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단편소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벽(壁 Mu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로맹 가리[프랑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로맹 가리 (Romain Gary, 1914년 5월 8일, 러시아 - 1980년 12월 2일) 프랑스의 소설가. 1945년 소설 '유럽의 교육'으로 데뷔하였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시대정신과 풍속 묘사로 현대문명의 퇴폐성을 신랄하게 고발, 풍자성으로 일관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작품은 공쿠르상을 받은 《하늘의 뿌리》(1956)와《자기 앞의 생》등이 있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내 친구 닥터 레이는 클럽 ‘부들스’의 낡고 편안한 가죽 소파에 나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 클럽은 영국의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드나들었던 곳이다. 우리는 열기가 딱 기분 좋게 느껴질 정도로 난롯불과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러니까 아무 생각도 해내지 못했단 말인가?” 그가 재촉하듯 물었다. </p><p class="ql-block">“전혀.” 내가 털어놓았다. “보름 전부터 벽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네.” </p><p class="ql-block">내가 오랜 친구인 그를 찾아온 것은, 원기와 낙관주의와 집중의 힘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기적의 약’ 한 가지를 처방해달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12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유수한 어린이 신문사의 편집장에게, 청소년 독자들이 내게서 기대함직한 교훈적이고도 멋진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쓰겠다고 약속한 터였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대개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멋진 이야깃감이 떠오르곤 하지.” 나는 그에게 설명했다. “밤이 길어지고, 상점 진열장에 장난감들이 가득 찰 때가 되면, 그런 이야기가 절로 떠오른다네. 하지만 이번엔 내게서 영감이 떠나버린 것 같네. 벽 앞에 있는 것 같다니까......” </p><p class="ql-block">훌륭한 의사의 두 눈에 꿈꾸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p><p class="ql-block">“그렇다면 자넨 멋진 주제를 찾아낸 것 같은데......” </p><p class="ql-block">“무슨 말을 하는 건가?” </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벽이라...... 난 자네에게 약을 처방하지 않겠네. 부들스에서는 의사가 아니니까 말일세. 그 빌어먹을 알약을 원한다면, 병원으로 날 찾아오게. 5기니 정도 들 걸세. 하지만 그 대신 벽에 대한 실화 하나를 들려줄 순 있네. 여기서 말하는 벽은 원래의 뜻도 되고 비유적인 뜻이기도 하네. 이 사건은 혹한의 추위가 몰아치던 어느 해 성 실베스트르 축제일(12월 31일)에 일어났네. 사람들이 우정과 따스함과 기적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때 말일세.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바로 그런 것에 관한 거라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내가 런던 경찰국 소속 법의학자로 일하던 때였네.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잠을 자고 있는 가엾은 사내를 들여다봐달라고 사람들이 한밤중에 나를 침대에서 끌어내는 일이 종종 있었지. 12월의 어느 희뿌연 새벽-이 점에서 런던을 당해낼 곳은 없을 걸세-나는 그런 식으로 얼스 코트의 가구 딸린 누추한 건물로 사망 확인을 하러 갔었지. 그곳의 서글픔과 더러움에 대해서는 자네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동전을 넣어야 가스 난로가 작동하는 초라한 방으로 들어서자 그날 밤 목을 매어 자살한 스무 살 가량의 젊은 남학생의 시신이 내 앞을 가로막았네. 얼어붙을 듯한 방 안에서 사망확인서를 쓰기 위해 탁자 위에 앉았을 때, 신경질적인 글씨로 빼곡한 몇 장의 종이가 내 시선을 끌었네. 힐끗 눈길을 주었다가 문득 관심이 끌려 그것을 읽기 시작했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 불쌍한 청년은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적어두었더군. 얼핏 보기에 그는 고독의 발작에 꺾이고 만 것 같았네. 그에게는 가족도, 친구도, 돈도 없었네. 크리스마스가 되자, 그의 전 존재가 애정을 갈구하게 되었지, 사랑과 행복을...... 사건은 여기서부터 꼬인다네. 프랑스어로 ‘스 코르세’ (se corser: 이야기나 사건 따위가 복잡하게 꼬이다-편집자)되는 거지. 옆방에는 안면은 없지만 때때로 층계에서 마주치는, ‘천사 같은 아름다움’-이런 표현에서 젊음의 극단적인 면을 읽을 수 있을 걸세-으로 그를 깊이 감동시킨 처녀가 살고 있었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런데 그가 슬픔과 낙담에 맞서 싸우고 있는 동안 옆방에서는 벽을 통해 삐걱임, 신음, 그리고 특이한 소리가 들려왔네. 그 소리를 두고 청년은 그 성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독특한 소리’라고 유서에 써놓았더군. 그가 유서를 쓰고 있는 동안 그 소리는 줄곧 이어졌던 모양이네. 그 가엾은 청년은 분노와 경멸에 차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듯 그 소리를 자세히 묘사해놓았으니 말일세.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의 글씨는 몹시 흥분한 심리 상태를 반영하고 있었네. 영국 청년이 쓴 것치고 그 글은 상당히 노골적이었네. 분노에 찬 절망적인 풍자를 곁들인 그 글은 아주 세세한 것까지 묘사하고 있었네. 그가 써놓은 바에 따르면, 적어도 한 시간에 걸쳐 침대가 삐걱이고 요동치는 소리와 명백한 쾌락의 헐떡임이 들려왔다는 거야. 내가 그 소리를 묘사할 필요는 없겠지. 우리 모두 벽에 귀를 대고 그런 추잡한 쾌락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을 테니까 말일세. ‘천사 같은 옆방 처녀’의 쾌락에 겨운 신음 소리는, 그러잖아도 고독과 낙담과 총체적인 혐오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의 마음에 일격을 가한 것 같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또한 자신이 남몰래 그 미지의 처녀를 사랑하고 있었노라고 털어놓고 있었네. ‘그녀가 어찌나 예뻤던지 감히 말도 걸 수 없었다’고 그는 적어놓았더군. 그는 그 또래의 제대로 교육받은 영국 젊은이가 함직한 신랄한 비난을 ‘구역질나는 추잡한 세상’을 향해 던지고 있었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 ‘그런 세상을 더 이상 살지 않겠다’면서 말일세. 요컨대 애정의 갈망에 찢기고 수줍음 때문에 말조차 걸어보지 못한 채 신비로운 ‘천사’에게 마음을 빼앗긴, 지나치게 예민하고 너무나도 순수하고 극도로 외로웠던 그 청년이 벽을 통해 들려오는, 충분히 알 만한 너무나도 세속적인 그 처녀의 신음 소리를 듣고 어떤 심정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걸세. 그래서 청년은 커튼 줄을 잡아 뽑고는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르고 만 걸세. 그 글을 다 읽고 확인서에 서명을 한 나는 방을 나서기 전 잠시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옆방은 조용했네. 오래 전에 사랑의 유희를 끝내고, 당사자들은 기분 좋은 잠에 빠져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지. 그게 인간 본능의 한계니까 말일세.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만년필을 주머니에 넣고 왕진 가방-내가 프랑스어로 ‘뫼랑빌(시내 죽음용)’이라고 부르는-을 집어들고,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이는 잠이 덜 깬 집주인이랑 경찰관과 함께 층계를 내려가려는 순간 나는 문득 호기심-그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에 사로잡혔다네. 물론 그럴싸한 구실은 찾아낼 수 있었네. 어쨌든 그 처녀와 쾌락의 파트너는 비극이 일어난 방과 얇은 벽-얼마나 얇은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걸세-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으니 말일세. 그들이 우리에게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려줄 수도 있었지. 하지만 내가 그런 행동을 한 주된 동기는 특별한 호기심-변태적이든 파렴치한 것이든 마음대로 생각하게-에서였다는 사실을 자네에게 숨기지 않겠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나지막한 신음과 숨소리로 그런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그 ‘천사 같은 여자’를 한번 보고 싶었다네. 나는 그 방 문을 두드려보았네. 아무 대답이 없었지. 그 여자가 아직도 남자를 안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자, 이불을 뒤집어쓴 채 겁에 질려 있을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네. 내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냥 층계를 내려가려 할 때였지. 두세 차례 문을 두드리며 ‘존스 양! 존스 양!’ 을 외치던 주인 여자가 열쇠꾸러미에서 열쇠를 찾아 문을 열었네. 외마디 소리가 들려오더니, 주인 여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방에서 달려나왔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나는 방으로 들어가 커튼을 젖혔네. 침대 위를 한 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벽을 통해 들려와 청년을 절망적인 행동으로 몰아간 그 탄식과 소스라침과 신음 소리의 정체를 청년이 완전히 오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네. 베개 위에서 나는 비소 중독으로 인한 온갖 증상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운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는 금발 머리 여인의 얼굴을 보았네. 처녀는 몇 시간 전에 죽은 것 같았네. 그녀의 마지막 고통은 길고 고통스러웠던 모양이야. 탁자 위에는 자살 동기를 분명하게 말해주는 유서가 놓여 있었지. 그녀가 죽은 이유는 고통스러운 고독과...... 삶에 대한 총체적인 혐오감 때문이었네.” </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말을 마친 닥터 레이는 우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울분에 겨워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고, 항의의 말조차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망연자실해 있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렇다네, 벽은” 하고 의사는 꿈꾸듯이 중얼거렸다. “자네의 아주 참신하고 흥미로운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주제가 될 걸세. 사람들의 가슴속에 이제 신비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으니 말이야.”</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 (끝)</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