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할머니가 외동아들 손을 잡고 재가한 할아버지 집에는 아버지보다 몇살 어린 남동생이 있었다. 큰 삼촌은 약간 지적장애와 신체장애가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서 둘째 삼촌, 막내 삼촌, 막내 고모 이렇게 세명의 자식이 나왔다. 아버지는 다섯남매의 맏이로 되었다.</p><p class="ql-block">친아버지가 있을 때만 해도 아버지는 삼대독자로써 우월한 환경에서 응석둥이로 온 집안 사람들이 떠받드는 보배 도련님으로 컸었다. </p><p class="ql-block">할머니한테서 들은 말이지만 친할아버지는 돈 좀 있노라고 집에 기생들도 공개적으로 데리고 왔었다고 한다. 그래도 하나밖에 아들한테만은 무지 이뻐해주고 잘해줬었다고 한다.</p><p class="ql-block">그런데 새 집에 오니 모든 상황이 뒤바뀌었다. </p><p class="ql-block">이붓할아버지도 사연이 깊은 분이셨다.</p><p class="ql-block">한국에 있을 때만도 할아버지네 집은 꽤 갖추고 산 지주집안이었고 할아버지는 장남이었다. 1910년, 조선이 일본 식민지로 함락되면서 조선인들에 대한 핍박이 심해지자 경제형편이 좋은 집들은 해외 이주를 분분히 계획하고 있었다. 그 때 할아버지는(이하 할아버지로 칭함) 일본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증조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대학교 2학년 재학중인 장남을 국내로 소환하였고 큰 아들만 데리고 부인과 함께 중국으로 넘어왔다. </p><p class="ql-block">할아버지는 대학교 중퇴었지만 동안시에서 그 정도 학력도 흔치 않은 학력이라 현재의 밀산시조선족중학교로부터 일본어 선생님으로 초빙받아 교사직에 종사하였다.</p><p class="ql-block">1966년 문화대혁명이 폭발하자 선생님들은 “구린내나는 아홉째”로 불리우면서 혹독한 비판, 타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어갔다. </p><p class="ql-block">할아버지도 선생님직에서 쫓겨나 태양촌이라는 농촌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셨다. 증조할아버지도 과거 지주었던 신분이 드러나 매일 고깔모자 쓰고 나가 동네돌림을 당하면서 비판 받고 물매를 맞아야 했다. 드디어 어느날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몸이 물매에 못 견디고 당장에서 숨지고 말았고 시신도 홍위병에 의해 흘러가는 목릉강에 버려졌다. 그때만해도 조상의 산소를 잘 써서 제사를 잘 지내는게 최고의 효도었는데 할아버지는 장남으로써 혼자 부모님을 모시고 중국 땅에 왔는데 결국 아버지 산소조차 모시지 못한 불효자식이 되고 말았다.</p><p class="ql-block">80년대말, 한국과 통신이 닿자 할아버지는 한국에 있는 동생들과 미국에 있는 누나와 연락이 되었고 친척방문 비자로 막내삼촌을 데리고 한국방문을 했었다. 그런데 형제들이 아버지 산소도 못 앉힌걸 두고 그렇게 원망과 핀잔을 했다고 한다. </p><p class="ql-block">할아버지는 정말로 선한 선비었다. 한번도 아버지를 남자식이라고 생각하고 편애를 한 적 없었다. 그렇지만 표현에도 어설픈 사람이었다. 식구는 많고 3년 자연재해까지 덮치고 생활의 난으로 허덕이던 시대 누구도 누구를 사랑하다는 사치스러운 표현을 할 여유가 없었다.</p><p class="ql-block">아버지는 장남으로, 한정된 음식을 항상 동생들한테 양보했고 그러다보니 위장염에 걸려 대학교 시험 한달 앞두고 쓰러지고 말았다. 평소에 수학과대표이고 공부를 그렇게 잘했는데 운명이 주는 시련앞에서 인간의 힘은 너무 미약했다. 유감을 재수로 만회할 수 있는 집안상황도 아니었다. </p><p class="ql-block">하느님은 절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때 항상 살 길을 틔워주는 같다. 그래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옛말이 있는 같다. </p><p class="ql-block">아버지는 문화대혁명의 피해자이자 수혜자이기도 했다. </p><p class="ql-block">그 시절 타도를 받아 북경 고위직에서 밀산으로 추방된 명인들이 꽤 많았다. 유명한 왕전(王振) 장군묘도 밀산시에 있다. </p><p class="ql-block">그때 유명한 서예가 한분이 밀산에서 노동개조를 하고 있을 때었는데 제자를 받겠다고 소문을 냈다. 소식을 접하고 찾아간 수많은 젊은이 중 그 분은 아버지의 손을 보면서 글을 잘 쓸 손이라고 칭찬을 하면서 아버지를 포함해 총 3명의 제자를 받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p><p class="ql-block">그때 시절만 해도 지금처럼 컴퓨터로 회의 현수막을 제작하고 벽에 거는 여러가지 제도를 만드는 시대가 아니었다. 전부 수작업이 필요한 시대었다. 정부 각 부처마다 회의며 여러가지 제도정책을 벽에 걸고 상장을 발급하는 등 손으로 붓글씨를 써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았다. </p><p class="ql-block">그래서 아버지의 서예재주는 부처마다 탐내는 재주가 되었고 아버지는 좋은 직장을 충분히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었다. 아버지는 은행에 취직했고, 엄마와 결혼하면서 태양촌에서 서동안으로 정착을 했다. 대가족하고 이별을 고하고 독립을 선포한 셈이다.</p><p class="ql-block">그런데 내가 늦둥이로 태어나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부모님들이 돌볼 여력이 없자 오래동안 떨어져 살던 할아버지 할머니집으로 보내지기로 결정된 것이었다.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