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남철심의 근작 시에 나타난 타자성</p><p>-현대문학 이론에 기초하여-</p><p><br></p><p>-이문철(중국 煙台大學人文學院 부교수)</p><p><br></p><p><br></p><p><br></p> <p>3. 소외된 타자에 대한 시선</p><p><br></p><p>남철심의 시에서 보이는 연대와 유대가 없는 소외된 타자, 그는 누구인가.</p><p><br></p><p>남철심의 대표작 태여난 곳이 타향이어서 , 이는 타자에 대한 비유 또는 상상을 언어․민족․국가를 수반하는 철학적 견지에서 조명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타자의 신분이 언어적 이데올로기를 어떠한 방식으로 구체화하고 있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언어는 흔히 ‘민족’을 요구하고 ‘국가’를 요구한다. 언어제국주의 시대로부터 보편적 언어의 꿈을 이루려고 한 에스페란토어에 이르기까지 언어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왔다. 그럼에도 언어는 민족과 국가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권력 구조를 유지하는 일에 줄곧 앞장서왔다. 남철심은 타자의 시선과 목소리를 깊이 간직하고 있는 시인이다. 타자의 언어를 논할 때, 타자로 존재하는 이들은 주류언어와 비주류언어의 관계 속에서 세 가지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는 주류언어와 문화를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최대한 모어의 사용을 피하는 일이다.</p><p><br></p><p>다른 하나는 타자로서의 입지를 인정하고 모어의 고유성과 정통성을 보유하고 계승하는 일이다. 마지막 하나는 주류언어와 모어를 동시에 수용하면서 이중언어 혹은 다중언어의 사용을 극대화하는 일이다. 방법론적으로 보면 타자에게 있어서 마지막 상황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일 것이다.</p><p><br></p><p>문제는 주류언어와 모어를 동시에 수용하는 상황이 가져온 현실적 불안과 결핍이다. 1960년대 말에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에서 태어나 역동의 시대를 지나온 남철심은 학창시절 모어인 한국어와 국어인 중국어를 동시에 배워온 세대이다. 1980~90년대의 용정은 조선족 집거지로 언어와 정서, 관습 등 면에서 타자성이 충분히 인정받고 적극적인 형태로 표현되었던 시기였다. 따라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국어인 중국어는 단 한 과목으로 편성되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모어인 한국어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즉 그 시대의 조선족 사회는 모어를 통하여 세상을 인지하고 사유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워왔다.</p><p><br></p><p>주류언어인 국어와 비주류언어인 모어의 수용이 동등한 선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세대들이 흔히 겪게 되는 언어의 결핍과 불안감을 남철심은 시를 통해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다.</p><p><br></p><p><br></p><p><br></p><p>태어난 곳이 타향이어서/ 어디에 있어도 우리는 他者/ 사투리투성이의 서투른 모국어에/ 모래알처럼 씹히는 대륙의 말/ 쩌거쩌거(这个)하면서/ 말이 말이 아니되고/ 말로 말을 할수 없는 이 답답함/ 내가 나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도저히 내가 되어주지 않는 영원한 불안/ 태어난 곳이 타향이어서/ 누구를 만나도 우리는 他者</p><p><br></p><p>—「태어난 곳이 타향이어서 10) 전문</p><p><br></p><p><br></p><p><br></p><p>이 시에서는 시인의 자화상 느낌이 진하게 배어난다. ‘태어난 곳이 타향이어서 어디에 있어도 우리는 他者’로 시작되는 시는 ‘태어난 곳이 타향이어서 누구를 만나도 우리는 他者’로 끝을 맺는다. 타향에서 태어난 ‘우리’로 지칭되는 이들은 ‘어디’에서 그 ‘누구’를 만나도 변함없이 ‘타자’로 인식되고 있는 아픈 현실을 담담히 고백하고 있다. ‘사투리투성이의 서투른 모국어’, 이는 연변에서 배우고 사용한 조선어 혹은 한국어가 정작 한국에서는 서투른 언어로밖에 인정되지 않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쩌거쩌거 하면서 모래알처럼 씹히는 대륙의 말’, 이는 국어인 중국어 사용에 있어서 어려움과 부족함을 겪고 있는 조선족 사회의 언어적 현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결국 모어인 한국어도, 국어인 중국어도 그 사용과정에서 결핍과 불안을 느끼게 되는 마이너리티 집단의 언어적 상황을 여실히 묘사하고 있다. ‘말이 말이 아니 되고 말로 말을 할 수 없는 이 답답함’, 이는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영역이 주체로서의 영역이 아닌 타자로서의 영역임을 나타낸다. 주류사회로 상징되는 틀안에서 마이너리티 집단은 언어적, 정서적 측면에서 항상 소외되고 분리된다. 따라서 타자는 그 결여와 불안에 대해 답답함을 토로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이를 보면 타자 스스로 늘 하나의 선택만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내가 나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도저히 내가 되어주지 않는 영원한 불안’, 여기서 시인은 ‘나’의 자아정체성을 두고 고민한다. 소리쳐서 부르는 나는 누구이며 내가 되고 싶은 나는 또 누구인가. 시적 화자는 내가 나로 될 수 없는 ‘영원한 불안’을 호소한다. 이는 시인이 절실히 느끼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p><p><br></p><p>탈구조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이 대폭 늘어났다. 타자, 경계인, 이방인, 이주민 등 개념은 더이상 마이너리티의 대명사가 아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세계 곳곳에서 협소한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가 다시 대두하면서 탈구조주의 시대도 이미 지나갔다는 한탄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시를 통해 타자의 언어에 대한 우려와 위기감을 드러낸 시인의 창작 의도를 이 맥락에서 살펴보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보편적 의미에서의 중국어와 한국어를 랑그(langue)라고 가정한다면 조선족 사회가 실제 사용하고 있는 ‘중국어’와 ‘한국어(혹은 조선어)’는 파롤(parole)이 된다. 데리다식의 이해에 따르면 랑그는 사회문화적 시스템 혹은 제도로 작동되고 파롤은 차연(différance)의 폭을 인정하며 모방을 꿈꾸는 것이 보편적인 언어 현상이다. 타자의 언어에 대한 이해는 랑그와 파롤의 관계에 있다. 언어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본위의(egoistic) 것이라는 보편성을 지니기도 한다. 타자는 언어사용에 있어서 일반적인 코드(랑그)를 의식하고 모방하는 과정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표현(파롤)을 전개하고 있다. 데리다 연구를 오랫동안 진행해온 남철심은 랑그와 파롤의 관계 속에서 ‘말이 말이 아니 되고 말로 말을 할 수 없는 이 답답함’을 토로한다. 이 ‘답답함’의 근원은 타자로서의 자아정체성에서 비롯된다. ‘사투리투성이의 서투른 모국어’와 ‘모래알처럼 씹히는 대륙의 말’은 상대적인 표현이다. 즉 주류언어와의 관계 속에서 타자는 자신의 언어가 ‘완벽하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타자의 언어 모방, 그것은 결코 온전한 모방이 될 수 없는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차연의 형식에 불과하다.</p><p><br></p><p>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중언어 혹은 다중언어의 문제는 수많은 경계인, 이방인, 이민자 등 마이너리티 집단과 그들을 민족 혹은 국가적 시스템으로 포섭한 주류사회 전원이 직면한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의 언어문제를 단순한 랑그와 파롤의 이항대립 구조로 이해하기보다는 다양한 삶의 문맥에서 사용되는 상이한 성격의 언어(파롤)들로 인지하고 복잡한 언어구조의 생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랑그의 잠재적 구속력을 피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의 파롤을 혼란시킬 필요도 없다. 차연이 발생하면 그 차이를 받아들이고 다양한 파롤의 의미생성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다양한 언어 규칙’12)이 시사한 바와 같이 언어의 세계에는 다양한 국어(랑그)들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같은 국어를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다양한 삶의 문맥에서 다양한 언어(파롤)들이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모국어 역시 마찬가지로 다양한 언어들을 파생시킨다. 타자의 경험을 통해 이중언어 혹은 다중언어의 사용과정에서 발생하는 ‘답답함’과 ‘불안’을 진솔히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남철심의 태어난 곳이 타향이어서 는 의미 깊다. 다만 이 시에서 보여주는 주류언어와 비주류언어에 대한 이항대립적인 구도에서 벗어나 리좀(rhizome) 형태로 존재하는 다양한 언어와 언어 규칙을 살펴본다면 보다 성숙한 통찰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p><p><br></p> <p>남철심의 시는 타자의 이름과 정체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시 추석 달 을 보기로 하자.</p><p><br></p><p><br></p><p><br></p><p>흰옷 입은 엄마는 더 고왔지/ 함경도 사투리 <꾸마>도 좋았지/ 보리밭 머리에 그 웃음도 서늘하고/ 우물가 드레박에 마음도 맑았지/ 부르면 오실 같아 잔 들어 곡을 하니/ 잔 속에 달이 밝고 달 속에 엄마 웃네/ 어머니, 지금은 제 이름을 불러 주소이다/ 옛날처럼 그렇게 제 이름을 불러 주소이다/ 붉은 초롱 높이 걸린 추녀 아래/ 오늘 밤 제게는 이름이 없소이다</p><p><br></p><p>—「추석 달 13) 전문</p><p><br></p><p><br></p><p><br></p><p>이 시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묘사한 듯 얼핏 읽히지만 에필로그를 보면 시인은 타자로서의 ‘이름’의 부재에 주목한다. 사투리 <꾸마>를 즐겨 쓰는 함경도가 고향인 어머니는 흰옷을 즐겨 입는다. 이처럼 시적 화자의 정체성은 어머니의 형상을 통하여 발로된다. 추석 달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부르면 오실 것 같아 잔 들어 곡을 하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적 화자는 어머니에게 청을 한다. ‘지금은 제 이름을 불러 주소이다’, ‘옛날처럼 그렇게 제 이름을 불러 주소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부르는 추모곡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지만 단순한 추모에 그치지 않는다. 시적 화자는 ‘이름의 부재’를 호소한다. 자아의 신체성과 사회적 이미지를 동일시함으로써 만들어낸 것이 ‘이름’이라면 인간은 이를 매개물로 하여 정체성을 획득한다. ‘이름’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지시(bedeutung, reference)’의 기능이라면 다른 하나는 ‘의미(sinn, sense)’의 기능이다. 시적 화자가 실제 시인이라고 가정한다면 지시의 기능을 행사하는 이름은 ‘남철심’이다. 그는 중국 조선족 시인이며, 일본에서 탈구조주의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자이다. 또한 타자 혹은 경계인으로 불리우는 마이너리티 집단에 속하는 이방인이다. 이 모든 것은 ‘남철심’이라는 이름이 행사하는 의미적 기능이다. 정작 시인은 스스로의 ‘이름의 부재’에 호소한다. 그가 불리우고 싶어 하는 이름은 지시적 기능의 이름일까 아니면 의미적 기능의 이름일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름을 부여한 이는 시인 자신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라는 점이다. ‘어머니, 지금은 제 이름을 불러 주소이다’. 시인은 자신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최초의 의미를 생성시킨 이가 어머니임을 알고 있다. 하여 ‘이름의 부재’라는 현실에 직면하였을 때, 원초적인 자아로 돌아가 이름과 의미를 처음 부여해준 어머니를 애타게 불러본다. 에필로그에서 시인은 ‘붉은 초롱 높이 걸린 추녀 아래’에서 ‘오늘밤 제게는 이름이 없소이다’라고 토로한다. 이는 현재 시적 화자가 타자의 신분으로 원초의 의미론적 ‘이름’을 상실한 상태임을 시사한다. ‘붉은 초롱’이 걸려있는 공간은 시적 화자에게 타자의 ‘이름’을 선사했고 그와 동시에 원초의 의미론적 기능도 변화를 강요받았다. 시인은 의미적 기능의 이름이 달라지면 그에 따라 지시적 기능의 이름도 변화를 요구받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는 타자로서의 존엄이 부정당하는 과정임을 깨닫고 있다. 함경도가 고향인 어머니에 대한 추모는 결국 현재의 자아를 넘어서 원초의 자아로 회귀하기 위한 기도인 셈이다. 아울러 이는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완성하기 위한 시인의 소망이기도 하다.</p><p><br></p><p>이같이 시인이 토로하는 ‘이름의 부재’는 더 나아가 자아정체성의 혼돈을의미한다. 남철심의 다른 한 편의 시를 보기로 하자.</p><p><br></p><p><br></p><p><br></p><p>만들어진 대로/ 생긴 대로/ 주어진 대로/ 갈 수 있는 길을 가기다/ 돌아서도/ 꿈은 도망가지 않는다/ 별을 볼 수 있는 눈으로/ 그것만은 못 본다/ 그러나 더는/ 크지도 말자/ 세상이 좁아진다</p><p><br></p><p>—「여섯 번째 손가락 14) 전문</p><p><br></p><p>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여섯 번째 손가락’을 그리고 있다. 정상적인 생체리듬을 파괴하는 작용을 하는 여섯 번째 손가락은 말 그대로 불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만들어진 대로’, ‘생긴 대로’, ‘주어진 대로’, ‘갈수 있는 길을 가기다’라고 여섯 번째 손가락의 존재를 인정하고 격려한다.</p><p><br></p><p>그러나 세상은 불필요한 존재에 호의적이지 않다. 먼 하늘가의 별까지 볼 수 있는 세상의 눈이지만 가까이에 있는 ‘그것만은 못 본다’. 시인은 세상의 눈밖에 난 여섯 번째 손가락을 향해 말한다. ‘꿈은 도망가지 않는다’, ‘그러나 더는 크지도 말자’. ‘여섯 번째 손가락’은 불필요한 존재로 취급되는 타자에 대한 은유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세상의 그 어떤 구조 혹은 체계 속에 갇히게 된다. 인간은 개체로 존재하지만 관계에 의해 규정되고 재정의된다.</p><p><br></p><p>근대에 들어서면서 이데아와 신의 자리에 인간이 놓이게 되지만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의 시대를 겪으면서도 인간의 동일성, 코드화, 주체화, 고착화 등 기준은 여전히 뿌리 깊다.</p><p><br></p><p>오늘날까지 차이의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생성을 가로막는 사회적 시스템은 단 한 순간도 작동을 멈춘 적이 없다. 노마드의 철학자 들뢰즈가 리좀, 발산(divergence),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 등 개념을 제기하여 주체와 대상 사이의 구분을 없애고 특정된 낙인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 지도 거의 반세기가 되어간다. 하지만 현재를 사는 타자는 아직도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여있다. 타자에게 있어서 성장의 공간, 즉 자신의 꿈을 마음껏펼칠수 있는 가능성의 장(場)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더는 크지도 말자’라고 하면서 자신을 고착화시키려고 한다. 에필로그에서 시적 화자는 ‘세상이 좁아진다’라는 표현으로 다섯 개의 손가락과 달리 굳이 존재할 필요가 없는 ‘여섯 번째 손가락’의 스스로의 정지를 권유한다. 시인은 불필요한 존재, 즉 타자의 성장이 기존의 것을 해체시키고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일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시 텍스트는 스스로 성장을 멈추어버리는 일, 차이의 가치를 부정하는 일, 새로운 생성을 막아버리는 일, 그것만이 고착화된 세계에서 ‘불필요한’ 타자가 선택하고 수행할 수 있는 일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p><p><br></p><p>남철심 시에서 보이는 시적 화자는 항상 작고 여리고 소외당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시 낯선 고향 (2017)에서 ‘아무도 닮지 않아 갈 곳이 없는’ 시적 화자는 ‘아무도 없는 고향에 돌아와/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잃는다’. 아무도 닮지 않아 갈 곳이 없다는 표현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타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시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 좁쌀꽃 (2018)에서는 ‘큰 것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야리야리 흔들리는 노오란 좁쌀꽃’이 ‘작아도 가볍잖은 생의 무게를 고스란히 껴안고’ 있는 소외당한 이들을 의인화하고 있다. 주류사회에 내포되지 못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이지만 ‘작아도 가볍잖은 생의 무게’를 지니고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이들에 대한 찬사와 격려를 읽어낼 수 있다.</p><p><br></p><p>이 외에도 남철심은 소외된 타자에 대한 시선을 담은 여러 편의 시를 써냈다. 이 사람은 (2003), 우리에게 하늘이 있습니까 (2007), 내가 돌아오던 날 (2008), 눈 감고 마주 보며 (2008), 다른 사람의 죽음 (2012), 출근(2014), 보이는 것은 (2016), 불안한 예감 (2017), 리좀 (2018), 도망(2018), 별찌 (2019) 등 시를 통해 타자의 언어, 이름과 정체성에 대한 독특한 시 세계를 그려냈다.</p><p><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