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 오늘은 포근한 초여름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5월 8일 어머니 절입니다. </p><p class="ql-block"> 5월이라고 산과 들에는 핑크빛 라이라크와 배꽃이 하얗게 피였습니다. 그 속에서 엄마는 하얀 머리를 곱디곱게 다듬으시고 꽃처럼 환하게 웃고 계십니다. </p> <p class="ql-block"> "엄마~" 목청돋구어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멍하니 서있다가 번쩍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 맞아. 엄마가 88세를 일기로 갑자기 세상뜨신지 한달이 되잖아... 나의 눈이 스르르 감기면서 몸이 전률합니다. </p> <p class="ql-block"> 어머니, 당신은 진짜로 녀성다운 녀성이였고 엄마다운 엄마였고 아내다운 아내였고 할머니다운 할머니였습니다.</p><p class="ql-block"> 우리 자식들이 어렸을적 엄마는 해마다 봄, 가을 이렇게 두번씩 집 벽을 하얗게 회칠해놓고 언제나 집을 깔끔히 거두시며 자식들에게 빨래를 깨끗이 하는 방법까지 가르치시며 집살림을 알뜰히 하시였습니다. </p><p class="ql-block"> 아마 내가 소학교 때라고 기억됩니다. 학교에 갔다가 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옷걸이에 걸어놓고 뛰놀고 있는데 "송금아, 이리 와봐" 는 부름소리에 가보았더니 " 이렇게 아빠 옷 우에 옷을 걸면 안돼. 특히 남자 옷우에 녀자옷을 거는 것은 례모없는 행동이야" 라는 가르침을 받고 난후에 절때 그런 일이 없었지요. </p><p class="ql-block"> 엄마는 딸들에게 줄곧 녀자는 앉아도 다리를 펴고 앉지말고 포개고 앉아야 하며 밥상에서 아빠가 일어나시기전에 일어나지 말며 어른들이 앉아계실때는 누워도 례모없는 행동이라고 타이르며 항상 가르치시여 지금도 그 때의 엄마의 타이름 소리가 귀전에 쟁쟁히 들려옵니다. </p><p class="ql-block"> 엄마는 우수한 료리사였습니다. 언제나 밥상에는 맛나는 료리들을 가득해서 자식들에게 맛나게 먹이는 것을 최상의 행복으로 생각하며 부지런하고도 알뜰히 집살림을 하시였습니다. 그런 엄마를 보아온 남편은 " 그 엄마에 그 딸이라는데 당신은 장모님의 료리 솜씨를 안 닮았구만"하였습니다. </p> <p class="ql-block"> 엄마는 훌륭한 아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식들은 엄마한테서 남편을 공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항상 병약한 아버지께 밥을 따로 해드리시고 많은 것이 불편했던 그 시대에 만날 풍로불을 지피여서는 보글보글 따뜻한 음식과 장을 끓여서 아버지께 대접하던 일을 늘 보아왔던 자식들입니다. 또 아버지께서 출장을 가시거나 집에 안계실 때 회칠한다던가 (불을 때는 온돌) 구들을 고치는 일까지 아버지를 안시키고 자식들을 데리고 엄마가 하셨습니다. 어쨌든 아버지를 무척 아끼는 엄마였었습니다. </p><p class="ql-block"> 아버지가 당뇨로 중풍까지 와서 거동이 불편해서 근 6년간 병간호를 하신 엄마는 아버지의 속옷도, 담요도 얼마나 깨끗이 빨아서 그냥 갈아 입히시고 깔리고 하셨던지 집으로 드나들던 간호사들도 깨끗한 할머니라고 칭찬이 자자했었지요. 엄마는 진짜로 우리 딸들의 본보기였습니다. </p> <p class="ql-block"> 엄마는 훌륭한 할머니였습니다. 엄마는 조카들을 넷이나 유아때 봐주셨고 동생이 한국으로 돈벌러 간후 조카를 8살부터 쭉 자식보다 더 아끼며 잘 키워서 천진 의과대학 석사까지 졸업한후 지금 상해 국립병원의 어엿한 의사로 키우는 큰 일을 해내셨습니다. </p> <p class="ql-block"> 엄마는 평범한 퇴직로인으로서 사회에 딸들도 하지 못한 불우의 학생을 돕는 일도 하셨습니다. 2013년 10월에 연길시 건공소학교의 빈곤가정의 학생들이 학용품을 살 돈이 없어 사회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을 아신 어머니께서는 월급을 아껴서 쓰시면서 2000원의 현금을 지원하셨습니다. </p><p class="ql-block"> 그리고 엄마는 항상 자식들에게 사회 생활을 하면서 친구지간에도 그렇고 자신의 것이 더 많이 나가야 마음이 편안하단다. 친척들과 의좋게 지내며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라도 먼저 솔선수범하여 인사하는 법을 몸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즉 베품을 가르치신 것이지요. </p> <p class="ql-block"> 또 색다른 음식이 나지면 "자식들이 모두 모여서 먹어야 맛있지"하시면서 랭동기에 꽁꽁 보관하시였으며 어느 자식이 옷 한견지 사서 입으면 "언니도 사주렴, 동생도 사주렴." 하시면서 형제의 정을 가꾸어 가도록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p> <p class="ql-block"> 노래교실로 다니시며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마냥 즐거워 하시던 엄마는 전주 텔레비방송 로년노래시합에서 우승을 하셨댔습니다. 그 때 나의 우승은 나의 성적인 것이 아니라 노래교실 선생님과 노래교실 친구들 덕분이라며 한상을 차려서 선생님과 친구들을 청하셨죠. 저의 한 학교 선배선생님도 엄마와 함께 노래교실을 다니셨는데 저를 보고 " 김선생 엄마는 점잖고 머리가 참 똑똑해서 노래교실에서 왕언니로 존경을 받고있소" 라며 엄마를 칭찬했었습니다. 엄마를 칭찬하는 말씀에 저는 이런 엄마의 자식으로 태여난 것을 진짜 영광으로 느꼈습니다. </p> <p class="ql-block"> 중풍으로 편찮은 근 3년 동안 우리 자식들이 모두 바삐보내다나니 토론하여 보모를 청하여 엄마를 돌보게 하였데 그 동안 자식들한테 경제 부담을 준다며 어찌나 미안해 하시던지 ... " 빨리 죽어야 너희들 시름도 덜고 ..." 는 말씀을 하셨을 때 " 딸들에게 김빠지는 말씀 좀 그만 하시죠." 라고 툭한소리를 한 내가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p><p class="ql-block"> 엄마는 편찮은 기간 늘 자식들이 보고 싶어 전화로 "보고 싶다야. 언제 오니? "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딸은 엄마가 한평생 사실 것 같은 착각에 (이제 잘해야지 다음번에 가면 엄마곁에서 오손도손 이야기하며 며칠이라도 묵어야지 ... )하다가 끝내는 엄마의 림종도 지켜 못드린 불효자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후회하며 통탄해도 이젠 다 쓸모가 없게 되였습니다. 세상에는 후회하는데 먹는 약이 없으니 말입니다. </p> <p class="ql-block"> 그렇습니다. 5월에 하얗게 핀 배꽃과 핑크빛 라이라크꽃을 받쳐준 파란 잎새들에서 엄마의 냄새가 나며 꽃향기마다 살랑살랑 부는 초여름 바람에 엄마의 숨결이 되여 쉭쉭 숨을 쉽니다. 그 하얀 꽃밭속에서 고운 엄마가 환히 웃으면서 걸어오십니다. </p><p class="ql-block"> 엄마~ 불러도 또 불러도 엄마는 대답이 없습니다. </p><p class="ql-block"> 엄마, 고통도 슬픔도 없는 그 곳에서 아버지를 만나셔서 부디 잘 계시십시요. 나는 목청을 돋구어 소리소리 웨쳐봅니다. </p> <p class="ql-block"> 글 쓴이 딸</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