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이붓 할아버지와 친 할머니</p><p class="ql-block"> 오늘 온라인에서 할머니를 쓴 글을 한편 봤다. 볼수록 꼭 내 얘기를 적은 같아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리고 희미해져가는 추억들을 다시 끄집어내여 빛을 보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서 하나씩 적어본다.</p><p class="ql-block">1</p><p class="ql-block"> 우리 집은 친척이 희소한 집안이다.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같은 일이 아버지와 엄마 몸에서 벌어진 것이다.</p><p class="ql-block"> 아버지의 친아버지는(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할아버지란 말이 안 나온다) 꽤 영리한 사람이었던 같다. 때는 일제시대, 밀산시는 동안시라고 불리웠고 흑룡강성도 동안성이라고 불리웠는데 동안시는 동안성의 성도었다. 어른들한테서 들은 얘기라 혹시 과장된 점은 없는지 의혹이 들어서 비에두에서 검색해봤는데 실제로 밀산시는 지금의 현급시가 아니라 성도었었다. </p><p class="ql-block"> 친 할아버지는(처음으로 불러보는 호칭이다) 일본사람들의 위만정부에서 회계직을 맡고 있었다. 일본사람들이 동북을 점령한 뒤 민족분렬을 시키기 위해 민족에 따라 등급을 나누었다고 한다. 당연히 일본사람들이 1등급 공민이었고 그 다음 조선인이(조선족은 신중국 설립이후 생긴 명칭이다) 2등급 공민, 한족들은 3등급 공민이었다. 2등급 공민들은 그나마 좁쌀과 입쌀을 배급받을 수 있었는데 3등급 공민들은 옥수수쌀 등 영양가 없는 잡곡들만 배급받았었다. 그러니 조선인에 대한 한족들의 미움은 이만저만 아니었고 그 증오감이 하루이틀에 쌓인것도 아니었나보다.</p><p class="ql-block"> 드디어 1945년 일제가 투항하고 동북은 토비, 군벌 혼전의 시대로 들어갔는데, 그 때 토비들이 앞장나서서 조선인들 없애기 작전을 개시했었다. 추석이면 한족들은 월병을 먹지만 조선인들은 전쟁을 피해 중국으로 이주해 온 지 얼마 안 되는 터라 아직도 조선인들의 풍속습관을 지켜 월병을 안 먹었다. 그 점을 이용해 한족들은 월병안에 쪽지를 넣어 조선인들 멸종시키기 작전 개시 시간을 전했었다. 그 중 조선인과 사이 좋은 한족 친구가 귀뜸해서 조선인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친 할아버지가 지휘하여 조선인들이 러시아국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었다. </p><p class="ql-block"> 총 지휘봉을 맡은터라 친 할아버지는 당연히 가족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 할머니가 여섯살밖에 안되는 아버지를 등에 들쳐업고 시아버지를 모시고 도주하려고 하자, 키가 팔척이고 장수같이 생겼다는 증조할아버지는 도주가는 것을 거절했었다. 혼자 도끼 하나 품에 안고 집을 지켰고 나중에 사태가 끝난 뒤 사람들이 돌아올 때까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지냈다고 한다. 가슴아픈 것은 그렇게 장수같은 증조할아버지가 3년 자연재해때 친척집에 피난갔다 식량이 없어서 기아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다.</p><p class="ql-block">할머니는 젊었을 때 달리기를 잘했었다. 그래서 아들을 업고 발밑에 바람을 일구면서 빨리 뛰었고 아버지는 중년이 훨씬 넘어 우리의 아버지가 된 후에도 그때 탄알이 쌩쌩 귀를 스치고 지나가면 어린 나이에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 등에 납작 엎드렸었다고 옛말처럼 우리한테 얘기해줬었다.</p><p class="ql-block">급하게 도망가느라고 베개를 애인줄 알고 업고 도망가다 절규하는 사람들, 토비들이랑 대항하다 피 흘리고 죽은 사람들… 인간 지옥이 따로 없었다. 5월 16일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5.16사변이라고 일컫는 그 참사가 지금도 밀산지에 기록돼 있다고 한다. </p><p class="ql-block">그렇게 일제시대에도 요령껏 잘 살고 해방시대에도 민족 리더로 활약한 친 할아버지가 27세 젊은 나이에 페결핵으로 돌아가고 할머니는 우리가 유일한 할아버지로 알고 있는 이붓 할아버지한테 재가갔다.</p><p class="ql-block">그래서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없는 신세가 되었다. 우연의 일치로 엄마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p><p class="ql-block">2</p><p class="ql-block">엄마의 할아버지는 꽤 유명한 중의사었다. 다들 알다시피 중의와 주역은 한 집이라고 (易医同源)외증조할아버지는 주역에도 연구가 깊었다. 엄마도 아마 할아버지 영향을 받아 주역공부를 했던 것 같다. 그 때 외증조할아버지는 외동 아들 하나밖에 없었고 한국에서 중국으로 피난 올 때 정실부인은 못 데려오고 첩하고 아들만 데리고 왔는데 바로 우리 엄마를 평생 키워주고 동반해 준 외증조할머니었다. 외증조할머니는 출산능력을 잃어서 정실부인한테서 낳은 아들을 친아들처럼 정성껏 키웠다. </p><p class="ql-block">외할아버지가 20살 되던 해, 15세 되는 외할머니를 봤는데 한눈에 반하고 말았고 그래서 부모들한테 결혼의사를 밝혔다. 주역을 연구하는 외증조할아버지는 여자 팔자가 사나워서 결혼하면 아들이 제명대로 못 산다고 죽기살기로 반대했었다. 그런데 외할머니한테 푹 빠져버린 외할아버지가 이 결혼 못하면 당장 죽겠다고 하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할 수 없이 외증조할아버지가 두 손을 들었다. </p><p class="ql-block">외할머니는 평생 딱 두번을 봤는데, 한번은 너무 어릴 때 봐서 인상이 없고 마지막으로 본것은 오빠 결혼식 때었다. 그 때 외할머니 연세가 60이었고 목 뒤에 혹이 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온 머리속에 너무 예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느 이목구비 하나가 특별히 이쁘다기보다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여성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다”는 형용사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니 한참 꽃피는 15세 때는 얼마나 더 예뻤을까</p><p class="ql-block">그렇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소원대로 결혼했고 외할머니 16세 되던 해 엄마를 낳았다. 애기를 낳을 때 외할아버지는 돈벌이 하러 외지에 가 있었는데 아기 출신 소식을 듣고 바로 기차에 몸을 실었다. </p><p class="ql-block">엄마가 태어나던 해는 1946년 7월, 일본인들이 항복하고 동북에서 철수해 나간지 1년쯤 되던 해이다. 일본군은 철수하면서 731생물공장에서 연구해낸 여러가지 바이러스를 투척했다. 외할아버지는 운이 안 좋게 기차에서 장질부사균에 전염되어 엄마가 태어난지 한달만에 세상을 떠났다.</p><p class="ql-block">외증조할아버지는 꽃처럼 아릿다운 외할머니를 보면서 “ 리씨집 자식은 우리가 키울테니 새아가는 재가가도록 해라. 아직 앞날이 구만리인데 과부로 살 순 없지 않은가” 고 말했다. 그래서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서 컸고 외할머니는 외지에 있는 목수한테 시집갔다. </p><p class="ql-block">갓 헤어졌을 때는 서신거래도 있었는데 전쟁난국에 얼마 안가 통신이 다 두절되었다. 엄마는 초등학교 졸업 뒤 사범학교에 갔었다. 하루는 친구가 달려와서 “ 얘, 지금 학교에 편지 한통 왔는데 네 사연이랑 똑같애. 빨리 사무실에 가보자” 고 엄마 손을 이끌었다. 외할머니가 딸과 연락을 취하고 싶어서 가능한데는 전부 편지를 띄운거었다. 그렇게 엄마는 16세에 친 엄마를 다시 만났고 이복 동생들도 네명 생겼다. 그때만 해도 목수 일은 돈을 잘 버는 직업이었다. 그래서 32세밖에 안된 외할머니는 여전히 너무 젊고 예뻐서 엄마는 차마 “엄마”라는 말이 입에서 안 떨어졌다고 한다.</p><p class="ql-block">이렇게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동병상련의 두 사람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었고, 자식들이 너무 소중한 나머지 우리 세 형제한테 손끝에 물 한방울 안 묻히우고 애지중지 키워주셨다. </p><p class="ql-block">3</p><p class="ql-block">내 위로는 오빠 한명, 언니 한명 있었다. 언니 오빠는 하야말쑥하고 금동옥녀처럼 너무 이뻐서 동네 사람들이 우리 엄마를 보고 집에 앉혀놓고 애만 낳게 했으면 좋겠다고 했단다. </p><p class="ql-block">모든 것은 완벽할 때 손을 멈춰야 한다. 나의 출생이 바로 생생한 예시이다. 나는 오빠랑 9살차이, 언니랑 5살차이, 내가 태어날때는 아버지가 38세었었다. 그래서 내 인상속에는 젊은 아빠의 모습이 없다. 내가 기억을 할 때부터 아버지는 앞머리가 벗어진 중년 아저씨었다. </p><p class="ql-block">나는 하야말쑥한 언니오빠랑 달리 까무잡잡했고 태어나마자 사탕물을 벌컥벌컥 마셨다고 한다. 성격도 급해서 한번에 콱 나온 바람에 엄마 골반뼈가 잘못됐다고 어릴 때부터 나는 엄마 둔부를 작은 손으로 두드려 주면서 그 빚을 꽤 오래 갚았다.</p><p class="ql-block">엄마는 18세부터 밀산에서 15키로정도 떨어진 서동안이라는 곳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했고 아버지는 젊었을 때 배운 서예 덕분에 좋은 직장들마다 너도나도 스카우트해서 때는 밀산시 양식국에 출근했었다. </p><p class="ql-block">그러다보니 오빠와 언니는 엄마 할머니가 다 키워줬다. 내가 태어날때는 외증조할머니도 연로해서 더 이상 애기를 키워 줄 기력이 없었다. 그래서 태양촌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보내기로 결정했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