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두부방/윤슬

慧莲

<p class="ql-block">  내가 교직에 참가하여 첫출근 하던 날 교장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내가 담임하게 될 반으로 가서 애들한테&lt;&lt; 얘들아 김씨 두부방 알지?&gt;&gt;하고 물으니 애들이 이구동성으로 &lt;&lt;예.&gt;&gt;하고 대답하는것이였다. 아이들한테 나에 대한 소개는 우리집 두부방 이름으로부터 시작 되였고 학부형들도 애들한테 김씨 두부방 집 딸이라는 이름으로 부터 나를 기억하였다고 하였다. </p><p class="ql-block"> 엄마와 아버지가 함께 꾸리는 김씨 두부방은 우리 촌에서 유일한 조선족이 꾸리는 깔끔한 두부방이였고 고소하고 깊은 두부맛으로 린근에 알려져 있었다.</p><p class="ql-block"> 1981년 초겨울날 내가 살던 촌에도 개혁개방의 물결을 타고 호도거리가 시작되였다. 집체소유의 모든 재산들이 종이장에 수자로 적혀져 제비 뽑기 형식으로 사원들 집집에 분배하게 되였다. 행운의 수자는 종이장 안에서 사원들의 회의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p><p class="ql-block"> 그날 회의에 가기전에 엄마와 아버지는 제비 잘못 쥐면 어쩌냐 하는 불안감때문에 서로 밀당을 하시다가 &lt;&lt;이런일은 남정들이 해야 재수 붙는다고 했어요. &gt;&gt;라는 엄마의 단호한 결정에 따라 행운의 기회는 결국 아버지한테 넘어갔다. 울며겨자 먹기로 아버지는 운수 대통을 기대하면서 회의장소로 나가셨다. 집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내내 엄마와 집식구들은 제발 우리 집에 행운이 왕림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p><p class="ql-block"> 큰 길에서 회의가 끝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촌민들이 소리가 들리더니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였다. 문을 떼고 집에 들어서는 아버지의 얼굴은 희색이 만면 하였다. 아버지의 주름잡힌 얼굴에 그렇게 활짝 핀 웃음 꽃은 내가 아마 세상에 태여 나서 처음 본것 같았다. &lt;&lt;여보 내가 문화실을 가졌소.그리고 황소도 제일 좋은 황소를 가지고 ...&gt;&gt;아버지의 환희에 젖은 목소리는 격정으로 떨리였고 희소식을 듣는 우리집 식구들은 격동으로 들먹이며 넘 좋아서 손벽까지 치면서 아버지의 그날의 행운을 축하하였고 엄마와 아버지는 그날 날이 새도록 잠자리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시는것이였다. </p><p class="ql-block"> 문화실을 분여받은 이튿날 부터 엄마와 아버지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관한 구상을 시작하였다. 분여받은 문화실은 동서방향으로된 면적이 120평방 되는 빨간 기와로 된 벽돌집이다.문화실의 절반은 큰 대청으로 사원들이 주기적으로 모여앉아 회의를 하던 장소였고 절은 가운데 큰 석마 매돌이 있고 이전에 당나귀로 매돌을 돌려 두부를 앗던 두부방이였다. </p><p class="ql-block"> 워낙 농사일을 할줄 모르는 아버지인지라 호도거리 첫해부터 아버지는 농사에는 자신이 없다면서 농사는 다른 사람한테 양도하고 저 두부방을 다시 수건하여 콩 가는 기계를 하나 사서 두부방을 시작해보자고 의논이 되였다. 이틑날부터 우리집 식구는 총동원 되여 회의실을 칸막이를 만들어서 살림집으로 만들고 이사하기 바쁘게 아버지는 연길에 가서 콩가는 기계며 두부만드는데 필요한 시설들을 이것저것 사왔다.</p><p class="ql-block"> 아버지는 전에 생산대에서 두부방을 운영하던 랑씨라는 한족 아저씨를 기술자로 모셔왔다. 랑씨는 콩 불르기 로부터 두부가 만들어지는 전반 순서를 차근 차근 아버지한테 가르쳐주었다. 몇일후 드디여 아버지와 엄마가 꾸리는 김씨 두부방이 오픈 하게 되였다. 하루에 보통 40근의 콩을 불러서 두부를 앗았는데 봄철과 겨울철에는 두부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80근씩 하였다. 지금은 두부 가공도 거의 기계를 작동해서 하는데 그때 우리집 두부방은 콩가는 일을 제외 하고는 거개가 다 수동이였다. </p> <p class="ql-block">  전날 저녁부터 엄마는 40근의 콩을 씻어서 큰 오지독에 불린다. 콩을 불릴때 물을 넘 적게 부어도 안되고 넘 많이 부어도 두부의 고소한 맛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두부를 불린 시간이 8시간 넘으면 앗은 두부에 기름기가 적고 쫀득거리는 맛이 없어진다고 하였다.</p><p class="ql-block"> 두부콩 가는 일은 아버지의 몫이였다. 아버지는 이른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큰 철 가마에 물을 붓고 불을 지펴놓고는 팔팔 끓는 물에 콩물을 끓인다.수시로 콩물에 거품이 생겨서 넘쳐날수 있으니깐 불조절을 잘해야 한다. 콩물을 끓일때 센불에 끓이면 가마밑에 콩물이 눌러 붙어서 탄 냄새가 날수 있고 너무 미지근한 불에 끓여도 끓인 콩물에 노란 기름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모든 순서는 완벽하게 진행되여야 하였다. </p><p class="ql-block"> 두부방 천정에는 가로세로 매달려있는 나무막대기가 있다. 큰 보자기 네 끝을나무막대기 끝에 동여매 놓고 그 밑에는 큰 오지 항아리가 놓여있다. 끓여 놓은 콩물을 그보자기에 넣고힘들게 보자기를 비탈면서 콩물을 짜서는 항아리에 넣는다. 두부를 앗는 과정에서 제일 힘든 일이다. 허약한 아버지때문에 그 힘든 일은 항상 엄마 몫이였다. </p><p class="ql-block"> 콩물 짜기를 끝마친 다음 순서는 간수를 맞추는일인데 이 순서는 두부맛과 두부의 쫄깃함과 부드러움이 완성되는 관건적인 기술적인 일이다. 이부분은 당연히 아버지 몫이였다. 아버지는 랑아저씨한테 배운 기술을 잘 전수받아서 아버지만의 비법으로 아주 침착하게 간수를 주는 과정을 끝마친다 .</p><p class="ql-block"> 두부발이 예상한대로 잘 잡히면 네모난 나무판대기에 사면이 물이 쉽게 빠지게 만들어진 틀에 커다란 보자기를 펴놓고 두부발이 선 초두부를 큰 그릇에 담아서 쏟아붓는다. 그리고 보자기의 네 끝을 서로 맞잡아서 판을 마추고 나무판자를 올려놓고그우에 커다란 돌덩이 네개를 올려놓고 눌러 놓는다.약 반시간 정도 물기를 뺀 다음 완성된 하얀 두부판에 나무자로 네모나게 두부모를 만들면 김이 모락모락 피여 오르는 두부가 완성된다.</p><p class="ql-block"> 그 때에는 집집마다 콩을 가져와서 콩 한근에 가공비 7전을 내면 두부 5섯모씩 주는데 그래서 두부를 산다고 하는것이 아니라 두부를 바꾼다고 하였다. 그러니깐 하루 40근 두부를 하면 하루 가공비 수입이 2원 8십전이고 두부하면서 나오는 찌거기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해마다 돼지 10마리 정도씩 키우고 토끼와 게사니 닭들을 키웠다. </p><p class="ql-block"> 우리집 두부맛은 차츰 차츰 린근에 이름이 알져지기 시작하였다. 두부가 야들야들하면서 쫄깃하고 구수한 맛이 있어서 그때 촌 마을에 두부방이 여러집이 있었지만 우리집 두부방은 항상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래서 어른 애들 할것없이 김씨 두부방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p> <p class="ql-block">  지금도 나의 눈에는 매일 저녁마다 하루 두부 판매가 끝나면 엄마는 푸른색 돈주머니를 풀어놓고 그날 가공비를 계산하느라고 1전짜리 2전짜리 5전짜리 지페들을 한장 한장 침 바르면서 헤여보던 ,돈을 헤여보던 그 순간만은 얼굴에 항상 기쁨이 찰랑거리던 엄마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렇게 동네방네에 유명했던 김씨 두부방은 5년동안 엄마와 아버지의 로동과 땀으로 운영되다가 1988년 힘든 일에 지친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두부방을 손씨 성을 가진 다른 한족 사람한테 팔아 넘기였다. </p><p class="ql-block"> 지난 가을 나는 고향으로 찾아갔다.오래동안 가보지 못한 고향의 그리움으로 어린 시절의 추억을 찾아서 여기저기 돌아보다가 엄마와 아버지의 숨결이 그려져 있는 그 두부방을 찾아갔다. 주인이 여러번 바뀌여져 버린 고향 집은 헐망해지고 마당에는 풀이 무성해서 옛날 모습이 거의 잃어져 버렸지만 고향 집 문앞에 다가가는 순간 나는 눈물을 주체할수 없었다. </p><p class="ql-block"> 고향집 문에서 하얀김이 서린 철가마앞에서 콩물 끓이던 엄마의 모습과 간수를맞추던 아버지의 모습, 두부를 바꾸려고 콩 담은 그릇을 손에 쥐고 줄지어서 기다리던 고향사람들, 매일 매일 두부가 다 팔리면 하얀 두부보를 씻어서 마당의 바줄에 널던 엄마가 보이는것 같아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p><p class="ql-block"> 아버지 어머니, 그 세월에 당신들의 신근한 로동이 있어서 자식들이 무탈하고 근심 걱정 없이 성장할수 있었고 단돈 십전도 없어서 힘들게 살던 가난에서 벗어나 남 부럽지 않게 살수 있지 않았을까요?</p><p class="ql-block"> 지금도 가끔 고향에 가면 김씨 두부방 집 딸이라면 아직도 알아주는 고향 사람들이 있다. 그 세월에 엄마와 아버지가 꾸린 김씨 두부방은 내 고향의 전설같은 이야기로 전해지고 우리 가족이 가난의 세월을 헤치고 힘들게 살아왔던 추억의 이야기로 남아있다.</p> <p class="ql-block" style="text-align:center;">2022년 7월 28일 KBS 한민족방송</p><p class="ql-block" style="text-align:center;">"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에서의 우수작품</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