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문학비평]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는 진정 위대한 작품, 톨스토이는 말하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반 곤차로프[Goncharov, Ivan] 러시아의 소설가(1812~1891). <평범한 이야기>로 문단에 등장하였으며, 작품에 농노제 폐지의 필연성을 주제로 한 <오블로모프(Oblomov)>가 있다. </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곤차로프의 생애</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러시아의 소설가 곤차로프(Ivan Aleksandrovich Goncharov)는 오늘날까지도 그 작품세계가 갖는 효력과 예술적 힘을 잃지 않고 있는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러시아의 사회변화를 극적으로 표현했고 러시아 문학에서 손꼽히는 생생하고 인상 깊은 ‘오블로모프’라는 인물을 창출했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는 1812년 6월 18일(구력 6월 6일) 러시아 심비르스크(현 울리야놉스크)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아버지의 지인인 퇴역해군장교 트레구보프가 어머니의 조언자 역할을 하며 4남매를 돌봐주었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1820년 곤차로프는 트레구보프의 주선으로 사설기숙학교에 들어간다. 이 학교는 사제인 트로이츠키와 그의 독일인 아내 리츠만이 운영하고 있었다. 트로이츠키 부부는 뛰어난 교육자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고, 이 학교에서 곤차로프는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익히고 도서관에서 수많은 고전을 읽으며 문학가로서의 자질을 쌓아갔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1822년에는 모스크바 상업학교에 진학한다. 여기에서도 그의 외국어 공부와 독서 열정은 이어진다. 상업학교였지만 곤차로프는 상업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인문학에 푹 빠져 있었다. 1831년 8월 곤차로프는 모스크바대학 인문학부에 입학한다. 그 무렵 모스크바대학교에는 게르첸, 오가료프, 레르몬토프, 스칸캐비치, 악사코프 등 뒷날 러시아 문화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공부하고 있었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 대학에서 곤차로프는 나제쥬진에게서 철학사와 예술·문학이론, 쉐브이로프로부터 외국문학, 다브이도프에게서 러시아문학에 대해 배웠다. 본격적으로 호머, 단테,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월터 스콧 등 고전작품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분석·연구하기도 했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무엇보다 그의 문학에 대해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푸시킨이다. 그 무렵 푸시킨에 대한 곤차로프의 심취는 거의 신앙이나 다름없었다. 대학 시절 푸시킨의 강의를 들었던 때의 감동을 그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고 자랑스레 이야기하곤 했다. </p><p class="ql-block">“그가 들어오는 순간, 강의실 안이 마치 찬란한 태양으로 밝게 빛나는 듯했다. 그의 시는 나를 포함한 수많은 학생의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였다. 그의 몸짓, 말투 하나하나에서 느껴졌던 그 경이로움을 어디서 다시 느낄 수 있으랴.”</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1834년 대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심비르스크로 돌아왔다. 그는 심비르스크 현의 관청 관리로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는데, 관리생활은 농노제 아래에서의 비참하고 고된 러시아 민중의 삶에 대한 눈을 뜨고 깊이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1835년에는 페테르부르크로 옮겨 외국 문서 번역 일을 맡았다. 그 뒤 1852년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평범한 관리로서 살아간다. 그는 평생 30년 넘게 관직에 있었는데, 이는 그 무렵 작가들 사이에서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라 하겠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관리생활은 그에게 문학에 대한 열망을 더욱 부추겼다. 그의 적성에 그리 맞지 않았던 것이다. 능력에 부치는 일이나 하기 싫은 일도 억지로 해야만 했다. 그럴수록 곤차로프는 글을 쓰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천직임을 새삼 깨달아갔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미 열네댓 살 때부터 괴테, 실러 등의 시와 산문을 번역했으며, 젊은 시절 내내 습작이라고 할 만한 여러 작품들을 닥치는 대로 써 보곤 했다. 인간이란 저마다 사명을 갖고 태어나며, 자신의 사명은 말할 것도 없이 글쓰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글쓰기란 당장 주린 배를 채워주는 빵보다도 더욱 소중한 것이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에게 작가로서 명성을 안겨 준 첫 작품은 1847년 발표한 《평범한 이야기 Obyknovennaya istoriya》이다. 이 작품을 쓰는 데 3년이 넘는 시간과 노력을 들였으며, 러시아문학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던 비평가 비사리온 벨린스키의 호평을 받아 더욱 유명해졌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평범한 이야기》는 수사학적인 우아한 에피소드들을 통하여 고결하지만 비현실적인 한 이상주의자의 환멸을 보여준다. 그 무렵 젊은이들의 신념이 1830년대의 고결한 이상에서 알렉산드르 2세 치하의 적극적이고 실제적인 진보성으로 변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주인공인 아두에프의 기질은 뒷날 그의 대표작 《오블로모프》의 주인공 오블로모프와 닮은 구석이 많다. 그러므로 《평범한 이야기》는 《오블로모프》의 전신이며 둘은 동일한 범주에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어린 시절부터 곤차로프는 바다를 사랑했고, 항해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푸챠친 장군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의 비서로서 합류하라는 제의가 들어오자 흔쾌히 받아들인다. 전함 팔라다 호는 1852년 10월 7일 페테르부르크를 떠났다. 일본과의 상거래를 트는 임무를 완수한 사절단은 2년여의 항해 뒤에 시베리아를 거쳐 육로로 1855년 2월 25일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평온한 그의 삶에서 이 여행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항해 내내 곤차로프는 빠짐없이 일지를 기록했고, 틈나는 대로 항해 경험을 길게 쓴 편지를 친구들에게 보냈다. 이것을 한데 묶어 1858년 《전함 팔라다 호 Freget Pallada》로 발표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실제 항해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정확하고 사실적인 정경 묘사가 돋보이는 훌륭한 여행기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1855년 12월 곤차로프는 검열관이 되면서 다시 관료 생활을 시작한다. 이 무렵 그는 ‘현대인’이라는 문학 서클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이 모임에는 투르게네프, 안넨코프, 네크라소프, 파나예프 등 이름난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1859년, 지난 10년간 심혈을 기울여 온 《오블로모프 Oblomov》가 드디어 완성되어 발표되었다. 러시아 귀족계급과 자본가계급을 강하게 대조하면서 농노제에 바탕을 둔 생활양식을 비난하고 있다. 《평범한 이야기》보다 주제와 사회적 본질, 심리적 측면에서 더욱 완숙한 작품으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느긋한 몽상가와 민첩한 실리적 인물의 전형을 대조하면서 옛 러시아 귀족주의 전통과 함께 막 발달하기 시작한 자본주의와 산업화가 서로 불안하게 공존하는 당시 러시아 사회상황을 조명하고 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주인공 오블로모프는 관대하지만 우유부단한 귀족청년으로, 박력 있고 실리적인 친구에게 애인을 빼앗긴다. 이러한 뛰어난 인물묘사에서 비롯되어 허무감에 빠지고 무기력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사람들을 일컫는 대명사로 ‘오블로모프시치나(Oblomovshchina, 오블로모프 기질)’라는 말이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1862년 7월 곤차로프는 신문 <북방우편>의 편집장이 되었다. 그러나 신문 편집 일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1년 뒤에 그만두었다. 그 뒤 1863년 출판 관련 위원직을 맡았으나 1868년 작품 활동에 매진하기 위해 그만두었다. 그리고 《오블로모프》와 거의 동시에 쓰기 시작해서 《오블로모프》발표 이후에도 계속 써 왔던 세 번째 소설 《단애(断崖) Obryv》를 20년 만에 완성, 1869년에 발표하였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단애》의 주인공 라이스키는 오블로모프의 가장 가까운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다음 세대의 주인공이자, 잠에서 깨어난 오블로모프다. 그러나 여전히 기지개를 켜고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면서 오블로모프의 요람을 찾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그 뒤 곤차로프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작품을 쓰지 않았다. 《구시대의 하인》과 같은 몇몇 스케치와 《안 하는 것보다는 늦는 것이 낫다》,《백만의 고통》,《벨린스키라는 인물에 대한 단상》등 몇몇 비평만을 남겼다. 그 가운데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의 희곡 <지혜의 슬픔 Gore ot uma>에 관한 평론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힌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1891년 곤차로프는 말년에 쓴 모든 작품, 편지, 단상을 불태워 없앴다. 그리고 자신을 알렉산드르—넵스카야 수도원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1891년 9월 27일(구력 9월 15일) 여든 살의 나이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 덕택에 삶을 깊이 이해하게 되고 인간의 감정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위대한 작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따랐다.</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탄생</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장편소설 《오블로모프》는 1859년 <조국의 기록>에 네 차례로 나뉘어 발표되었고, 곧바로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톨스토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블로모프》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대작 중의 대작이다. 《오블로모프》의 성공은 결코 우연이 아닐 뿐 아니라, 한바탕 소동으로 끝나는 일회적인 것도 아닌 바람직하고 아주 의미심장한 것이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라는 이름은 오래전부터 문학 애호자에게는 친근한 말이 되어 왔다. 그럼에도 그 내용을 완전히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청년 지주 귀족 일리야 일리이치 오블로모프는 페테르부르크 관청 일을 그만두고 시내에서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태만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와는 대조적인 소꿉친구 슈톨츠는 행동적이고 폭 넓게 사업을 하고 있다. 이렇게 정반대인 두 사람이지만 오블로모프는 슈톨츠를 믿음직하게 생각하고 슈톨츠도 오블로모프의 순수한 마음을 소중하게 여긴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가 무위도식하며 파멸해가는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었던 슈톨츠는 젊은 여자 친구 올가에게 그를 도와줄 것을 부탁하고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다. 올가와 오블로모프는 점점 서로 이끌리고 오블로모프의 삶도 크게 바뀌는 듯 하지만, 그는 결국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올가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그의 기억 속에 영원히 잠들고, 마치 고향 오블로모프카로 돌아가는 것처럼 미망인 아가피야의 셋집에 안주한다. 이제 그의 삶에는 아무런 발전도 전진도 없이 그는 젊은 나이에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의 기본 골격은 소설의 주인공 오블로모프의 사랑 이야기다. 언뜻 보기에 소설은 단순하고 어떤 면에서는 쓸데없이 장황하게 보일 수도 있다. 문예비평가 도브롤류보프의 표현을 빌리면 “제1부에서는 오블로모프가 소파에 누워 있고, 제2부에서는 그가 올가와 사랑에 빠지고, 제3부에서는 올가가, 자신이 생각했던 사람이 오블로모프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 서로 헤어지고, 제4부에서는 올가가 슈톨츠와 결혼하고, 오블로모프는 세들어 사는 주인집 여자와 결혼을 한다. 이것이 전부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러나 정작 소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는 달리 풍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고 작가는 예술적 재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이 소설의 전례 없는 성공의 비밀을 말해준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곤차로프의 창작활동은 《평범한 이야기》《오블로모프》《단애》의 세 장편과 세계일주여행을 적은 《전함 팔라다 호》가 전부라고는 하지만 그가 투르게네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대작가라는 것에는 이론(异论)이 없을 것이다. 그가 평생에 걸쳐 발표한 작품은 몇 편 되지 않는데도 그것이 세상 나 올 때마다 러시아문학계에 크나큰 파장을 몰고 왔다. 특히 그의 대표작 《오블로모프》는 러시아 국민성의 한 면을 보편화한 것으로 단지 문학뿐 아니라 러시아 연구를 위해서도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인식되어 있다. 실제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그 중요성에 반하여 소홀히 취급되었던 작품이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이 명작이 현재 독자들에게 냉대를 받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 내용이 단조롭고 따분하다고 전해진 탓이 아닐까 한다. 하기야 오블로모프가 게으른 자의 대명사라는 것은 문학 상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소설 제1편에서의 주인공은 침대에 누워 독자 앞에 나타난 채 거의 거기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사건다운 사건도 없고 줄거리다운 줄거리도 없는 것이 소설 전체의 특색이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러나 《오블로모프》가 세계명작이란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단조로운 주제와 게으른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 아무런 권태감을 느끼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충분한 예술적 만족을 주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곤차로프는 움직임이 없는 무위(无为)의 경식 속에 특수한 정적(静的)인 미를 발견한 독특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농노제가 낳은 ‘쓸모없는 사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 소설은 도브롤류보프의 유명한 논문 <오블로모프 주의란 무엇인가> (1859) 이래 러시아 지식계급의 근본적 약점을 찌른 사회적 폭로 문학으로 일반인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논문으로 도브롤류보프는 오블로모프를 19세기 러시아문학의 대표적인 형상 ‘쓸모없는 사람’의 계보에 올려놓았다. 뿐만 아니라, 구두를 신는 것조차 하인의 손을 빌려야 하는 귀족 지주의 삶이, 오블로모프를 줏대 없고 무기력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선 사회적 전형(典型)으로서의 오블로모프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전형으로서의 오블로모프 또는 오블로모프시치나(오블로모프 기질)라는 말은 이중의 뜻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농노제 바탕 위에 생긴 낡은 러시아 귀족 지주의 대표자로서이고, 둘째는 러시아 국민성에 포함된 어떤 종류의 특질을 구상화한 것으로서이다. 러시아 국민성을 표현하는 전형으로서 ‘카라마조프시치나’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 오블로모프시치나는 결코 러시아 국민성을 나타내는 전형으로서 포괄적인 것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작가 곤차로프도, 오블로모프의 성격 안에는 ‘러시아 사람 약간의 요소적 특질이 들어가 있다’고 자인한 바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 장편의 주인공 오블로모프의 주된 성격은, 병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의지박약, 여기서 생겨나는 나태, 권태, 살아 있는 흥미와 희망의 결여, 생활에 대한 불안, 일체의 변화에 대한 공포이다. 이런 오블로모프의 태만함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그가 마음에 들어 하는 ‘헐렁한 진짜 동양식 가운’이다. 몽상가 오블로모프와는 대조적인 소꿉친구, 슈톨츠는 아버지가 진지하고 강건한 독일인이며 그도 러시아뿐만 아니라 유럽도 자주 오가는 행동파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여기서 우리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이 무렵 러시아의 정체성과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슬라브파(派)’와 ‘서유럽파(派)' 사이에는 논쟁이 왕성했다. 오블로모프의 정체(停滞)와 수동성은 ‘동양’특성으로 보이고, 슈톨츠의 진보와 적극성 등은 ‘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만약 오블로모프가 이러한 부정적인 성격만 갖고 있었다면 그것만으로 주인공이 될 자격은 없었을 것이다. 오블로모프는 다른 면에서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순수하고 감수성 높은 영혼과 선량한 마음의 소유자이다. 결코 사람을 속이거나 상처 입히지 않는다. 친구 슈톨츠의 말을 빌리자면 ‘수정과 같이 투명한 영혼’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의 애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블로모프는 아주 총명한 두뇌를 타고났는데, 다만 그의 지적 능력은 나태에 압도되어 동면 상태에 빠져 있다. 또 그에게는 선에 대한 희망도 있고 일반 복지를 위해 무엇인가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내부 요구도 느끼고 있지만, 이 좋은 성질들이 권태와 무기력 때문에 마비되고 있는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는 사랑스럽게 유머를 섞어가며 생생한 빛을 발하듯 묘사되어 있다. 반대로 슈톨츠는 긍정적인 부분이 많은데도 매력이 없고 평범한 느낌을 준다. 오블로모프와 사랑이 깨진 뒤 슈톨츠와 결혼한 올가는 부족한 것 하나 없는데, 뭔가 따분하다 느낀다. 이는 결국 근대 합리주의가 필요함을 곤차로프 자신이 인정하면서도, 합리주의에 의해 버려지는 부분 속에 인간다움이 있다 말하고 싶은 것 같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는 농노제하의 나태와 비활동성, 침체를 상징하고 있는 뿌리 깊은 러시아 민족의 한 전형으로서 오네긴, 페초린, 루진 등과 같은 ‘잉여인간’이라는 것이다. 즉 오블로모프는 말과 행동, 이상과 실제와의 깊은 모순에 빠져 있다. 그러나 오블로모프에게서 나타나는 잉여인간의 전형적인 콤플렉스는 역설과 논리적 종착역에 다다르고 있다. 그 뒤에는 한 인간의 타락과 파멸이 숨어 있는 것이다. 도브롤류보프의 견해에 따르면, 곤차로프는 자신의 선조 그 누구보다도 오블로모프의 무위의 뿌리를 깊이 간파하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영혼과 평범하지 않은 비판력을 증명하는 최초의 예로, 제1편 제2장에 등장하는 몇몇 삽화적 인물, 그중에서도 특히 미숙한 작가 펜킹과의 대화를 들 수 있다. 인간의 약점과 악덕을 척결하고 비웃는 것을 문학의 사명이라고 믿고, 유행하는 폭로주의를 소리 높여 주창하는 펜킹의 말에 오블로모프는, 그런 종류의 이른바 신문학에는 “보이지 않는 눈물”이 없고, 오직 끊임없는 조잡한 웃음이 있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타락한 사람들을 그리면서도 인간을 잊고 있다고 반발한다. “당신들은 단지 머리만으로 쓰겠다고 하니”하고 그는 외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여러분은 상상을 위해서는 심정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여기나? 천만에. 사상은 사랑에 의해서 살이 붙는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손을 뻗고 그를 안아 일으켜야지. 그렇지 않고 만약 그가 망해간다면 이에 대해서 마음속으로부터의 눈물을 흘려야지 농락해서는 안 된다.”이 말들을 보아도 오블로모프의 문학관이 전문 문사(文士)인 펜킹의 그것보다 훨씬 고매하고 진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러한 오블로모프의 인간애는 자기 영지인 오블로모프카의 농민들에게까지 미친다. 그는 이미 몇 년 동안 영지 개혁 계획에 전념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밤낮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 그러나 그가 사실상 그 개혁에 착수하는 날은 언제 올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계획 그 자체가 언제 완성될지 전혀 전망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영지 개혁은커녕 주거의 이전조차도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행(苦行)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렇게 나태와 무기력이 뼛속까지 침투해 있는 오블로모프도 지적인 소녀 올가와의 사랑에 의해서, 잠시 무위와 권태의 마취에서 깨어나 감격에 찬 활동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들의 연애가 초기 단계를 끝내고 보다 진지한 실천을 요구하는 과정으로 접어들자 오블로모프에게는 사랑 또한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짐이 된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임시로 옮긴 변두리 과부 집에서 발을 뺄 기력도 없이, 요리나 재봉 외에는 어떤 능력도 없는 주부 아가피야의 소박하고 온순한 매력에 끌려 늪에 빠지는 갈대처럼 생애를 끝마치고 만다. 새로운 일, 미래에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고 계속 과거로 돌아가려는 오블로모프의 모습은 상공업 발전으로 급속히 변해가는 러시아에 적응 하지 못한 구세대의 상징이라 볼 수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옛 러시아에의 그리움, ‘오블로모프의 꿈’</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의 생애는 그의 말을 빌리자면 ‘조락(凋落)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그의 나태, 무기력, 무능력의 원인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이 물음에 대답하는 모든 열쇠는 제1편 제9장을 이루고 있는 유명한 ‘오블로모프의 꿈’이리라.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이것은 러시아 변두리에 위치하는, 교통편이 드물고 비옥하며 평범한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이 갖추어진 마을로, 그곳에는 모든 풍습이 태고의 상태를 유지하고 보수주의는 철저하며, 모든 변화는 역병(疫病)처럼 기피되고,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하기라도 하면 일대 사변으로 여겨 공포의 마음으로 이를 맞이한다. 일종의 도원경(桃源境)인 것이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러나 이 도원경은 만민평등의 나라가 아니라 농노제를 바탕으로 하여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농노들도 주인들에게 잔인성이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처지를 조금도 불행하다 여기지 않고 오히려 오블로모프 일가를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영주로 믿고, 스스로 오블로모프카의 농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정도이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결국 불행에 빠진 것은 농노가 아니라 영주 쪽이었다. 자기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도 않고 타인의 노력(劳力)으로 충족한 생활을 향락한 결과 모두가 예외 없이 정신적 불구자, 무능력자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오블로모프는 외아들로 편하게 자란 탓에 독립적인 행동은 모조리 위험하다고 해서 금지되고 교육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해로운 것으로 여겨져 단지 형식을 위해 실시되었다. 때문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평범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파멸해 버린 것이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소설의 구성으로 볼 때, 오블로모프가 자신의 최초의 바람과는 달리 페테르부르크 시내에서 변두리로 점차 밀려나고 있는 점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삶은 반복된다. 시내에 살면서 사라져버렸던 어린 시절, 오블로모프에서의 꿈이 다시 나타난다. 소설의 구성은 대칭적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이상적인 장소, 즉 오블로모프카와 브이보르그 방면 사이에는 가로호바야 거리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진정한 둥지를 찾아 헤매는 임시방편적 잠자리라고 할 수 있고, 또한 끊임없이 꿈을 갈망하는 과도적 정신 상태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즉 이 세 장소는 세 종류의 정신 상태인데, 천국과 잃어버린 천국 그리고 되찾은 천국이 그렇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가 비극의 주인공이 된 가장 큰 원인은 그가 도원경의 주민으로 생애를 보낸 조상들과는 달리 근대적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는 소박한 무자각, 무반성 속에 취생몽사하는 가능성을 빼앗겨, 항상 나태, 의지박약을 부끄럽게 여기고 생활의 갱신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실행으로 옮기는 가능성은 운명에 박탈당한 성격분열자였다. 이 점에서 그는 오네긴을 위시하여 페초린, 루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쓸모없는 인간형의 마지막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저마다 개성의 차이에 의해 표면적으로는 심한 차이를 보여 주지만 그 바탕은 이른바 ‘40년대의 이상주의자’ 임은 변함이 없다. 다만 오블로모프는 그중에서 가장 퇴폐한 사람이었다는 것뿐이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러나 무엇보다 큰 차이는 오블로모프가 단 한 가지 점에서 마지막까지 반성 없이 끝났다는 점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의식하지 않는 농노주의자로, 그의 영지 개혁 계획은, 농노제라는 제도 위에 자신들의 향락과 안일을 확보하려는 것이지 농민의 행복에 관한 배려, 요컨대 자비로운 영주로서의 은혜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어린 시절부터 불행한 농민의 존재를 모르고 지내왔기 때문이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경험으로 생생하게 살아나는 귀족의 삶</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는 순수한 객관적 예술의 전형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정평에 대해 이의를 주장하는 비평가도 적지 않다. 그들은 곤차로프가 이 전형의 창조를 생각해 낸 것은 자신의 체험과 성격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따라서 이 작품에는 주관적 요소가 적지 않게 끼어들어 있다고 말한다. 하기야 그는 상상인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 저택은 광대해서 하인 방, 하녀 방, 몇 개의 마구간, 소 우리, 곡간, 창고, 가금사육장, 목욕탕 등 무수한 부속 건물이 있었고, 소, 말, 상양, 양의 수도 많았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리고 창고, 지하 저장고, 빙실(冰室)에는 가족을 위시하여 수많은 하인들을 위한 갖가지 식료가 비축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그것은 하나의 영지였고 마을이었다’고 곤차로프는 <고향에서>에서 되돌아보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뿐만 아니라 친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그를 위해 양아버지의 자리에 앉은 트레구보프는, 한때 해군에 근무한 적 있는 지주로, 수백 명의 농노를 소유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영지와 교섭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 도시에서 살았던 곤차로프도 오블로모프카의 생활 습관에 입각해서 ‘오블로모프의 꿈’을 그토록 생생한 필치로 자세하게 그려낼 수 있던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또 곤차로프가 어렸을 때의 관찰을 활용했다고 보아도 무방한 것은 이 도시적인 오블로모프카 주민들이다. 양아버지 트레구보프는 자신의 영지 관리를 외눈의 농부 책임자에게 맡겼을 뿐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을 몰랐고, 이따금 그를 방문하여 도시로 나오는 이웃 지주들도 ‘고향에서’ 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침부터 그들은 세 사람이 침대에 누운 채 거기에 커피나 식사를 가져오게 하였다. 정오에는 가벼운 점심을 들고 식후에는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 손님이 찾아와도 거기로 안내되었다’ ‘매우 감수성이 예민했던 나의 뇌리에는 이미 그 무렵부터 그들의 한가한 생활, 무위 등을 보고 있는 동안 막연하나마 ‘오블로모프시치나’에 관한 인상이 잉태된 것으로 여겨진다’고 고백하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것들은 모두 사실임에 틀림없겠지만 작품 속에 약간의 자전적 요소가 끼어들었다고 하는 것은 그 작품이 그만큼 주관적인 것이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만약에 이들 소재가 순수하게 객관적 태도로 처리되었다면 문제는 저절로 소멸되었을 것이다. 또 곤차로프에게는 다소 게으른 성향이 있었다거나, 그가 30년 동안 관리 생활을 한 것은 변화를 싫어한 증거이므로, 오블로모프에는 작가의 모습이 다소 투영되어 있다고 하면서 주관적 요소를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정도의 공통점은 많은 작품에서 손쉽게 지적할 수 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예를 들어 푸시킨이 모차르트와 어떤 공통성을 갖고 있다고 해서, 누가 그의 작은 극시(剧诗)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주관성을 논할 것인가. 오블로모프가 과연 범선으로 세계 일주를 할 수 있을 것인가, 평생 동안 불과 세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토록 방대한 소설을 쓸 수 있었단 말인가?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작가는 오블로모프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본다. 이 모습을 보면 작가가 옛 러시아의 가부장적 사회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느껴진다. 또 오블로모프가 남긴 아이가 슈톨츠와 올가 부부에게 맡겨지는 결말은 앞으로 러시아인이 순수한 정신과 풍부한 상상력, 근면함을 모두 갖추기를 기대하며 오블로모프의 게으르고 정체된 모습은 그 과정이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끝]</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