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花季少女” 진품•명품</p><p class="ql-block">人民艺术家: 韩相益·한상익</p><p class="ql-block">尺寸:92*68cm</p><p class="ql-block">作品名:花季少女</p><p class="ql-block">创作年:1956年</p><p class="ql-block">画家简介:</p><p class="ql-block">韩尚益(1917.9.2~1997.10.22)</p><p class="ql-block">1917年9月2出生于咸京南道咸州郡州西里</p><p class="ql-block">1934年3月毕业于咸镜南道咸兴高等普通学校</p><p class="ql-block">毕业后1935年3月止在庆尚北道大邱市大邱师范学校美术科受教1年</p><p class="ql-block">1935年4月~1936年12月止咸镜北道清津第二公立普通学校教员活动</p><p class="ql-block">1937年4月~1942年2月止美术教员,日本东京美术学校油画科中退 </p><p class="ql-block">1943年4月~1945年8月止首尔私立普成高等学校美术教员,解放后在首尔与李顺钟,金正洙等一起进行美术活动中归乡</p><p class="ql-block">1945年12月~1950年3月止美术家同盟 咸镜南道委员会 美术家活动</p><p class="ql-block">1950年4月~1955年8月止平壤美术大学教授,教员活动</p><p class="ql-block">1955年9月~1957年3月止美术家同盟 中央委员会 美术家活动。</p><p class="ql-block">1957年4月~1965年止美术家同盟 咸镜南道委员会 美术家活动</p><p class="ql-block">1965年~1976年止朝鲜美术家同盟 江原道委员会 美术家活动</p><p class="ql-block">1970年与黄尚玉结婚,当年53岁,在夫人的鼓舞下10年间创作出200多幅金刚山和元山题材的珍贵作品</p><p class="ql-block">1971~1984年止在江原道通川郡水产事业所,高山郡光明工艺品工厂等地进行创作活动</p><p class="ql-block">1985年在日本“菊花”,“连珠潭”等75幅金刚山风景作品举办个人美术展</p><p class="ql-block">1991年2月11日作品在万寿台创作社展会上被首领给予高度评价</p><p class="ql-block">1992年在平壤国际文化会馆举行个人美术展</p><p class="ql-block">1993年“丛石亭”Korea统一美术展参展</p><p class="ql-block">1995年12月在中国延吉举行个人美术展</p><p class="ql-block">1996年2月在日本Korea平和美术展参展并出版个人画册</p><p class="ql-block">1997年10月22日离世。</p><p class="ql-block">韩相益是敏锐善感的艺术大家,总能与天地的生气同出息,与自然的脉搏共起落,能体会出生命中最深的情、最真的美。朝鲜油画大师韩尚益,就是这样一位杰出的典范,他以深静的心襟,投身于生命的波澜,悉心捕捉着自然中律动的美和生命的深意。他的作品,笔触奔放自由、潇洒飘逸,意韵如歌如舞、如醉如梦,以浑然一体的形色光影表现出转瞬即逝的微妙之美,以音乐般潺动流淌的旋律推展出生命的活力,内容与形式达到了和谐相融,已臻于最为深远的艺术境界。</p><p class="ql-block">朝文版</p><p class="ql-block">画家简介:</p><p class="ql-block">한상익(韓相益) 1917.9.2~1997.10.22</p><p class="ql-block">1917년 9월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태어난 한상익은 19살이 되던 해 함흥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1938-42 도쿄미술학교 중퇴.제22회(1943) 선전, 〈청년〉 입선. 제23회(1944) 선전, 〈秋의 作〉 특선, 〈부엌에서〉졸업 후 대구사범학교 강습과에 재학 중이던 한상익은 겨울방학 동안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미술학교 유화과 유학 당시 그는 도서관에서 서유럽 중세미술작품과 동양미술전시관에 전시된 중세미술작품을 연구했다. 이를 두고 신보는 "색채를 어떻게 잘 다루어 나갈 것인가 하는데 많은 사색을 돌리었다"며 "자연의 색채, 인물의 색채, 화면에서의 색채조화, 색채대조는 그에게 있어서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과 같았다"고 평가했다.하지만 한상익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총동원령의 하나로 실시되던 도쿄미술학교 군사훈련을 피해갈 수 없었다.당시 일본군사교관이 한상익의 덥수룩한 머리 모양을 지적하며 욕을 퍼붓자, 이에 한상익은 교관을 때리고 체포될 것을 우려해 귀국했다.1945년 8.15 해방을 맞은 한상익은 11월 함흥으로 월북, 1947년 8월 첫 국가미술전람회에 유화화 '단강도', '수확전날', '풍년송' 등 3점을 출품했다.해당 작품은 성진제강소 노동자들과 함흥벌 농민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새 조국 건설에서 발휘하고 있는 헌신적인 투쟁성과들을 예술적으로 일반화한 작품"이라고 평가받았다.특히, '단강도'는 문학예술상 2등을 받았으며, 이후 김일성의 표창장을 받았다. 한국전쟁 당시 한상익은 평안북도 룡천군에 전시학교를 차린 평양미술대학 교원으로 활동했으며, 전후 대학전람회에 유화 '고지의 이야기'를 출품했다.'고지의 이야기'는 북한 미술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문학예술상 1등을 수여받고, 김일성이 그림을 보고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한상익은 제1차 사회주의국가조형예술전람회에 '새 땅에 씨를 뿌리고' 유화 작품을 출품했으며, 동유럽, 중국 등에서 순회전시회를 가졌다. 1960년대 한상익은 다양한 풍경화 유화작품을 선보였으며, 1997년 사망했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