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기的美篇

꽃향기

<p class="ql-block"><b style="color:rgb(22, 126, 251); font-size:18px;"> 봄놀이를 즐기는 전영실 작가</b></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인물탐방]</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p><p class="ql-block"><b style="color:rgb(237, 35, 8); font-size:22px;"><i> </i></b></p><p class="ql-block"><b style="color:rgb(237, 35, 8); font-size:22px;"><i> 헌걸찬 녀인</i></b></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글/신기덕</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2023년도 7월에 ≪길림신문≫의 [백성이야기] 특집에 안상근 기자가 쓴 &lt;95세 어머니가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는 67세 딸&gt;이라는 긴 제목의 보도글이 나갔는데 퍼그나 인상적이였다. 2024년 양력설을 맞으면서 필자는 연길시에 나가 몇개 행사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전영실 작가와는 시집발표모임과 단풍수필협회에서 기약도 없이 두번이나 만나게 되였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 만남이 계기로 되여 그 때부터 위챗련계를 가지게 되였는데 련계가 많아지면서 다른 사람에게서 볼 수 없는 많은 성격적인 매력들을 발견하게 되였다. 지금은 생활형편이 좋아지면서 연지곤지 바르고 아름다운 치마저고리를 떨쳐입은 년세가 이슥한 녀성분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촌놈이고 심미관에 문제가 있어 그런지 지금도 그냥 가냘프게 생긴 녀성보다는 ‘채갑수건’과 ‘싸진수건’을 맨 반세기 전에 보이던 헌걸찬 녀인들의 모습이 더 자주 떠오르고 그립다.</span></p> <p class="ql-block">  <b style="font-size:18px; color:rgb(22, 126, 251);">헌걸찬 녀인 ㅡ전영실</b></p> <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런데 전영실 작가와 접촉하면서 어딘가 좀 억척스럽고 헌걸찬 성격특점과 ‘좌충우돌’이라 할가 ‘술덤벙물덤벙’이라 할가 어딘가 좀은 보드랍고 세심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성격적인 매력을 발견하게 되였다. 타인의 눈을 너무 의식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 대로, 자기의 멋 대로 살아가는 그 모습이 너무 당당하고 멋스러워 오늘 이렇게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b style="font-size:22px;">반포보은</b></p><p class="ql-block"><b style="font-size:22px;"><span class="ql-cursor"></span></b></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새끼 까마귀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줌으로써 낳아서 키워준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반포보은(反哺报恩)이란 말이 있다. 전영실 작가가 지금 바로 ‘반포보은’을 하고 있는 중이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올해(2024) 3월 20일에 연길에 일보러 나갔다가 시간을 내여 전영실 작가의 집에 잠간 들린 적이 있다. 위챗으로 보내온 사진과 동영상 자료를 가지고도 웬간히는 그의 정황을 료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될수록이면 집에 직접 찾아가서 진실한 모습을 자기의 눈으로 한번 보는 것이 글의 진실성을 보장하는데 퍽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였기 때문이다.</span></p> <p class="ql-block"><b style="color:rgb(22, 126, 251);"> 《연변녀성 잡지》제5기</b></p> <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아파트의 일층에 있는 집을 찾아가니 몸이 불편하신 고령의 어머니가 자리에 조용히 누워계셨고 시간제로 보는 보모가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집을 한번 돌아보고 나는 밖에 나가서 텃밭과 닭우리를 구경하였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전영실 작가의 어머님은 올해 96세인데 자기 절로 움직일 수는 없지만 정신상태는 괜찮다고 한다. 그리고 병이 있기에 혼자서 식사를 하지 못하고 튜브를 리용하여 위에 영양죽을 넣어드려야 한다. 닭알과 여러가지 영양품들을 믹서에 갈아서 영양죽을 만드는데 그 일이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동영상자료를 통해서도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인츰 알 수 있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어머님을 양로원에 모실 생각을 한 적이 없는가 하는 필자의 물음에 그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그래도 엄마와 같이 있으면서 자기가 모시는 것이 마음이 편하여 양로원에 모시지 않고 지금까지 자기가 집에 모시고 있다고 한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지금은 많은 자식들이 여러가지 상황으로 인해 부모를 양로원에 모시고 있다. 지금은 부모를 양로원에 모셨다고 뒤에서 헐뜯어 말하는 사람도 없다. 지금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가치없는 연명’과 ‘존엄있는 죽음’에 대한 토론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기에 적지 않은 나라들에서는 ‘안락사’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전영실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깊이 느낀 바지만 어찌 보면 그들 모녀의 관계와 정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전영실 작가는 9살 때 사고로 인해 좌골을 크게 다치게 되는데 이로 인해 4년 넘게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어린 딸의 상처를 치료해주려고 어머니는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다니며 병을 보였고 나중에는 당시 우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갖춘 천진병원에도 찾아갔었다.</span></p> <p class="ql-block"><span style="color:rgb(22, 126, 251);">  </span><b style="color:rgb(22, 126, 251);">정이 깊은 어머니와 딸</b></p> <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진병원에서 얻은 치료방법에 따라 어머니는 딸에게 충분한 영양을 보충해주기 위하여 갖은 방법을 생각하고 모진 고생을 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 쏟아부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span>아 <span style="font-size:22px;">그의 병은 좀씩 차도를 보이더니 기적같이 나아지게 되였고 전영실 작가도 때늦은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고 지금에는 어엿한 작가의 이름까지 얻게 되였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어머니가 자기에게 몰부은 그 지극한 사랑과 정성을 생각하면 어머니가 내 옆에 살아계신다는 그 사실 만으로도 마음속에 행복의 난류가 흐른다는 전영실 작가이다. 집에서 부모를 모시는 일은 사실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이 한 령혼의 평온과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것은 아주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 순간 ‘반포보은’하는 전영실 작가의 모습이 업그레이드 되여 내 눈앞에 우렷이 나타난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b style="font-size:22px;">자유분방</b></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전영실 작가는 연길시의 전신사업에 종사하였었는데 그가 불 그가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사업해왔기에 연길시와 연변주, 길림성의 통신계통 선진일군 및 표병으로 당선되였으며 선진일군의 자랑을 안고 북경의 인민대회당에 가서 나라의 지도일군들의 접견을 받은 적도 있다. 그의 집에 있있는 수많은 영예증서들이 그의 빛나는 과거를 이야기해주고 있다</span></p> <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15px;"> </span><b style="font-size:18px; color:rgb(22, 126, 251);">연변작가협회 대회에 참석</b></p> <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의 집 벽에는 여러개의 붉은 띠가 걸려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연변방송에서 청취한 그의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9살 때부터 4년간 좌골병 치료를 받으면서 학교를 다니지 못한 그에게는 자연스레 한번 스포츠맨이 되여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나게 되였다. 하여 그는 의식적으로 걷기 운동과 자전거타기 운동에 특히 정력을 쏟았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어느 해 그는 전주 자전거경기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그는 그 작은 몸체로 그 시합에서 2등을 쟁취하여 한동안 소문이 높았다고 한다. 더우기 그가 자전거를 달려 종점선과 근 20메터를 사이둔 거리에서 자전거의 사슬이 벗겨져 아예 자전거를 밀고 달려서 종점에 도착한 이야기는 한동안 이 작은 도시 사람들의 입에서 가화(佳话)로 널리 전해졌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그의 도담하면서도 물불을 가리지 않는, 어딘가 억척스러운 성격은 팔씨름을 하는 과정에 잘 반영되였다. 어떻게 되다보니 모 협회의 활동중에 팔씨름을 하는 종목이 있게 되였는데 그가 소속된 팀에서는 키도 작고 몸도 보통인 전영실 작가를 선수로 내보내게 되였단다. 10년 전에 남편을 여의고 남자가 할 일 녀자가 할 일 가리지 않고 해제끼는 그에게, 그리고 굳센 의지로 운동을 견지하는 그에게 웬간한 힘이 들어있음을 팀원들은 얼마간 알고 있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나중에 시합에서 덕지도 크고 힘도 센 적수를 물리치고 우승의 영예를 따냈을 때 사람들은 입을 딱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힘이 좀 센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엄청날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대방도 너무 놀랍고 어처구니가 없어 그를 선의적으로 ‘악물’이라 불렀다고 한다. 어찌 보면 그의 성격에는 참으로 ‘억척스럽고’ ‘악물’ 다운데가 있어보이기도 한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그는 일층에서 살기 때문에 50평방메터 남짓한 작은 텃밭이 있는데 이 터전은 전영실 작가의 작은 생활공간이면서 또한 창작터전이기도 하다. 면적은 크지 않지만 텃밭에는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다. 옥수수나 호박, 감자를 심었는가 하면 마늘과 파도 심었고 고추, 가지, 배추, 부추, 상추, 오이, 토마토, 여주(苦瓜) 그야말로 종류가 다양하다. 그리고 산포도가 있는가 하면 앵두나무도 있고 구기자나무도 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p> <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b style="font-size:18px; color:rgb(22, 126, 251);">텃밭에 살어리 랏다</b></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이뿐이여도 생활이 아주 다채로운데 그는 마당의 우세를 리용하여 닭도 좀 키우고 있다. 닭장을 들여다 보니 얼마나 알뜰히 키웠는지 닭들도 하나같이 색갈이 고왔고 아주 건강하고 크게 자랐었다. 매일 닭장에 들어가 닭알을 줏는 것도 그의 하나의 일과인데 닭알을 주을 때에는 그렇게 마음이 즐겁단다. 이와 같은 세절들은 그의 창작에 무궁무진하면서도 생신한 소재를 부단히 제공해준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이 외에 그는 등산도 즐긴다. 일요일마다 친구들과 더불어 수다도 떨고 등산도 즐기는데 하여간 활동이 많고 아주 다망하게 보낸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것은 사회적인 일에 참여하면서 닭도 사양하고 채소도 가꾸려면 그리고 가정일도 혼자서 돌보려면 그는 응당 아주 분망하고 힘들게 보내야 한다. 말하자면 ‘탈망살이’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탈망살이’ 모습보다는 ‘자유분방’한 모습이 우리에게 먼저 안겨오기 때문이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b style="font-size:22px;">팔방미인</b></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텃밭을 가꾸고 닭을 기르고 몇개 협회의 활동에 참가하고 등산과 자전거 운동도 견지하노라면 몹시 힘들며 시간도 모자라다. 그런데 요새 그는 벽돌장도 구해들이고 상수도도 고치고 빨래줄도 다시 새로 만들었다. 이러면 ‘탈망살이’가 아닌가? 더우기 그는 급할 때에는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며 물건을 실을 때에는 전동차를 몰고 다니며 운동할 때에는 자전거를 탄다. 그는 여러가지 일에 능하니 말그대로 ‘팔방미인’이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그런가 하면 협회활동에도 아주 적극적이다. 토론에도 적극 참가하고 사진도 찍어서 자주 올리며 그가 쓴 글들도 다 나름 대로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가 쓴 수필 &lt;일하면서 재미를 줏는다&gt;, &lt;엄마는 엄마로 영원하다&gt;, &lt;녀성이란 이름의 철학자&gt;, &lt;바람의 끝자락에서 불어치는 또 다른 바람&gt; 등은 그 제목만으로도 상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span></p> <p class="ql-block"><b style="color:rgb(22, 126, 251);">협회의 로동활동에도 적극 참가</b></p> <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요 근년에 그는</span> <span style="font-size:22px;">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부회장 책임을맡고 맹활약하고 있다. 필자가 영화제작에참여하여 활약한 정황을 물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문자를보내왔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① ≪황혼의 정≫ 촬영제작에 군중배우로 출연.② ≪아, 아름다운 연길강≫에 군중배우로 출연. ③ 효도다큐기록영화 ≪년년로한 엄마를 지켜선 효녀≫(상하집), ≪엄마가 있어 정말 행복합니다≫, ≪효녀의 하루 발자취≫ 등에 직접 출연... 영화 주역으로 6차 출연하고 군중연원으로 2차 출연하였으며 출품인으로 한번 나번 나서고 스태프일군으로 4차 나섰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가 참여하는 령역이 이렇게 넓고 하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 그는 왜 ‘탈망살이’가 아닌 ‘팔방미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일가?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대로 말하면 70이 된 전영실 작가에게는 쓸 이야기가 너무도 많다. 하지만 쉽게 손을 댈 수 없었다.0여명의 인물보도글을 쓰면서 가장 어렵게 씌여진 글이 이 글이 아닐가 생각된다.전영실 작가가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탈망살이’가 아닌 ‘팔방미인’으로 생활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가 일을 아주 주동적으로 즐겁게 하기 때문이고 동심이 안받침된 짙은 취미와 생활에 대한 깊은 사랑의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span class="ql-cursor"></span>전영실 작가의 위챗친구의 한마디 말로 이 글을 맺는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영실이는 삶을 참 다채롭게 보내고 근면하며 지혜롭고 효성스러워 이 세상에 자랑을 떨칠 만하지.”</span></p> <p class="ql-block"><b style="color:rgb(22, 126, 251);"> 영화 속의 한 장면</b></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