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르몬또브 (Lermontov/莱蒙托夫) 의 文学 庭园

레르몬또브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 rgb(57, 181, 74);"> &lt;한상익 (조선) ㅡ 원산 앞 바다&gt;(39X27, 61년)</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추모수필</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원산 앞바다, 푸른 海水는 따뜨읏할것이옵니다</p><p class="ql-block"> ―작가정신의 높으신 귀감, 김학철선생님</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 (墨晝) 정 세 봉</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span style="color:rgb(57, 181, 74);">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rgb(57, 181, 74);">. * 金学铁 (1916 ~2001) 肖像画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rgb(176, 79, 187);"> ㅡ (金文武 画伯 그림)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어제(2001년 9월 25일) 오후. 3시 39분에 별세하셨습니다!”</p><p class="ql-block"> 아드님인 김해양씨의 전화로 김학철선생님의 별세소식을 접하였던 나는 한참을 고개를 떨군채 돌처럼 굳어져있었다. 그러는 내 가슴에 사무쳐올랐던것은 그 어떤 인지상정적인 놀람이거나 비애같은것이 아니였다. </p><p class="ql-block"> (지금 가시면 안되는데... 왜서 하필이면 이런 시점에서 급급히 떠나시는것이옵니까?)</p><p class="ql-block"> 이런 항변과도 같은, 꼭 마치 학철선생님이 인생의 패배자라도 된것만 같은, 그런 렬패감과 잔혹한 야속함이였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 그러나 나는 금방 그것이 나의―혹은 우리들의―욕심임을 알았다. 참으로 아까운 인격자이시기에, 너무나도 크고 깊은 고통과 고독과 한(恨)을 안고 사신 분이기에, 우리 모두가 작가정신의 철탑같은 지주(支柱)로 기대여왔던, 우리 문단의 단 한분의 거장이시기에 그런 안타까운 항변을 외쳤음을 알았다.</p><p class="ql-block"> 그처럼 험난하고 파란만장 했던 선생님의 일생―그 전기적인 일대기를 떠올리면서 김학철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우리 문단을 상상해보면서 그리고 그분한테서 내가 받아왔던 남모르는 사랑과 믿음과 기대를 새삼 절감하면서 나는 급기야 솟아오르는 눈물을 어찌할수가 없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어릴적은 말할것도 없고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썩 뒤에까지도 김학철, 그 이름은 나한테는 “멀리에서 바라볼수밖에 없는” 경외(敬畏)의 존재였다.그만큼 선생님은 워낙 큰 어르신이였고 함부로 범접할수가 없는 분위기를 지닌 분이였다는 얘기다. </p><p class="ql-block"> 그러다가 운명은 감격스럽게도 나한테 하나의 계기를 하사하여주었던것이니 나의 중편소설 “볼쉐위크의 이미지”에 대한 “닉명고발신사건”이 바로 그것이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1991년 6월의 어느날, 남영전씨가 연길로 와서 김호근씨를 동반해가지고 우리 집에 찾아왔었다. 나한테 그 “고발신사건”의 전말을 알려준 그들은 그 길로 곧장 김학철선생님댁으로 갔던 모양이였다.</p><p class="ql-block"> 이야기를 듣고난 김학철선생님은 크게 놀라시면서</p><p class="ql-block">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도 그런 일이 있단 말인가!”하고 몹시 분개를 하셨다고 했다.</p><p class="ql-block"> 아니나 다를가 김학철선생님은 즉시 펜을 들어 나의 소설을 격찬을 해주시고 용렬하고 무지한 “고발자”와 아직도 사회에 잔재해있는 이른바 “설치류”들에 대하여 신랄한 비평을 가했던것이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우리의 재화있는 소설가 정세봉도 이번에 그러한 설치류들의 치화(齒禍)를 입었다. 발표된 한편의 소설이 횡래지액(橫來之厄)을 당한것이다. 하마트면 반당, 반사회주의적 독초로 생매장을 당할번했기때문이다.”(“구태의연”, “장백산” 1991년 제5호)</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정세봉이 그 소설로 지은 죄란 거짓말 안한 죄, 역설적으로 말하면 정말을 한 죄다.”(“혼잣말 중얼중얼”, “송화강” 1992년 제6호)</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렇게 시작된 김학철선생님과의 “운명적인 인연”(옷깃이 스쳐도 인연이라는 뜻외의 과장된 뜻은 없으니 부디 오해의 소지가 없기를 바란다)은 나를 참으로 “행복한 후배”로 만들어주었다. 김학철선생님께서 나를 어여쁘게 봐주시고 믿어주시고 그 어떤 큰 기대를 주셨다는 사실은 내가 자신이 걸어온 인생길을 후회하지 않는, 오히려 뿌듯한 자긍심을 느끼게 되는 리유중의 하나이다.</p><p class="ql-block"> 이 글을 쓰고있노라니 하나하나 되살아나는 감동의 기억들이 머리속에 차례로 줄을 짓는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 “이번에 정세봉의 &lt;볼쉐위크의 이미지&gt;를 수상작으로 뽑아주신 심사팀의 혜안에 감사를 드립니다!”</p><p class="ql-block"> 1992년 5월 16일, 백산호텔에서 열렸던 “배달문예상”시상식 수상소감에서 자신에 대한 언급보다는 나의 수상을 더 기뻐해주셨던 선생님.</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 “김학철입니다, 편집부에 몸을 담그게 되였다니 축하를 드립니다!”</p><p class="ql-block"> 1994년 1월 6일, 내가 만 5년을 &lt;실업자&gt;로 살다가 리상각주필님의 덕분으로 “천지”(지금의 “연변문학”)월간사에 출근을 하기 시작한 나흘째 되는 날 오후 4시경에 몸소 전화를 걸어 제일 첫사람으로 축하를 해주시던 일.</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잘됐어! 한국에서 인정을 받게 되였다니 얼마나 좋은 일이야. 한국사회의 구석구석을 잘 보고 돌아와!”</p><p class="ql-block"> 1999년 3월 30일, 서울행을 이틀 앞두고 전화를 드렸더니 당신 일처럼 기뻐하시던 유쾌한 육성.</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지금은 내편이 많아. 당신들은 둘다 우리 문단의 엘리트들이야!”</p><p class="ql-block"> 2000년 2월 6일(음력설 이튿날) 오전 10시, 장정일씨와 함께 설인사차로 저택을 찾아갔을 때 몹시 즐거워하시면서 격찬을 해주시던 모습.</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선생님은 이렇게 후배들을 예뻐해주시고 좋아하셨다. 그런 사랑은 우리 민족문학을 위한 큰 사명감에서 비롯된것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최근년간 나는 그것이 선생님의 어쩔수 없는 “고독의 표현”이기도 한것임을 가슴 저리게 느끼군 하였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나는 선생님께서 언론자유를 운운하면서 탄식하시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였다.</p><p class="ql-block"> "요즘은 체첸문제가 나를 괴롭히고있어.”(2000년 3월 23일 14시 15분, 선생님 저택)</p><p class="ql-block"> 선생님은 이렇게 “강건너 불”처럼 먼일까지도 홀로 괴로와하고 고민을 하시는것이였다. </p><p class="ql-block"> 어쩌면 선생님은 “단창필마로 고군분투”하고있는 자신을 스스로 애처롭게 느끼고있는것 같기도 했다. 세상과 동료들의“버림”을 받았던 “고독한 산책자”―장 작크 루쏘의 그것과도 같은, 위인(偉人)에게서만 풍길수 있는 그런 고독의 향기였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나는 지금도 1998년 5월 5일에 있었던 김학철선생님과의 만남을 잊을수가 없다. 전화 약속대로 9시 30분에 저택에 찾아가서 권하시는대로 서재 북쪽켠에 놓인 긴 쏘파에 앉았다. 남쪽 창문가에 놓인 테블에서 뭔가를 쓰시던 선생님은 오른 다리로 바퀴 달린 안락의자를 아주 능숙하게 “운전”을 해서 맞은켠에 와 앉으셨다.</p><p class="ql-block"> 부인님이 들여온 커피를 한모금 마시는 시늉만 내시고는</p><p class="ql-block"> “이봐, 세상에 참 한심한 일도 많다구.”</p><p class="ql-block"> 음성을 낮추시며 말꼭지를 떼는것이였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한국에서 출판된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놓고 문단의 몇몇 사람들이 “반당, 반사회주의 독초”라고 중앙에까지 고발을 한 그 자초지종과 상세한 내막을 나한테 이야기해주셨다.</p><p class="ql-block"> 일제의 감옥에서 3년 반, “사회주의 감옥”에서 10년의 옥고를 치른 수난자이고 인젠 80고개를 넘은 “앞이 얼마 남지 않은” 로인을 아직도 매장해버리지 못해 속을 끓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보다는 쓸쓸한 비애를 느끼였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언론의 자유가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란 불가능해. 또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고서는 경제도 발전을 할수가 없는거야, 우리 같이 분투를 하자구!”</p><p class="ql-block"> 선생님은 오른 주먹을 불끈 쳐들어보이면서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는것이였다. 나는 그 믿음에 가슴이 뜨거워났지만 마음은 가볍지가 않았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우리 같이 분투를 하자구!” 그 말의 의미는 분명히 문단후배에 대한 간곡한 기대였던것이요, 한사람의 고군분투로서는 민주주의라는 성스러운 세계를 창출해낼수 없으며 치열한 정신을 갖춘 작가군(群)이 형성되여야만 한다는, 또한 그리 되여야만 선생님 자신도 외로움에서 해탈할수가 있을것이라는 눈물겨운 절원이 담겨져있는 것이기 때문이였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 그뒤에도 선생님께서는 여러 글에서 나와 나의 문학에 대해서 자주 언급을 하셨다.</p><p class="ql-block"> “... 우리 민족문단에도 얼음장이 갈라질 때와도 같은 굉음을 울리며 태여난 소설이 있다. 정세봉의 &lt;볼쉐위크의 이미지&gt;가 곧 그것이다... 우리 사회의 심장부(명문화하지 않은 금구지역)에다 감히 메스(수술칼)를 들이댄것은 역시 &lt;볼쉐위크의 이미지&gt;이다. </p><p class="ql-block">(“얼음장이 갈라질 때” ‘장백산’ 1999년 제2호)</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정세봉과 박선석이 그러한 성과들을 이룩해냈다는것은 그들이 오랜 세월 밑바닥인생―따라지목숨을 살아왔다는 사실, 이 사실과 갈라놓을수가 없을것이다... 행운의 별밑에서 일생을 수박 겉핥기로 살아온 사람들은 억천만번 죽더라도 이 경지에는 다다르기가 어려울것이다.”(“흙내와 분내” ‘장백산’ 2000년 제2호)</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 그래도 나는 희망을 버릴 생각은 없다. 혹 &lt;볼쉐위크의 이미지&gt;가 새끼를 쳐서 우리 문단이 어느날 그 제2세, 3세들로 가득해질지도 모를거니까 말이다.”(“창발력 만세!” ‘장백산’ 1998년 제5호)</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솔직히 말해 그 어떤 평론가의 평론보다도 더 유력한 김학철선생님의 이런 평가는 나를 몹시 격동시켰지만 한편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수가 없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김학철선생의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는 1956년, 쏘공 20차당대회 직후인 1960년대 전반기, 흐르쑈브집권시기에 씌여졌다. 중공과 쏘공간의 "대론전" 끝에 두 당, 두 나라의 관계가 이미 적대적관계로 악화되였던 그 정치사회적 배경하에서 ”절대적인 진리의 화신“이였던 모택동을 감히 비판하고 흐르쑈브집권하의 쏘련(현대수정주의)을 공공연히 중국이라는 동토(凍土)를 해토시킬수 있는 ”봄바람“으로 비유한 소설을 썼다는것은 분명히 목숨을 내걸고 한 도전이였다.</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그러나 나의 “볼쉐위크의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안전도(度)”가 있는 기후에서 씌여졌던것이다.</p><p class="ql-block"> 김학철선생님이 그 점을 모르실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그렇게 격찬을 해주시는것이다.</p><p class="ql-block"> 지금도 나는 마음에 실려오는 무거운 부채감(負債感)을 떨쳐버릴수가 없다. 나의 작가적량심 본연의 사명감이겠지만 김학철선생님의 관심과 배려가 너무나 고마워서이기도 하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두가지 일만 더 이야기하겠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작년 겨울 나는 한국 모 문학지에다 김학철선생님의 에세이 10편을 특집으로 꾸며서 보냈었다. 금년봄에 마침 잡지가 출간돼 나와서 우송되여 왔길래 보았더니 편집인인 xxx씨가 편자의 말을 학철선생님이 보기에 많이 서운할 정도로 “린색하게” 썼기에 좀 곤혹스러웠다. 남영전씨도 그걸 보고 “글쎄, 좀 그렇네.” 했다.</p><p class="ql-block"> 그래서 나는 잡지에다 “... 편자의 말을 xxx씨가 좀 서운하게 썼는데 예쁘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라는 글쪽지를 끼워서 아드님인 김해양씨한테 맡겼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이튿날, 그러니까 2001년 3월 2일 오후 4시경에 전화벨이 울렸다.</p><p class="ql-block">"나 김학철이야. 잡지를 고맙게 받았고 편자의 말도 읽어봤어. 난 xxx의 글에 전적으로 동의야. 원래 내 글은 시사성이 다분한 칼럼이거던. 그리구 그 사람의 관점과 솔직함을 난 전적으로 받아들여. 우리 다 같이 겸허하자!”</p><p class="ql-block"> (역시 큰 그릇이로구나! ...)</p><p class="ql-block"> 나의 진부한 사유와 상투적인 상상이 상쾌하게 깨뜨려지는 순간이였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2001년 5월 17일 오전 10시 30분쯤에 뜻밖에 걸려왔던 선생님의 전화, 결국 그것이 김학철선생님과의 마지막 전화통화로 될줄을 어찌 알았으랴.</p><p class="ql-block"> 그날 김학철선생님은 이상하게도 어디에서 무슨 소릴 들었던지 아니면 나의 “침묵”이 걱정스러웠던지 단도직입적으로 나의 창작문제를 언급하시는것이였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 “이봐, 장편을 꼭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지 말라구. 그리구 꼭 명작을 쓰겠다는 집착도 버리구... 편하게 생각하구 써야 해. 꼭 장편이 있어야 명작가인게 아니야. 로신을 봐. 로신이 장편이 없잖은가. 체호브도 그렇구... 최명익이두 만년에야 &lt;서산대사&gt; 하나를 쓴거야. 모파쌍의 &lt;비게덩이&gt; 같은거 기가 막힌 명작 아니야. 고골리의 &lt;따라스 불리바&gt; 같은것도 얼마나 좋아... 그리구 당신 소설엔 해학이 좀 부족한것 같아. 참고를 하라구.”</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미국의 저명한 문학담당기자 허버트 미트갱이 소개한 “20세기를 감동시킨” 대문호 66인 가운데서 많은 작가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친히 겪은 사람들이였다. </p><p class="ql-block"> 그중에는 쏘련작가―-어릴적에 읽은적이 있었던 “단검”의 작가―아나똘리 릐바꼬브 등 몇몇 사회주의 권(圈)의 반체제작가들도 끼여있었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체코슬로바키아의 반체제작가 이리 스트란스끼는 “행복”이라는 표제의 단행본을 낸것이 화가 되여 2년형을 받고 감옥에 갇혔고 독일(동독)작가 한스 요아힘 셰들리히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단조롭고 소외된 생활을 폭로한 “시험당한 이웃”이라는 소설을 쓴것으로 하여 “국가의 적”으로 선언되였지만 작가 본신이 직업을 잃고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있던 안해가 장학금을 박탈당하는 정도의 벌을 받았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가석하게도 허버트 미트갱의 발길은 이곳까지 미치지를 못하였다. 인생경력으로 보나 문학적으로 보나 우리의 김학철선생님이 스트란스끼거나 셰들리히와 같은 이른바 “대문호”들과 어깨를 겨눌수 없다는 리유는 하나도 없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 20세기의 전반기에는 총을 든 반일투사였고 후반기에는 붓을 든 민주주의의 투사였던 김학철선생님은 자신의 치열(熾熱)한 삶과 전투적이고 비판적인 문학으로 옹근 동포사회를 격동시켰고 20세기를 빛내시였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lt;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p><p class="ql-block">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gt;</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철석같은 삶의 신조를 평생을 두고 실천을 하신 분, 자연의 순리대로 “지한명(知限命)하야” 85성상 고달픈 “나그네 길”을 웃으시며 거뜬히 가신 분, “조선의용군 추도가”(김학철 작사)와 “황포군관학교 교가”의 멜로디를 추억으로 향수하시며 두만강 푸른 물에 실려서 원산 앞바다 그리운 고향으로, 대자연으로 되돌아가신 분. </p><p class="ql-block"> 참으로 멋있는 분, 아까우신 분! ...</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김학철선생님은 불굴의 작가정신의 귀감으로 우리 문단과 내 마음속 우주의 하늘에 북극성으로 떠서 오래오래 빛날것이다.</p><p class="ql-block"> ―김학철선생님, 원산 앞바다 푸른 해수(海水)는 따뜨읏할 것이옵니다.</p><p class="ql-block"> 편히 쉬소서, 위대한 영령 (英灵) !</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2001년 9월 29일)</p><p class="ql-block">​</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lt;장백산&gt; 2002년 2기 登载]</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 rgb(57, 181, 74);">[추도가]</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 rgb(57, 181, 74);"> 조선의용군 추도가</span></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 rgb(57, 181, 74);"> 김학철 작사, 류신 작곡</span></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 rgb(57, 181, 74);">사나운 비바람 치는 길가에</span></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 rgb(57, 181, 74);">다 못 가고 쓰러지는 너의 뜻을</span></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 rgb(57, 181, 74);">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span></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 rgb(57, 181, 74);">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 길이 잠들어라</span></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 rgb(57, 181, 74);">불멸의 영령!</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