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르몬또브 (Lermontov/莱蒙托夫) 의 文学 庭园

레르몬또브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문학 批評]</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마꼰도와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에 대한 탐구</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譯者 조구호</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árquez] 콜롬비아 소설가./출생-사망; 1927년 ~ 2014년/라틴 아메리카의 창세기(創世記)로 일컬어지는 대하 소설 《100년 동안의 고독(1967)》으로 1982년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1 &lt;소설의 죽음&gt;에 반기를 든 『백년의 고독』</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지금까지 세계 문학계의 중심무대 밖에 머물러 있던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소위 &lt;붐 Boom&gt; 세대의 등장과 더불어 서서히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 1927~2014)를 비롯해 멕시코의 까를로스 푸엔떼스, 페루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등 일군의 작가는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역량을 전세계에 과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특히 1944년 &lt;집 La casa&gt;이라는 제목으로 소설 하나를 쓰려고, 현재의 『백년의 고독』에 있는 첫 행을 썼지만 그 스스로 하려고 하는 얘기를 믿을 수가 없었고, 자신이 쓰려고 하는 것이 믿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테크닉적 · 언어적 요소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의 &lt;완성된 작품&gt;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23년 동안 생각하고 18개월에 걸쳐 집필한 『백년의 고독』이 196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수다메리까(Sudamerica)’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을 때는 전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기에 이르렀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백년의 고독』이 출판되기 전 여러 잡지들이 그 일부를 미리 게재했었고,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읽어보라고 건네주었던 제1장을 읽은 까를로스 푸엔떼스도 아낌없는 격찬을 보냈다. 비평가들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즉각적인 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현기증 나는 속도로 재판이 이루어졌고, 출판된 지 몇 개월 만에 동 · 서 유럽의 20개의 언어로, 현재는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 독자들, 특히 &lt;고갈의 위기&gt;에 처해 있는 작가들의 애독서가 되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런 성공에 힘입어 이탈리아에서는 치안치아노 상을 수상했으며, 프랑스에서는 가장 뛰어난 외국 소설로 지정되었다. 미국 비평가들은 1970년대의 가장 훌륭한 열두 권의 책 가운데 하나로 선정했으며, 1971년 콜롬비아 대학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72년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권위 있는 베네수엘라의 로물로 가예고스 상을 수상했으며, 결국 1982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작품으로 소위 &lt;소설의 죽음&gt;이라는 주장에 반기를 들게 했고, 결국은 밀란 쿤데라로 하여금 &lt;소설의 종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인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동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에게는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책꽂이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gt;&gt;라는 말로 소설의 부활에 대해 언급하도록 만들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문학은 이제 라틴아메리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유럽 및 세계 문학 속에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바, 그의 영향을 받은 다른 작품들까지도 문학계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면서 독자들의 아낌없는찬사를 받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따라서 세계의 수많은 비평가들은 이미 세계 문학사의 한 획을 그었고, 앞으로도 노력 여부에 따라 문학사를 바꿀 가능성이 예견되는 그의 눈부신 글쓰기가 현대 세계 문학사의 멋진 순간을 계속해서 장식하면서 21세기를 여는 초석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2 마술적 사실주의: 또다른 리얼리즘의 극치</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심도 있게 표현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방법을 모색하던 라틴아메리카 소설가들은 역사적 · 문학적으로 큰 혼란을 겪어온 라틴아메리카만의 독특한 문학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lt;마술적 사실주의 Realismo Magico&gt;라는 독특한 방법을 고안해 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중남미 학자로서는 아르뚜로 우슬라르 삐에뜨리가 1948년 처음으로 썼지만, 이것을 새로운 사조로 규정 지은 사람은 앙헬 플로레스였고, 쿠바의 작가 알레호 까르뻰띠에르는 &lt;경이로운 사실 Lo real maravilloso&gt;이라는 용어로 정의하기도 했던 &lt;마술적 사실주의&gt;는 사실과 환상, 사실과 허구가 초현실적 수법으로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좁게는 리얼리즘의 한 유형, 넓게는 세계 인식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충분히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현실을 실제의 삶보다 더욱 폭넓게 수용하고 있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lt;현실&gt;이란 개인 심리적 · 사회적 · 수평적 · 역사적 · 외면적 측면뿐 아니라 집단 심리적 · 민화적 · 미신적 · 환상적 · 추상적 · 수직적 · 탈시간적 · 내면적 측면까지 포함한다. 바꾸어 말하면, 죽음의 세계는 삶의 세계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며, 부재와 현존은 한 사물이나 현상의 동시적 속성이며, 환상과 실제 사이에는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진정한 의미의 현실은 불가시적 세계로 둘러싸인 포괄적인 전체를 뜻하기 때문에 소설 속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일상적인 것을 환상적인 것으로, 환상적인 것을 일상적으로 구사하는 문체와 서사적 관점을 교묘하게 조합함으로써 허구적 세계의 실제적 요소들을 환상적 요소들과 융합시키고 있기 때문에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자신의 소설에 첨가한 이런 신화적인 요소들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 즉 고독을 치유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이해될 수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백년의 고독』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환상과 현실을 격리시키고 있는 벽을 제거하는 데 무척 고심한 작품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랐는데, 미신을 믿고 신비적인 것을 아주 좋아하던 외할머니는 어린 가브리엘에게 환상적이고도 터무니없는 일들을 아주 자연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해 주곤 했고, 가브리엘은 환상과 경이로 가득 찬 옛날 얘기의 세계에 흠뻑 젖은 채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렇듯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분석적이고 증언자적인 태도를 배제하고서 대신 유년기부터 들어온 전설이나 신화로 포화되어 있는 잠재의식의 인도를 받아 『백년의 고독』에 그만의 필체와 서사적 관점을 사용하여 현실과 비현실, 사실과 환상을 교묘하게 융합시켜 놓았음으로써 특유의 제3 현실, 즉 총체적 허구의 세계를 창조해 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러한 창조적 행위를 통해 현실과 환상의 갱계를 무너뜨리고 이루어진 제3 현실은 독자의 개념적 세계를 환상적 세계로 대치시킴으로써 독자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 속에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백년의 고독』의 마술적 장치는 실제로 이 작품을 읽음으로써만 풀 수 있는데, 작품에 나타난 그 예들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lt;팔팔 끓고 있는 얼음&gt;, &lt;인물들 가운데 죽은 사람이 다시 나타나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활약하는 모습&gt;, &lt;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난 아이&gt;, &lt;흙과 벽에서 긁은 석회를 먹고 사는 레베까&gt;, &lt;항해 도중 바다에서 잡은 바다용의 뱃속에서 발견된 십자군 병정의 투구, 허리띠, 무기&gt;, &lt;난로에 얹어둔 우유가 끓지 않아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았을 때, 그 안에서 득실거리는 구더기&gt;, &lt;담요나 양탄자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가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린 인물들&gt;에 관한 것 등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특히 호세 아르까디오의 죽음(한 발의 총성이 울린 후)에 일어난 &lt;사실&gt;을 표현하는 데서는 극치를 이루고 있다. 호세 아르까디오가 침실문을 닫자마자 권총 소리가 집 안을 진동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한 줄기 피가 문 밑으로 새어나와, 거실을 가로질러 거리로 나가, 울퉁불퉁한 보도를 통해 계속해서 똑바로 가서, 계단을 내려가고, 난간으로 올라가, 터키인들의 거리를 통해 뻗어나가다, 어느 길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다른 길모퉁이에서 왼쪽으로 돌아, 부엔디아 가문의 집 앞에서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닫힌 문 밑으로 들어가서, 양탄자를 적시지 않으려고 벽을 타고 응접실을 건너, 계속해서 다른 거실을 건너고, 식당에 있던 식탁을 피하기 위해 넓게 우회해서 베고니아가 있는 복도를 통과해 나아가다, 아우렐리아노 호세에게 산수를 가르치고 있던 아마란따의 의자 밑을 들키지 않고 지나, 곡식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우르슬라가 빵을 만들려고 달걀 서른여섯 개를 깨뜨릴 준비를 하고 있던 부엌에 나타났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또한 바나나 농장 노동자들이 노동 조건과 생존권 문제를 놓고 벌였던 시위의 진압 과정에서 실제로는 13명이 죽은 사실을 3천 명이 죽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런 과장에 대해 백년 후에는 3천 명이라는 환상적 숫자는 역사적 숫자로 믿어지고 13 명이라는 역사적 숫자는 믿기 어려운 환상적 숫자로 퇴색할 것인바, 그때는 사람들이 역사보다는 자기 픽션을 믿을 것이라고 말하는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그 사실과 유사한 이미지들을 통해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영역으로 이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사실 가르시아 마르케스 자신이 &lt;작가보다 마술사가 되고 싶었다.&gt;고 했던 말은 그가 현실을 &lt;제대로&gt; 파악하고 표현하기 위한 기재로 차용한 마술적 사실주의와 연관이 있을 법도 하다. 마술사처럼 하는 것, 즉 현실을 무한히 확대하고, 현실을 재해석하는 그의 시도는 『백년의 고독』에서 충분히 탐지되는데, 이 허구적 세계는 마치 창조주가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마술에 의해, 마술 속에서, 마술로부터 생성되고 파괴되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3 유토피아적 공간: 나선형적 시간</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사람 하나를 죽임으로써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아무도 닿지 않는 곳에 건설해, 부엔디아 가문의 6대에 걸친 영고성쇠, 즉 고통, 절망, 사랑의 결여, 백년 동안의 고독이 펼쳐지고 있는 마꼰도는 콜롬비아 지리(리오아차, 시에나가, 그란데)와 신화(원죄 이전의 축축하고 고요한 낙원, 마법에 걸린 지역) 등에 뿌리를 박고 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lt;마꼰도&gt;라는 이름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첫 소설을 쓸 때인 1951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는데, 이는 그의 고향인 카리브 해 연안의 원시적인 마을 아라까따까에 있는, 자신이 어렸을 때 몇 번 머물곤 했던 농장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마꼰도는 신화적 레벨에 있어서 에덴의 은유를 내포하고 있는 죽음이 없는 세계이자,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는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 신대륙, 아메리카를 상징한다. 이런 이중 구조 안에서 마꼰도라는 곳은 고독이 지배하는 곳으로 장치되는 것이다. 마꼰도는 아주 명확하게 정의된, 그렇지만 동시에 열려 있고 복잡한 상징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우선 마꼰도는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변두리 마을들과 일반적인 지방을 대변한다. 그러나 초기의 단절과 고립으로부터 식민화, 미 제국주의화로 이행되는, 소위 &lt;일탈 또는 전도(顚倒)&gt;의 역사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lt;주민들이 그때까지 알고 있던 그 어떤 마을보다 잘 정비되고 부지런한 마을&gt;인 마꼰도는 여러 면에서 &lt;에덴 동산(무릉도원, 유토피아)&gt;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자원이 풍부하고 위기의식도 없으며, 그 누구도 사망한 적이 없는 영생의 낙원인 것이다. 하지만 원시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마꼰도는 점차 현대 문명과 그 제도의 침투를 받으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고독에 휩싸인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이 거주하는 고독한 마을로 변해 백년이 흐른 후 결국은 소멸되고 만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처럼 현실적 공간이자 신화적 공간인 마꼰도는 &lt;직선적(역사적&gt;이고 &lt;원형적(신화적)&gt;인 시간이 중첩 · 혼합된 시간 구조, 다시 말하면 &lt;나선형 espiral&gt; 시간 구조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백년의 고독』에 내재되어 있는 핵심 테마인 &lt;고독&gt;을 찾아내는 데 열쇠가 되는 것은 직선적으로 진행되는 역사, 즉 마을의 설립과 발전, 쇠퇴와 파괴라는 역사를 보완하고, 소설의 시간적 차원을 확장시키며, 새로이 생명력 있게 펼쳐지는 확장된 현재의 꿈을 묘사하는 나선형적 시간, 다시 말하면 연속성보다는 동시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돌고 도는 시간, 직선적인 시간을 보완하고 소설의 시간적 차원을 확장시키는 시간과 부엔디아 가문에 총체적으로 선고되어 있는 고독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부엔디아 가문의 역사, 다시 말하면 소설의 &lt;고독한&gt; 시간적 메커니즘은 &lt;끝없이 반복되는 하나의 톱니바퀴, 즉 그 축이 서서히,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되지 않는다면 영원히 계속해서 회전하는 하나의 바퀴&gt;이기 때문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사실 『백년의 고독』에는 수많은 등장인물들과 사건들이 어지럽게 깔려 있지만 진지하게 읽어보면 지속적인 어떤 흐름, 즉 ‘시 · 공’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리듬과 패턴이 발견된다. 불멸을 찾아다니는 길가메쉬의 모험, 오뒤세우스의 귀향 여행, 영원성을 추구하는 연금술사의 자기 실현 과정, 성배를 찾아 떠나는 기사들의 이야기, 디오니소스적 광란의 축제 등등 인류가 시간을 통해 쌓아올린 모든 문학적 경험들, 다시 말하면, 수많은 민속 모티브, 신화, 에피소드들이 도처에 깔려 서로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여성 주인공들, 특히, 도덕성의 화신인 우르술라, 풍요와 성의 상징적 여신에 비유될 수 있는 삘라르 떼르네라(삘라르는 기둥, 축을 의미하고, 떼르네라는 암소를 의미한다.), 아마란따(그녀는 출산의 여신이나 그 자신의 처녀로 남아 있는 그리스의 대모신(大母神) 아르테미스를 의미한다.) 등은 위와 같은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백년의 고독』에서 나선형적 시 · 공의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적인 면모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이름 짓기에서 비롯되고 있다. 부엔디아 가문의 남자 자손들은 아우렐리아노 또는 호세 아르까디오라는 이름을, 여자 자손들은 우르술라, 아마란따, 레메디오스라는 이름들을 반복해 사용하고 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한 가지 예를 들자면, 호세 아르까디오라는 이름을 지닌 남자들은 충동적이며 모험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지닌 남자들은 명민하며 은둔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이름들은 심리학적 · 생물학적으로 지속적이고 동일한 패턴의 성격적 특성을 계승해 나가기 때문에 인물들은 역사적 개인임과 동시에 또다른 레벨에서는 하나의 추상적 개념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일으키거나 겪은 서른두 번의 반란은 콜롬비아 독립 이후 끊임없이 진행되었던 좌 · 우 이데올로기의 투쟁의 역사를, 4년 11개월 2일간 지속된 대홍수와 10년 동안 지속된 가믐은 &lt;낙원&gt;에서 저질러진 타락의 정화와 다가올 신생(新生)을, 그리고 동시에 신생에 대한 소망의 무참한 좌절과 고독을 상징하고 있으며, 이 밖에도 10년 주기로 3월에 마을을 찾아오는 집시들, 불길한 일들이 일어나는 화요일들, 부엔디아 집에서 일상적으로 되풀이되는 수많은 일들 또한 시간의 동시성과 순환성, 그리고 그 속에 내재된 고독을 상징하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특히 신화 속의 &lt;페넬로페&gt;를 생각나게 하는, 아마란따가낮에는 수의를 짰다가 밤에는 다시 푸는 행위와 아우렐리아노가 고독을 지탱하기 위해 황금을 녹여 작은 황금 물고기를 만들고, 황금 물고기를 판 금화들을 녹여 황금 물고기를 만둘다가, 마침내는 팔기를 단념하고 순전히 만들기만을 위해서 황금 물고기를 녹여 다시 황금 물고기를 만드는 행위는 시간의 순환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처럼 마꼰도라는 실제적인 공간과 소설이라는 공간(양피지라는 공간)이 아주 교묘하게 얽히고 설켜 있는 『백년의 고독』에서 서사(서사)의 나선형적 시간의 특성은 죽음ㅡ 라틴아메리카 사회가 선고 받은 것처럼 보이는 정체의 운명 또는 수동적인 혼수 상태 ㅡ으로부터 시작해 과거로 회귀하고 재정립하고, 더 나아가서는 현재를, 미래를 정립하고 여는 생명의 순환고리를 연결해 가는 데 있는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4 고독, 섹스, 근친 상간: 마꼰도와 부엔디아 가문의 인간 조건</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고독과 연계해서 볼 때 『백년의 고독』에서 가장 특징적인 인간들은 마꼰도의 설립자인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로서, 고독이라는 기호는 그들의 온몸과 영혼에 나 있는 상처이자 종양이자, 가족의 혈통 속에 녹아들어 있는 피할 수 없는 인자라고 할 수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부엔디아 가족 가운데서 가장 고독한 인물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다. 그의 고독한 운명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나타났었다. 어머니 우르술라가 노령에 이르면 생기는 통찰력으로 아우렐리아노 대령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울었던 것은 &lt;그가 사랑을 하는 데는 무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했던 걸&gt; 기억했듯, 그는 모든 가족들 가운데서도 타인과의 우정이나 내밀한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이 가장 많았던 인물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고독하게 자란 그는 나중에 보수파와 자유파 사이의 1.000일 전쟁의 영웅으로서 엄청난 권력을 소유하게 되어 &lt;이제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남자처럼 보였을 때&gt;도 하얀 백묵으로 그려진 원 안에 격리된 채 &lt;무한한 권력의 고독 속&gt;에 위치하게 된다. 그래서 우르술라는 그의 과도한 권력은 거의 완벽한 도덕적 타락을 나타낸다고, 다시 말하면 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난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권력을 상실한 후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lt;다시는 전쟁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위해&gt; 황금 물고기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서, 아니 순환적인 고독을 누림으로써 치유하기로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묶여 있었던 밤나무 아래에서 고독한 시체로 발견된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lt;고독&gt;은 부엔디아 가문이 위치하고, 가문을 지배하는 공통의 조건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고독으로부터, 심지어 부엔디아 후손의 어머니인 우르술라조차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녀는 소경이 됨으로써 노쇠의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고독 속에 침잠해 아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과 마찬가지로 깊은 사색에 빠진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아들의 깊은 사색이 명상의 한 형태로 선택된, 실제적인 것이었던 반면에 적극적인 삶을 영위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우르술라의 침잠은 본의가 아니었다. 이처럼 고독은 아우렐리아노와 그의 어머니에게서 반대되는 효과를 유발했는데, 아우렐리아노가 고독 속에서 몽상가적인 화려한 권력을 차츰차츰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면, 우르술라는 눈이 멀어짐으로써 고독 속에서 사물들을 더 잘 보게 된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결혼에 의해 가족이 된 산따 소피아 델 라 삐에닷, 페르난다 델 까르삐오, 우연히 가족관계를 맺게 되는 삘라르 떼르네라, 마우리시오 바빌로니아, 가족의 절친한 친구 멜키아데스, 헤리넬도 마르께스, 외국인으로서 부엔디아 가문 여자의 사랑을 얻어 마꼰도에 정착하려다 실패한 삐에뜨로 끄레스피, 가스똔 등 모든 인물이 고독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부엔디아 가문의 집 자체, 그 안에 이는 가재도구, 화초, 나무, 잡풀, 새, 불개미, 노랑나비들까지도 고독한 존재로 나타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들은 고독을 피하기 위해, 고독을 향유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거나 강제로 죽고, 결국은 근친 상간에 함몰되는 것이다. </p><p class="ql-block">싑사리 눈에 띄지는 않지만, 마꼰도 주민 그 누구에게도 카톨릭은 심오한 믿음도, 세계관도 도덕도, 행동의 규범도 아니며 모든 경우에 있어 단지 사회적인 실천일 뿐으로, 외양을 중요시하는 의례와 형식주의만을 수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카톨릭까지도 고독을 치유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미사에 참석해 재(灰)의 십자가를 이마에 그렸다가 영영 지워지지 않은 바람에 그 십자가가 표적이 되어 반대파에 의해 모두 차례차례 암살된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열일곱 아들 또한 카톨릭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한 결과물로서 고독한 운명을 대변하고 있는바, 어떤 의미로 카톨릭은 죽음과 연계된 고독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고독과 관계된 가장 특징적인 면모는 이 작품의 마지막 세 페이지에 드러난다. 부엔디아 가문의 최후 생존자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는 개미떼에 의해 끌려가는 갓 태어난 아들의 몸을 보는 순간, 멜키아데스의 양피지에 적힌 &lt;가문 최초의 인간은 나무에 묶여 있고, 최후의 인간은 개미 밥이 되고 있다&gt;라는 제사(題詞)를 떠올리고는 자신의 운명이 양피지에 적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멜키아데스의 방에 처박혀 백년 전에 산스크리트어로 씌어진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를 해석했고, 양피지의 해석을 마치는 순간 마꼰도(거울의 도시 또는 신기루들)가 바람에 의해 부서져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져버릴 것이고, 또 백년 동안의 고독의 운명을 타고난 가문들은 이 지상에서 두 번째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양피지에 적혀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반복되지 않는다고 예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여기서 양피지를 읽는 행위는 그 자체로 반복할 수ㄴ 없는 고독한 행위이며 죽음의 행위가 되어 고독의 극치에 이른다. 말은 비극으로 끝나고 삶 자체는 반복될 수 없으며, 한번 지나간 시간을 다시 시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백년 후의 &lt;사랑에 의해 비로소 삶을 받은 자&gt;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끊어질 운명에 있던 부엔디아 가문의 고독은 그들만의 업보가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그것이기도 하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어찌보면 『백년의 고독』 속의 인물들은 고독과 사랑에 관해 무능함으로써 고독이라는 순환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의 운명, 다시 말하면 라틴아메리카의 조건을 가장 잘 정의하는 고독이라는 개념은 사랑에 무능한 사람들의 &lt;황폐&gt;와 &lt;단절&gt;이라는 두 단어 사이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한편으로, 즈엔디아 가문에서 우르술라 이구아란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성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남자들은 삶을 성적인 욕망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성은 이들의 삶의 방식처럼 보이기도 하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프랑스 한 출판사가 마르셀 프루스트와 함께 질문서를 만들어 &lt;관대히 용사할 수 있는 실수가 무엇인가?&gt; 라고 물었을 때 가르시아 마르케스 자신이 &lt;허리 밑에서 저지르는 실수&gt;라고 말했다시피, 인간에게 성은 권력과 더불어 가장 기본적이고, 자연스럽고, 강력한 욕구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겠지만, 『백년의 고독』에서는 성이 고독과 더불어 기능한다는 점에서 그 정도와 의미가 일상을 넘고 있다. 즉 성은 고독을 해소하고, 동시에 고독을 더욱더 심화시키는 기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런 맥락에서 볼 때, 『백년의 고독』에 대한 독서에서 마꼰도 설립의 근원을 이루고, 부엔디아 가문과 그 혈통의 고칠 수 없는 경향으로 지속되고, 결국에는 묵시록적 재난을 유발시키는 서사의 중심 모티프에 대한 언급이 없으면 불완전하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것은 바로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lt;내 소설 『백년의 고독』에서 내게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근친 상간에 의해 고착되어 있는 가족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gt;이라고 밝혔다시피, 고독과 더불어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테마인 근친 상간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사실, 『백년의 고독』은 동시에 &lt;백년 동안의 근친 상간&gt;으로 치환될 수 있을 정도로 라틴아메리카 문화에 가장 깊숙이 내재된 두 가지 현실, 즉 고독과 근친 상간의 문제를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따라서 부엔디아 가족의 모든 구성원을 가장 뚜렷하게 특징짓는 것은 바로 사랑의 주체와 대상이 한 가족에 속하는 근친 상간에의 유혹이며, 그들 모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근친 상간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이런 근친 상간의 내면에 바로 고독의 존재한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텍스트의 순환적 리듬은 수많은 사건들이 부엔디아 가문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고독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인 근친 상간과 연결되어 진행되면서 그 주기와 현태가 더욱 복잡해지고 있는데, 이 리듬 속에 위치하는 근친 상간과 그것의 금기는 부엔디아 가문의 기본적 틀을 형성한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무엇보다도 근친 상간으로 상징되는 도덕적 타락은 부엔디아 가문의 몰락을 재촉하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유전학적 관점에서 볼 때 동종교배가 열등한 자손을 낳듯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 또한 근친 상간이라는 동종교배를 통해 점점 더 열등한 자손을 낳고 그 결과 부엔디아 가문이 멸망하고 마꼰도가 폐허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는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마지막 순간에 해석해 낸 양피지에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이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사실 마꼰도 설립의 근본 동기도 사촌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결혼한 우르술라가 근친 상간으로 인해 돼지꼬리가 달린 태어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부부 생활을 거부하게 되고, 이를 비웃는 쁘루댄시오 아길라르를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죽임으로써 이루어졌던 것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근친 상간의 결과에 대한 가공할 만한 공포로 인해 우르술라는 후손들에게 엄한 주의를 주지만 근친혼의 전통을 지니고 있던 가문의 삶에서 근친 상간은 피할 수 없는 굴레이기 때문에 가문의 혈통에 흐르는 근친 상간적 경향은 영원히 바로잡을 수 없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형 호세 아르까디오와 동생 아우렐리아노는 삘라르 떼르네라를 공유하고, 자매간인 레베까-비록 양녀이긴 하지만-와 아마란따는 삐에뜨르 끄레스삐를 동시에 사랑하고, 형제간인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와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는 뻬뜨라 꼬떼스를 공유하며, 레베까는 친오빠처럼 자란 호세 아르까디오와 결혼하고, 아마란따와 조카 아우렐리아노 호세도 근친 상간 직전까지 이른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이모와 조카 사이인 아마란따 우르술라와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관계를 맺어 돼지꼬리가 달린 자손을 낳고, 선조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치욕적인 종말을 고한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 외에도 실제로 행해지지는 않았지만 근친 상간의 경향이 드러나는 관계 또한 많이 발견된다. 아르까디오의 어머니 삘라르 떼르네라에 대한 욕정, 미녀 레메디오스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열일곱 아들들과의 관계,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자신의 딸 레나따 레메디오스와의 관계,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페르난다 사이에서 태어난 호세 아르까디오와 중조고모할머니 아마란따 와의 관계 등이 그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처럼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는 근친 상간과 더불어 시작되고 혈통의 미로를 통해 여러 세대에 걸친 모색 후 그 순환이 완성되는바, 결국 돼지꼬리 달린 아이와 거울로 이루어진 도시의 파괴는 인간이 꿈꾼 유토피아는 인간 자체 내에 지닌 악의 씨로 말미암아 성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다시 말하면, 마꼰도는 서양 세계와의 진정한 족외혼적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시도에서 번번히 실패하고서 수세기 전부터 지속된 고독 속에 갇힌 채 아직까지도 완전하게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근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은유적 표현인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5 『백년의 고독』: 삶과 문학에 대한 진정한 화두</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백년의 고독』은 라틴아메리카의 창세기이며 묵시록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작품을 통해 가장 라틴아메리카적인 거ㅣ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더욱 넓고 깊게 바라봄으로써 라틴아메리카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고, 초월적 지역주의, 다시 말하면, 좁게는 콜롬비아 넓게는 라틴아메리카라는 특정한 지역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보편성을 추구하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즉 『백년의 고독』은 &lt;우리의 현실을 타인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갈수록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갈수록 우리를 덜 자유스럽게 하며, 갈수록 고독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 할 뿐&gt;인 상황하에서 &lt;삶의 새롭게 활짝 개인 유토피아이며, 아무도 타인을 위해 심지어는 어떻게 죽어야 한다고까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곳이며, 정말로 사랑이 확실하고 행복이 가능한 곳이고, 백년의 고독을 선고받은 가족들이 마침내, 그리고 영원히 이 지구상에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곳&gt;인 유토피아를 창조하는 작업을 실행하기에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 결과물, 즉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을 타파하기 위한 지난한 시도인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더 나아가, 라틴아메리카인뿐만 아니라 세계인과 그들의 삶의 정수를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과 시적 환상이 마술적으로 융합되어 있는 그의 소설 세계는 현실의 지평을 확장시키면서 20세기를 위협한 부조리한 요소들을 까발리고, 도덕적 분노를 표출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주면서,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영원한 가치인 사랑을 통해 인간과 삶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재평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현대 사회의 삶 그리고 문학에 새로운 좌표를 형성해 주고 있는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백년의 고독』이 출판된 지 30년이 넘게 지났지만, 비평가들과 독자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소설, 멜키아데스의 양피지 안에 있는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처럼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던 문학적 거울인 이 소설에 여전히 놀라움과 감동을 표하고, 전율을 느끼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과 역사를 비추고 전망해 보고 있는 이유는 『백년의 고독』이 작가의 의식 세계와 라틴아메리카라는 실체가 지니고 있는 복합적인 사실을 총정리한 소설로서 그 대륙을 체계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lt;소설의 죽음&gt;에 대한 종지부를 찍고, 소설의 삶과 소설의 미래에 대한, 우리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화두일 수 있기 때문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2007년)</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