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우리 아버지네는 남자만 삼형제였다. 아버지가 중간이고 우로는 큰아버지 아래로는 삼촌이 한분 계셨다. 삼형제는 촌에서 거리가 얼마 안되는, 걸어서 십분이면 제꺽 모일 수 있는 가까운 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아버지 사촌과 륙촌 형제들이 모두가 연변 각지에 자리잡고 살고 계셨는데 좌우간 남씨가 많기로 유명하였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하지만 큰아버지네는 딸자식 한 분밖에 없었다. 남편을 따라서 북조선에서 살다보니 우리 집 큰 오빠가 백부 앞을 서서 즉 백부 아들로 들어갔다. 옛날에는 그런 법이 있었다. 형님에게 자식이 없으면 동생이 자기의 큰 아들을 형님 앞에 세워주고 동생에게 자식이 없으면 형님은 당신의 지차 아들을 동생 앞에 세워준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습관적으로 그 오빠를 큰집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는 공부하려 외지에 나가있고 집에는 별로 없었다. 백부네 내외는 팔간집을 쓰고 살았는데 60년대 그 시절에는 보기드문 기와집이였다. 사방 몇십리 안에 기와를 지붕위에 얹어놓고 사는 집은 촌에서는 그 백부네 집이 유일하였다. 외지에서 간부들이 모여와도 백부네집을 려관처럼 쓰곤 하였다. 백부가 이름이 무었인지는 몰라도 기와집이라 하면 태양향에서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동네에서도 습관적으로 기와집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지금은 쌔구 버린게 벽돌집과 기와집이지만 그 년대에는 실로 기문이였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남씨 집안에서 제일 크게하는 행사가 제사를 지내는 일이였다. 해마다 겨울철이 되면 할아버지 제사로서 음력 시월인데 그 때에 나이 어렸던 내가 어느 날이였던지는 딱히 모르겠고 남씨네 집안 형제들이 모여서 제사를 굉장히 치루었던 일만이 간간이 떠오른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애들만 하여도 소학교 한개반급은 실이된다. 벌써 우리 형제가 다섯이고 삼촌네도 다섯이다. 거기에 한 마을에 사는 륙촌언니들이 자그만치 오륙명은 되고 조카벌이 되는 애들도 상당수다. 또 이미 시집을 멀리 타지방에 가서 남편이며 자식들을 거느린 오촌고모들까지 꾸역꾸역 모여든다. 어떤 때에는 보고 싶은 고모들은 아니오고 초하루 보름에도 생각이 안나는 고모부들만 벌써 하루 전에 와서는 방 구석을 차지 한다고 큰엄마가 우수개 비슷하게 푸념하셨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큰엄마는 원체 단촐하게 살다보니 애들과 손님들을 썩 달가와 하는 분이 아니였다. 하지만 조상에게 지내는 신성한 제사때는 례외였다. 한마디 군소리 없이 애들과 문객 "사위" 들이 배부르게 먹고 잠자리가 불편함이 없도록 자상하게 살펴준다. 겨울이니깐 아무리 팔간집이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몇십명의 식구들이 이틀 사흘씩 먹고 자고 하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였다. 저녁이 되면 고방에서는 동생을 업고 온 우리 엄마와 삼촌댁에 우리까지 여기저기에 누워서 대충잠을 잔다. 방에서는 문객들과 사촌, 륙촌 오빠들이 한데 모여서 잠을 자고 정지 아래켠에서는 아버지 백부 삼촌에 고모부들의 잠자리가 마련되고 가마목에서는 큰엄마 륙촌언니 오촌고모들이 함께 자리를 펴고 누웠는데 기실은 오래 만에 만난 김에 그립던 회포를 풀고 옛말을 하느라고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이튿날이 바로 제사날이다. 제사날에도 손님들이 문턱이 닳도록 산지사방에서 모여든다. 북적북적하고 흥성흥성하다 .지금은 무슨 잔치든지 간단하게 혼례청에 가서 하고 그날로 하객들이 뿔뿔이 혜쳐진다. 그 세월처럼 구들에 모여앉아 때식을 받아먹지 않는다. 사회가 발전하고 모든 것이 간편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아마 진보일 것이다. </p><p class="ql-block"><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