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수기

꽃향기

<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추모수기]</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b style="font-size:22px;"><i>아저씨를 추모하여</i></b></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2024.1.4 아저씨가 돌아가셧다는 갑작스런 부고를 접하고 놀라움과 아쉬움을 금치못햇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병원에 다녀오신지 불과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불치의 병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다시 못올 강을 홀연히 건너야만 했습니까?</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누구라 할 것 없이 갈 때가 되면 모두 가야하는 곳이지만 저승사자는 대체 무엇이 그리 급해서 아저씨를 이리도 빨리 데려갔는지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하늘도 야속하지.어려서 아버지 없이 온갖 고생하며 자라서 단란한 가정이루고 인제 만년에는 자손들의 효도속에서 맘껏 복을 누려야지 않겟습니까? 하늘나라 가기전에 5명의 손주들 혼인하는것까지 다 보고 가는것이 소원이였는데 간절한 소원 이루지도 못하시고 어찌 가셧습니까?</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이젠 아저씨가 있던 자리는 비여있으며 &lt; 처제 &gt; 라고 불러주던 다정한 목소리와 인자한 얼굴을 더는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이미 고인이 돤 아저씨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을 담아 애도의 글을 쓰는 이 시각,고인이 생전에 베풀엇던 인정들이 주마등마냥 눈앞을 스쳐지납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어느해 설날,언니와 아저씨 로부부께서는 집에서 대리석 떡돌에 고무망치로 찰떡을 맛나게 쳐서 우리집 뿐만 아니라라 우리아들 처가집 몫까지해서 두 대야나 담아내왓습니다.설날아침에 맛난 찰떡을 받아든 순간 가슴이 뭉클햇습니다.그것은 그젯날 우리부모님 세대에 바자굽이 너머로 색다른 음식이 오가던 따뜻한 인정이 넘치는 우리민족 풍속을 떠올리게 하엿습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마음씨 선량한 아저씨는 주변에 따뜻한 인정을 베푸는 아름다운 사람이엿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언니와 나는 동성동본 전주림씨이고 바로 옆집에 삽니다. 세상에 어쩜 이런 우연한 일치도 다 있습니까? 아래웃집이 동성동본인 경우는 극히 드문일입니다.이건 필시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여긴 우리 두집사이는 친자매처럼 친하게 지냈고 돈독한 정을 다져갔습니다.우리는 허물없이 시도때도 없이 하루에도 몇번씩 두집사이를 오가며 들락거렷는데 아저씨는 언제나 따뜻하게 대하며 나에게 &lt; 처제 &gt;라고 다정하게 불러주엇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나는 언니에게서 아저씨의 어린시절에 대한 서럽고 가슴쓰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아저씨의 아버지는 1950년10월에 조국의 &lt;항미원조 보가위국&gt;의 호소에 따라 중국인민지원군에 입대하였습니다.총알이 빛발치는 조선전장에 곧바로 투입되는 참군은 죽음과 직결된다는것은 불보듯 명백햇습니다.하지만 당시 수많은 조선족 열혈청년들이 죽음도 초개같이 여기고 중국인민지원군에 용약 참군하였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입대후 아저씨 아버지는 곧바로 중국인민지원군 부대에 편입되여 1950년10월 19일에 팽덕회 총사령원의 령솔하에 기세드높이 압록강을 건너 총알이 빛발치고 폭탄소리 귀청을 찧는 항미원조 전장에 투입되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아저씨 아버지는 항미원조 제1차전역에서 미군의 무차별 퍼붓는 폭격에 맞아 장렬히 희생되였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아저씨는 지금도 조선의 어느한 심산속에 누워있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아버지가 참군할 때 아저씨 나이는 7살,동생은 5살로 한창 부모님품에서 어리광 부릴 나이였고 그러는 두 아들의 귀여운 재롱을 받아주며 천륜지락을 누리며 살아가야 할 부모님이였습니다.항미원조가 아니였다면 아저씨 두 형제는 부모님 슬하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행복하게 자라며 마음껏 공부햇을것입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일어나지 말아야 할 조선전쟁은 하루아침에 단란햇던 아저씨집 가정행복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고말았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아저씨 기억속에 아버지 모습은 키가 크셨다는것외에 얼굴모습은 희미할뿐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아저씨 세 모자는 어서 전쟁이 끝나서 아버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두달,반년,일년,삼년이 가두 기다리던 아버지는 끝끝내 오지않았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러니 어쩝니까?엄마는 어린아들 데리고 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학교에 보낼 엄무도 못내고 일만 시켰습니다.어린 나이에 조가을 할 때이면 조이가 키를 넘었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아저씨는 한마을의 친구들이 아침이면 책가방 메고 학교 가는것을 그저 먼발치에서 부러운 눈매로 바라만 볼 뿐이였습니다.학교가는것은 사치였 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아저씨가 어려서 아버지 없이 온갖 고생 다하며 자랐다는 말이 아직도 귀전에 울립니다.항미원조 렬사가족의 이야기는 참으로 가슴아픈 이야기 아닐 수 없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긴 세월이 흐른뒤 화국봉 주석의 집정시기에 와서야 행방불명이된 항미원조 렬사들을 등기하라는 상급의 지시가 있었답니다.엄마가 돌아가신 이듬해 1976년 늦가을의 어느날, 긴 기다림끝에 아버지 렬사증이 마침내 내려왔습니다. 꼭 25년만입니다.촌지도부에서는 온 마을 사람들을 모여놓고 추도회를 열었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 때 렬사대우를 취급하는 길림 유수현의 민정국의 한 사업일군은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리유로 렬사대우 수속을 해주지 않았습니다.아들이 직계가족인데 아이된다니 웬 말입니까? 그렇게 일이 몇년간 풀리지 않고 있던 시점에 아저씨는 가족을 거느리고 연길에 이사오게 되였습니다.연길시 민정국도 다니면서 렬사대우문제를 반영했으나 그냥 해결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그러다가 썩 후에야 해결받고 겨우 6년간 대우받으시던 중에 아저씨가 돌아가셨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소년시절부터 밭농사로 잔뼈를 굳혀온 아저씨는 인생전반을 오로지 일에만 몰두하셨고 일로 일생을 마감햇습니다.근면함이 몸에 밴 아저씨는 여름에는 밭농사하고 겨울에는 시내에 들어가 보이라불 때는 일하면서 쉬지않고 억척스레 일하엿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최근에는 암진단 받고도 아픈몸을 이끌고 하루도 쉬지않고 수년간 해오시던 페지줏는 일하시엿는데 돌아가시기 한달전까지도 일손을 놓지않으셧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저씨가 생활난으로 페지줏는가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실상은 그와 정반대입니다.아저씨에게는 효성이 지극한 아들딸이 세명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 가있는 아들딸 셋은 달마다 어김없이 생활비를 넉넉히 부쳐보내와서 부모님 로후는 아무런 근심걱정 없습니다.허나 어릴때부터 습관된 근면함과 검소함이 몸에 밴 아저씨는 절대 가만히 앉아 놀 수 없었습니다.우리가 &lt;이젠 편안히 쉬시라&gt;고 할 때마다 운동해야 한다고 말씀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아저씨의 인생 좌우명은 &lt;사람은 놀면 안된다&gt;엿습니다.그런 인생 좌우명답게 아저씨는 심장의 고동이 멎는 순간까지도 실천해 가는것이엿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아저씨 인생은 험난한 길을 헤쳐온 각고한 인생이였습니다.하지만 본인이 워낙 똘똘한 아이다 보니 아버지 없이 자라도 방황하지 않고 바르게 자라서 성인이 되엿고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촌의 지도부에서는 렬사후대인 아저씨를 정치상에서 아낌없이 배려해 주고 밀어주었습니다.촌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대대민병련장직에 임명된후 맡은바 임무를 착실히 리행하였습니다.훈련시에는 자신보다 덩치가 우람진 촌의 청년들을 진두지휘하는 날파람을 보엿습니다. 한때는 대대 축구선수로 뽑혀 축구장을 주름잡는 용맹도 떨쳣습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지난세기 70년대에 연길현 동성에서 살던 아저씨네 일가는 동생네 가족을 따라 길림성 유수현이 입쌀의 고장이란 소문믿고 이사가서 그 곳에서 이십여년 살앗습니다.그 때 젊음의 패기가 넘쳣던 아저씨는 한족들이 많은 마을에서 생산대 대장직을 맡고 활약하여 조선족 촌민은 물론 한족촌민들의 한결같은 호평을 받앗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아들딸 낳고 잘 키워 시집장가 보내고 부모의무 다하니 이젠 신체가 따라주지 않습니다.불치의 병은 수시로 아저씨의 몸을 괴롭혔습니다.하지만 아저씨는 불치의 병마앞에서 가족들에게 락심하거나 정서가 저락된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고 고통을 참고 견디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엇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세상뜨기 몇칠전에 우리남편은 연변병원 급진실에 있는 아저씨에게 병문안 갔었습니다.그 때 &lt; 이 추운겨울에 페지줏으러 밖에 나가지말고 따뜻한 집에서 휴식하라고 &gt;또 &lt; 몸에 달고 있는 검사기계를 함부로 떼지 말라 &gt;고 햇더니 &lt; 그래야 력사가 남지 &gt;하며 그 와중에도 우스개도 슬슬 던지는 여유로움을 보여주셧습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인생무상, 진짜 인생 덧없는것입니까?고인은 떠나가셨지만 그이가 남긴 여향은 영원히 남아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사랑하는 남편,자애로운 아버지를 잃은 가족에 숭엄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고 김명룡님,이젠 모든 고통 다 내려놓고 부디 아픔없는 천국에 가셔서 평생 복락누리십시요.</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림률아</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2024.1.25</spa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