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큰언니는 우리 집 다섯 형제 자매중에서 맏이고 나와 무려 12년이란 년령 차이가 있다. 그 시절에 언니는 나에게 엄마같은 존재였고 보호자였다.</p><p class="ql-block"><<니가 태여난 날은 아침 해살이 눈부시게 우리집 창문에 비추었어.너는 촌 산파의 접생으로 우리집 초가에 고고성을 울렸어.금방 태여난 니가 엄청 이뻤단다. 녀자애인 것이 너무 좋아 너를 만지고 싶어서 니 옆에 앉아 촐싹대고 있었는데 일밭에 나가셨던 아버지가 집에 들어서면서 니가 녀자애라고 하니깐 보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시드라. 아버지는 니가 은근히 아들이였기를 무척 바랬었지만 지금 보면 니가 딸이였기에 너무 좋지 뭐야!>> 그러니 내가 세상에 태여날 때부터 나의 존재를 제일 반겨준 사람은 큰언니였고 그날부터 큰언니의 자랑이였고 사랑이였다. </p><p class="ql-block">언니가 일곱살 때 갑자기 고열이 나서 엄마가 급히 병원에 안고 갔는데 급성 뇌막염에 걸렸다고 한다. 그 후유증으로 언니는 한쪽 다리를 살랑살랑 절는 지체 장애인으로 되였다. 언니가 아홉살 나던 때에 우리 집은 아버지의 외고집으로 룡정 시가지에서 량수라는 시골에 가서 정착하였다. 그때로부터 큰언니의 고달픈 인생살이가 시작되였다. 시골 농사를 한번도 못해본 아버지였지만 나름대로 어린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이일저일에 지쳐 있었다. 어머니도 돈이되는 일이라면 말 갈 데 소 갈 데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하였다. 하는수 없이 언니가 물을 길어오고 밥하고 어린 동생을 돌보면서 가정일을 도맡아 하였다. 집에 뽐프가 없는지라 식용수는 길건너 외가집에 가서 길어와야 했다. 그때 우리 집에는 양철로 만든 물동이가 있었다. 언니가 아홉살 어린 나이에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물을 날랐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가? 막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집안일을 도맡긴 부모들이였지만 언니는 그 시절의 힘든 기억 때문에 부모님들에게 고까운 마음이 생길때도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서 바들바들 떨리는 두손으로 물동이를 머리에 이다가 물을 그대로 쏟아붓고 온몸이 물참봉이 되였단다. 그래도 악을 쓰며 물독에 물을 채워 놓고서야 저녁밥을 지었다. 그제날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할 때면 언니는 내 앞에서 늘 눈물을 흘리군 하였다. </p><p class="ql-block">내가 태여난지 다섯달 되던 그날밤, 엄마는 생산대 탈곡장에 일하러 나갔다. 나는 태여나서부터 바람만 맞으면 자지러지게 울고 보채는 습관이 있었다. 그날따라 초저녁부터 보채더니 자정이 지난후부터는 용을 쓰면서 기를 쓰고 울었다. 도무지 나를 달랠 수가 없어서 언니는 그 가냘픈 등에 나를 둘쳐업고 엄마가 일하는 탈곡장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 갔다. 가는 도중에 나는 언니의 잔등에서 흘러내리고 언니는 나를 추슬리고 하면서 숱한 애를 먹었다. 탈곡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기진맥진한 내가 언니 잔등에서 쌔근쌔근 잠들고 있었다.</p><p class="ql-block">언니가 시집 가던 해에 두 오빠가 동시에 대학에 입학하였다. 최저로 한달에 5원씩 보내줘야 기본 생활이 유지될 수 있는 오빠들이였다. 가난한 시골생활에 어떻게 그 돈을 이어댈 수 있었으랴. 언니는 자신이 시집갈 때 갖고 갔던 침대보와 문보며 돈되는 물건들을 몽땅 팔아서 한푼도 남기지 않고 오빠들한테 보내 주었다. 그해 겨울방학 설날 가족모임 때 둘째 오빠는 김응 가수가 불렀던 《우리누나는 좋았지>> 를 눈물이 글썽해서 불러 가족 모두를 코마루가 찡하게 만든 적이 있다. 큰언니는 형제들의 마음의 기둥이였고 형제들이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보듬어주는 너그러운 사랑의 품이였다.</p><p class="ql-block">지난해에 병으로 돌아가신 큰오빠는 언니의 그 사랑에 고마워서 유서에 자신의 재산을 몽땅 큰언니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였지만 언니는 오빠의 재산 한푼도 받지 않고 조카한테 넘겨 주었다. 그래도 늘쌍 동생들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단다.</p><p class="ql-block">큰언니는 주방 일에서도 고수였다.허약하고 잔병이 많은 아버지 때문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항상 끼니가 걱정이였다. 끼니마다 아버지의 식성에 맞추어 음식을 만들었고 12살 때부터 여러가지 떡을 할 줄도 알았다. 그중에서 제일 나의 입맛을 당겼고 아버지도 항상 큰언니한테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음식이 바로 큰언니표 된장찌개이다. 우리 엄마가 만든 된장은 린근에서도 이름이 날만큼 장맛이 유독하게 좋았다. 그 비법이 무엇이였던지 동네 아낙네들이 울엄마가 된장 담글 때에는 우리 집에 와서 보기도 하고 또 울엄마를 청하여 같이 담그기도 하였지만 여하튼 우리집 된장맛에 비길 수 없었다. 커다란 까만 철가마에 감자를 토막토막 넣어 끓이다가 된장을 풀고 가지랑 고추랑은 몽당몽당 손으로 끊어서 넣고 터밭에 심어놓은 호박순도 함께 넣어서 끓여주던 구수한 된장찌개, 여름철이면 언니가 끓이는 된장찌개 내음이 열려진 창문으로 온동네에 풍겨 나갔다. 지나가던 남정네들도 코를 벌름거리며 장맛에 입구미가 동한다고 하였다. 그 된장찌개로 우리 가족 일곱명은 별탈없이 무병하게 가난의 긴 세월을 살아 왔었다.</p><p class="ql-block">큰언니가 25살 나던 해 우리가 살던 곳에서 20여리 떨어진 심심산골 마을로 시집갔다. 오형제중 막내인 형부는 우로는 누이가 네분이 있었는데 결혼 할 때는 그 시누이들이 장애인 동생한테 부모공양의 책임을 절대 지우지 않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해 놓았지만 언니는 시집가서 30여년동안 두 로인을 모시면서 언제 한번 얼굴을 붉히지 않았고 해마다 촌과 진의 모범 며느리로 로인들에게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가는 정에 따라 오는 정도 있는 법이다. 어느 해인가 내가 언니집에 놀러갔을 때 사돈 할아버지는 며늘아기한테 빨간 털실 세타 하나 입히고 싶다면서 추운 겨울날에 강변에 나가서 버들가지를 꺽어다 힘들게 키를 결어서는 고개넘어 시골집들을 찾아다니며 팔고 그 돈으로 빨간 털실을 사다가 언니 앞에 내놓는 것이였다. 그때 사돈 할아버지한테서 느꼈던 언니에 대한 사랑은 바로 언니가 시부모에 대한 사랑의 보답이였을 것이다. </p><p class="ql-block">큰언니는 동네에서도 인품이 후하기로 이름 있었다. 촌에서 수의사로 일하였던 형부도 언니와 마찬가지로 인품이 후했던 것만큼 촌의 사람들은 언니네 집에 시간적인 제한이나 미안함이 없이 자신들이 오고 싶을 때에는 허물없이 놀러왔다. 언니는 친정에서 익힌 음식 솜씨로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 해마다 김장철이면 언니는 커다란 오지독에 여러가지 김장을 가득 채워서 이집저집 나르기도 하고 시골의 유일한 반찬인 김치볶음을 해서는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했다. 나의 아들애는 지금도 그때 이모집에서 먹었던 그 김치볶음은 평생 잊지못할 맛이였고 지금은 언제 어디에 가서 먹어도 그 맛을 찾을 수 없는 김치볶음이였다고 한다. </p><p class="ql-block">언니는 올해 칠순 고령에 들어섰다. 어릴 적 지체 장애로 나이가 들면서 더욱 심한 후유증이 생겨서 인젠 걷기도 힘들고 매일매일 병마와 아픔의 고통에서 하루하루 지탱한다. 하지만 평생 가족과 형제들한테 준 사랑의 마음과 우리 가족, 아니 언니가 세상사람들한테 남겨준 사랑의 마음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흉벽을 보듬어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길이 남겨질 것이다. </p><p class="ql-block">图片</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