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엄마의 누룽지</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글 /태명숙</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나는 언제나 이 맘때가되면 공기가 탁한 시내를 벗어나 시야가 탁 트인 시외를 걷는 습관이 생겼다.여름내 고열에 시달렸던 몸과 마음을 시원한 가을 바람에 식히면서 탄력과 리듬을 되찾아 힐링도하고, 또 시외의 아름다운 경치를 폰에 담아 사진도 찍으면서, 일거양득의 수확을 얻는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해 진다. 미세먼지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 맑고 깨끗하다. 솜 사탕 같이 뭉게 뭉게 피여오르는 구름 사이로 고개를 살짝 내미는 햇 살은 나의 두 볼을 어루쓸면서 정겹게 반기는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해 진다. 저 멀리, 가로수 사이에서 날개 잠자리 한 쌍이 먹이 찾기에 분주하다. 생존의 법칙은 인간이나, 날 새나, 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얼마쯤 걸었을까? 자그마한 시교 마을이 보이는데 <진수 성찬>이라 쓴 식당 간판이 한 눈에 안겨온다. 걸으면서 한편으로는 정말로 진수 성찬이 있을까? 내 입에 맞으면 다 진수 성찬이지, 하면서도 그 무엇을 먹어도 입맛이 없고, 그 누가 맛 있는거 훔쳐 놓고 혼자 먹는 것처럼 느껴질때가 있다. 그 것이 무엇일까? 딱히 생각나지 않으면서 식욕의 욕구로 구미를 돋구는, 그 무엇을 찾기에 력력해 진다. 옛날과 달리 그 무엇인들 없어서 못 먹으련만 비싼 외식을 해도 그 뒤 끝에는 통 입이 개운치 않을때가 있는데 그럴때면 그 옛날 엄마의 손맛과 정성이 담긴 쇠가마 솥 누룽지가 생각난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지난 세기 60년대의 시골은 형편이 썩 좋지 못했다. 우리 집은 할머니로부터 아버지 엄마, 우리 5남매에 모두 여덟 식솔이였다. 그 세월엔 집집마다 쇠가마 솥에 밥을 지었는데 가마솥은 그 년대의 유일한 취사 도구였다. 추운 겨울이면 집에서 밥을 짓고 여름이면 밖에 딴가마를 걸고 옥수수와 감자를 쪄 먹기도 했었다. 할머니는 가끔씩 어린 나에게 <그 어느집에 가던지 간에 그 집의 쇠가마 솥부터 살펴보며는 그 집 안주인의 알뜰함과 야무진 살림살이를 알수 있느니라> 그리고는 <우리 숙이는 야물딱진 제 에미를 닮아싸 손 끝이 야무져야 할 텐데, 물론 제 에미를 담겄지, 아무렴 > 하시면서 나의 머리를 쓰담아 주셨다. 철 없던 어린 나이에 그 참 뜻을 다는 알지 못했지만 엄마의 알뜰한 살림살이를 칭찬하는 얘기인 줄은 알고 있었다. 할머니 칭찬처럼 내 기억속의 우리 집 쇠가마 솥은 얼마나 윤이 반질반질 났던지, 솥 뚜껑을 들여다 봐도 얼굴 모양새가 거울처럼 다 비춰 보였다. 어머니가 미처 우리 남매들을 돌보지 못하고 아침 일찍 일하려 나가실 때면 늘 할머니가 우리를 챙기셨다. 할머니가 아침마다 늘 같은 모양으로 묶어주신 머리가 맘에 안 들때면 학교를 가다가도 되 돌아와서 어른들 키높이에 걸려있는 거울에 키가 닿지 않아, 간혹가다 가마솥 뚜껑으로 머리를 비춰보면서 꼭 양 가닥으로 땋아 달라고 조르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머리에 생생히 떠 오른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런 쇠가마 솥에다 엄마의 정성으로 지은 밥은, 하얀 쌀밥이 아니였어도 우리에겐 언제나 별미가 따로 없었다. 우리 집은 할머니와 아버지가 늘 겸상을 같이하셨고 엄마와 우리 남매들은 큰 냄비하나에 밥을 퍼서 빙 둘러 앉아 먹었다. 특히 여름이면 며칠 지난 쉰 갓 김치를 보리 밥에다 고추장을 넣고 깻잎을 송송 썰어 얹은 다음, 다 같이 비벼가면서, 큰 냄비 하나로 빙 둘러 앉아 먹던 때가 엊 그제 같다. 그렇게 반찬 없이 김치 한 가지로 먹었던 비빔 밥인데도 얼마나 맛 있었던지, 그 맛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밥이 좀 부족할 것 같으면 철 없는 동생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볼이 미여지게 먹어치웠는데 그런 날이면 밤중에 나의 배에서는 꼬르륵 꼬륵 소리가 났다. 가난이 어린 나를 일찍 철들게 했는지도 모르겠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쇠가마 솥으로 밥을 짓고 나면 나오는 간식이 있었는데 바로 누룽지다. 밥이 좀 적고 부족할 것 같으면 물 누룽지를 만들기 위해 솥에 물 한 바가지를 붓고 끊이면 구수한 누룽지 향기가 온 집 안을 진동한다. 그 누룽지에 어쩌다가 간혹 어머니가 손 맷돌로 정성스레 앗은 야들 야들한 손 두부와 김치움에서 금방 꺼내온 배추김치 아니면 무우 깍두기로 함께 곁들면 정말 환상적인 궁합이 된다. 식사가 끝나면 아버지께서는 숭늉 한 모금을 쭉~ 들이키시고는 어~허 시원하구나~하시면서 텁수룩한 짧은 구레나룻을 쓰다듬던 기억이 어제 같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그래도 우리 집은 엄마가 알뜰하게 살림을 하신 덕에 배는 곯지 않았다. 그렇지만 왜소한 체구의 엄마가 그 없는 살림에 위로는 할머니를 모시면서 우리 5남매를 키우시느라 얼마나 벅 차셨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찡~ 할때가 많다. 가녀린 몸으로 짬짬히 점심 시간을 이용해 재봉틀에 앉아 우리 남매들 옷도 척척 재단해 하셨고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 재봉틀 없는 이웃들의 옷들도 지어주셨다. 할머니는 이런 엄마의 몸이 축 날라 늘 걱정하셨다. 엄마의 도움을 받은 이웃들은 우리 집에 절인계란 아니면 오리알을 바가지에 담아오군 하였다. 그때의 시골 인심은 그렇게들 후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저녁이면 엄마는 아버지께서 싸리나무를 벗겨서 결은, 손때 묻은 반 짇고리에서 바느실을 꺼내신다. 어두운 등잔 불 밑에서 바늘로 손 끝을 찔려가면서 손 바느질을 하셨다. 바느질 솜씨가 어찌나 좋았던지, 기운바지를 입고 학교에 가도 기운티가 전혀나지 않아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워 했던지? 요즘 세상에는 우리네 아들 딸들이 멋 내느라 새 청바지도 구멍 뚫어 입느라 야단이지만 옛 날 그 시절에는 바지도 구멍나면 기워 입고 양말도 구멍나면 기워 신고들 하였는데 우리 집만이 아니고 다들 그렇게 살았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렇게 우리 5남매를 힘들게 키우면서도 엄마는 집안 일을 한 번도 게을리 한 적 없으시고 할머니와 아버지 공대도 등한시 한 적 없으셨다. 이른 새벽부터 늘 하시던 일상처럼 쌀 함박에 쌀을 휘~휘 저어가면서 돌을 인다. 그 다음 시골에서 제일 흔한 감자를 깍아 듬성 듬성 썰어서 솥 밑에 깔고 그 위에 쌀을 얹은 다음 손 등으로 물을 맞추고 아궁이에 넣은 장작 개비에 불을 지핀다. 20여분이 지나 열이 오른 가마솥은 구슬 땀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구수한 밥과 누룽지 향기에 밖에서 뛰놀던 우리 남매들은 서로 뒤질세라 집으로 달려간다. 누룽지를 먹기 위해서였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할머니 세대로부터 물려 받은 다 닳은 노란 놋 주걱으로 윗 어른, 할머니로부터 집안 호주인 아버지 진지까지, 흰 쌀 쪽으로 차곡차곡 담아 푸신 다음 쌀 알이 얼마 보이지 않은 밥에 감자를 훌훌 섞어서 큰 냄비에 담는다. 그리고는 누룽지를 긁어 꽁꽁 줴기를 해서 두 손을 내밀고 있는 우리 남매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누룽지를 받아든 동생들은 누구 것이 더 큰지 서로 곁 눈질하면서 두볼이 미여지게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는 한창 맛있게 먹고 있는 나를 뻔히 쳐다보군 했다. 별 생각 없이 그때는 그냥 맏이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동생들과 나눠 먹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밭일을 나가시면 하학후에는 할머니를 도와 동생들을 돌보는 일은 내 몫이였다. 그런 맏딸이 측은해서였던지, 아니면 공부를 잘 해서였던지, 내 차례가 되면 엄마는 누룽지를 더 꽁꽁다져 적어보이게 하셨고 동생들건 슬쩍슬쩍 줴기를 해서 커 보이게 하셨던 일을 지금까지도 어제 일처럼 기억난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누룽지를 날마다 먹는건 아니였다. 끼니가 부족하면 물 누룽지로 대체했고 그렇지 아닐때만 줴기 누룽지로 나눠 주셨는데 그런날은 우리에겐 행운이였다. 우리 엄마표 누룽지는 쌀 밑에 무우를 얹거나하면 줴기누룽지, 옥수수와 좁쌀을 얹거나하면 물 누룽지, 또 감자를 얹거나하면 마른 누렁지로, 그렇게 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마른 감자 누룽지가 제일 맛 있었다. 뜸 들인 밥을 그릇에 담아 푸시고 아궁이에 땔 나무 한 움큼 집어 넣은 후 좀 기다려서 솥을 들여다 보면 노란 감자 딱지가 들떠 일어나면서 뽀드득~뽀득 소리가 난다. 군입거리로 아무런 먹거리가 없던 그 세월에 누룽지는 우리에게 특별한 간식이였다. 그때 먹었던 그 감자 누룽지 맛은 지금 마트에서 파는 감자 칩, 그 이상의 맛이였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누룽지 배분이 끝나면 엄마는 솥에 물을 붓고 아버지께서 자작나무 가치로 꽁꽁 묶어서 정성들여 만든 솔비로 지저분한 내용 물을 빡빡 문질러 닦으셨다. <뜨거운 솥은 찬 물에 닦고 찬 솥은 더운 물로 닦아야 솥이 윤이 반짝반짝 난다> 면서 곁에서 누룽지를 맛 있게 먹고 있는 나에게 커서 시집가면 꼭 그렇게 하라고 당부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철 없는때라 나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아무 생각없이 고개만 끄떡~ 끄떡 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몇 십년이 지난 요즘, 집집마다 손 가락 한 번만 터치해도 밥이 다 되는 전기 밥 솥이 있을 줄 엄마인들 생각이나 하셨을까? 철 없는 나에게 신신 당부하셨던 그 쇠가마 솥을, 윤이나게 닦지 않아도 되는, 전자제품이 막~ 쏟아져 나오는 그런 세월이 온 것이다. 전기 밥 솥으로 밥을 짓는 요즘, 기계로 만든 여러가지 누룽지가 판을 치고 있지만, 우리 엄마표 누룽지와 많이 비교가 되면서 구수한 그 맛이 생각 난다. 요즘처럼 아침 저녁으로 몸이 오싹하면서 쌀쌀한 날씨에 쇠가마 솥에 장작불을 지펴 밥을 짓던 그 누룽지에, 김치 움에서 갓 꺼낸 배추 김치 한 포기를 머리만 뚝~잘라 곁 들여 얹어 먹던 그 생각을 하면 입에 군침이 스르르 돌면서 엄마의 그 손 맛이 아직도 그리워진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10월의 늦가을 날씨는 참 변덕스럽다. 방금까지만 해도 맑았던 파란 하늘이 삽시에 먹장 구름이 몰아치면서 굵은 비 방울을 떨어뜨린다. 나는 오던 길을 되 돌아가면서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생각해 보지만 입에 구미를 돋구는 그 무엇이 딱히 떠 오르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엄마의 누룽지> 에 대한 그리운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리라.</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2023. 7. 9.</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2022년 10월에 쓴 원본인데 그해</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12월호에 연변녀성에 실린 글입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