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오늘 인터넷에서 80, 90후 동년시절 추억이라는 동영상을 봤다.</p><p class="ql-block">어릴 때 먹던 먹거리들이 갑자기 생각난다.</p><p class="ql-block">나는 밀산이라는 현급시에서 살았는데 가장 번화한 시내 중심 반경이 청화대보다 작다고 농담으로 얘기할 정도로 작은 도시었다. 흑룡강성 수탉모양 지도에서 꼬리부분에 위치해 있었고 러시아와 육지로 연결돼 있는 변방도시이다.</p><p class="ql-block">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운동장 제일 구석진 곳에 움푹 패여 들어가면서 운동장보다 한사람 키높이 정도로 낮게 집 한채 있었다. 거기에는 노인 부부 둘이 살고 있었고 노인들은 사탕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p><p class="ql-block">학교를 안 나가고 사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군것질이었기때문에 수업 끝나고 할아버지 집에 달려가 사탕 하나 사 먹는건 우리한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p><p class="ql-block">방과 종소리가 울리면 우리는 시위를 벗어난 화살마냥 허둥지둥 운동장 끝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경사진 비탈길을 속도 조절하면서 조심스레 내려가 허름한 솜천으로 드리워진 풍막을 제끼고 할아버지네 집 문을 밀고 들어간다. </p><p class="ql-block">집안에 들어서면 광선이 가려져 어두컴컴한 가운데 큰 철로 만들어진 솥이 눈에 유난히 띄운다. 그 때쯤이면 아이들이 오는 시간이라 할아버지는 항상 솥에서 흑갈색이면서도 뒤집을 때마다 금빛 광택이 감도는 설탕을 휘젓고 있었다. 잘 달여진 설탕물을 평평한 판대기 위에 올려 골고루 얇게 편다. 그리고 응고되기를 기다리면 우리가 좋아하는 얼음사탕이 만들어진다. 한 조각에 5전씩 주고 샀던것 같았다. </p><p class="ql-block">한 입 씹으면 바삭바삭한 식감과 함께 달달한 맛이 입안에서 감돌았다. 동년시절의 달콤한 추억속에 키 작고 꼬부장한 한족 할아버지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리고 방과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제3학교를 지나가게 된다. 그 학교 옆 길가에는 기억속에 기막히게 맛있는 군것질들이 많았었다. </p><p class="ql-block">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흰색 엿이었다. 흑갈색 나는 물엿하고 달리 잘 켜서 우유빛 흰색 나는 엿이었다. 적당한 크기에 줄무늬가 세로로 나있어서 보기도 좋았다. 그리고 한 입 먹으면 아삭아삭한 식감이었다. 물엿처럼 찐뜩하게 한 입 가득한 느낌보다 바삭바삭하고 달달한 맛이었다. 그 엿은 하나에 10전 주고 사먹었던 것 같다. </p><p class="ql-block">맛있던 추억때문에 다시 먹어보고 싶었는데 성년이 된 후 그런 엿을 다신 본 적 없었다. 언젠가 다시 봤으면 좋겠다. 아이한테 엄마의 추억속 맛을 나눠주고 싶다. 초등학교 1-2학년 때 많이 먹던 음식이라 중국말로 이름이 뭐었던지 기억이 안 나 이미지 검색도 하기 힘들다. 그냥 사 먹을 때면 이름 말하지 않고 직접 가리키면서 “이걸 한개 주세요” 라고만 소통했던 같았다. </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동북의 겨울은 유난히 춥다. 특히 우리가 어렸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추웠던 같다.</p><p class="ql-block">겨울이면 다른 지역에 없는 동북 특산물 과일 - 언 배가 있었다. </p><p class="ql-block">배를 얼린건데 먹을때마다 바깥 창고에서 꽁꽁 얼어붙은 배를 푸짐하게 한 대야 담아온다. 그리고 찬 물을 부어 넣고 한참 녹여야 했다. 얼음조각이 완전히 없어지면 시원한 배를 그대로 베어 먹는데 해동된후 나른해진 식감에 찬 기운때문에 이가 시릴정도었지만 즐겨 먹던 과일이다.</p><p class="ql-block">보통 설 때 친척들이 모여서 노름판 벌려놓고 아이들은 언배를 먹으면서 어른들 주변을 감돌았던 기억이 난다. </p><p class="ql-block">그리고 북경에 온 후 한번도 먹어보기는 커녕 본적도 없었다. </p><p class="ql-block">우리가 어릴 때 비록 간식거리는 많지 않아도 과일은 오히려 통 크게 쌓아놓고 먹었었다. 계절마다 제철과일을 아빠 엄마 직장에서 싸리로 엮은 큰 광주리에 잔뜩 담아서 나눠주곤 했다. 그래서 창고에 항상 사과며 수박 등 다양한 제철 과일들이 쌓여 있었다. </p><p class="ql-block">여름 수박철이 거의 지나갈 무렵이면 장사꾼이 밀차에 수박을 싣고 다니면서 파는데 1원에 한통씩 팔았다. 그래서 우리는 큰 마로 된 자루에(麻袋) 수박을 가득 담아놓고 먹었었다. 그런데 95년도 북경에 와보니 매점에서 한조각에 2원씩 팔고 있었다. </p><p class="ql-block">그래서 과일 단위는 광주리거나 자루인줄 알았는데 북경에 와서야 박스라는 단위가 있는 줄 알았다. 그리고 한박스가 그렇게 작은걸 보고 심히 놀랐었다. 98년도에 한국 가서 사과 2-3알에 천원씩 파는걸 보고는 더 놀랐다. </p><p class="ql-block">동북은 아직도 경제적으로 많이 뒤처지는 지역이다. 하지만 식당에 가면 반찬 량이 부유한 남방의 두세배정도로 푸짐하게 나오고 돈이 있든 없든 밍크 외투는 기본으로 다 갖추고 있는, 가난한데 잘 사는 지역이다. </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식품점에 가서 엄마가 자주 사오는 “고양이똥 과자”도 너무 맛있었다. 밀가루를 기름에 튀긴 후 하얀 분말가루(단 맛인데 뭔지 모르겠음) 를 입힌 과자었다. 이건 최근에 타우바우에서 江米条이라는 이름으로 팔리는걸 발견했다. 지금 다시 먹으라면 기름 냄새에 과량의 설탕으로 어울어진 고칼로리때문에 맛있어도 많이 못 먹을 같다.</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8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 시장경제가 어느 정도 활성화되자 매점에 여러가지 식품들이 다양하게 출시되기 시작하였다. 그 때 최애로 나타난게 자모과자었다. 여러가지 영어 자모음 형태로 만들어져서 자모과자라고 명명됐는데 뭘 넣고 어떻게 만들었는지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 그런 맛이었다. 지금 먹을 수 있는 과자들보다 훨씬 맛있었다. 이것도 성인이 된 후 시중에서 다시 본 적 없는 추억속 과자이다. 이 글을 쓰면서 사진 찾아보기 위해 타우바우 들어가봤더니 타우바우에는 있었다. 역시 존예 - 타우바우</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초등학교 5-6학년 쯤 상업화 분위기는 더 한층 짙어져갔고 TV광고가 소비를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 광고화면을 휩쓸었던 大大泡泡糖이라는 껌이 있었다. 지금 껌처럼 얇지 않고 두툼하고 너비도 지금 껌 두배정도었다. 질근질근 씹다 아주 큰 풍선을 만들어 낼 수 있어서 그 재미에 많이 사 먹었던 같다. 하나에 10전씩 매점에서 낱개로 팔았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흔적없이 사라진 과거 브랜드로 역사에만 한페이지를 남겨 참 아쉽다.</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소시적 먹기리 하면 빼놓을 수 없는게 당연히 아이스크림이다.</p><p class="ql-block">방과후면 선생님네 자녀들은 엄마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느라 운동장에 모여서 같이 놀군 했었다. </p><p class="ql-block">여자아이들은 운동장 쇠창살가에 피어있는 물초롱처럼 생긴 꽃을 따서 귀볼에 꼭 집어 붙였다. 그리고 귀걸이 생겼다고 좋아했었다. 그런 유치한 놀이로 시간 보내다 갑자기 “雪糕”라는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아이스크림 장수가 자전거 타고 지나가면서 부르는 소리다. 애들은 목청 놓아 “雪糕”라고 웨친다. 그 때는 행상들 호칭이 바로 판매하는 상품 이름 그 자체었다. 두부 파는 사람은 “豆腐”라고 부르면서 불러세웠고 아이스크림 장수는 “雪糕” 라면서 불러세웠다. 아이들 웨침소리에 멀리 간 장수꾼은 주춤하더니 자전거머리를 돌려세우고 우리를 향해 온다. 창살가로 돈을 건네주면 우리한테 아이스크림을 꺼내주었다. 그 때는 아이스크림 하나에 10전씩 했다. 30여년 지난 오늘날 아이스크림 한대 가격이 1.5~3원 정도가 평균가이니 사실 가격이 많이 오르지 않은 상품 중 하나이다. </p><p class="ql-block">가끔씩 학교문을 나서서 사거리에 있는 아이스크림 판매처로 향하기도 했다. 판매처라고 해봤자 아주머니 한 분이 아이스크림 박스 하나 놓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돈을 건네주면 아주머니는 박스를 열고 안에 깔아놓은 솜이불을 헤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주었다. 박스에 갖고 온 아이스크림을 다 팔고 나면 옆에 놓은 보온병에서 또 꺼내주었다. 어릴 때는 그런 용기들이 너무 신기했고 요술박스 같아 보여서 너무 갖고 싶었던 아이템이었다. </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90년대에 들어 선 후 신강에서 양고기뀀이 동북지역에서도 가장 북쪽 변방지역에 있는 밀산까지 전파돼왔다.</p><p class="ql-block">엄마가 우리한테 주는 가장 큰 장려가 양고기뀀을 사주는거었다. 기말시험 등 큰 시험 치르면 사거리에 있는 양고기뀀 파는데 가서 양고기뀀을 사다 집에서 나오기 싫어 죽치고 있는 언니오빠한테 배달해줄 수 있었다. 하나에 15전씩 했던가? 10원이면 꽤 많이 먹었단 기억이 난다. 고향에서 먹던 양고기뀀이 지금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었던 같았다.</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고등학교에 들어설 때 쯤, 92년도쯤이었던 같다. 연변에서 전해왔는지 즉석냉면이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p><p class="ql-block">어릴 때 할머니 집에서 큰 이유로 내가 좋아하는 입맛은 가족들과 다 달랐다. 가족들이 물만두를 먹을 때면 나만 싫다 했고(어릴 때 농촌에서 고기도 변변히 못 넣고 만들어서 맛없다고 머리속에 입력됐나부다) 밥 지을 때 엄마가 맛있으라고 완두콩, 감자 같은거 넣으면 나만 너무 싫어해서 항상 따로 맨밥으로 퍼주었다. 당연히 온 집 식구가 좋아하는 냉면을 나만 싫어했다. 어릴적 집에서 냉면을 해놓고 옆집에 사는 엄교장을 모셔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었단다. 내가 냉면을 싫어하다보니 손님한테 다른걸 해놨다고 엉뚱하게 전달했다는 얘기도 언니한테서 놀림 받으며 전해들은 적 있었다. </p><p class="ql-block">이런 나한테 유독 즉석 냉면만은 너무 맛있었다. 씹으면 면발이 딱딱 끊기면서 새콤달콤한 육수와 함께 넘기면 진짜로 꿀맛이었다. 냉면은 우리 고향에서는 조선족 특유의 음식이 아니라 아무 길가 식당에 들어가서도 다 먹을 수 있는 대중 음식이었다. 가격도 착해서 한그릇에 1-2원밖에 안했다. 95년도 대학교에 오면서 엄마가 학교 뒷골목에 위치한 한국식당으로 데리고 들어간 적 있었다. 물정 모르고 들어갔는데 메뉴판을 보니 엄청 비싼 집이었던거었다. 할 수 없이 그중에서 제일 싼 냉면 한그릇 시켰는데 30원에 한그릇이었다. 그런데 우리 고향의 1원짜리보다 맛없던 기억이 난다. </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어릴 때는 생활이 넉넉치 않아 지금처럼 원하는대로 다 먹지 못했었다.</p><p class="ql-block">엄마 뒤를 졸졸 따라 퇴근 길에 시장에 들린다. 그러면 바나나, 파인애플 등 남방 과일들이 즐비하게 선 보이는데 쉽게 먹을 수 없었다. 동북까지 오면서 가격이 너무 많이 올라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막내보다보니 파인애플 한조각이라도 시장거리에서 더 얻어먹고 들어갈 때가 가끔 있었다. 불현듯 인상속에 먹기 힘들었던 바나나를 서슴치 않고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지금이 정말 행복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p><p class="ql-block">분명 생활이 넉넉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들로만 가득했던 유년시절…</p><p class="ql-block">물질적인 부러움은 없으나 과외수업, 교내 수업으로 스트레스 받으며 친구들과 교감도 거의 없는 딸애를 보면 측은한 감이 든다. </p><p class="ql-block">가장 황금시절이었던 70후 동년시절… 그립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