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수필]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 ’찔레꽃’을 불러주세요.”</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나의 말에 어머니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있게 운을 뗐다. 차분하고 간드러지게 그리고 진지하게 노래를 불렀다. <찔레꽃> 1절이 끝나자 2절까지 불렀다.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가사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힘든 고음처리까지 음 리탈이 없이 거뜬히 불렀다. 형제들 모두 깊이 감동하였다. 어머니의 기억력과 가창력에 감동하였고 어머니의 정신과 자신감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솔직히 어머니보다 젊은 우리들에게 당장에서 그 노래를 불러라고 했더라면 완창을 할 사람이 없었을것이다. 노래를 안다고는 하지만 노래방기계가 아니면 가사 두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가 우리세대다. 어머니는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어머니에게서 풍기는 인간의 존엄이란 무엇인지? 나는 요즘 어머니에게서 그런 것을 배운다. 살아있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배운다. 숨이 붙어있으면 사는 것이 아니다. 존엄이 없는 인생은 살아있어도 죽은것이다. 문뜩 오규현 시인이 쓴 “죽고난 뒤의 팬티”가 떠오른다. 여러차례 교통사고를 겪은뒤 시속 80킬로메터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잡고 언제 팬티를 갈아 입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눈동자를 굴린다는 시이다. 산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대하여 신경을 쓴다는 그런 내용의 시이다. 이런 것이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인간의 최후의 존엄이라고 생각한다. 죽은뒤의 팬티를 걱정하는데 비하면 아직 살아계시는 어머니께서 자신의 머리를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가 싶다. 이는 나의 어머니께서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에게 남겨진 삶을 가장 치렬하게 열정적으로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나는 어머니를 돌보면서 대신 어머니에게서 삶을 배우고 철학을 배우고 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2020년 4월 28일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span><b style="font-size:22px;">엄마가 있어서 참 좋다</b></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글/전 영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화창한 봄이 물러간 자리에 어느덧 록음이 짙은 여름이 성큼 들어섰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잡는다고 머물지 않는 계절의 바뀜은 거침이 없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오늘 아침에도 여느 날처럼 자리에 누워있는 엄마에게 죽 한숟가락을 떠드리는데 “나도 코로나19 핵산검사를 받아야 하지 않겠니?”라고 불쑥 물어오신다. 구순이 훨씬 넘은 년세에 그것도 8년째 누워만 계시는 엄마의 뜬금 없는 물음에 마음이 포실해지면서 롱을 건네고 싶어졌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엄마, 빨리 죽고 싶다면서? 인젠 이 딸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면서?”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래, 너를 그만 애 먹여야 하는데… 인젠 집에 누워있지 말고 산에 가 누워있어야 하는데…”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엄마가 말끝을 흐리운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엄마 또 거짓말하는구나. 백살까지 살고 싶어하면서. 나 얼른 가두에 가서 알아볼게. 나 오늘 아침에도 소원을 빌었어. 엄마를 오래오래 살게 해달라고. 백살까지 나랑 같이 오래오래 살게 해달라고.”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엄마가 합죽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나의 손을 꼭 잡는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고마워.”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엄마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나고 눈 가장자리가 아려난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나의 하루는 자리에 누워있는 엄마를 위해 아침에 죽을 끓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엄마의 얼굴과 몸을 닦아드리고 양치시킨 후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를 빗질해드린다. 그리고 아침 6시부터 세시간에 한번씩 여러가지 영양식을 믹서로 갈아서 비위관(코에 삽입하여 음식을 식도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관)을 통해 대접한다. 또 매일 두번 이상 몸을 주물러드리고 일부러 화제거리를 찾아서 대화도 나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7년이 넘도록 자리에 누워있는 엄마는 여태껏 욕창 한번 생기지 않았고 정신상태도 아주 또렷하다. 옆에서 엄마의 수발을 드는 나를 두고 요즘에 보기 드문 효녀라며 주위에서 칭찬이 끊이지 않지만 솔직히 부끄러울 때가 많다. 긴병에 효자 없다고 가끔은 ‘엄마가 정말 백살까지 살지 않을가? 나도 인젠 나이가 들어서 힘든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으니 말이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한번은 엄마가 섭섭한 얼굴로 이런 말을 꺼내였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지난번 애들(증손)이 왔을 때 세배돈도 주지 못했구나.”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 소리를 듣는 순간 아차했다. 종일 누워있는 엄마는 돈 쓸 데가 없다는 리유로 용돈을 드리지 않은 지 오래되였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달포전인가 아들며느리가 손자를 데리고 ‘어머니의 날’이라며 생화를 사들고 집으로 찾아왔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엄마, 많이 힘들 텐데 우리 할머니를 료양원으로 모실가요?”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아들의 말에 며느리도 동을 달았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요즘은 다들 료양원에 모신대요. 어머니도 이젠 로인이잖아요. 비용은 저희가 댈게요.”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하긴 나도 한해가 다르게 기력이 못해지고 여기저기 아파나서 병원출입이 잦아지니 엄마의 수발이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잠시 엄마를 료양원에 모셔갈가 고민하다가도 어린시절 나에게 쏟아부은 엄마의 정성을 떠올리면 저절로 절레절레 고개가 저어진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9살 때, 나는 하교길에 큰 사고를 당하게 되였다. 뼈가 으깨지며 극심한 통증이 덮치는 순간 의식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이였다. 그번 사고로 나는 설 수도 걸을 수도 없는 신세가 되여버렸다. 223부대병원, 연변병원, 연변중의원, 광명가의 용하다는 마의사, 철남 끝에 있는 골과전문의 왕의사… 엄마는 용하다는 의사와 좋다는 병원을 찾아 나를 등에 업고 사처로 돌아다녔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한 때가 아니였고 밀차조차 빌리기 힘들었다. 엄마는 나를 등에 업고 걷다가 힘들면 내려놓고 잠간 쉬였다가 다시 가면서 끝끝내 나에 대한 치료를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찾아간 곳은 천진에 있는 어느 큰 골과병원이였다. 의사들은 두가지 치료방안을 내놓았다. 하나는 썩어들어가는 둔부의 뼈를 잘라내고 불수강으로 만든 인조골격을 해넣는 것인데 걸을 때마다 잘각잘각 소리가 날 수도 있다는 것이였다. 다른 하나는 영양보충으로 뼈의 성장을 촉진하면서 림상치료를 결부하는 것이였다. 엄마는 두말없이 두번째 치료방안을 선택했다. 그 뒤로 4년 반 동안 엄마는 춘하추동 하루도 거르지 않고 종축장의 우유를 받아와서는 닭알, 포도당, 어간유, 칼시움제 등과 함께 끼니마다 나에게 먹였고 여름에는 꿀, 겨울에는 엿을 달여서 두 동생을 빼놓고 나만 먹였다. 한동안은 하루에 침만 20여대씩 맞아야 했다. 엄마는 침만 보아도 진저리를 치는 나를 옆에서 얼리고 달래주었다. 아픈 침을 꼬박꼬박 맞게 하는 엄마가 얼마나 밉고 원망스럽던지… 반년 쯤 지나 검사를 받으니 뼈가 좀씩 자란다는 것이였다. 그렇게 엄마의 지극한 정성으로 4년 반 만에 나는 또래 아이들처럼 정상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사람들은 “녀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로 어머니의 아름다운 모성애를 칭송한다. 그만큼 자식을 위한 엄마의 희생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태여나서부터 유난히 잔병치레가 많았던 나는 이래저래 엄마에게 아픈 손가락이였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로 4남매를 키운 엄마는 평소에 아버지 몫까지 사랑을 주면서 자식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고 모지름을 썼다. 자식들 중에서 가녀린 엄마 등에 제일 많이 업혀다닌 것도, 엄마의 애간장을 제일 많이 말리운 것도 둘째딸인 나였다. 그렇게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엄마가 올해 94세이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지난해 봄, 팔순의 엄마를 떠나보낸 친구를 잠시 부러워한 적이 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친구의 엄마는 재작년까지 뇌출혈로 고생하시다가 호스피스병원에 들어간 지 한달 만에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서 친구는 눈물을 떨구지 않았다. 이제 엄마가 안 아프니 다행이라는 그녀의 말이 슬프게 들렸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그녀는 쉬고 싶다면서 려행을 떠났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럴가 싶었다. 홀가분하다고 말하는 그녀가 홀연 부러우면서 엄마가 어깨에 짊어진 짐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3년간 부모님의 수발을 들고 효도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7년이 넘도록 엄마의 수발을 든 나는 엄마에게 빚진 것이 없다고 여겼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러던 그 친구가 올봄에 부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며 이런 말을 건넸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넌 엄마가 있어서 좋겠다. 앓는 엄마가 돌아가시니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엄마가 없다는 것이 너무 슬퍼. 살아계실 때 잘해드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엄마가 있어서 좋겠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집에 돌아와서도 그녀의 말이 자꾸 귀전을 울리면서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반포보은(反哺报恩)이란 고사가 떠올랐다. 새끼까마귀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줌으로써 낳아서 키워준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자식이 자란 후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게 마땅하다는 도리를 깨우쳐주는 이야기이다. 엄마 등에 업혀서 병원에 다니던 어린시절에 나는 매일 밤 잠들기 전이면 엄마를 내 옆에 오래오래 있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어도 엄마가 좋고 엄마를 잃고 싶지 않았고 엄마랑 더 오래오래 살고 싶어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는 더더욱 엄마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암, 이제껏 해오던 대로 엄마를 섬겨야지.’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굳이 엄마의 마음속에 효녀로 남고 싶은 욕심 따위는 없다. 그저 이 몸을 낳아서 키워주어 고맙고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힘 자라는 대로 섬기고 싶을 뿐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 걱정으로 로심초사하며 자식을 마음에 품고 있는 엄마, 그런 엄마를 이 나이에도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바라볼 수 있으니 나는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인가.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엄마가 있어서 참 좋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엄마는 나에게 하늘이고 전부이니까.</spa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