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 style="color: rgb(176, 79, 187); font-size: 22px;"><i><u>솔파도는 바닷바람에 놀고• 련봉산 </u></i></b></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i style="color: rgb(22, 126, 251); font-size: 22px;"> 강선화 </i></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늦둥이아들애의 두달도 넘는 여름방학도 어느샌가 끝나가고 있던 어느날, 무의식간에 꼽아본 아들애의 과외반이 여덟개나 되여 나로서도 깜짝 놀랐다. 마침 전날 학교에 가서 핵산검사를 받으며 겨우 85점이나 맞게 쓴 방학숙제마저 바쳐버렸기에 급기야 여름방학의 꽁무늬나마 붙잡아보려고 아들애를 데리고 북대하의 련봉산구경을 떠나게 되였다. </p><p class="ql-block"> 련봉산은 비록 크지도 높지도 않지만 이른바 <산의 령검함은 높음에 있지 않고 신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리고 소(水潭)의 령검함은 깊은데 있는게 아니라 룡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렸다>고 력사가 유구하고 력사적인 인문학 인소가 비교적 돌출된 곳이다. 고대엔 18세의 진시황영정, 24세의 한무제류철, 52세의 위무제조조, 46세의 당태종 리세민이 왔었으며 신해혁명이래 강유위, 서세창(徐世昌), 주학희(周学熙), 장학량, 주계금(朱启钤)등 력사상의 많은 풍운인물들이 북대하에 찾아와서 련봉산에 올라 옛사람들을 추모하며 창해를 바라보았다. </p><p class="ql-block"> 1893년 개란(개평)광무국총공정사인 영국인 김달이 진유철로(津榆铁路)를 답사하면서 친구인 양계림(杨季琳)을 설복하여 북대하해변가에서 별장 한채를 지어 유람하러 온 외국인들이 거처하게끔 하였는데 이것이 북대하 최초의 “섭외여행”업의 전신이다. 1895년에 이르러 영국 전교사 감림이 동계관산(东鸡冠山)의 절반땅을 세맡아 두채의 별장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그곳이 북대하최초의 별장으로 되였다. 몇년후 북대하해변가에는 한채한채의 별장들이 우후죽순마냥 일어서게 되였고 영국, 프랑스, 로씨야, 미국 등 외국인들이 분분히 모여들게 되였다.</p><p class="ql-block"> 1916년 중국조기의 도시건설전문가인 주계금이 북대하구역의 도로계획을 주최제정하고 련화석공원(莲花石公园, 련봉산공원의 전신)과 관음사(观音寺)등 건축을 세움으로써 북대하해변의 관광단지건설이 현대의 궤도에 들어서게 하였다. 1949년 새중국이 성립될때 북대하해변가의 련봉산아래 별장이 도합 719동이 있었는데 그중 외국인 별장이 483동, 중국인별장이 236동이였다. 이곳은 구중국의 4대별장구역인 로산(庐山), 북대하, 막간산 (莫干山), 계공산(鸡公山)가운데서 유일한 해변별장구역이다.</p><p class="ql-block"> 북대하가 여름휴양사무구역으로 건설된 100여년간에 련봉산은 중국근현대사상의 많은 중대한 력사사건을 겪어왔다.</p><p class="ql-block"> 1954년, 61세의 모주석은 련봉산 장학량의 별장에 머물면서 망해정에서 해돋이구경을 하며 조조의 <창해를 바라보노라>중의 명구들을 읖조리면서 시사중의 절창으로 꼽히는 <파도는 모래를 일어내고• 북대하>를 써내였는데 그중 <소슬한 가을바람 오늘도 불어와 세상을 바꾼다>는 영원한 명시명구로 되였다.</p><p class="ql-block"> 1973년 9월 12일 밤 자시, 무장정변음모가 폭로된 림표,엽군부부와 아들 림립과등은 바로 북대하 서해탄에서 2키로 떨어진 련봉산련화석옆의 청회색 별장 96호(모택동주석 95호별장)에서 국산 제일의 <붉은기1호>를 타고 산해관비행장으로 출발했었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 처음으로 우리를 맞이한것은 구불구불한 산길옆의 수림가에 위치한 <시녀기려상>《仕女骑驴像》이다. 고동색의 석상은 대개 두메터높이로 당나귀는 단단하고 기민해보였고 나귀를 탄 여사는 오른손에는 양산을 받쳐들고 왼손에는 나귀고삐를 가벼이 쥐고 있었는데 얼굴이 이쁘장하고 몸매가 날씬했다. 어깨에 닿을듯 말듯한 숯많은 곱슬머리엔 세로무늬의 흰캡을 쓰고 있었고 몸에는 나시 스커트를 깡똥하게 차려입어 동실한 어깨를 드러내고 있다. 미끈한 다리는 윤택이 흐르고 발에는 간편한 목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세련되고 대범해보인다. 이 석상은 재밌는 이야기와 력사가 있는 명소이다.</p><p class="ql-block"> 청조광서22년(1896년 ),영국전도사 감림의 계관산 별장이 락성의식을 거행하던 날 , 많은 친우들이 찾아와서 축하를 하였는데 그중 이쁘장하게 생긴 영국여사가 산아래의 농가에서 나귀 한마리를 빌려타고 오다가 이 수림밑에서 잠깐 쉬여가게 되였다. 마침 손님들가운데 영국 화가 한명이 그녀의 예쁜 모습을 보고 당장에서 측면사생화를 한장 그리게 되였는데 이것이 바로 중외로 유명한 “시녀기려도”《仕女骑驴图》이다. 영국철도공정사 김달은 이 그림을 영문으로 찎어서 포스터광고로 썼다. 후에는 경봉(京奉)철로국이 매년 여름철이면 각지의 기차역과 외국대사관 및 외국인거주지에 내붙이는 선전화로 중외인사들이 북대하에 놀러오도록 선전하는 광고로 썼다. 자료에 따르면 이는 중국역사상 첫번째로 되는 여행포스터광고화이다. 훗날 또 이 그림을 모본으로 옛날 그 자리에 이 석상을 세우게 되였다.</p><p class="ql-block"> 석상속의 녀인이 너무 예뻐서 나도 살며시 시 한수 읊는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천년의 예쁜 모습</p><p class="ql-block">만년의 석상으로 남겨</p><p class="ql-block">그 미모 세상에 자랑하고</p><p class="ql-block">그 풍경 천하에 알렸어라</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예쁜 얼굴 봉긋한 청춘으로</p><p class="ql-block">세인의 갈망 한가슴 불태우고</p><p class="ql-block">치켜든 양산 거머쥔 고삐로</p><p class="ql-block">떠나는 세월 살며시 잡았더라</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소박한 모습으로 청춘을 불사르고</p><p class="ql-block">담담한 눈길속에 력사를 정시하며</p><p class="ql-block">고요한 사색속에 미래를 부르나니</p><p class="ql-block">도고한 당나귀도 갈길은 알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두귀 쫑긋 세우고 두코 벌름거리며</p><p class="ql-block">세월의 소리 듣고 있느냐</p><p class="ql-block">변혁의 냄새 맡고 있느냐</p><p class="ql-block">커다란 두눈으로 모두 보아가거늘.</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사진 몇장을 찎고서 우리는 구비진 돌층계를 따라 올라 전설속의 <피우석>(避雨石)을 보게 되였다. 계관산풍경구 옹석(翁石)의 동쪽에 위치한 이 바위는 높이가 4~5메터가량되는 거대한 암석 두개가 마치 앞다리를 공중 들고 일떠선 몸집이 우람진 코끼리처럼 버티고 서있는데 어떤 신비로운 힘이 머리가 크고 발이 가벼운 괴물을 떠받치고 있는듯 하다. 바위꼭대기가 경사지게 앞으로 뻗어있어 처마같기도 하고 우산같기도 한 이 바위는 아래부분이 안쪽으로 깊이 파여져 여러사람이 동시에 비를 피할수 있다. </p><p class="ql-block"> 전설에 의하면 이 바위는 좋은 사람만 비를 피할수 있게 해주고 나쁜 사람이라면 에누리없이 물에 빠진 병아리로 만든다고 했다. 모두들 “<전설에 의하면>은 신화이고 <옛날옛적에>는 동화라고 하더니 오늘 우리는 진실하게 이 신화이야기속에 서게 되였다. 세상에 진짜로 그렇게 시비를 분별할줄 알고 선악과 이쁘고 추한걸 가려낼만한 암석이 있을까? 모든게 사람들이 하늘과 대자연이 덕행을 널리 알리고 악행을 없애치우며 천하의 선량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주기를 기도하는 바램이리라.</p><p class="ql-block"> 피우석에서 우불구불한 돌층계를 따라 오십보가량 올라가면 주홍칠을 한 정자가 나타나는데 <림풍정(临风亭)>이라고 쓴 간판이 보인다. 정자우에서 바라보면 파아란 나무숲우로 아득하게 뻗어져나간 회색하늘과 회색빛 바다가 머얼리 하늘끝에서 해천일색을 이루었고 왼손편의 바다가 푸른 숲속에는 빨간 지붕을 둘러쓴 노란 벽의 천가만호의 주택들이 빼곡하게 박혀있다. 자세히 눈여겨보니 망망한 바다에는 적어도 열몇개는 되여보이는 작은 고기배들과 예닐곱척의 커다란 륜선이 멀리서 항행하고 있는게 희미하게 보였다. 단지 멀고먼 거리와 보일듯말듯 얄포롬한 안개에 휩싸여 얼핏 보면 그저 스쳐지날정도로 몽롱할뿐이였다.</p><p class="ql-block"> 림풍정에서 내려오니 푸르른 주단이 펼쳐진 왼손편 언덕위에 <쌍산소바>라고 씌여진 패쪽이 보이고 그 우로는 네개의 절구통보다도 굵직한 통나무탁자가 두메터사이를 띄우고 자리를 잡았고 탁자의 주위에는 세멘트로 만들어진 나무밑둥을 잘라낸듯한 돌걸상들이 네개씩 보였다. </p><p class="ql-block"> 여기는 산과 바다가 서로 비껴져있고 꽃과 수림이 우거져있어 공기가 청신하기로 이름이 높은바 “페를 세척하는 산소바”로 불리우고 있는 최고의 피서지이다. 또 국내에서 보기드문 옛날의 지형지모와 식물피복이 완정하게 보존되여 있고 바다와 가까와서 수림속의 음이온함량이 기본상 3000~8000/cm3 에 달하고 최고실제측량농도가 14000/cm3에 달하여 일반 도시의 공기속 음이온 함량의 10~20배에 달한다. 1954년도에 중앙에서 여기에 피서료양지를 세우고 해해년년 중앙수장들을 접대하게 된데는 북경과의 거리로 인한 지리적위치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것은 바로 산과 바다를 끼고 있는 북대하의 수려한 풍경과 풍부한 음이온을 듬뿍 함유한 맑고도 청신한 공기를 념두에 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p class="ql-block"> 쌍산소바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삐딱하고 구부정하게 자란 물통만큼 굵직굵직한 소나무들이 여기저기 불쑥불쑥 보이는 기암괴석과 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스쳐가는 바닷바람에 이기지 못하고 문인묵객들의 발목을 잡았당기는 쏴—쏴—하는 솔파도소리로 <송음정>이란 이름의 유래를 자꾸자꾸 재언명하고 있고 삼십보밖에는 위인의 발자취가 찍혀진 또 하나의 정각인 <망해정>이 있고 망해정의 발치에 <모택동관일처>라고 적혀진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위인의 발자취를 밟고 있다는 격동된 심정에 조용히 읊어보는건 나의 감동, 감회, 감념이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천년의 솔파도소리 </p><p class="ql-block">만년의 만경창파속에</p><p class="ql-block">붉은해 오늘도 바다를 물들이고</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창해상전의 비바람속에</p><p class="ql-block">억조창생의 발자취속에</p><p class="ql-block">어젯날 위인은 오고 또 갔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울창한 솔나무 헤치고</p><p class="ql-block">창망한 바다를 바라보며</p><p class="ql-block">영웅의 위업을 새겨보고</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기암괴석 석반길 따라</p><p class="ql-block">우중충 련봉을 톱으며</p><p class="ql-block">구만리강산을 굽어보면</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영웅은 언제나 천리를 보고</p><p class="ql-block">위인은 언제나 만리를 아나니 </p><p class="ql-block">강산은 호매로운 기백의 기록자여라.</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 모택동관일처의 비석앞으로 엄마의 보배보자기 한귀퉁이가 비죽이 터진듯 바다로 통한 갈림길 하나가 있는데 분명 망해정보다 이삼메터가량 낮았음에도 오히려 나무가지 무성한 정각우에보다 너무나 산뜻하게 아름다운 산아래 바다가의 동네가 환히 바라보이는 곳이다. 바로 송조의 륙유가 읊었던 <산과 물이 첩첩하여 길이 막혔는가 하였더니 버드나무 우거지고 백화가 만발하니 동네 하나 또 나지네>시구 그대로다.</p><p class="ql-block"> 1954년4월, 모택동주석은 여기에서 창해를 바라보고 해돋이를 구경하며 조조의 명시 <창해를 바라보노라>를 흥미진진하게 랑송하시였고 북대하사람들의 자랑으로 된 서사시 <파도는 모래를 일어내고 • 북대하>를 창작하셨다. 위인의 시사는 북대하해변가의 늦여름과 초가을사이의 장려한 경치를 생동하게 묘사하여 무산계급혁명가의 웅장한 기개와 드넓은 도량을 보여주었는바 조조의 <창해를 바라보노라>보다 더욱 선명한 시대감, 심오한 력사적사명과 더욱 광활한 우주감각 및 풍부한 미학적용량을 구비하고 있다.</p><p class="ql-block"> 여기저기 산모퉁이의 바위와 절벽에 옛날 명인들의 시구와 명언으로 된 마애석각이 보이는 신산에서 16.8메터로 하늘 향해 치솟은 금빛휘황한 <진산보저(镇山宝杵)>를 바라보고 내려온 우리는 쌍산소바에서 한참을 푹 쉬고 나서야 천천히 관음사로 출발했다. </p><p class="ql-block"> 그쪽으로 가면 <9.13사변>의 제조자인 림표부통수가 외몽골로 망명의 길을 떠나기전 마지막 며칠간을 묵었던 림표별장을 지나게 된다. 근년에 문을 닫고 참관을 사절하는 력사의 의미지는 왕왕 더욱 신비로운 색채를 띠고 있는것이다.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는게 어찌 나뿐이랴.</p><p class="ql-block"> 길의 량켠에는 분명 한그루한그루 정성들여 가꾸어온 일매지게 높고도 미츨한 소나무들이 시시각각으로 명령을 기다리는 전신무장한 경위련전사들처럼 엄숙하고 정연하게 버티고 서있다. 길의 왼손편에는 지세가 낮아서 어둑침침한 골짜기들이 수풀에 가려서 더욱 으슥해보이고 오른편은 지세가 왼편에 비해 훨씬 높았는데 울울창창한 송림이 높다란 산중턱에서 어마어마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한그루 한그루의 소나무가 모두 물통만큼 굵직굵직한것이 엄연히 엄격한 선발을 거친 경위련의 정예병들 모습으로 건장하고 위풍당당하다. 소나무와 소나무사이는 모두 한메터가량의 거리를 두고 있는데 거의 매그루의 소나무마다 완전 나팔꽃줄기같은 기생식물의 줄기가 무성하게 자라서 두세메터높이에서 푸르른 손을 내밀어 소나무가지를 칭칭 동여매고 있다. 량편의 수림사이로는 그옛날의 홍기CA722승용차가 언제든지 120키로의 전속으로 달릴수 있었던 반듯하고도 탄탄한 세멘트길이 구불구불 신비로운 산속으로 뻗어져나갔다. 산의 량켠에는 산세에 따라 보기에도 번듯하고 든든한 세멘트담장을 한자두께로 두툼하게 쌓았는데 오른쪽에는 지세가 높아서 거의 끈기지 않고 2~3메터의 부동한 높이로 구불구불 이어지고 왼켠에는 지세가 높은 곳에만 반메터나 한메터의 높이로 가끔씩 보이는데 뭉턱뭉턱 끊어진 느낌이 없이 극히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지만 어딘가 엄숙하고 정연한 느낌을 준다. 주변 어디에서도 볼수없는 위엄스런 담장과 산속으로 구비쳐간 세멘트길이 모두 반세기의 세월에 씻기우고 바래운듯 세멘트색 그대로 창백한 흑회색인데 지세에 따라서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한것이 마치 구불구불 살아움직이는 거대한 흑룡을 방불케했고 담장의 꼭대기에 올린 자그맣고 촘촘한 기와들은 꼭 룡의 커다란 비늘을 상상시킨다. 어제날의 위엄과 오늘의 신비로움이 모두 묵묵히 무언의 존재속에 진실하게 감추어져 있다.</p><p class="ql-block"> 600메터가량 걸으면 관음사이다. 관음사는 원명이 광화사인데 명조때 건축되고 청건륭60년(1795년)에 재수건하였는데 지금은 문전, 정전, 대청과 회랑 모두가 청조때 재수건된 건물이다. 관음사는 아늑한 수림, 골짜기와 괴석속에 묻혀있으며 2~3백년전의 명청시기에 심어진 회화나무와 백송나무가 있다. </p><p class="ql-block"> 우리는 몇메터간격을 사이두고 줄줄이 늘어선 경비대원들이 지키고 선 림표별장의 흑빛담장밖의 계곡속에 묻힌 길을 따라 귀로에 올랐다.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주덕부주석과 강극청어머니, 류소기주석과 왕광미녀사, 경애하는 주은래총리와 등영초어머니, 리선념, 양상곤, 등소평, 강택민, ...... 무수한 로일대의 무산계급혁명가들과 수령들, 그리고 당대의 영웅호걸들이 호호탕탕하게 끊는 피를 흘리며 걸어온 길이고 또한 나의 세대와 아들의 세대, 그리고 우리의 자손들이 대대손손으로 금빛휘황하게 수놓아가야할 길이다.</p><p class="ql-block"> 빨갛게 타오르는 저녁노을이 아프리카 대사막의 플라밍고처럼, 진붉은 늦가을의 단풍잎처럼 서쪽 하늘과 아들애의 동통한 얼굴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천태만상의 기암괴석과 수백년의 력사를 지키고 서있는 소나무숲이여! 루루천년을 흘러온 인류력사와 수천수만년을 파도쳐온 푸르른 바다여! 그대들의 신비로움이 없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얼마나 무의미하고 쓸쓸할거냐!</p><p class="ql-block"> 면면이 뻗어나간 련봉산은 오늘도 억만년을 출렁거려온 푸르른 파도속에서 청신한 바다향이 듬뿍 실린 미풍에 살랑거리며 조용히 따뜻하게 력사의 매 한페이지를 품고서 세상 방방곡곡에서 구름처럼 모여드는 유람객들을 그 창창한 솔파도소리로 맞아주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 2021.9.15.초고</p><p class="ql-block"> 2022.7.5.3:01수개.</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