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b style="font-size:18px;">2023년 연변녀성 제1기 발표 작품</b></p><p class="ql-block"><b style="font-size:18px;"> 글 / 리상옥</b></p> <p class="ql-block"><b>꽃 보다 아름다운 나의 엄마- 세상의 어느 자식을 막론하고 다 자기 엄마를 꽃 보다 아름답다고 비유한다. 여기에는 엄마의 본 인물이 꽃 보다 아름다운것이 있는가하면 그 보다 정녕 마음씨가 꽃 보다 더 아름다워 비유하는 두 가지 류형이 있다. 하다면 나는? 후자를 택한다.그것은 나의 엄마가 인물은 보통이나 키가 겨우 120 으로 진짜 소학생의 키에 불과하지만 엄마의 그 일거일동이 우리 가정 뿐 아니라 평범한 보통 엄마들을 초월하여 날이 갈수록 나의 기억속에서 맴돌기 때문이다. 꽃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고 한다. 이런 세상에 둘도 없는 엄마에 대한 나의 고모들이 들려주신 진실하고 소박한 울고 웃는 한편의 드라마 같은 인생사—비록 글 솜씨는 서툴지만 정성껏 써서 그 향기가 천리 만리에 갔으면하는 바램이다… 엄마 이름은 리임순(1933-2014), 이북 황해도에서 열 살때 부모를 따라 지금의 흑룡강성목단강시동승 마을에 정착하여 22살에 한 동네의 동갑인 아버지와 결혼하였다. 내가 철이 들어 엄마가 하신 말씀에 의하면 당시 결혼전 우리 외가집 생활 형편도 너무 안 좋았고 거기에다 엄마가 남보다 키 작다는 부족함이 있어 어디가나 맏 며느리감은 못되고하여 응근히 걱정하던차 마침 아버지가 둘째고 성격이 착하다니 세간나서 살면 힘들지 않게 밥은 배불리 먹을수 있다는데서 동의 하였단다. 그런데 엄마가 타고난 복이였는지 아니면 손에 쥔 팔자였는지 어쩌면 둘째 며느리가 어느 종가집 맏며느리보다 더 힘들고 고달픈 시집 살이를 했겠는지 전혀 상상이 안된다.아버지와 간단한 결혼식을 올리고 시집이라 가 보니 아버지가 항렬로 둘째는 맞는데 위로 형님이 군인이여서 부대에 있다보니 엄마가 세간 나가기는 커녕 대 가정의 가마목 왕중왕으로 없어서는 절대 안되는 아주 중요한 위치가 엄마를 대기할줄 꿈에도 몰랐다. 코흘리개 막내 시누 겨우 다섯 살, 그 위로 큰 시누,개구쟁이 시 동생, 당원이고 마을에서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시아버님, 건강이 안 좋아 날마다 병에 시달려 방 한쪽에 자리를 깔고 있는 시어머님. 아이고 무시라! 엄마의 고생문이 열리였다. 시집 가서 꽃 신 신고 꽃 길을 걸어 가기는 열 번도 틀렸다.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 둘 셋…일곱 식구의 밥을 지어야 했고 후에 군인이던 시형이 제대하여 집으로 오니 여덟명, 하루건너 시부모 뵈러 오는 친척까지하면 십여명 밥 짓기는 보통이였다. 이런 일을 농촌에서 여름이면 괜찮은데 겨울에 그 떵떵 언 자작 나무를 부엌에 넣고 불을 때며 큰 가마에 밥을 짓자면 웬간한 솜씨 아니면 어림도 없다. 일도 해본 사람이 안다고 내가 맏며느리로 시집가서 당해보니 당시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겠는지 머리가 숙여진다. 때는 50년대 자연재해로 한창 량식 곤난에 집집마다 쌀 부족이 제일 문제여서 등이 단것은 가마 운전수였다. 엄마는 없는 살림을 쪼개여 알뜰히 잘 하려고 매일 생산대 일도 나가는데 돌아 올 땐 꼭 나물을 캐다 밥하고 섞어서 했다. 무우 밥, 콩 나물 밥, 시래기 밥 어느 밥이면 안 해 보았겠는가! 엄마는 이런 잡곡 밥을 지어서는 또 입쌀쪽으로 먼저 시아버지 시어머님께 드렸다.</b></p> <p class="ql-block"><b style="color:rgb(176, 79, 187);">다음으로 시형님께 그 다음으로 철부지 시누 시동생 마지막에 엄마한테 차려진것은 완전히 잡풀하고 누렁지뿐이였다. 그래도 마음씨 비단같이 순한 엄마는 이에 대해 푸념 한마디 없고 뭐나 다 자기가 응당 해야하는 줄로 여기고 그렇게 열심히 잘 했다. 이런 엄마가 꽃 보다 아름다운것이 아닌가! 우리 마을은 옛날 별명이 ‘’닭으 덩때”이다. 똑똑한 선조들이 여름이면 물 피해를 입으니 아예 마을을 강에서 약 150메터 위의 바우돌 꼭대기에 앉혀서 안전하기는 하나 먹는 물이 문제였다. 흐르는 강물 지게대 아니면 동이를 이고 길어어 야는데 여름이면 몰라도 겨울이면 지게대 흘린 물이 얼어 붙어 마치 유리판 같이 판들판들하였다. 이런 언덕 길에서 맨 몸으로 다니기도 벅찬데 물을 지고 이고 다니자면 얼마나 힘 든지 모른다. 우리 형제들이 커서는 우리가 물을 길었지만 어렸을적에는 엄마가 자그마한 동이를 머리에 이고 다니셨단다. 게으른 사람의 앞에는 모두가 산이고 부지런한 사람의 앞에는 모두가 길이라고 항상 부지런한 엄마 앞에는 할일이 그렇게 많았다. 쯤만 나면 들에나가 졸뱅이를 캐다 하나라도 더 보탬한다고 적은 쌀을 발 방아 찧여 가루 낸후 진짜 쌀 가루는 넣는다는 형용만 내고 잘 버무려 떡도 맛있게 했다. 건강이 안 좋으셔서 항상 자리를 지키는 할머님이 엄마 일손을 한번도 도와 주지 못하여 늘 미안해 하셨고 더불어 진짜 엄마가 일을 너무 잘하니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며느리를 삼을 때 키가 너무 작아 제 앞의 일이나 하겠는지 걱정 했는데 이렇게 일 잘 하고 착한 며느리 들어 왔으니 마음이 놓으신단다. ‘’격려는 귀로 먹는 보약이다”엄마가 그렇게 힘들고 피곤했지만 시어머님의 이런 한 마디 칭찬에 모든 고달픔이 다 사라지고 아침에 일어나면 마냥 새힘이 솟아나군했다.엄마의 시집 살이는 마치 옛말처럼 너무 많다. 우리 할아버지가 술을 좋아 하셨는데 술 한잔 하면 웬일인지 우리 할머니하고 괞히 걸고 들어 다툼하고 손찌검도 하고 심지어 밥상도 뒤번졌다.할아버지 성격이 호랑이 같다는것을 잘 아는 엄마는 혹시 시아버님이 나 때문에 할머니하고 불필요한 투정을 하는건지 영문을 알수 없어 속은 탔지만 혹시 또 외딴 불호령이 떨어질가봐 말도 못하고 눈치만 볼뿐이였다. 다행이 그때 이미 내가 태여나서 비록 식구가 더 많았지만 엄마에게는 커다란 위로가 되였다. 복덩어리 딸이 생겼으니 아무리 힘들어도 해죽해죽 웃는 딸의 모습을 보면 모든 억울함이 다 풀리군했다. 그런데 그 좋은 경치도 잠시 그때뿐이였다.나의 아래로 또 여동생이 태여나니 할아버지 안색이 완전 달라졌다. 아마 두번째는 응근히 손주를 기다렸는데 또 손녀이니 그닥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모양이였다.엄마는 꼭 마치 손주를 안겨 드리지 못한것이 자기 탓 같은 자책감에 더구나 시아버님하고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그저 앞뒤로 일을 하면서 자아 안위하였다. 세번째로 드디여 남동생 리씨 가문에 대를 이을 후손이 태여 났다. 엄마의 어깨는 더 올라 갔지만 할일은 곱으로 많아졌다. 시름시름 병환에 계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외톨이 시아버지를 모셔야했다. 잔 심부름이 더 많아졌다.그래도 참고 견뎠다. 엄마의 일 솜씨는 누구를 닮았는지 그렇게 많은 식구들의 구석구석 모든 일을 다 챙기면서 농사 일은 또한 빠지지 않았다.봄에 벼 종자 담그기 시작해서부터 모내기 논 김매기 가을 탈곡까지 장 출근이였다. 연속 막내 여 동생이 태여났다. 남이 남의 말 한다고 친척들로부터 생활이 구차한데 애를 많이 낳는다고 엄마를 나무람한다. 역시 복 받을 일이 아니란다. 엄마는 이 설음을 또 일로 갚았다.</b></p> <p class="ql-block"><b>지금은 딸 셋이면 금메달 상장을 준다,비행기 태워 준다고 법적 고으지만 그때는 오보호 후보(아들 하나 있으니)라 주늑이 들어 머리도 쳐들지 못했다. 엄마는 막내를 낳고 대접은 커녕 미역국도 제대로 잡숫지 못하고 또 자리를 차고 일어나야 했다. 젖이 부족해 앵앵 우는 애기 안죽도 혼자 끓여야했다. 이렇게 엄마는 딸 셋 , 아들 하나 자식 넷을 낳아 키우면서 시형인 큰 아버지를 장가 보냈다. 아마 모르긴 하겠지만 제수 손에서 장가 든 시형도 흔치 않을 것이다. 련이어 큰 고모 결혼하여 우리 집도 단칸 방인데 옆방에 세간 내주고 삼촌도 장가가고 그 방에서 살림하다 집 짓고 나갔다. 제일 작은 고모는 조카인 나 보다 여섯살 더 크고 소학교때 할머니가 돌아 가시여 진짜 우리 엄마 큰 딸이나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공부 잘하는 작은 고모를 고중까지 졸업시키고 후에 직장 다니다가 결혼까지 다 챙겨 주었다. 할머니가 돌아 가신후 엄마는 더더욱 할아버지 성격을 맞추느라 모진 신경 다 썼다. 이런 엄마의 정성이 그렇게 무섭다고 소문난 할아버를 감동 시켰다. 엄마 앞에서 더는 술 주정 안하시고 식구들과 다정다감했다. 끝내 할아버지 림종까지 엄마가 지키셨는데 할아버지가 엄마하고 고맙다고 수고 했다는 말씀을 하셔서 엄마가 더 목 놓아 우셨다. 고진감래 ,울고 웃는 인생사, 엄마의 이런 감동적인 회억록 대부분은 내가 철 들기전 일이라 후에 고모님 두 분이 엄마 칭찬을 하여 많이 들은것이고 내가 세상 물정을 알아서 직접 목격한 일은 지금까지도 나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한다. 사실은 이러하다. 당시 우리 마을 농촌 수입이 낮아 간혹 로동력이 많은 집은 년말에 분홍이나 많이 타면 일년내 기름 ,간장,초 등을 사는 돈이라도 남기지만 우리집은 식구는 많고 로동력이 적어 매년 장부하고 마주서면 다행이였다. 그러니 일상 용돈 나올 구멍이란 입쌀하고 좁쌀 바꾸(换谷)고 웃돈 20전씩 받아서 쓰는것이였다. 만약 입쌀을 팔아 버리면 집 식구들 구량이 부족되니 항상 환곡을 많이 하여 불쌍한 우리 엄마만 고생했다. 전에 엄마가 이렇게 다닌다는 말은 들었지만 내가 학교 다니다보니 집에 없어서 나의 눈에 한번도 띄우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마침 내가 집에 있었다. 그때도 우리 마을엔 뻐스가 없었다. 그런데 저녁 편이 되여도 엄마가 오지 않아 한참을 문 밖에서 기다리다보니 저 멀리서 엄마가 무거운 쌀을 이고 힘겹게 오는것이 보였다. 인츰 달려가 받으니 20키로라 너무 무거웠다. “쾅” 겨우 집까지 와서 땅에 떨구었다. “엄마 정신 있어요!?”자기 힘든 줄 모르는 엄마가 불쌍하다 못해 미웠다.엄마는 이고 간 쌀을 팔면 집의 량식이 부족하니 웃돈 8원 받아 생활에 보태려고 왕복 50여리 먼 길을 왔다갔다했다. 머리에 20키로나되는 무거운 쌀 주머니를 이고 왔다갔다 했다. 나는 너무 어이없어 다시 엄마를 빤히 쳐다 보았다. 남처럼 키가 크오 덩치가 크오 ! 체중이 30키로도 안되여 바람불면 훌 날아갈가 두려울 정도로 외소한 몸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나는 엄마를 불러 놓고 몰래 눈물 흘렸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목이 멘다. “여성은 나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꼭 마치 우리 엄마를 두고 한 말인같다. 만약 엄마가 ‘’엄마”란 대명사가 없고 그저 평범한 리임순이라면 이런 초 강이한 힘이 있을수 있었을까! 덩치가 웅장한 씨름 장사군? 역시 어림도 없다. 20키로나 되는 쌀을 이고 온 엄마 목은 마치 움츠린 거북이 목 마냥 쏙 들어가서 한참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다. ‘’엄마 다신 가지 말아요. ‘’ ‘’ 알았다”온몸이 축 늘어진 엄마는 한참을 누워서 일어도 나지 못한다. 엄마의 울고웃는 인생사는 시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시동생 시누 다 시집 장가 보내여 세간까지 나가니 이젠 우리들 형제가 시작한데로 이어졌다.</b></p> <p class="ql-block"><b style="color:rgb(22, 126, 251);">엄마는 아무쪼록 나를 공부 잘 하라고 다독이신다. ‘’엄마는 세월 잘못 만나 하고싶은 공부도 못하였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너만 노력하면 어디까지라도 공부할수 있어”하여 나도 목단강 시내가서 숙소 생활하며 고중까지 졸업하고 농촌에 내려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았다. 일하며 배우며 남들 엄마는 여자가 입당해서 뭘 하냐고 비웃지만 엄마는 할아버지 로당원의 기풍을 이어 받아야한다며 적극 밀어 주어 1976년에 영광스럽게 입당하였다. 나도 이미 46년의 당령을 가진 로당원이다. 엄마의 자랑은 이뿐이 아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농사가 자식 농사라 했다. 엄마는 이 네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하여 무엇이든지 백배의 노력과 열정으로 날마다 자신을 붙태우며 우리에게 삶의 용기와 신심을 키워 주셨다. 하여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고 우리 형제들은 엄마의 말씀 뭐든지 하면 된다는 명언에 따라 무조건 복종하였다. 남동생도 어려서부터 착하고 공부를 잘 하였다. 엄마는 아들을 꼭 대학생으로 키우려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집에서는 아끼고 절약하고 한쪽으로 돼지를 키운다고 매일 돼지 풀 캐러 다니고 콩 농사도 잘 지어 몽땅 팔았다. 동생은 역시 엄마 아들이였다. 엄마의 적극적인 지지하에 무사히 흑룡강성 목단강 상업 학교를 졸업하고 세무국에 분배 받았다. 당시 조선족이 세무국이란 집법부문에 분배받는것이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 없다는것을 잘 아는 엄마는 너무 기뻐 밤잠도 이루지 못하였다.그런데 남 동생 분배가 그리 쉬운것이 아니였다. 세무국의 규정에 따라 또 간고한 1년간의 실습을 해야했고 이어서 시험을 치고 합격해야 정식 직원으로 비준되였다. 남동생도 꼭 엄마의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하기위하여 밤낮 없이 각 가지 실습에 몰두하느라 얼굴마저 수척해 졌다. 엄마는 또 이런 아들이 안스러웠다. 하여 엄마가 도울수 있는 유일한 음식 솜씨를 발휘하여 집에서 정성스레 각가지 밑반찬을 해서 뻐스가 없으니 왕복 50여리 길을 걸어서라도 꼭 시간 맞추어 다녀 오셨다.드디여 동생은 실습을 마치고 정식 직원으로 비준 되여 엄마의 만족을 주었는가하면 더 자랑할만한것은 1980년 계산기 보급이 안되고 주판(算盘)이 한창 열을 올릴때 이미 전성에서 주판 능수로 소문나고 그해는 전국적으로 2000여명 (조선족 3명)참가한 주판 놓기 경합에서 6등(우리성에서 하나)이란 우수한 성적을 따낸것이다. 그날 역전에서 남동생이 커다란 붉은 꽃을 달고 나올때 전 세무국 계통의 임직원들이 앞다투어 동생을 열렬이 환영을 하는것을 본 엄마는 이것이 생시인지 꿈인지 너무 감동되고 격동되여 ‘’네가 내 아들 맞냐”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시였다… 희노애락, 고진감래, 울고 웃는 인생사- 젊어서 별의별 고생 다 하신 엄마는 고생끝에 락을 보았다. 착한 자식들이 잘 커 줘서 자식 복도 있고 더욱이는 마음씨 힌량없는 아버지와 말 다툼이란걸 모르고 오손도손 부부 정을 나누며 희희락락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손군들의 재롱 속에서 행복한 만년을 보내시다 조용히 돌아 가셨다. 누군가의 말을 빈다면 죽은 정은 멀어진다지만 내가 엄마에대한 정은 아닌것 같다. 엄마 비슷한 로인들만 보아도 엄마 생각에 눈 시울이 젖어 난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두손 모아 엄마의 명복을 빌며 꽃 보다 더 아름다운 우리 엄마가 넘겨준 참된 삶의 계주봉을 받아 쥐고 어디서나 로당원으로서 초심을 잃지 않고 립장이 견정한 만년을 보내는것으로 엄마를 그리는마음의 보답을 하려고 한다. 꽃 보다 아름다운 나의 엄마, 편히 고이고이 잠드세요 !</b></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