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철심의 근작 시에 나타난 타자성 -현대문학 이론에 기초하여-

南铁心

<p>남철심의 근작 시에 나타난 타자성</p><p>-현대문학 이론에 기초하여-</p><p><br></p><p>-이문철(중국 煙台大學人文學院 부교수)</p><p><br></p><p><br></p><p><br></p><p><br></p><p><br></p><p>&lt;차 례&gt;</p><p><br></p><p>1. 들어가며</p><p>2. 시적 언어의 울림 : ‘대화’와 ‘소리’</p><p>3. 소외된 타자에 대한 시선</p><p>4. 죽음과 삶의 상징계</p><p>5. 나오며</p><p><br></p><p>한국학연구 제58집|♣~♣쪽|2020.8.</p><p><br></p><p><br></p><p><br></p><p><br></p><p><br></p><p>[국문초록]</p><p><br></p><p>남철심은 중국 조선족 3세 시인이다. 시작(詩作) 활동을 개시한 지 20여 년, 이미 100여 편의 한글로 쓴 시를 발표했지만 남철심의 시는 중국 연변 문단에서 주목받을 뿐, 한국 문단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려고 최선을 다하는 용기와 올곧음, 정직함을 지닌 시인이다. 그에게 시작(詩作)은 고통을 덜거나 감내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무상의 슬픔을 유상의 즐거움으로 바꾸는 행위의 일환이다. 남철심의 시 세계에 대한 관심과 주목은 한국학계에도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오늘날 여전히 한글로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조선족 시인 혹은 소설가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들의 작품활동은 탈경계적인 사유방식과 생활체험을 동반한다. 중국 조선족 문단의 움직임에 대한 학문적 접근과 이해는 한국학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연구과제이다. 현시점에서 조선족 문단의 전모를 파악하고 특히 지금까지 관심과 주목을 크게 받지 못한 시인 혹은 작가들에 대한 발굴작업은 더욱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언어적 혹은 정서적 공동체 내부의 인간적 결속 및 유대감 증진, 그리고 해외 한국학 연구의 다원적 가치체계의 확립을 위하여 한국 내 ‘중국조선족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본고는 현대문학 이론에 기초하여 남철심의 근작시에 나타난 타자성에 대해 짚어보려고 한다.</p><p><br></p><p><br></p><p><br></p><p>[주제어] 중국 조선족 시인, 타자성, 현대문학 이론, 탈경계</p><p><br></p><p><br></p><p><br></p><p>1. 들어가며</p><p><br></p><p>시란 무엇인가. 시에 대한 독자의 기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나 쉽게 읽어내릴 수 있고 동참하고 관여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시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귀 기울이는 관심의 반만이라도 그 텍스트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에 주목한다면 전혀 다른 시 읽기가 될 것이다. &lt;어떻게&gt; 말하는지에 관심을 보인다는 건 &lt;무엇&gt;을 말하는지에 대한 숙명적 배반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시에 대한 담론이 겪고 있는 시대의 좌절을 이해하려면 시가 무엇을 통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을 늘려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남철심의 시를 읽어보려고 한다.</p><p><br></p><p>남철심(1968~ )은 시인이다. 중국 용정에서 조선족 3세로 태어나 이십 대 중반에 떠난 일본 유학을 계기로 20여 년간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타자 혹은 경계인으로서의 삶의 무게를 누구보다 실감하면서 살아왔다. 남철심은 일본 국립 치바대학(千葉大學) 인문사회과학대학원에서 포스트 구조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개체의 존엄과 자유를 중시하고 고정된 중심 및 권위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그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려고 최선을 다하는 용기와 올곧음, 정직함을 지닌 시인이다.</p><p><br></p><p>남철심의 시는 여린 것, 사라지는 것, 소외당하는 것, 비루한 것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그것들 역시 하나의 존재이고 주체임을 보여주려는 외침이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고독과 비애, 아픔과 상실의 그림자가 짙게 비껴있고 그로부터의 분열과 해탈, 치유와 성찰 등 탈구조주의적 정서가 겹겹이 깔려 있다.</p><p><br></p><p>시작(詩作) 활동을 개시한 지 이십여 년, 이미 백여 편의 한글로 쓴 시를 발표했지만 남철심의 시는 중국 연변 문단에서 주목받을 뿐, 한국 문단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p><p><br></p><p>본고는 현대문학 이론에 기초하여 남철심의 시 세계에 나타난 타자성의 존재 양상 및 의의를 파헤치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남철심의 근작시 중 주로 타자와 타자성에 주목한 봄이다 , 사람을 팝니다 , 착각된 시간 , 물역에 서면 , 태어난 곳이 타향이어서 , 추석 달 , 여섯 번째 손가락 , 나 죽으면 바람 불겠지 , 죽은 자의 말 , 존재의 무 , 살아있는 의미 등 11편의 시를 텍스트 분석의 대상으로 하고자 한다. 이 11편의 시는 타자로서의 독자와의 대화, 타자로서의 시인 스스로에 대한 주목, 그리고 죽음과 생의 상징계 안에서 느끼는 타자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 남철심의 창작기법과 자아정체성을 가장 뚜렷이 나타낸 대표적 작품이라 볼 수 있다.</p><p><br></p> <p>2. 시적 언어의 울림 : ‘대화’와 ‘소리’</p><p><br></p><p>남철심의 시 세계는 ‘대화’와 ‘소리’에 민감하다. 시적 자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타자의 언어, 타자의 반응과 타자의 화답이다. 남철심의 대화적 시에서 시인과 독자 사이에는 하이어라키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시에서 시인은 수시로 독자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청하며 독자는 항상 시인과 동일한 선, 열린 공간에 위치해있다. 시인은 시가 대화적인 형태로 존재할 때에만 비로소 가치를 획득할 수 있고 시적 언어는 다중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이는 바흐친의 대화원리에 대한 직접적인 반론이며 비평이다. 바흐친은 ‘대화’, ‘다성성’ 등 키워드적인 개념을 사용하여 문학작품의 언어와 특성을 자세히 분석하였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아왔다. 바흐친의 대화원리는 타자 혹은 타자성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있다. 바흐친의 이론적 근거로 잘 알려진 한 구절을 보기로 하자. “근대에 있어서 모놀로그적 원리가 강화되고 그것이 사상 활동의 모든 영역에 침투되는 일에 힘을 쏟아부은 것은 단일적이고 유일한 이성을 숭배하는 유럽의 합리주의, 더우기는 계몽주의시대의 사조이다.”1) 이처럼 바흐친의 이론적 근거는 모놀로그적 원리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다. 그는 통일성, 진리, 중심, 아이덴티티 (identity) 등 근대적 사고방식을 철저히 비판하고 이를 자신의 새로운 &lt;소설의 시학&gt;의 근거로 삼았다. 특히 바흐친의 대화원리는 모놀로그적 사실주의에 대한 비판, 대결이라는 점에서 평가를 받았다. 이 점만 주목한다면 남철심의 시는 바흐친의 대화원리에 온전히 순응하는 듯 보인다.</p><p><br></p><p>하지만 바흐친은 시와 소설의 장르적인 특성을 ‘언어의 대화성’에 기초하여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시는 언어 고유의 대화성이 예술적으로 활용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적 장르에서의 말은 자족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경계 너머에 다른 발언들이 있음을 전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시의 세계는 시인이 그 세계의 내부에서 아무리 많은 모순과 갈등을 전개시켜 보인다 해도 항상 단 하나의 절대적 담론의 조명을 받도록 되어 있다” 라고 피력했다. 이같이 바흐친은 시 자체의 완결성과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고정된 구조 속에서 시 읽기를 권유한다. 이는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큰 획을 그은 선구자임에도 불구하고 시에 관해서는 철저한 구조주의적 시각을 지니고 있는 바흐친의 제한성을 나타낸다.</p><p><br></p><p>대화주의자로 일컬어지는 그가 시와 소설의 장르를 비교하는 부분에서는 대화가 아닌 독백의 단선 논리를 주장하였다는 사실은 여전히 아이러니컬하다.</p><p><br></p><p>그에 반해 남철심의 시는 시와 소설의 언어 사이에 그다지 큰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면서 시인과 독자의 담론을 가능케 한다. 특히 그의 대화적 시는 시적 언어가 완결성과 자율성을 넘어 텍스트를 탈영토화하고 있는 포스트 구조주의적인 현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p><p><br></p><p><br></p><p><br></p><p>봄이다/ 참 힘들지?/ 죽은 듯이 억눌려있다가/ 가난하게 말라 있다가/ 얼어서 터실한 손으로 기다리다가/ 울어도 눈물이 없다가/ 참, 아프지?/ 그래 이제는 너희들이 아름다울 차례다 /너희들이 따스할 날이다.</p><p><br></p><p>—「봄이다 4) 전문</p><p><br></p><p><br></p><p><br></p><p>이 시에서 시인은 ‘풀’로 상징되는 ‘죽은 듯이 억눌려’있거나 ‘가난하게 말라’있거나 ‘얼어서 터실한 손으로’ 봄을 기다리는 ‘울어도 눈물이 없는’ 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긴 세월 동안 메마르고 거칠고 넉넉하지 못한 고단한 삶을 지탱해온 이들에게 ‘참 힘들지’, 그리고 ‘참 아프지’라고 따뜻하게 말을 건네는 시인의 목소리에 독자는 대등한 관계성을 느끼며 무언(無言)의 화답을 하게 된다. 시의 에필로그에서는 힘겹게 봄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 ‘이제는 너희들이 아름다울 차례’임을 알려주고 ‘따스할 날’이 곧 다가오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봄을 기다리는 것은 시인의 물음에 화답하고 싶어 하는 잠재된 독자뿐만 아니라 시적 화자도 포함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시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무언의 대화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변화를 허락한 &lt;대화&gt;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의 발화는 대화를 시작으로 한다. 이 대화는 발화 주체만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엿듣는 독자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이처럼 남철심의 시 텍스트는 시적 화자와 독자 사이의 무언의 대화를 전제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다.</p><p><br></p><p>또한 남철심은 해석하기 쉬운 언어로 시의 난해성을 조율하여 독자와의 거리를 적절히 유지한다. 시 사람을 팝니다 에서 시인은 어렵고 무거운 주제를 쉽게 이해되는 언어와 간결한 함축성, 운율을 통해 가볍게 툭 던지듯독자에게 말을 건다.</p><p><br></p><p><br></p><p><br></p><p>사람을 팝니다/ 착하게 살아온 한평생은 오백 원/ 버거우시면 상냥함을 더블로 드릴게요/ 진심은 찾기 힘든 물건이라 천 원에 팔게요/ 학식과 수양은 쓸모없는 물건이라/ 부르는 대로 드릴게요/ 사랑은 누구도 필요 없겠죠/ 그냥 버릴게요/ 그리고 마지막 남은 남자는/ 공짜로 드릴게요/ 사람을 팝니다/ 필요하신 분은 아래로 연락 주세요/ 공구공 팔공오공 팔구구이</p><p><br></p><p>—「사람을 팝니다 5) 전문</p><p><br></p><p><br></p><p><br></p><p>남철심의 초기 시작(詩作)을 보면 그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을 헤쳐오며 그 과정에서 세련되고 난해하고 파괴적인 시들을 쓴 적이 있다. 이는 어느 한 시인의 창작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탈구조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언어․사유․행위 전반이 점차 탈경계화․탈범주화․탈구조화되면서 기존의 시적 언어로 그러한 현상을 표현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철심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양식으로부터 빠르게 벗어나 독자와의 관계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겸손과 절제를 내세우며 ‘자신’을 싼값에 팔고 있다. ‘착하게 살아온 한평생은 오백 원’의 값어치밖에 되지 않는다. ‘상냥함’은 버거울 수 있으므로 더블로 주고 ‘진심’은 찾기 어려우므로 ‘천원’에 팔려고 한다. ‘학식과 수양은 쓸모없는 물건’이라 값을 부르지 않기로 하고 ‘사랑’은 필요 없는 것이므로 그냥 버리려고 한다. ‘남자’로서의 성은 ‘공짜’로 그 어떤 값어치도 없다.</p><p><br></p><p>이 시에서 시적 화자의 주체는 실제 시인일수도 있고 내포 시인일수도 있으며 혹은 내적 서술자일수도 있다. 시적 화자는 착하고 상냥하고 학식과 수양을 갖춘 남자를 헐값에 팔기로 하고 독자들에게 광고하고 있다. ‘필요하신 분은 아래로 연락 주세요’. 그리고 실제 사용한 적이 있는 시인의 전화번호를 적어두는 섬세함도 보인다. 이 시에서는 시적 화자의 주관적 정서와 상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품격이라 할 수 있는 내재적 수양과 진실한 마음은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능력을 최우선시하는 시대에서는 ‘쓸모없는 물건’으로 간주된다. 사람을 팝니다 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도전한 시로 읽을 수 있다. 이 시는 물질주의와 능력주의 시스템에서 버림을 받기 전에 스스로를 헐값에 팔아버리려고 하는 시적 화자를 자조적으로 그리고 있다. 외적인 성취를 중시하는 현대사회에서 내재적 가치, 즉 도덕적 능력은 스스로 위축되어 나약한 영혼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를 보아낸 시인은 자신을 버림으로써 자신을 구하려고 한다. 광고의 대상이 된 독자는 실제 독자일수도, 내포 독자일수도, 혹은 내적(외적) 피서술자일수도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자신의 내면을 세상에 내보이고 자신을 광고하라고 독자에게 권한다.</p><p><br></p><p>이 시에서 지칭하는 ‘사람’은 시적 화자 자신뿐만 아니라 시를 읽고 있는 독자들도 포함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내면의 자아와 끊임없이 싸우며 성장하는 이 시대의 많은 이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외적 성공보다도 내적 성숙에 있음을 시사한다.</p> <p>남철심의 시 세계는 ‘소리’에도 민감하다. 그의 대화적 시에는 특권을 가진 중심적인 시적 화자가 존재하지 않고 암묵적인 발화 주체들의 소리가 공존하고 있다. 때로는 상반되는 다양한 소리의 교차도 등장하여 언어의 다성성(多聲性)을 보여주고 있다. 남철심의 대화적 시에는 흔히 여러 가지 소리가 유동적으로 움직이거나 여러 겹의 소리들이 겹치고 충돌한다.</p><p><br></p><p><br></p><p><br></p><p>내가 먹던 것이 나를 먹겠다고/ 소리를 내어도 소리는 소리가 없다/ 목이 메어서 그걸 좀 달라 달라 하는데/ 빈 가마를 가시며 누가 자꾸 울고 있다 / 그리고 그 시간이다/ 누가 죽어가는 총소리/ 대포 소리/ 문명이 돌아가는 기계 소리/ 그런데 지금 세계는 몇 시쯤이냐?</p><p><br></p><p>—「착각된 시간 6) 전문</p><p><br></p><p>소리와 시간의 의미는 남철심의 시 세계를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다. ‘누가 죽어가는 총소리’, ‘대포 소리’, ‘문명이 돌아가는 기계 소리’가 들려오는 ‘지금 세계’는 ‘몇 시쯤’일까? 이 물음에 대한 여러 가지 해답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겹쳐있음은 분명하다. 우선 착각된 시간 속에 울려 퍼지는 이 소리들은 아크로니적인 관계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시간이다’라는 표현은 세 가지 소리의 시간적 동일성을 말해주고 있다. 시적 화자의 귀에들리는 여러 소리는 문명의 일탈을 암묵적으로 가리키며 그 사이의 관계성, 즉 시간적 관계와 질서적 관계를 허용한다. 다음, 총소리, 대포 소리, 기계소리의 나열은 근대 과학기술혁명 이후 새로운 유토피아를 이룰 것이라는 판타스마고리아(fantasmagoria)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먹던 것이 나를 먹겠다고’ ‘소리를 내어도 소리는 소리가 없다’, 이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의미한다. 즉 생명 있는 유기체를 대신하여 생명 없는 무기체에 의존하는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면서 근대문명은 인간을 전쟁의 참호 속에 빠져들게 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끝으로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상반되는 소리의 교차, ‘누가 죽어가는 총소리’와 ‘대포 소리’는 ‘문명이 돌아가는 기계 소리’와 동시에 존재한다. 상반되는 소리를 내포한 시 세계는 완결성, 통일성, 논리성 등 모놀로그적 시의 창작기법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대항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산발적인 소리들의 통합을 허락하며 모든 것들이 뒤섞여있는 세계를 그리고자 한 대화적 시로 읽을 수 있다. 다른 한 편의 시 역시 소리에 주목하고 있다.</p><p><br></p><p><br></p><p><br></p><p>물역에 서면 물소리만 들리고 나는 없다/ 내 눈에는/ 꽃이 피는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 바람이 돌아와 눈물을 가려주는 소리/ 잃어버린 날 잊은 듯이 나와 물역에 서면/ 부끄럽지 않게 사람으로 서라고/ 물소리로 돌아와 나를 보는/ 어머님의 눈/ 내 마음의 눈</p><p><br></p><p>—「물역에 서면 8) 전문</p><p><br></p><p><br></p><p><br></p><p>이 시에서는 보이는 세계와 들리는 세계의 통합이 이루어진다. 보이는 세계가 현실성이 지배하는 세계라면, 들리는 세계는 잠재성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본 것이다. ‘꽃이 피는 소리’와 ‘물이 흐르는 소리’는 눈에 보이는 자연 세계를 귀로 들으려 하는 들뢰즈식 논리를 재현한 듯 보인다. 들뢰즈는 보이는 세계보다 들리는 세계가 인간의 정서를 더욱 자극하게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물이 흐르는 소리와 같은 현실적 소리의 세계와 꽃이 피는 소리와 같은 잠재적 소리의 세계는 모두 인간의 풍성한 감각들을 일깨워준다. 시적화자는 꽃이 피고 물이 흐르는 물가에 서서 그 광경을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고 담으려고 한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바람이 돌아와 눈물을 가려주는 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된다. ‘소리’의 세계에 몰두한 시적 화자는 ‘물역에 서면 물소리만 들리고 나는 없다’라고 고백한다. 이는 시각의 세계보다 청각의 세계가 인간의 실존을 더 심층적으로 자극하기 때문이다. 예하면 그림을 보고 우는 경우보다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더 많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시의 에필로그에서 시적 화자는 ‘물소리로 돌아와 나를 보는’ 어머니의 눈을 연상한다. 소리의 세계, 즉 청각의 세계가 형태의 세계, 즉 시각의 세계와 상호 통합함으로써 시적 화자는 ‘물소리’로 변해버린어머니의 눈길을 애틋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소리의 세계가 실존을 강하게 뒤흔드는 힘을 갖고 있음을 일러준다.</p><p><br></p><p>이 외에도 남철심은 침전 (2003), 자정 (2004), 아침을 위한 서시(2012), 누구였는지 (2016), 여름날의 고독 (2017), 돌의 생각 (2017), 그런데 지금 아침이다 (2017), 진달래꽃 (2018), 무언의 사연 (2018), 소리 없는 소리 (2018) 등 시를 통해 대화와 소리를 다양하게 그려냈다. 대화와 소리의 힘에 주목하였다는 것은 독자의 존재를 항상 염두에 두고 열린 공간에서 시 쓰기를 시도해온 시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p><p><br></p><p><br></p><p><br></p><p><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