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협회를 이끌던 나날들의 이야기(한국KBS방송 체험수기특별상)-박영옥

慧莲

<p class="ql-block">  지금으로부터 22년전인 1997년 1월의 어느날, 이용득선생이 날보고 지금 연변에 아동문학협회가 공백인데 안도에 이 협회를 설립할 계획이니 김동철씨가 회장, 내가 부회장을 맡아하라고 하셨다. </p><p class="ql-block"> 처음에는 다리가 장애인 내가 해낼수 있을가? 하고 고민하다가 믿어주시는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쾌히 동의하였다. </p><p class="ql-block"> 그해 2월 1일, 그날은 대한절기에 어울리지않게 날씨가 봄처럼 따스했다. 오전 열시에 우리 다섯회원(이용득, 김동철, 류영녀, 장은숙, 박영옥 )은 장은숙집에 모였다. 붓글씨를 잘쓰는 김동철씨가 하얀종이에다 빨간색으로 “안도현 토월산 아동문학협회 설립모임”이라고 쓴 글을 객실벽에다 붙혔다. 그런후 여자 셋은 한복을 입고 남자 둘은 양복에다 넥타이까지 매고 그 앞에서 “찰칵 ㅡ”하고 사진을 찍었다. </p><p class="ql-block">이렇게 안도현 토월산 아동문학협회가 너무나 비좁고 너무나 조용하고 너무나 소박한 방안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p><p class="ql-block"> 그때로부터 우리의 힘든 걸음이 시작되엿다. 회원들의 열정을 식히지 않기위해 우리는 일주일마다 모여앉아서 작품을 평의하였고 또 자주 만나는것으로 서로간의 정을 돈독히 하였다. </p><p class="ql-block"> 협회가 활동하려면 돈이 있어야했고 그 돈을 벌기위해 회원들은 신문팔기에 나섰다. 그때 “연변건강생활보”에서 편집을 맡으신 이용득선생님이 주일마다 연길에 가서 이 신문을 삼백부씩 가져오시면 우리회원들은 한사람이 60부씩 나누어가지고는 힘자라는대로 팔았다. </p><p class="ql-block"> 한부를 팔면 30전씩 벌수있는데 그 신문들을 가지고 기차역, 시장, 거리에 다니면서 판다는게 참 체면잃을 일이기도 했다. </p><p class="ql-block"> “아니 글 쓴다는 사람이 왜서 신문장사를 해요?”</p><p class="ql-block">이렇게 빈정대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 신문을 안 사겠다고 우리회원들을 보기만하면 피하느라고 길을 에돌기도 했다. 또 어떤회원은 신문을 채 팔지못하면 자기가 몽땅 사기도 했다. 이렇게 협회의 활동경비를 얼마라도 해결할수 있긴했지만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회원들은 누구도 원망없이 잘해나갔다. 얼마나 고마운 회원들였던가!</p><p class="ql-block"> 많은 사람들은 여름이면 그늘진 곳에서, 겨울이면 따스한 온돌에서 한가히 보냈지만 우리는 글을 써가지고 여름이면 산으로 찾아다니고 겨울이면 옷을 꽁꽁 입고는 이집 저집을 찾아다니며 활동하였다. </p><p class="ql-block">그런 모습을 볼때마다 가슴이 뜨거워났고 또한 우리글을 굳건히 지켜가려는 그들만이 진정 사랑스러운 사람이엿고 존경스런 사람이 아니겠는가를 다시한번 느끼기도했다.</p><p class="ql-block"> 그렇게 반년동안 모지름쓰며 견지하다다 김동철씨가 가정문제로해서 사직하는바람에 이 협회가 활동을 잠시 중지하였다.</p><p class="ql-block"> 1997년 9월의 어느날 이용득선생님이 날 찾아오셨다. </p><p class="ql-block"> “이 협회를 해제시킬가요? 너무 힘들어서요”</p><p class="ql-block"> “아니, 그냥 견지해보면 좋겠습니다.” </p><p class="ql-block"> 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불쑥 튀여나갔다.</p><p class="ql-block"> 나는 왜서인지 협회가 해제되는게 가슴아팠다. 어떻게 세운 협회인데? 또 이만큼 만이라도 걸어오기 위해 얼마나 모지름 써왔던가? 그리고 우리 어린이들의 건실한 성장과 꿈을 살찌우기 위해 꾸린 협회인데 계속 꾸려나가는게 우리들의 사명이 아닌가? </p><p class="ql-block"> “장부에 지금 돈이 얼마 있는가요?”이용득 선생님이 계속 물으셨다.</p><p class="ql-block"> “60원이 있습니다.” 그때 협회의 장부가 내손에 있었던것이다.</p><p class="ql-block"> “그럼 내일 글쓰기 열성자들을 조직하여 들놀이하던지. 그리고 영옥씨가 잠시 회장을 맡아서 하세요”</p><p class="ql-block">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 계속 운영하는게 고달프지만 그러나 잠시라지않는가? 그러나 그 잠시가 꼬박 10년일줄을 그때는 생각지도 못했다.</p><p class="ql-block"> 이튿날, 나는 글쓰기 열성자 여섯분을 불러서 저수지로 떠났다 가을의 하늘은 푸르다못해 유리알처럼 알른거렸다. 우리 일곱글쓰기 열성자들은 그날 가을하늘을 향해 또다시 새로운 꿈, 더 큰 꿈을 펼쳤다.</p><p class="ql-block">. 물론 장부에 있는 돈 60원을 그날 들놀이에 몽땅 썼지만 모자라서 내돈을 조금 더 보탰다. 그날 저녁 나는 자리에 누웠지만 인차 잠들지못했다. </p><p class="ql-block"> “난 인제부터 아동문학협회의 코기러기다. 어깨가 무겁더라도 중도에서 절대 주저앉지 말아야지!” 나의 속다짐이였다.</p><p class="ql-block"> 그 들놀이를 계기로해서 몇달간 수면상태에 처했던 문학회가 새봄을 맞이한 풀처럼 파아랗게 살아났다. </p><p class="ql-block"> 자주 활동하고 또 새로운 회원들을 발굴하니 원래는 다섯명회원뿐이던것이 후에는 스무명도 넘었다. 나는 할수록 힘이 생겼고 희망은 수림처럼 자꾸 커갔다.</p><p class="ql-block"> 회원들에게 신심을 주기위해 매년마다 회원들의 특집을 조직하였는데 그때는 컴퓨터 시대가 아니여서 우편으로 보내지않으면 나는 늘 자기돈을 팔며 두툼한 원고들을 가지고 직접 잡지사로 찾아가기도 했다. 불편한 다리로 잡지사의 아래우층을 오르내린다는것이 좀 힘겨웠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무릇 내가 가지고 간 회원들의 글들은 모두 신문잡지에 실렸다.</p> <p class="ql-block">  2003년부터 우리는 내부간물을 꾸리기로 했다. 그러자면 돈이 좀 많이 있어야했다. 그때 리사장직을 맡으셨던 함창도선생이 나와 함께 돈 구하러 나섰다. 돈이 좀 있을거다하고 생각하는 단위는 다 돌아다녔다. </p><p class="ql-block"> 상사앞에서 좋은 말을 다하면서 “돈구걸”했더니 200원, 300원, 500원…돈이 불어났다.. 기분이 좋았다. 물론 나는 돈을 얻기가 좀 쉬운 우월한점이 있기도했다. 절뚝대는 다리로서 숨을 헐떡이며 3,4층까지 올라오는 모습에 많은 상사들이 감동 받았을거라는 생각이 든다.</p><p class="ql-block"> 때론 스트레스도 받았다. </p><p class="ql-block"> “돈도 없으면서 무슨 협요? 우리도 살기어려운데 언제 당신들에게 줄 돈이 있겠소?”</p><p class="ql-block"> 그것은 우리에 대한 비방이고 모욕이엿다. 돈 안주려면 좋게 거절하면 될건데 왜 하필 이렇게 짜증까기 낸담? </p><p class="ql-block"> 퇴자를 맡고 구름이 꽉 찬 얼굴로 돌아서서 나올때면 눈물이 나기도했다. 정말 울고만 싶었다. 그러면서 자문도 해 본적이 있었다.</p><p class="ql-block"> “ 내가 왜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협회를 위해이렇게 뛰여다니고 이렇게 모욕도 당하고…아니아니, 모든일이란 순풍에 돛 단듯 순리로운게 아니잖아? 그리고 난 또순이야!” </p><p class="ql-block"> 이전에 어느작가분이 나에게 “또순”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던것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냐고 물었더니 그 작가분이 “이악스럽고 끈질긴 여자를 통털어서 부르는 이름”라고 했다 </p><p class="ql-block"> 그래! 난 이악스럽고 끈질긴 여자다. 그런데 내가 어느새 이악스런 여자로 변했단말인가? 난 나의 변화를 두고 정말 깜짝 놀라기도했다. </p><p class="ql-block"> 원래 나는 양띠를 타고 태여나서인지 양처럼 온순하기로 소문이 있었댔다. 그누가 욕해도 대꾸도 바로 못하는데…해야 할 말조차 하기 싫어하는데…</p><p class="ql-block"> 그러던 내가 글쎄 협회를 위해 돈있는 사람들을 잘 구슬려서 돈을 잘 얻어들이는 재간둥이로 되다니? </p><p class="ql-block"> 그리고 원칙앞에서는 사정을 두지않는 여자로 되다니? 협회를 이끌면서 나는 바로 이렇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아니 이렇게 변해야 했다.</p><p class="ql-block"> 그러다가 많은 지성인들의 칭찬을 들을때면 나의 작은 가슴은 사해의 바다처럼 마구 설레였고 꿈은 어느새 저 멀리로 날아가서 영글고 있었다.</p><p class="ql-block"> “네. 참 좋은 사업을 하십니다.”</p><p class="ql-block"> “우리민족의 영웅들입니다”</p><p class="ql-block"> 협회에 경비가 부족할때 많은 회원들이 자기주머니 돈을 터는 일도 있었다. 특히 잊을수 없는것은 홍복녀씨 그리고 정성호씨다. 이 두 회원이 한국에 가서 힘들게 번 돈을 협회에 내놓았을때 나는 코마루가 쩡해났다. </p><p class="ql-block"> 특히 홍복녀씨는 한국에 가서 갖은 어려움 당하면서 일하다보니 잔뜩이나 작은 체대인데다 더구나 여위였고 얼굴은 초췌하기가 말이 아니였다. </p><p class="ql-block"> 그러면서도 뭉치돈을 내놓았을때의 그 모습은 영원히 잊어지지 않는다. 후에 식당을 꾸리면서 협회에 많고도 많은 후원을 했다. 그 외에도 자그마한 식당을 꾸리고 있는 정옥희씨도 몇번이나 후원금을 내놓았다. </p><p class="ql-block">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활동장소를 마련해준 안도현도서관의 리성철관장님, 문학을 사랑한다면서 호주머니 돈을 선뜻 내주시던 량성복, 김창식 등 이런 고마운 분들로해서 나에게는 샘물처럼 힘이 자꾸 솟구쳤으리라.</p><p class="ql-block"> 2003년부터 우리는 “토월산아동문학회”를 “장백산아동문학회”라고 개칭하였다. 인제부터 장백산의 호랑이처럼 뛰여보자는 회원들의 한결같은 마음을 담은 이름이였다. </p><p class="ql-block"> 그러니 신끈을 더 단단히 조여야했고 호랑이처럼 더 멀리 뛰여야했다.</p><p class="ql-block"> 나는 신체가 허약해서 늘 전신이 무너질듯하면서도 정신만은 잃지않았다. 한달에 적어서 한번, 많으면 두세번씩 활동했는데 이렇게 해해년년 견지하고 또 견지했다.</p><p class="ql-block"> 나는 바삐보내야했다. 돈을 얻어야했고 일부 회원들의 서투른 글을 보아주고 수정하고…때론 생글대는 햇님과 만날 여유도 없이 하늘빛을 머금고 내주변을 맴돌아치는 곤충도 볼사이 없이 간물에 실을 글들을 정리하고 또 정리하였다. </p><p class="ql-block"> 힘겨웠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았다.</p><p class="ql-block"> 2003년 4월의 어느날 나는 감기때문에 개인진료소에 가서 점적주사를 맞게되였다. 그때 의사선생과 동창이 되는 김은철이라고 부르는 남자가 놀러왔는데 내가 아동문학글을 쓴다는걸 알고는 제꺽 내곁에 다가왔다.</p><p class="ql-block"> “이것참 너무 좋은분 만났군요. 저도 그 협회에 가입할수 있는지요?.만약 동의하신다면 오늘 저녁 한턱 낼게요.” 하고 농담절반 진담절반하는것이였다.</p><p class="ql-block"> 협회에 가입한 그는 협회활동에서 아주 열정적이였다. 매번 회의때면 제일 먼저 왔고 협회로 찾아오는 외지손님은 자기집에 모셔다가 잠자게하고 식사하게하고…정말 협회일이라면 발벗고 나서군하였다.</p><p class="ql-block"> 또 한번은 버스를 타고 연길로 가는데 옆에 앉은 잘 아는 사람이 날보고 지금도 글쓰는가고 묻자 앞에 앉은 삼십대중반에 이른 웬 남자가 제꺽 돌아앉더니 나의 손을 덥썩 잡으며 이렇게 반기였다</p><p class="ql-block"> “아, 오늘 끝내 찾았군요. 전 조봉산이라 부릅니다. 며칠전에 이 협회가 안도현텔레비전에 소개되는걸 보고 저도 의향이 있어서 찾던중입니다. 정말 하늘이 내 마음 알아준셈입니다”</p><p class="ql-block"> 회원 이 정남이란 분에 대한 얘기를 할라면 더구나 재미있다. 내가 이 정남씨를 알게 된 이유는 이러했다.</p><p class="ql-block"> 어느한번 친구를 따라서 초면인 김정옥씨집으로 간적이 있었다. 우리는 인사를 끝내고는 서로 전화번호까지 남겼다. 그날 거기서 김정옥씨의 남편인 이 정남씨와 넷이서 저녁을 먹게 되였는데 내가 글 쓰고있다는 말이 나왔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내가 집으로 돌아간후 이 정남씨는 장밤 잠을 못 잤다는것이였다. 어릴때부터 지향하던 문학을 지금까지 힘든 삶 때문에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나를 만난것이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그런 기쁨때문이란다. </p><p class="ql-block">그런데 나의 전화번호를 몰라서 더구나 실면했단다.. 그렇다고 아내와 물으면 “당신 그 여자한테 반한게 아닌가요? 정말 그러는 날에는 이혼이에요” 하면서 오해할가봐 묻지도 못하고 그냥 끙끙대며 속을 앓았단다.</p><p class="ql-block"> 그후로부터 이 정남씨는 나를 찾기위해 일부러 병원 앞골목에서(그때 우리집은 병원 앞골목에 있었댔다) 온하루 서성댔단다. </p><p class="ql-block"> 연속 며칠 이렇게 기다리다가 끝내는 날 만나게 되였는데 그래서 협회에 가입하게 되였다. 문학의 매력은 바로 이같이 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밤잠 이루지못하게 했고 또한 가슴 설레이게도 했다. </p> <p class="ql-block">  문학은 아름답고 숭고하다지만 울퉁불퉁 험난한 길이엿다. 새로 가입한 회원들에게 신심과 희망을 심어주기위해 나는 그들의 글을 다듬어서 신문사에 추천하고는 시름이 놓이지않아서 신문사에 전화를 두세번 걸다가 편집선생의 </p><p class="ql-block"> “참 시끄럽게 구는군요. 차라리 당신이 와서 편집할거지”하고 짜증내면 남몰래 눈물을 훔치던 일이 어제일 같았다. </p><p class="ql-block"> 한 사람은 자기와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있는데 나이가 많아서 친구도 없고 놀러다닐곳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니 협회에 가입시켜달라고 사정한적 있었는데 내가 거절하자 대번에 성을 버럭 내면서 마구 욕까지 하는것이엿다. </p><p class="ql-block"> 날 인정이 없다니. 회장이라고 권리를 내세운다니…어떻게 욕해도 나는 좋았다. 이 협회는 엄숙한 우리글쓰기 애호자들의 삶의 터전인만큼 놀러갈곳이 없어서 심심풀이로 찾아오는 협회가 절대 아니다. </p><p class="ql-block"> 협회란 협회의 원칙이 있고 규정이 있는만큼 나는 에누리 없이 그대로 하고만 싶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에누리 없는 성격이였고 옹고집이기도했다.</p><p class="ql-block">문학협회라해서 엄숙한 장소가 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나는 일년에 두번씩 문체활동도 조직하였다. </p><p class="ql-block">재미있는 오락프로로 온하루 즐거움속에서 보낼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고 어느회원이 곤난이 있으면 곧 위문했고 또한 명절이거나 생일이면 함께 모여서 식사도하다보니 회원들은 협회를 늘 자기집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만나기만하면 서로 반가워서 어쩔줄 모르기로한다. </p><p class="ql-block"> 때론 너무도 힘들어서 몇번이나 회장직을 내놓겠다고 했더니 회원들이 누구나 반대해나섰다.</p><p class="ql-block"> “만약 박회장이 아니라면 우리협회가 해산된지 오라지요.그러니 조금만 더 수고해주세요”</p><p class="ql-block"> “글쎄 오늘까지 이 협회를 이끄느라 고생도 많았지요. 더구나 성한 몸도 아니니까. 그런데 우리는 박회장을 장애인으로 생각한적 없었어요”</p><p class="ql-block">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만점이란 점수를 주는 회원들이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장애인 나를 언제나 성한사람처럼 인정해주어서 고마웠고 믿어주고 밀어주고 격려해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p><p class="ql-block"> 그래서 다시금 다져보기도했다 ㅡ더 힘내자. 더 높이 날자!</p><p class="ql-block"> 2007년3월21일 안도현아동문학회는 설립 10주년을 맞는 모임을 가졌다. 그날의 하늘은 여느때보다도 더 파아랗고 해님도 여느때보다 더 생글댔다.</p><p class="ql-block"> 연변의 각 현시에서 오신 수십명의 귀빈들을 모시고 발언대에 올라서 10년동안의 회노애락에 대해서 발언하는 나는 왜서인지 눈시울이 자꾸만 젖어들었다. </p><p class="ql-block"> 사진사의 섬광등과 박수갈채속에서 나는 울렁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면서 10년동안 걸어온 발자국을 총화하였다 </p><p class="ql-block"> 꼭 10년이다. 정말 기나긴 10년이였고 때론 눈물, 때론 웃음, 또 때론 한숨, 또 때론 즐거움으로 보내던 나날들이였다. </p><p class="ql-block"> 그날 연변주아동문학학회에서는 나의 십년동안의 수고를 기리여 공로패를 증정하였다.</p><p class="ql-block"> </p> <p class="ql-block">내가 회장직으로 있던 1997년부터 2007년까지 회원들의 작품이 한국의 “월간아동문학”잡지, “중국조선족소년보”, “연변아동문학”,”흑룡강신문”, “종합신문”, “아동문학샘터”등 잡지에 실렸는데 발표수는 360여편이 되고 안도현아동문학회는 2004년과 2005년에 연변조선족아동문학학회로부터 “우수협회”로 선정되였고 나는 또 2007년에는 연변주조선족아동문학회 대표단일원으로 한국에까지 갈수있는 행운을 얻게 되였다. 뿐만아니라 10년동안 우리글을 위해 열심히 뛰여왔다고 안도현정부에서는 나에게 “안도명인”이란 영예를 주었고 2006부터 2016년도까지 안도현정협위원으로, 2012년 1월 16일에는 안도현 10대 도덕모범이란 칭호를 주었다. </p><p class="ql-block"> 그외에 나는 또 많은 작품에서 수상하였는데1995년도에 동북조선족신문계통우수통신원으로부터 시작하여 2008년에는 중국조선족아동문학탐구회에서 동시우수상을, </p><p class="ql-block">한국kbs방송국해외동포수기에서 대상을, 2009년도에는 백두아동문학상을, 2011년에는 중한문화교류협회에서 주최한 “일송정”응모에서 대상에 선정되여 한국에 갈수있는 자격을 가지게 되였다. 그리고 연변텔레비와 안도현 텔레비에 몇번 올랐었다. </p><p class="ql-block">그외에도 연변일보, 연변녀성, 연변방송국, 흑룡강신문 등에서 조직한 생활수기응모에서 수차 수상하는 영예를 지녔으며 2005년 우화 “비뚠나무의 고운 꿈”이 의무교육조선족학교교과서 조선어문 자습독본 5학년 상권에 실렸고 나의 사적은201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 헌례도서 &lt;&lt;사시장철 피여나는 민족단결의 꽃&gt;&gt;에 소개되였다. 또한 나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더 많은 일을 해야하며 우리민족의 사명을 위해 더 열심히 뛰여야한다. 그래서 오늘도 인생이란 이 도화지에 열심히 내일의 인생 설계도를 그려본다.</p><p class="ql-block"> </p> <p class="ql-block">2013년 KBS 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에서 공모한 제15회 한민족체험수기에서 특별상 작품(방송파일 없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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