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지만 화목하던 그 세월에 큰엄마네 기와집에 사돈의 팔촌까지 모여앉아서 웃고 떠들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옛말을 하면서 제사를 지내던 그 일이 가물가물 머리에 떠 오르면서 지나가버린 옛 추억을 아련하게 불러온다. 벌써 반세기도 넘게 흐른 먼 옛날의 이야기다. <br><br>중등키에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고 얼굴이 흰 배꽃처럼 말쑥하게 생긴 큰엄마는 회색 나는 겹저고리한복을 운치 있게 차려 입고 제사준비로 사전에 정성들여 사오고 보관했던 제물들로 상을 차리고 있다. 아버지네 삼형제도 옷차림새부터가 다르다. 삼베천으로 만든 길고 너른 두루마기를 입고 네모번듯한 사각삼베모자를 쓴다. 내가 보기에는 조금은 괴상하고 을씨년스러운 오싹한 감을준다. 제사는 저녁 "夕前" 석전부터 드린다. 사망하기 전날 저녁을 제사날이라고 한다. 방에 달린 출입문을 열어놓고 큰엄마가 차린 제상을 방안에다 들여놓는다. 그리고 돗자리를 문턱에서부터 바깥까지 죽 펴고서 할아버지 큰 아들 백부부터 술을 붓고 절을 세번 하고 다음은 마지막으로 밥을 딱 한술만 떠서는 물이 담긴 자그마한 공기에 놓는다. 아마도 일년에 한번씩 주시는 밥이니 할아버지가 불시에 드시다가 목에라도 걸릴까봐 물에다 밥을 말아서 주시는 모양이다. 그렇게 촌수에 따라서 내리 제사를 지내는데 한식경이 모자라게 긴 시간이 걸린다. 우리네 애들은 제사에는 마음이 별로고 제물에만 눈을 판다.언제면 저 느리고도 질긴 행사가 빨리 끝이나서 저녁밥을 먹겠는지? 조급하기만 하다. 한참이 지나서야 행사는 끝이났다. 하지만 새벽 한시 전에 또 제사를 지내여야 하기 때문에 제상의 소물은 고방에다 그 채로 보를 덮어서 보관한단다. 저 제사상의 과자며 사탕이며 곶감을 먹어보기는 백번도 틀렸구나. 나이 어린 나에게 그러루한 생각은 묘하게도 떠올랐다. 그 때에는 어려서 잠이 둔하니깐 새벽제사를 지낼 때에 깨여나지 못하면 내몫이 없어지고 만다. 먹을 게 별로 없던 세월이니 리해할 수 있는 일이다.<br><br>저녁상은 풍성했다. 말린 가지와 말린 풋고추, 무우 오가리 채소중의 상등인 고사리채 어쩌면 그렇게 입맛을 돋구는지 토기배떠리에 그대로 담아서 애들하고 엄마, 큰엄마, 고모, 륙촌, 사촌 언니들이 함께 정지 식장 앞에 앉아서 먹는다. 오고가는 젓가락과 숫가락이 누구의 것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갔다. 제 입안으로 들어가니 제 젓가락 제 숫가락인 줄을 안다. 이렇게 기껏 푸짐하게 먹고는 언니들과 함께 이야기도하고 옛말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보다는 나이 있고 세상 물정에 조금 눈이 밝은 사촌과 륙촌 언니들이 고방 구석에 앉아서 무엇을 하는지 문을 닫아걸고 우리를 멀리한다. 뭇별들이 깜박깜박 졸고 있고 쪼각달조차 구름 뒤에 숨어서 잠을 청한다. 퍼그나 지나고 밤이 깊어 가는데도 애들이고 어른이고 도무지 잘 념을 안한다. 어른들은 제사를 지내고 술 한잔이라도 드시고 싶고 애들은 제상의 과자며 사탕을 먹으려고 눈이 머룩머룩해서 기다린다. 눈이 천근무게처럼 내리깔린다. 나는 엄마 무릎을 베고서 잠깐 꿈나라에서 헤맨다. 비몽 사몽간에 큰엄마의 새된 목소리에 소스라치듯 놀라 깨여났다. <br><br>큰 엄마가 고방에 들어가더니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아니 글쎄 어느 놈들의 작간인지 제상의 소물들이 절반남아 축이났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십중 팔구는 짐작이 갔지만 큰엄마에게 일러 바치지는 않았다. 큰아버지가 큰엄마를 타이른다. "여보 너무 상심하지마오. 우둔한 애들이 한 짓이니 할아버지도 용서를 할 것이요. 남씨집안의 후손들이 잘 자라고 튼튼하고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것이 저승에 계시는 할아버지의 소망일 것인데 애들이 먹었는데 무었이 문제요."하고 자상한 소리로 말씀하셨다. 큰어머니도 욕소리를 멈추고는 상소물이 빈 자리에 채소 몇가지를 잘 다듬어서 올려 놓았다. 큰엄마는 종가집 며느리질을 빈틈 없이 잘하였다. 식구가 단촐해서 생활이 펴이였고 집도 팔간 기와집이지 낫을 놓고 기윽자도 모르지만 시비밝고 인물이 전 촌에서 상등으로 꼽히였다. 우리 엄마와 삼촌댁은 큰엄마의 말씀 한마디면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달싹도 못한다. 큰엄마는 상소물이 없어진 것이 우리 형제와 삼촌집 애들의 작간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엄마와 삼촌댁에게 애들 관리나 잘 하라고 훈계하고는 푸르딩딩해서 물러갔다. 물자가 귀했던 그 시절에 있었던 울고 웃던 이야기다. 지금은 어느 누가 그저 준다 해도 밀가루로 만든 압축과자 따위를 가지려고 안 하는데 먹지도 않는다. 내 손주들은 어지간한 음식물을 입에도 안댄다. 매일 먹다남은 과일이며 음료 따위며를 한아름씩 걷어서 쓰레기통에 버린다. 개혁 개방의 정책은 중국을 물자가 풍부하고 과학이 발전하고 인민 생활이 한급 높은 차원에로 제고 되게끔 부추켜 주었다. 그 옛날보다는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그 시절에 비하면 눈에 풍년이고 입이 풍년이고 마음도 풍년이다. <br><br>큰엄마가 늙어서 기력이 부족하자 큰집 오빠네 새 언니가 가마목을 차지하고 집안의 크고 작은 행사를 주관하고 처리하였다. 새 언니는 키가 작달만하고 야무지게 생겼다. 팔도향 오봉촌위생소에서 호사질을 하였는데 오빠에게 시집와서 역시 태흥촌위생소에서 호사로 일하였다. 새 언니도 종가집 며느리 답게 그렇게도 가마목일을 잽싸게 잘하였다. 제사때에도 어김 없이 무어나 푸짐하게 잘 차려서 집안 식구들을 먹인다. 언제 한번 인상을 쓰는 법이 없었다. 내가 시집가서 년년생 딸둘을 낳아서 업고 안고 오빠네 집에 놀려가면 애를 업어주고 달래주고 하면서 귀여워 하였다. 그런데 명이 짧았다. 간경화복수로 앓다가 57세에 세상을 떠났다. 오빠와 언니가 사망한 후 종가집 제사는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br><br>지금은 제사가 무었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한해에 한, 두번씩 청명과 추석에 뫼에 가서 제사를 올리기도 힘에 겨워 한다. 언제 사촌, 오촌에 숱한 사람들을 모여놓고 우리 큰엄마처럼 새 언니처럼 제사를 차리겠는가? 시대가 변하였고 풍속도 변하였다. 조선 팔도에서 유명한 옛말의 주인공 최팔남의 누이는 작은부처 큰부처 몽땅 부셔 버리면서 하는 말이 살아있는 시부모 모시기도 힘든데 언제 죽어없어진 조상까지 모시겠는가고 한다. 지금 시대는 그게 아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전통 문화, 혼례, 제사가 력사의 소용돌이 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제 새끼 키우기도 힘들고 밥벌이 하기도 힘든 세월인데 언제 그런 케케 묵은 자질 구레한 일에까지 신경을 쓰랴고 그거다. 시대에는 시대에 따르는 류행어가 따로 있다. 좌우간에 큰엄마의 정성들인 조상에 대한 제사덕분인지 우리 집안에 시집온 며느리들이 하나 같이 몽땅 아들을 낳고 잘 지내였다. 그 세월에 집안의 친척 언니들과 함께 큰아버지네 집에 모여서 먹고 자고 하던 일이 감회가 새롭다. 그 세월은 영원히 흘러가 버렸다. 엄마네 세대도 세월 속에 파뭍히고 말았다. 지금은 무어나 간단하게 편리하게 인간관계도 간단하게 한다. 사촌도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고 제 돈을 벌고 제 집 애들만 돌보고 이것이 핵가족이다. 빠른 절주 시대에 적응 하는 것이 상책이니깐. 시대에 따라서 좋은 점이 따로 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br><br>한 집안이고, 남씨라고 함께 어울려서 한 동네에서 살던 그 후손들은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한번 쯤은 남씨 집안 모임을 굉장하게 차례야 할텐데 그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