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연극 평론에 심취해온 교수ㅡ김운일 (평론가)

방미선

<p class="ql-block">인물로 보는 조선족연극 (11)</p> <p class="ql-block">2022년 6월 초, 나는 연변대학 김운일 교수님께서 연극학부 한영희 교수에게 부탁하여 연길에서 보내주신 "중국조선족예술사 - 연극편"을 상해서 택배로 받았다. 이에 앞서 2006년 5월 "중국조선족연극사", 그리고 그 뒤 출판된 김운일문학예술론평집 "석조여광", "운성여광"과 함께 수필집 "열새베치마저고리"도 교수님으로부터 직접 선물 받았다. </p> <p class="ql-block">교수님께서 수십년 각고의 노력으로 펴내신 "중국조선족연극사"를 읽으면서 나는 교수님이 조선족연극을 위해 큰 일을 해내셨음에 깊이 감동되어 "중국조선족연극사와 김운일 교수"란 제목으로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너무 크고 무겁고 아름찬 일이라 내 능력으로는 감당이 안되여 금방 포기하고 "인물로 보는 조선족연극"시리즈에 교수님께서 조선족연극평론에 기울린 정성과 성과만이라도 다루고 싶었다.</p> <p class="ql-block">벌써 12년 전의 일이니 그게 바로 2011년 가을이다. 김운일 교수님에게 한번 뵙고 싶다고 전화를 드렸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어오셨다. "인물로 보는 조선족연극" 시리즈 중 평론 분야에 교수님을 모셨으니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누련다고 말씀드리자 교수님께서는 단마디로 거절하셨다. "내가 어떻게 조선족 연극인물 속에 들 수 있냐" , "나에 대해 뭘 쓸게 있냐"고 하면서 한사코 거부하시는 교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할 일도 있으니 꼭 만나고 싶다고 거듭 말씀드려서야 동의를 얻고 교수님댁을 방문할 수 있었다.</p> <p class="ql-block">문을 열고 들어서니 소담한 객실 겸 서재가 한눈에 들어왔는데 한쪽 벽을 통째로 차지한 개방식 책장은 물론, 객실 구석 구석에도 책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책장 맞은 편 소파 앞의 책상 삼아 쓰시는 앉은뱅이 밥상에 여러가지 책, 잡지와 원고지가 놓여있었는데 한눈에도 금방까지 글을 쓰신 흔적이 력력하였다. 퇴임하신지도 한참 되건만 손에서 한시도 책과 펜을 놓지 않으시는 교수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안고 나는 교수님을 찾게 된 이유를 상세히 말씀드렸다. </p> <p class="ql-block">조선족연극 분야의 저명한 연극인들의 년세가 점점 높아가는 시점에서 그들을 방문하여 연극인생을 되돌아보고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글로써 그들의 공로를 기리고 그렇게라도 조선족연극의 역사를 남기는데 힘을 보태고 싶다는 나의 말을 주의깊게 들으신 후 교수님께서는 "방선생이 참 좋은 일을 하고 있는데 힘자라는 대로 도와야지" 하며 적극적으로 호응하시면서도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건 견결히 반대하셨다.</p> 연극은 극본, 배우, 관객 이 삼요소가 결합되어야 완성되는 예술인데 연변연극단과 기타 현, 시의 조선말 연극공연을 거의 빼놓지않고 관람하신 중요한 관객의 한 분으로서 교수님은 어쩌면 관객대표라고도 할 수 있고 게다가 관람하신 연극마다에 중요하고도 전면적인 평가를 해주셨을 뿐만아니라 유일무이 중국조선족연극사를 펴내신 분이니 교수님 개인에 대한 글이라는 협소한 의미를 벗어나 조선족연극 역사를 되돌아보는 데에 필요한 메세지를 남긴다고 생각하셨으면 좋겠다고 내가 거듭 말씀드려서야 교수님을 설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잊지않았다. 훈춘의 "만년 연극쟁이 초동 선생"을 방문할 때 교수님께서 함께 가셨으면 좋겠다는 나의 요청에 흔쾌히 응낙하시여 선뜻 동행해 주셨고 기타 원로연극인들에 대해서도 좋은 말씀을 많이 들려주셨다. 그후 나 자신도 퇴임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10여년 필을 놓은 탓에 교수님 관련 글을 완성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차 교수님의 작고 소식을 접했다. 죄송한 마음으로 교수님 댁 방문시에 나눴던 이야기와 그토록 정력을 몰부어 조선족연극평론에 심취하셨던 교수님을 다시 떠올린다. <p class="ql-block">1. 연극에 다가선 시골소년</p><p class="ql-block">김운일 교수님을 마주하면 이 분이 소학교 때부터 연극놀이를 좋아했던 소년이였었다는게 전혀 믿겨지지 않는다. 내가 보아왔던 교수님은 희곡창작회의거나 연극관람좌담회에 오실 때면 언제나 조용히 자리를 찾아 앉으시고 주위의 분들과 그저 빙그레 웃음으로 반가움을 표하신다. 토론회에서 그 어떤 의견에 수긍 혹은 반대를 표시할 때에도 표정과 정서에 별로 변화가 없이 은은한 목소리로 천천히, 차분하게 말씀하시여 쩍하면 어성을 높히고 격한 목소리를 내는 연극인들 사이에서 교수님만의 잔잔한 호수같은 독특한 풍경을 연출한다. </p> 한마디로 교수님은 신사이시다. <p class="ql-block">이런 분에게 과연 연극적 흥과 끼가 있을까? 늘 한결같이 차분하고 부드러운 모습의 교수님께서 소학교와 중학교는 물론 대학시절에도 정서표현이 강렬함을 요하는 연극배우로 열연했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충격적이였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로년에 이르기까지 배우, 극작가, 연극평론 등 연극에 관련된 여러가지 크고 작은 작업을 몸소 해오셨고 "중국조선족예술사ㅡ연극편"의 집필을 위하여 퇴임후에도 펜을 놓지않으시니 비록 과외적이지만 교수님은 그야말로 연극과 깊은 인연의 력사를 품은 것만은 사실이다.</p> <p class="ql-block">1934년 훈춘 토산자에서 태여나신 김교수는 열둬살 때부터 당시 조선족연극의 요람이라고 할 정도로 연극활동이 활발했던 훈춘의 연극환경과 연극 열성분자였던 형님의 영향으로 연극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였다. 그 뒤 훈춘 문공단에 취직하여 전직 연극배우로 활약하던 형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연극구경에 정신을 앗겼다가 중학시절에는 아예 무대에 올라 곽말약의 "굴원" 과 쉑스피어의 "베니스 상인" 등 연극에서 중역을 맡아 신나게 연기를 펼쳤다고 하셨다.</p> <p class="ql-block">1956년 고중 졸업시 연극 "굴원"에서 굴원 역으로 신나는 연기를 펼치는 김운일 교수님</p> <p class="ql-block">대학시절에도 문예써클에서 연극배우로 무대에 섰음은 물론, 희곡도 몇편 써내면서 작가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게다가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할 때에는 학생 중 유일하게 조선족연극을 테마로 론문을 쓰셨고 그걸 계기로 "조선족 문학사"편집소조에 가담하여 문학사 자료-주요하게 해방전 조선족연극 관련자료를 수집하면서부터 연극에 대한 관심이 한결 증폭되였다.</p> 1957년 꿈많은 대학시절의 김운일 교수님 <p class="ql-block">김교수의 조선족연극과의 인연은 여기에 그치지않는다. 대학에 남아 교편을 잡은 후에는 연변에서 공연되는 거의 전부의 연극공연을 관람했고 관람했던 연극에 대해 빼놓지않고 평론 혹은 관후감을 "문학과 예술", "문학예술연구", "예술세계", "연변대학학보", "일송정", "길림예술학원연변분원 학보" 등 여러 조선문잡지에 발표했을 뿐만아니라 연극관련 평론문장을 문학예술론평집 "석조여광", "운성여광"에 수록함으로써 조선족연극을 위해 "유난한 빛으로 밤하늘을 찢는" 운성처럼 자신의 "여광"을 남김없이 발하셨다.</p> <p class="ql-block">대화 중 김운일 교수께서 조금은 수줍게, 그러나 전혀 사양함이 없이 자신이 소학시절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무대에서 신나게 연기를 펼쳤었다고 떳떳이 말씀하셨지만, 연출가인 내 눈에는 전혀 배우의 끼가 보여지지 않는 교수님, 어쩌면 교수님의 연극적 끼와 흥이 가슴 속 아주 깊숙히 감춰져있었지 않았냐 싶다. 아마도 그 극적감성와 정열이 너무 깊히 파묻힌 탓에 쉽게 분출되지 못해 배우로서는 성공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분출구를 찾아 연극을 옳게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키워 연극평론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않았을까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하긴 조선족연극으로 말하면 열정에 들뜬 어설픈 연극배우 한명을 잃은 대신 저명한 연극평론가를 얻은 셈이니 그야말로 예상치않은 수확이고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p> <p class="ql-block">2. 조선족연극 평론에 심취하시여</p><p class="ql-block">김교수의 연극평론은 발표시간으로 볼 때 조선족연극이 창작극 갖춤새를 보일 때와 동일함을 알수 있다. 창작극은 80년대 초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김교수의 연극평론도 그때로부터 시작된 뒤 2010년 좌우까지 근 30년 간 여러 문학예술잡지에 부지런히 발표되였으며 그 기간 중국조선족연극사 집필도 시종 이어졌다.</p> <p class="ql-block">전국 유일 조선족연극단체인 연변연극단의 경우, 1956년의 정식 성립을 이어 1966년까지는 소량의 전통극과 창작극 외 거의 대부분은 한족극단과 외국의 우수한 희곡을 번역, 혹은 개편하여 공연하였고 창작장막극은 근근히 "장백의 아들" [황봉룡 작 1959.2] "광활한 천지" [황봉룡 작 1964. 3월], "초유록" [집체창작,1966. 1] 이 3부 뿐이다. </p> "장백의 아들" [황봉룡 작 1959.2] "광활한 천지" [황봉룡 작1964. 3월] "초유록" [집체창작,1966. 1] 70년대에는 사회정치적 분위기에 따라 "붉은 신호등", "두견산".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 등 본보기극과 당시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되었던 희곡을 번역개편하여 공연하였고 창작극으로는 역시 "백산의 봄우뢰" [한원국 작, 1973.4]와 "괴상한 간력표" [황봉룡 작. 1979.10] 2부 뿐이다. "백산의 봄우뢰" [한원국 작, 1973.4] 괴상한 간력표" [황봉룡 작. 1979.10] 1980년대에 이르러서 새로운 문예정책이 시달되면서부터 창작극이 중시를 받고 활기를 띄게 되였는데 한편으로는 번역극을,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창작극을 무대에 올리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창작되여 무대에서 공연된 연극들로는 1980년 장막극 "눈속에 핀 꽃" [박응조, 홍성도 작, 1980.2], "산귀신" [황봉룡 작, 1982.3], "해란강반에 봄이 왔네" [최정연 작, 1982.4], "배우와 강도" [황봉룡 작, 1982.11], "도시+농민" [리광수 작,1984,2], "꽃사슴아 잘 가거라" [황봉룡 작, 1984.3], "9번 새각시" [한원국 작, 1985.3], "출국전야" [리광수 작 1985.6 ] "청춘소야곡" [김훈 작,1985.9], "망각된 인간들" [김훈 작, 1987.3], "그 처녀와 택시아가씨" [한원국 작, 1987.7], "처녀들 안녕" [한원국 작, 1988,2], "배우와 강도" [황봉룡 작, 1988.3], "요란한 사랑" [리광수 작. 1988.9], ”교회당의 종소리" [황봉룡 작 1989.2] 외 전통극 "성황당"과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등 15부가 공연되였고 번역작품은 3부로서 창작극보다 많이 줄었다. "눈속에 핀 꽃" [박응조, 홍성도 작, 1980.2] "산귀신" [황봉룡 작, 1982.3] "해란강반에 봄이 왔네" [최정연 작, 리동철 연출 1982.4] "배우와 강도" [황봉룡 작, 1982.11] <p class="ql-block">"도시+농민" [리광수 작,1984,2]</p> "꽃사슴아 잘 가거라" [황봉룡 작, 1984.3] "9번 새각시" [한원국 작, 1985.3] "청춘소야곡" [김훈 작,1985.9] "망각된 인간들" [김훈 작, 1987.3] "그 처녀와 택시아가씨" [한원국 작, 1987.7] "처녀들 안녕" [한원국 작, 1988,2] "출국전야" [리광수 작 1985.6 ] 배우와 강도" [황봉룡 작, 1988.3] "요란한 사랑" [리광수 작. 1988.9] ”교회당의 종소리" [황봉룡 작 1989.2] 90년대에 들어서자 전국적으로 연극위기가 시작되었지만 조선족연극은 여전히 흥성세를 보여주면서 전국의 연극계를 깜짝 놀래우기도 했다. "해란강반 세자매" [한원국 작, 1990.4], "털없는 개" [리종훈 김웅걸 작, 1991.3], "총각별동대" [최인호 작, 1992.3], "취한밤" [리광수 작, 1993.2], "사랑의 품" [리광수 작 1994.3], "사랑의 지친 여인" [허강일 작, 1994.8], "헤톨부대" [리광수 작, 1996.4], "과부골목" [허련숙 작, 1997.2], "송순녀" [리광수 작, 1999.7], "금개구리" [김영 작, 1999.7] 등 10부의 장막극, 그 중 "털없은 개"와 "사랑의 품" 은 공연회수도 역대를 돌파했고 국가급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당시 번역작품은 근근히 "청춘블렉댄스". "영웅소년 뢰녕" 이 2부 뿐으로서 창장극이 절대적 우세를 차지했다. <p class="ql-block">"해란강반 세자매" [한원국 작, 1990.4]</p> "털없는 개" [리종훈 김웅걸 작, 1991.3] "총각별동대" [최인호 작, 1992.3] "취한밤" [리광수 작, 1993.2] "사랑의 품" [리광수 자, 1994.3] "사랑의 지친 여인" [허강일 작, 1994.8] "헤톨부대" [리광수 작, 1996.4] "과부골목" [허련숙 작, 1997.2] "송순녀" [리광수 작, 1999.7] "금개구리" [김영 작, 1999.7] <p class="ql-block">2000년 새세기에 들어서서는 전국의 연극위기와 함께 조선족연극도 침체되어 "하얀꽃" [리광수 작, 2001.6], "댄스를 추는 아이들" [김학송 작, 2001.8], "사랑의 샘" [리광수 작 2003.3] 3부의 창작극 외에 기타 전통극이거나 번역극 공연도 차츰 자취를 감추었다. </p> "하얀꽃" [리광수 작, 2001.6] "댄스를 추는 아이들" [김학송 작, 2001.8] "사랑의 샘" [리광수 작 2003.3] <p class="ql-block">교수님과 조선족연극에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교수님께서 상술한 창작극을 빠짐없이 보셨을 뿐만아니라 일부 연극의 주인공 역, 중요한 대목이거나 장면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기억하시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어떻게 그 많은 걸 아직도 기억하시고 또 합평회거나 좌담회시의 여러가지 해프닝까지 잊지않으셨는가의 물음에 교수님께서는 역시 교수님만의 그 특유의 빙그레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셨다.</p> <p class="ql-block">대학교수로서 교학연구와 수업에 드바삐 보내시면서도 연극평론에 어찌 크나 큰 애정과 정열을 쏟을 수 있었을까, 연극을 둘러싼 긴 대화에서 의문이 서서히 풀리면서 교수님이 연극평론에 심취하게 된 배경과 원인을 나는 아래와 같이 나름대로 추려보았다. </p> <p class="ql-block">첫째, 문예비평이 절실히 필요했던 당시의 문예환경이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p><p class="ql-block">1980년대 초, 당의 문예로선방침하에 예술작품이 우후죽순처럼 창작, 공연되였는데 조선족연극도 주로 한족과 외국의 우수한 작품을 번역개편하여 공연하던데로부터 창작극을 선호하기 시작하였고 작품의 질 향상을 위해 문예비평이 절실히 필요되면서 평론사업에 종사하시는 대학교수와 평론전문가들을 극단에 모시게 되였다. 초기에는 연변대학의 정판룡교수님과 서일권교수님, 그리고 연변사회과학원의 전성호평론가님을 모셔서 고대희극사와 문예리론 강의를 청취했고 그 뒤로는 희곡창작합평회거나 연극공연좌담회에 김해룡교수님과 김운일교수님을 자주 모셨다. </p> <p class="ql-block">90년대 희곡창작합평회에 참가하시고</p><p class="ql-block">왼쪽 김해룡교수님, 김운일교수님</p> <p class="ql-block">창작극이 날로 활기를 띄고 연극공연 차수가 늘어감에 따라 연극공연 질을 높히기 위한 여러가지 모임이 부지런히 열리면서 김운일교수님도 더욱 자주 극단에 초청되였고 따라서 교수님도 연극평론문장을 련속 발표하시면서 우수한 연극평론가로 거듭나셨다. </p> <p class="ql-block">둘째. 리론과 실제를 결합한 강의를 위한 필요한 하나의 수단이였다고 할 수 있다.</p><p class="ql-block">교수님은 대학에서 문예리론 강좌의 "문학개론", "희곡개론", "예술개론", "맑스주의 문학예술론" 등 학과목을 강의하시면서 메마른 리론강의보다 리론과 실제가 결부된 강의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셨다. 문예지망생들에게 리론에 얽매인 "개론"을 강의하다 보면 자신도 멋과 맛이 별로 없어서 재미를 곁들인 강의를 고민하던 차 창작합평회와 공연좌담회에 참가하시여 희곡작가들과 연극예술가들의 힘겹지만 흥미롭고, 괴롭지만 즐거운 창작과정의 이야기를 직접 접하면서 사회와의 련계를 강화하여 좀 더 높고, 좀 더 넓은 안광을 가지게 되었다.</p> <p class="ql-block">특히 합평회거나 좌담회에서 희곡작가들과 연극예술가들이 리론적으로 해명하지 못해 고민하는 실제문제를 함께 연구하고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예술가들의 유머스럽고 감성이 톡톡 튀는 흥미롭고 가치있는 부분의 이야기를 리론강의에 곁들임으로써 리론과 실제를 결합할 수 있었을 뿐만아니라 따분한 학습 분위기를 돌려세우는데에도 유조하고 학생들과의 교류에서 일부 문제에 대한 해결고리의 힌트를 받을수도 있었다.</p> 세째, 교수님 자신의 글쓰기 취미와 자기제고의 필요성도 원인중의 하나다.<br>글 쓰기가 유일한 취미인 교수님에게 있어서 예술평론 쓰기는 어쩌면 작가로 되고팠던 욕망을 달래고 억제된 감성과 열정을 분출하는 하나의 출구라고도 볼 수 있으니 평생 좋아하시는 글쓰기의 중요한 부분으로서의 평론쓰기는 교수님 삶 중 하나의 중요한 의미이고 즐거움이고 보람이라고 할 수 있다. <br> 그리고 교수님은 희곡창작회의거나 연극작품좌담회를 당의 문예비평원칙을 한층 깊히 학습하고 이해하는 장으로, 또 기타 교수, 전문가들과 의견을 교류하고 정보를 공유하면서 자신의 의식수준을 높힐 수 있는 좋은 기회로 간주하셨다. 평생 배움을 거부하지 않으시면서 그 어떤 장소에서도, 그 누구한테서도 섭취하고 배울게 있다고 여기시며 남들의 발언을 열심히 경청하고 자기를 반추하는 교수님이기에 연극평론수준은 교수님의 의식수준의 제고와 함께 정비례를 이루며 높아지는 한편 그 량도 점차 연극평론계에서 앞자리를 차지하였다. <p class="ql-block">교수님의 연극평론은 대체로 세가지 류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연극작품, 즉 공연에 대한 평론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에 대한 평론, 또 다른 하나는 연극예술가에 대한 평론으로 볼 수 있다. </p> <p class="ql-block">그 중 연극작품 평은 교수님의 평론에서 가장 많은 폭을 차지한다. 특히 공연으로서 관중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은 작품, 국가 차원의 상을 받았거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전면적이고 구체적인 연구와 분석을 가했는데 이런 평론에는 희곡작가에 대한 평가도 많이 첨가되어 있다. 그리고 연극예술가에 대한 평은 주로 우수한 연극인들의 조선족연극예술 발전에서의 위치와 작용 및 공헌을 언급하셨다. 하여 본문에서는 작가와 연극예술가에 대한 평은 략하고 주로 연극작품 평을 살펴보기로 한다.</p> <p class="ql-block">교수님이 1984년과 1992년에 각각 발표하신 "시대감과 희극성-장막극 "도시농민"을 두고"와 "연극 "털없는 개"의 매력으로부터 음미되는 문제" 이 두편의 평론이 대표적이라고 할수 있다. 그것은 80년대에 가장 인기를 누렸던 연극이 "도시+농민"이라고 할 수 있고 90년대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털없는 개"라고 할 수 있기도 하고 또 교수님도 이 두 평론에 필묵을 아끼지않으셨기 때문이다.</p> <p class="ql-block">청년작가 리광수의 장막희극 "도시+농민"은 1984년에 창작 공연되어 당시 연변, 길림지구와 흑룡강성에서 관람객 161617만명이 자원적으로 동원되여 279회 공연되는 (자료: 연변연극단 대사기 참고) 창거를 이루었고 작가는 이 희곡의 성공으로 제1차 전국소수민족제재극본 은질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p> <p class="ql-block">교수님께서는 이 연극을 보시고 "시대감과 희극성-장막극 '도시농민'"이란 장편의 평론을 발표하셨는데 "이 극이 거둔 성과는 무엇보다도 먼저 농촌개혁의 시대적특징의 한 측면을 반영하려고 한 작자의 자각적이고 담량있는 탐구와 사색이고 다른 하나는 시대감이 다분한 현실생활제재를 희극적으로 파악하고 희극예술이 간직한 특성들을 비교적 다채롭게 운용함으로써 극적형상으로 하여금 희극성이 풍부하고 개성적생기가 부여되도록 하였다는 이 점에서 찾아봐야 할것이다", "극구성에 있어서도 종적으로는 장과 장사이에 막간장면을 끼워넣어 전반 극으로 하여금 중단없이 이어나갈수 있게했고 횡적으로는 같은 시간내에 부동한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한무대 공간에서 대칭적으로 전개시킨 것이 독창적구성수법"이라고 평가하셨다.</p> <p class="ql-block">그러면서 "리광수의 희곡창작에서 표현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시대적 맥박이 굽이치는 중대한 사회문제들을 작품의 제재로 다루면서 작가적인 안목으로 심각한 주제사상을 표현한데 있다"고 높히 평가하셨고 성공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 작품에 취급한 제재의 중대성과 그것을 표현한 독창성의 매력"이라고 하셨다. </p> 교수님은 이와같이 리광수의 "도시+농민"을 충분히 긍정하시면서도 희곡의 언어가 생활미가 풍기지만 그러나 일부 다듬을 필요가 있는 언어표현이 보여진 결함에 대해서도 따끈히 지적하셨다. "도시 + 농민"의 한 장면 <p class="ql-block">1992년에 무대에 선보인 연극 "털없는 개"는 전국연극계를 들썽하게 만든 작품으로서 조선족작가로서는 유일하게 "조우 문학상"을, 극중 주인공 리영근 배우는 조선족연극배우로서 력사상 유일하게 "문화연기상"을, 연극은 "문화부 신극목상"을 따내는 전례없는 성공을 따냈다. 중국의 연극전문가들은 전국적으로 연극저조로 몸부림치는 와중에 조선족연극이 한 극목으로 466회 련속 공연의 창거를 이룬 원인을 연구하기 위하여 전국연극가협회 주석을 선두로 연극전문가들이 연변에 오셔서 "연극 '털없는 개' 연구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p> 교수님께서는 연극을 관람하신 후 "연극 "털 없는 개"의 매력으로부터 음미되는 문제"란 평론에서 우선 "어떤 연극작품은 무대에 올라 며칠 못가서 관객을 잃어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데 연극 "털없는 개"는 무슨 매력이 있어서 날따라 늘어나고 다양하게 풍부해지는 사회적문화오락생활의 소용돌이속에서 붐비는 관객들을 그처럼 많이 끄당길수 있었을가?"는 물음을 던지면서 연극 "털없는 개"의 매력을 피력하시였다. 교수님께서는 "털없는 개"의 첫번째 매력은 무엇보다도 먼저 주제적심도와 그에 대한 희극적탐색이라고 쓰셨다. 평론에서 교수님은 "'돈벌이'와 '치부의 길'이라는 허울속에 감춰진 저렬하고도 용렬한 사욕에 대한 신랄한 풍자는 연극 '털없는 개'의 주제가 주선률에 바쳐지고있음을 설명해준다. 이처럼 연극은 주선률을 다루면서도 또 그 주제가 희극성을 안받침하고 탐색되였다. 그리고 연극 '털없는 개'에서 표현한 이런 변태적소농의식은 농민에게만 있는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적 상품경제발전의 고험을 겪어내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다소소 다 나타날수 있는 보편적인 정신적질환이다. 그러므로 연극 '털없는 개"를 보게 되면 우리 신변에서 생겼던 일을 보는것과 같은 익숙한감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연극 '털없는 개'의 예술형상이 표현해주는 작품주제는 관객의 친절미를 자아내게 한다."고 쓰시면서 이것이 바로 "털없는 개"가 파헤친 심도이고 이런 주제적 심도와 그에 대한 희극적 탐색이 그처럼 많은 관객을 끄당길 수 있었다고 인정하였다. "털없는 개"의 다른 또 하나의 매력은 작품이 "극적 정경을 충분히 지어줌으로써 인물의 동작성을 짙게 하였고 끊임없는 동작의 변화로써 인물의 내심세계를 전달해주고 인물성격을 잘 표현한데 있다"고 하셨다. 특히 "돌발사건이 잘 주어졌기때문에 인물의 정신세계를 활성화시키고 그로부터 인물의 동작을 끊임없이 풍부하게 한데서 관객의 주의력을 환기시킬수 있었다.......극 중에 두가지 이야기선이 서로 교차되다가도 교묘한 일치를 보이고 또 극의 발전속에서 끊임없이 사건 련쇄가 이루어지는 가운데서 다양한 인물관계가 펼쳐지면서 동작을 생동하게 표현해 줄수 있었다"고 하시며 동작을 통해 화폭으로 창조되는 연극예술의 특징을 투철히 분석하셨다. <p class="ql-block">다음, 평론제목에서 제기한 연극 "털없는 개"를 통해 음미할 점에 대한 교수님의 답은 비교적 명쾌했다. </p><p class="ql-block">첫째로 현대관객들이 문화오락에 대한 목적은 옛날처럼 정치생활의 수요에 복종하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정신생활의 만족을 추구하는데 있으므로 일극지본인 희곡예술 자체의 질적제고를 위한 사업 즉 작가들이 현실생활에 밀착하고 현실생활을 대중의 심미적차원에서 탐색해야 함을 강조하셨다.</p><p class="ql-block">둘째로 "털없는 개"의 예술창조자들이 대담하게 구연, 골계극, 지어는 황당극 등 다양한 예술형태의 우점을 대담하게 도입해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를 거울로 우리의 연극예술가들이 앞으로의 창작에서 이것저것 좀스럽게 꺼리면서 구속을 받을것이 아니라 담략있게 실천해야 한다고 하셨다.</p><p class="ql-block">세째는 앞으로 연극예술이 통속성이 강하면서도 예술성이 홀시되지 않은 작품을 많이 창작해야 대중들의 문화오락생활의 욕구에 만족을 줄 수 있다고 하시면서 "'털없는 개'에서는 대중들이 익숙히 알면서도 대중들이 제일 관심하는 현실생활문제를 흥미진진한 희극적이야기와 생동한 예술형상으로 풀어주었고 대중들에게 친절미를 자아내는 일상언어로 표현하였기에 그 내용이 대중들이 즐길수 있는것으로 되였다"고 구체적으로 분석하시면서 창작자들이 인민대중의 생활속에 들어가기를 바랬다.</p> 교수님께서는 연극 "털없는 개"에 대해 이상과 같이 높은 점수를 주면서도 "연극작품의 기점이 보통사람들이 알아보기 쉽게 하려는 흥미에 중점을 두었다" 고 하시면서 연극이 "아직 통속차원에 속하는 매력으로서 보다 높은 차원의 예술적매력을 자아내자면 제고하는데 더욱 힘써야 한다"고 하면서 례절스럽지 못한 동작이거나 실생활속의 "잡담"마저 끼여들어 예술을 흐리우지 말것"을 제안하였다. "털없는 개"의 한 장면 <p class="ql-block">3. 김운일 교수님과 연극평론</p><p class="ql-block">교수님은 조선족연극이 가장 흥기했을 때를 같이하여 년령, 정력, 능력의 최고 왕성기에 이르러 근 30년 동안 주옥같은 평론을 무수히 발표하시며 자신의 황금기를 보냈으니 어쩌면 교수님은 연극평론과 특별한 인연을 가진 아주 행운스러운 분이시다.</p> 근 30년 사이에 발표된 교수님의 평론을 읽으면 교수님께서 시종 당의 문예비평원칙에 쫓아 력사적이고 실사구시적인 태도로 평론에 임했음을 알 수 있으며 리론의 높이에서 작품이 존재하는 문제를 사고, 분석하시고 예리한 안목과 날선 관점으로 희곡과 연극작품을 연구하신 흔적이 력력하다. 교수님의 평론은 깡마른 리론이거나 텅빈 미사려구가 아닌 실제 문제를 둘러싼 리론연구의 실효성으로 하여 작품의 방향성과 관련된 문제를 발견하거나 해결책을 찾는데 큰 조력작용을 함으로써 조선족연극예술의 발전과 번영에 큰 몫을 담당하셨다. 교수님께서 발표하신 주요한 평론을 목록으로 살펴본다.<br>1. "'해토무렵'의 슈제트와 인물형상" 【문학과 예술】1882년 3월<br>2. "시대감과 희극성 ㅡ '도시+농민'을 두고" 【문학과 예술】1984년 11월<br>3. "관중심미 특점과 우리 연극예술"【문학과 예술】1988년 3월<br>4. "연극 '털없는 개'의 매력으로부터 음미되는 문제" 【예술세계】1992년 3월<br>5. "인간탐색의 극작가 최정연" 【중국조선족연극사 발취】1994년<br>6. "출로의 선택을 두고" 【예술세계】1995년 1월<br>7. "초불이 비치는 계시"【예술세계】1995년 6월<br>8. "전통과 그 수용자세" 【예술세계】1997년 1월<br>9. "조선족 연극예술에 미친 한원국의 영향과 그의 희곡창작특점" 【예술세계】1998년 1월<br>10. "삶의 보람을 극예술에서 빛낸 저명한 조선족 연극예술가 허동활" 【문학과 예술】2003년 1월<br>11. "조선족 극예술의 뒷심이였던 저명한 극작가 황봉룡" 【일송정】2003년 5월<br>12. "조선족 연극예술에서 차지하는 방미선의 자리" 【예술세계】 2004년 7월<br>13. "중국조선족연극사" 【한국 신성출판사】2006년 5월 <br>14. "조선족 제2세대의 중견극작가 리광수" 【중국조선족연극사 발취】2006년 5월<br>15. "조선족 근대,현대 희곡문학의 실상과 그 특징" 【중국조선족연극사 발취】2006년 5월<br>16. "조선족연극예술 발전과 허동활" 【예술세계】2006년 9월<br>17.. "저명한 극작가 황봉룡과 조선족연극" 【중국조선족연극사 발취】 2007년 9월 <br>18. 2015 기획, 2020 완성 "중국조선족예술사ㅡ연극사" 【연변인민출판사】2020년 9월 <br> <p class="ql-block">목록만 보아도 감탄이 절로 나간다. </p><p class="ql-block">교수님은 실로 문예비평 터전의 신근한 감농군임이 틀림없다.</p> <p class="ql-block">교수님의 연극평론은 조선족연극의 한 시대의 실황을 거시적으로 조명하고 구체적으로 분석하시여 연극예술이 바른 길로 나아가고 질적인 제고를 가져오는데 크게 기여했을뿐만아니라 지어는 조선족연극사료 역할까지 하고 있음을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새삼 느끼게 된다.</p> <p class="ql-block">그리고, 김운일 교수 하면 "중국조선족예술사 ㅡ 연극편"(김학송 합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국조선족예술사" (총 7권) 속에 조선족연극력사가 떳떳이 자리하고 있음은 비단 조선족연극에 힘다하신 원로연극인들과 현재 끈끈히 그 명맥을 이어가는 연극인들의 자랑일뿐만아니라 우리민족문화예술역사에 대한 교수님의 크나 큰 공헌이기도 하다. </p> <p class="ql-block">소학교시절부터 연극놀이를 탐해 과문을 연극적으로 읽고 역할을 표연했었다는 교수님, 중학교와 대학시절에도 다양한 인생을 연기할수 있는 연극무대를 그토록 지향하고, 한편 두편 희곡을 쓰면서 작가의 꿈에 설쳐 수많은 청춘의 밤을 지샌 교수님..... 연극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조선족연극예술에 대한 끓는 열정과 사명감이 없다면 몇십년을 이어오시면서 조선족문화예술의 한가닥 뿌리 ㅡ 조선족연극력사의 맥을 캐는 험난하고도 위대한 장정을 견지할 수 있었을까, 펼치기만 하면 조선족연극의 굽이굽이 자욱자욱이 한눈에 확 안겨오는 "중국조선족예술사ㅡ연극편" 거작을 90을 바라보는 높은 년세에 끝끝내 완성할 수 있으셨을까?</p> <p class="ql-block">김운일 교수님 댁에서 필자와 교수님</p> <p class="ql-block">조선족연극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조선족연극 평론에 넘치는 사랑과 정열을 쏟아부으신 존경하는 김운일 교수님, </p><p class="ql-block">교수님의 타계 1주년에 이글을 삼가 드린다. </p> 상해에서 방미선<br>2023년 12월 31일<br> <p class="ql-block">(부분 사진을 제공한 김학송 선생께 감사드립니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