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르몬또브 (Lermontov/莱蒙托夫) 의 文学 庭园

레르몬또브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문학 批評(連載 2)]</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 「‘오블로모프 주의’란 무엇인가?」</p><p class="ql-block"> Chto takoye “Oblomovshchina”?</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도브롤류보프[러시아]</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Nikolai Aleksandrovich Dobrolyubov,1836.2.5 ~ 1861.11.29.] 러시아의 비평가. 체르니셰프스키와 함께 1860년대의 혁명적 민주주의의 사상적 지도자였다. 노브고로트의 가난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교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했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인생을 위한 예술주의’를 신봉했으며, 재학 시절부터 《현대인》이라는 잡지에 집필하여, 청교도적 사명감에 불타며 문예평론, 사회평론에 정력적인 활약을 하였지만, 불과 25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요절하였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비평이란 문학작품을 깨우쳐 준 현실 그 자체를 규명하는 것을 뜻하며, 현실에 입각하여 그 작품에 보충과 주석을 달아주는 것이 비평가의 임무라고 생각했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의 주요저서로는 《오블로모프 기질이란 무엇인가?: Chto takoye “Oblomovshchina”?》(1859) 《어두운 왕국에 비치는 한 줄기의 빛》(1860) 《오늘이란 날은 언제 오는가?》(1860) 등이 있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반 곤차로프[Goncharov, Ivan] 러시아의 소설가(1812~1891). &lt;평범한 이야기&gt;로 문단에 등장하였으며, 작품에 농노제 폐지의 필연성을 주제로 한 &lt;오블로모프(Oblomov)&gt;가 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독자는 볼 것이다—이 보물은 그의 천성 속에 숨겨져 있고, 다만 그가 결코 그것을 세상의 빛 아래 꺼내 놓지 못했다는 것을. 그보다도 젊은 다른 동료들은 ‘지상을 돌아다니며’,</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위대한 사업을 찾아다닌다.</p><p class="ql-block">부유한 부모의 유산 덕택에</p><p class="ql-block">자잘한 일에서 벗어나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도 젊은 시절에는 ‘러시아에는 마르지 않는 샘을 파기 위한 일손과 지능이 필요하므로, 힘이 있는 동안 일하자.’ 이렇게 공상했다. 사실 지금도 그는 ‘전인류적 슬픔과 관련이 없지 않다. 그 또한 높은 사상과 기쁨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사업을 찾아 지상을 돌아다니지는 않았다고 해도, 세계적 행위에 대해 공상하고, 업신여기는 마음으로 잡역부를 바라보며, 열의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아니, 나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매달리는 일에</p><p class="ql-block">나의 영혼을 공허하게 소비하고 싶지는 않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결코 다른 모든 오블로모프 주의자보다 더 나태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 다만 더 많이 솔직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무위를 감추기 위해 사교계에 나가 사람들과 대화하고, 네프스키 거리를 산책하는 일마저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블로모프가 우리에게 주는 인상과 앞에 서술한 주인공들이 우리에게 주는 인상이 이렇게도 다른 것은 왜일까? 앞에 다룬 주인공들은 종류는 달라도 모두 불리한 환경에 의해 억눌린 강한 성격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오블로모프는—가장 유복한 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블로모프의 기질은 너무나 활발하지 않다. 그런 연유로 그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거나 적대적인 환경에 저항할 필요가 있을 때, 다혈질인 오네긴이나 참을성과 의지가 강하지만 거만한 페초린보다도 노력을 기울이는 방법이 약간 적은 것은 당연하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본질에 있어서 그들은 적대적인 상황의 힘 앞에서는 동일하게 무력하고, 현실적이고 성실한 행위에 직면한 경우에는 한결같이 쓸모없는 존재로 변해 버린다. 오블로모프의 환경이 그가 행동하기에 좋은 무대를 제공하고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스스로 경영할 수 있는 소유지가 있다. 그를 실제적인 행동으로 인도하려 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보다 성격도 강하고, 사물을 보는 방식도 명료하며 그를 깊이 사랑한 여성이 있었다. 그러나 오블로모프 주의자들 가운데 이 모든 것을 가지지 않은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그리고 그들 모두가 이것들로부터 어떠한 결과를 끌어냈을까?</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오네긴과 첸체트니코프도 자신의 소유지를 마음대로 관리한 적이 있다. 그리고 처음 농부들은 첸체트니코프에 대해 ‘워매, 엄청 똑똑한 주인님이구먼!’이라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곧 농부들은 주인이 처음에는 영민했으나 실은 아무것도 모르며, 유익한 일은 무엇 하나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렇다면 우정에 있어서는 어떤가? 그들 모두는 친구에게 어떤 행동을 하고 있었을까? 오네긴은 렌스키를 죽였다. 페초린은 베르네르와 서로 빈정대는 말만 주고받을 뿐이다. 루딘은 레지뇨프와 멀어져 버렸다. 그리고 포코루스키의 우정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 각자는 인생 속에서 포코루스키와 같은 사람을 몇 명 만나지 않았던 것일까?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한 가지 공동의 일을 위해 서로 손을 잡은 것일까? 적대적인 상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굳건한 동맹을 맺은 것일까? 그런 일은 없었다······. 모든 것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모든 일은 똑같은 오블로모프 주의에 의해 처리되었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연애 또한 말할 것도 없다. 오블로모프 주의자는 모두 자신보다 수준높은 여자를 만났다(크루치펠스카야 부인은 베리토프보다 높았고, 공작의 딸 메리도 페초린보다는 높았으므로). 그리고 모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상대의 애정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상대가 자신을 차 버리게 만들었다······. 이는 피해야만 하는 오블로모프 주의의 압박 때문이라는 것 외에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기질의 차이 외에, 오블로모프와 다른 주인공 사이에는 연대 자체도 커다란 차이가 있다. 나이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그들은 거의 같은 연배이다. 루딘마저 오블로모프보다 두세 살 연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출현한 시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블로모프는 가장 늦은 시대에 속한다. 따라서 그는 젊은 세대가 본다면, 또는 현대 생활에서 본다면, 지금까지의 오블로모프 주의자보다 상당히 나이들어 보일 것이 분명하다. 그는 열 일고여덟 살 때 대학에서, 서른다섯 살의 루딘을 고무시킨 것과 같은 지향을 느끼고, 같은 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이 대학 과정을 마친 뒤, 그에게는 단 두개의 길이 펼쳐져 있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즉 행동—말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과 손을 동시에 움직이는 현실적인 행동을 하거나, 팔짱을 끼고 드러누워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무관심한 성격 탓에 오블로모프는 두 번째 길을 골랐다. 이는 피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거기에는 거짓이나 눈속임은 없었다. 혹시 그가 오늘은 그저 공상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형제들이 했던 것처럼 소리높여 말하기 시작했다면, 그는 소유지 관리인에게서 편지를 받았을 때나 집 주인으로부터 퇴거를 요구받았을 때에 느낀 것과 같은 번거로움을 매일같이 느껴야만 했을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본래 사람은 무언가의 필요성이라거나, 높은 지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내용 없는 웅변가의 말에 애정과 깊은 존경심을 가지며 귀를 기울였다. 그 때 같았다면 오블로모프도 타인과 이야기할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사람들은 모든 공론가와 몽상가를 향해 ‘그럼 해 보는 게 어때요?’하고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제 오블로모프 주의자의 힘이 미치지 않는 일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확실히—오블로모프를 전부 읽고, 무엇이 이러한 유형을 문학 속에서 불러일으켰는가에 대해 생각할 때, 새로운 생활의 숨결이 느껴질 것이다. 이것을 작가 개인의 재능 및 그 넓은 견해에만 돌려서는 안 된다. 재능의 힘과 매우 폭넓은 인간적인 견해와 함께, 우리는 이것을 앞에 인용한 종래의 모든 유형을 창조한 작가들의 경우에도 찾아낼 수 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유형 중 최초인 오네긴이 나타난 뒤 오늘까지 이미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다. 그때는 막 싹이 트기 시작했을 뿐으로, 속삭이는 목소리와 정확하지 않은 몇 마디 말로 표현되었을 뿐인 것도 지금은 이미 일정하고 확실한 형태를 가지고 공공연히, 그리고 큰 목소리로 이야기되고 있다. 언어는 그 의의를 잃고, 사회 그 자체 속에 현실적 행동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베리토프와 루딘은 실제로 높고 더럽혀지지 않은 지향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자신들을 억누르려는 환경과의 목숨을 건 무서운 싸움의 필연성을 철저히 자각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싸움의 일상적인 가능성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말하자면 그들은 무성히 우거진 낯선 숲 속에 들어가 발이 빠지는 위험한 늪지대를 걷다가, 발밑에서 각종 파충류와 뱀을 보고 나무 위에 기어올라간것과 같다—그것은 주변을 둘러보고 어딘가 있을 길을 찾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휴식과 동시에 늪지대에 빠지거나 뱀에 물릴 위험으로부터 아주 잠시라도 벗어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의 뒤를 따라갔던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선구자를 보는 듯이 존경심을 가지고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구자는 그들이 기어올라간 높은 곳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숲은 너무나도 넓은 데다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들은 나무에 오를 때 얼굴을 긁히고, 다리는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며, 손까지 다쳤다. 그들은 고통스러워하고 또한 지쳐 있다. 그들은 나무 위에 최대한 편안한 발판을 만들어 쉬지 않으면 안 된다. 확실히 그들은 일반의 이익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아래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도움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나무를 베어 쓰러뜨려, 숲 속에 길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일반의 이익을 생각하며 가까스로 나무 위에 오른, 이 불행한 사람들을 그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그를 향해 돌을 던질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은 그를 동정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그에게 숲에 길을 여는데 참가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에게는 다른 일이 주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한 것이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도 해도—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지금까지 작가들은 모두 스스로 오블로모프적 주인공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은 옳았다. 게다가 이 여행자들은 모두 숲에서부터 도로로 나가는 출구가 어딘가에서 발견되겠지 하는 기대를 오랫동안 지녀 왔고, 그와 동시에 나무 위에 기어오른 선구자의 달견에 대한 신뢰도 오랫동안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사태는 조금씩 명백해져서 다른 방향을 더듬어 갔다. 선구자는 나무 위가 마음에 들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그는 늪과 숲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여러 가지 길이나 방법에 대해 뛰어난 웅변술로 의견을 펼친다. 그는 나무 위에서 무언가 열매를 발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것을 맛보면서, 껍질을 지상에 내던진다. 그는 군중 속에서 선택받은 몇 명을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부른다. 이러한 자들은 무리에서 빠져나와 나무 위에 머무른다. 그리고 더 이상 길을 찾지도 않고, 나무열매를 걸신들린 듯 먹고만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는 거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오블로모프들이다······. 그러나 나무 밑에 서 있는 가련한 여행자들은 늪에 빠지고, 뱀에 물리며, 파충류를 보고 놀라고, 나뭇가지에 얼굴을 얻어맞는다······. 마침내 군중은 일을 시작하기로 결정하고 나중에 나무에 올라간 사람들을 불러 보지만, 오블로모프들은 잠자코 나무열매만 먹어대고 있다. 그래서 군중은 원래의 선구자들에게 땅 위로 내려와서 공동의 일에 협력해 줄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선구자는 길을 찾는 일이 필요할 뿐 숲을 베어 길을 내려 고생할 필요가 없다며, 처음에 늘어놓았던 불평불만을 되풀이한다. 그러자 가련한 여행자들은 자신의 착각을 깨닫고 한 손을 내저으며 말한다 — ‘아아, 역시 당신들은 모두 오블로모프야!’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활기찬 노동이 시작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사람들은 나무를 잘라 늪 위에 다리를 놓고, 오솔길을 열고, 거기에 나타나는 뱀이나 파충류를 죽이는 동안, 이윽고 그 현명한 사람, 그 강한 성격을 지닌 사람, 원래 그들이 기대를 걸고 마음을 빼앗겼던 페초린과 루딘 같은 자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게 된다. 오블로모프 주의자들은 처음에는 조용히 이 공동 작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뒤, 평소의 습관대로 겁에 질려 외치기 시작한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아, 아, 그만둬. 그대로 내버려 둬—라고 그들은 자신이 올라 있는 나무가 베어져 넘어가는 것을 보고 소리친다—부탁이야, 우리가 죽을지도 모르잖아. 우리가 죽으면 우리가 줄곧 품어왔던 아름다운 사상도, 고결한 감정도, 인간적인 지향도, 웅변도, 열정도, 뛰어나고 고결한 모든 것에 대한 애정도 다 함께 사라져 버린다고. 그대로 내버려 둬,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너희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모든 여행자들은 이런 입에 발린 말은 이미 천 번도 넘게 들었으므로,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일을 계속한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 주의자들에게는 아직도 자신과 자신의 명성을 구할 길이 남아있다. 나무에서 내려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처럼 망설이며,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모른다. ‘대체 왜 갑자기 이런 상황이 된 거지?’ 그들은 절망 속에서 되풀이한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잃은 군중을 향해 무익한 저주의 말을 퍼붓는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러나 군중이 옳지 않은가. 만약 군중이 현실적인 일의 필요성을 의식했다면, 그들 앞에 있는 것이 페초린이건 오네긴이건, 그것은 이미 그들과 전혀 상관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페초린도 오블로모프와 똑같이 행동하기 시작할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같은 상황 속에서 다른 방향을 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능이 뛰어난 작가가 창조한 유형은 긴 생명을 지닌다. 마치 오네긴, 페초린, 루딘을 본뜬 듯한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게다가 그들은 다른 사정 속에서 당연히 성장할 수 있었던 모습이 아니라, 그야말로 푸시킨, 레르몬토프, 투르게네프가 제시한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다만 사회적 의식이라는 면에서만 관찰하면, 그들은 모두 점점 오블로모프로 변해 가고 있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이 변화가 이미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아직 오늘날에도 수천의 사람들이 대화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또한 다른 수천의 사람들은 대화를 일로 간주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것을 곤차로프가 창조한 오블로모프의 유형이 증명하고 있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예전부터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잡아끌었던, 이런 어중간한 재능을 가진 성격이 전부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가에 대한 의식이, 비록 사회 어느 한 부분에서나마 성숙하지 않았다면, 오블로모프 유형의 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원래 그들은 여러 가지 망토를 걸치거나, 다양한 머리 형태로 자신을 꾸미고, 갖가지 재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지금 오블로모프는 아름다운 단상 위에서 푹신한 소파 위로 끌려내려와, 망토 대신 헐렁한 실내복을 입고 아무 말 없이 우리 앞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의 생활의 의미와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은 솔직하고 확실하게 제기되어, 어떠한 부차적인 질문에도 헛갈리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인 일의 시기가 이미 도래했거나 또는 눈앞에 닥쳐와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우리가 곤차로프의 소설 속에서 시대의 상징을 본다고 말한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과거에 진정한 사회적 일꾼이라고 생각한, 교양 있고 사고력도 풍부한 게으름뱅이들에 대한 평가의 관점이 얼마나 변했는지 독자는 주의해야 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지금 당신 앞에는 매우 아름답고 민첩하며 또 교양 있는 한 청년이 있다. 그는 상류사회에 나가 성공을 거둔다. 그는 극장과 무도회, 가장무도회에 참석한다. 그의 옷차림이나 식사예절은 근사하다. 그는 독서를 하고 매우 정확한 문장을 쓴다. 그의 마음은 사교계에서 그날 그날 일어나는 일에만 움직이지만, 고상한 질문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정열에 대해</p><p class="ql-block">영원한 편견에 대해</p><p class="ql-block">사후세계의 슬픈 비밀에 대해</p><p class="ql-block">토론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몇 가지 </p><p class="ql-block">청렴결백한 규칙을 가지고 있어,</p><p class="ql-block">예부터 내려온 부역의 의무를 </p><p class="ql-block">가벼운 인두세로 바꾸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또한 가끔은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소녀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을 이용해서 속이거나 하지 않는다. 사교계에서 자신의 성공을 특별히 중시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상류사회의 공허함을 의식하게 된 것 만으로 이 사회보다는 높은 위치를 지닌다. 그는 사교계를 버리고 시골에 내려갈 수도 있다. 물론 시골에 살더라도, 자신이 어떤 일을 발견하면 좋을지 몰라 지루해 하겠지만······.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서 그는 친구와 다투다가 경솔하게도 결투에서 그 친구를 살해한다······. 몇 년이 지나 그는 다시 사교계로 돌아간다. 그리고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는 예전에 그녀를 위해 자신의 방랑자적 지유를 버려야만 한다는 것이 두려워 그 사랑을 스스로 거부한 적이 있다······. 당신은 이 사람이 오네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잘 보면, 그는—오블로모프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독자 앞에는 더욱 정열적인 영혼과 더욱 높은 자존심을 가진 또 다른 인간이 있다. 그는 오네긴에게 있어서 다양한 배려의 대상인 모든 것을, 마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는 화장이나 몸치장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사교계 사람이다. 그는 단어를 선택하거나, 얕은 지식을 자랑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그의 말은 면도날처럼 예리하다. 그는 사람들의 약점을 잘 이해하고, 실제로 사람들을 얕보고 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실제로 마음을 짧은 순간이 아니라 오랫동안, 종종 영원히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나아가는 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밀어내거나 없애버릴 수 있다. 단 한 가지 불행은 그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의 마음은 텅 비어 있으며, 모든 것에 대해 차갑게 식어 있다. 그는 모든 것을 경험하고, 젊은 나이에 이미 금전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쾌락을 혐오한다. 아름다운 사교계 여자들의 애정도, 그것이 그의 마음에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았기에 그에게 있어서는 지겹기만 하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학문에도 질렸다. 이는 그가 명예도 행복도 학문과는 아무 관계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란—무지한 사람을 말하며, 행복이란 성공을 가리킨다. 군사상의 모험도 곧 그를 지루하게 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속에서 아무 의미도 인정하지 못하고 곧 그것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 자신도 마음에 들어 했던 미개인 소녀 한 명의 성실하고 티없는 애정조차 그를 지루하게 한다. 그는 이 소녀 안에도 격정의 만족을 발견하지 못한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이 격정이란 애초에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를 향해 그를 데려가는 것일까? 왜 그는 자신의 영혼이 가진 모든 힘을 가지고 그것에 몸을 던지지 않는 것일까? 왜냐하면 그 스스로 격정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신의 정신력이 향할 곳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어리석은 자들을 비웃고, 세상물정 모르는 귀족 아가씨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거나,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고, 화를 돋우고, 별 거 아닌 일에 막무가내로 행동하거나, 필요없이 다툼을 벌이면서 자신의 생활을 보내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독자는 이것이 페초린의 역사라는 것, 때로는 그 자신이 이 대부분의 단어를 그대로 이용해서 막심 막시무이치에게 자신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떠올릴 것이다······.</p><p class="ql-block">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면, 독자는 여기서도 똑같이 오블로모프를 발견할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여기에 자신의 길을 좀 더 의식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에게 많은 힘이 주어져 있음을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에게는 커다란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욱이 이 목적이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품위 있고 정직하다(빌린 돈을 갚지 않은 적도 종종 있기는 하지만). 그는 쓸데없는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고상한 문제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토론한다. 인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용의가 있다고 단언한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것이 생생하고 짜임새 있는 연결고리 속에 정돈되어 있다. 그는 그 강력한 언어로 세상물정 모르는 청년들을 끌어당긴다. 그런 이유로 그의 말을 듣고, 그들 또한 자신이 무언가 위대한 것에 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그의 생활은 어떤 것 속을 지나갈까? 그는 모든 일을 시작하지만 끝마치지는 않는다. 모든 방면에 손을 뻗쳐, 모든 일에 탐욕스럽게 몰두하려고 한다. 그리고—끝까지 몰두하지 못한다······. 그는 한 소녀를 사랑한다. 그 소녀는 어머니의 만류도 듣지 않고, 그의 것이 될 생각이라는 것을 기어이 그에게 고백하지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오오! 그렇다면 당신의 어머니는 반대하시는 거군요! 정말 뜻밖의 충격입니다! 오오! 이렇게 빨리······. 할 수 없군요 — 따르는 수밖에’ ······. 바로 여기에 그의 모든 생활의 축약판이 있다. 당신은 이미 이것이 루딘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 지금은 이 또한 오블로모프이다. 이 인물을 잘 관찰하여 현대 생활이 요구하는것 앞에 대신 놓아 보면—스스로 이를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이 모든 사람의 공통점은, 그들에게 있어 생활상의 필요물이며, 마음으로부터 신성한 것도 되며, 종교도 되는 ‘일’, 그들의 육체와 유기적으로 이어져 성장하고, 이를 없애는 것은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 그들의 생활 속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외면적이며, 그 무엇도 그들의 천성 속에 뿌리내리고 있지 않다. 그들 또한 오블로모프가 슈톨츠의 손에 이끌려 손님을 만나러 나가고, 올가를 위해 악보나 책을 사고, 그녀가 읽으라 한 책을 읽었던 거처럼, 외부로부터의 요구가 있으면, 무언가 이런 일을 할 것이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우연이 그들에게 부여한 일에 적합하지 않다. 혹시 그들이 노동을 통해 얻는 모든 외면적 이익이 그들에게 무상 제공된다면 그들은 기꺼이 자신의 일을 집어치울 것이다. 오블로모프 주의 때문에, 오블로모프적 관리는 혹여 일을 하러 나가지 않더라도 봉급을 받고 승진할 수 있다면, 일하러 나가기를 그만 둘 것이다. 군인 또한 지금과 동일한 조건이 주어지고, 어떤 경우에는 크게 도움이 되는 저 아름다운 군복을 입는 것이 허락된다면, 당장 무기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맹세할 것이다. 교수는 강의를 그만두고, 학생은 배우기를 그만두고, 작가는 글쓰기를 그만두고, 배우는 무대에 오르길 그만둘 것이다. 또한 미술가는, 지금 노력으로 얻는 모든 것이 무상으로 주어진다면, 격조 높은 말을 읊으며 조각칼과 팔레트를 부수어 버릴 것이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들은 그저 높은 지향과, 도덕적 의무의 의식과, 공통 관심의 침투에 대해 논하기만 한다. 그러나 잘 검토해 보면, 이 모두는—첫째도 말, 둘째도 말이다. 그들의 가장 솔직한 마음 속 깊은 곳에서의 욕구는 안정에 대한, 실내복에 대한 욕구이다. 그들의 행동 자체는 그들이 자신의 공허함과 무관심을 갖추기 위해 이용하는, 명예로운 실내복(이 표현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일 뿐이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극히 교양 높은 사람들, 그것도 생동감 넘치는 천성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마저, 실생활에서는 자신의 의견과 계획을 매우 쉽게 버린다. 주변의 현실과 지극히 신속하게 타협한다. 그러나 말로는, 이 현실을 천박하고 추악한 것으로 간주하길 그만두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의 말과 공상하는 모든 것이—그들에게는 남의 일이며, 빌린 것임을 의미한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같은 공상, 같은 이상이 뿌리내리고 있다—즉 가능한 한 흔들리지 않는 안정, 정적주의, 오블로모프 주의이다. 많은 이들은 인간이 기꺼이 열중해서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어느 새 상상조차 할 수 게 되었다. 혹시라도 부의 평등한 분배가 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자극을 개개의 인간으로부터 빼앗아 버릴 경우에는 모든 인간은 무위 때문에 굶어 죽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경제안내’지에 실린 논문들을 통독하면 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확실히 모든 오블로모프 주의자들은 머릿속에 주입된 모든 원칙이 자신의 피와 살이 되도록 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결코 그것을 최종적인 결론까지 이끌어가려 하지 않았다. 또 말이 행위가 되고, 원칙이 영혼의 요구에 녹아들어 영혼 속에 소화되고, 인간을 움직이는 단 하나의 힘이 되는 한계까지 다다르는 일은 없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끊임없이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자기 행위에 대한 개개의 사실에 대해 이처럼 무력한 것이다. 또한 그런 까닭에 그들에게는 추상적 견해가 살아있는 사실보다 소중하고, 일반적 원리가 생활 상의 단순한 진실보다 중요하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들이 유익한 책을 읽는 것은 거기에 무엇이 쓰여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이며, 고상한 문장을 쓰는 것은 자신이 하는 말의 논리적 구성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또한 대담한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은 자신의 미사여구 중 듣기 좋은 부분을 들려주어 상대로부터 칭찬받기 위해서이다.그러나 그 이상의 것, 즉 이 모든 독서, 저술, 변론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해서—그들은 완벽하게 알고 싶어하지 않거나, 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당신에게 이야기해 왔다—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알 바 아닙니다······ 라고.​​</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는 이로 인해 대중을 속여넘길 수도 있었다. ‘우리는 그래도 이처럼 걱정하고, 돌아다니며, 말하고, 얘기하지 않는가’ 하고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다. 루딘과 같은 사람들이 사회에서 쟁취한 성공은 여기에 기반을 둔 것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 뿐만이 아니다—술, 연애, 사치, 과장 된 행위에 관해—’우리는 더 큰 행동의 자유가 없으므로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도 있었다. 그 때는 페초린도, 또 오네긴마저도, 태어나면서부터 한없는 영혼의 힘을 가진 인간으로 보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 이 모든 주인공들은 뒤로 물러나 지금까지의 의의를 잃고, 더 이상 그 불가해함으로, 또 그들과 사회의, 그들의 커다란 힘과 행위의 신비한 부조화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지는 않는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제 수수께끼는 풀렸다.거기에 딱 들어맞는 말을 발견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 말은 바로—오블로모프 주의이다.만일 오늘 내가 인류의 권리와 개성 발달의 필요에 대해 토론하는 지주를 본다면—나는 그가 처음 뱉은 몇 마디 말로 그가 오블로모프임을 알 수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혹시 사무의 혼란이나 과중한 부담에 대해 괴로움을 토로하는 관리가 있다면, 그는—오블로모프이다.또 내가 사관 한 사람으로부터 지루한 열병식에 대한 괴로움이나 조용한 보조의 무의미함에 대한 대담한 발언을 듣는다면, 나는 그가 오블로모프임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내가 잡지 속에서 권리의 남용에 대한 자유주의적 반대론이나, 우리가 오랫동안 기대하고 희망해 왔던 일이 드디어 실행된 것에 대한 기쁨을 쓴 글을 읽었을 경우—나는 이 모든 것이 오블로모프카 마을에서 쓴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인류의 곤궁에 진심으로 동정하고, 뇌물수수자나 압박과 모든 종류의 불법행위에 대해 언제나 똑같은(그러나 때로는 새로운) 여담을 오랫동안, 한결같은 열의를 가지고 계속 이야기하는 교양있는 사람의 그룹 속에 내가 놓여 있다면—나는 자신이 오래된 오블로모프카 마을에 끌려온 것이라고 나도 모르게 느낄 것이다.이런 사람들의 시끄러운 수다를 틀어막고, ‘당신들은 이러이러한 일들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모를 것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들에게 가장 간단한 방법을 제안하면—그들은 ‘어째서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된 거지?’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반드시 그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오블로모프들에게는 그 외에 다른 대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과 대화를 이어가며 ‘당신들은 원래 무엇을 할 생각이었나?’하고 물어보면—그들은 루딘이 나탈리아에게 한 것과 똑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즉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론 운명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얼마나 힘들고, 괴롭고, 참기 힘든 것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따위의 대답이다. 그들로부터 그 이상의 대답은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에게는 오블로모프 주의의 작인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고골리가 그렇게도 몽상하던, 또 러시아가 그토록 오래 기다려 왔던 이 전능한 한 마디, 곧 ‘앞으로!’란 이 한 마디에 의해 마침내 그 사람들을 그 장소에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지금까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회 속에서도 문학 속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곤차로프는 우리의 오블로모프 주의를 이해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는 있었지만, 지금까지 이 나라의 사회에 이토록 뿌리깊게 널리 퍼진 일반적인 미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블로모프 주의를 무덤으로 보내고, 이를 찬양하는 애도사를 늘어놓고자 마음먹었다. ‘안녕, 오랜된 오블로모프카 마을이여, 너의 시대는 이미 지나 버렸다’ 그는 슈톨츠의 입을 빌려 그렇게 말하며 거짓을 고한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를 통독했거나, 지금 통독하고 있는 모든 러시아 사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블로모프카 마을은 우리의 직접적인 고향이며, 그 지주들은—우리의 양육자이고, 그곳에 있는 삼백 명의 자하르는 항상 우리에게 봉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우리 모두의 안에는 오블로모프적 요소가 다분히 숨겨져 있다. 우리를 위해 애도사를 쓰기는 아직 빠르다. 일리야 일리이치를 포함한 우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할 까닭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의 안에는 모든 지력보다도 고귀한 것, 즉, 더럽혀지지 않은 성실한 마음이 있었다. 이는 말하자면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황금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이를 망가뜨리지 않고 지녀 왔다. 그는 충격으로 쓰러지고, 무감각 해졌으며, 살아갈 힘을 잃고, 마침내 죽은 듯이 변해 환멸하고 잠들어 버렸지만, 청렴결백함과 성실함은 잃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는 거짓의 징조라곤 하나도 없었다. 진창이 들러붙는 일도 없었다. 아무리 화려한 거짓도 그를 유혹할 수 없고, 그 무엇도 그를 그릇된 길로 인도할 수 없다. 오물이나 사악의 깊고 넓은 바다가 그의 주변에서 파도쳐도, 전 세계가 미친 듯 거꾸로 돌아가도—오블로모프는 결코 거짓 우상 앞에 무릎 꿇지 않을 것이다. 그의 영혼은 항상 맑고, 밝으며, 또한 성실할 것이다······. 이는 투명한, 티끌 없는 영혼이다. 그러한 사람은 많지 않다. 이는 군중 속의 진주이다! 그의 마음은 무엇에도 매수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그는 신뢰할 수 있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우리는 이 부분을 너무 크게 확장시킬 생각은 없다. 그러나 독자들은 거기에 커다란 거짓이 내포되어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오블로모프 안에는 단 한가지 실제적인 장점이 있다. 그가 타인을 속이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성격적으로—게으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점에서 그를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점에서인가? 이 부분에서 그는 확실히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가 없어도 가능한 일이다. 그는 사악한 우상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는 어째서인가? 왜냐하면 그에게는 긴의자에서 일어나는 일이 귀찮기 때문이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만약 그를 끌어내려 이 우상 앞에 무릎 꿇린다면, 그는 이번에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무엇으로도 그를 매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그를 매수하는가? 그를 그 장소에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진창이 그에게 들러붙는 일은 없다! 실로 그가 혼자 드러누워 있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날 리 없다. 그러나 타란체프나 자초르투이, 이반 마토비치가 찾아오면—곤란해진다! 오블로모프를 둘러싸고 얼마나 가증스럽고 꼴보기 싫은 장면이 펼쳐질 것인가.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들은 그의 집에 빌붙어 살거나, 그의 돈으로 실컷 술을 마시거나, 또 그를 취하게 하기도 하고, 그에게서 가짜 어음을 받아내거나 한다(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슈톨츠가 어느 정도 무례하게, 러시아식 습관에 따라, 재판도 심리도 없이 그를 구해 준다). 그들은 또한 농부들을 구실삼아 그를 몰락시키고, 정당한 이유 하나 없이 그에게서 거금을 뜯어낸다. 그는 이 모든 일을 묵묵히 참아내고 있다. 그런 이유로 또 물론 거짓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아니, 살아 있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은 칭찬의 애도사를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살아 있으며, 우리는 여전히 오블로모프이다. 오블로모프 주의는 결코 우리를 버린 적이 없었고, 지금도—현재 이 순간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 이 나라의 문학자, 평론가, 교양있는 사람들, 사회적 활동가 가운데 곤차로프가 일리야 일리이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을 읽고, 이것은 분명 나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 또한 높은 사고의 행복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전인류적인 슬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도 때로는 인류의 불행을 슬퍼하며 마음속 깊이 씁쓸한 눈물을 흘렸다. 뚜렷하지 않은, 말 못할 고통과 애수, 그리고 또 어딘가 멀리, 아마 일찍이 슈톨츠가 그를 데려가려 했던 세계에 대한 동경을 느낄 때가 있었다. 달콤한 눈물이 그의 두 뺨에 흘러내렸다. 그는 또한 인간의 악덕, 거짓, 비난, 세계를 떠도는 죄악 등에 대한 멸시의 생각에 마음을 만족시키거나, 남에게 그 사람의 흉한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하는 희망에 불*타오르는 일도 있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리고 불현듯 그의 마음에 사상이 불타올라, 바다의 파도처럼 머릿속에 떠돌아다닌 끝에, 갖가지 의지로까지 성장하여, 그의 온몸을 피 끓게 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의 근육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혈관은 팽팽해지고, 의지는 갈망으로 바뀌려 하고 있다. 그는 정신적인 힘에 움직여져서, 잠시 동안 급히 두세 번 자세를 바꾸고, 눈을 빛내며 침대 위에서 반쯤 몸을 일으켜 한 손을 내밀고 감동한 듯이 주변을 돌아본다. 이에 갈망은 실현되어, 위대한 행동으로 변할 것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때, 오! 그 고상한 노력으로부터 어떤 기적과 어떤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어느 새 밝은 아침이 사라지고, 점심은 이미 저녁으로 기울어진다. 오블로모프의 힘도 약해져, 저녁 노을과 함께 잔잔하게 스러진다. 태풍이나 파도는 마음속에서 가라앉고, 머리는 사고의 흥분으로부터 깨어나며, 피는 점차 천천히 혈관 속을 흘러간다. 오블로모프는 조용히,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누워, 슬픈 눈길을 창 너머의 하늘에 향해, 누군가의 4층짜리 집 너머로 엄숙히 저물어 가는 태양을 애수를 띠고 배웅하는 것이다. 그는 몇 번이나 이런 식으로 일몰을 배웅한 것일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교양 있고 고상한 사색을 하는 독자여, 이것이 당신의 좋은 지향과 유익한 행위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아닌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는 그저 당신의 발달 정도가 어떠한 단계까지 다다라 있는가 하는 것뿐이다. 일리야 일리이치는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켜 한 손을 내밀고 주변을 돌아보는 정도까지 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해도 그 정도 수준까지 다다르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그저 사상이 파도처럼 머릿속을 떠돌 뿐이다(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다른 사람의 경우 사상은 의향으로까지 성장하지만, 욕구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다(이런 사람은 비교적 적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욕구가 나타나는 일도 있다(이런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래서 모든 문학이, 베네딕토프의 표현에 의하면,······우리 육체의 시련산문과 시로 쓰여진 고민—</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것을 대표하고 있는 현대의 경향에 따라, 우리는 곤차로프가 앞에서 오블로모프에 대해 칭찬한 말이 우리의 자존심에 아무리 기분 좋은 것일지라도, 이러한 칭한의 말을 공정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을 어른스럽게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오블로모프는 페초린과 루딘만큼 생기 있고, 젊고, 활동적인 인간을 화나게 하지는 않지만, 역시 그 무가치함에 있어서 미워할 만한 존재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곤차로프는 또한 오블로모프의 해독제라고도 할 수 있는 슈톨츠를 등장시켰다. 그러나 이 인물과 관련해서, 우리는 문학이 생활로부터 너무 멀리 앞서나갈 수는 없다는 우리의 지론을 여기서 다시 한 번 되풀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사상이 즉시 욕구가 되고 행위로 이행되는, 완전하고 활동적인 성격을 가진 슈톨츠와 같은 사람은 이 나라의 사회 생활 속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는 높은 욕구를 이해할 수 있는, 교양있는 사회에 대해 말하고 있다. 대중 속에서는 사고와 욕구가 극히 근접한 관계를 가지고 몇몇 대상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그런 사람들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작가 자신도 이것을 의식하고, 이 나라 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눈은 겉잠에서 깨어나고, 힘차게 성큼성큼 걷는 발소리와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p><p class="ql-block">러시아식 이름을 가진 수많은 슈톨츠가 나타날 것이 틀림없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들은 수없이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들이 출현할 가능성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곤차로프의 소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슈톨츠가—활동적인 인간이며, 언제나 무언가에 대해 배려하며 뛰어다니고, 무언가를 획득하고,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은—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인간이라는 것 뿐이다. 그래도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다른 사람들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가 뭔가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을 생각해 낼지—이것은 우리에게 비밀로 남겨져 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일리야 일리이치를 위해 오블로모프카 마을의 경영을 눈 깜짝할 새에 되살려놓는다—하지만 어떻게 해서?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일리야 일리이치의 가짜 어음을 금방 파기해 준다—어떻게 해서? 이것은 우리도 알고 있다, 그는 오블로모프에게서 어음을 받은 이반 마토비치의 상관을 찾아가서, 그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다—이반 마토비치는 그 자리에 불려가 어음을 돌려주도록 명령받을 뿐만 아니라, 해임을 통보받기까지 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는 물론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판단하건대, 슈톨츠는 아직 러시아의 사회적 활동가로서의 이상에는 도달해 있지 않다. 확실히 아직 거기까지 도달하기는 어렵다.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니다. 지금 상황에서 사람은, 아무리 현명하더라도 무언가 제대로 된 사회적 사업을 하려고 할 경우, 천만 루블의 재산으로 수많은 선행을 베푸는 선행가인 전매인 무라조프, 또는 고결한 지주 코스탄조그로에게 배울 수 있을 정도로—그들보다 앞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리고 우리는 슈톨츠가 자신의 행위 위에서, 오블로모프마저 사로잡은 모든 지향과 요구 앞에서 어떻게 평정을 유지하고 있을 수 있었는지, 왜 자신의 입장에 만족할 수 있었는지, 또 고독하고 격리된 자신만의 행복 위에서 어떻게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않는다······. 그의 발치에는 늪이 있는 것, 그의 가까이에는 오래된 오블로모프카 마을이 있는 것, 넓은 길에 나가 오블로모프 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직 숲을 개간할 필요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슈톨츠가 무엇을 했는지, 어떤 식으로 했는지—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 없이 우리는 이 인물에 대해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말만을 할 수 있다. 즉 ‘러시아인이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우리에게 ‘앞으로!’ 란 이 전능한 한 마디를 할 수 있는’ 인간은 그가 아니라고.​​</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올가 이리인스카야는 이 위대한 행위를 하는 데 있어서 슈톨츠보다 더 유능하고, 우리의 젊은 생활에 슈톨츠보다도 더 가까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곤차로프가 창조한 여성들에 대해서는—올가에 대해서도, 아가피아 마토베브나, 프셰니치나에 대해서도, (더욱이 또한 독특한 성격을 가진 아니시아나 아크리나에 대해서마저)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는 우리가, 그녀들에 대해서 무언가 재치 있는 말을 하기에는 너무나 무력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곤차로프가 창조한 여성 유형에 대해 고찰하는 것은 여성의 마음에 대한 위대한 전문가라는 자부심을 표명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소질이 없는 경우에는, 곤차로프가 그린 여성들에게 그저 매혹당하기만 할 가능성이 있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여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곤차로프의 심리 분석이 정확하고, 자잘한 것은 놀랄 만하다고 한다. 이 경우 여자들의 이야기를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굳이 이 여자들의 비평에 무언가를 더하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있어 완전한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글의 맺음말로서 올가에 대해, 또 오블로모프 주의에 대한 그녀의 태도에 대해 감히 몇 마디 하고자 한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올가는 그 정신적 발달 정도에 있어서 러시아 예술가가 지금의 러시아 생활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최고의 이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논리가 가지는 예사롭지 않은 명료함과 솔직함으로, 또한 마음과 의지의 놀라운 조화로,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감동시킨다. 마침내 우리는 그 시적 진실을 의심하고 싶어져, ‘이러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 소설 전권을 통해 그녀의 뒤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녀가 언제나 자신과 자신의 발달에 충실한 것, 그녀가 작가의 교훈적 견해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아직 만난 적 없는, 살아 있는 인물을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녀 안에는 슈톨츠 안에 존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새로운 러시아 생활에 대한 암시를 볼 수 있다. 그녀로부터 오블로모프 주의를 모조리 불태워, 그 재를 불어 날려 버리는 말을 기대할 수 있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녀는 우선 오블로모프를 향한 애정에서, 또 그의 정신적 개조에 대한 신뢰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그녀는 오랫동안 한결같은 애정과 따뜻한 배려로 이 남자의 내면에 생활을 눈뜨게 하고 행위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그가 선행에 대해서 이렇게도 무력하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에게 건 자신의 희망을, 자신의 미래의 창조물이 완성되길 기대하면서 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한다. 외면적인 예의의 제약마저 무시하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혼자서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평판이 땅에 떨어지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놀랄 만한 분별력을 가지고, 그의 천성 속에 나타나 있던 모든 거짓을 즉시 꿰뚫어본다. 그리고, 끝없는 솔직함으로 그것이 어떻게, 또 왜 거짓이고 진실이 아닌가를 그에게 설명한다. 예를 들어, 그는 앞에 말한 대로 그녀에게 편지를 쓴다. 그 뒤에, 그것이 오로지 그녀에 대한 배려에서, 자신을 완전히 잊고, 자신을 희생하면서 쓴 편지라고 그녀에게 단언한다—</p><p class="ql-block">‘아니오—그녀는 대답한다—거짓말이에요. 만일 당신이 오직 나의 행복만을 생각해서, 나의 행복을 위해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미리 편지 따위 쓰지 않고 가 버렸을 거예요.’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는 혹시 그녀가 나중에 그에 대한 사랑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싫어하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녀가 불행해지는 것이 두렵다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 그녀는 대답한다.</p><p class="ql-block">‘지금 당신은 어디에 나의 불행이 있다고 말하는 건가요? 지금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걸로 난 행복해요. 그러나 언젠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때는 그때 나름대로, 나는 그 사람과 함께 행복할 거예요. 당신은 나에 대해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군요!’</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사고의 이런 솔직함과 명료함 속에는 현대 사회를 키운 생활과는 다른 새로운 생활이 움트고 있다······. 그리고 또—놀랍게도 올가의 의지는 그녀의 마음에 얼마나 순종하는 것인지! 그녀는 그가 결정적으로 쓸모없는 사람임을 확실할 때까지는, 주변의 모든 유쾌하지 못한 일들과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오블로모프에 대한 자신의 관계 및 애정을 이어나간다. 그가 쓸모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기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그에 대한 사랑이 잘못되었음을,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운명을 그와 함께할 결심을 할 수 없음을 그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그녀는 이 거절의 순간에도, 또 그 이후에도, 그를 칭찬하고 그에게 호의를 가진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그녀는 이와 같은 자신의 행위로 그를 말살하였다. 다른 오블로모프 주의자들은 누구도 여자에 의해 이렇게까지 말살당하지는 않았다. 타티아나도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네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거짓말할 필요가 무어 있겠어요?)하지만 나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 몸인걸요마지막까지 지조를 지킬 생각입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리하여 그저 외면적인 도덕상의 의무가 타티아나를 이 공허한 멋쟁이로부터 구해냈을 뿐이다. 만약 그녀가 자유로웠다면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겼을지도 모른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또한 나탈리아가 루딘을 버린 것은 그가 처음에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가 버린 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만 마음을 빼앗겨, 그것을 몹시 슬퍼했다. 페초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 그는 공작의 딸 메리의 증오만을 바랐고, 거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올가는 오블로모프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식 없이, 그리고 상냥하게 그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나도 겨우 최근 들어서야 알아차리게 되었지만, 내가 사랑하고 있었던 것은 당신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어 주길 내가 바라고 있던 거였어요. 그건 슈톨츠 씨가 나에게 보여 준 거예요. 그건 내가 슈톨츠 씨와 함께 생각해 낸거죠. 나는 미래의 오블로모프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로군요. 당신은 어른스럽고 정직해요, 일리야 씨. 당신은 친절해요······. 마치 비둘기 같아요. 당신은 날개 속에 머리를 숨기고 있는 거예요—그리고 그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지요. 당신은 평생을 지붕 밑에서 울고 있을 생각이겠죠······. 하지만 난 달라요, 나는 이걸로는 부족해요. 나에게는 더욱 큰 무언가가 필요해요, 그게 무엇인지—난 모르지만요!’</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리고 그녀는 오블로모프를 버린다. 그리고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는 그 무언가를 추구한다. 결국 그녀는 그것을 슈톨츠에게서 발견하고, 그와 맺어져 행복해진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도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활동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 어떤 확실치 않은 문제와 의혹이 그녀를 불안케 한다. 그녀는 무언가를 구명(究明)하려 하고 있다. 작자는 우리 앞에 그녀의 마음속 파도를 완전히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마음속에 일렁이는 파도의 특질에 대해 잘못된 예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마음과 머릿속에서 새로운 생활의 숨결이 되어, 그녀는 슈톨츠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 새로운 생활에 가까워져 있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음 대화 속에서 몇 가지 암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항복하고 슬퍼하나요? —그녀가 물었다.— 아니—그는 말했다—확실한 기분과 차분한 마음으로 무장하는 거야. 나도 당신도 거인이 아니야—그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계속했다 — 우리는 맨프레드나 파우스트와 함께 마음을 어지럽히는 문제와 대담한 전투를 향해 나아가는 일은 하지 않아. 그들의 부름에는 응하지 않을 거야. 머리를 숙이고, 얌전하게 곤란한 시간을 넘기자. 그렇게 하면 언젠가 다시 생활이 미소짓게 될 거고, 행복도 그때부터······—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나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면, 슬픔은 점점 심각하게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까요? —그녀는 다시 질문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어쩔 수 없잖아! 생활의 새로운 요소로서 그 슬픔을 받아들이자······. 아니, 그게 아니지.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우리에게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어. 그건 당신만의 슬픔이 아니야. 그건 인류 공통의 병마인 거야. 당신에게도 그 한 방울이 떨어진 거지······. 인간이 생활에서 분리되어 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그것은 모두 무서운 일이야, 하지만 우리에게는······.</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우리에게는······ 어떠한 것인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내용은 명백하다. 즉, 그는 ‘마음을 어지럽히는 문제와의 전투에 나서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얌전하게 머리를 숙이자’고 결정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싸움에 대비하고, 이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슈톨츠와의 조용한 생활이 오블로모프적인 무관심과 유사한 무언가로 변화하는 것을 견딜 수 없을 만큼 두려워하고 있다. 명백하게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언젠가 다시 한 번 생활이 미소지을 거라도 기대하며, 괴로운 시간을 어른스럽게 참아 넘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녀는 오블로모프를 믿기를 그만두었을 때 오블로모프를 버렸다. 그녀는 혹 슈톨츠를 믿을 수 없게 된다면, 그 역시 버릴 것이다. 여러 가지 문제와 의혹이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또 슈톨츠가 그녀에게—그것들을 생활의 새로운 요소로서 받아들이고 머리를 숙이도록 자꾸 충고한다면, 이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그녀는 오블로모프 주의를 잘 알고 있다. 그녀는 그것이 어떤 형태를 하고 있더라도, 어떤 가면을 쓰고 있더라도, 그것을 구분해 낼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 가차없는 판결을 내릴 힘을 언제나 자신 안에서 발견할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끝]</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