 하겠다.</div><div></div><div> 제8절 감각의 물화</div><div></div><div> <<새로운 언어조합>>에서 감각의 물화문제를 간단히 짚고넘어왔다. 그것으로 부족한것 같아서 다시 이야기하고싶어진다. 감각의 물화문제는 이미지시를 쓰는가 아니면 다른 류형의 시를 쓰는가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이기때문에 다시 취급해 보고저한다.</div><div> 이미지스트선언의 첫째 조목 <<일상어를 사용하되 정확한 말을 고르며 모호한 말이나 장식적인 말을 배척한다.>>, 넷째 조목<<명확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다섯째 조목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견강하고 명확한 시를 쓴다>> 등은 감각을 물화함으로써만 이미지시에 도착된다는 요구라고 리해하여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것 같다.</div><div> 한국의 박진환은 <<현대시를 이렇게 쓰자>>에서 <<시는 모방도, 재현도, 묘사도 아닌 창조적경로를 통한 문화적창조행위이다>>라고 하면서 현대시를 잘 쓰려면 물화(物化)작업을 잘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가 <<조선문학>>에 발표한 시론 <<현대시를 이렇게 쓰자>>는 감각의 물화라는 명제로 관통되였다고 하여도 별로 틀리지는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는 변용-대용-물화-이미지라는 시창작 그라프로 현대시를 말하고있다.</div><div> 감각대상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사물이지만 감각은 실재물이 아니라 추상물이다. 감각은 뇌의 활동을 말하는것으로서 허상이며 존재하지 않는 영상이나 개념과 같은 추상물인것이다. 감각은 물질에서 받은 인상이다. 시를 쓸 때 다시 시각적인 물질로 환원되여 표현되여야 한다는것이 감각의 물화라고 하겠다. 시에서 모든 리념적이고 개념적인 언어들은 추방되고 그러한 언어들 대신에 눈으로 볼수있는 사물적인 언어들로 그 자리를 메꾸어야 한다. 시각으로 볼 수있는 물질적운동을 표현하지 못하는 언어들은 이미지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어렵다. 자리를 차지하려면 물질적언어로 바뀌여야 한다. 사상, 리상, 희망, 아픔, 마음과 같은 추상적언어가 그러할뿐만 아니라 아름답다, 착하다, 곱다, 밉다와 같은 형용사들도 마찬가지로 이미지에서 자리를 내야 한다. 이러한 언어들이 자리를 차지하려면 가시적인 명사와 결합되여 가시적으로 표현되였을 때래야만이 이미지의 효능을 발휘할수있게 되는것이다. 아무런 결합도 이룩하지 않은 채 례하면 <<사상을 해방하자>> <<아름다운 리상>> 등으로 쓰인다면 실례를 면할수 없을것으로 알고있다.</div><div> 앞에서 추상적언어를 구상적언어와 결합시켜야 한다고 한것이나 추상어에 색깔을 올려야 한다고 한것이나 추상어와 구상어의 결합이나 은유적방법들을 쓰는것들 모두가 관념의 물화를 실현하는 방법이라고 하여도 되겠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려는것은 감각이나 관념과 같은것을 가시적인 물질운동으로 대용하여 표현하여야 한다는것이다. 그러자면 상징으로 추상적 감각이나 관념을 대체해 버리는것이 하나의 방법이라겠다. 상징은 은유와 달리 표현하려는 대상은 나타나지 않고 표현해 놓은 대상만 나타난다. 우리는 <<꿈>>이라는 추상적언어를 <<꽃>>이나 <<노을>>이나 <<별>>이나 <<무지개>> 등으로 얼마든지 대용해 쓸수있다. 이렇게 대용해 쓰는 방법이 상징인데 대용해 쓰게 되면 확연히 다른 이중삼중의 감각을 얻게 된다. 문제는 죽은 상징을 쓰지 말고 산 상징을 쓰는데 있다. 죽은것이란 선인들이 만들어 써먹은것이고 산것이란 시인이 새롭게 만들어내는것이다. 새롭게 만들어내는것만이 바람직하겠다. 남의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아류에 물젖게 되기마련이다.</div><div> </div><div><br></div> 제9절 종의미 쓰기.<div></div><div> 류의미와 종의미는 복잡한 언어작업이 아니므로 간단히 짚고 넘어간다. 류의미는 어느한 부류의 언어를 일컫는것이고 종의미는 고유명사를 일컫는것이라고 하겠다. 산이라고 하면 세상의 모든 산을 다 포괄하므로 류의미다. 하지만 백두산하면 장백산맥의 주봉 하나를 가리킨다. 나무하면 여러 가지 나무를 다 가리키지만 백양나무 하면 나무의 한종류 백양나무만 가리키게 된다. 시를 쓸 때 백두산이나 백양나무같은 종의미 언어를 골라서 쓰는것이 류의미를 쓰는것보다 열배는 더 좋을것으로 알고있다. 그것은 의미지시란것이 언어로 그린 그림이기에 눈에 똑똑히 보일수록 좋기때문이다. 이따라 더 이야기할것은 사물의 어느한 부분으로 전체를 나탄낼수있는 언어를 쓰는것에 류의하여야 한다. 백양나무하면 백양나무의 가지나 이파리가 어떠한가를 쓰는것이 좋겠다. 언어는 세부적이면 세부적일수록 좋고 표현도 세부적인 표현일수록 좋은것이다. 모든 큰소리, 빈소리를 시는 싫어한다. 세찬 바람이 분다고 쓰기보다 바람에 아름드리 백양나무허리가 부러져 물앉았다 하고 쓰면 더욱 표현이 좋은것과 같은것이라겠다.</div><div> 한마디로 말하면 물방울에서 강이나 바다가 보이게 쓰는 수법이라겠다.</div><div> 그외에도 <<해빛 한줌>>이나 <<노래 한마대>>와 같은 수량사의 새로운 사용이나 고유어사용 등을 제외하고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이로써 마친다. 언어의 련금사란 말의 의미는 시인자신이 게으름 없이 시마다에서 새로운 언어를 창출해 내야 한다는 뜻이라것을 명기해야 한다고 생각된다.</div> 제7장 이미지와 시적상관물<div></div><div> 이미지시를 창작함에 있어서 시적상관물을 리용하는것은 현대시를 잘쓸수있는 하나의 중요한 도경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미지시작시법을 시적상관물을 어떻게 설정하는가로 이야기하려 한다.</div><div> <<시를 읽는 젊은이들을 위하여>>란 글에서 루이스는 <<시는 항상 사물과 사물을 비교한다>>고 지적하였다. <<사물과 사물을 비교>>하는것은 시의 제일 기초적인 작업이라겠다. 어떠한 시를 쓰나 비유요, 상징이요, 은유요, 제유요 하고 여러가지 수사법들을 거들지 않으면 안된다. 수사법들의 리용은 사물과 사물을 비교하기 위한데 있다는것은 중학생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하나의 시적대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미지시는 그것을 표현할수있는 사물이나 사실을 대용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물이나 사실을 일컬어 시적상관물이라고 한다.</div><div> 시적상관물을 설정하여 시를 쓰는것은 현대시를 잘 쓸수있는 기본고리라겠다. 사물시를 쓰든 관념시를 쓰든 형이상시를 쓰든 시적상관물을 떠나서 쓴다는것은 현대시의 예술을 떠나서 쓴다는 말과 맥락을 같이 하는것이라고 하겠다. 시적상관물을 떠나서 시를 쓰면 <<사물과 사물의 비교>>를 하는것이 못되고 이미지 작업이 안되고 낯설기에 도달할수 없고 직설의 배설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div><div> <<예술이라는 형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적상관물을 발견하는것이다>>고 엘리어트는 <<해믈릿론>>에서 점을 찍어놓았다고 한국의 문덕수는 말하고있다. 현대시를 읽어보면 엘리어트가 한 말이 하나의 진리임을 심심히 느끼게 된다. <<예술이라는 형식>>으로서의 <<유일한 방법>>, 둘도 아닌 딱 하나인 이 방법은 이미지시 창작수법의 핵이며 기본이라고 말할수있겠다.</div><div> 말라르메는 정조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서서히 대상을 환기할것이라고 하였고, 리처즈는 이질적사물의 <<밸런스 (균형)>>라고 하였고, 루이스는 <<은유는 일종 지름길>>이라고 하였고, 김춘수는 <<리상적인 짝을 찾아주는것이 상상>>이라고 하였다. <<대상의 환기>>, <<밸런스>>, <<지름길>>인 <<은유>>, <<리상적인 짝>> 들은 모두 시적상관물에 대한 결론성적인 정확한 말이라고 하여도 무방하겠다. 대상의 환기도 두가지 사물이나 사건을 련계시키는 일이고 밸런스도 이질적인 두가지 사물이나 사건을 련계시키는것이고 , 은유도 두가지 사물이나 사건을 련계시키는 일이고 리상적인 짝도 두가지 사물이나 사건을 련계시키는 일이다. 시적상관물은 간단한 언어들의 련계로도 표현될수있고 시구로도 표현될수있고 한편의 시로서도 표현될수있다. 시적상관물은 모든 수사법을 집대성한 예술적기법이라 해도 좋고 예술을 생성하는 오작교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박진환은 <<사물-변용-대용-이미지>>라는 그라프적인 방법을 제공하고있는데 이것은 시적상관물의 도해를 그린것이라 해도 좋고 이미지 탄생의 순서를 배렬한것이라 해도 좋겠다.</div><div> <<나는 내 생애를 커피 숟갈로 되질해 버렸다>></div><div> <<수술대위에 누운 마취된 환자처럼/저녁하늘을 배경으로 사지를 뻗고있는 지금>></div><div> 엘리어트가 <>에서 창조한 세계적 명성을 가진 이러한 이미지들은 시적상관물의 전범이라 하겠다. 하루하루 그럭그럭 허송하는 생애를 <<커피 숟갈로 되질해 버렸다>>는것으로 대용하였고, <<저녁하늘을>> <<수술대위에 마취된 환자>>로 변용하였고, <저녁하늘>>과 <<사지를 뻗고있는>> <<수술대위에 누운 마취된 환자>>는 <<지금>>이라는 사회상황을 반영하는, 즉 얼빤하고 흐리마리한 사회상황을 예술화한 시적상관물이라겠다.</div><div></div><div> <<진리의 청혼자-그대는?>>.</div><div>이렇게 그들은 비웃었다-</div><div><<아니다! 한 사람의 시인에 불과하다!</div><div>간교하고 약탈군이고 몰래 접근하는 짐승이다</div><div>속이지 않으면 안되는</div><div>알고서 일부러 거짓말하는 짐승이다</div><div>먹이를 노리고</div><div>화려한 가면을 쓰고</div><div>스스로를 도깨비로 만드는</div><div>스스로 수확물이 되는 짐승이다.</div><div></div><div> 니체의 시 <<광대에 불과하다! 시인에 불과하다!>>의 한 대목이다. 시인을 <<진리의 청혼자>> <<략탈군>>, 여러가지 <<짐승>>이라고 한것은 현대시, 시인을 표현하는 시적상관물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현대시 시인들이 전통을 부정하면서 전문적으로 낯설게 하는데서 얻어진 칭호라겠다.</div><div> 시적상관물은 이질적인 사물의 동일성을 추구하여(어떤 때는 그 미비한 동일성도 관계하지 않고) 이미지화하는데 그 특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것이 바로 <<짝>>을 맞추는 <<지름길>>이며 예술의 <<유일한 방법>>이라겠다. 이 <<지름길>>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가? 아래와 같은 몇가지 방법으로 걸어갈수 있다고 필자는 모색해 보았다. 색깔에 의한 시적상관물 설정, 모양에 의한 시적상관물 설정, 움직에 의한 시적상관물 설정, 소리에 의한 시적상관물 설정, 속성에 의한 시적상관물 설정, 의인(의물)화에 의한 시적상관물 설정, 이 여섯가지 시적상관물 설정을 한가지 한가지씩 풀어보기로 하자</div><div><br></div> 제1절 색깔에 의한 시적적상관물<div></div><div> 색깔, 우리들의 눈을 흥분시키고 우리들의 마음을 흔들어주는 색깔이다. 색깔, 이 세상의 단조로움을 극복해주는 천사이다. 모든 시각적사물은 색깔을 지니고있다하겠다. 하늘은 하늘의 색깔이 있고 해는 해의 색깔이 있고 달은 달의 색깔이 있고 별은 별의 색깔이 있다. 대지에서 살고있는 모든 사물들도 색깔이 있다. 산은 산의 색깔, 강은 강의 색깔, 흙은 흙의 색깔이 있다. 개구리도 파리도 모래도 풀도...죄다 자기의 색깔이 있다. 색깔은 특정된 사물의 특성을 나타낼뿐만아니라 존재를 나타내기도 한다.</div><div> 사물들은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색깔이 변하기도 한다. 제일 잘 변하는 것은 인간의 색깔이라 하겠다. 백색인종, 황색인종, 흑색인종으로 존재하는 인간은 사람마다 때에 따라 수요하고 추구하는 색깔이 달라 련속부절히 옷을 갈아입으며 색깔을 변화시키고있다. 예로부터 색깔은 인간의 장식의 수단이였고 희로애락 발로의 징표이기도 하였다. 색깔의 함의는 한없이 풍부한 것으로서 한입으로 다 말할수 없다.</div><div> 색깔은 시라는것이 탄생한 날부터 시인의 추구의 대상이였을것이다. 현대시인들도 례외가 아니다. 현대시인들은 색깔의 근사성으로부터 시적상관물을 설정하여 이미지 만들기를 즐긴다고 하겠다. 색깔은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현대시가 탄생되는 하나의 샘이라겠다. 시인들은 이 샘을 파서 맑은 샘물에다 구름도 띄우고 새도 띄우고 나무도 그려보고 산도 그려보고 바람도 스치게 하고 얼굴도 비춰본다.</div><div> 색깔로 찾은 시적상관물은 막강한 에네르기를 갖고있으며 현란한 이미지를 그려주고있다겠다.</div><div></div><div>바다는 자신을 마신다 바다는 자신을 먹는다</div><div>바다의 창백한 피는 생각하는 피이다</div><div>바다는 스스로 변화를 꾀하며 춤추는 영웅을 위해</div><div>자신을 풀어헤친다</div><div>바다는 포말속에서 뒹군다</div><div>그런가 하면 눈을 뜨지 않은 채로도</div><div>바다는 바다의 노예를 죽도록 괴롭힌다</div><div>바다의 노예들에게 자신을 떠맡긴 후에</div><div>나는 이와 같이 실감나는 파멸을 경외한다</div><div>클레오파트라도 살로메도</div><div>결코 이와 같이 파란 드레스를 걸쳐보지 못했을걸</div><div>이토록 증오에 고무된 심장은 갖지는 않았을걸</div><div>바다는 큰 술통을 갖고 있다 거둬들인 포도로 그 큰 술통이 가득하다</div><div>바다는 청록의 눈을 가졌으며 각빛깔을 뜬 눈을 가졌다</div><div>바다는 스스로 마신다 바다는 자신에게 먹힌다</div><div>심지어는 포도재배자들도 먹어치울 태세다</div><div></div><div>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후 <<시는 비밀의 무기이다>>고 선언한 장꼭도의 시 <<바다>>의 전문이다.</div><div> <<자신을 마시고 자신을 먹고>> <<자신에게 먹히는 바다>>에는 무슨 비밀이 뭍혀있는가? 그 바다는 <<큰 술통을 갖고있는>> 바다이며 <<거둬들인 포도로 그 큰 술통이 가득한>> 바다다. 이제 비밀이 열리였다. <<포도재배자들까지도 먹어치울 태세>>를 가진 바다는 다름아닌 포도주의 시적상관물이다. 이 포도주의 시적상관물이 어찌하여 바다로 설정되였는가? 색깔의 비슷함에 의하여 설정된 것이다. 바다도 푸르고 포도주도 푸르다. 그러니깐 <<짝>>이 무어진것이다. <<바다는 자신을 마신다 바다는 자신을 먹는다>>는 첫 시구를 얽었을 때 우리는 당혹스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자신을 마시고>> <<먹는>> 바다도 있단말인가? 하는 의문이 불쑥 뛰여나온다. 하지만 이 <<바다>>가 포도주의 시적상관물이라는 단정이 내렸을 때 시인의 기발한 착상에 깜짝 놀라게 된다.</div><div> 놀람보다 심각한 것은 이 시의 내함이라겠다.</div><div> 술의 마술을 쓴것같은 <<바다>>는 파멸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시인의 심정의 발로가 아닐가. 자신을 마시고 먹히우고 먹어버리는 <<바다>>는 생명을 가진 <<살아있는 피>>이다. 이 피는 <<춤추는 영웅을 위해>> <<자신을 풀어헤칠>>뿐만 아니라 자신을 <<노예들에게>> 내맡기고 <<노예들을 죽도록 괴롭히기>> 위하여 거대한 파도로 <<뒹군다>>. 이집트 프롤레아오스의 최후의 녀왕이며 재치와 미로로 유명했던 녀왕인 클레오파트라도 <<걸쳐보지 못했던>> 귀중한 <<파란 드레스>>, 헤룻왕의 이붓 딸로 왕의 생일잔치에 황홀하게 춤추고 요한의 머리를 베여가지는 소원을 이룩했던 실로메도의 증오보다 더 <<증오에 고무된 심장>>을 가지고있는 바다, 그 푸른빛 바다의 눈은 죽은 눈이 아니라 원본을 들여다보는 <<각빛갈을 띤 눈>>이다. <<눈>>은 보고있다. 자신만 먹히우는것이 아니라 <<포도재배자들까지도 먹어치울 태세>>를 가진 바다를. 이 세상의 모든것을 파멸하고있으며 파멸에로 몰입시키고있는 바다를 <<눈>>은 보고있는것이다. 바다-포도주, 포도주-바다 그것은 인간이 사는 세상이다. 어쩔수 없이 파멸에로 치달아 오르고있는 세상을 시인은 포도주-바다를 통하여 각인시키고 있다하겠다.</div><div></div><div>은행나무그늘엔</div><div>노란 음부들이 떨어진다</div><div>은행잎파리에도</div><div>내 귀여운 어휘들을 적어본다</div><div>적어놓은 어휘들도</div><div>제법 노란 발음을 한다</div><div></div><div> 양영문의 <<은행산조>> 전문이다. 깔끔한 맛이 나는 이 시는 단조로운 같지만 결코 단조롭지 않는 시라겠다.</div><div> 가을 은행나무잎들은 노란 물이 들어 가을의 시간을 타고 한잎 두잎 땅에 떨어진다. 이러한 노란 은행나무잎을 시인은 <<노란 음부>>로 변형시키고있다. 시인은 음부라는 청각적언어에 비실재적인 노란색을 올리여 <<노란 음부>>라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고있으며, 색깔을 맞추어 노란은행잎의 시적상관물로 떠올리고있다. 시인은 일반적인 어휘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하는 <<귀여운 어휘>>들을 <<적어놓는다>>. 그러면 <<어휘들이>> <<제법 노란 발음을>> 하면서 떨어진다. 시인의 기지와 묘미가 황홀하게 안겨오는 색갈에 의한 시적상관물설정이라 하겠다.</div><div> 시인은 간결하고 깔끔한 <<은행산조>>로 회귀의 아름다움이라는 엄청난 뜻을 깔아두었다하겠다.</div><div><br></div> 설쇠는 날에<div>애들이 터지운 폭죽이</div><div>어쩌면 4월의 비속에서</div><div>또 불꽃을 튕길가</div><div>떨리는 연분홍치마에</div><div>차분히 스며드는</div><div>비의 이미지</div><div>살짝 화장한</div><div>예쁜 웃음이 어줍게 떠오른다</div><div>비속에서 </div><div>어떻하면 즐거울수 있을가</div><div>눈부신 색조로</div><div>어색하게 그리는 풍경</div><div>비가 멎으면</div><div>아름다운 해님앞에서</div><div>수집음을 머금고 사라지리</div><div></div><div> 김학천의 시 <<진달래>> 전문이다. 시인은 진달래의 색깔을 고리로 잡고 놓지 않으면서 <<폭죽>>으로, <<불꽃>>으로, <<살짝 화장한 예쁜 웃음>>으로, <<어색하게 그린 풍경>>으로 연해연방 변형시키고있다. 시인은 진달래를 통하여 비와 진달래의 교감을 노래하고있는것이다. 어찌보면 남녀의 사랑의 장면을 스케치한것인지도 모른다.</div><div></div><div>........................</div><div>정녕 하늘이 알아본게다</div><div>억만개 진주가</div><div>낟알로 맺혔구나</div><div>--오, 사막의 태양</div><div>이 세상 망각의 한 끝에</div><div>억만개 태양을 걸어놓고</div><div>하늘과 마주 웃는</div><div>내다, 사막의 주인이다</div><div>그 예날 누구는</div><div>해를 쏘아 떨궜다지만</div><div>해를 심어 떨구는 그 재간</div><div>20세기 신화의 주인-</div><div>아무렴, 장수 왔다 울고 갈테지!</div><div>하늘의 해가 못닿는 구석</div><div>하루길에 지쳐 잠들제</div><div>나의 태양은 야직을 선다</div><div>하늘땅이 바꾸는 그 대거리</div><div>삭막한 이 세상에서</div><div>아예 밤은 썩 지워버리자</div><div>진주농사 해농사-</div><div>빛으로 적어보는 아름찬 소출</div><div>이제 줄줄이 고압선따라</div><div>해살처럼 뻗어갈 힘의 원동력</div><div>홰치며 일어서는 이 사막에서</div><div>거짓 아닌 전설도 만풍년이다!</div><div>아무렴,</div><div>나는 -</div><div>해를 심는</div><div>-감농군! </div><div> </div><div> 호방한 정서와 격정으로 끓어번지는 김철시인의 <<해를 심는 감농군>>의 앞부분 세개련을 잘라버린 시문이다. <<화력발전소실기>>라고 부제를 달고 씌여진 이 시는 발전소창업자들에 대한 극찬으로 가득 찬 서정시이다. 발전소창업자들의 노력의 성과인 전등불을 해라고 읊으면서 해의 창조자들을 감농군이라고 하였다.</div><div> 이 시에서 김철시인은 어찌하여 전등불을 해라고 지칭하였는가가 문제이다. 전등불을 해로 둔갑시킨데는 두가지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한가지는 전등불빛과 해빛의 빛이 비슷한 색깔에서 류추되였다고 할수있고 다른 한가지는 전등불도 동그랗고 태양도 동그란 모양이기때문이다. 이 두가지 리유중 주요한것은 빛이다. 그러므로 가히 색깔로 찾은 시적상관물이라 하여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전기불이 해로 되었으니까 화력발전소로동자들은 전기를 만드는것이 아니라 해를 만든다고 할수있다. 그럼 해를 심는 감농군이라는 언어는 어떻게 탄생하였을가가 문제로 나서게 된다 이 시의 주인공들은 화력발전소로동자들인데 시인은 감농군이라고 한다. 이것은 성질에 의하여 변형되는것이므로 다섯번째를 잘 새기면 저절로 풀릴 문제이기에 더 언급하지 않겠다. 이쯤하면 관심있는 독자라면 시를 다시 읽어보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알수있으리라 믿는다.</div><div></div><div>제2절 모양에 의한 시적상관물</div><div></div><div> 사물의 색깔처럼 사물의 모양도 시인의 눈길을 끈다하겠다. 시인은 누구보다 사물의 모양과 친하려하며 사랑하려 한다. 사물의 모양은 시인을 흥분시키며 시인의 령혼을 자극한다. 사물의 색깔처럼 사물의 모양도 시인에게 있어서는 신비한 존재이다. 천차만별의 사물의 모양을 보고 시를 쓴 시인도 헤아릴수 없이 많거니와 시의 수량은 더욱 헤아릴수 없이 많을것이다.</div><div> 모양은 사물의 특성의 하나이며 존재방식의 하나라겠다. 모양이 없는 사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양은 각각으로 자기 독특한 생김새를 갖고있으며 나름대로의 미를 발하고있다. 길고 짜르고 둥글고 넙적하고 두텁고 얇고 삼각형, 릉형, 장방형...규칙적이기도 하고 불규칙적이기도 한 모양의 종류와 양상은 끝이 없으리라. 모양은 색깔보다 상대적으로 고착성이 강하고 변화가 적다하겠다.</div><div> 사물의 모양의 상사성은 시인이 시적상관물을 포착하고 끌어내는 또 하나의 원천이라 하겠다.</div><div></div><div>한밤중 고요한 부두위</div><div>밧줄 드리운 높은 돛대 끝에</div><div>달이 걸렸고, 그렇게 먼 것은</div><div>놀다 잊은 어린아이의 풍선뿐이다</div><div></div><div> 이미지시에 철학적 뒤심으로 나섰다는 흄은 생전에 시험작 다섯편을 썼다고 하는데 이 <<부두위>>의 전문은 그중의 한편이다. 정서적인 표현을 완전히 배제하고 이미지만 떠올렸다하겠다. 간결한 넉줄의 시속에 모양에 의한 시적상관물을 찾아놓은것으로 시는 끝을 내고있다. <<돛대끝>>에 높이 걸린 달이 장난에 미쳐서 놀다간, 그만 잊어버리고 간 <<어린아이의 풍선>>이라는것이다. 달도 모양이 둥글고 풍선도 모양이 둥글다. 두 사물이 다 모양이 둥글다는것으로부터 시적상관물을 설정한것라겠다. 혹자는 이런 시도 시인가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 이런것도 시이다. 시일뿐만 아니라 이미지시의 하나의 전형으로 될수있는 시이다. 시란 길어서 시인것이 아니고 짧아서 시가 아닌것이 아니다. 우리는 파운드가 7년이란 긴긴 시간에 <<지하철 정거장에서>>라는 두줄의 시를 써낸것을 앞에서 읽어보았다. 흄의 <<부두위>>라는 넉줄의 시를 읽으면 바람이 잦은 아늑하고 아름다운 그림같은 바다가의 부두풍경을 만나게 된다. 그 풍경속에서 부두를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게 된다. 또 이질적인 사물의 동일성을 추구하여 <<서서이 대상을 환기>>시키는 묘미가 어떤것인가를 터득하게 된다. 특히 청년도 아니고 장년도 아닌 어린아이, 그 천진한 어린아이의 풍선은 순수성의 추구라겠다. 이 한장의 풍경화는 영원히 우리 가슴에 남아있을것이다.</div><div> 릴케의 <<눈물단지>>라는 시를 읽어보자.</div><div><br></div> 다른 단지라면 술을 담겠네 다른 단지라면 기름을 담겠네<div>벽이 그리는 텅 빈 배에 말일세</div><div>나는 치수야 더 클것도 없지만 호사는 으뜸이라</div><div>쏟아지는 눈물을 받을가해서 패인 몸일세</div><div>술이라면 단지에 더 괴겠지 기름이라면 더욱더 맑아지겠지</div><div>하지만 눈물은 어찌되는가ㅡ 눈물덕분에 내 몸 무거워지고</div><div>앞이 더 안 보이고 굽은 등에서 반짝이다가</div><div>필경은 깨질것만 같더니 텅 비고말았네</div><div></div><div> 장미의 시인이라 불린다는 릴케는 <<눈물단지>>란 무엇가를 끝까지 밝히지 않은채 종지부를 찍고있다. <<술단지>>도 아니고 <<기름단지>>도 아니고 <<벽에 그리는 텅 빈 배>>이고 <<패인 몸이고>> 눈물이 <<굽은 등>>에서 반짝거리며 <<몸>>을 무거워지게 하는, 종당에는 <<텅 비고>>마는 사물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눈확이라겠다. 얼굴에 패여들어간 타원형의 눈확과 속이 비인 <<단지>> 는 모양에서 비슷한 점이 없다고 할수 없다. 그리고 푸른 바다에 떠있는 빈 쪽배와도 상사성이 없다고 할수 없는 생김새다. 눈확은 몸의 일부분이며 <<패인 몸>>의 일부분이다. <<굽은 등>>은 눈확의 언저리, 휘우듬한 눈확의 언저리, 휘우듬한 등, 여기에 바로 동일성의 초점이 있다하겠다. <<눈확>>의 시적상관물로 <<술단지>>, <<기름단지>>, <<텅 빈 배>>가 등장하고 <<눈언저리>> 시적상관물로는 <<굽은 등>>이 등장한다. 이러한 시적상관물들은 모양에 의하여 설정된것이라 하겠다. 시인은 이런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면서 눈물로 인한 <<호사>>의 <<으뜸>>과 <<몸>>의 <<무거워짐>>을 진술하는것으로 눈확의 희비극과 인간 또는 인생의 희비극을 노래하고 있다하겠다.</div><div> 한국의 최선령시인이 쓴 <<아침>>이라는 시도 모양에 의한 시적상관물의 설정이 잘된 시라하겠다.</div><div></div><div> 아침</div><div> 리선령</div><div></div><div>암흑의 물결을 타고</div><div>선인장의 비장한 가슴으로</div><div>이어서는바다</div><div></div><div>뱃길을 잃은 마녀</div><div>해심에서 나와</div><div>암초위에서 백기를 든다</div><div></div><div>차가운 정적의 쟁반위로</div><div>구근(球根)처럼 내미는</div><div>지구의 여린 얼굴</div><div></div><div>황금의 수레바퀴는</div><div>알몸의 부끄러운 그림자를 벗기는 하늘의 손거울</div><div></div><div>간밤에 신음하던 참새의 꿈이</div><div>금붕어비늘이 되어 반짝이는</div><div>나의 바다여</div><div></div><div> 시 <<아침>>에서는 모양으로부터 초점을 맞춘 시적상관물이 련마다 나타나고 있다. 1련에서의 <<선인장 가슴>>은 모양과 색깔로 혼용된 파도의 시적상관물이고, 2련에서 <<백기>>도 모양과 색깔이 혼용된 파도의 시적상관물이고, 3련에의 <<쟁반>>은 모양으로 인한 바다의 대용이고, <<구근>>과 <<여린 얼굴>>은 둥그런 모양에 의한 <<아침해>>의 대용이고, 4련에서의 <<황금의 수레바퀴>>와 <<하늘의 손거울>>은 또 모양에 의한 태양의 대용이다. 마지막 5련의 <<금붕어비늘>>은 모양과 빛으로 찾은 파도의 대용 즉 시적상관물이라겠다.</div><div> 이러한 변용, 대용, 이미지화는 모두 모양의 동일성으로부터 떠올린 시적상관물들의 흐름을 이루고있다. 그 흐름속에 장쾌한 아침바다를 노래하는 시인의 사랑과 숨결이 합류하고 있겠다하리.</div><div> 이번에는 리상각시인이 어떻게 모양을 리용하여 변형하는 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리상각시인은 <<아침에>>라는 시를 이렇게 쓰고 있다.</div> 아침에 <div>리상각</div><div></div><div>산이 아침에 커다란 초불을 켜들고</div><div>기도를 드린다</div><div>새들이 젖은 날개를 털며</div><div>짙푸른 숲에서 합창을 한다</div><div>축복받은 이들이 산마루를 바라고</div><div>새삶을 창조하고 있을 때</div><div>산은 그 초불을 하늘에 띄운다.</div><div></div><div> 김철시인은 전기불을 해라고 하였는데 리상각시인은 아침해를 초불이라고 한다. 김철시인이 색깔로 변형을 하였다면 리상각시인은 모양으로 변형을 하였다고 하겠다. 아침에 동산에서 금방 솟아오른 태양이 둥그렇다는것을 우리들은 다 알고있다. 밤에 초불을 켜놓으면 둥그스럼한 불이 빛을 뿌린다는것도 우리는 알고있다. 어상사한 이 둥그스럼한 모양을 시인은 변형의 조건으로 설정하고 있는것이다.</div><div> 리상각시인의 시 <<아침에>>서 우리는 한가지 생각해 볼봐가 있다는것을 알아야겠다. 시적상관물을 설정한다음 어떻게 전개시키느냐이다. 리상각시인은 아침과 관계되는 사물 새와 기도를 떠롤리면서 새는 숲과 관계있으므로 숲과련계시켜 쓰고, 기도는 축복받는 사람들과 관계있으므로 축복받은 이들을 시에 끌여들이고있다. 그것들의 관계를 시인은 새롭게 해석하고있다고 하겠다.</div><div></div><div>제3절 움직임에 의한 시적상관물</div><div></div><div> 움직인다 해도 달도 지구도. 움직인다 강도 산도 바다도. 움직인다 나무도 풀도. 움직인다 바위도 모래도 바람도. 세상 사물이 모두 움직이였고 움직이고 있으며 영원히 움직일것이다. 일상적인 눈길이라면 벼랑은 움직이지 않는 전형이라겠다. 허나 벼랑도 움직이고있다. 벼랑밑에 가보라, 바위사태 돌사태를 만나지 않는가. 이것들은 벼랑의 움직임속에서 붙어있지 못하고 떨어져나은 벼랑의 산물이며 부스러기이다. 바람이 스치고 비에 씻기고 세월의 가고옴에 따라 벼랑이 움직인 증명물이다. 우리들의 가녀린 시력으로 보아내지 못할뿐이지 벼랑이 움직이지 않는것은 아니다. 사물은 운동하며 운동속에서 존재한다하겠다.</div><div> 사물의 움직임은 예로부터 문학가들이 몰라서는 안되는 현상이였다. 어느 한 사물의 움직임에 대하여 어느만큼 알고있는가는 문학인들의 소질을 가늠하는 자대라고도 할수있겠다. 움직임을 많이 알수록, 움직임에 대한 상식이나 견식이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해박하고 학식있고 조예가 깊다하겠다. 소설가도 좋고 시인도 좋고 극작가도 좋고 그들 모두가 사물의 움직임을 주시하고있으며 사물의 움직임속에서 무엇인가 터득하고 깨우치려 한다. 글을 쓰는 자체도 움직임의 표현이라겠다. 모든 작가는 사물의 움직임을 그리워하고 사물의 움직임을 사랑한다.</div><div> 현대시 시인은 사물의 움직임을 새롭게 보아냈을 때 시를 쓰지 않고는 잠들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움직임도 색깔이나 모양처럼 현대시를 낳는 원천이라겠다.</div><div> 사물들의 움직임은 이미지시가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아니 될 한가지 중요한 조성부분이다. 사물의 색깔이 표현되지 않은 경우와 사물의 모양이 표현되지 않는 경우의 시는 있을수있으나 사물의 움직임이 표현되지 않는 경우의 시는 있을수 없다하겠다.</div><div></div><div>바다는 뿔뿔이</div><div>달어 날랴고 했다</div><div>푸른 도마뱀떼 같이</div><div>재재 발렀다</div><div>꼬리가 이루</div><div>잡히지 않았다</div><div>흰 발톱에 찟긴</div><div>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div><div></div><div> 정지용의 시 <<바다.2>>의 앞부분이다. 바다의 썰물을 노래한 시이다. 파도가 해안으로 밀려왔다가 밀려가고있는 상황을 <<푸른 도마뱀떼>>라고 하였다. <<재재 발리여>> <<꼬리가 이루/잡히지 않는>> <<도마뱀떼>>, <<흰 발톱에 찢기여>> 생기는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썰물이 밀려가는 모습을 세세하게 이미지화하고있다.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는 밀려간 썰물에 의하여 드러난 모래와 자갈이 깔린 바다가이고, <<흰 발톱>>은 이런 바다가에 와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의 물결이라겠다. 이 시에서 주역을 일으키는 시적상관물은 <<푸른 도마뱀떼>>이다. 기타 시어들인 잡히지 않는 <<꼬리며>>, <<흰 발톱>>이며 <<생채기>>며는 <<푸른 도마뱀떼>>에 의해 파생된 시적상관물이며 이미지라겠다.</div><div></div><div>밤의 파도-바다의 양과 돌고래가</div><div>히아신스의 가벼운 짐을 지고</div><div>장미 월계수와 트래배 어린이</div><div>텅 빈 으스트리아 궁전의 둘레에 바람을 일으킨다</div><div></div><div>밤의 파도-두개의 조개가</div><div>물살을 헤치고 바위위로 떠오르며</div><div>화려한 머리띠며 자주빛덩이를 억수로 퍼붓는다</div><div>바다의 중앙으로 흰 진주는 다시 굴러간다</div><div></div><div> 독일 벤의 시 <<밤의 파도>의 전문이다. 밤의 파도의 시적상관물을 <<양과 돌고래>>(2련)로 설정하고있다. 파도가 해안을 향하여 하얀 갈기를 나붓기며 퍼렇게 솟구치며 무너지며 또 솟구치는 것을 <<양과 돌고래>>라고 하였고 물결이 해변의 바위로 치달아오르는것을 <<두개의 조개>>라고 은유하고있다. <<희아신스의 가벼운 짐>> <<화려한 머리띠며 자주빛덩어리>>, 그리고 <<흰 진주>>는 부서지는 파도의 하얀 빛깔에 의하여 잡은 시적상관물이라겠다.</div><div> 정지용과 벤은 다 같이 바다를 쓰고있으며 파도를 쓰고있다. 하지만 두시인의 눈길은 다르다. 정지용은 바다의 시적상관물을 <<푸른 도마뱀떼>>로, 벤은 <<양과 돌고래>>로 각각 설정하였고 정지용은 부서지는 파도의 시적상관물을 <<잡히지 않는>> <<꼬리>>와 <<흰 발톱>>으로 설정하였지만 벤은 <<히아신스의 가벼운 짐>> <<화려한 머리띠며 자주빛덩이>>로 시적상관물을 설정하였다. 정지용은 종적인 추구를 하였고 벤은 횡적인 추구를 하였다. 정지용의 시야는 한사물에 머물러있지만 벤의 눈길은 여러 사물을 휩쓸고있다. 정지용의 이미지는 하나를 파고들지만 벤의 이미지는 폭을 넓히기 위하여 이미지를 자주 바꾸고있다. 정지용은 화폭의 묘미를 추구하는데로 몰입한다면 벤은 거창한 화폭을 펼치는데로 돌입한다고 할가</div><div></div><div>감별없는</div><div>노란 부화상</div><div>자연산</div><div>가을 병아리떼가</div><div>거리로 쏟아져나왔다</div><div>록음의 철망을 빠져나와</div><div>날개짓 종종 걸음으로</div><div>길을 읽고 헤매는</div><div>집단탈출</div><div></div><div> 한숙희의 <<은행나무잎>>이다. <<노란 부화상>>은 단풍든 은행나무를 색깔로 찾은 시적상관물이고(혹은 은행나무잎이 모록이 떨어진것을 보고) <<가을 병아리떼>>는 가을바람에 무리를 지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노란 잎들의 시적상관물이라겠다. <<록음의 철망>>은 은행잎들이 푸르렀을 때를 변용</div><div>형해서 대용한것이라겠다. 이쯤하면 내용을 리해할만한 수수께끼는 모두 풀어놓았다고 하겠다.</div><div> </div><div>푸르른 벼개봉밑에서</div><div>푸르른 뱀 한 마리 푸르르게 기여나온다</div><div>수억만번도 더 떨어진 락엽을 헤치였건만</div><div>아직도 푸르른 꼬리가 다 나오지 않았다</div><div>푸르른 뱀은 그냥 푸르르게 기여가고</div><div>당신이 꼬였던 이브는 어디로 가고</div><div>이브가 속였던 아담은 어디로 갔는가</div><div>푸르르게 기여가는 푸르른 뱀이여</div><div>태초에 잘못한것은 아니였던가</div><div>한여람쯤되는 이브에게 금단의 열매를 먹였어도</div><div>푸르르게 열였던 하늘에 푸르르게 열였던 땅에</div><div>오늘처럼 때자국이 어룽거리지 않았을수도</div><div>당신도 언녕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며</div><div>휴식의 향연을 맛보았을수도 있었으리</div><div>이제 또 어디 가서 이브를 찾으랴</div><div>푸르르게 푸르르게 기여가는 뱀이여</div><div>아직도 꼬리가 다 나오지 못한 푸르른 뱀이여</div> 움직임으로 시적상관물을 찾은 필자의 졸작 <<해란강>>이다. 해란강이 굽이굽이 휘돌아 흘러가는것을 보고 <<푸르른 뱀>>이 그냥 기여가고있다고 필자는 상상하고 움직임으로 해란강의 시적상관물을 <<푸르른 뱀>>으로 설정한 것이다. 형용사 <<푸르른>>을 자주 반복한 것은 <<푸르른>>이란 이 언어가 물과 뱀의 색깔에 대한 표현도 있겠지만 언어의 부드러움과 률동에 대한 추구에서 였다. <<푸르름>>과 <<때자국>>은 완전히 상반되는 뜻을 가진 언어표현으로서 세상이 깨끗했으면 하는 바램을 표현한것이라고 하겠다.<div> 우리가 시를 쓸 때 같은 제목을 쓰더라도 내용과 형식이 이미 쓴것보다 꼭 달라야 하고, 제목의 가지고있는 기성적함의와 이미지가 꼭 달라야 한다는것을 각별히 주의하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시인만이 발견한 세계를 써야 하는것이다. 해란강에 대한 시는 많지만 해란강을 <<푸르른 뱀>>이라고 한 시인은 아마 없는것으로 알고 이렇게 시적상관물을 설정하고 나름대로 한번 노래해 보았다.</div><div> 시적상관물의 부동한 설정에 따라 감각이 다르고 감수가 다름을 확연히 느끼게 된다. 현대시는 무엇을 썼는가보다 어떻게 썼는가를 더 중시함을 알아야겠다고 생각된다.</div><div> 이미지시는 내용보다 형식을 더 중시하겠다고 하겠다. 형식의 새로움으로부터 내용의 새로움을 추구하기도 한다. 새로운 형식은 기필코 새로운 이미지와 새로운 시를 낳게 마련이다. 이미지자체가 내용이고 이미지자체가 시이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꼭 새로운것이여야 한다. 새로운것이 아니면 내용을 중복하게 되고 새 내용이 없으면 언어장난을 치게 된다.</div><div> </div><div>제4절 소리에 의한 시적상관물</div><div></div><div>검은 A, 흰 E, 붉은 I, 초록의 U, 청색의 O</div><div>모음들이여</div><div>나는 언젠가 너희들의 내밀한 탄생을 말하리라</div><div>A, 지독한 악취 주변을 윙윙거리는</div><div>굉장한 파리떼들의 털투성이의 검은 코르셋</div><div>자랑스러운 빙하의 창 백인왕</div><div>산형화의 흔들림</div><div>I, 적색, 내 뿜는 피, 화가 났을 때나</div><div>회개의 감흥을 느낄 때 아름다운 입가의 미소</div><div>U, 원형, 록색 바다의 신성한 전율</div><div>동물들로 씨뿌린 방목장의 평화</div><div>O, 이상한 날카로운 소리로 가득찬 지고의 나팔세계</div><div>와 천사가 가로지르고 있는 고요함</div><div>-오, 신의 눈의 보라빛 광선 오메가여</div><div> 랭보의 시 <<모음들>>의 전문이다. 랭보자신도 위대한 발견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적이 있다는 <<모음들>>이다.</div><div> A가 어덯게 검은 색갈이 되고, E가 어떻게 흰색갈이 되고, l가 어떻게 붉은 색깔이 되고, U가 어떻게 초록색갈이 되고, O가 어떻게 청색이 되는가? 랭보는 무엇이라고 답변할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이 모음들의 시적상관물을 찾을 때 발음에 초점을 멎추었겠다고 생각된다. 구라파시인들은 운률을 특별히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겠다. 운률의 새로운 조합도 시라는 견해가 있는 구라파이다. A, E, l, U, O, 하고 소리를 내면서 그 소리로부터 색채를 끌어내였다고 함이 적당하리라고 맏어진다.</div><div> 랭보는 모음소리의 시적상관물로 색채들을 떠올린 다음 그 색채들로부터 다시 새로운 사실들을 떠올리고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중 삼중의 시적상관물의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고있다 하겠다.</div><div> A를 검은색상으로, 검은 색갈로는 털투성이 파리들의 <<검은 코로셋>>을, E는 하얀 색갈로, 하얀 색갈로는 <<물거품>> <<천막의 순진함>> <<빙하의 창>> <<백인왕>> <<산형화의 흔들림>> 등 여러가지 시적상관물을 연해연방 라렬하였고, L는 적색으로, 적색으로는 <<피>>와 <<아름다운 입가의 미소>>를 찾았고 ,U는 초록색갈로, 초록색으로는 <<바다>>의 <<전률>>과 <<동물들로 씨뿌려진 방목장의 평화>>를 찾았고 , O는 청색으로, 청색으로는 울부짖는 <<지고의 나팔세계>> 와 << 천사가 가로 지르고 있는 고요함>> 과 <<신의 눈의 보라빛 광선의 오메가 (끝이라는 뜻)>>를 찾았다. 전반시가 파편문체라겠다. 모음들의 소리를 통하여 <<파리떼>>로부터 시작하여 동물, 식물, 강, 바다, 인간, 천사, 신에 이르기까지의 방대한 세계를 굉장하게 그려놓았다하겠다.</div><div> 현대시는 이질적인 사물들의 동일성을 추구하면서 은유적인수법라렬만으로 훌륭하한 시가 태여나고 있음을 보아낼수있다고 하겠다.</div><div> 소리는 현대시가 시적상관물을 찾는 또 하나의 중개자임을 랭보의 시를 통하여 보아냈다. 세상사물은 모두 소리가 있으며 그 소리는 색깔이나 모양이나 움직임처럼 그 사물의 특성의 하나로서 존재를 알리는 신호이다. 우리가 어떤 소리를 들었을 때 소리를 내는 사물을 보지 않고도 번개가 치는구나 새가 우는구나 개가 짖는구나 강물이 흐르는 구나........ 하는 여러가지 판단을 정확하게 내리게 된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움직이면서 여러가지 소리를 내고있는데 어떤 소리는 우리가 들을수있고 어떤 소리는 우리가 듣지 못하고있다. 듣지 못하는것은 소리가 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간의 귀가 부실하기때문이다. 의사들이 청진기를 끼고 가슴을 대보는것은 귀로 들을수 없는 가슴속의 소리를 들어보려는데 있으며 그 소리에서 가슴속에 있는 기관들의 모병을 확인하려데 있는것이다. 시인도 <<청진기>>를 끼고 남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div><div> 소리에 의하여 설정되는 시적상관물은 어떤 류사성의 추구라기보다 시를 쓰는 시인의 나름대로의 상상력의 산물이라겠다. 다시 말하면 어떤 확실한 근거에 의거하는것이 아니라 시인이 하고싶은대로 설정하면 되겠다고 함이겠다.</div><div>종소리</div><div>눈이 부신</div><div>강물로 흐르네</div><div>내 안을 따라</div><div>나즉이 흔들리는 목선에</div><div>가락 높낮음 결의 교응마다</div><div>파도는 일렁이네</div><div>해지는 수면은</div><div>억만사금파리 뜨는 눈</div><div> (두련삭제)</div><div>구름처럼 흐르는</div><div>여백을 벗어 다가앉는</div><div>쾌청의 산수화</div><div>치마빛 진달래</div><div>개나리 내음 이랑진 기와집 따라</div><div>가슴마다 알맞게</div><div>피여오르는 아지랑이의</div><div>살아야 할 우리 그 노래의 흐름은</div><div>하나의</div><div>강물로 흐르데</div><div> 이병기의 시 <<환희>>다.</div><div> 우선 <<환의>>의 시적상관물을 <<종소리>>로 찾았고 <<환희>>의 대용에 쓰인 이 <<종소리>>의 시적상관물을 <<강물>>로 설정하였다. <<환희>>의 대용에 쓰인 이 <<종소리>>는 진짜 종소리인것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의 표현이거나 어떤 절대자에 대한 표현이라겠다. 이병기시인은 <<종소리>>에 대한 시적상관물을 <<강물>>로 떠올린후 내내 강물에 대한 진술을 하고있다하겠다. 이 <<강물>>도 <<종소리>>처럼 마음속의 강물이며 상상속의 강물로서 <<환희>> 라는 주제를 표현하는 비실재적 대상물일뿐이다. 시인은 강물을 통하여 이미지를 한장한장 번져보고있으며 <<강물>>의 의미를 <<흔들리는 목선>>으로부터 <<억만사금파리의 뜨는 눈>>을 거쳐 <<쾌청의 산수화>>, <<치마빛 진달래>>, <<개나리 내음>>, <<아지랭이>>로 확충시킨다. 이러한 확충은 실은 시인의 에티오피아에 대한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설계라고 하겠다. 이 리상국에 도달하자면 <<강물로 흐르며>> <<살아야 할 우리>>다. 현대시인의 리상은 언제나 지평선이다. 바라볼수는 있지만 도착할수 없는 현실로 하여 그리움과 사랑을 안고 꿈만 꾸어야하는 슬픈 족속이 현대시인이라 하겠다.</div><div> 이제 우리 시단의 현대시 대표의 한사람이라고 불리는 한춘씨의 <<낡은 타악기>> 한편을 더 보자.</div><div></div><div>숨가쁜 기차가</div><div>산모퉁이를 넘는다</div><div>두갈래 레루장을 흔들며</div><div>모든 것이 낡은대로</div><div>소리내는 타악기가 굴러간다</div><div>큰 딸의 기별을 받고</div><div>빈 손으로 찾아가는 할머니</div><div>들고 갈것은 모성애 하나뿐</div><div>이빠진 사기그릇처럼 말이 없다</div><div>해거름 실어 여위여지면서</div><div>한줌의 한숨을 손으로 질러넣고</div><div>시름을 풀지 못하고있는데</div><div>바람개비 도는 동구역 질러</div><div>어둠속에 묻히는 기차</div><div>인고가 침전된 각질속에</div><div>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없다</div><div></div><div> 한춘씨는 낡은 타악기를 달려가는 기차로 상상하면서 이 시를 써내려가고 있다. 타악기가 기차로 탈바꿈하는데는 레루장우로 굴러가는 기차의 덜컹거리는 소리이다. 타악기소리와 덜컹거리는 기차의 소리는 소리의 음색과 률동에서는 별로 같은 점은 없겠지만 소리라는 면에서는 같은 사물이라고 할수있는것이라겠다. 한소리를 다른 한소리로 옮겨놓는것도 소리로 찾는 시적상관물의 한가지 설정방법이고 소리를 통하여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이동시키는것도 한가지 방법이라겠다. 한춘시인은 이 시에서 이 방법들을 능란하게 구사하고 있는것이다. 어려운 인생을 살아가고있는 할머니를 떠올리면서 <<인고가 침전된 각질속에/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없다>>고 시인은 탄식한다. 오케스트라라하면 자연히 웅위롭고 화려한 음악세계이겠지만 렬차에 앉은 할머니한텐 그런 세계가 차례지지 않았다. 인고가 쌓이고 쌓여 단단한 껍데기로 되었는데 그 깨여지지 않는 인고의 껍데기속에서 헤여나오지 못하고 살아가는 할머니의 이미지는 밑바닥에서 밟히며 인생을 살아가고있는 사람들의 축도가 아닐가.</div><div><br></div> 익어가는 달빛이 아플가<div>차마 못밟아</div><div>가던 길 멈춰선</div><div>나무 한그루</div><div>흐르는 달빛에 흐느적거려</div><div>해묵은 심사를 파아랗게 젖힌</div><div>한포기 물초</div><div>한가닥 피리소리</div><div>휘휘 저어서</div><div>감아올린 옛꿈은</div><div>언제면 저 달속에</div><div>하아얀 들국화로</div><div>눈이 시게 피여볼가</div><div></div><div> <<추억>>으로 우리 시단의 현대시문을 열었다고 하는 김정호시인의 시 <<아리랑>>의 전문이다. 아리랑은 우리민족의 전통가요이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력사의 한 장이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정서이며 문화이다. 이 노래소리를 김정호시인은 두가지로 변형시키고 있다. 첫째로는 소리를 사물로 변형시키고 둘째로는 소리를 다른 소리로 이동시키고 있다. 아름다운 달빛을 밟기를 저허하여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서있는 <<한그루 나무>>가 아리랑이라 하고 달빛에 몸을 저으며 옛날의 마음을 파랗게 펴놓은 <<한포기 물초>>를 아리랑이라고 한다. 이 두가지 사물로의 변형은 소리를 사물로 둔갑시킨것이라겠다. 하늘을 저어서 옛꿈을 감아올리는 <<한가닥 피리소리>>로 변형시킨것은 두번째에 속하는 변형이라겠다. 소리로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겠는데 김정호시인은 이 두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여 아리랑을 노래하면서 <<하얀 들국화>>(이것도 리상을 표현한 시적상관물)로 눈부시게 피여날 미래를 동경하고있다.</div><div></div><div>제5절 속성에 의한 시적상관물</div><div></div><div> 세계는 사물로 구성되였고 사물들은 죄다 자기의 속성이 있다. 사물의 속성은 5관을 통하여 뇌에 반영된 감각을 종합, 분석, 추리하여 내린 사물성질이다. 앞에서 언급한 사물의 색갈, 모양, 소리, 움직임들은 5관을 통하여 뇌에 반영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사물의 속성의 외적 표현이라 하겠다. 외적표현이 있으면 내적표현이 있기마련이다. 내적표현은 외적표현처럼 감각할수있게 드러나는 표현이 아니다. 내적표현은 드러남을 고찰한후 내린 추상적인 판단이나 관념이다. 이런 판단이나 관념을 속성이라고 하겠다.</div><div> <<봄이면 꽃이 핀다>>는 개념은 봄의 속성의 한가지를 표현한것이라겠다. 이 개념은 <<봄>> 이나 <<꽃>>을 지시하는 언어인 것이 아니며 <<봄>>과 <<꽃>>이라는 언어는 봄의 속성을 나타내는 언어의 재료로 충당되였을 뿐이다. 한 사물에는 한가지 속성이 있는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속성이 있기마련이다. 속성은 한류형의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법칙을 반영하지만 한사물의 속성의 표현은 여러가지 형태라겠다. <<물은흐른다>>하고 물의 속성을 한마디로 나타낼수 있지만 표현은 여러가지로 나타난다. 유유히 흐르기도 하고 세차게 흐르기도 하고 잔잔히 흐르기도 하고 물결을 일으키기도 한다. 물결은 하얗게 부서지기도 하는데 그 부서지는 표현도 천태만상이다.</div><div> 현대시는 속성을 중시하며 속성으로부터 시적상관물을 설정하기를 즐긴다. 색깔, 모양, 움직임, 소리 등은 일반적으로 은유에 의하여 시적상관물을 드러내지만 속성으로부터 착안하여 설정된 시적상관물은 일반적으로 상징에 의하여 표현된다. 때문에 속성으로 찾은 시적상관물은 상징적상관물이라고 하여도 틀린다고 할수는 없겠다.</div><div></div><div>한편의 시가 태여나기 위해서는</div><div>우리들은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div><div>숱한것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div><div>숱한 사랑하는것을 사살하고 암살하고 독살해야 한다</div><div>보라</div><div>사천의 날과 밤하늘에서</div><div>한마리 새의 떨리는 혀가 탐나서</div><div>사천의 밤의 침묵과 사천의 날의 역광선을</div><div>우리들은 사살했다.</div><div>들으라</div><div>비내리는 모든 도시 용광로</div><div>한 여름의 방파제와 탄갱에서</div><div>굶주린 한 아이의 눈물이 있어서</div><div>사천날의 사랑과 사천의 밤의 련민을</div><div>우리들은 암살했다</div><div>기억하라</div><div>우리들 눈에 보이지 않는것을 보고</div><div>우리들 귀에 들리지 않는것을 듣는</div><div>한마리 들개의 공포가 탐나서</div><div>사천밤의 상상력과 사천날의 차가운 기억을</div><div>우리들은 독살했다.</div><div></div><div> 일본의 다무라류이지의 시 <<사천의 날과 밤>>의 전문이다. 니체의 시 <<광대에 불과하다! 시인에불과하다!>>에서 시인을 <<짐승>> 이라고 표현한것과 일맥상통하다 하겠다. 다무라류이지는 <<짐승>> 이라는 언어를 쓰지 않았을뿐이다. 오히려 짐승보다 더한 도깨비를 현대시라고 노래했다고함이 더 어울리리라 , 어찌하여 이런 무시무시한 언어로 현대시를 말하게 되는가?</div><div> 현시대는 <<죄악>>이 많고 크다겠다. 현시대는 전시대의 랑만주의시도 동시대의 사실주의시도 모두 부정한다. 현대시는 사물을 떠나고 관념을 떠나고 인간을 떠나고 언어를 떠나고, 현실을 떠나서 자기의 궁전을 건설한다. 이 궁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궁전이며 낯선궁전이며 현실과 모순충돌을 일으키는 불협화궁전이다. 이 궁전으로 들어가려면 표를 떼야지 아무나 들어갈수있는 곳이 아니다. 표는 누가 파는가? 현대시가 판다. 현대시를 알면 표는 스스로 생기게 된다.</div><div> 다무라류이지의 <<사천의 낱과 밤>>은 바로 이런 현대시의 상징주의시 가편이라겠다. <<사천>>이라는 수자의 등장은 다무라류이지가 현대시를 10여년간 탐구하면서 써왔겠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질것 같다. <<사살>>, <<암살>> <<독살>>이라는 언어는 다른 류파와의 철저한 결렬을 표현한것이라고 하겠다. 2련의 <<한마리 새의 떨리는 혀가 탐나서>>는 새로운 이미지 탐구에 대한 현대시의 추구를 상징한것이고, 3련의 <<굶주린 한 아이의 눈물>>은 이제까지 성취와 창조에 추호도 만족하지 않고있는 시인의 초상화라고 하면 될것이고, 4련의 <<한마리 들개의 공포가 탐나서>>는 보이지 않는것을 보게 하고 들리지 않는것을 듣게 하려고 애쓰는 시인의 불타는 노력과 진지한 탐구의 상징이라고 리해하면 좋을것 같다. 이쯤하면 시의 모든 내용이 풀리리라 믿어진다. <<사천의 날과 밤>>은 현대시에 대한 다무라류이지의 굳센 믿음과 그속에서의 열광적인 분투를 표현했다 하리라</div><div> 은유의 수법으로 기술한 현대시는 무엇이 무엇이라는 명백한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상징적인 시적상관물로 시를 관통시킨 현대시는 그런 딱딱한 맛이나는 문체격식이 아니다. 이것도 속성으로 찾은 시적상관물의 특점이라면 특점이겠다.</div><div> 한국 신세훈시인의 <<목쉰 연가>>를 보자.</div><div><br></div> 백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div>천번을</div><div>만번을 찍었거니</div><div>결국 사랑하는 나무는 비참히 쓰러졋네</div><div>섰던 세월의 태양이 아무리 그리워도</div><div>누워서 밤이슬을 맞게 되는것은 누워서 어둠안으로 죽어가는것</div><div>나도 사랑하는 나무옆에 넘어져</div><div>오랜 잠들 때까정 넘어져</div><div>한 천년을</div><div>한 만년을</div><div>하늘의 별에 대고 얘기할련다</div><div></div><div> 관념을 이미지한 관념이미지시라 하겠다. <<열번찍어 넘어지지 않는 나무가 없다>>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홍윤기 비평에 의하면 이 시의 부제를 <<사랑하는 나무>>라고 달았는데, 시인은 자기의 시세셰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초부가 거대한 나무를 찍어넘기는 식으로 천번만번, 아니 무수한 각고를 거듭하여야 한다는것으로 해석하고있다. 이 외에도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라는 의미를 이미지화한것이라겠다. 노력은 천재를 낳는다는 말이 있다. 찍어서 넘어지지 않는 나무가 있다한들 <<천번을 만번을 찍어서 >>넘어지지 않는 나무야 어디에 있으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하고 또 하면 꼭 성공한다는 의미겠다. 문제는 그런 끈질긴 노력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의하여 결정되는것이다. 태산도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지>> 않는가.</div><div> 1련의 마지막줄 <<결국 사랑하는 나무는 비참히 쓰러졌네>>는 노력 끝에 일이 성공되였다는것을 나타내는 아이러니적 시구이며 성공의 기쁨을 상징적으로 반어적으로 노래한것이라겠다. 2련의 마지막줄 나무가 <<누워서 어둠안으로 죽어가는것>>이라는것은 완성을 의미한다. 넘어진 나무는 썩어서 흙이 되여야 한다. 흙이 되는것이 바로 <<어둠안으로 죽어가는것>>이다. 흙이 되여야 나무는 사물적 한생을 종결짓고 영혼의 영생을 획득하게 된다. 흙이 되는 것은 자연속에서 나온 사물이 자연이 부여한 최후의 의무을 가장 성스럽게 완정하게 완성한 표징이다. 그런 뜻의 실현을 위하여 <<나도 사랑하는 나무옆에 넘어져 오랜 잠들 때까정 넘어져서>> <<하늘의 별에 대고>> <<천년을 만년을>> 얘기하려 하는것이다. 최후의 완성을 위한 시적화자의 정진정신을 보여준것이라겠다.</div><div> 성질로 시적상관물을 설정하여 쓴 우수한 시들은 우리의 시에서도 흔히 볼수있다. 지난 80년대 중반으로부터 립체시라는 기발을 들고 시창작에 정진해 왔던 김파의 시 <<항로>>를 살펴보기로 하자</div><div></div><div>항로</div><div>김파</div><div></div><div>물속에 누워있던 파도들이</div><div>거울을 깨고 일어선다</div><div>갈피에 끼인 녹슨 시간이</div><div>죽은 비늘로 뒤로 밀려간다</div><div>바람이 돛폭 안고 갈 때</div><div>하늘이 찢어지며 신음하고</div><div>어둠이 아픈 기침을 한다</div><div>땀에 절은 쩝절한 항로</div><div>지금쯤 얼마나 달려왔는가</div><div>피안의 저쪽</div><div>물새의 하얀 울음소리가</div><div>멀리 화살로 날아가는데, 벌써</div><div>머리칼에 가을서리 물들고</div><div>내 숨결이 조금씩</div><div>흰빛으로 증발하고 있다</div><div></div><div> 김파의 시 <<항로>>는 인간이 어떻게 태여나고 어떻게 살아가고있는가를 고요한 항구에서 떠난 배가 어떻게 달리고 있는가와 비교하면서 두사물의 성질에 모를 박고 시를 구사하고 있다. 시인은 살아가는것이란 배가 항구를 떠나서 달리는것과 같다고 증언하고있다겠다. 첫두행은 인간의 탄생을 그린것이고, 3,4행은 인간의 탄생과 함께 밀려나는 낡은것의 사멸을 그리였고, 5,7행은 일생을 살아가는 인간의 간난신고를 그리였고, 2련에서의 첫두행은 인생의 간난신고를 극복하며 억차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였고, 나머지는 한생을 바쳐 리상을 추구하여 왔으나 그에 닿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살아져야 하는 슬픔을 쓰고있다. 배는 태여난 그날부터 파도를 헤치다가 일생을 마치고 인간도 태여난 그날부터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가다가 소원은 있으나 성취하지 못하고 모든것을 접어야만 한다. 이면에서 배와 인간은 비슷한 성질이 없다고 할수 없는것이다. 시인은 바로 이와같은 류사성을 착안하고 <<항로>>를 썼으리라 추측해 본다. 이 시에서 시인은 알찬 이미지들로 시를 엮어내려가서 독자의 가슴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있다. 시에 씌여진 언어 거개가 거듭나이를 하면서 새롭게 태여나고 새롭게 조합되면서 다각적인 양상을 보이고있어 이미지의 새로움이란 어떤것인가를 보여주고있다고 하겠다.</div><div></div><div>강아, 흰가슴 여미지 못한채</div><div>죽어서 얼음이 되었던 강아</div><div>쫓겨갔던 물새들 기슭으로 돌아오고</div><div>앙상하던 버드나무 새움이 트는구나</div><div>또다시 나는 본다</div><div>너의 파도의 장쾌한 옛모습을</div><div>또다시 나는 듣는다</div><div>너의 출렁이는 환락의 노래소리를</div><div>승냥이떼처럼 불을 털며덮쳐들던</div><div>미친 눈보라 자취를 감추고</div><div>죽어서도 쩡쩡 짜개지던 너의 가슴</div><div>비단결 새살로 아물어 푸르구나</div><div>어제날 두꺼운 얼음밑에서</div><div>도란도란 누구와만 나누던 귀속말</div><div>오늘은 와-와- 가슴 터져 말하며</div><div>하늘아래 자유로이 흘러가누나</div><div>나는 안다 강아, 네속에 가득차</div><div>끓으며 사품치는 그 많고많은 말을</div><div>나는 안다, 풀려내리는 해빙기의 강아</div><div>너는 정녕 반짝이는 무수한 눈물방울</div><div>지금 내 가슴속에 흘러들어</div><div>가슴벽 세차게 때리며</div><div>너는 우는구나 강아!</div><div>너는 웃는구나 강아!</div><div></div><div> 우파에 걸려 청춘을 잃어버렸던 조룡남시인이 해방을 받고 토해낸 감격의 시편이다. <<해빙기강변에서>>라는 시제목부터 빼았겼던 인생을 다시 찾는 기쁨을 떠올릴수있는 심상치 않는 내함을 포함하고있다. 얼음속에 갇혀 한겨울을 소리 한마디 쳐보지 못하고있다가 봄을 맞아 얼음을 깨고 다시 자신의 활력을 펼치게 되는 물! 사회의 잔학을 엄청나게 받으면서 살다가 자유를 획득한 시인의 생명! 이 두사실 사이에 속성으로 말할 때 비슷하다고 아니할수 없다. 바로 여기에 시적상관물의 설정가능성이 있는것이다. 이 시에서 물과 물에 대한 모든 묘사와 언어는 억울했던 사람을 지칭하는 상징물이고 겨울에 대한 모든 묘사와 언어는 훌륭한 사람에게 반혁명이라는 모자를 씌우고 다스리던 가혹을 상징한다. 르네르상스의 시대가 이 세상에 군림한지도 수세기가 지난 20세기중기를 넘어서면서 우리나라에 신을 모시는 유치한 년대가 있었다. 특징적인 환경에서 억울했던 사람들의 해방된 심정을 자신의 체험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토해낸 <<해빙기의 강변에서>>이다.</div><div> </div><div>제6절 의인(의물)에 의한 시적상관물</div><div></div><div> 의인(의물)화의 수법은 우리 몸에 젖어있는것이라겠다.</div><div> 의인(의물)법을 기초로 시적상관물이 설정되여 이미지를 구성하는것은 문구에서 동안뜨게 나타나는 의인적수사법과는 차이가 있다 하겠다. 전자는 대상물을 가리키는것이고 후자는 이미지시의 수법을 가리키는 것이다.</div><div> 인간의 순한 마음은 자연과 자연물과 인간의 평등을 요구하고 서로의 사랑을 요구한다. 요구한다는것은 평등이 되지 않고 사랑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라겠다. 현대인간은 인간과 다른 모든 자연물과의 평등과 사랑을 너무 무지하게 짓밟고있는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서양의 예수나 중국의 유가는 세상만물은 이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고 이간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불가나 도가의 사상가들은 인간을 자연의 몸에서 사는 <<이나 써개>>라고 하면서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식물, 인간과 기타 자연물과의 평등과 사랑을 주장하였다. 오늘의 인간은 탐욕으로 팽창되여있다. 인간은 자연의 파괴자 략탈자, 통치자로 추락되여 자연의 원쑤로 활약하고있다겠다. 한 인간이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는것처럼 인류도 공룡과 같은 훼멸을 향하여 걸어가는지도 모른다. 이런 시점에서 의인(인물)에 의한 시적상관물을 설정하여 이미지를 만드는것은 의의가 작거나 가볍다고는 할수 없겠다. 현실과 현실인간을 떠난다는 이미지가 의인 (의물)적인 시적상관물을 설정함으로써 인간으로 다시 회귀하는것인지도 모른다.</div><div>가을밤의 싸늘한 감촉</div><div>밖을 나섰더니</div><div>얼굴이 붉은 농부처럼</div><div>붉으레한 달이 울타리너머를 보고 있다.</div><div>나는 말을 건네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div><div>주위에는 생각에 잠긴 별들이 있어</div><div>도회의 아이들처럼 얼굴이 희였다.</div><div></div><div> 흄의 시험작 5편중의 한편 <<가을>>의 전문이다. 달을 <<얼굴이 붉은 농부>>로 별을 <<얼굴이 흰>> <<도회의 아이들>>로 변형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마들고 있다.</div><div></div><div>기운 썩 좋은 낯 붉은 아이들</div><div>아우성치며 벼랑 타고 오르는 소리</div><div>성대 썩 좋은 아이들</div><div>온통 산에 불 지르는 함성이다.</div><div>아니 온 몸 속속들이</div><div>시뻘겋게 달아올라</div><div>이윽고 분출하는 화산이다</div><div>불타는 산속에서 나도 불 붙어</div><div>고래고래 웨친다</div><div></div><div> 홍윤기의 시<<단풍>>의 전문이다. 시각적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가 호상 전의되고 교차되면서 씌여진 이 시를 정한모시인은 <<단풍>>의 이미지를 멀리 정관하는 눈이 아니라 안에서 용솟음치며 끓어오르는 힘 즉 역동적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div><div></div><div>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div><div>언제나 점잖은편 말이 없구나</div><div>관이 향기로운 너는</div><div>무척 높은 족속이였나 보다</div><div>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div><div>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div><div>어찌할수 없는 향수에</div><div>슬픈 모가지를 하고</div><div>먼데 산을 바라본다</div><div></div><div> 한국의 30년대에 홍윤숙과 함께 녀류시인의 쌍벽을 이루었다는 노천명의 <<사슴>>이다. 인간을 의물화한 우수작이라겠다. 노천명은 결혼도 하지 않고 일생을 보낸 시인이라며 <<사슴>>에다 자신의 <<고고한 모습>>을 투영시켰다고 홍윤기는 평하고 있다.</div><div> 의인(의물)화에 의하여 설정된 시적상관물의 이미지시는 리해에 큰 장벽이 없으므로 세세한 해석을 가하지 않는다. 의인화에 의하여 씌여진 이미지시는 그속을 파보기전에 우선 마음이 통하는 감이 든다. 그만큼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 대화하는것이라 하겠다. 의물화는 의인화와 틀린다. 의물화는 의인화보다 암시성과 몽롱성이 더 강하다고 하겠다. 어떤 경우에는 난해성까지 초래할수 있겠다. 특히 어떠한 감정의 편린을 의물화 하였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div><div> 이제 우리 시들에서 한수를 뽑아 이미지작업을 어떻게 하였는가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div><div><br></div> 비는 <div>하루밤사이에 </div><div>손가락이 잘리웠다</div><div>비는 </div><div>하루밤사이에 </div><div>두다리가 끊기웠다</div><div>비는</div><div>하루밤사이에</div><div>옷을 몽땅 벗기웠다</div><div>비는 </div><div>하루밤사이에</div><div>머리 하나만 댕그라니 남았다</div><div>손가락을 자른이는 바로</div><div>자신이 적셔주던 수풀이였다</div><div>다리를 끊은이는 바로</div><div>자신이 키워주던 삼림이였다</div><div>옷을 벗긴이는 바로</div><div>자신이 가꿔오던 초원이였다</div><div>비는 한바탕 울고싶었으나</div><div>비는 눈물이 다 말라버렸다</div><div>비는 부른다</div><div>비는 처절하게 부른다</div><div>초원에서 </div><div>삼림에서 </div><div>사막에서</div><div>망그러진 세계와 마주하고</div><div>그의 손가락을 부른다</div><div>그의 다리를 부른다</div><div>그의 옷을 부른다</div><div>소리소리 그 부름소리</div><div>사람의 마음을 잡아비튼다</div><div></div><div> 남영전씨의 <<비>>의 전문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는 그 무슨 손가락이요 다리요 옷이요 머리요 하는것들이 없다는것은 코풀레기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학에서 의인화수법이 이채를 돋굴뿐만아니라 시에서는 한가지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하고있는것이다. 우리는 비를 통하여 불상한 인간을 보기도 하고 인간에게 파괴당한 자연의 참상을 읽기도 하면서 동정과 사랑 련민 등을 감수하기도 한다. 2련을 통하여 비가 겪는 참상은 환대를 받아야 할 사물들한테서 곡경을 당하는것을 읽으면서 격분과 슬픔이 동시에 폭발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인류력사에 흔히 있는 일들이며 우리들 주위에서 심심잖게 볼수있는 일이 아닌가! 마치 우리주위에서 불상하게 살아가고있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형제자매의 누구인것만 같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참상을 격지 않고 모두가 자유롭고 행복하고 평등하게 살아갔은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게 된다. 의인화에 의하여 시적상관물을 설정하여 시를 쓰면 다른 이미지시보다 친절하고 감동적인 감을 주게 되는것도 설정된 사물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기때문이리라.</div><div>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 방법은 이외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필자는 이 여섯가지 방법을 착중하여 설명하였을 뿐이다. 이 여섯가지 방법은 어떤 근거를 잡으면서 한 방법이다. 그러나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데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는것들이 있다. 이미지시란 현실을 초월하여 쓰는것이 중점의 하나인데 무슨 근거가 필요한가? 이 말은 맞는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것은 지적인 지위를 삭감해 버리는것으로서 우리들이 연구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당대 영미 초현실주의 시들은 이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환상적이고 몽상적인 이미지를 제작해 내고 파편문체를 많이 쓰는데 필자는 그런 이미지에 대한 연구가 너무 천박하여 여기에서 피력하지 못하는것을 과제로 남기면서 독자들이 량해하기 바란다.</div><div></div><div>제7절 령감에 의한 시적상관물</div><div></div><div> 령감에 의한 시적상관물의 설정은 감각의 물화와는 다르다. 감각은 아직 리성화되지 않는것을 물화는것이으로서 상징어나 상징구에 속하는것이라고 할수있지만 령감에 의한 시적상관물의 설정은 한수의 시를 어떻게 쓰는가에 관계되며 령감을 어떻게 시로 만드는가와 관계되는 중요한 고리라고 생각된다.</div><div> 령감은 고층차사유의 표현으로서 어떤 사물의 필연적인 느낌일수도 있고 우연한 떠오름일수도 있다. 량자중에서 필연보다 우연이라고 함이 그래도 더 적절할것 같다. 우연히 떠오른 령감을 두가지 부류로 나눌수있다. 한가지는 어떤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가 떠오르는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어떤 사물에 대한 새로운 느낌이 관념으로 떠오를 때가 있다. 관념으로 떠오른 령감을 그대로 써놓으면 현대시가 안 되는 경우가 너무 많을것으로 알고있다. 관념으로 떠오른 령감이란 사물의 이미지가 새롭게 떠오른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에 대한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이 추상적개념으로 떠오른것을 말한다. 이 추상적개념이 아무리 새롭고 철리적인것이라 하여도 그대로 써놓으면 좋은 시가 안된다. 그것을 이미지로 다시 가공하여 써놓았을 때 비로소 좋은 시가 되는것이다. 아래에 주요하게 이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가을에 오곡이 무르익고 과일이 주렁지는것은 하느님의 은덕이라는 생각이 떠올라서 릴케는 <<가을날>>이라는 시를 이렇게 쓰고있다.</div><div></div><div> 가을날</div><div> 릴케</div><div></div><div>주여, 때입니다. 여름에는 참으로 위대했습니다</div><div>해시계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div><div>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div><div></div><div>마지막 과실에서 결실을 명하십시오.</div><div>열매위에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여</div><div>그들을 완성시켜 주시고 , 마지막 단맛이</div><div>짙은 포도송이속에 스미게 하십시오.</div><div></div><div>지금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div><div>지금 고독한 사람은 계속 고독하게 살것입니다.</div><div>잠자지 않고, 책을 잃고, 긴 편지를 쓰고</div><div>그리하여 락엽이 뒹구는 가로수길을</div><div>불안스러이 이리저리 헤맬것입니다.</div><div></div><div> 가을의 풍성함은 하느님이 은총이라는 주제를 담은 릴케의 시이다. 이 시는 령감이 관념으로 떠올라서 쓴 시라고 할수있다. 이 시를 쓸 때 릴케의 뇌리에 떠오른것은 세상의 모든 사물이 산생하고 발전하고 사멸하는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이런 주제를 표현하는것이 가을철이 제일 적당하다고 생각되여 내용을 가을로 잡았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복합이미지의 수법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노래하고있다. 릴케는 령감을 씀에 있어서 관념에서 관념으로 간것이 아니라 관념을 이미지화하고 있는것이다. 시는 이렇게 어떤 관념적인것을 쓸 때 론리적으로 전개하는것이 아니라 이미지적으로 시의 집을 짓는것이라겠다</div><div> 겨울이라고 하자. 눈보라 휘날리는 겨울에 춥다는 생각쯤은 누구나 다 할수 있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 눈보라치는 겨울추위가 봄을 만든다는 생각은 누구나 다 할수있는 상상이 아니다. 추위가 봄을 만든다는것은 시적령감에 속하는것이며 새로운 관념에 속하는것이다. 눈보라에서 받은 관념을 어떻게 이미지시로 만들것인가? 아래와 같이 시를 썼다고 하자.</div><div></div><div>(A) 눈보라 눈보라</div><div> 윙윙 울부짖는다</div><div> 바위도 얼어터진다</div><div> 털모자 없이는 한걸음도 내 디딜수 없다</div><div> 하지만 나는 사랑한다 눈보라를</div><div> 아, 눈보라여 봄을 만들어내는 사랑이여</div><div>(B) 눈보라 너는 겨울의 왕자</div><div> 너는 봄의 남편</div><div> 초봄의 언덕에서 신부를 맞을제</div><div> 신랑의 말등에서 보이지 않을 슬픔이여</div><div>(C) 눈보라 펄럭이는 날</div><div> 겨울나무 숲에 가면</div><div> 풀무소리 들린다</div><div></div><div> 줄기속에서 불길이 펄펄 일고</div><div> 망치소리 뚱땅뚱땅</div><div></div><div> 웃도리 벗어부친 신동들</div><div> 땀을 벌벌 흘리며</div><div> 푸른 잎을 벼리고있다.</div><div><br></div> 우의 A, B, C에서 A보다 B가 좋고 B보다 C가 좋다는것을 우리는 알수있다. A가 제일 차하다고 생각되는것은 눈보라라는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써놓았기때문이다. 특히 제일 마지막행 <<아, 눈보라여 봄을 만들어내는 사랑이여>>는 관념적으로 떠오른 령감을 직설적으로 써놓았기 때문에 루이스가 지적하였던것처럼 <<불순물>>이 되었다. 이미지시는 이런 <<불순물>>이 나타나는것을 용허하지 않는다. B와 C는 그렇지 않다. 시인이 받은 관념적인 느낌을 상징과 은유 즉 이미지로 표달하였기때문이다. C가 B보다 낫다는 리유는 C는 B보다 더 셈세한 필치로 감성이 강하다는데 있겠다. 아무리 좋은 령감이래도 물질운동으로 재구성되지 않고 섬세한 필치가 따라서지 못하면 피와 살이 없는것이 되거나 여윈것이 된다.<div> 령감을 이미지화한다는것은 령감을 새로운 사물이나 새로운 사실이나 새로운 사건으로 재구성하는것으로서 모름지기 중시를 돌려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div><div> 총적으로 령감의 시적상관물을 설정하여 이미지를 만드는것은 중요한 기법의 한가지이므로 능숙하게 장악하여야 할것으로 알고있다.</div><div></div><div> 종언</div><div></div><div> 종합해보면 아주 간단한 도리인것 같다. 이미지시란 현대시다. 현대시는 이미지다. 이미지시의 핵심은 변형이다. 이 변형을 위하여 사유와 언어가 따라서야 한다.</div><div> 사유는 새로운 짝을 맞추는 작업이다. 짝을 맞춘다는것은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것이다.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 방법에는 색깔, 모양, 움직임, 소리, 속성, 의인화, 령감 등 일곱가지가 있다.</div><div> 언어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재료이다. 이미지시의 언어다룸은 주요하게 아홉가지로 한다. 성질이 다른 언어조합이 첫째요, 두사물의 공간과 시간 줄이기가 둘째요, 두사물의 짝을 바꾸기가 셋째요, 추상어와 구상어 결합이 넷째요, 은유적언어사용이 다섯째요, 색갈올리기가 여섯째요, 공감각이 일곱째요, 감각의 물화가 여덟째요, 류의미와 종의미가 아홉째이다. 사유와 언어는 서로 침투하고 융합되여 변형을 이룩하면서 이미지시를 제작한다고 하겠다.</div><div></div><div><br></div> 참고서<div></div><div>까마귀-리상각시집</div><div>별들의 울음소리-종합시집</div><div>중국조선족문학선집(시선집)</div><div>금잔디-김성휘시집</div><div>무지개는 뿌리내릴 곳을 찾는다-한춘시선집</div><div>하얀 메아리새-김파시집</div><div>두사람의 풍경-리삼월시집</div><div>달빛의 언어-김정호시집</div><div>청자기의 꿈-김동진시조집</div><div>고향마을 동구앞에서-조룡남시집</div><div>그리움 삼만리-김응준 미국기행시집</div><div>나, 진짜 바보이고싶다-김철시집</div><div>뻐꾸기는 철없이 운다-김철시집</div><div>백의 넋-남영전작품집</div><div>꽃의 의미-석화시집</div><div>20세기 마지막 밤-김학송시집</div><div>사랑, 그리고 바보들의 이야기-리임원시집</div><div>백두산은 독한 술이랍니다-최룡관시집</div><div>푸른 종소리-박화시집</div><div>중국고전문학작품선집-허룡구</div><div></div><div> ++++++</div><div></div><div>시론-문덕수</div><div>오늘의 시작법-문덕수</div><div>현대시학-홍문표</div><div>시론-김준오</div><div>도시시와 해체시-김준오</div><div>현대시작법-오규원</div><div>시의 리해와 작법-김춘수</div><div>현대시를 이렇게 쓰자-박진환</div><div>한국현대시해석-홍윤기</div><div>한국현대시해설(상,하)-조남익</div><div>조선고전문학선집3-시조집</div><div>한국명시집-김희보편저</div><div>달과 자유-정지용시수필집</div><div>타는 호소-굴원시집</div><div>적-한춘섭시조집</div><div>사라지는것들을 위하여-문덕수시집</div><div></div><div> +++++++</div><div></div><div>현대시리론-서양론문종합집</div><div>현대시구조-후고.프리드리히</div><div>알바트로스-보들레르등 언론종합집</div><div>문예비평의 원리-I.A.리처즈</div><div>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릴케</div><div>시를 읽는 젊은이들을 위하여-루이스</div><div>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훗살</div><div>문심조룡-류협</div><div></div><div> ++++++</div><div></div><div>세계명시선-김희보편저</div><div>축제의 노래-로르까시집</div><div>이보다 더 쓸쓸할 때는 없다-G.벤시집</div><div>고요한 시-G.벤시집</div><div>지옥의 격언-블레이크시집</div><div>안개-샌드버그시집</div><div>삶-엘뤼아르시집</div><div>몽마르뜨르의 축제-j. 꼭도시집</div><div>지하철정거장에서-E.L파운드시집</div><div>이국여인에게 바치는 시-S.J페르스시집</div><div>태양-니시자키 준자부로시집</div><div>누가 사랑에 관해서 말하리-랭보시집</div><div>나는 한 개의 별입니다-헤세시집</div><div>고독-릴케시집</div><div>방랑자-니체시집</div><div>겨울에-클라클시집</div><div>밤의 찬가 -노발리스시집</div><div>깨여진 약속-하디시집</div><div>악의 꽃-보들레르시집</div><div>황무지-엘리어트시집</div><div>태양-니시자키 준자부로시집</div><div>비라보다리아래 세느강이 흐른다-아폴리네르시집</div><div>농부-무라노 시로오시집</div><div>나르시스는 말한다-발레리시집</div><div>디종의 영광-로렌스시집</div><div>유예된 시간-바흐만시집</div><div>시월의 노래-토마스시집</div><div>시간의 흐름-크롤로우시집</div><div>애니벌리-포우시집</div><div>목신의 오후-말라르메</div><div>당대구미시선-왕가신 등 편집</div><div><br></div> 출처 조글로 최룡관선생님의 불로그에서 퍼옴http://www.zoglo.net/blog/ls/cuilongguan/all/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