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그리면서

小草(谢绝私聊)

<p class="ql-block">  사진에 관한 설명</p><p class="ql-block"> 윗 사진은약 100년전 아버지가 태여나서 몇개월때에 찍은 것인데 가운데 두분이</p><p class="ql-block">증조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곁에 분 할아버지께서 품에 안고 있는 아기가 우리 아버지이시란다. </p><p class="ql-block">윗 사진은 현재 연변 민속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p><p class="ql-block"> 아래 사진은 아버지 생전 북하마탕에서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하시고 계시는 장면이다. </p> <p class="ql-block">  금년 2022년 (음력12월 27일) 은 나의 아버지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p><p class="ql-block">아버지 생전에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나로서 아버지탄생 100주년을 맞으면서 꼭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이 글이나마 아버지께 올리고저 한다. </p><p class="ql-block">아버지께서 이세상을 떠나 가신지도 어느덧 14년이 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 모습은 생생하게 머리속에 남아있다. </p><p class="ql-block">아버지 고향은 조선함경남도 북청군 성대면의 한 시골이라고 들었다. </p><p class="ql-block">증조할아버지땐 먹고 사는 것이 괜찮았었는데 그후로 점점 못해져 가게 되여 먹을 걱정 없다는 만주로 이주민으로 오시게되였는데 당시 아버지 나이14세였다. </p><p class="ql-block">그 당시 오셔서 자리잡은 고장이 바로지금의 왕청형 대흥구 하마탕 신흥툰이다. </p><p class="ql-block">아버지께서는 이주민으로 오면 학교도 다닐수 있다는 한가닥의 꿈을 안고 오셨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집안에 로동력이 부족하여 아버지께선 학교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나의 할아버지께선 막내 아들을 (삼촌) 학교에 보내면서 넌 걔가 배우고 돌아 오면 거기서 배우라고 하였다. 말이 쉽지 그렇게 한다는 건 여러모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p><p class="ql-block">이렇게 아버지의 학교다니고 싶은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p><p class="ql-block">1945년 광복이 나서 마을에 야학교가 섰는데 아버지는 열정적으로 야학공부를 다니셨는데 때론 일밭에서 늦게 돌아 오시게되면 식사도 거르시고 야학부터 다녀오셨다. 이렇게 열심히 배운 덕분에 아버지깨선 신문, 잡지도 볼수 있고 편지도 쓸수 있게 되였고 회의 내용도 기록할수 있게 되였다. </p><p class="ql-block">인상 깊은 것은 아버지께선 가끔 글씨를 쓰시곤 &lt;돈을 들였으면 퍽 잘 썼겠는데&gt;하시면서 학교 문에 못 들어간 아쉬운 마음을 자주 표현하였다. </p><p class="ql-block">아버지께선 야학교에서 배운 밑천으로 </p><p class="ql-block">합작사, 인민공사, 단간에 이르기까지 몇십년간 생산대 대장, 지부위원 등책임을 맡고 맡은 바 임무를 훌륭히 완성하셨 다. 아버지께선 회의때마다 필기를 꼭 꼭 하셨는데 50년대 초부터 2000년도에 이르기까지 몇 십권에 달하는 필기장이 있었다. 그리고 연변일보, 로년세계, 지부생활등 신문 잡지들을 빼놓지 않고 꼭 꼭 구독하셨다. </p><p class="ql-block">아버지께선 생산대 대장, 지부위원 직무를 절대로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께서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 간부노릇하려면 잠을 적게 자고 걸음을 많이 걷고 잔소리를 많이 해야한다. 였다. </p><p class="ql-block">아버지께선 문화수준은 높지 않았어도 하시는 말씀마다 유머스럽고 사리에 밝았다. 하여 사원들은 아버지 말씀을 아주 잘 들어 주었다. 아버지께서 생산대장을 맡은 20여년간 생산대 량식표준과 수입 분배는 언제나 온당하게 진행되여 그 당시 수준에선 중상등을 차지했다. </p><p class="ql-block">우리 형제 자매5섯중 위로 셋은 녀자여서 처음 보는 사람 들은 이집에 녀자애가 많다고하면 아버지께서는 &lt;야, 많소, 셋이 요&gt;하고 대답하시군 하셨 다. 그렇지만 절대로 남존녀비를 하지 않으셨다. 특히 학교다니는 일에 대해서는 녀자애라고 공부 안해도 된다는 관념이 전혀 없었다. 우리가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닐 때는&lt;독서 무용 론&gt;이 판을 치는 바람에 많은 동창들이 학교를 그만 두고 생산대에 나와서 로동에 참가 하였다. 그당시 우리 반 녀학생수는 겨우 6명이였다. 그래서 한번은 내가 아버지앞에서 &lt;나도 학교 그만 둘가&gt;고 말했는데 아버지께선 아주 성을 내시면서 &lt;저를 위해 공부하지, 공부해서 남을 주냐&gt;고 하셨다. 그후로 나는 다신 학교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그후에 난 연변한사를 졸업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는데 처음 출근 한학교는 집과 20여리떨어진 </p><p class="ql-block">이웃 공사의 한시골 마을이였다.지금은 교통이 편리하여 20리거리는 문제가 아니지만 그당시는 곤난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휴식도 일요일 하루만이였다. 난 토요일 오후 상과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오르면 거의 두시간을 걸어야 집에 도착하군했다. 그때마다 저녁 밥상에는 색다른 음식이 갖춰져 있었다. 아마도 내가 오는 줄알고 남겨 둔 음식이 였다. 이렇게 하루 밤 자고 이틑날 오후에는 또 다시 시골 학교로 돌아 가야 했다. 그때 아버지께선 하루 밤 더 자고 아침 일찍 서둘러 가면 된다고 하셔서 그후로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나의 사업터로 가곤 했는데 외지에서 근무하던 4년 남짓한 동안 내가 걸은 길은 5000리 남짓하다. 그동안 아버지는 주말이면 꼭 나를 기다리셨고 나도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고 즐거웠다.</p><p class="ql-block">아버지께선 성미가 활달하시고 말씀을 구수하게 잘 하셨고 마을과 하마탕내의 력사에 대해 잘 료해하고 계셔서 마치도 한권의 력사책과도 다름이 없었다. </p><p class="ql-block">하여 신문사의 기자들과의 인터뷰도 많았고 연변 일보, 길림신문에 아버지에 대한 보도와 이야기도 여러번 실렸었다. </p><p class="ql-block">아버지께선 시비가 분명하시고 자사자리하지 않으셨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싫어 하셨고 누구에게 아첨하거나 굽실거리는 것을 질색하셨고 생활에서는 근검소박하셨다. </p><p class="ql-block">그뿐만 아니라 형세와 시사를 아주 중시하셨는데 문화 혁명시기때 무단 투쟁, 파벌투쟁등에 대해 아주 못 마땅해 하시면서 &lt;모주석께서는 이렇게 하라고 안 했는데&gt;고 말씀 했다.</p><p class="ql-block">로년에 들어 서서도 밭을 돌아 보시고 논물관리도 하셨는데 일생 동안 밭일에서 잔뼈를 굳혀 오셨다. </p><p class="ql-block">때론 우리가 롱담으로 아버지는 한평생을 기층에서 고생하면서 뭘 얻은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 그냥 웃어 넘기군 하셨다. </p><p class="ql-block">그밖에 형제간의 우애가 돈득하셨는데 형님, 동생, 누이동생간에 손을 벌리는걸 사절하셨다. 서로 만나면 이야기가 오고 가며 정말로 보기 좋았다. 형제간의 일을 자신의 일보다 더 념두에 두셨고 도울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도왔다. </p><p class="ql-block">아버지는 자녀 교육에는 별다른 노하구가 없었다. 아버지는 우리들에 대해 특별히 이래라 저래라하지 않으셨다. </p><p class="ql-block">아버지가 늘 하시는 말씀이 &lt;공부는 할 것이 해야 한다 &gt;였다. </p><p class="ql-block">소학생시절에 내가 반급에서 공부 잘 한다는 얘기를 듣곤 많이 기뻐하시고 자랑스러워하시며 &lt;우리 딸이 장래 부녀 주임 감이라니깐 . &gt;고 하셨다. </p><p class="ql-block">나중에 물론 부녀 주임은 되지 못했다.</p><p class="ql-block">아버지는 농촌에서 한평생 살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다섯 남매를 키우시며 제일 기층에서 생산대 대장직무를 충실히 완성하면서 일생을 마감하셨다 ……</p><p class="ql-block">유감스러운건 내가 아버지마감을 지켜 주지 못한 것이다. 자다 깨여도 생각하면 가슴이 미여지듯 아프다. </p><p class="ql-block">아버지께서 돌아 가셨다는 비보를 전해 들었을때 나는 서울에서 안산에 있는 조카집으로 밤중으로 도착해서 아버지께 절을 올리고 꼭 돈을 많이 벌고 형제 자매들 모두 잘 살게 하겠다고 맹세하였다. 나는 근 며칠 내내 아버지를 그려보며 꿈에라도 아버지를 뵐수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타나</p><p class="ql-block">주질 않았다. </p><p class="ql-block">아마도 나에게 짐을 지워 주기 싫어서인것 같다…………</p><p class="ql-block">아버지, 걱정 마십시오, 제가 꼭 저의 맹세를 현실로 만들 것입니다. </p><p class="ql-block">요즘은 못 사는 것이 자랑이 아닙니다. 가난하면 어디 가나 떳떳하지 못하고 주눅이 들게 됩니다. </p><p class="ql-block">나는 마음속으로 &lt;아버지, 하늘 나라에서 우리를 지켜 보세요 &gt;하고 몇십번 외쳤다. </p><p class="ql-block">지금도 우리 형제 자매들은 별로 잘사는 형편이 안 된다. </p><p class="ql-block">모두의 노력을 통해 많은 변화가 있긴하지만 아직 더 많은 노력과 분투가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다. </p><p class="ql-block">나는 반드시 초심을 잃지 말고 아버지께 한 맹세를 현실로 만들어 갈 것이다. </p><p class="ql-block">아버지, 그리운 당신, </p><p class="ql-block">내가 아버지를 만나는 그날, 나의 형제 자매들 모두 함께 다 잘 살게 되었다고 말씀 드릴겁니다. </p><p class="ql-block">아버지, 사랑합니다, 죽도록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