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대학 교수 고 우상렬의 문학작품 10편

春光

<p class="ql-block">《살구꽃 피는 계절》을 읊어보셨습니까? / 우상렬</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살구꽃 피는 계절’이라, 구미가 동한다. 우리에게는 분명 살구꽃 피는 계절이 있었다. 그럼 살구꽃 피는 계절은 어떤 계절이였던가? ‘살구꽃처럼 환하던/ 두 사람의 봄을 그리며’ ‘살구나무 아래서/ 백년해로 다짐하던 그날 밤’, ‘시처럼 만발한/ 살구나무 꽃바다’에서 알 수 있다싶이 그것은 영원한 사랑이고 다함없는 행복에 다름 아니다. 사실 살구꽃은 언녕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사랑, 행복의 상징코드로 되여있다. 이 서정서사시는 처음 이런 상징코드로 행복멜로디를 뽑아내는가 싶더니 급전하강으로 비극멜로디가 흘러나온다. 행복멜로디는 어쩌면 이 비극멜로디의 전주곡으로 볼 수 있다. 그런 만큼 이 비극멜로디의 충격은 크다. 또한 이 비극멜로디가 서정서사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p><p class="ql-block">이 비극멜로디는 순정남과 마음 변한 녀인의 충돌 속에 일어난 것이다. 전통적인 가부장사회에서 대개 남자가 변심하고 녀자가 눈물을 흘리는 형국인데 이것은 그게 아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사실 이것은 우리 조선족사회의 사랑비극을 읊고 있다. 살구꽃 피는 산골에서 오손도손 그래도 행복했는데 가난이 문제다. 그래서 그 개도 안 먹는 돈 때문에 녀자는 남편과 가짜 리혼을 하고 외국으로 간다. 그런데 ‘몸이 멀어지면 맘도 멀어지’는가, 녀자의 가짜리혼이 진짜리혼으로 둔갑한다. 마음이 변한 것이다. 인간성 파멸의 비극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다른 녀인의 손 한번/ 아니 잡은 채/ ‘일편단심 민들레’로/ 하얀 순정을 지켜”온 순정남에 대한 배반으로 된다. 따라서 아름답던 사랑도 파멸된다. 호랑이 잡던 사냥군 사나이와 ‘선녀처럼 눈부신’ 처녀는 천생배필이건만. 그래서 그 사랑의 비극이 더 충격적이고 우리의 가슴을 더 아프게 한다.</p><p class="ql-block">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이런 비극이 연출되고 있다. 이 서정서사시는 분명 이런 사랑비극을 읊으면서 제목을 &lt;살구꽃 피는 계절&gt;이라 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의 역설이면서 그것을 더 돋보이게 한다. 이 서정서사시는 바로 이런 사랑비극을 읊고 있어 사회적 의미와 시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 전통적인 아름다운 녀성의 순결미 및 순수하고 진지한 사랑의 파탄이기에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노스텔지아에 기인하는 일시적인 가벼운 감상이 아니다. 그것은 민족과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 인간이 영원히 간직해야 할 아름다운 인간성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감정이 희박해지고 헌신짝처럼 내버려지는 현시대에 있어서 말이다. 따라서 &lt;살구꽃 피는 계절&gt;은 제목이 시사하다시피 바로 그런 아름다운 인간성과 사랑에 대한 갈구를 톺아내고 있다. 그래서 시적 자아는 ‘올해도 살구꽃이/ 구름처럼 흐드러진 범진령’, ‘살구꽃 피는 계절/ 아!/ 그 계절이 그립다…’고 되뇌이고 있다. 그래서 이 서정서사시는 더 값진 줄로 안다. 시인은 바로 이런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존재들이다. 김학송도 여기에서 례외는 아닌 줄로 안다.</p><p class="ql-block">하지만 &lt;살구꽃 피는 계절&gt;은 비극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지막 부분에 ‘그 이름도 청순한 민들레촌,/ 순이는 딸애와 함께/ 이 마을의 새 주인이 되였다’, 그리고 ‘아빠의 귀여운 손녀가 어느덧/ 학교 갈 나이가 되였다’로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져주기도 한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어찌 희극 뿐이랴. 비극이 생기고 있는 것도 정상. 인생은 희노애락의 파노라마가 아니더냐. 그래 우리는 비극에 대해 정시하기도 해야 하겠지만 정상으로 대할 수 있는 평상심도 가져야 한다. &lt;살구꽃 피는 계절&gt;은 이런 정상적인 평상심을 읊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있어 좋다. 우리 시대정신과도 통한다. 산 사람은 어떻게 해서나 살아야 한다. 그 비극을 딛고 말이다.</p><p class="ql-block">그래 우리는 누구나 &lt;살구꽃 피는 계절&gt;을 한번 읊어볼 필요가 있다. 이 시는 얼마 전 조문판 《연변일보》 ‘해란강문학’ 코너 전면에 실려있었다. 김학송의 시는 워낙 우리 조선족의 삶의 정서를 그 누구보다도 감명 깊게 읊어낸다. 그는 우리의 희노애락을 시의 꽃으로 피워내는 명수다. 그는 우리 조선족의 대표적인 향토 서정시인이 되기에 손색없다.</p><p class="ql-block">김학송의 서정서사시 &lt;살구꽃 피는 계절&gt;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우의 사상내용이나 서정도 한몫 했겠지만 간만에 접하게 되는 서정서사시 형식이 신선하다. 사실 우리 조선족 시에는 이런 서정서사시 형식이 없은 것이 아니다. 새 중국이 성립되여 얼마 안되는 1950년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개혁개방 후에 김철의 &lt;산촌의 어머니&gt;를 비롯하여 얼마간 나타났다. 사실 한 시대를 거창하게 노래하는 데는 이런 서정서사시가 제격이다. 그런데 현단계 우리 조선족 시단에는 이런 서정서사시가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 시대가 많이 세속화되고 파편화되면서 시인들도 스케일이 작아지면서 짧은 서정시에 많이 연연하기 때문인 줄로 사료된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김학송의 &lt;살구꽃 피는 계절&gt;은 새롭고 돋보인다. 그것도 이전의 서정서사시가 우리 조선족의 혁명력사 제재를 많이 취급하고 있는 데 반해 우리 조선족의 현실생활을 제재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p><p class="ql-block">그리고 &lt;살구꽃 피는 계절&gt;은 민족적 색채가 진하다. 첫 시작에 등장하는 ‘호랑이’도 그렇고 ‘민들레촌’도 그렇고 ‘순이’도 그렇고 민족적 정취를 풍기는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이미지 및 그 조합들이 생경하지 않고 자연스럽고 정답다. ‘뜨락의 살구꽃도 궁둥이를/ 요상하게 흔드는걸 보니’, ‘내물의 입술도 바짝 마르는 걸 보니/ 아마도 말 못할 속사연이 있었나 보다’. 사랑의 변심을 이렇게 자연의 상징적 이미지의 력동적인 의인화로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lt;살구꽃 피는 계절&gt;의 서정이 직설적이고 공허하기 보다는 이미지화된 만큼 진정성이 넘치면서 차분해서 더 몸에 와 닿는다. 례컨대 안해의 변심 때문에 슬픔에 젖은 순정남의 슬픔을 시적 자아는 객관상관물로 뻐꾸기를 끌어들여 ‘뻐꾸기만 뻐꾹뻐꾹/ 어리석은 나그네를 비웃으며 날아간다’로 야속하고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p><p class="ql-block">&lt;살구꽃 피는 계절&gt;은 우리 조선족 시단에 하나의 좋은 시작이 될 줄로 안다. 우리 조선족 시단의 ‘살구꽃 피는 계절’을 꿈꾸어본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출처:연변일보 2019년6월 21일 발표</p> <p class="ql-block">우리 좀 우아하게 삽시다 / 우상렬</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연길은 현재 전국문명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너도나도 떨쳐나서 분발하고 있다. 일시에 새로운 면모가 펼쳐지는 듯하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촌티를 많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우리는 돈에 너무 연연하는 것 같다. 천민자본주의적 냄새가 많이 풍긴다.</p><p class="ql-block">연길은 먹을거리가 풍성한 미식의 도시다. 조선족음식에 조선음식, 한국음식, 한족음식〜 찍고 박기다. 그런데 제법 그럴듯한 식당에 들어갔다가도 메스꺼울 때가 있다. 입구 카운트 한 귀퉁이에 황금색 구리로 실물보다 몇 배 크기로 주조한 두꺼비가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입에는 중국 돈 제일 큰 액면인 백 원짜리를 선두주자로 많은 돈을 물고 말이다. 분명 나보고 돈 달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다. 돈도 돈이겠지만 두꺼비 몸뚱아리에 난 특유의 우둘투둘 옴 모양이 몸서리치게 한다. 그 옴 모양이 당장 내게로 옮겨 붙을 것 같으니 말이다. 나는 이 두꺼비가 눈에 띄일 때는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치며 빠른 걸음으로 피해 달아난다. 그럼 왜 이 을씨년스러운 두꺼비를 카운트에 모셔놓았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두꺼비는 조선족이나 한족이나를 막론하고 민속학적으로 복두꺼비라 식당 주인이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기원을 담아 모셔놓았다고 한다. 또 어떤 식당은 보면 두꺼비보다는 좀 점잖게, 그래도 무슨 귀신딱지 같은 財神爺-재물을 가져다준다는 관우상을 모시고 있다. 그 멋진 관우님이 어찌 이렇게 속되게 변해버렸는지, 참! 그래 '잘 모셨다'.</p><p class="ql-block">연변대학교, 우리 조선족 교육, 문화의 메카-성지. 나는 우리 대학교 주위가 먹자골목이 되는 것도 아니꼽지만 돈 냄새를 확 풍기는 것은 더구나 꼴 볼견이다. 우리 연변대학교 정문 앞 길을 건너 좀 오른 쪽으로 치우쳐 우뚝 선 건물 꼭대기를 한 번 보라. 거기에 돈이 박혀있지 않은가. 옛 날의 구리엽전 모양을 크게 주조하여 말이다. 물론 구리엽전 모양이되 변형을 주고 있다. '상평통보' 같은 글자가 박혀있을 주변에 태극무늬를 박아 넣은 것이 다르다. 그러나 전반적인 이미지는 분명 구리엽전을 연상시킨다. 그 태극무늬는 세상이 아무리 변화무쌍해도 돈만 많이 벌게 해달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다. 이 구리엽전이 전반 건물의 중간지점 꼭대기에 척 붙어있으니 돈, 돈, 돈을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돈은 우리 건물 안으로 말이다. 그래 건물주의 '포부'도 참 야무져!</p><p class="ql-block">요새 우리 중국도 좋은 일이 많은 것 같다. 쩍 하면 시상식이 아니더냐. 무슨, 무슨 상이 어쩌면 그렇게도 많은지! 사실 이상할 것도 없지. 좋은 일, 좋은 사람이 있으면 표창하고 상을 주고 해야지. 좋은 일, 좋은 사람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상에 따르는 상금이로다. 요새 시장경제니 맨 입으로 표창만 하고 상장만 줘서는 안 통한다. 상응한 상금을 주는 것도 정상적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굳이 이 상금액수를 큰 간판에 큰 수자로 달달달 써서 사회자가 큰 소리로 돈 수자를 또박또박 외우면 수상자는 두 손으로 그 큰 간판을 높이 들어 흔들어대며 거들먹거리니 말이다. 그래 정말 '잘 났다'!</p><p class="ql-block">이 세상 돈 참 좋지. 이 세상 돈 싫어할 놈 있나 말이다. 그래도 우리는 사람 먼저 있고 돈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 돈을 좀 우습게 볼 줄 알아야 한다. 물론 돈 없으면 살기 힘든 세상이니깐 정당하게 돈을 벌어야 할 뿐만 아니라 챙겨야 한다. 그렇다하여 돈 욕심을 내는 것은 꼴불견이다. 위의 행태들은 바로 돈 욕심을 너무 속되게 노골적으로 격에 안 맞게 드러낸데 문제점이 있다.</p><p class="ql-block">돈에 있어서 우리는 양반정신, 귀족정신을 좀 갖출 필요가 있다. 옛날 우리의 진정한 양반들은 돈과 거리가 멀었다. 청빈함을 생활의 지조로 삼았다. 아예 돈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정신&nbsp; 적인 우아함을 많이 추구했다. 나는 그래도 한국에 아직 이런 양반정신이 좀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중국 사람들은 돈을 직설적으로 말하고 직접 만지기 좋아하는 것 같은데 한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다음 디테일을 보자. 돈, 돈, 돈... 한국 사람들은 치사한 감이 들어 직접 거론하기를 좀 난감해하고 월급봉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경조사나 남에게 큰 돈을 줄 때도 봉투에 넣어 건네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지금도 너도나도 이전에 양반이었다고 하는 데는 적어도 이런 정신적인 우아함을 많이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돈을 둘러싼 유렵의 귀족정신이란 것도 그렇다. 귀족들은 돈에 그리 연연하지 않고 우습게 보아오기도 했다. 정신적인 우아함 내지 도고함을 추구했다. 이에 반해 귀족들을 치고 올라오는 초기 자산계급들은 돈이라 하면 눈에 벌개서 설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에 19세기 비판적 사실주의대가 발자크는 멸망해가는 귀족에 대해 지대한 동정을 보냈고 욱일승천하는 돈의 구린내가 나는 천민자본주의에 대해 질타했던 것이다.</p><p class="ql-block">그래 우리는 양반정신과 귀족정신에서 분명 본받을 것이 있다. 적어도 이 욕망시대 돈에서 초탈하는 우아한 모습을 배우야 한다. 양반과 귀족은 돈이 많아서 그럴 수 있다고? 물론 돈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우아한 모습은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 하나의 마인드고 삶의 자세다.</p><p class="ql-block">연길시를 전국문명도시로 건설하고 우리 매개 시민이 문명시민으로 되는 데는 바로 이런 우아한 모습이 필요하다. 우리 좀 우아하게 삽시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2020.8.23</p><p class="ql-block">/동북아신문</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身因性과心因性</p><p class="ql-block">우상렬 연변대학 교수</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우리 인간은 잘난체 하지만 이래저래 참 살기가 힘든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절대적 빈곤에 시달렸다. 나는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내 어릴적 가난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기억을. 육형제, 걸신에 걸린듯한 우리 형제들을 어머니, 아버지는 먹여주기에 대단히 힘들어하신 것 같았다. 항상 두 콧구멍으로 시누런 콧물줄기를 들이마시기에 바쁜 우리. 들에서 일하고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어머니는 우리의 콧물 닦아주기에 바쁘시다. 이것이 우리 어머니 일과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 어머니 치맛자락은 항상 우리의 콧물로 얼룩져있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콧물은 시도 때도 없이 더 열심히 흘러내린다. 그러면 우리는 집안에 죽 들어앉아 경쟁이라도 하듯이 후르륵 쩍-쩍. 여하튼 그때 그 시절 콧물이 어찌 그리도 많은지.</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후에 안 일이지만 못 먹어서 그렇단다. 코흘리기도 하나의 병이란다. 몸에 영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때 그렇단다. 그런 거 같다. 그래 요새 아이들 시누런 콧물 훌쩍이는 거 보았더냐. 그렇다. 절대적 빈곤시대 절대적 영양부족으로 인간은 많은 병이 생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무슨 영양부족으로 간염에 결렸소, 폐렴이 왔소, 시력장애요 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래 당시 누가 간염에 걸렸소하면 잘 먹게 되었군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간염은 잘 먹으면 낫는 줄로 알았다. 그래 간염을 부귀병이라고까지 했다. 이른바身因性병이 난무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인간은 워낙 정교하고 맘모스 같은 존재라 많은 것을 먹으며 이런저런 많은 영양분을 흡취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육체적 생명 유기체가 잘 돌아간다. 그런데 절대적 빈곤의 시대 이것이 어려웠다. 입고 먹고 자는 문제, 좀 세련된 말로 하면 의, 식, 주문제가 우리를 괴롭혀 왔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배 부르고 등 따뜻하기를 바랐던가. 혁명의 수령들도 그 무슨 이밥에 쇠고기국에 기와집이 어쩌고 저쩌고 하지 않았던가.</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우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이 외우던小康사회건설이라는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의, 식, 주의溫飽문제를 해결하는데 있다. 이런 문제의 해결은 간단한듯하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생산력만 발전하면 되는 듯하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과학기술과 생산력의 발달과 발전에 힘 입어 의, 식, 주의 절대적 빈곤문제를 많이 해결하기도 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그래서身因性병도 많이 근절시켰다. 간염과 같은 부귀병이 많이 사라졌지 않은가. 그래 요새 간염이라는 것이 못 먹어서 생겼다는 소리 들어보았는가. 술 많이 처먹어 그렇지. 이래저래 우리는 그만하면 잘 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또 발생. 우리가 배가 불러 태평세월이다고 쾌지나 칭칭 나네,하기도 전에 말이다. 새로운身因性병이 우리를 괴롭힌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배가 부르면 만사대길인줄 알았는데 바로 배가 불러 생기는 병 말이다. 인간은 배가 불러 죽을 수 있다. 배불러 죽겠다는 말이 허망 나온 말이 아니다. 우리 조선족 작가 박선석이 쓴 장편소설 “재해”를 좀 보라. 그 속에 어떤 인물이 그 어려웠던 세월 어쩌다 먹자판이 터져 너무 많이 먹어 정말 창자가 터지고 배가 아파 죽는 해프닝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공것이 사람 죽인다는 말도 틀린 것 같지 않다. 뷔폐, 촌놈이 어쩌다 온통 먹을천지 뷔폐에 갔다. 돈은 좀 내기는 냈으나 거저 공거로 먹는 것 같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그래 열심히 먹는다. 정말 먹거리산 정복하기다. 그래 눈이 뒤번져지도록 먹고나니깐 문제다. 배가 아프다. 배가 터지도록 아프다. 소화불량. 그래 다시 열심히 소화제먹기. 그래도 배는 잘 꺼지지 않는다. 그래 온 밤을 끙끙 거리며 엎치락뒤치락하기. 정말 요새는 좀 살만하기 되어 너무 많이 먹어 문제다. 새로운身因性병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 똥배가 나오고 체형이 기울어지는 것은 약과. 비만으로 인한 심장병, 고혈압, 고혈지... 말 그대로 비만은 만병의 근원.過猶不及이란 말이 이때도 통하는 줄로 안다. 그래 다이어트란 말이 나오고 비만과의 전쟁이 시작된 줄로 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사실 요새는身因性병보다도心因性병이 더 기승을 부리는 줄로 안다.身因性병은 신, 육체의 병이니 눈에 유표하게 잘 보인다. 그래서 어쩌면 치료하기도 좋다. 그런데心因性병은 심, 마음의 병이니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 현대인간들이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스트레스. 현대라는 개방된 사회, 그리고 물욕이 넘치는 사회,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욕망은 팽창되어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 산수를 낀 전원 가든식 아름다운 별장, 그리고 길거리를 질주하는 벤츠, 오디, 보마... 그리고 밤에 도처에 번쩍이는 네온사인... 우리의 잠재된 원초적 욕망까지도 자극한다. 여기에人不爲己,天誅地滅가 작동하면서 우리는 뛸 데 없는房奴,車奴가 되고 네온사인을 좇아 다니기에 바쁘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그런데 이런 욕망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쌓이는 것이 스트레스. 우리 현대인간들이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나는 것이 모든 것이 귀찮고 거저 그렇고 그렇다는 식의 인상쓰기. 여기에 먹고 살만 한데도官大一級壓死人에 학벌을 비기고 니가 돈 많냐, 내가 돈 많냐를 비기고 니 집이 크냐, 내 집이 크냐를 비기고 니 차가 좋냐, 내 차가 좋냐를 비기고 또 무슨 무슨을 비기는 온통攀比로 가득 찬 현대라는 세상에서 우리는 영원히 상대적 빈곤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이 산에서 저 산보면 저 산이 높고... 우리는 영원히 헐떡이며 살수밖에. 가련한 현대의 우리의 자화상.</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그래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心因性병에 노출되어 있다. 노이르제, 신경쇠약, 정신병... 현대가 앓고 있는 마음의 병들. 그래서 현대 심리학에서 정신분석학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병원에도 무슨 심리자문실이요, 뇌신경과요하는 새로운 치료분야가 생겨났다. 실로心因性, 마음이 문제다. 자연적으로 불교의一切唯心造이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현대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급선무. 그래서 우리는 도교의適可而止,知足者常樂의 경지도 떠올려본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사실 인간의 몸과 마음,身因性과心因性은 따로따로 놀아나는 것이 아니고息息相通. 서로 긴밀하게 통한다는 말이 되겠다. 그것은 어쩌면唯物과唯心의 논리와도 통한다. 몸이 아픈身因性때문에 마음이 아파나고 마음이 아픈心因性때문에 몸이 아파나지 않던가. 이것이 우리 인간의 얽히고 설힌 몸과 마음,身因性과心因性의 유기적 섭리. 그럴진대 우리는 몸과 마음,身因性과心因性을 같이 다스려야 한다.身因性의唯物과心因性의唯心그 어느 한 쪽에 치우쳐 극단으로 달려서는 안 된다.唯物에만 치우치면 기계적이 되고唯心에만 치우치면 고무풍선이 되고 마는 법.</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요새 우리는 조화로운 사회건설에 주력하고 있다. 조화로운 사회는 뭐니뭐니 해도 일단은 내 일신의 몸과 마음,身因性과心因性의 조화를 가져와야 하느니. 내 몸이 편안할 때 다른 사람도 생각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법.</p><p class="ql-block"> </p> <p class="ql-block">경계 허물기</p><p class="ql-block">우상렬 연변대학 교수</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경계는 일종 질서. 그렇다하여 경계를 맹신하거나 그것에 매이면 그 삶은 답답해나고 가련해보인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1980년 구소련 모스크바에서 올림픽 개최, 그런데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진영 불참. 1984년 미국 로스안젤스에서 올림픽 개최, 그런데 구소련을 위시한 절대다수의 사회주의진영 불참. 이른바 동서랭전시기 경계는 이렇게 분명하다. 정치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것 같은 스포츠에서조차 그 경계는 이렇게 침투되였다. 그런데 1988년 서울올림픽, “손에 손 잡고 벽을 허물고” 용하게 동서화합을 이끌어냈다. 동서의 경계를 허물고 랭전을 종식했다. 어쩌면 코리아의 다이내믹한 력동성이 한몫 했는지도 모르겠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리고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는 곧바로 본격적인 정치의 민주화와 경제의 글로벌화로 나아갔다. 이른바 각국의 정치, 경제가 함께 가는듯 했다.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일종 해체주의를 표방하는 철학사조가 전세계를 휩쓸면서 많은 경계들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소통의 길이 트였다. 그래서 현재 우리의 숨통도 많이 트이고 삶도 훨씬 좋아진것은 아닐가.</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나는 1980년대 초반 대학교에 붙어 열심히 연변으로 달려 왔다. 당시 연변은 분명 촌구석이지만 나에게 매력 만점. 연변에 오면 다른 나라, 다른 세상을 마음대로 볼수 있을것 같았기때문. 그런데 나는 연변에 와서 정말 답답해났고 서글퍼났다. 두만강이라는 국경이 나를 쩍 막아나섰다. 오히려 더 답답해났다. 나는 그때 인간을 저주했다. 지구는 너나 없이 둥글둥글 어울려 살라고 둥글둥굴하게 만들어진것 같은데 인간은 왜 이렇게 옹졸하게 니것 내것 따지며 “땅 긋어 자기 울안 만드는”거지? 내가 대학교 4년 기간에 머리를 갸웃하고 가장 심각하게 생각한 문제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였다. 그러다가 어느 하루아침에 마음만 먹으면 국경도 마음대로 넘나들수 있다는 그 말에 나는 그만 환심장을 했다. 그래서 결국 옹졸하고 알량한 내 마음도 풀렸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런데 이런 거창한 국제적인 문제, 자잘한 내 문제는 좀 그러니까 코앞에 빤히 보이는 우리 연길을 좀 보도록 하자. 연길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 그러니 분명 중국땅. 그래서 우리도 “담장쌓기”문화가 자연적으로 몸에 배인것일가, 조그마한 연길시 도처에 담장이 세워졌었다. 나와 너의 경계를 분명히 가르는 담장, 참 답답할시구!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담장허물기운동”이 시작되였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일이였지만 그러나 이 일은 정말 잘 보아줄만 일이였다. 담장을 허무니 우리 모두들의 거리가 가까와졌고 연길시내는 그만큼 넓어졌고 밝아보인다. 실은 우리의 마음이 그만큼 넓어지고 밝아졌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경계 허물기, 현재 전 세계적으로 분명 보이거나 또는 보이지 않는 많은 경계들이 허물어지고있다. 그래서 미국의 어느 저명한 문화학자는 현재 “세계는 평평한것이다”고 했던가.</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우리 문학에서도 경계는 허물어지고있다. 쟝르 하나만 놓고봐도 그렇다. 무슨 시요, 소설이요, 산문(주로 수필)이요 하지만 실제 창작을 보면 이들 사이 막 넘나드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시―서정”, “소설―서사”하지만 서정과 서사는 워낙 쌍둥이자매. 그런만큼 서로 의지해 자기를 나타내는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 그럼 다시 “소설―픽션”, “산문―논픽션”을 보도록 하자. “픽션―허구”, 꾸미기란다. 그렇다하여 “천방야담(天方夜谈)”같은 기상천외의 이야기만 늘여놓아보라. 그것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은게 리해가 차단되며 허황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니 이 허황함을 갈무리할 진실감을 주는 논픽션을 곁들여야 한다. 이것을 본질의 진실이다 해도 좋고 세부적진실이다 해도 좋다. 소설은 바로 픽션과 논픽션의 “새끼꼬기”―허허실실인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문학쟝르의 경계 허물기―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오면 올수록 그것은 도를 더 높여간다. 모더니즘소설, 그것은 픽션적인 슈제트조차도 없다. 애초에 심리, 그것도 무의식을 짓궂게 물고 늘어진다. 그래서 모더니즘소설은 모두 모아 심리소설이라 해도 무방하다. 무슨 표현주의니, “블랙유머”니, 마환(魔幻)사실주의니 하는것도 그렇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거기에 한술 더 뜬다. 비탈린 패러디로 마음껏 해학, 풍자의 꽃을 피우고 퓨전적인 기기괴괴―크로테스크한 미를 창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상호텍스트성”으로 여러 쟝르의 글들도 마음대로 가져온다. 한마디로 여기서는 어떤 특정적인 쟝르개념이 없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지난해 《연변문학》(2009. 4)에 발표된 한영남의 “웬만하면 발을 사랑하시지”라는 “단편소설”을 좀 보도록 하자. 머리와 발이 뒤바뀐 현대―가치가 전도되고 광고가 란발하는 세상에서 진실과 가상은 뒤죽박죽이 된다. 그래서 작자는 나름대로 소시민적이게 별 볼일 없이 발이나마 가지고 이죽거려본다. 그러니 이 소설은 현대인의 뒤틀린 심리를 보여준 전형적인 모더니즘 심리소설이고 또 광고를 패러디하고 모나리자를 끌어들이는 “상호텍스트성”도 보이고 자조적인 내포화된 자기반영성도 얼마간 보이고있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특색도 다분히 나타내고있다 하겠다. 현재를 사는, 톡톡 튀는 젊은 세대들의 새로운 방식―또 대담한 경계 허물기라면 경계 허물기라 하겠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니 세상보기, 세상일하기, 문단에서 지내기, 문학을 하기가 모두 그런것이 아닐가. 기본에 충실하고 질서를 지키는것이 존재의 사실이라면 경계를 허물고 넓게 시야를 가지는것은 또 발전의 도리가 아닐가. 연길시에서 담장을 허물어 좋은 일이 되였는데 우리도 담장을 허물면 어떨가. 조금은 아쉽더라도, 조금은 거칠더라도, 조금은 미숙하더라도 담장을 허물고 또 새로운 세계 대하는것이 어떨가, 좋은 마음으로 좋은 세상을 바라면서 권장하는 내용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2010.11.24</p> <p class="ql-block">회귀본능과 연변</p><p class="ql-block">우상렬 연변대학교 교수</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인간에게는 회귀본능이란 게 있다. 落葉歸根이란거, 여우도 죽을 때면 자기가 나서 자란 곳을 향해 죽는 다는 그런 회귀본능. 연변이 우리 조선족에게 어떤 존재냐? 바로 우리의 이 회귀본능에 맞닿아 있는 영원한 정신적인 고향.</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저 멀리 아득한 역사의 지평선에 ‘아, 고구려-’로 가슴 아련히 맺혀오는 곳, 여기에 지천에 널려 있는 발해유적은 우리의 무의식 심처의 역사적 뿌리를 확인시켜 준다. 그러다가 지, 지난세기부터 흰 옷 입은 무리들이 쪽박 하나 차고 꾸역꾸역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난에 쪼들려 ‘월강죄’를 무릅쓴 죽음의 월강이었고 왜놈들 성화에 못 견딘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끈질기게 생명의 씨앗을 박아온 개척과 투쟁의 역사이기도 했다. 하늘땅과 싸우고 계급의 적과 싸우고 민족의 적과 싸우고... 벼농사 성공시키고 사과배 열매 맺게 하고 소비에트 정권수립, 항일열사 90%이상... 광복,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신생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토지개혁 및 분배는 우리 삶의 뿌리의 비옥한 토양이었다. 그래서 3년 해방전쟁은 일단 우리 삶의 터전의 보위전이었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달갑게 피를 흘리고 희생도 했다. 정말 투쟁과 혁명을 내놓고 우리 연변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중국의 어느 저명한 시인은 읊었던가, ‘산은 산마다 진달래/마을은 마을마다 열사비’! 연변은 우리의 땀과 피눈물이 슴배인 곳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새 중국 및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탄생은 그야말로 우리 조선족의 봉황열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세웠네...’ 연변은 명실공히 우리의 삶의 고향이 되었다. 연변, 조선사람 세상. 우리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중심. 조선노래 울려 퍼지고 조선춤 너울너울, 그리고 우리 말, 우리 글이 그대로 통하는 세상. 조선음식, 조선옷, 조선집, 조선어 간판, 조선족 학교, 조선족 신문방송... 아- 연변은 실로 중국 조선족의 상징코드, 아니 성스러운 메카! ‘안쪽’의 조선족들, ‘연변’하면 어쩐지 그리운 곳으로 아련히 젖어온다. ‘연변깍쟁이’, ‘연변치’, ‘연변촌놈’ 하면서도 못 잊어 외워보는 곳이 연변이다. 연변은 ‘안쪽’ 사람들의 ‘조선세상’ 콤플렉스의 대리 발산체.</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연변은 ‘歌舞之鄕’, ‘足球之鄕’, 우리 조선족의 장끼를 한껏 뽐내는 곳. 연변은 우리 조선족 인재들이 참 많이 나기도 했다. 장군 조남기, 과학가 강청산, 문학가 김학철... 기라성 같은 존재들-우리 조선족의 진정한 스타들이다. 연변은 이런 스타들로 인하여 빛난다. 우리 조선족의 회귀본능을 자극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개혁개방, 시장화, 도시화, 우리 연변은 일대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조선족인구의 마이나스 성장, 조선족학교의 구조조정, 농촌의 황폐화, 연변이 무너지는 듯하다. 그래서 많은 조선족 지성인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 우려의 목소리, 우리의 회귀본능의 다른 한 메아리에 다름 아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리고 현재 연변은 동공상태를 방불케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돈벌이를 위해 ‘내지’로, 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연변을 잊지 못한다. 한때 연변 敖東팀의 활약에 얼마나 흥분하고 감격해했던가. 나그네는 연변의 ‘뚜-푸-’ 소리를 되 뇌이며 소주 한 잔 기울이는 속에, 아낙은 자기도 모르게 연변노래를 흥얼거리는 속에 회귀본능을 달랠 것이다. 그들은 워낙 연변 胎志임에랴!</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연변은 우리의 회귀본능이 가닿는 곳. 인간의 회귀본능을 달리 자궁회귀본능이라 하기도 했으랴! 연변은 바로 어머니 자궁과도 같이 포근한 곳. 연변은 항상 정답게 안겨오는 우리의 영원한 정신적 고향. 짐 지고 힘든 족속들아, 모두 오너라, 너희들의 흐르는 눈물 씻어주고 편안히 쉬게 하여주마.</p><p class="ql-block"> 2008.10.3 사천 성도에서</p> <p class="ql-block">인물값 / 우상렬</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우리 조선사람은 돈값보다 인물값을 잘 따지는 것 같다. 쩍 하면 인물값을 하라고 하지 않는가? 남자로 태어났다. 그럼 인물값이 무엇이냐? 부엌에 안 들어가기. 옛날 우리 할머니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사내자식 부엌에 들어가면 거시기 떨어진다고. 그리고 우리는 사농공상을 철저히 지켰다. 그러니 장사는 지극히 천한 일. 장사를 하는 것은 인물값이 뚝 떨어지는 차마 못할 일. 그런데 漢族들은 인물값보다 돈값을 더 따지는 것 같다. 그들은 거시기 떨어진다는 얘기 없을 뿐만 아니라 배가 고프면 인물값이고 무어고 다 팽개치고 부엌에 내려가는 것은 약과고 장사든 무엇이든 다 잘 하는 것 같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중국 漢나라 때 罷出百家, 獨尊儒術, 유교의 기강이 확립되던 시기다. 그러니 유교에서 말하는 士農工商이요 하는 것도 이때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다. 그런데 바로 이때 유명한 문장가 司馬相如와 새파란 과부 卓文君이 서로 눈이 맞아 私奔을 한다. 그들이 私奔을 해서 온 곳이 지금의 成都다. 그들이 成都에 와서 한 일이 무엇인가 하니 卓文君의 패물을 판 돈으로 술가게를 차렸다. 卓文君은 앞에서 해쭉해쭉 웃으며 손님을 반겨 맞고 주문을 받는 등 시세말로 하면 홀 서비스를 하고 司馬相如는 뒤에서 술이나 퍼주고 그릇이나 씻는 등 뒷바라지를 했다. 이들의 장사는 불티나게 잘 되었다. 미남에 재사 司馬相如와 미인에 과부 卓文君이 하는 술장사라 잘 될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하리라. 그것은 일종 私奔의 낭만적인 사랑이 깃들어진 술타령과 같은 멋이 있었으리라.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두고두고 지금까지도 司馬相如와 卓文君의 私奔 및 그 술장사를 외우고 있다. 成都 시가지 중심에는 바로 司馬相如와 卓文君의 낭만적인 사랑조작상이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사실 중국 사람들은 士農工商이고 무어고 떠나 분명 장사하는 전통이 있었던 것 같다. 漢나라 賈誼의 『過秦論』과 司馬遷의『史記』의 ‘貨殖列傳’에도 장사치에 관한 얘기가 나오지 않던가. 그런데 그때 이들의 술장사도 분명 인물값에 못 가는 쪽 팔리는 일임에 틀림없다. 인물값을 따지는 卓文君의 아버지가 술장사하는 그들을 차마 보아줄 수 없어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하지 않는가?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면 우리 문학사에 어느 문인 장사했다는 소리 들어보았는가? 없다. 아니, 있기는 있다. 그런데 문인작가는 아니고 문학작품 속의 가상의 주인공이 있다. 바로 허생. 실학이 싹튼 근대여명기에 선각자 박지원의 소설「허생전」에 나오는 주인공. 허생은 처음 인물값을 하느라고 10년 공부를 작심한다. 그런데 마누라의 바가지 긁는 소리가 진절머리가 나서 인물값을 팽개치고 장사---꼴값을 하러 나섰다. 독점 매과점으로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다. 그런데 인물값이 떨어지는 듯 했다. 그래서 가난한 거지들에게 무인도에 살길을 마련해주고 황금흑사심이라 남아도는 돈은 모두 바다에 처넣고 자기는 처음 출발했던 원점으로 돌아온다. 결국 인물값을 따졌던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나는 연길이며 우리 조선족이 많이 사는 곳으로 돌아다니다 보면 인물값을 잘 하는 그런 인물들을 참 많이 만나게 된다. 할 일 없으면 사구려 장사나 좀 해보지, 노가다나 뛰어보지… 내가 넌지시 이런 식으로 말을 던져보면 에익, 내가 그런 일을 어떻게 한다고, 그런 일은 漢族들이나 남방쿠리들이나 할 일이지, 나는 죽어도 그런 일을 못한다니까하고 쯔쯔 혀를 다신다. 그래서 백수건달들이 참 많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얼굴 화사하게 화장하고 부티 나는 남자의 애인이나 되어 등이나 쳐 먹자는 새기들을 보고 나는 또 싱겁게 건의한다. 할 일 없으면 양꼬치나 구워 팔든가, 아니면 구두닦는 노릇이나 하지 하면 흥,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는 얘기예요, 놀려도 분수가 있지, 그래 내가 그런 일 할 사람 같아 보이나요 하며 앵돌아진다. 그래서 백수기생이 많은 것 같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나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잘 난 인물값을 하겠다는 데는 말이다. 우리 다들 그래 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漢族들 그리 인물값 하는 거 같지 않다. 나는 현재 거물급의 도시 重慶에 와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를 나서 얼마 안 가면 상설 장마당이 있다. 나는 심심하면 여기에 간다. 뭐 물건 사러 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 구경하러 간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여기는 참 별라별 가관의 장사치들이 다 있다. 너무 괴짜들로 보여 내가 하나하나 인물값을 매겨 주었다. 과학가--안경 알이고 테고 모든 것이 두툼한 안경을 건 훤칠한 중년의 사나이. 인물값을 보면 뛸 데 없는 위성이나 원자탄 쯤 연구해낸 연륜이 지긋한 과학가타입. 어떻게 장사하게 되었는가고 묻자 지난 세기 77년 대학문이 열리자 출세 좀 해 볼가 해서 죽자 공부는 했는데 자꾸만 名落孫三이 되어 자기는 대학 갈 운이 아닌 줄 아고 그때부터 한 노릇이 이 장사라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운명의 신에게 정배를 당한 ‘우파’ 과학가로 보였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화이트칼라--역시 안경을 걸었다. 안경 알이고 테고 모든 것이 얄팍한 신식 안경을 걸었다. 생긴 것도 갸날플 정도로 얄팍하게 생겼다. 인물값을 보면 현대의 전형적인 화이트칼라 스타일. 어째서 장사를 하게 되었는가고 물어보니 역시 몇 번 대학입학시험을 쳤는데 허약한 몸이 자꾸 딸려 실패하고 말았다 한다. 그래서 이 일 저 일 찾던 중 그래도 장사가 자기 적성과 건강 상태에 가장 맞더라는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현대 西施--西施 어떻게 잘 생겼는지 잘 모르지만 갸름하게 생긴 것이 여하튼 西施 같았다. 인물값은 두말할 것 없이 경국지색. 모두들 그렇게 말하니 더 같았다. 이 西施는 魯迅의「故鄕」의 두부서시 양얼댁처럼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아니고 양꼬치를 구워 판다. 해쭉해쭉 웃으며 굽는 양꼬치는 그녀의 웃음이 어려 더 맛있어 보였다. 사람들 맛있게 잘도 사 먹었다. 그녀의 장사사연을 들어보았더니 자기네 집안 내력은 모두 장사할 팔자라서 그런단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백설공주--분을 뾰얗게 뒤집어 쓴 듯 천연의 백설공주. 인물값--피부 좋고 부드러운 전형적인 아담사이즈의 남방미인. 그래서 내가 지어준 백설공주칭호. 그런데 나를 지극히 ‘실망’시키는 것은 이 백설공주가 구두닦이를 하고 있다. 그것도 1원짜리 구두닦이 말이다. 우리 연길처럼 2원이나 좀 더 비싼 것이 아니고. 그래 그 잘 난 인물값에 왜 이 별 볼일 없는 구두닦이를 하는가고 물어보았더니 구두닦이 수입이 짭짤하게 괜찮은데 왜 우습게 보는가고 한다. 이외에… 여하튼 여기에는 인물값을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러나 그들은 참 자기 주제에 맞게 인물값을 하며 실속 있게 산다고 생각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우리도 이젠 인물값이요 하는 꼴값 좀 적게 떨고 실속 있게 살아보자.</p><p class="ql-block">나는 한국이 참 좋다. 한국은 우리 조선족의 용광로다. 우리 조선족은 한국에 가서 인물값을 그리 따지지 않는 것 같다. 아니 따질려 해도 따질 수 있는 계제가 못 된다. 인물값을 따질 ‘좋은’ 자리는 우리보다 똑똑한 한국 사람이 먼저 다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가서는 노가다고 식당써빙이고 주방일이고 닥치는 대로 잘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새로운 인물값을 매겨 나가는 것 같다. 사실 못해낼 것도 없는 것 같은 일에서 우리의 인물값은 매겨진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2007-11-21</p> <p class="ql-block">네 얼굴에 침을 벹으마! / 우상렬</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대학교 신입생입학시즌. 신입생이 몰려온다. 商機를 잡은 재학생들 신입생의 돈주머니를 노려 난전을 벌이고 사구려를 외쳐대기에 바쁘다. 서로 터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시끌벅적 아귀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대학교 졸업시즌. 졸업생들이 자기가 쓰던 물건을 팔기에 바쁘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열린다는 벼룩시장-대학생들이 물건을 내다 파느라고 제정신이 아니다. 어느새 이것이 우리 대학교의 한 풍경이 되고 말았다. 학교당국에서는 자기네 학생들이 商機를 잡을 줄 아는 똑똑한 학생들이요, 배운 지식을 실천에 옮길 줄 아는 지행합일자요, 그리고 근검절약하고 자아 독립할 줄 아는 등등 칭찬이 자자하다. 그런데 나는 자꾸 그만 허구픈 웃음이 나오고 만다. 그러다가 요새는 네 얼굴에 침을 벹으마!로 격해지고 말았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나는 대학생들이 돈에 미쳐나는 것을 못 보아 주겠다. 특히 선배라는 작자들이 멋모르는 신입생이나 아껴줘야 할 후배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것은 어쩐지 꼴볼견. 내가 대학교에 입학할 때다. 선배들이 따뜻이 마중해주고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주기도 했다. 나는 선배들이 챙겨준 그 졸업생들이 남기고 간 물건들을 쓸 때마다 따뜻한 인간의 정에 항상 고마움을 느끼곤 했다. 나의 한 졸업생 술꾼 선배는 나에게 자기가 보던 책을 싹 넘겨주며 하는 말이 ‘야, 4년간 공부해보니 나는 공부할 놈이 아니야. 그러니 나는 돈이나 벌으련다. 이 책은 다 니가 가져. 너는 공부하면 될 것 같애.’나는 술꾼 선배의 이 한마디 말에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 선배가 넘겨준 사전들을 뒤지노라면 감개무량해난다. 몇 년 전에 우리 동북의 어느 명문대학교에 대학입시시험 채점을 하러 갔다가 졸업생들이 캠퍼스에서 자기가 보던 책을 다문 몇 푼이라도 받고 팔겠노라고 하루 점도록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 멋진 선배가 생각키웠다. 선배는 현재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대범한 선배는 꼭 부자가 되었을 거야! 그립다. 다음 순간, 서글픈 현실에 쓴웃음이 나왔다. 현재 내가 와 있는 이 남방의 명문대학교의 졸업생들은 우리 동북 명문의 졸업생들을 뺨칠 정도다. 자기가 쓰던 이부자리까지 내다 팔기에 바쁘니 말이다. 기숙사구역에서 이부자리를 사러 온 ‘무지랭이’ 촌아준마들하고 가격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은 참 가관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돈을 모르고 순수하던 우리 대학생들이 언제 이렇게 돈에 아득바득이 되었지? 현재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에나 돈을 아득바득 따지는 시장경제세상이니... 하고 모든 것을 여기에 밀어 붙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제3자에 원인을 돌리기 전에 진리와 착함과 아름다움을 가르쳐야 할 우리 대학이 여기서 많이 빗나가 있음을 자성해야 한다. 적어도 우리는 청빈하지만 대바르고 꼿꼿한 선비정신을 잃었다. 적어도 우리 대학교는 학비 안 받는데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학생들하고 돈을 따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 대학 교수들 강의료 안 받고 강의할 놈 몇이나 되지? 시장경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언젠가 모두들 알아서 돈 버는 세상이랍시고 우리 대학 교수라는 양반들이 낮에는 강의를 하고 나머지 시간에 여행사 가이드노릇도 하고 저녁에는 양꼬치를 구워서 팔기도 했지. 돈에 미쳐나면 이런 해프닝도 얼마든지 벌린다. 이런 우리의 철따구니 없는 자화상이 上行下效로 연쇄반응을 일으킨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나는 한국의 선배문화가 참 멋져 보인다. 한국은 자본주의, 우리보다는 한참 자본주의. 그런데 한국은 인정이 남아있다. 그래 한국에서 대학 캠퍼스에서 선배들이 신입생이나 후배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걸 보았느냐? 그래 졸업생들이 자기가 쓰던 물건을 다문 몇 푼이라도 받겠다고 하루 점도록 서 있는 꼬락서니를 보았느냐? 나는 보지 못했다. 아니, 나는 보았다. 그들도 장사하는 것을. 그러나 우리처럼 쫀쫀하지 않고 영악스럽지 않은 자선바자회말이다! 그리고 나는 다만 선배들의 호기어린 깡다구와 지나친 관심에 신입생이나 후배들이 좀은 피곤해하는 것은 보았다. 기분 나쁘지 않은 그런 피곤함.</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나는 우리 대학생들이 돈하고 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사회에 나가 돈 버는데 이골이 트고 악돌이 되더라도. 우리 대학도 有敎無類, 학생들하고 돈 노름을 좀 적게 해야 한다. 대학생은 어디까지나 眞善美의 화신이고 대학교는 어디까지나 眞善美의 신성한 전당이거늘. 그러나 오늘날 眞善美가 어린 이런 충언은 사상누각의 허황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서글픈 현실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러나 나는 외치련다. 적어도 내가 몸담고 있는 연변대학,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학생들만이라도 그러지 말기를!</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2007.11.1</p><p class="ql-block"> </p> <p class="ql-block">선녀와 나무꾼 / 우상렬</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우리에게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가 있다. 하늘의 선녀, 땅 위의 나무꾼, ‘하늘과 땅 사이에 꽃비가 내리던 날…’, 그들은 사랑을 한다. 이 사랑이야말로 정말 낭만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구구전승 쾌자되는 듯 하다. 사실 이것은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중국의 ‘牛郎职女’, 일본의 ‘날개 옷을 잃어버린 千叶姬’식으로 전 세계적으로 분포된 이야기이다. 신델렐라는 못 생기고 별 볼일 없는 여자가 시집가는 이야기라면 나무꾼의 이야기는 못 생기고 별 볼일 없는 남자가 장가가는 이야기이다. 신델렐라 이야기가 시집 못 간 처녀들의 백일몽이라면 나무꾼의 이야기는 장가 못 간 총각들의 백일몽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우리 말에는 헌 신작짝도 짝이 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섭리를 나타내고 있다. 性比의 바란스를 나타낸 진리성을 띠고 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처녀와 총각을 만들 때 모두 제 짝이 있도록 짝짝 맞게 만들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는 처녀총각의 사랑을 아예 자기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런데 진리는 진리고 현실은 현실일 때가 많다. 진리와 현실이 겉돌 때가 많다는 말이 되겠다. 현실의 그 잘 난 남자들이 여자들을 너무 많이 꿰차기 때문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중국의 경우를 좀 보자. 3천궁녀를 거느리는 제왕들, 허용된 축첩제도에 다다익선으로 축첩하는 대신들과 귀족양반들, 그리고 부자들. 三妻六妾이라는 말도 이로서 생겨났다. 여기에 英雄好色, 英雄难过美人关이라 영웅까지 가세하니 나무꾼이나 牛郎 같은 최하층 일반서민들에게 차례질 처녀들은 애초에 모자란다. 이로부터 性比의 바란스가 깨어지는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사실 이것은 옛날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현실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아랍권의 많은 나라에서는 아직도 한 남자가 여자들을 많이 거느리는 것은 부와 권위의 상징으로 통한다. 그리고 우리 현실의 이른바 잘 나가는 남자들을 보라. 권력 있고 돈 많은 남자들 말이다. 그들 사이에 통하는 말---沾花惹草, 家花不如野花香. 그래서 너도나도 情妇. 이런 情妇는 그 권력과 돈의 비례에 따라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이것을 새로운 축첩제도라 해야 되나. 바로 이런 축첩에 운 좋게 겨우 장가갔던 ‘나무꾼’이나 ‘牛郎’들은 다시 외톨이로 되는 비극을 맛보야 한다. &lt;金瓶梅&gt;에서 무대랑이 서문경에게 색시 반금련을 빼앗기듯이 말이다. 아니, &lt;金瓶梅&gt; 얘기가 아니고 우리 현실에서의 조선족 총각들도 마찬가지다. 1년에 한국으로만 시집가는 처녀가 몇 백명은 약과고 천명이나 된다고 하니 조선족 ‘나무꾼’ 총각들 장가가겠나 말이다. 물은 낮은데로 흐르고 사람은 높은 데를 바라보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몇 년 전에 이런 小品 하나 보았다. 처녀기갈이 든 조선족 농촌의 총각들이 처녀마네킹을 색시인양 모셔놓는 해프닝을 희비극으로 보여준 내용이다. 이것이 단지质小品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 현실의 한 자화상이라 할 때 서글프났다. 사실 처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위장결혼이요, 뭐요 해서 또 우르르 나가니 많은 홀아비들이 또 양산되는 판이다. 이른바 잘 사는 나라에서 여자 싹쓸이 해가는 판이다. 이로부터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의 性比의 역삼각도가 형성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럼 색시가 없거나 잃은 ‘나무꾼’은 어쩌야 하나? 하늘에 올라가 찾아야 하나? 그것은 너무 아득한 길이고 실효성이 적다. 그래서 나무꾼이 수닭으로 변해 하늘을 보고 애꿎게 울기만 하거나 牛郎도 칠월칠석에만 职女를 한 번밖에 못 만나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는가? 그러니 원천적인 개변을 해야 한다. 바로 ‘나무꾼’이나 ‘牛郎’의 신세를 고쳐야 한다. 아직도 전근대적으로 산에 가서 땔나무나 해 팔고 소궁둥이나 두드려며 밭을 갈아서는 처녀가 아니라 식은 죽도 못 얻어 먹는다. 현재 중국의 새농촌건설붐이 일고 있다. 천재일우의 기회다. 우리의 ‘나무꾼’들도 여기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이제 새농촌건설이 실효를 거둘 때 선녀도 날아내려올 것이고 职女도 아늑한 조선족 구들 아래목에서 천을 짤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2007-11-20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p> <p class="ql-block">중경과 조선사람 / 우상렬</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나는 우리 조선사람이 씨앗 같은 기질이 있다고 생각된다. 바람에 이리저리 날려가다가도 여기다 싶으면 떡 물고 널어져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중경은 중국 서남지구에 위치한 오지. 이제야 서부대개발이니 뭐니 하니 정말 개혁개방의 늦 차를 타도 한참 늦게 탄 듯한 감이 든다. 그런 만큼 여기는 그만큼 기회의 땅인지도 모르겠다. 이에 항상 역동적이고 기회의 땅을 찾는 한국사람이 들어온다. 제조업을 비롯한 제1산업, 기간건설을 비롯한 제2산업, 식당, 사우나 같은 제3산업-서비스업이 중국정부의 서부대개발정책의 프러포즈 하에 동시다발적으로 들어온다. 2005년 5월 29일에 중경시인민정부와 한국의 중국주재대사관에서 주최한 2005년 ‘中國重慶․ 韓國友好周’가 중경에서 성대히 개막되었다. 한국대표단은 정부관원, 기업계와 연예계인사들로 도합 170명에 60여 업체가 참가했다. 중경시장 王鸿举가 개막식에서 축사를 했다. 6월 2일까지 ‘中國重慶․ 韓國友好周’ 기간에 투자간담회, 참관고찰 등 경제무역활동을 진행하였으며 동시에 한국영화주, 한국도편문화전람, 한국연예계스타방문공연 등 문화활동을 진행하였다. 2005년 현재 중경에 투자한 한국 업체는 농업, 공업, 기간건설, IT, 서비스업 다양한 영역에 걸쳐 현대자동차, 포스코, 효성 등 굴직굴직한 한국업체들을 비롯하여 44개 업체가 진출해 있고 투자계약 누계액은 5865만불에 달한다. 중경의 외래자본투자액의 10위권에 든다. 중경에는 전문 한국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중경한국공업단지’까지 갖추고 있다. 근년래 중경과 한국의 수출입 총액은 15%좌우의 증장속도를 보이고 있다. 한국과 중경은 제7대 무역파트너가 되었다. 또 얼마 전에는 中国商务部의 대폭적인 지지 하에 2007년 10월 25일에 韩国官民联合考察团을 상대로 ‘重庆投资环境说明会’를 진행했다. 그리고 덕수궁, 高麗食府 등 한식요리점이 신성한 입맛으로 3천2백만 중경사람들의 입으로 다가온다. 한국 연속드라마 『대장금』이 중경사람들에게 한국음식을 각인시켰다. 그들은 한국음식하면 ‘대장금’할 정도다. 그래서 호기심에 적어도 한번은 먹어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하요리 중경요리 최고라는 의식이 강한 중경사람들의 입맛을 길들이기는 정말 쉽지 않은 줄로 안다. 덕수궁 책임자의 말을 들으니 처음에는 중경사람들도 잘 굽어먹고 하니 한국불고기가 먹혀들어가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홍보하고 맛들이고 한 결과 이제는 제법 먹혀들어간다는 것이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옛청사 및 광복군연고지 내방, 그리고 현대적인 紅鼎을 비롯한 6개의 골프장레저 등 인연으로 중경에 관광레저차로 오는 한국 사람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아시아나’가 인천과 중경 사이를 날아예고 있다. 현재 중경에는 한국 사람이 적어만치 몇 백 명은 잘 된다. 중경한국인협회 및‘한국인교회’는 이들의 聯宜體 및 만나의 장소, 교류의 장소가 되고 있다.「중경저널」은 이들의 소식통이 되고 있다. 여기에 한국인과 ‘먹이사슬’의 운명공동체가 된 조선족이 또 모여든다. 이들은 민족동질성 및 중한이중 언어구사 덕택에 대개 한국인이 경영하는 업체에서 일한다. 식모에서 통역, 가이드, 관리인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역할은 다양하다. 조선족 수도 제법 되는 것 같다. 중경조선족교회까지 있으니 말이다. 중경에는 사천외국어대학, 서남민족대학, 중경대학 등 대학이 적지 않다. 조선족 학생들이 이런 대학에 많이 붙어온다. 중경에는 조선족 대학생만 해도 백여 명 정도가 된단다. 작년에 조선족 대학생 한명이 장강에 뛰어들어 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해내고 그 자신은 사품치는 강물에 실종된 감동적인 일이 있었다. 온 중경시내를 감동시켰다. 그래서 그해 중경시선전부의 주최 하에 시민들이 뽑은‘2006년 중경을 감동시킨 10대 인물(2006年感动重庆十大人物)’의 한명으로 뽑혔다. 중경시장이 그 어머니를 중경으로 모셔 위로했다고 한다. 중경사람들은 한국인이나 조선족에 대해 아직 호기심을 잃지 않고 있으며 아주 우호적이다. 이런 호기심이나 우호적임이 못난 한국인이나 조선족한테 상처받지 않고 계속 이어가기를 기원해본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중경사람들은 한국은 미인이 많이 나는 곳, 탤런트가 많은 곳으로 알고 있는듯하다. 그래서 화장품이나 미용광고는 쩍하면 한국 식이니 한국미인이니 하고 갖다 붙인다.‘한류’의 영향이라 해야 되겠나,여하튼 한국어를 배우는 젊은 애들이 많다. 사천외국어대학 한국어학과와 한국학연구중심이 중경의 한국어교육의 메카가 되고 있다. 사실 이 한국어과에는 대학입시를 통해 입학한 대학생 수는 입시규정 상의 제한으로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전 학교 제2외국어 선택과나 이른바 사회인을 대상으로 한 사회반에는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한국어붐이라 해야 하겠나, 여하튼 학생은 많고 강사가 모자라 나까지 동원되어 한국어를 강의한다. 고 새별 같은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차 바라보고 있는 학생들을 대할 때면 나는 절로 열심히가 된다. 그런데 왜서 한국어를 배우냐고 한번 물음을 던져보았더니 의외로 정말 간단명료한 해답들이다. 한국 노래가 좋아서, 한국 드라마가 좋아서, 한국 탤런트가 좋아서... 한마디로 한국이 좋아서인데 나는 그들의 순수함과 홀가분함에 감동을 받았다. 그들의 이 순수함과 홀가분함이 부러웠다. 일본어를 배워 일본에 가서 돈을 많이 벌겠다고 한동안 지랄발광을 하던 우리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아득바득 삶에 코 꿰어 다닌 각박함과 억지가 많았지 않은가. 세대차요, 격세지감이요 하는 것이 확실하게 몸에 와 닿았다. 사천외국어대학 한국어학과에서는 1년에 4월과 9월에 나누어 2번에 걸쳐 한국어토익시험을 조직한다. 현재 매년 수험생수가 늘어나고 있다. 한국어시험에 합격된 전제하에서 추첨에 의해 한국에 노무로 나가는 무연고자들의 비즈니스한국어시험도 이때 치르게 된다. 이때면 조선족들이 많이 모여든다. 이번 시험에 감독을 하면서 조선족들이 시험을 잘 쳐 흐뭇해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흐뭇해났다. 한국 바람에 한국붐이 계속 일기를 기원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사실 중경은 일찍 광복 전에 한국 사람과 인연이 닿은 곳이다. 항일전쟁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의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한 이듬해인 1938년에 중경이 중국의 陪都가 됨에 따라 장개석 국민정부를 따라 중경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게 된다. 여기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훈련하기도 한다. 이로부터 중경은 한국독립운동의 한 메카가 된다. 1942년 11월 10일에 한국임시정부수립 제24주년기념강연회가 개최되었는데 周恩來가 ‘한국독립문제’로 주제발언을 했다. 그리고 1943년 12월 21일에는 한국독립운동 라디오좌담회가 개최되었다. 1944년 9월 22일에는 한국임시정부승인문제로 좌담회가 개최되었다. 일제가 패망한 후 모택동은 장개석의 요청에 응해 중경에 와서 평화담판을 하게 된다. 이때 즉 1945년 9월 3일에 모택동은 자기가 묵고 있는 桂園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인원들을 접견한다. 1942년 10월 11일에는 중경의 중국방송국대강당에서‘韓中文化協會’가 성립된다. 회장에 임시정부 외교부장으로 있은 조소앙이 취임했다. 상무이사는 한국 측에 김규식, 중국 측에 孫中山의 아들인 孫科 등이 맡고 명예이사는 한국 측에 이승만, 이청천, 서재필 등, 중국 측에 周恩來, 馮玉祥, 郭沫落, 白崇禧, 張治中 등이 맡았다. 이 단체는 실로 한중 및 당시 중국의 國共인사들의 연합체였다. 1945년 10월 29일에는 협회창립 제3주년 기념식 및 한국임시정부 요인 귀국환송회를 개최한다.‘韓中文化協會’는 1946년 11일까지 중경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으로 들어간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중경은 역사적으로나 현재로나 이래저래 조선사람들과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이 인연이 계속 이어가고 보다 좋은 일이 많이 맺어졌으면 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2007. 10. 13</p> <p class="ql-block">선생콤플렉스 / 우상렬</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선생노릇하기 대단히 좋아 보이쟈? 거저 서서 말만 하면 되는 갑쟈? 야, 사실 그런 것도 아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마지 못해 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 개새끼는 똑똑하다. 선생은 가난하여 그 똥도 기름기가 없고 별로 먹을 것이 없는 것을 잘 안다. 그래 선생이 어디 한 자리 하는 사람처럼 배가 많이 나왔더냐? 남은 날아가는 돈도 잘 잡는다고 하던데 우리는 겨우 쥐꼬리만한 월급에 매여 산다. 그래서 오바하여 학생들 돈 뜯어먹기도 한다. 선비는 청빈해야 하거늘 하면서도 돈 없는 콤플렉스에 기가 죽는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臭老九, 구린내 나는 아홉째라네. 몽고족이 원나라를 세워 사람들을 10등분하여 다스렸는데 선비들을 마지막으로 두 번째 등급인 9등급에 매겼네. 전대의 송나라에서는 선비들이 그래도 대접을 잘 받았는데 정말 일락천장이네. 여기에 선비들을 키워내는 우리 선생들이 포함됨은 더 말할 것도 없네. 그래서 비참하게도 우리 선생 별명이 臭老九가 되고 말았네. 그런데 새 중국이 들어서 문화대혁명시기 臭老九가 死灰复燃해서 또 우리를 괴롭힐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 그래서 호요방이 올라와 교사절을 정해주니 우리는 감지덕지. 그래도 사회에 나가 办事 하나 하자 하면 우리 선생 말이 안 먹혀 들어간다. 출세 뭇 한 콤플렉스가 뼈저리게 스며든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닭 모가지 하나 비틀 맥도 없는 갸날픈 선비라고 하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선생은 깔끔해야 한다. 학생들 앞에 나서는 직업이니 의포단장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값이면 잘 생겨야 한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이전에 사범류 학교에는 지체장애자들을 받지 않았다. 지체장애자들의 선생진출을 원천봉쇄한 셈이다. 그래서 선생이 강의 들어가기 전에는 정장 차림에 면경을 보고 또 보며 깔끔하게 해서 들어가란다. 나처럼 데데하거나 못난 놈은 항상 어깨가 처진다. 깔끔콤플렉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선생은 근엄해야 한다. 선생의 그림자는 밟아서도 안 되는 거룩한 존재거늘 어찌 嬉皮笑脸할 수 있다더냐? 값이 떨어지게 스리! 선생의 기본 자세는 站如松이라 소나무처럼 꼿꼿하게 서야 하고 음성은 으험, 으험이 기본 톤이여라. 그리고 선생은 누구하고나 얘, 습니까, 습니다의 최대 정중성의 수양이 깃든 彬彬有礼를 나타내야 한다. 근엄한 선비콤플렉스. 嬉皮笑脸하는 나하고는 영 안 맞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선생은 꼿꼿해야 한다. 선생은 真,善,美를 가르치는 지성이다. 이 세상 다들 假,恶,丑로 놀아도 선생만은 出污泥不染.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는 존재-꼿꼿콤플렉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선생은 최고의 지성. 먼저 생겨나 소금 한 알이라도 더 먹었으니 말이다. 알 것은 다 안다. 특히 이 세상의 비리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래서 눈꼴 사나운 것이 많다. 그러나 敢怒不敢言, 뒤에서 불평불만만 많다. 그래서 지행합일이 잘 안 되는 명철보신파-명철보신콤플렉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선생은 무엇이나 다 아는 척 해야 한다. 적어도 학생들은 우리 선생이 무엇이나 다 아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 기대에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도. 공자가 知之而知之,不知而不知为知라 했지만 그렇게 해서는 선생 위신 쫄딱 녹아난다. 틀리게 가르치고도 옳다고 증명하고 모르면서 아는 척 해야 박학다식해 보인다. 그래야 학생들 존경 받는다. 아는척콤플렉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2007-06-1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