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할머니의 지혜</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태명숙</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어렸을때 할머니께서는 늘 우리 남매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그 이야기를 들으려고 우리는 저녁 밥술을 놓기 바쁘게 할머니 옆자리를 차지하느라 서로들 안달이였다. 약삭빠른 내가 미리 할머니 곁에 물 한 대접을 떠다 놓는다. 이야기 하나로 만족할리 없는 철 없는 나이라 할머니는 내가 떠다 놓은 물로 목을 축여가면서 하나가 끝나면 또 새로운 하나로 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푸신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범 이야기, 아니면 흥부와 놀부, 선녀와 나무꾼, 해와 달, 도깨비와 요술 방망이, 춘향전, 심청전, 등 매일 새로운 이야기로 우리 두 귀를 호강시켰다.우리 남매들은 저녁이면 늘 할머니가 재치있게 엮어가는 이야기속에 빠져 처음에는 초롱초롱한 두 눈을 번쩍뜨고 귀를 쫑긋 세워 들으면서 잠들지 않으려고 무등 애를 쓰다가도 어느새 소르륵, 쌔근쌔근 달게 자 버린다. 그러면 우리를 하나하나 살펴서 바로 눕히고 그날 할머니의 이야기도 마무리가 된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span class="ql-cursor"></span>할머니의 나름대로 거창하지도 않고 소박한 많은 이야기는 대부분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것은 없지만 착한 마음으로 남을 도우면서 결국에는 부자로 잘 사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가 된다. 눈먼 심청처럼 아버지를 효도하고 춘향처럼 정조를 지키는 우리 민족의 풍속과 부모를 공양하고 여자가 지켜야 할 예의범절도 어릴적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알아갔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어릴때부터 이렇게 듣고 자랐던 수 많은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아픔과 슬픔이 동반된 삶에서 악행보다 선행으로 살아가는 우리 조상들의 덕행을 엿 볼수 있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동년시절의 티 없이 깨끗한 동심에 한올 또 한올의 해맑은 꿈을 심어주신 셈이다.</span></p> <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여덟식구의 생계를 책임진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생산대 일로 바삐 보내신다. 아침 일찍 일을 나가 저녁 늦게야 귀가하는 어머니를 위하여 우리네 성화를 피해 일찍 쉬게하려는 할머니의 지혜가 살짝 내포되지 않았을까, 돌이켜 생각해 본다. 어머니를 끔찍 아끼는 할머니의 모습을 어려서부터 봐 왔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간혹가다 의견 충돌이 있어도 할머니는 무조건 어머니 편이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우리 남원 태씨가문의 족보를 따지자면 김씨나 박씨처럼 쭉~쭉 잘 뻗어나가는 집안도 아니고 삼대 독자인 아버지에게 시집온 어머니가 대가 끊길 우려없이 우리 5남매 중 둘은 동네산파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응아~응아 울음보를 터트렸다고 한다. 그 없는 세월에 우리 남매들은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잘 자랐으니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더 말할나위 없는 일등 공신인 셈이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할머니 또한 동네에서 손군들 예뻐하기로 두번째 가라면 섭섭 했을 분이다. 어머니가 밭일을 나가시면 할머니가 늘 우리를 보살피고 챙기셨다. 할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아 우리는 할머니를 많이 따랐다. 우리 남매들이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고 바르게 성장한 것도 어릴때부터 봐 온 할머니의 인성 교육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때는 소수민족인 우리 글보다 한자에 대한 우상화 바람이 잠깐 일긴 했지만 우리민족의 글만 고집하신 할머니 덕분에 우리글을 배우는데 방해를 받지 않았다. 아마 그것이 나의 심령에서 봄날의 새싹처럼, 글에 대한 집착이 움트지 않았을까, 되새겨 본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러던 내가 학교에 입학하기전, 일곱살되던 해였다. 어느날 할머니가 방으로 나를 부르시더니 "우리 숙이가 명년에 학교를 가야지. 구구단과 한글 자모음을 어서 떼야겠다" 래일부터 잘 따라 읽으라 하신다. 내가 할머니께 누구한테 배우냐고 묻자 당연히 할머니란다. 생산대 일로 금방 퇴근한 어머니가 그 얘기를 듣고 나에게 귓속말로 할머니의 그 시절에는 여자들이 글을 배우는 시대가 아니여서 집안에 잔 심부름을 도맡아 하시던 할머니는 일부러 가던 길을 에돌아 글 방에서 랑랑하게 글 읽는 소리를 밖에서 따라 읽었다고 한다.시간이 가는줄 모르고 엿 듣다가 깜빡 심부름을 잊은채로 집에가서 웃 어른들께 혼난적도 한 두번이 아니란다. 할머니가 그때 듣고 따라외운 공부인데 한번 들은건 웬만하면 잊지 않고 머리가 비상하셨다고 한다. 그전에 석현 장터에서 할머니가 풋 강냉이 장사를 할때 1하면 옆에다 돌 한개를 갖다 놓고 2하면 두개를 갖다 놓으면서 숫자개념을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구구단을 활용해 돈 계산도 척~척 잘해서 모두들 걸어다니는 주산이라 불렀단다. 그러나 어머니가 시집와서 할머니가 글을 쓰는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는데 듣고 외우기만 해서 쓰는 것은 못 하신단다. 자모음과 구구단 읽는 것만 잘 따라해도 네가 학교에 들어가면 많은 도움이 될거라 하시면서 엄마가 일하느라 못 챙기니 잘 배우라 하셨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글을 쓸 줄을 모르시고 외우기만 했다는 어머니의 얘기에 어린나이에도 장난기가 발동했던 나는 얼른가서 " 할머니, 할머니도 이름이 있어요?" " 물론 있지 " "할머니, 그럼 저 한테 한번만 써 주실래요?" " 숙아, 오늘 내가 팔이 좀 아파 글을 쓰지 못해 어쩌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내가 생 떼질을 쓰면서 와~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이렇게 나는 어머니도 한번도 보지 못했던 할머니의 십여분 넘게 삐뚤삐뚤하게 쓴 전 자, 해 자, 산 자, "전해산"이란 이름 석자를 기억하게 되였다. 다 알면서 일을 벌였고 다 아시면서 손녀의 요구를 들어준 할머니가 나이가 들어 차츰씩 커가는 나에게 더없이 묵직한 존재로 다가 왔다.</span></p> <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때로부터 할머니 방에서는 저녁마다 조용히 글 읽는 소리가 들린다. 아 야 어 여 가 갸 거 겨 자모음을 며칠씩 따라 읽고 그 다음은 할머니가 아~하면 내가 어~ 하고 내가 즈~하면 할머니가 츠~하면서 읽기도 했었는데 할머니의 칭찬을 들어가면서 신나게 배웠다. 얼마되지 않아 1×2=2, 3×6=18, 9×9=81, 구구단도 통달하였다. 돌이켜보면 나의 계몽 스승은 틀림없는 할머니시다. 할머니 곁에 누워서 받아 외우던 지난 일들이 마치 나의 머리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여덟살에 학교에 입학한 나는 할머니의 계몽 교육이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였던지, 재삼 실감했다. 그때 소학교에서 중간시험, 기말시험, 성적표를 보면 최우수, 아니면 우수로 나왔다. 중학교에 올라가 수학이 좀 힘들었는데 그래서 내가 글 쓰는 쪽인 어문에 더 흥취를 가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소학교에서 2학년부터 작문수업이 있었는데 하루는 담임인 황선생님이 제목을 자기절로 선택해서 글 짓기 숙제를 하라고 한다. 무엇이나 남보다 뒤지기 싫었고 승벽심이 강했던 나는 할머니께 고민을 털어 놓았다. 할머니는 " 우리 주위에 글 쓸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봄이면 꽃이 피고 그때가 되면 모내기를 시작하고 여름이면 기음을 매고 가을이면 탈곡을 하는데 그 탈곡중에도 콩 탈곡이 있지. 우리 숙이가 골라서 써 보렴 " 할머니의 얘기가 떨어지기 바쁘게 " 할머니, 저는 콩 탈곡을 쓸래요 " 라고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주섬주섬 옷을 입으시면서 따라 나서라고 하신다. 그 굽은 허리를 가다가도 몇번씩 쭈욱 펴 가면서 생산대 탈곡장으로 향하신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생산대 사원들이 도리깨로 콩을 두드리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쓴 나의 첫 작문 " 콩 탈곡 " 의 한 구절이 지금도 뚜렷이 잊혀지지 않는다."생산대 아저씨들이 콩 탈곡을 합니다. 아저씨들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힙니다. 한쪽에서는 콩단을 풀고 한 쪽에서는 도리깨로 콩을 두드립니다. 도리깨에 맞은 샛노란 콩알들은 마치 해방을 받았다는듯이 너도나도 좋아라 퐁퐁 뜁니다." 할머니께 읽어 드렸더니 나의 머리를 쓰담으면서 우리글에 끼가있어 앞으로 많은 책을 읽으면서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이렇게 나의 첫 작문이 백점을 맞았고 선생님께서 전체 학생들 앞에서 읽으셨다. 2학년 학생이 쓴 작문일까 싶을 정도로 잘 썼다고 칭찬하셨다. 그 때로부터 사물을 직접 접촉하면서 글을 쓰게한 할머니의 지혜가 지금까지도 나의 몸에 배였는지, 모든 사물을 그저 슬쩍 스치지 않고 글과 연관시키는 습성을 키운 것 같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러던 5학년 여름 방학때 쯤 나는 할머니에게 읽고쓰는 우리글을 가르치겠다는 결심을하게 된다. 우리민족 한글의 자음 19개에 모음 21개를 책에다 적어놓고 그 원리를 할머니에게 차근차근 설명에 들어간다. 할머니가 나에게 읽는 것만 가르켰던 자음과 모음의 구별점을 잘 익히고 그 둘을 결합하면 한개 단어가 되는데 ㄴ ㅏ 나, ㅁ ㅜ 무, 의 결합된 단어가 나무이고 ㄱ ㅏ가에 ㅇ받침이 붙어 강이고 ㅁ ㅜ 무에 ㄹ 받침이 붙어 물인데 두 결합된 단어가 강물이라고 차근차근 설명에 들어간다. 쌍 받침도 함께 배워 나갔다. 지혜로운 할머니답게 생각대로 터득이 빠르셨다. 내가 읽었던 1학년 조선어문 교재는 할머니의 손 자국으로 다 닳아 떨어졌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 당시 생산대에서 일하던 사원들은 퇴근 할 무렵 빙 둘러 앉아 그날의 일을 평가해서 공수를 매겼다. 그러면 생산대 부기원이 그것을 기공하는데 간혹가다 빠질때가 있어 일하고 와서는 어머니가 아버지 몫까지 꼭 수첩에 적으셨다. 어느날부터 그 수첩이 할머니의 손으로 넘어갔다. 빈틈없이 날자, 시간, 공수를 정확히 적으신 할머니가 아버지의 일하신 날자가 빠져 부기원을 찾아가 찾으셨다고 어머니에게 자랑을 하셨다. 또 동네에 마실을 나가셔도 늙으막 공부를 손녀덕에 잘 한다고 입 버릇처럼 외우셨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할머니의 노력은 계속되였다. 어느날 하학한후 집에 발을 들여놓기 바쁘게 나는 입버릇처럼 할머니를 불렀는데 여느때와 달리 대답이 없다. 할머니의 방 문을여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모래에 물을 살짝쳐서 담은 널판지 판자에 할머니가 나무 젓가락으로 글 연습을 하신다. 쓰고 지우고 또 쓰고 할머니의 손 놀림도 빨라진다. 손녀의 공책과 연필이 축나지 않게하려는 할머니의 지혜에 나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필기장 한권이 3전이고 제일 저렴한 쑥대연필도 3전이고 제일 고급스런 샛노랑 고무달린 연필이 5전이였다. 필기장을 앞 뒷장 다 쓰면 1전짜리 고무지우개로 다 쓴 글을 지우고 또 쓰고 그랬다. 쑥대 연필도 다 써서 손에 잡히지 않아 양철을 감아서 끝까지 쓰게하는 지혜를 할머니가 발휘했다. 아마 저급 학년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우리집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다들 그렇게들 쪼들리게 살았다. 그때 나의 유일한 소원은 샛노랑 고무달린 연필과 공책을 쌓여놓고 원 없이 쓰는 것이였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때부터 보고 자랐던 할머니의 근검 소박하게 절약하는 그 지혜로운 생활 방식이 얼마나 나의 몸에 배였던지, 모든 것이 부족하지 않은 요즘에도 새 것을 사면 낡은 것은 미련없이 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딸한테 가끔씩 몇마디씩 듣는다.</span></p> <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문화대혁명 시기에 고금중외 귀중한 수 많은 책들이 그 무슨 독초라고 불살라 버리는 세월이 있었다. 살아 남은 책을 찾기위해 주인이 채 읽지 못한 책도 내가 오늘 저녁만 보고 래일 아침에는 꼭 가져온다고 약속하고 빌려다 본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골에 전기가 없던 세월이라 석유 등잔불 밑에서 날 새면서 읽다가 앞머리가 불에 그을러 곱슬이가 되였고 눈썹도 다 타서 친구들한테 놀림을 받은 헤프닝도 있다. 내가 빌려서 보는 책이라해도 책 뚜껑에 보풀이 일면 꼭 할머니가 생각해낸 지혜로 세멘트포대 누런 포장지로 책 가위를 곱게 씌워 주셨다. 그래야 책 주인한테 돌려 줄때 또 다른 책도 쉽게 빌려다 볼수 있단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할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나는 어릴적부터 독서를 즐겼다.신문과 잡지로부터 시작해 구양해의 노래와 림해설원, 붉은바위, 등 많은 책들을 걸탐스레 읽었다. 기억에 제일 남은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 레닌 훈장을 받은 러시아 트롭스키 작가의 자서전이다. 그리고 1930년 고난에 처한 우리 민족사를 배경으로 조국 분단의 가슴아픈 역사를 다룬 장편소설 "두만강" 이기영 작품이다. 상, 하로 나뉘였는데 아쉽게도 구하지 못해서 다 보지 못했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러던 나는 우연찮게 2022년 (카라즈 컵) "세계 조선족 글 짓기 대회 " 우리들의 사는 이야기를 주제로 쓰는 공모문을 보게 되였다. 특히 "조선족 글 짓기" 라는 단어가 눈에 확 들어 들어왔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우리 민족의 백여년 이주 역사를 돌이켜보며 일제 강점기에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수 많은 우리 조상들이 달랑 보따리 하나만 걸머지고 산 설고 물 선 간도땅에 터를 잡았다. 다른 민족에게 치우지 않고 오직 조선족이란 민족의 자부심으로 굶어 죽더라도 자식만은 꼭 공부를 시켜야 된다는 신념만은 우리 할머니를 통해서도 알수 있었다. 우리 조상들로부터 민족과 우리말로 된 우리글을 끊길우려 없이 잘 배워야 된다는 피타는 노력들을 돌이켜 보면서 "조선족 글 짓기" 대회란 나에게 그 어떤 특별한 의미로 부여되였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내가 움직여야만 먹고 살았던 힘든 현실속에서도 글이란 단어를 잊어본 적 없다. 어느 신문사나 잡지사에 꼭 한번이라도 내 글이 발표되여 여러 사람들이 읽어주고 평가를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 이런 생각을 하면서 5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젊었을때는 바삐 사느라, 생계라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묵묵히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나에게 한가지 사치에 불과했다. 꼭 마치 저 남쪽 하늘에 걸려있는 아련한 무지개를 보는듯한 절절한 념원이라 할까, 어느덧 자식들도 성가시키고 한가해지면서 마음 한 구석이 어딘가 허전한 공허감을 느끼면서 텅 비여 있음을 발견했다. 그 빈자리에 무언가로 채우지 않으면 안될 충동과 갈구를 느꼈다. 그것이 그렇게 쓰고 싶었던 우리말로 된 글짓기가 아니였을까, 그 꿈이 한 발짝 두 발짝, 스멀스멀 나에게로 다가옴을 느꼈다.</span></p> <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러나 여지껏 살면서 글을 한번이라도 써 본적 없는 내가 첫 작품으로 세계적인 국제무대에 도전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선택은 아니였다. 시작이 절반이라 우선 "저녁노을" 이란 제목부터 달아놓고 황혼을 담은 우리들의 사는 이야기를 구상하면서 내가 살아온 인생과 귀결시켜 써 내려갔다. 다 쓰고 보니 머리가 한 움큼씩 빠졌지만 해냈다는 성취감에 무한한 긍지를 느꼈다. 이렇게 쓴 첫 작품 "저녁 노을" 이 우수상을 받으면서 연이어 "엄마의 누룽지" "추억의 사이판" "노년의 삶과 길" 이 연변여성, 청년생활, 노년세계 등 여러 잡지에 발표되였다. 그리고 한민족 신문에서도 공로상을 받고 "민들레" 와 "들꽃" 에 이어 10여편의 글이 발표되였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내가 생각한 글이란, 내가 살아온 삶이고 인생이며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의 꿈과 희망을 설계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늦은 고희가 가까운 나이에 글을 시작했고 전문 작가는 아니여도 취미로 쓰는 글이지만 만약 이 세상에 할머니가 살아계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앞으로도 쭉~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다. 식사한끼 건너뛰여도 무방할만큼 너무앉아 있어 허리가 아프고 폰을 너무 봐서 눈이 아플 정도로 남들의 쓴 좋은 글들을 공유하면서 열심히 살아간다면 삶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나의 노력과 열정이 지금까지 글을 쓰는데 원동력이 되였다면 할머니의 조언과 지혜는 앞으로의 살아갈 인생 로정에서 아름다운 꽃길로 나를 인도할 것이다. 마치 저~어 멀리 망망한 대해에서 거센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쪽배의 방향타처럼.....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2023년 제 25회 " KBS 한민족 체험수기 " 우수상 작품입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2024. 1. 15.</spa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