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19.</p><p class="ql-block">아침햇살이 창호지를 붉게 물들였다.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얼굴을 간지럽히는 햇살에 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벌써 일어날 시간이 되었나.</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간신히 눈을 떠보니 한쪽에 펴놓은 이부자리가 눈에 띄인다. 그렇다면 나는 어제밤…그제야 욱신거리는 어깨죽지에 눈살이 다시 찌푸러지는 그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잘 주무셨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장지문 저편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나는 와뜰 놀라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제야 자신이 간밤에 서안을 의지하고 잠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미 의관을 정제한 여현이 보료위에 단정하게 앉아있는 게 보였다. 지난 밤의 노기는 가뭇없이 사라진 그의 반듯한 얼굴에는 지금 아무 표정도 보아낼수 없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향단이를 부를께요.”</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단 둘이, 그것도 함께 밤을 보냈다는 사실이 민망하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안위에 놓인 면경함속에 남색 치마에 연노랑 저고리가 비쳐졌다. 다행히 흰 단속곳 차림이 아니라서 나는 가만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밖에 누가 있느냐.”</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살짝 목소리를 높였지만 바깥은 잠잠하기만 하다. 밝은 장지문쪽을 보아하니 이미 아침시간은 훨씬 지난 걸로 짐작되는데 늘 장지문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향단이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잠깐 심부름을 보냈소.”</p><p class="ql-block">“아…”</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나는 다시 그 자리에 앉았다. 잠시 애꿎은 저고리 고름을 만지작거리다가 내가 입을 열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늘은 출타를 안하십니까.”</p><p class="ql-block">“꼭 마치 축객령으로 들리오만.”</p><p class="ql-block">“…그게 아니라…”</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여현의 도도한 기품에 왠지 주눅이 들었다. 나는 여현이 나가서 일을 보는 틈을 타 외출을 할 예정이었다. 이 높고 소슬한 담장으로부터 탈출을 해야만 내가 돌아갈 방법을 도모할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고로 앉아있는 똑똑이보다 나돌아다니는 머저리가 낫다 하였거늘…아니, 아니다. 움직이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 낫다 하였거늘.</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나는 서안에 턱을 괴었다. 일전에 서당에 갔다 온 뒤로부터 몸과 마음이 무엇에 잡힌 듯 개운하지 않았다. 설이에게 숙주 소식이 왔는지 가서 물어도 볼겸 한번 더 강변 나들이를 하고 싶었다. 물론 나혼자 몰래.</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조반후 강연에 나갈 것이요.”</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가 덤덤히 입을 열었다. 세자시강원…그러니까 그가 지금 세자의 스승중 한명이라 이거지.</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임해…세자는 좋겠습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가 눈을 들어 나를 본다. 나는 서안을 정리하면서 백자병에 꽂아둔 마른 난초가지를 꺼내어 책갈피에 정히 넣었다. 그는 말없이 내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지금을 아끼라 하십시오. 이런 날이 더 없을터이니.”</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또 예지꿈을 보았소?”</p><p class="ql-block">“아니요. 내 말이 글렀습니까? 세자는 지금이 한창 소년의 시기가 아닙니까. 청춘을 아끼라는 말인데 뭘 그리 확대해석 하십니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나는 책을 덮고 면경에 비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양쪽 귀밑머리가 살짝 흐트러져있었다. 면경함속의 얼레빗을 꺼내어 머리를 빗으려는데 그가 움찔 자리에서 일어났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나는 고개를 돌려 그가 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보았다. 내앞에 다가온 그가 한쪽 무릎을 접혀 앉았고, 내 어깨를 잡아 면경쪽으로 돌려놓을 때까지 나는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그가 내 손에서 얼레빗을 빼앗아갔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리 주시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면경속의 내 얼굴이 금세 도홍빛으로 물들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서방님…”</p><p class="ql-block">“머리카락이 꽤 자랐소. 조금만 더 있으면 가체를 쓰지 않아도 되겠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가 숙련된 행동으로 머리를 빗어주었다. 나는 면경을 통해 그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전에도 이러셨습니까.”</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의 손이 잠시 멎는 듯 했고 나는 잠시 내 실언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비집고 새어나오는 건 단지 단순한 호기심과 궁금증만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수 있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하도 오래되어서...”</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변명삼아 중얼거리는 내 입속말을 무시한 채 그는 여전히 내 머리를 빗어주었다. 잠시후 가체를 이용해 뒷머리를 얹고 옥잠까지 몸소 꽂아준 후에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럼 이만…가보겠소.”</p><p class="ql-block">“저녁진지는 들어와 드시겠습니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장지문을 나서려던 여현이 내 말에 고개를 돌렸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일찍 들어오라는 말로 들리오만.”</p><p class="ql-block">“아, 아니라니깐요.”</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나는 손사래를 치다싶이 격한 제스추어를 취하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어멈에게 일러두려고 물어본 것이어요.”</p><p class="ql-block">“일찍 들어오리다.”</p><p class="ql-block">“아니 굳이 안그러셔도…”</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문을 열고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가볍다. 여광으로 그의 옆얼굴에 미소가 걸린 것도 눈에 들어온다. 드르륵 문이 닫히고 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빌어먹을. 오늘 외출은 나가리가 분명하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아씨, 대낮에 이러시면 쇤네가 난감해져요.”</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향단이는 울상을 하고 내 뒤에 서있는다. 나는 상투에 꽂은 은잠을 바로 하고 갓을 뒤집어썼다. 여현의 옷이 항상 남색과 물색 같은 담정한 색상인 것이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내게는 따로 선택이 없었다. 올때 저자거리에 들려 좀 화려한 색상의 비단으로 외출복을 마련해야겠다. 허란설헌보다 다섯살 아래니까 좀 의상에 힘을 주면 어때서.</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저번처럼 허균도련님이라고 하면 되잖아.”</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남색 도포자락을 날리며 내가 장지문을 나섰다. 향단이 바싹 내뒤를 따라붙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어디로 가시와요? 아씨…”</p><p class="ql-block">“어흠…”</p><p class="ql-block">“아씨께서는 몸이 편찮으시어 연일 거동을 못하시옵니다. 허도련님 이왕 오신김에 사랑채에 가셔서 차라도 한잔 하심이…”</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앞채에서 오고가는 하인들의 시선에 향단이 급히 말을 고친다. 나는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향단이 니가 따라주는 차맛이 그립긴 해도, 내 이리 상경하면 볼 일이 많으니 다음을 기약하마. 명월관에서 꼭 좀 들리라 하였으니. 하아…이놈의 인기는 어쩌면 좋아.”</p><p class="ql-block">“지금 명월관이라 하셨습니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사랑채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나는 부지중 발걸음을 멈추었다. 시어머니 송씨…아니 송씨부인의 근엄한 얼굴이 문가에 나타났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요즘 유달리 방문이 잦으십니다.”</p><p class="ql-block">“아네, 누이가 앓는다 하여 집에서 어찌나 가보라고 성화인지.”</p><p class="ql-block">“저리 사흘이 멀다하게 아프니 출가전 사부인께서도 상심이 크셨겠습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송씨부인의 얼굴에 언뜻 비아냥이 어렸다. 이건 뭐, 허씨가문에서 지금 병다리를 시집 보냈다는 말인가. 내가 그정도는 알아듣는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딸은 출가지외인이니 저희 집안에서는 그냥 걱정할따름이지요. 그보다 부인께서 더 상심이 크실 듯 합니다.”</p><p class="ql-block">“제가요?”</p><p class="ql-block">“네. 대를 이을 금쪽같은 조카들이 어쩌면 하나같이 이 집에서 잘못되었는지…저희 집에 왔을 때는 그리 생기 넘치는 아가들이…”</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송씨부인의 얼굴이 새카맣게 질린다. 나는 복수의 쾌감에 젖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럼 이만.”</p><p class="ql-block">“명월관으로 가신다 하셨습니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부인이 재차 물었다. 왜 지난 번부터 명월관에 대해 이토록 관심을 가지는 지 나는 그것이 궁금해졌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네.”</p><p class="ql-block">“혹 명월이를 보거든, 전갈 한마디 부탁드릴수 있겠습니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부인이 내게 정곡을 찔리고도 부탁이란 걸 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절박한 일인 것 같았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리하지요.”</p><p class="ql-block">“시간이 나면 이 집에 잠시 들리라 해주십시오.”</p><p class="ql-block">“그건 부인께서 직접 사람을 보내어 부르시면 될 일인데요.”</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내가 되물었다. 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어찌 사대부 가문에서 그런 천한 것을 부르겠습니까. 그냥 외부에는 명월이 스스로 온 걸로 보이게끔 해야지요.”</p><p class="ql-block">“알겠습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대체 부인이 명월이를 봐서 뭘 하자는 생각인지 당췌 알수는 없지만 나는 일단 대답을 했다. 원래는 서당으로 직접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부탁을 받고보니 명월관에 먼저 들려야 할수밖에 없었다. 날이 저물기전에 되돌아올 계획으로 집을 나섰으나 이미 시간은 퍼그나 지체된 듯 보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명월관에 도착하자 기녀들이 마중나왔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이처럼 재자(才子)들이 명월관으로 모인답니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저번에 풋면목을 익혔던 기녀가 내게 바싹 다가붙으며 말했다. 나는 잠시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춘향이라고 했나.”</p><p class="ql-block">“어머, 허도련님, 이번에는 한글자만은 제대로 불러주셨사옵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기녀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운향이옵니다. 허도련님.”</p><p class="ql-block">“아아, 운향.”</p><p class="ql-block">“다음에는 제대로 불러주시와요.”</p><p class="ql-block">“그래, 알았으니 오늘은 누가 왔는지 어디 말해보거라. 혹시 우리 매부가 또 온건가.”</p><p class="ql-block">“아닙니다. 서당선생님은 그리 자주 오는 편이 아니십니다. 오늘은 도련님이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 분이 한분 와계십지요.”</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광해군도 데리고 왔을라니 내가 깜짝 놀랄 인물이 또 어디 있을까. 마음 한가득 의혹을 품고 안쪽 별채로 향했다. 별채를 가득 매운 사람들의 분주한 소리에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라고 이름만 들먹이먼 알만한 벼슬아치가 아니면 어느 지체 높은 명문가의 자제일 터이다. 명월이 직접 나서서 배동하는 것도 모자라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나온 음식들도 예사롭지 않았으니.</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손곡선생이 이리 오실줄은 누가 알았겠어요.”</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춘향인지 운향인지 하는 기녀의 말도 귀전에서 웅웅거리기만 한다. 나는 눈앞의 광경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손곡 이달, 조선역사에서 허초희와 허균의 스승이자 3당시인의 한사람으로 불렸던 그 이달이 어찌, 현대의 녀석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내 앞에 나타난단 말인가.</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허균도련님이 아닙니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명월이 옥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로 내쪽을 향해 입을 열자, 별채의 모든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손곡선생의 눈길도 그들을 따라 내쪽으로 옮겨졌다. 나를 보는 그의 눈길이 반짝 하고 빛났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시간대의 그는 허초희와 허균의 스승이었으니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태연한 자태로 방안으로 들어섰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스승님이 와 계시는줄 몰라 미처 안부를 드리지 못했군요.”</p><p class="ql-block">“균도련님.”</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손곡선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대의 녀석과는 달리 근엄하고 단정한 몸가짐이 내 시선을 끌었다. 그의 준수한 얼굴도 정제된 의관의 힘을 빌어 더욱 눈부시게 빛났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어찌 이곳에 와계시는 겁니까.”</p><p class="ql-block">“쉿. 저희 집에는 비밀로 해주십시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살짝 몸을 기울여 그의 귀가에 대고 가만히 속삭였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알았지? 형.”</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손곡이 몸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말없이 술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오랜만에 윤곽이 분명한 녀석의 얼굴을 보니 배신감보다는 반가움이 갈마들었다. 현대에서 아무리 녀석이 최여사의 스파이가 되었다 해도, 그에게서 전수받은 무예와 지식이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녀석과 나의 인연은 단지 이 조선시대에 국한되어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p><p class="ql-block"><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