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동년시절

玄AY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실화 현애옥 글</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15px;"></span></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 style="font-size:22px;"> 머리말</b></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60여년 세월이 지나 왔는데 항상 동년시절이 그리움은 무엇 때문일까 ...... 얼마 지나면 기억력도 지금보다 못해질 것이고 세월의 년륜도 거역할수 없으니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언젠가 명석하던 두뇌도 흐려질수 있지 않을가 생각하니 조급한 마음이 앞서고 지금이 적시적이라 판단되여 당장 [ 나의 동년시절 ] 이란 이 작품을 꼭 빨리 완성 해야겠다는 충동을 받게 되였다...... 지금 세대의 아이들은 말해도 리해할 수도 없거나 믿을 수도 없겠지만 우리 같은세대의 사람들끼리 저마다의 옛날 추억을 한번 되살려 보면서 서로 통하는 마음을 주고 받듯이 공유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고 또 나 자신도 십여년 후에라도 다시 보면 더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 글을 쓰게 되였다.</span></p><p class="ql-block"><b style="font-size:22px;"> </b></p><p class="ql-block"><b style="font-size:22px;"> 1 . 동년시절의 고향 마을</b></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나의 동년시절은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은 한 산간 마을에서 보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15세쯤 되였을 때 저마다 우리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 따라 조선에서부터 살길 찾아 다니다가 정착한 곳이라고 한다. 내가 세상에 태여났을 때는 이미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까지 저 세상에 가신 후였고 단지 외할머니 한분밖에 안 계셨다. 나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에게 정이 많았고 외할머니 역시 나를 많이 예뻐해 주셨다. 인간세상에 태여나 태줄 묻은 내 고향은 철 없던 어린 나이에는 모든것이 좋아 보였고 지금과는 비할수도 없이 빈궁했고 하찮은 세월이였건만 불평을 모르는 동년시절이였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내가나서 자란 고향마을 앞에 흐르는 강물이 있다하여 마을 이름이(前河)전하촌이라고 불리워져 있었다. 마을과 좀 떨어진 서남쪽에 큰 돌바위가 있는데 오랜세월 빗물에 황토가 흘러 내리면서 붉은색갈을 띄였다해서 붉은바위 골이라 불리웠고 바위 꼭대기에는 사철푸른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어서 마치 마을을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 같았다. 커서 옛 시인들이 쓴 시에나 노래에 남산의 소나무라는 대목이 나오면 나는 대뜸 고향의 남산 소나무를 떠 올리군 하게 된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고향 마을에서 서북쪽을 바라보면 사면이 넓고 높은 사방산이 위엄있게 자리잡고 있으며 산 남쪽에 삼형제 바위가( 石林 )석림처럼 서 있어서 마치 사방산 입문을 지키는 호위대 같다 . 사방산의 울창한 수림에는 이름 모를 많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서 처음가는 사람은 동서남북을 가리기가 힘들다. 옛날에는 토비들이 득실 거렸고 한 때는 김일성도 오고 가면서 혁명 근거지로 유명했단다. 그 즈음에 ( 蛤蟆 )하마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그의 공적을 기리여 향정부 이름을 하마탕이라고 불렀었단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 내 고향 뒤동산에는 해마다 어김없이 피여나는 천지꽃과 ( 진달래 꽃 ) 울긋불긋한 여러가지 꽃들이 만발하여 나는 꽃 꺾는 재미에 동년시절의 마음을 사로 잡혔었던 것 같았다. 봄이면 달래 캐러도 다녔고 논두렁 변두리를 훑어가며 나시도 캤으며 미나리도 뜯어서 엄마 아빠 칭찬을 받으면서 집 식구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에 마음이 후련 했었다. 산나물 캐러 다니는 언니 따라 다니며 길을 잃지 않으려고 바싹 붙어 다녔고 가을이면 버섯 캐고 깨암 뜯으러 가는데 따라오지 말라는데두 기를 쓰고 따라 다녔다. 강물이 한창 차가울 때 돌을 번져가며 (기름 개구리) 하마 잡는 오빠 따라 다니며 주머니를 쥐여 주었고 고기잡이 하러 갈 때도 다래끼를 들고 바지가랭이를 다 적시군 했어도 마냥 신 나기만 했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고향의 청신한 공기는 페부를 씻어 내는듯 했으며 동년에 보았던 내 고향마을은 하늘도 유난히 푸르고 높아 보였고 별도 더 반짝이고 달도 더 밝아 보였으며 돌돌 흐르는 강물도 더 맑아 보였고 산천의 일목일초 모두가 더 없이 아름다웠던 것 같았다. 그야말로 나의 동년은 자연의 싱그러움 그 자체속에서 뛰놀던 하늘아래 첫 동네의 꽃동산과 정다운 고향 마을에서의 잊지 못할 추억이였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span></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 style="font-size:22px;"> 2 . 고난의 년대 속에서</b></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우리들의 동년시절은 고난의 년대여서 1960년대 중후반까지도 마을에는 전기가 없었고 집집마다 밤이면 작은 접시 같은데 실 여러겹이나 솜을 길게 비벼서 콩기름을 부어 놓고 한쪽 끝부터 불을 달아 등잔불로 켰으며 얼마후 석유를 작은 유리병에 넣고 심지를 만들어서 불을 달면 역시 등잔불이 되었는데 그것도 항상 아껴 써야 했었다. 겨울에 추울 때면 화로에 불을 담아 놓고 찌개 같은 것을 끓이기도 하고 손을 쪼이기도 했으며 간혹 가다 좀 누그러진 그 불에 감자를 파묻어 놓고 구워 먹기도 했었다. 옷은 해여지면 기워입고 양말과 장갑은 실로 손수 떠서 신고 끼기도 했었다. 어릴 때에는 새 고무신을 신어 보는 것도 큰 영광이였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입쌀밥이라고는 명절에나 먹어 보았고 주식은 항상 좁쌀밥과 산량이 많이 나는 메 옥수수 밥이였다. 돼지고기는 청명과 추석에만 맛 보았던 기억이 난다. 해마다 추석 전에는 추석 바심이라고 먼저 여문 벼를 베여 발방아에 찧어 입쌀밥을 해먹었는데 그 때는 그 이상 행복이 란 없는 줄만 알았다. 추운 늦 가을에는 나보다 일곱살 위인 언니와 다섯살 위인 오빠는 학교에서 돌아 오자마자 멧 마당에 가서 벼 쭉정이 무지에서 바람에 날리고 또 선정한 다음 남는 벼알을 모여서 발방아에 찧어 쌀을 조금씩 만들었다. 그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가 안간힘을 다 해도 방아가 꿈쩍하지도 않았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 엄마는 쭉정이 쌀이나 쌀 싸래기를 가루내여 팥으로 죽을 쓰다가 팥배기 오그랑 죽과 찌삶이라는 걸 해주었었는데 참말로 별 맛이였다. 감자를 갈아 지짐이도 하고 겨울이면 언감자 밴새도 했으며 늘 감자밥을 해주었는데 그 때 쇠가마에 한 감자밥 누룽지가 어쩜 그렇게 맛 있었던지 잊어지지 않는다. 뜰안에는 늘 닭들이 달아 다니다가 제 자리에 가서 닭알을 낳았고 돼지우리에는 항상 몇마리의 돼지들이 꿀꿀거렸다. 엄마 따라 다니면서 돼지먹이 풀을 뜯을 때 같이 풀도 뜯고 마대도 벌려 줬었고 엄마가 돼지죽을 만들어 놓고 일하러 갔다오는 중간에는 시키는대로 돼지 먹이를 한번씩 주면서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려 했었던 기억들이 난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60 년대 초에 전국적으로 량식 고생난을 겪으며 대식품을 먹던 시기에도 우리는 다행히 부지런한 아버지와 알뜰하게 살림 잘하는 엄마 덕분에 배를 굶은 기억이 없다. 나는 엄마 따라 졸배와 쑥 캐러 늘 다니던 기억이 있는데 한 마대씩 캐온 졸배와 쑥을 각각 가마에 찜틀 놓고 쪄서 반죽하고 콩깎지를 흐드러지게 푹 삶아 두부 주머니에 걸러 낸 다음 그 물을 가라 앉히면 전분이 나오는데 그 전분과 졸배, 혹은 쑥을 반죽한 것을 다시 배합하여 옥수수가루 조금 넣고 여러가지 졸배떡, 쑥떡도 해서 기름 발라 먹으니 맛있던 기억만 난다. 엄마는 가을이면 언제나 짬만나면 우리를 데리고 돌피도 훑어오고 벼, 콩, 옥수수, 감자 할것 없이 여러가지 이삭들을 주어서 량식에 보태였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엄마는 콩을 하루저녁 퍼지웠다가 손수 매돌에 갈아 콩물을 끓인 후 서시를 적당히 쳐서 두부도 맛있게 했고 겨울이면 콩을 푹 삶은 후 호미로 짓찧어서 메주도 만들어 말리웠다가 봄이면 장도 담그고 간장도 달였다. 메주 하는 날에는 삶은 콩을 바늘실에 껴서 구슬 목걸이라고 가지고 놀다가 그것을 눈무지에 파묻어 얼궜다가 먹느라고 철없던 그 때 나는 신나게 달아 다녔던 것 같았다. 옥수수를 갈아서 끓이다 주머니에 짜낸 후 엿싹을 넣고 다시 몇시간씩 끓이면 맛있고 달달한 엿이 만들어 진다. 식은 다음 둘이서 당기기를 하듯이 반복하면 새하얀 켠엿이 되고 또 그것으로 태석이라는 걸 만들었는데 칼로 베면 완전한 사탕으로 변신하여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조금씩 주머니에 넣어서 동네 조무래기들을 나눠 주면서 우리 엄마가 한 것라고 자랑을 하던 기억이 난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span></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 style="font-size:22px;">3. 동년시절의 불 사건</b></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우리 년대의 아이들은 자랄 때 놀이감이란 없었고 동네 애들끼리 어울려서 건조실 마당 같은데서 붙잡을 내기나 숨바꼭질 같은것이 위주였고 종이 팔랑개비를 만들어서 손에 쥐고 바람에 날리면서 뛰여 다녔었다. 좀 더 커서는 땅에다 금을 그어놓고 차개돌 놀이도 하고 딱지치기, 꽁기똘 놀이, 제기차기, 말타기, 줄뛰기 같은 것을 놀았는데 그렇게 신 날수가 없었다. 내 기억에 일곱살 때 처음으로 촌에서 꾸리는 유치원에서 옥수수 틔우개 타 먹던 일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일곱살 전에는 어른들이 일하러 가면 동네 애들은 돌봐주는 사람도 없이 저들끼리 알아서 놀아야 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나에게는 60 여년이 지난 지금의 기억속에도 너무나 생생하고 평생 잊혀지지 않는 한가지 큰 사건이 있었다. 그 때 우리집은 ( 초가흙집 ) 지은지 얼마 안되여 집 천정을 올려다 보면 커다란 대들보가 두줄로 보였고 석가래를 안보이게 마른 쑥으로 엮어서 펴놓은 듯 붙혀 놓은 것이 보였다. 원래는 진흙을 이겨서 발라 놓아야 완성되는 것이고 해마다 천정이랑 벽이랑은 토흙으로 물매질 해서 살아온 것 같은데 그 때는 아마 일손이 딸려서 흙을 바르는 걸 미루었던 것 같았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내가 만으로 금방 여섯살 되였을 때 항상 어울려 잘 놀았던 짜개바지 친구 서현지와 송용국이가 그날도 엄마 아빠들 일하러 간 다음 우리집에서 같이 놀게 되였다.그날 따라 엄마는 부엌앞에 콩깍지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아서 어린 우리들 눈에는 천정에 거의 닿은것 같았다. 우리 셋은 부지깽이를 들고 신나게 콩깍지 무지를 파서 동굴처럼 만들면서 노느라고 코구멍이 시커멓게 먼지가 들어가는 줄도 몰랐다. 얼마 안가서 그 놀이도 재미없는 것 같아서 더 재밋는 놀이가 없을가 생각하다가 현지와 용국이가 바로 부엌앞에 놓여진 성냥을 발견하고 어른들이 켜는 것만 보았지 직접 켜보지 못했으니 신기해서 켯다 껏다 하다가 그만 콩깍지에 불이 붙고 말았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일곱살도 안되는 우리셋은 있는 힘껏 불을 끄느라고 했지만 역부족이여서 불은 삽시간에 콩깍지 전체 무지에 활활 타올랐다. 용국이와 현지는 너무도 놀라고 무서워서 울면서 우리집 뒷 고방에 들어가서 숨어 버렸고 우리집은 삽시간에 잿더미로 될 판이였다. 어린 내 가슴에는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어서 두 주먹을 부르쥐고 큰 길까지 달려가서 《우리집에 불이 났어요. 도와 주세요》하고 있는 힘껏 련거퍼 소리쳤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오고 마침 점심 때가 거의 되여서 일하러 갔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였다. 몇십명의 사람들이 달려와서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는 사람, 물 뿌리는 사람들로 한바탕 북적거리고 모두가 달아 다니며 난리를 쳐서 겨우 불을 껐는데 불과 십몇분 사이에 집안은 불바다에서 물바다로 변했고 엉망진창이 되여 버렸다. 나는 불끄기 첫시작에 뒷 고방에 현지와 용국이가 있다고 소리쳐서 어른들이 인차 구해 내여 무사히 목숨을 건지게 되였고 다행히 집은 살렸지만 집 천정의 엮어놓은 쑥가지들이 집 정지칸 면적의 절반 넘어 탔던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때로는 나쁜일이 좋은일로 되는가 보다. 집에 불이 난 그 사건이 있은 뒤로 나는 동네에서 총명한 애로 소문났고 한바탕 훈계 받았어야 할 일이였는데 엄마와 아버지는 나를 욕도 안하고 하마트면 큰일날 번 했다면서 기특하다고 칭찬까지 해주었다. 현지 엄마와 용국이 엄마는 나를 꼭 껴 안아주며 네가 아니였으면 우리 용국이와 현지는 꼼짝 못하고 뒷 고방에서 연기먹고 죽었을 수도 있었는데 네가 살려 줬다며 칭찬했다. 그 후로 두집 엄마는 집에 맛있는 음식만 있으면 나를 가져다 먹이면서 엄청 이뻐해 주었다. 이 일로하여 우리 세 짜개바지 친구는 더 친하게 되였고 학교 다니면서 어느 때까지도 공부하다 모를 것이 있으면 나한테 물어 보자고 둘이 다투기도 했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그 때부터 나에게는 칭찬받기 좋아하는 습관과 진취심이 많은 습관이 싹 터서 알게 모르게 나의 동년시절에서 좋은일과 나쁜일이 동반한 것 같았다. 여덟살에 엄마한테 칭찬을 받으려고 집을 깨끗이 거둬놓고 동생들을 집에 들어 못가게 한 기억도 있고 처음으로 밥을 해놓고 일하러 간 엄마 마중 멀리까지 가기도 했었다. 여덟살 때 0. 7푼이 되는 논 배미를 도맡아 혼자서 벼모를 꽂으며 누구도 도와주지 못하게 하며 아버지에게 장하다고 칭찬 받고 좋았던 일이 잊어지지 않는다.</span></p> <p class="ql-block"><b style="font-size:22px;">  </b></p><p class="ql-block"><b style="font-size:22px;"> </b></p><p class="ql-block"><b style="font-size:22px;"> 4. 마음속의 우리 아버지</b></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내가 동년시절부터 보아 온 우리 아버지는 정직하고 성실하며 대바른 분이셨다. 자신의 의견을 과감히 제출하며 언제나 정의를 지키셨다. 아버지는 천성적으로 능력자이시지만 세월을 잘 못 만나서 째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여 났고 조선에서 아홉살부터 물을 지게에 메다 팔아야 만 했던 궁핍한 살림에서 공부란 꿈도 못 꿨고 학교 문에도 못가 보았으니 일자무식이였었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이 되여서 아무리 곤난한 상황이 되여도 자식들 만큼은 꼭 공부를 잘 시키겠다고 했었다. 특히 남존녀비가 심했던 그 세월에도 남의 집에 시집 보내야 할 딸 일수록 공부를 더 잘 시켜야 한다고 해서 동네 사람들은 리해하기 어려워 했고 아버지의 딸들인 우리 자매들은 늘 마음 속으로부터 감동을 받으면서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꼭 공부를 잘 해야겠다고 다짐 하였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훌륭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오며 자랐다. 아버지는 해방전쟁 당시에 금주 ( 辽宁锦州 )전쟁에 참가하여 후근병인 담가대에 소속되여 포화 속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병원으로 호송하는 일을 맡아하며 목숨도 바칠 각오까지 했었다.그 후 고향 마을에서 해방을 맞았고 토비 숙청 때에도 혼자 밤 길을 걸으며 회의를 다니면서 청춘의 정열을 나라에 바쳤고 토지개혁 때는 농촌의 훌륭한 간부로 활약했고 호조조 시기에는 전 현의 시점 모범 호조조를 꾸리는데 힘 다했었다. 아버지는 담배 등 여러가지 농사를 열심히 해서 번 돈으로 마을에서 처음 학교를 지을 때 손에 있는 돈을 몽땅 기부하셔서 온 마을 사람들의 감동을 받기도 하면서 고향 마을 건설에 많은 힘을 이바지 하셨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아버지는 열심히 살아 온 과정에서 목수일을 능란하게 잘 하셨고 고향 마을에서 수 많은 집들을 지었으며 농촌의 집집마다 없어서는 안되는 소 수레바퀴는 전문 담당 하셨단다. 전기가 없는 마을에서 전기로 탈곡할 수 있는 등 타지방의 선진기술을 남 먼저 보급 받았다. 큰 물레방아를 직접 만들었고 강물을 리용하여 수력기를 돌아가게 하였으며 탈곡장에서 전기를 쓸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전기를 리용하여 쓰는 벼 탈곡기도 만들었고 도리깨로 만 할수 있었던 한전 탈곡을 위하여 나무와 철을 조합하여 란초기를 만들어서 많은 인력을 절약했고 린근 마을에 초청되여 다니면서 보급도 시켰었단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아버지는 오랜세월 동안 생산대장을 맡아 하시면서 농사일에는 전문가 수준이였으며 어느 밭에 무엇을 심으면 산량이 얼마 나올 것이라고 예산하면 번마다 정답이였다고 오래동안 같이 손잡고 회계를 맡아 해온 유재욱 아저씨는 늘 우리 아버지를 탄복 한다고 하셨다. 촌 당지부 서기를 할 때는 현급 회의에 다녀오면 낫과 호미를 그려놓고 한두시간씩 연설하면서 그 누구보다 회의 정신을 잘 전달하여 머리가 비상하기로 소문이 났었고 남들의 존중을 받아온 분이셨다. 어린 마음이였지만 나의 부모님은 너무나 훌륭하시고 위대한 분이라는 인상이 머리속에 자리잡게 되였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우리 아버지의 출중한 판단 능력에 대해 내가 평생가도 안 잊혀지고 탄복됐던 한가지 추억이 있었다. 바로 문화 대혁명이 폭발하던 그 해 아버지는 촌에서 단 지부서기를 맡아 하고 있는 언니와 우리 형제들을 불러 모여놓고 지금 자신이 보건대 이 혁명은 절대 잘못된 것이고 언제든지 꼭 뒤엎어 질 것이니 너희들은 절대로 남을 투쟁하는데 앞장 서서 다른 사람에게 마음 아프게 하고 상처주는 일을 하면 안된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언니를 단 지부서기도 그만 두게하고 나와 내동생을 공부시키는데도 유리한 신흥이라는 아래 공사 마을에 이사 오면서 절대적으로 조용히 살라고 신신 당부하셨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당시에는 누구든지 이 일을 알게 되면 완전한 반혁명 언론이였었고 큰 사건이 일어날 일이였지만 우리 자식들은 원래부터 아버지를 믿어 오고 존중해 왔던 터라 그 누구도 이 중대한 비밀을 잘 지켜왔고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서 모든 행동에 조심했었다. 아니나 다를가 그 때부터 꼭 10년 후 아버지의 예언은 딱 맞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동년시절부터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으로 사람이란 언제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하고 인간의 도리를 잘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조금씩 터득해 온것 같았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span></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 style="font-size:22px;"> 5. 동년시절의 부모님 사랑</b></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어릴적 일이였지만 그 때 기억이 생생한데 우리 부모님들은 농사는 주로 담배와 콩, 벼, 옥수수를 하여 가을이면 좋은 것을 골라 공량을 바쳤었는데 가끔씩 불합격 되는 것은 집으로 도로 가져 오면서 공량 수구 요구가 너무 높다고 하는 것 같았다. 일년 농사 땀 흘리며 다 짓고 초 겨울때는 생산대 회의를 열고 한번씩 부농이라고 하는 총 결산을 하던데 한공에 십몇전씩 할때는 돈을 구경도 못하고 장부만 공개하였다. 후에 몇원씩 할 때는 언니와 오빠가 아버지 엄마와 함께 일하니 로동력이 많다고 하던데 종결 짓는 그 날은 남보다 돈을 많이 탔다고 온 식구들이 기뻐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 하다. 이튿 날에는 합작사에 가서 천을 사온 후 엄마가 손수 재단하여 낡은 재봉틀을 돌려서 집 식구들에게 옷 한견지씩이라도 기념으로 해 입혔던 것 같았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가을이면 많은 식구들이 겨울내내 먹어야 할 여러가지 김치와 특히는 배추김치는 백여 포기씩 하였는데 김치움에서 금방 내온 배추 김치는 별미였었다. 감자와 무우 등 여러가지 채소들을 김치움에 장만하느라 우리들도 모래를 날라 움에 넣기도 하였고 엄마는 앉아서 휴식할 사이도 없었던 것 같았다...... 동년시절에 나는 엄마가 그렇게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여 여러가지 음식들을 만드는 모든 과정을 번마다 열심히 곁에서 지켜 보았다. 나는 비록 어린 나이였었지만 모든 노력의 대가를 차츰 깨닫게 되였고 엄마가 만들어 준 음식을 행복하게 먹을 때 사랑의 손길을 느낄 줄 알게 되였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아무튼 우리 부모님은 그 고난의 년대에도 필사적으로 자신의 모든 힘을 다 바쳐 우리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다 썼었다는 것을 나는 가슴깊이 새겨두게 되였다. 동년시절부터 내가 봐 왔던 우리 엄마는 심성이 착하고 전형적인 현처량모로서 아버지를 공대 잘 했으며 부부간의 정이 돈독했고 한번도 언성을 높이는 걸 본적이 없었다. 엄마는 또 심청이라고 소문날 정도로서 불쌍한 우리 외할머니를 몇 십년을 하루와 같이 곁에서 잘 보살펴 드려서 사람마다 둘도 없는 효녀라고 동네방네 칭찬이 자자했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우리가 나서 자란 시대는 계획생육이란 것도 없었고 우리의 부모님들은 어쩔수 없이 아이가 생기는 대로 낳아야 했었다. 째지게 가난하고 또 의료시설도 기본상 없었던 세월에서 애들이 홍진. 촉한. 발열같은 병에 걸리기만 하면 살아남기 힘 들었었다. 우리 부모님도 례외가 아니여서 자식 열한명을 낳아서 키우다가 일곱명을 저 세상에 보냈고 우리 사남매만 남게 되였으니 우리들도 혹시 언제 어떻게 될가봐 늘 시름놓지 못하고 키워서 그런지 나는 부모님께 한번도 욕먹고 매맞아 본 적이 없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그만큼 다른 애들보다 부모님 사랑을 더 많이 받으면서 자란 것 같다. 그 때를 돌이켜 보면 부모님은 우리 남매들을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 하셨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앞을 가리운다. 부모님 생전에 못 다한 효도가 평생 후회와 한으로 남아 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span></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 </b><b style="font-size:22px;"> 후기 </b></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지금 와서 추억을 더듬어 보면 동년시절의 나는 무엇을 하나 칭찬 받기 위하여 하던 데로부터 점차 어디에서 든지 일등을 해야하고 남을 초과해야 만 직성이 풀렸던 것 같았다. 소학교 일학년부터 6 학년까지 최우등을 하면서 엄마가 학부형 회의에 갔다 오면 선생님들에게 칭찬만 들었다는 것이 늘 어깨가 으쓱했고 학습성적이 좀 차했던 오빠는 나 때문에 엄마 아버지께 공부를 좀 더 잘하라고 꾸중받고 나를 은근히 구박 했던 것 같았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내가 소학교 다닐때의 꿈은 중점 중학교에 가고 중점 고중에 가며 좋은 대학교에 가는 것이였다. 그러나 그 꿈은 첫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문화 대혁명의 찬 서리에 맞아 시들어 버렸고 하고싶은 공부도 다 못한 것이 평생 한으로 남아 있게 되였다. 다행인 것은 운 좋게 성향 차별이 많던 그 시기에 농촌을 벗어나 국가의 정식 직원이 되여서 사회에 진출하였으니 농촌에서 태어난 나로서는 일생의 전환점이 되였었다. 열심히 살다보니 리상적인 남편을 만나 행복한 결혼 생활도 했었고 두 딸애도 중점대학을 필업하고 자기들 인생을 잘 살고 있다. 비록 이런저런 풍파속에서 잘 견디여 왔지만 이제 남은 황혼인생도 보람있게 살기위해 최선을 다 하고 싶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나의 동년시절의 동창 친구들아 한번 목놓아 불러보고 싶구나. 태명숙. 황금순. 김순자. 안영옥. 김창희. 임영숙. 김명옥. 박민자. 안옥순. 박옥선. 서해순. 량연옥. 정송학. 김명철 강국철. 전명숙. 최민옥. 전장화. 박영대. 림순금. 김순선. 석련자 등등 모두들 건강하게 잘 있다가 기회 될때 반갑게 만나보자...... 하늘나라에 계시는 1~ 6학년의 반주임이자 어문교원이였고 언제나 인자 하셨던 황천석 선생님도 그립구나...... 하늘나라에 있는 서현지. 로하룡. 김성길. 박진혁. 석상국. 김영진. 박순화. 황순선 등등 그립구나......소학교 저학년에서 고향마을을 떠나 이사 간 송용국. 박범철. 석해산. 김시혁 등등 너희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보고 싶구나......</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 2022년 4월 18 일</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0px;"></spa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