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문학 批評(連載 1)]</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 「‘오블로모프 주의’란 무엇인가?」</p><p class="ql-block"> Chto takoye “Oblomovshchina”?</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도브롤류보프[러시아]</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Nikolai Aleksandrovich Dobrolyubov,1836.2.5 ~ 1861.11.29.] 러시아의 비평가. 체르니셰프스키와 함께 1860년대의 혁명적 민주주의의 사상적 지도자였다. 노브고로트의 가난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교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했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인생을 위한 예술주의’를 신봉했으며, 재학 시절부터 《현대인》이라는 잡지에 집필하여, 청교도적 사명감에 불타며 문예평론, 사회평론에 정력적인 활약을 하였지만, 불과 25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요절하였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비평이란 문학작품을 깨우쳐 준 현실 그 자체를 규명하는 것을 뜻하며, 현실에 입각하여 그 작품에 보충과 주석을 달아주는 것이 비평가의 임무라고 생각했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의 주요저서로는 《오블로모프 기질이란 무엇인가?: Chto takoye “Oblomovshchina”?》(1859) 《어두운 왕국에 비치는 한 줄기의 빛》(1860) 《오늘이란 날은 언제 오는가?》(1860) 등이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rgb(57, 181, 74);">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Гончаров, 1812~1891)1). <평범한 이야기>로 문단에 등장하였으며, 작품에 농노제 폐지의 필연성을 주제로 한 <오블로모프(Oblomov)>가 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rgb(176, 79, 187);"> *** ***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러시아인의 본능 속에 살아 숨쉬는 ‘앞으로’란 전능한 이 한 마디를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시대는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수많은 게으르고, 나태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깨어나지 않는 잠에 빠져 있다. 그리고 이 말을, 전지전능한 이 한 마디를 던질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는 러시아 땅에 아주 드물게 모습을 드러낸다. </p><p class="ql-block"> ㅡ 니콜라이 고골리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 나라의 독서계는 10년 동안 곤차로프의 소설 <로망>이 세상에 나오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품이 출판되기까지 기나긴 시간동안, 사람들은 이 책에 대해 마치 이상한 작품이라도 되는 듯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매우 큰 기대를 가지고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이 소설의 제1부는 이미 1849년에 집필되었고, 현재 눈앞에 펼쳐진 흥밋거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루함을 느꼈다. 마침 같은 시기에 나온 <귀족의 둥지>를 읽고 모든 사람들은 이 작가의 시적이며 감성이 흘러넘치는 재능에 마음을 빼앗겼다. 사람들은 <오블로모프>에 대해 가졌던 친근감을 잃어버렸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많은 사람들은 곤차로프의 소설 속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매우 구체적이며 심도 있는 심리 분석에 지루함마저 느꼈다. 사건의 재미만을 좇는 독자들이 이 소설의 제 1부를 지루하게 느낀 이유는 마지막 장면까지 주인공이 제 1장 도입부와 마찬가지로 긴의자 위에 계속 드러누운 채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비판적 경향을 선호하는 독자들은 이 소설 속에 이 나라의 공식적=사회적 생활이 전혀 다뤄지지 않은 채 끝나 버린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즉, 이 소설의 제 1부는 독자를 잡아끄는 흥밋거리가 없다는 인상을 심어 준것이다.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본다 해도, 적어도 이 나라의 독서계, 즉 모든 시적 문학을 오락으로 간주하고 예술 작품을 첫인상으로 판단하는 일에 완전히 익숙해져 버린 독서계에서는 성공을 거둘 수 없을 거라고 예상하게 하는 징후들이 적지 않게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예술적 진리가 급속히 그 움직임을 드러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소설 제 1부에 이어지는 각 부는, 처음 이 작품에 대해 불쾌한 인상을 안고 있던 모든 사람에게서 그러한 부정적 인상을 거두어 갔다. 그리고 곤차로프의 재능은, 그를 누구보다 동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마저 거부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성공의 비밀이 직접적으로는 작가의 예술적 재능의 힘에 있으며, 또한 이 소설의 비범하리만치 풍부한 내용에 있으리라 생각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주인공의 성격 탓에 사건이라 부를 만한 일이라곤 거의 없는 이 작품 속에서 우리가 특별히 풍부한 내용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기묘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글의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우리의 생각을 명백히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 글의 주된 목적은 우리가 곤차로프의 소설 속에서 마땅히 끄집어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문제점과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는 많은 비평을 불러일으킬 것이 틀림없다. 아마 그 비평 중에는 교정에 관한 것도 있어, 단어나 문체에서 무언가 결점을 찾아내려 할것이다. 또한 감동적 비평에서는 장면이나 성격의 미학적 표출에 감탄의 소리를 지를 것이다. 게다가 미학적=약제적 비평은 등장인물이 전 권을 통틀어 미학적 처방에 올바르게 따라서 저마다 이 특질의 필요량을 잘 배분하고 있는지, 또 이 인물들이 늘 처방대로 그 특질을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엄격히 음미할 것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우리는 이러한 자잘한 문제를 파고드는 것에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한다. 또한 우리가 이러저러한 말은 주인공의 성격과 입장에 완벽히 어울리는 것인지, 또한 이러한 단어 속에서 몇몇 단어를 고칠 필요가 있는지, 여러 생각으로 골머리를 썩이지 않더라도 읽는 이에게 특별한 불행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곤차로프의 소설 내용과 의의에 대해 좀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다룬다는 것은 절대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물론 비평가들은 우리의 글이 오블로모프에 대해 쓴 것이 아니라 그저 오블로모프를 기회로 삼아 쓴 것에 불과하다며 또 우리를 비난할지도 모르지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rgb(57, 181, 74);"></span>다른 어떤 작가보다도 곤차로프에 대한 비평의 경우, 우리는 작품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일반적인 결과에 대해 보다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진해서 이러한 역할을 맡아 자기 작품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작가도 있다. 또 어떤 작가는 자신이 의도한 바를 절대 입밖에 내지 않지만, 그의 이야기 전체가 작가가 가진 생각을 명백하고 정확히 구체화하도록 그려 간다. 이러한 작가의 경우 페이지마다 독자가 가르침을 얻기를 노린다. 그리고 그의 의도를 이해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우둔함이 필요하다······. 대신 이러한 작품을 읽으면 작품의 바탕에 놓인 사상에 대해 (작가의 재능의 정도에 따른) 다소마나 완전한 동의를 얻을 수 있다. 그 밖의 일은 이 작품을 읽은 지 두 시간 만에 완전히 머릿속에서 잊힐 것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곤차로프의 경우 이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독자에게 어떠한 결론도 내려 주지 않을뿐더러, 반대로 독자가 결론을 내 주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가 그리는 생활은 그에게 있어 추상적 철학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직접적인 목적이다. 그에게 독자는 문제되지 않는다. 또한 독자가 그의 소설로부터 어떠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해도, 그 또한 문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독자의 몫인 것이다.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면 저마다의 근시안을 탓하라, 절대 작가를 탓해서는 안 된다. 그는 당신에게 생생한 묘사를 제공하고, 그 묘사가 현실과 닮아 있는 것만을 보증한다. 그 속에 그려진 대상의 가치 정도를 결정하는 것은 당신들의 일이며, 작가는 이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다른 재능 있는 작가들이 가진 가장 큰 힘과 매력인 쉽게 달아오르는 감정도 그에게는 없다. 예를 들어 투르게네프는 자신의 주인공들에 대해 마치 자신과 친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그들의 열렬한 감정을 파악하여, 상냥한 동정과 안쓰러운 불안을 품고 그들의 뒤를 쫓아, 자신이 창조해 낸 인물들과 함께 때로는 괴로워하고 때로는 함께 기뻐한다. 그리고 언제나 기꺼이 그들을 시적 환경으로 둘러싸고 거기에 스스로 열중한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게다가 그의 열중은 전염성이 강하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도록 독자의 동정심을 유발하여, 첫 페이지에서부터 독자의 사상과 감정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고, 독자로 하여금 투르게네프적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을 눈앞에서 체험하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면—독자는 때로 이야기의 줄거리를 잊고, 모든 사건의 세부적인 이음새를 잃은 채 개개의 인물과 상황적인 특징을 놓칠 수도 있다. 그리하여 결국 읽었던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독자에게 있어 그 이야기를 읽고 경험한 생생한 기쁨의 인상은 잊을 수 없는 귀한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곤차로프에게는 그러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의 재능은 인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꽃피는 장미나 나이팅게일을 바라보아도 서정적인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물론 그 역시 그것을 보고 가슴 속 깊이 감동받을 것이다. 가던 길에 멈추어 서서 한참을 바라보면서 귀를 기울이고, 생각에 잠기고 말 것이다······. 이 때 그의 마음속에는 어떠한 과정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보라. 그는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는 아직 확실치 않은 그 윤곽을 냉정히 바라보고 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 윤곽은 조금씩 확실해지며, 멋있는 무언가로 변해 간다······. 그리고는 갑자기, 무언가 기적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 이들 윤곽 속에서 장미꽃도 나이팅게일도 그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움과 매력을 품고 독자 앞에서 되살아난다. 단순히 독자의 눈앞에 그 모습이 그려질 뿐만이 아니다. 장미꽃 향기가 퍼지고, 나이팅게일의 지저귐이 들려올 것이다······. 만약 장미나 나이팅게일이 독자의 감정을 고조시킨다면, 독자 쪽에서 서정가를 부르면 된다. 예술가는 그 모습을 그려낸 것으로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곁으로 물러난다. 이 이상 그는 그 무엇도 덧붙이지 않을 것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만약 형상 그 자체가 당신의 영혼에, 언어가 당신에게 전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다면—라고 예술가는 생각한다—이 이상 덧붙인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파악하여 주조하고 조각해 내는 이 능력 속에—곤차로프의 재능이 가지는 가장 강력한 측면이 있다. 특히 이러한 점에서 그는 현대 러시아의 모든 작가들을 앞서고 있다. 거기에서 그의 재능이 가지는 모든 특징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에게는 놀랄 만한 능력이 있다—그는 어떠한 순간에도 생활 속에서 사라지려고 하는 현상의 모든 것을 완전함과 신선함 그대로 파악하고, 그것들이 완전히 예술가의 소유물이 될 때까지 자신의 앞에 매어 두는 힘을 가지고 있다. 생활의 밝은 빛은 우리 모두의 위를 비추고 있지만, 그 빛은 우리 의식에 닿자마자 금방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에 이어 또 다른 빛이 다른 곳에서 흘러나와, 거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 없이 다시 순식간에 사라져 간다. 이런 식으로 생활 전체가 우리 의식의 표면을 미끄러지듯 스쳐지나간다.</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예술가는 이와 다르다. 그는 저마다의 대상 중 자신의 마음에 가까이 하고 싶은 그 무언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그의 마음속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 순간 위에 머무를 수 있다. 시적 재능의 특질과 완성의 정도에 따라서 예술가가 다다를 수 있는 범위는 좁아지기도 하고 넓어지기도 한다. 인상은 훨씬 더 생생해질 수도, 깊어질 수도 있다. 인상의 표현은—더 열렬해질 수도 있고, 더 평안해질 수도 있다. 시인이 여러 대상 속에서 어떤 동일한 특질에 흥미를 가지는 일도 적지 않다. 그리고 시인은 그 특질을 모든 곳에서 불러일으키고,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이를 가능한 생생히 표현하는 것을 자기의 주된 목표로 삼아 이 일에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주로 쏟어붓는다. 이렇게 자신 내면의 영혼 세계를 바깥 현실 세계와 융합시켜 생활과 자연 그 모두를 자기 자신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감정의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예술가가 있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리하여 어떤 예술가의 경우는 모든 작품이 조형적인 아름다움의 감각에 종속되고, 또 다른 예술가의 경우는 상냥하고 기분 좋은 특질을 주로 그린다. 또한 다른 예술가들은 모든 형상이나 서술 속에 인간적, 사회적인 지향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측면 중에서 어느 하나 곤차로프의 장점이 될 만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특질이 있다. 그것은 시적 세계관의 평정과 충실이다. 그는 어떠한 것에도 특별히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모든 것에 동등하게 마음을 빼앗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대상의 일부분이나 사건의 계기 하나로 마음이 움직이는 일 없이 대상을 모든 측면에서부터 관찰하고, 현상의 모든 요소가 완성되길 기다린다. 그러고 나서 그 위에 그것을 예술적으로 가공하는 일에 착수한다. 물론 그 결과로 그는 자신이 그리는 대상에 대해 한층 평안하고 공평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고, 작은 사물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경우에조차 그 윤곽을 한결 확실하게 하여 이야기의 모든 부분에 평등하게 주의를 기울인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이런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곤차로프의 소설이 그저 길기만 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것은 실제로 길다면 길다고도 할 수 있다. 제 1부에서 오블로모프는 긴의자에 누워 있다. 제 2부에서 오블로모프는 이리인스키 집안의 올가를 사랑하게 되고, 올가 또한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 제 3부에서—그녀는 오블로모프를 잘못 보았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제 4부에서 올가는 오블로모프의 친구 슈톨츠와 결혼하고, 오블로모프는 자신이 살던 하숙집 여주인과 결혼한다. 이것이 전부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이 작품 속에는 어떠한 외적인 사건도, (네바 강 도개교가 올라가는 바람에 올가와 오블로모프의 밀회가 중단된 것 말고는) 어떠한 장애도, 어떠한 부수적 상황도 얽혀 있지 않다. 오블로모프의 태만과 무기력—이것이 그의 이야기 전체에 흐르는 모든 행동을 만든 단 하나의 원동력이다. 대체 어떻게 이 내용을 4부에 이르는 작품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이 주제를 다른 작가가 다루었다면, 그는 이와 다른 작품을 완성했을 것이다. 50페이지 쯤의 가볍고 재미있는, 짧은 작품으로 마무리하지 않았을까. 애교 있는 희극이 만들어졌으리라. 게으른 주인공을 비웃고, 올가와 슈톨츠에게 매혹당해, 그것으로 이야기를 끝맺어 버렸을 것이다. 이야기는 특별한 예술적 의의는 없더라도 결코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러나 곤차로프는 다른 방식으로 글을 써내려갔다. 그는 먼저 자신의 눈길을 끈 현상을 끝까지 추구하지 않고서는, 또한 그 원인을 찾아내지 않고서는, 더욱이 그것과 주변의 모든 현상과의 관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현상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어른거리는 우연의 형상을 하나의 유형으로 굳혀, 여기에 본질적이고 변하지 않는 의의를 부여하고 싶어했다. 따라서 오블로모프와 관계가 있는 것은 무엇 하나라도 그에게 있어서 결코 공허하거나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는 모든 것에 애정을 가지고, 그 모든 것을 자세하고 확실히 그려냈다. 오블로모프가 살고 있던 방 구석구석뿐만 아니라, 그가 살고 싶다고 생각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집마저도, 그의 실내복뿐만 아니라, 그의 하인 자하르의 쥐색 연미복과 뻣뻣한 구레나룻에 이르기까지. 또한 오블로모프가 편지를 쓰는 방식뿐만 아니라, 영지 관리인이 그에게 보낸 편지지와 잉크의 질마저도—모든 것을 빠짐없이, 정확하고 명료하게 그렸다. 이 소설 속에서 아무런 역할도 없는 폰 랑그바겐이라는 남작에 대해서마저 작가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 남작에 대해 한 페이지를 고스란히 써 가며 훌륭하게 묘사해 냈다. 만약 한 페이지로 성에 차지 않았다면 두 페이지, 아니, 네 페이지라도 썼을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것은 신속한 행동을 거스르는 일일지도 모른다. 또한 강렬한 감각을 통해 억누르기 힘든 유혹을 받고 있는 무관심한 독자를 지루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차로프의 재능 중에서—이 점이 그의 묘사에서 보이는 예술성에 매우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귀중한 특질이다. 그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독자는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사상(事象)이 예술의 영원불멸한 요구에 합당하지 않은 것처럼 여길 것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곧 독자는 작가가 그리고 있는 세계에 익숙해지고, 작가가 그리는 모든 현상이 법칙에 들어맞으며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점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의 입장에 스스로를 대입하여 그들과 같은 입장과 환경에서라면 그것 말고 다른 식으로 행동할 수는 없으리라고 느끼고, 좀 더 나아가면 그것 말고 다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느낌마저 가지게 될 것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작가가 끊임없이 제공하는, 애정과 함께 평범치 않은 숙련된 기술로 그려진 사물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마침내 어떤 매혹을 불러일으킨다. 독자는 어느 새 작가가 이끄는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어 버린다. 독자는 거기서 무언가 친근함을 발견한다. 독자의 앞에는 각각의 인물과 대상 저마다의 외면적인 형태뿐만 아니라, 그 깊은 내면에 있는 것, 그 정신이 차례로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모두 읽고 나면, 독자는 자신의 사상 범위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더해짐을 느끼고,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새로운 형상과 새로운 유형이 깊이 침투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들 형상과 유형은 오래도록 독자의 곁을 맴돈다. 독자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독자 자신의 생활, 성격, 기호에 대해서, 그것들의 의의와 관계를 명확히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독자의 무기력과 권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강렬한 사상과 싱싱한 감각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독자는 다시 한 번 많은 페이지를 되새김질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다시 읽은 부분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하고 싶어진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적어도 우리에게 오블로모프는 이러한 영향을 주었다. 우리는 <오블로모프의 꿈>을 비롯한 몇 가지 장면을 여러 차례 되풀이해 읽었으며, 작품 모두를 두 번에 걸쳐 거의 완전히 읽었다. 두 번째 읽을 때에는 처음 읽을 때보다 더욱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이런 식으로 사건 진행을 꾸민 부분, 그리고 어떤 사람들의 의견처럼 이 작품의 길게 늘려 쓴 부분의 세부 묘사는 실로 이와 같은 매혹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렇게 곤차로프는 갖가지 생활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표현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예술가로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여러 생활 현상의 묘사는 그의 사명이며 즐거움이다. 그의 객관적 창조는 어떠한 이론 상 편견이나 이미 정해진 이념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고, 어떠한 일방적인 동정(同情)에도 좌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온건하고 정직하며 냉정하다. 이는 예술적 활동의 최고점을 구성하는 것일까, 아니면 예술가의 연약한 감수성을 보여주는 결점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단정적인 답을 내기는 어렵다. 어쨌든 제한과 설명 없이는 공정을 기할 수 없을 것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많은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시인의 조용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들을 이러한 재능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에 있어서 즉시 엄한 판결을 내리려 한다. 우리는 이러한 판단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이해한다. 우리 역시 작가가 우리의 감정을 더 많이 자극하고, 마음을 더 강하게 잡아끄는 식의 글을 써 주었으면 하는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우리는 이 희망이—감정 속에서마저—끊임없이 지도자를 가지고자 하는 경향으로부터 태어난, 어느 정도 오블로모프적인 것임을 의식한다. 인상이 작가에게 서정적인 기쁨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작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조용히 숨어 있을 뿐이라는 이유로 작가의 감수성이 빈약하다고 단정 지어 버리는것은—옳지 않다. 오히려 인상을 빠르고 강렬하게 묘사하면 그 인상은 그만큼 쉽게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된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우리들은 언어와 표정의 파토스를 끊임없이 축적하는 축복받은 사람들에 대해 매사 이와 관련된 수많은 예를 본다. 만일 사람이 대상의 모습을 자신의 마음속에 품은 채 키워 나가고, 그런 뒤에 이를 확실하고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이는 그 사람의 날카로운 감수성이 감각의 깊이와 결부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바로 말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이 땅 위의 그 무엇 하나 무익한 것은 없다. 그의 주변에서 생활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 자연과 인간사회를 풍요롭게 만들고 있는 모든 것, 이 모든 것은— 왜인지 기묘하게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살아 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어떠한 순간에도 생활의 모든 현상은 그의 안에서는 마법의 거울 속에서처럼 비추어져, 그가 생각하는 대로 머물고, 굳어져서, 단단한 부동의 틀 속에 부어진다. 그는 생활 그 자체를 붙잡아, 생활의 가장 잡기 힘든 한 때를 영원히 고정시켜 우리 앞에 놓고, 우리가 그것을 통해 배우고, 때로는 즐기며, 언제까지나 그것을 바라보도록 할 수 있다.</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러한 힘이 지극히 높은 수준으로 발달해 있을 경우에는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가 재능의 좋은 느낌, 매력, 신선함, 또는 믿음직함이라고 부르는 그 모든 것에 필적한다. 그러나 이 힘이라는 것에도 각각의 정도가 있으며, 심지어 여러 종류의 대상으로 향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또한 적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여기서 우리는 말하자면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신봉자들과 의견을 달리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낙엽 한 장에 대한 뛰어난 묘사도 인간 성격에 대한 뛰어난 묘사와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관적으로는 그 말도 옳을지도 모른다. 원래 재능의 힘은 두 명의 예술가가 동일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저 그들의 행동 범위가 다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뭇잎이나 실개천의 모범적 묘사에 스스로의 재능을 낭비하는 시인이, 그와 같은 재능을 가지고, 예를 들어 사회 생활의 모든 현상을 재현할 수 있는 시인과 동일한 의의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비평이나 문학, 또한 사회 그 자체에 대해서는 예술가가 자신의 내면에, 추상적인 것 속에, 또 가능성으로서 얼마나 큰 재능과 어떠한 사물의 어떤 면을 표현하는가 하는 문제 쪽이 훨씬 중요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렇다면 곤차로프의 재능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고, 어디에 그 재능을 소비하고 있을까? 이 작품의 내용 분석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아마 곤차로프는 자신의 재능을 묘사에는 얼마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 좋고 한심한 오블로모프가 드러누워 자고 있다, 우정도 사랑도 그의 눈을 뜨게 하거나 일으킬 수 없다—는 데 대한 이야기이다. 이는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러시아의 생활상이 반영되어 있다. 이 글은 가차없는 엄격함과 진실함을 가지고 정확히 그려진, 살아 있는 현대 러시아인의 유형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여기에는 우리 사회가 발달하며 생겨난 새로운 말, 즉 절망도 없고 어린애다운 기대도 없지만, 진리의 충실한 의식을 가지고 확실하고 강하게 소리낸 새로운 말이 쓰여 있다. 이 단어란—오블로모프 주의이다. 이는 러시아 생활 상 많은 부분에 나타나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열쇠로 적합하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리고 이것은 곤차로프의 소설에 이 나라의 모든 사회비판적 소설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사회적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오블로모프 유형 속에서, 또 이 오블로모프 주의 전체 속에서, 우리는 강한 재능의 성공적인 창조물 그 이상의 것을 본다. 우리는 그 안에서 러시아 생활의 작품을, 시대의 상징을 보는 것이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는 러시아 문학사에 반드시 새로운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러한 인물이 곤차로프의 소설에서만큼 이렇게까지 꾸밈없이,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리 앞에 선 적은 없었다. 너무 예전 기억을 더듬지 않더라도 우리들은 이미 오네긴 속에서 오블로모프 유형의 혈연적 특질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뒤 이 나라의 가장 우수한 문학작품 속에서 그러한 특질이 몇 차례인가 반복됨을 발견했다. 문제는 이것이 이 나라의 성실한 예술가들 모두가 무시할 수 없는, 러시아의 근원적 국민 유형이라는 점에 있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또한 사회가 의식적인 발달에 성공함에 따라, 이런 유형도 스스로의 형태를 변화시켜 생활에 대해 별개의 태도를 취하게 되고, 마침내 새로운 의의를 갖기에 이르렀다. 그 존재들의 새로운 양상에 주목하며, 새로운 의미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 일은 언제난 커다란 과제였다. 그리고 이 일을 성공시킨 재능은 변함없이 이 나라의 문학사를 본질적으로 일보 전진시켰다. 우선 오블로모프 유형의 주요 특징을 관찰하고 난 뒤에, 이 유형과 여러 시대 속에서 이 나라 문학 상에 나타난 종류의 몇 가지 유형을 간단히 비교해 보자.</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적 성격의 주된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생겨나는, 완전한 무기력이다. 이 무관심은 그의 외면적 입장에서 기인하고 있는 동시에, 그의 지적이고 정신적인 발달 상태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외면적 입장으로 말하자면—그는 지주(地主)이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그에게는 자하르가 붙어 있고, 그 위에 또 삼백 명의 자하르가 따라다닌다.’ 자신이 우월한 입장에 서 있음을 일리야 일리이치(오블로모프)는 자하르를 향해 다음과 같은 말로 타일렀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내가 발버둥을 치거나, 일을 한다는 건가?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건가? 비쩍 마른 빈상(贫相)인가? 무언가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다는 건가? 물건을 가져 오거나 수발을 들어 주는 사람이 제대로 붙어 있지 않은가. 덕분에 나는 태어나고부터 한 번도 내 손으로 양말 따위 신어 본 적 없다고! 내가 악착같아질 거라고? 이 내가? 내가 대체 누굴 향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어린 시절부터 날 돌봐 준 건 너 아냐. 너는 모두 알고 있을 텐데. 전부 다 봤을 거야. 나는 귀한 대접을 받고 자랐어. 나는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 본 적이 없지. 무엇 하나 자유롭지 못한 구석이 없어. 내 스스로 빵을 위해 돈을 벌어 본 적도 없다고. 그런 천한 일 따위 해 본 적 없단 말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렇게 오블로모프는 완전한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가 자라 온 역사가 그가 하는 말의 진실성을 확실히 증명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는 물건을 가져다주거나 수발을 들어 주는 사람이 따라다녔다. 덕분에 그는 게으름뱅이와 같은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거기에 종종 의지에 거스르면서까지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하루를 보낸다. 다음과 같은 조건 아래에서 자란 인간에게 애당초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자하르카는—보통 보모가 자주 그러듯이—그의 양말을 신겨 주거나 신발을 신겨 주거나 한다. 이미 열네 살의 소년이 된 이류시카는 자리에 드러누운 채 자하르카에게 한 쪽씩 다리를 내미는 것 밖에 할 줄 모른다. 그리고 신기는 방법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하르카의 얼굴에 발길질을 하는 것이다. 자하르카가 혹시 불만스레 잔소리라도 할라 치면, 그 위의 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머리를 한 대 쥐어박힌다. 그러고 나서 자하르카는 일리야 일리이치의 머리를 빗겨 주고, 그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주의깊게 재킷 소매에 두 손을 넣게 해서 옷을 입힌다. 그리고 그 외에 해야만 하는 또 다른 일들, 예를 들어 아침 일찍 일어나서—세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거나 하는 것을 일리야 일리이치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일리야 일리이치는 무언가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슬쩍 눈을 깜박이기만 하면 된다—그러면 서너 명의 시종이 그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기 위해 바쁘게 돌아다닌다. 그가 무언가를 떨어뜨려도, 무언가 집어야 할 물건에 손이 닿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 또한 장난꾸러기 소년답게 때로는 자리에서 뛰쳐나가 뭐든지 스스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면 느닷없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세 명의 숙모까지 총 다섯 개의 목소리가 외치는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뭐 하는 거니? 어디 가니? 바시카, 바니카, 자하르카, 뭐 하는 거지? 이봐! 바시카! 바니카! 자하르카! 너희들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멍청이들! 혼날 줄 알아!”그래서 일리야 일리이치는 무언가를 스스로 해 보려고 생각해도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편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큰소리치는 법을 배웠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봐, 바시카, 바니카! 저거 줘, 아니 다른거! 저건 싫어, 그게 마음에 드는 걸. 얼른 가서 가지고 와!”때로는 그 또한 양친의 상냥한 배려에 싫증이 날 때도 있다. 그가 계단을 뛰어내려오거나 뒤뜰에서 뛰어다니거나 하면, 느닷없이 그의 뒤에서 절망에 찬 열 명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아이고, 저런! 누가 좀 말려 줘! 말려 달라고! 저 애가 넘어져, 다친다고! 기다려! 거기 서!”</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가 겨울에 문간방으로 뛰쳐나가려고 하거나 통풍구를 열려고 하면—다시금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라, 어디 가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나가면 안 돼, 가는 거 아냐, 열면 안 되지, 위험한 걸, 감기 걸린다고······”</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리하여 일류샤는 온실 속의 이국풍 꽃과 같이 소중한 취급을 받으며, 슬픔에 잠겨 집 안에서만 머물렀다. 그리고 유리 속의 그 이국풍 꽃처럼, 그는 서서히 힘없이 자라났다. 밖으로 표출되어야 하는 힘은 안으로 향하고, 시들어 버렸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러한 양육 방식은 이 나라의 교양 있는 사회에서 결코 예외적이고 이상한 것이 아니다. 물론 자하르카가 도련님께 양말을 신겨 줄 때와 같은 장면은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하르카가 이러한 일을 면제받을 수 있는 경우는 특별한 관대함이나, 혹은 지극히 높은 교육적 고려에 입각한 것으로, 결코 일반적인 가사 상태와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귀족 아이들도 아마 제 손으로 옷을 입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이 자신에게 있어 일종의 유쾌한 기분전환이며 변덕이지, 원래 자신이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 일반적으로 그 자신이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악착스레 매달릴 필요가 있는가? 필요한 것은 뭐든지 그를 위해 가져다주고, 필요한 일은 뭐든지 해 주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므로 그는 노동의 필요와 신성함에 대해 아무리 설교한다 한들 일에 악착같이 매달리거나 하지 않는다. 그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집에서, 집안일은 전부 하인이나 하녀에게 시키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저 지시를 내리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호통을 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보며 자랐다. 거기서 이미 그는—악착스레 일에 매달리기보다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편이 존경받는다는 생각을 먼저 갖게 된다······. 그 뒤의 발달도 전부 이 방향으로 진행된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아이의 이러한 처지가 그의 모든 정서적이고 지적인 교양에 어떠한 작용을 하는가는 명백하다. 내면의 힘은 필연적으로 ‘시들어 죽게 된다.’ 소년이 때로 이러한 힘을 시험해 보려 하면, 그것은 오직 변덕이 되고, 또한 자신의 명령을 타인에게 실행하도록 하는 교만한 요구로 나타난다. 그러나 충족된 변덕은 무성격을 발달시키며, 교만은 자신의 품위를 성실히 지키려는 능력과 서로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무의미한 요구를 하는 일에 익숙해지게 되면, 곧 소년은 자신이 가진 희망의 가능성과 실현성을 계산하지 못하게 되어, 수단을 목적에 적용하는 힘을 완전히 잃고 만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런 탓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헤처나갈 수밖에 없는 장애물을 만나면 곧 그 자리에 멈춰 서는 것이다. 이러한 소년이 성장하면 오블로모프가 된다. 그는 많던 적던 교묘한 가면 아래 오블로모프적인 무관심과 무성격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가 항상 가지고 있는 공통적이고 변하지 않는 특질이 있다—즉, 성실하고 자주적인 행위에 대한 혐오이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이 경우 오블로모프들의 지적 발달 또한 많은 역할을 해내고 있지만, 이 역시 그들의 외면적 태도에 의해 방향이 정해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인생의 시작에서 생활을 뒤집힌 모습으로 바라본다—그 때문에 훗날에도 자신의 생애 마지막에 다다를 때가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그 뒤 많은 일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그들도 무언가를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심어진 생각이란 것은 여전히 마음 속 어딘가 남아 있어, 끊임없이 고개를 들며 모든 새로운 생각들을 방해하고, 영혼 깊숙이 이러한 새로운 생각들이 들어오는 것을 용서치 않는 것이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리고 머릿속에 어떠한 혼란이 생겨난다. 때로는 그도 무언가를 하고자 결심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시작하면 좋을지, 어느 쪽을 향햐면 좋을지를 모른다······.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제대로 된 인간은 보통 성취할 수 있는 일만을 원한다. 그 대신 그는 바라는 일은 뭐든지 즉시 실행에 옮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오블로모프는······ 그는 무언가를 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따라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그러므로 무언가를 진지하게, 실질적으로 바라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 그의 희망은 그저 형식 속에서만 나타난다. ‘만약 이 일을 한다면 참 좋을 거야.’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이 일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그런 연유로 그는 공상을 즐기며, 공상이 현실과 만나는 순간을 지극히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는 모든 일을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려 애쓴다. 만약 아무도 없을 때에는 우연에 기대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 모든 특징은 일리야 일리이치 오블로모프의 내면에서 보기 좋게 지적되고, 특이한 힘과 진실함을 가지고 집약되어 있다. 일리야 일리이치가 활동하지 않는 것을 본질적이고 근본적은 특질로 삼는 것 같은 어떤 특별한 종류의 인간에 속해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에게 생각한 대로 움직이는 능력이 태어날 때부터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역시 태어나기는—다른 모든 사람들과 동일한 인간이다. 어릴 적에는 그도 뛰어다니거나 아이들과 눈싸움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또 스스로 무언가 물건을 가지러 가거나 계곡에 뛰어들거나 실개천이나 울타리, 고랑을 뛰어넘어 근처의 자작나무 숲 속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블로모프카 마을의 모든 사람이 오수(午睡)에 들어 있을 때를 노려 몸을 움직였다.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그는 ‘회랑 위에 올라갔다 (이 회랑은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몰랐으므로, 그곳에 가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삐걱대는 판자 위를 뛰어다니고, 비둘기집에 기어올라가며, 과수원 깊숙이 숨어들어 투구벌레가 날아다니는 소리를 듣고, 그것들이 공중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언제까지나 바라보는 것이다.’ 혹은—‘실개천 속에 숨어들어가 흙을 파서 무언가의 줄기를 찾아내어, 껍질을 벗겨 맛있게 먹었다. 그는 그것이 어머니가 준 사과와 잼보다도 훨씬 좋았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러한 모든 일은 온화하며 조용하지만, 어리석거나 나태하지도 않은 성격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온화함은 두려움이나 편벽(偏僻)으로 바뀌기도 하는데—이는 인간에게 절대 선천적인 현상이 아니며, 뻔뻔함이나 교만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후천적인 현상이다. 그 두 가지 성질의 차이는 결코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만큼 크지 않다. 누구나 하인만큼 자만할 수 없고, 윗사람 앞에서 비굴하게 행동하는 사람만큼 아랫사람 앞에서 거만하게 구는 사람도 없다. 일리야 일리이치는 그 모든 온화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구두를 신기는 자하르카의 면상을 걷어차는 일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그가 자기 생활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행동을 할 경우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저항을 만날 것을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자신의 활동 범위를 자신의 하인 자하르와 같은 삼백 명 가량의 사람으로 제한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 자하르들이 백 배 천 배 많이 있었다고 해도—그가 저항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관련지어질 운명에 놓인 사람들의 이빨을 상당히 용감히 후려치는 일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 식의 행동은 절대 그의 성격이 어딘가 흉포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은 물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행동은 매우 자연스런, 그리고 필요한 것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가 무언가 다른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기도 하고 필요하기도 하다는 생각은 그 누구의 염두에도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불행하게도, 혹은 다행히도—일리야 일리이치는 중산층 지주로 태어나 일만 루블에 조금 못 미치는 수입을 얻고 있으며, 그 결과로 그저 공상 속에서만 세상의 여러 가지 운명을 지배할 수 있었다. 공상 속에서 그는 기꺼이 용감하고 영웅적인 충동에 사로잡혔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때로 자신이 나폴레옹뿐만 아니라 에르스란 라자레비치마저도 빛을 잃을 만한 무적부대의 사령관이라고 공상을 해 보길 좋아했다. 그는 전쟁과 그 원인을 떠올린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여러 민족이 유럽을 침략한다. 혹은 그가 새로운 십자군을 조직해 싸운다. 그리고 여런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고, 마을들을 파괴하며, 또는 사면을 베풀고, 처형하고, 또는 선행과 관용의 공적을 쌓는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또한 때로 그는 자신이 위대한 사상가 혹은 예술가로, 군중이 그의 뒤를 따르며, 모든 사람이 그를 숭배한다······고 공상한다. 오블로모프가 지향하는 바나 감정을 가지지 않는 둔하고 무관심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 자신의 생활 속에서 역시 무언가를 추구하고,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인간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스스로의 노력이 아닌 타인의 노력으로 자신의 희망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배척해야 할 습관이—그의 안에서 무관심한 게으름을 발달시켜, 그를 비참한 정신적 노예 상태로 전락시켰다. 이 노예 상태는 지주로서의 오블로모프의 신분과 극히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서로 스며들어 영향을 주고 있으므로, 그 사이에 무언가 경계를 두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블로모프의 이러한 정신적 노예 상태는 그의 개성 속에서, 혹은 그의 이야기 전체를 통해 가장 흥미로운 측면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일리야 일리이치와 같은 독립된 입장에 있는 인간이 어째서 노예 상태로까지 전락할 수 있었는가? 언뜻 보면 그만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달리 없지 않은가? 그는 월급쟁이가 아니며, 사회에 얽매여 있지도 않다. 그리고 확실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절을 하거나,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스스로를 낮출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점을 자랑으로 삼는다. 또한 자신이 지칠 새도 없이 일하거나, 뛰어 돌아다니거나, 억척스레 일에 매달려야 하는—즉, 일하지 않으면 곧 굶게 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을 자랑스레 여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선량한 과부 프셰니치나의 마음에 그를 향한 깊은 사모의 정을 불러일으키지만, 그것은 그가 지주라는 후광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렇게나 자유롭게 누구의 제약도 받지 않은 채 걷기도 하고 말도 할 수 있기 때문이고, ‘끊임없이 서류를 작성할 필요도, 출근 시간에 늦을까 걱정하는 일도 없고, 또 자신에게 안장을 채워 출발하게 해주길 바라는 말과 같은 모습으로 모든 사람을 보는 일도 없이 자신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는 듯 거리낌 없고 자유로운 태도로 모든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이 지주의 생활 전체는 그가 항상 타인의 의지의 노예로서 머물러 있으며, 무언가 자주성을 나타낼 만큼의 높이에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상황에 의해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는 모든 여자, 마주치는 모든 사람의 노예이며, 그를 마음대로 주무르려는 모든 사기꾼의 노예이다. 그는 자신의 농노 자하르의 노예이다. 그리고 그 둘 중 누가 상대방의 권력에 종속되어 있는가를 밝히기는 어렵다. 적어도—일리야 일리이치는 자하르가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을 강제로 시킬 수 없다. 그러나 자하르는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이라면 주인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할 것이다. 그리고 지주는 거기에 복종할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즉 이러한 식이 된다—자하르는 어쨌든 무언가를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오블로모프는 아무 것도 할수 없을 뿐더러, 무언가를 하는 방법조차 모른다. 타란체프나 이반 마토비치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지적 발달 정도나 인격적인 점으로 보아 오블로모프보다 한참 아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블로모프에게 제멋대로 굴고 있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대체 왜 그럴까? 이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상황, 즉 지주인 오블로모프가 일할 의지도 능력도 없고, 주변의 모든 것에 관한 자신의 진정한 관계를 이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도 행동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다—그저 그 행동이 환상의 형태에 머물러 현실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중일 뿐이다. 예를 들어, 그는 영지의 경영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무척이나 집중한다.—그러나 그는 ‘세목과 견적, 숫자’를 무서워해, 결국 그 계획서는 그의 손에 구겨져 한쪽 구석으로 던져지고 만다. 어째서 그가 이런 일에 매달려야 할 필요가 있을까? ······ 그는 지주이다. 그는 거기에 대해 스스로 이반 마토비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자네는 물어보겠지. 가서 자하르에게 물어 봐. 그 녀석은 자네에게 말할 거야, “지주님이시죠!” 라고. 그래, 난 지주야. 그리고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 자네가 알고 있다면 해 줘. 가능하다면 도와주고, 보수는 원하는 만큼 주지—그러기 위한 학문이니까 말이야!”</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독자 역시 그가 이것에 의해 그저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며,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말로 자신의 태만을 감추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고 생각할까? 아니, 그는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할수 없다. 제대로 된 일에 무엇 하나 직접 착수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영지에 대해서(영지개혁에 대해 그는 한 가지 계획을 만들어냈지만), 그는 마찬가지로 자신의 무지(无知)를 이반 마토비치에게 고백한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나는 부역노동이 뭐고 농업노동이 뭔지, 또 빈농이란 무엇이고 부농은 무엇인지 모른다. 또 1체토벨치(약 1.6헥타르)의 쌀보리나 귀리란 어는 정도이고 가격은 얼마인지, 또 어떤 것을 몇 월에 파종하고 몇 월에 수확하는지, 어떤 식으로 해서 언제 파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래 자신이 부자인지 가난한지, 일 년이 지나고도 배불리 먹고 있을지 아니면 밥을 빌어먹으며 살고 있을지—나는 아무 것도 몰라! 그러니까 나를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고 말해주지 않겠는가, 그리고 충고해 주게나.’</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는 다시 말하면—나의 주인이 되어 달라, 내 재산을 마음대로 관리해 달라, 그 중에서 얼마가 되어도 좋으니 적당히 생각하는 만큼을 나에게 나누어 달라······ 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정말 말한 그대로 되었다. 이반 마토비치는 오블로모프의 영지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직전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슈톨츠가 이를 방해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는 단지 자기 마을의 질서를 모르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일 상태를 이해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일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 가장 곤란한 것은 그가 처음부터 생활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있어 의미 있는 것으로 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점이다. 오블로모프카 마을에서는 누구 한 사람 생활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생활이란 대체 무엇인가, 생활의 의미와 사명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자가 없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카 마을의 주민들은 생활이라는 것을 지극히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다. 즉—‘여러 가지 유쾌하지 못한 우연의 사건으로, 예를 들어 질병, 손실, 싸움, 또 노동에 의해서, 때때로 중단되는 안정과 무위의 이상(理想)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노동이라는 것을 이미 그 조상 시대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진 형벌이라고 생각하며 참아 왔으나, 이를 사랑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것도 그러한 일이 가능하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일리야 일리이치도 생활에 대해 이와 완전히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가 슈톨츠에게 들려 준 행복의 이상이란 것은 만족스런 생활 바로 그 자체다—따뜻한 방과 마룻바닥이 있는 생활, 사모바르를 손에 들고 풀이 우거진 곳으로 소풍을 갈 수 있는 생활—실내복을 입고 사는 생활, 숙면, 그것도 잠깐의 휴식을 위한 숙면을 취할 수 있는 생활—상냥하지만 뚱뚱한 아내와 목가적인 산책을 하고, 농민들이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사는 생활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의 두뇌는 어린 시절부터 가장 추상적인 사색에 있어서도, 또 가장 공상적인 이론에 있어서도, 주어진 계기 위에 머무르며, 그 이상은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그 status quo(현재 상황)로부터 나오려 하지 않은 채 있도록 만들어졌다. 자신의 높은 행복의 이상을 그리면서도 일리야 일리이치는 그 내면의 의미에 대해서 자문하려 생각하지 않았다. 그 합법칙성과 진실성을 확인하는 일은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그 따뜻한 방과 마룻바닥을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는지, 누가 그 수발을 들 것인지, 어떤 목적으로 그것을 이용할 것인지······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여기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세상이나 사회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명백히 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므로, 오블로모프는 물론 자기 생활을 의미있게 만들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면, 항상 고민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근무를 하러 나간 적도 있다—그러나 도저히 무엇을 위해 서류를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지 못한 채 그는 사직해서 아무 것도 쓰지 않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해 본 적도 있다—그러나 학문이 그에게 있어 대체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를 알지 못한 채로 그는 책을 구석에 쌓아 놓고, 그 위에 먼지가 쌓여 가는 것을 냉정하게 바라보기로 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사교계에 나가 본 적도 있다—하지만 사람들이 왜 손님에게 불려 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는 모든 지인들을 버리고, 며칠이고 계속 자신의 방 긴의자 위에 드러누워 있게 됐다. 여자들과 교제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그들로부터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얻어야 좋을지를 생각했다. 생각하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로, 그는 여자들을 피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것이 지루하고 싫어졌다. 그리고 그는, 무엇을 위해서인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에 애를 쓰며 악착같이 매달리는 ‘개미처럼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완전한 의식적 멸시감을 가진 채 길게 드러누워 잠만 자고 있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의 성격을 여기까지 설명한 이상, 우리가 앞에 약속했던 문학적 비교로 주제를 옮겨도 상관없을 것이다. 앞에 서술한 여러 가지 고찰에 의해 우리는 오블로모프가 자신이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능력이 날 때부터 아예 결여되어 있는 인간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의 태만과 무관심은 교육과 환경이 만든 결과이다. 여기서는 오블로모프 개인이 문제가 아니라, 오블로모프 주의가 문제이다. 그는 만약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을 찾았을 경우 일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자랄 때의 조건과 몇 가지 다른 조건 아래에서 자라났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자신의 본래 상태 아래에서, 그는 자신의 마음에 맞는 일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일반적인 생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타인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있어서 합리적인 이해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이 나라의 훌륭한 작가들이 그려낸 지금까지의 여러 유형과 그를 비교할 기회를 주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적해 온것처럼, 러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중편소설이나 장편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생활속에서 목적을 찾지 못하고, 적당한 사업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 결과로서 그들은 모든 것에 지루함과 혐오를 느끼며, 이 점에 있어서 오블로모프와 상당한 유사점을 보인다. 확실히—예를 들어 <오네긴>, <현대의 영웅>, <누구의 죄인가?>, <루딘>, 혹은 <무용지물>이나 <시치그로프스키의 햄릿>을 펼쳐 보자—그 어느 책 속에서나 독자는 오블로모프의 여러 특징과 거의 문자 그대로 비슷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네긴은 오블로모프와 마찬가지로 세상으로부터 발을 뺐지만, 그것은 그가 사랑을 찾아다니는 것도 지치고 친한 친구와의 우정에도 질렸다.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글 쓰는 일에 매달린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여러 가지의, 우리를 미치게 하는 즐거움을 버리고 </p><p class="ql-block">오네긴은 집에 틀어박혀</p><p class="ql-block">하품을 하며 펜을 집어들어</p><p class="ql-block">무언가 쓰려고 생각했지만 </p><p class="ql-block">끈기를 요하는 일이란 숨이 막히는 듯하여그 펜으로부터는 무엇 하나 태어나지 않았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는 또한 루딘이 등장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루딘은 ‘자신이 계획한 논문과 저서의 앞머리 저서의 앞머리 수 페이지’를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에게 읽어 주는 것을 즐겼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첸체트니코프도 ‘전 러시아를 모든 관점에서 논할 만한 대저서’에 오랜 시간 매달려 왔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도 ‘계획은 기껏 단순한 사안에 머물렀다. 펜은 여기저기 물어뜯기고, 종이 위엔 낙서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고 나서 이 모든 것은 한 쪽 구석으로 밀려나 버렸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일리야 일리이치는 이 점에서 그들에게 지지 않는다. 그 또한 무언가를 쓰고, 번역했다.—세이의 번역을 시작하기까지 했다. ‘자네 일은 어떻게 된 거야, 번역은?’—그 후 슈톨츠가 곧잘 그에게 물었다—‘몰라, 자하르가 어딘가 치워 버렸어. 분명 구석에 널브러져 있겠지’—오블로모프는 대답한다. 그런 이유로 일리야 일리이치는 그와 마찬가지로 굳은 결의를 가지고 일에 착수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했는지도 모른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러나 각각의 입장과 지적 발달 정도에 차이는 있더라도, 어쨌든 이들 오블로모프 일족의 거의 대부분이 이 일에 매달려 있다. 페초린은 ‘소설의 청부인들과 시정배적 드라마의 거짓 작가들’을 위해서 내려다 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수기를 썼다. 베리토프는 어떠냐 하면, 그 또한 무언가를 썼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에르미타주에 다니며 이젤 앞에 앉아서,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비론과 시베리아로 향하는 미니프와의 만남을 다룬 대작을 그리려 생각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생겨났는지는 이미 독자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족 안에는 똑같은 오블로모프 주의가 있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타인의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일’, 즉 독서에 대해서도 오블로모프는 그 형제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일리야 일리이치 역시 무언가를 읽었다. 그러나 그의 죽은 아버지와 같은 독서 방식은 아니다. ‘이미 꽤 오랜 기간—이라고 그는 말한다—책을 읽지 않았다.’, ‘뭔가 책을 읽어 볼까.’—여기서 손 닿는 대로 책을 집어들겠지······. 아니, 그렇지 않다. 현대 교양 풍조는 오블로모프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는 이미 스스로 선택하여 의식적으로 읽도록 되어 있다. ‘무언가 주목할 만한 작품 이야기를 들으면—그에게는 그것을 읽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난다. 그는 그 책을 찾도록 누군가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만약 당장 책을 가져온다면, 그는 그 책에 매달린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 대상에 대한 생각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그는 그것을 파악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펴보면, 그는 이미 드러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다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책은 그의 옆에 널브러져 있다. ······. 그에게 있어서는 열중하기보다도 열기가 사그라지는 편이 훨씬 빨랐다. 그는 이 버려진 책을 결코 다시는 펼쳐 보려 하지 않았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이와 완전히 같지 않았던가? 오네긴은 타인의 지혜를 자신의 것으로 하려고 생각하면서, 우선, 많은 책을 책장에 꽂았다.</p><p class="ql-block">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혀 재미가 없었다. 그는 곧 독서에 싫증이 났다. 그리고—</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여자들로부터 멀어진 것처럼 </p><p class="ql-block">책으로부터도 멀어져 버렸다.</p><p class="ql-block">그리고 책장을, 그 먼지투성이의 </p><p class="ql-block">내용물도 모두 함께, 호박단으로 짠</p><p class="ql-block">두꺼운 덮개로 덮어 버렸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첸체트니코프도 같은 식으로 책을 읽었다(더욱이 그는 항상 책을 손에 들고 다니는 버릇이 있었으므로)—대부분은 식사 시간에, ‘스프와 소스, 구운 고기와 함께, 때로는 피로그(소를 채워 구운 러시아식 파이)를 먹을 때에도 책을 읽었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루딘 역시 레지뇨프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그는 농업에 대해서 몇 권인가의 책을 사 모았으나, 그 중 한 권도 끝까지 읽지 않았다. 교사가 되고 나자, 사실을 잘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16세기의 어떤 문헌의 일로 수학 교사에게 찍 소리도 못 하게 당한 적마저 있었다. 그 역시 오블로모프와 같은 식으로, 일반적인 사상만을 쉽게 이해하고, ‘세목과 견적, 숫자’는 항상 한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러나 이것은 아직 생활이 아니고, 단순히 생활에의 준비에 지나지 않는다’—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첸체트니코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 역시 오블로모프 및 그 모든 동료들과 같이 여러 가지 불필요한 학문 속을 통과해 왔지만, 그 중 어느 하나 생활에 적용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진짜 생활—그것은 일이다.’ 여기서 오네긴과 페초린을 제외한 모든 주인공들은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있어 일이란—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중노동이 된다. 그들은 다 같이 품위있게, 그리고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퇴직해 버린다. 베리토프는 도저히 14년 반이나 일해서 훈장을 받는 등의 일은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시작할 때에만 열중했을 뿐 곧 관청 일에 냉담해져, 그 후 곧잘 화를 내며 남의 일 보듯 대충대충 일을 했기 때문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첸체트니코프는 상사와 격한 논쟁을 벌였다. 게다가 자신의 영지를 스스로 경영해서 국가에 공헌하려 생각했다. 루딘은 자신이 교사로서 근무하고 있는 중학교 교장과 언쟁을 벌였다. 오블로모프에게는 모든 사람이 과장과 이야기할 때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무언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와 같은 약간 높으며, 듣기 싫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는 ‘필요한 문서를 아스트라한에 보내는 대신 알한게리스크로 보낸’ 것에 대해, 이런 목소리로 과장에게 변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고 사표를 냈다······. 모두가 똑같은 오블로모프 주의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들의 일상생활 또한 서로 지극히 닮아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산책, 독서, 깊은 잠</p><p class="ql-block">숲 속 나무그늘, 실개천의 얕은 여울</p><p class="ql-block">때로는 까만 눈동자의, 피부가 하얀</p><p class="ql-block">마을 처녀의 상큼한 입맞춤</p><p class="ql-block">고삐가 매인 대로 움직이는 준마</p><p class="ql-block">상당히 공을 들인 저녁 식사</p><p class="ql-block">한 병의 백포도주</p><p class="ql-block">고독, 조용함—</p><p class="ql-block">이것이 오네긴의 신성한 생활.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말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면 이는 일리야 일리이치가 그린 이상적인 일상생활과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들어맞는다. 까만 눈동자의, 피부가 하얀 여인의 입맞춤마저도 오블로모프의 공상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농촌 아낙한 사람이—일리야 일리이치는 공상한다—볕에 그을린 목덜미를 하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채, 머뭇머뭇 눈을 내리깔고, 하지만 앙큼스런 눈매로, 겉으로만 보면 잠시 지주의 애무로부터 몸을 지키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기뻐하는 것이다······. 쉿, 아내가 보면 안 되는데. 아아, 들키지 않도록!’ (오블로모프는 이미 자신에게 아내가 있다고 공상하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리고 혹 일리야 일리이치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시골로 내려가고 싶어졌다면, 그는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했던 자신의 전원시를 반드시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오블로모프 주의자들은 무언가 요구받는 일 없는, 전원시적인 움직임이 없는 행복에 마음을 빼앗긴다. 즉, ‘자신을 즐기는 거지, 그것뿐이야’ ······ 라는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페초린마저 마찬가지이다. 그 역시 행복이란 것은 안정과 기분 좋은 휴식 속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그의 수기 중 어떤 곳에서 자신을 굶주림에 고통받는 인간에 비유하고 있다. 그 남자는 ‘지치고 쇠약해져 잠에 빠져셔는, 값비싼 요리와 거품이 이는 술이 자신의 앞에 한 상 가득 차려진 꿈을 꾼다. 그는 공상 속의 허탈한 선물을 정신없이 먹어치우고, 편안해진 듯한 기분을 느낀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눈을 뜨면 공상은 사라지고, 두 배로 늘어난 배고픔과 절망이 남는 것이다······.’ 다른 부분에서 페초린은—‘이 길은 운명이 나를 위해 열어 준 것이며, 여기에서는 조용한 행복과 마음의 평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건만, 나는 왜 이 길을 걷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일까?’라고 자문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왜냐하면 ‘영혼이 폭풍우에 익숙해져, 끓어오르는 듯한 행위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그는 자신의 싸움에 영원히 불만스럽지는 않은가, 그리고 자신이 혐오해야 할 방만한 행위는 모두 그보다 나은 행위가 무엇 하나 보이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항상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일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결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무엇에도 만족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가 일보다도 무위를 더 많이 좋아한다는 의미이다······. 역시 똑같은 오블로모프 주의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사람에 대한, 그 중에서도 특히 여자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모든 오블로모프들은 몇 가지 공통적 특징이 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자잘한 일, 좁은 이해, 근시안적 욕구란 이유로 업신여기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잡역부이다’—그들 중 가장 인간적인 베리토프마저 이렇게 내뱉는다. 루딘은 순진하게도 자신을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천재라고 공상했다. 페초린은 말할 필요도 없이 모든 사람을 두 발로 짓밟는다. 오네긴마저 다음과 같은 이행시(二行诗)를 남겼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생활하고 사색하는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p><p class="ql-block">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을 수 없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첸체트니코프마저—온화한 성격에도 불구하고—그도 관청에 나가 보자, ‘실수 등으로 그의 지위가 내려가는 것처럼 느꼈다.’ 마을로 돌아온 그는 그와 빨리 친해지고 싶었던 주변 사람으로부터, 마치 오네긴과 오블로모프가 한 것처럼 급히 멀어지려 노력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우리의 일리야 일리이치도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점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이는 그에게 있어서 그 어떠한 노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 쉬운 일이다. 그는 자하르를 앞에 두고 득의양양하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비교해 본다. 그는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사람이 대체 무엇 때문에 일부러 취직하거나, 무엇을 쓰고, 신문을 열심히 읽으며, 교제 중인 친구를 방문하는가에 대해 순진한 놀라움을 표명하고 있다. 그는 슈톨츠를 향해 모든 인간에 대한 자신의 우월감을 매우 확실히 표명하기까지 한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사회 생활이라고?—그는 말한다—거절하고픈 생활이다! 그 속에서 무엇을 찾는다는 거지? 사상이나 감각에 대해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건가? 보라고! 이 모든 것이 돌아가는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그런 건 없어. 급소를 찌를 만큼 깊이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이들은 전부 죽은 사람이야. 잠들어 있는 사람이고, 나보다도 훨씬 쓸데없는 사람들이야. 사교계니 사회니 떠들어대는 이런 녀석들은!’ 그리고 나서 일리야 일리이치는 이 문제에 대해 루딘마저 심하다 생각할 정도로 긴 연설을 늘어놓는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 주의자들은 여자에 대해서 모두 한결같이 면목없는 행동을 한다. 그들은 사랑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며, 일반적인 생활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연애 속에서 무엇을 갈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여자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용수철 달린 인형으로 보이는 동안에는 그녀에게 굽실대고 아양 떠는 일마저 불사한다. 여자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이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이를 통해 그들의 지배자적 성격은 완전한 만족을 느낀다. 그러나 상황이 조금이라도 진지해지기 시작하면, 혹은 그들이 자신 앞에 있는 것이 실은 장난감이 아니라 그에게 자신의 권리를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여성이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하면—그들은 곧 수치스럽게 도망쳐 버린다. 이 모든 신사들은 평범을 넘어선 겁쟁이가 되는 것이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이처럼 ‘일찍이 바람둥이란 꼬리표가 붙은 여자의 마음을 흔드는 기술을 알고 있던’ 오네긴, 여자들을 ‘즐거움도 없이 따라다니고, 슬픔도 없이 버리는’ 오네긴—이 오네긴도 타티아나의 앞에서, 그것도 두 번이나 무릎 꿇었다—한 번은 그녀로부터 교훈을 받으려 했을 때, 또 한 번은 그 자신이 그녀에게 교훈을 주려 했을 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던 게 아닌가. 그리고 만약 그녀가 그렇게 열렬히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도 그녀에 대해 위엄있는 도덕가와 같은 태도를 취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러나 여기서 그는 장난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 이유로 자신의 이미 한창 때를 지나 버린 생활에 대해, 나쁜 성격에 대해, 또 그녀가 그 사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것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이 행위를 설명하면서, 그것은 ‘타티아나 안의 사랑의 불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 사랑스런 자유를 </p><p class="ql-block">그는 잃고 싶지 않았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런 이유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얼마나 공허한 말로 변명하고 있는가, 이 겁쟁이 신사는!크루치펠스카야 부인을 대하는 베리토프 역시 잘 알려진 대로 그 사랑을 밀고 나갈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로부터 도망쳤다. 하기야 그의 말대로라면 그것은 전혀 다른 사상에 입각하고 있지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루딘—이 남자는 나탈리아가 그로부터 무언가 결정적인 것을 바라기 시작하자, 완전히 당황해 버렸다. 그는 그녀에게 그저 ‘단념하도록’ 유도하는 것외에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그는 그녀에게 편지를 써서, 그녀와 같은 여자를 상대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고 얕은꾀를 부려 변명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페초린—여성 심리 전문가로, 여자 외에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지구상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이 페초린도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다. 그 역시 제일 먼저, ‘강한 의지를 가진 여자는 좋아하지 않는다. 강한 의지라니 여성스럽지 않아!’라고 말하며, 두 번째로 자신은 결코 결혼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내가 아무리 열렬히 여자를 사랑한다 해도—그는 말한다—혹 그녀가 나에게, 내가 그녀와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순간—사랑이여, 안녕. 내 마음은 돌로 변한다. 그리고 그 무엇도 다시 내 심장을 뜨겁게 할 수 없겠지. 이 한 가지를 제외하면 나는 모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스무 번이라도 이 생명, 아니 명예마저 걸어도 좋아. 그러나 나는 내 자유를 팔지는 않는다. 나는 왜 이리도 자유란 것을 존중하는가? 나에게 있어 무엇이 그 안에 있는가? 무엇을 향해 나는 스스로 준비하고 있는가? 나는 미래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사실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의 공포, 설명할 수 없는 예감이다’등.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는—오블로모프 주의 이상 그 무엇도 아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일리야 일리이치는, 독자들은 생각한다. 오네긴적인 것은 별도로 치더라도, 페초린적인, 그리고 루딘적인 요소마저 없지 않은가? 아니, 잔뜩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페초린과 같이 확실히 여자를 점유하기를 원한다. 여자에게서 그 사랑의 증표로 모든 희생을 강요하려 한다. 독자들도 알아차렸듯이, 처음에 그는 올가가 그의 아내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자신과 결혼해 줄 것을 주저하며 부탁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달리 그녀는 그에게 프로포즈가 너무 늦었다는 의미의 말을 한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주저하며, 올가의 동의에 오히려 불만을 품었다. 그리고 그는—독자는 어떻게 생각했을까?—그녀가 그의 정부(情妇)가 될 만큼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시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자신은 그러한 길에는 절대로 들어서지 않겠다고 말한 순간, 화를 냈다. 그러나 뒤이은 그녀의 설명과 정열적인 장면이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역시 생각했던 대로, 마침내 그는 올가와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되었다. 꾀병을 부리거나, 도개교가 올라가 버린 것을 구실로 삼고, 그녀가 그에게 창피를 줄지도 모른다는 것을 넌지시 그녀에게 암시하곤 했다. 이 모든 원인은 무엇인가.—이는 그녀가 결단이나 행위를, 즉 그가 익숙해 있지 않은 것을 그에게 요구했기 때문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결혼 그 자체는 그것이 페초린과 루딘을 공포에 빠지게 한 만큼은 그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았다. 그는 좀 더 가부장적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올가는 결혼하기에 앞서 그가 영지 경영에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기를 원했다. 이는 그야말로 하나의 희생이었다. 물론 그는 그 희생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짜 오블로모프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매우 큰 것을 강요했다. 그는 올가에게 페초린이나 할 법한 장난스런 일을 시도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자신이 그다지 잘생기지도 않았으며, 전체적으로 보아도 올가로부터 뜨겁게 사랑받을 만큼 매력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민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다 마침내 최후의 힘을 짜내서, 올가에게 루딘 식의 긴 편지를 써 내려간다. 그 편지 속에서 그는, 오네긴이 타티아나를 향해, 또 루딘이 나탈리아를 향해, 또한 페초린이 공작의 딸 메리를 향해 했던 그 유명한, 낡아빠진 문구를 반복했다. 즉, ‘나는 당신과 결혼해서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만한 인간이 아닙니다. 앞으로 당신은 반드시 또 다른, 당신에게 더욱 어울리는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젊은 여인은 몇 번이고</p><p class="ql-block">그 경쾌한 꿈을 바꾸어 갑니다······</p><p class="ql-block">당신은 또 다시 사랑을 하겠죠······</p><p class="ql-block">하지만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세요</p><p class="ql-block">모든 사람이 나처럼</p><p class="ql-block">당신을 이해할 수는 없을 테니까······</p><p class="ql-block">세상물정을 모른다는 건 불행의 씨앗입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 주의자들은 모두가 비하하길 좋아한다.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상대의 반론을 듣거나, 상대 앞에서 자신을 꾸짖어 상대의 칭찬의 말을 듣는 만족을 맛보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자신을 비하하여 만족을 얻는다. 루딘을 비평하며 피가소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 남자는 먼저 자신을 욕한다. 스스로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다—그래서 어떠한가. 세간에 얼굴을 내미는 것마저 싫어졌을 텐데. 천만에, 그 자신은 기분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쓰디쓴 보드카를 마시고 있는 꼴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이 루딘과 흡사하다. 이런 식으로 오네긴도 자신을 폄하한 후, 타티아나의 앞에서 마음 넓은 사람인 척 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도 마찬가지이다. 그도 올가에서 자신을 비방하는 편지를 쓰고 나서, ‘더 이상 괴롭지 않다, 거의 행복하다고 해도 될 정도이다’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편지를 오네긴이 그가 설교할 때 했던 것과 같은 식의 훈계로 끝맺음했다. 즉 ‘나와의 사이에 있던 일들이—그는 말한다—당신 미래의 정상적 연애에 길잡이가 된다면 좋겠습니다’등. 물론 일리야 일리이치는 올가 앞에서 자신을 비하하는 관용을 언제까지나 계속하지는 못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편지가 그녀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달려간다. 그리고 올가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만족했다. 게다가—그녀가 괴로워하는 그 순간에 그녀의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행복을 배려해서’ 쓰여진 이 편지 속에서 그가 얼마나 천박하고 비참한 이기주의자인지를 그에게 증명했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물러나 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오블로모프 주의자가 성격이나 교양 면에서 자신보다 높은 여자와 만났을 때 항상 하는 일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라고 사려 깊은 사람들은 큰 소리를 내어 말한다—당신네들의 비교는 얼핏 보기에 똑같은 사실을 주워모으긴 했지만, 전혀 무의미하다. 성격을 규정할 경우 그 외면적인 현상보다도 오히려 개별적 행위의 바탕이 되는 의지 쪽이 중요하다. 그런데 행위의 바탕이 되는 의지에 대해 말하자면, 오블로모프의 행동과 페초린, 루딘, 그 외 인물의 행위 의식과의 사이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차이를 어떻게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가?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오블로모프는 모든 것을 타성으로 행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기 때문이며, 남이 그를 잡아당길 때에 그 장소를 고집하는 것또한 귀찮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목적은 손가락 하나라도 쓸데없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페초린과 루딘, 그 외의 인물들은 항상 행동욕에 좀먹히고 있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정열을 가지고 모든 일에 임한다. 그들은 끊임없이,</p><p class="ql-block">불안에 휩싸여</p><p class="ql-block">장소의 변화를 추구한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리고 그 외의 병, 강렬한 영혼의 징후에 지배된다. 혹시 그들이 실제 유익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힘에 걸맞은 행위를 발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초린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관청 책상에 붙박인 채 문서를 베끼도록 운명 지어진 천재와 같다. 그들은 주변의 현실보다도 높은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생활과 사람들을 업신여길 귄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모든 생활은 사물의 현존하는 질서에 대한 반동이라는 의미에서의 부정이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그러나 오블로모프의 경우, 그 생활은 현존하는 모든 힘에 대한 소극적인 복종이고, 모든 변화에 대한 보수적인 혐오이며, 천성 속 내부적 반응의 완전한 결여이다. 이런 사람들을 비교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루딘을 오블로모프와 같은 선상에 두다니! 페초린을 일리야 일리이치가 빠져들어 있는 것과 같은 공허함이란 점에서 비난하다니! 이것은 완전한 몰이해요, 바보같은 짓이다, 그야말로 범죄다!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오오, 신이시여! 확실히 우리는 사려깊은 사람을 대할 때 방심은 금물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들은 당신이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결론을 이끌어낸다. 당신이 멱을 감으려 하면, 사려깊은 사람은 양 손이 묶인 채 절벽 위에 서서 자신이 멋지게 헤엄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혹시 당신이 물에 빠지면 당신을 구해 주겠다고 약속한다.—그러나 당신은 섣불리 ‘잠시 기다려 보게, 친절한 친구여. 자네는 양 손이 묶여 있지 않은가. 먼저 자신의 양 손을 풀 생각을 하게’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려깊은 사람은 곧 기분이 나빠져서 다음과 같이 말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아아, 그러면 자네는 내가 헤엄칠 수 없다고 말하는 거로군! 당신은 내 양 손을 묶은 자를 칭찬하고 있어! 당신은 물에 빠진 자를 구하는 사람을 동정하지 않는군! ······’</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매사 이런 식이다. 사려깊은 사람은 종종 놀랄 만한 달변가이며, 전혀 생각지 못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 선수다. ······이번 일도 그렇다. 곧 결론을 끌어내어, 우리가 오블로모프를 페초린이나 루딘보다 높이 평가하려 한다, 우리가 내내 드러누워 잠만 자는 오블로모프를 변호하려 하고 있다, 우리에겐 오블로모프와 그 이전의 주인공 사이의 내면적이고 근본적인 차이가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당장 이 사려깊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고자 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모든 것 속에서, 우리는 오블로모프와 그 밖의 다른 주인공들의 개성보다는 일반적인 오블로모프 주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예를 들어 개성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는 페초린과 오블로모프의 기질 차이를 무시할 수 없다. 이는 페초린과 오네긴, 또는 루딘과 베리토프에 대해서도 기질 차이를 찾아내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동일하다······. 사람들 사이에 개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에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긴 그 차이도 결코 일반적으로 예상하는 만큼 큰 것도, 중요한 것도 아니지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문제는 이 모든 인물들이 그들 위에 무위도식과 지상에 있어서 완전한 불필요성이라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는 것과 마찬가지인 오블로모프 주의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생활 조건 속이나 다른 사회에서 오네긴은 실로 선량한 젊은이였을 수도 있으며, 페초린과 루딘은 위대한 공적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베리토프는 실로 걸출한 인간이었을 수도 있다. 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다른 조건 속에서 자랐다면, 오블로모프와 첸체트니코프 또한 그런 게으름뱅이로 자라지 않고, 무언가 유익한 일을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제 그들 모두는 하나의 공통된 특징—즉 행동을 향한 장난기 어린 동경과, 자신은 많은 것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끝나리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점이다. 이 점에서 그들은 놀랄 만큼 서로 닮아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나는 내 과거의 모든 것을 추상한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사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 왔는가? 어떤 목적을 위해 태어난 것인가? ······그러나 틀림없이 목적은 존재한다. 그리고 나에게는 높은 사명이 있었다. 왜냐하면 내 마음속에서 한없는 힘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사명을 찾아보지 않았다. 나는 공허하며 보답받을 수 없는 욕정의 꼬드김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 욕정의 용광로 속에서, 무쇠처럼 단단하고 차가워져서 나왔다. 그러나 나는 높은 지향의 불꽃—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꽃을 영원히 잃어버렸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것은 페초린이다······. 한편 루딘은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그렇습니다. 자연은 나에게 많은 것을 부여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자신의 힘에 걸맞는 것은 무엇 하나 하지 않고, 무엇 하나 유익한 것도 남기지 않은채 죽어가겠죠. 내 모든 풍요로움은 공허하게 사라져 버리고, 나는 자신의 씨앗이 맺는 열매를 볼 일이 없을 겁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일리야 일리이치도 다른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 역시—‘내 안에 마치 무덤 속에서처럼 어떤 멋있고 빛나는 소질이 묻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이미 사멸해 버렸을지도 모르고 혹은 벌써 금화로 주조되었어야 하는 땅 속 금광처럼 공허하게 드러누워 있다는 것을, 고통스런 마음으로 느꼈다. 그러나 그 보물도 잔뜩 쌓인 티끌과 먼지 속에 깊숙이 묻혀 버렸다. 그것은 마치 세계와 생활이 그에게 선물한 보물을 누군가 훔쳐 그 자신의 마음속에 숨겨 버린 것 같았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连载 2에 계속 이어집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