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철심의 근작 시에 나타난 타자성-현대문학 이론에 기초하여

南铁心

<p><b style="font-size: 20px;">남철심의 근작 시에 나타난 타자성</b></p><p>-현대문학 이론에 기초하여-</p><p><br></p><p>-이문철(중국 煙台大學人文學院 부교수)</p><p><br></p><p><br></p><p>&lt;차 례&gt;</p><p>1. 들어가며</p><p>2. 시적 언어의 울림 : ‘대화’와 ‘소리’</p><p>3. 소외된 타자에 대한 시선</p><p>4. 죽음과 삶의 상징계</p><p>5. 나오며</p><p>한국학연구 제58집|♣~♣쪽|2020.8.</p><p><br></p><p><br></p><p>[국문초록]</p><p>남철심은 중국 조선족 3세 시인이다. 시작(詩作) 활동을 개시한 지 20여 년, 이미 100여 편의 한글로 쓴 시를 발표했지만 남철심의 시는 중국 연변 문단에서 주목받을 뿐, 한국 문단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려고 최선을 다하는 용기와 올곧음, 정직함을 지닌 시인이다. 그에게 시작(詩作)은 고통을 덜거나 감내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무상의 슬픔을 유상의 즐거움으로 바꾸는 행위의 일환이다. 남철심의 시 세계에 대한 관심과 주목은 한국학계에도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오늘날 여전히 한글로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조선족 시인 혹은 소설가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들의 작품활동은 탈경계적인 사유방식과 생활체험을 동반한다. 중국 조선족 문단의 움직임에 대한 학문적 접근과 이해는 한국학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연구과제이다. 현시점에서 조선족 문단의 전모를 파악하고 특히 지금까지 관심과 주목을 크게 받지 못한 시인 혹은 작가들에 대한 발굴작업은 더욱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언어적 혹은 정서적 공동체 내부의 인간적 결속 및 유대감 증진, 그리고 해외 한국학 연구의 다원적 가치체계의 확립을 위하여 한국 내 ‘중국조선족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본고는 현대문학 이론에 기초하여 남철심의 근작시에 나타난 타자성에 대해 짚어보려고 한다.</p><p><br></p><p>[주제어] 중국 조선족 시인, 타자성, 현대문학 이론, 탈경계</p><p><br></p> <p>1. 들어가며</p><p>시란 무엇인가. 시에 대한 독자의 기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나 쉽게 읽어내릴 수 있고 동참하고 관여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시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귀 기울이는 관심의 반만이라도 그 텍스트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에 주목한다면 전혀 다른 시 읽기가 될 것이다. &lt;어떻게&gt; 말하는지에 관심을 보인다는 건 &lt;무엇&gt;을 말하는지에 대한 숙명적 배반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시에 대한 담론이 겪고 있는 시대의 좌절을 이해하려면 시가 무엇을 통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을 늘려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남철심의 시를 읽어보려고 한다.</p><p>남철심(1968~ )은 시인이다. 중국 용정에서 조선족 3세로 태어나 이십 대 중반에 떠난 일본 유학을 계기로 20여 년간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타자 혹은 경계인으로서의 삶의 무게를 누구보다 실감하면서 살아왔다. 남철심은 일본 국립 치바대학(千葉大學) 인문사회과학대학원에서 포스트 구조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개체의 존엄과 자유를 중시하고 고정된 중심 및 권위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그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려고 최선을 다하는 용기와 올곧음, 정직함을 지닌 시인이다. </p><p>남철심의 시는 여린 것, 사라지는 것, 소외당하는 것, 비루한 것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그것들 역시 하나의 존재이고 주체임을 보여주려는 외침이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고독과 비애, 아픔과 상실의 그림자가 짙게 비껴있고 그로부터의 분열과 해탈, 치유와 성찰 등 탈구조주의적 정서가 겹겹이 깔려 있다. </p><p>시작(詩作) 활동을 개시한 지 이십여 년, 이미 백여 편의 한글로 쓴 시를 발표했지만 남철심의 시는 중국 연변 문단에서 주목받을 뿐, 한국 문단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p><p>본고는 현대문학 이론에 기초하여 남철심의 시 세계에 나타난 타자성의 존재 양상 및 의의를 파헤치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남철심의 근작시 중 주로 타자와 타자성에 주목한 봄이다 , 사람을 팝니다 , 착각된 시간 , 물역에 서면 , 태어난 곳이 타향이어서 , 추석 달 , 여섯 번째 손가락 , 나 죽으면 바람 불겠지 , 죽은 자의 말 , 존재의 무 , 살아있는 의미 등 11편의 시를 텍스트 분석의 대상으로 하고자 한다. 이 11편의 시는 타자로서의 독자와의 대화, 타자로서의 시인 스스로에 대한 주목, 그리고 죽음과 생의 상징계 안에서 느끼는 타자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 남철심의 창작기법과 자아정체성을 가장 뚜렷이 나타낸 대표적 작품이라 볼 수 있다.</p> <p>2. 시적 언어의 울림 : ‘대화’와 ‘소리’</p><p>남철심의 시 세계는 ‘대화’와 ‘소리’에 민감하다. 시적 자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타자의 언어, 타자의 반응과 타자의 화답이다. 남철심의 대화적 시에서 시인과 독자 사이에는 하이어라키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시에서 시인은 수시로 독자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청하며 독자는 항상 시인과 동일한 선, 열린 공간에 위치해있다. 시인은 시가 대화적인 형태로 존재할 때에만 비로소 가치를 획득할 수 있고 시적 언어는 다중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이는 바흐친의 대화원리에 대한 직접적인 반론이며 비평이다. 바흐친은 ‘대화’, ‘다성성’ 등 키워드적인 개념을 사용하여 문학작품의 언어와 특성을 자세히 분석하였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아왔다. 바흐친의 대화원리는 타자 혹은 타자성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있다. 바흐친의 이론적 근거로 잘 알려진 한 구절을 보기로 하자. “근대에 있어서 모놀로그적 원리가 강화되고 그것이 사상 활동의 모든 영역에 침투되는 일에 힘을 쏟아부은 것은 단일적이고 유일한 이성을 숭배하는 유럽의 합리주의, 더우기는 계몽주의시대의 사조이다.”1) 이처럼 바흐친의 이론적 근거는 모놀로그적 원리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다. 그는 통일성, 진리, 중심, 아이덴티티 (identity) 등 근대적 사고방식을 철저히 비판하고 이를 자신의 새로운 &lt;소설의 시학&gt;의 근거로 삼았다. 특히 바흐친의 대화원리는 모놀로그적 사실주의에 대한 비판, 대결이라는 점에서 평가를 받았다. 이 점만 주목한다면 남철심의 시는 바흐친의 대화원리에 온전히 순응하는 듯 보인다.</p><p>하지만 바흐친은 시와 소설의 장르적인 특성을 ‘언어의 대화성’에 기초하여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시는 언어 고유의 대화성이 예술적으로 활용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적 장르에서의 말은 자족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경계 너머에 다른 발언들이 있음을 전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시의 세계는 시인이 그 세계의 내부에서 아무리 많은 모순과 갈등을 전개시켜 보인다 해도 항상 단 하나의 절대적 담론의 조명을 받도록 되어 있다” 라고 피력했다. 이같이 바흐친은 시 자체의 완결성과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고정된 구조 속에서 시 읽기를 권유한다. 이는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큰 획을 그은 선구자임에도 불구하고 시에 관해서는 철저한 구조주의적 시각을 지니고 있는 바흐친의 제한성을 나타낸다. </p><p>대화주의자로 일컬어지는 그가 시와 소설의 장르를 비교하는 부분에서는 대화가 아닌 독백의 단선 논리를 주장하였다는 사실은 여전히 아이러니컬하다. </p><p>그에 반해 남철심의 시는 시와 소설의 언어 사이에 그다지 큰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면서 시인과 독자의 담론을 가능케 한다. 특히 그의 대화적 시는 시적 언어가 완결성과 자율성을 넘어 텍스트를 탈영토화하고 있는 포스트 구조주의적인 현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p><p><br></p><p>봄이다/ 참 힘들지?/ 죽은 듯이 억눌려있다가/ 가난하게 말라 있다가/ 얼어서 터실한 손으로 기다리다가/ 울어도 눈물이 없다가/ 참, 아프지?/ 그래 이제는 너희들이 아름다울 차례다 /너희들이 따스할 날이다.</p><p>—「봄이다 4) 전문</p><p><br></p><p>이 시에서 시인은 ‘풀’로 상징되는 ‘죽은 듯이 억눌려’있거나 ‘가난하게 말라’있거나 ‘얼어서 터실한 손으로’ 봄을 기다리는 ‘울어도 눈물이 없는’ 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긴 세월 동안 메마르고 거칠고 넉넉하지 못한 고단한 삶을 지탱해온 이들에게 ‘참 힘들지’, 그리고 ‘참 아프지’라고 따뜻하게 말을 건네는 시인의 목소리에 독자는 대등한 관계성을 느끼며 무언(無言)의 화답을 하게 된다. 시의 에필로그에서는 힘겹게 봄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 ‘이제는 너희들이 아름다울 차례’임을 알려주고 ‘따스할 날’이 곧 다가오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봄을 기다리는 것은 시인의 물음에 화답하고 싶어 하는 잠재된 독자뿐만 아니라 시적 화자도 포함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시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무언의 대화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변화를 허락한 &lt;대화&gt;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의 발화는 대화를 시작으로 한다. 이 대화는 발화 주체만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엿듣는 독자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이처럼 남철심의 시 텍스트는 시적 화자와 독자 사이의 무언의 대화를 전제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다.</p><p>또한 남철심은 해석하기 쉬운 언어로 시의 난해성을 조율하여 독자와의 거리를 적절히 유지한다. 시 사람을 팝니다 에서 시인은 어렵고 무거운 주제를 쉽게 이해되는 언어와 간결한 함축성, 운율을 통해 가볍게 툭 던지듯독자에게 말을 건다.</p><p><br></p><p>사람을 팝니다/ 착하게 살아온 한평생은 오백 원/ 버거우시면 상냥함을 더블로 드릴게요/ 진심은 찾기 힘든 물건이라 천 원에 팔게요/ 학식과 수양은 쓸모없는 물건이라/ 부르는 대로 드릴게요/ 사랑은 누구도 필요 없겠죠/ 그냥 버릴게요/ 그리고 마지막 남은 남자는/ 공짜로 드릴게요/ 사람을 팝니다/ 필요하신 분은 아래로 연락 주세요/ 공구공 팔공오공 팔구구이</p><p>—「사람을 팝니다 5) 전문</p><p><br></p><p>남철심의 초기 시작(詩作)을 보면 그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을 헤쳐오며 그 과정에서 세련되고 난해하고 파괴적인 시들을 쓴 적이 있다. 이는 어느 한 시인의 창작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탈구조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언어․사유․행위 전반이 점차 탈경계화․탈범주화․탈구조화되면서 기존의 시적 언어로 그러한 현상을 표현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철심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양식으로부터 빠르게 벗어나 독자와의 관계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겸손과 절제를 내세우며 ‘자신’을 싼값에 팔고 있다. ‘착하게 살아온 한평생은 오백 원’의 값어치밖에 되지 않는다. ‘상냥함’은 버거울 수 있으므로 더블로 주고 ‘진심’은 찾기 어려우므로 ‘천원’에 팔려고 한다. ‘학식과 수양은 쓸모없는 물건’이라 값을 부르지 않기로 하고 ‘사랑’은 필요 없는 것이므로 그냥 버리려고 한다. ‘남자’로서의 성은 ‘공짜’로 그 어떤 값어치도 없다.</p><p>이 시에서 시적 화자의 주체는 실제 시인일수도 있고 내포 시인일수도 있으며 혹은 내적 서술자일수도 있다. 시적 화자는 착하고 상냥하고 학식과 수양을 갖춘 남자를 헐값에 팔기로 하고 독자들에게 광고하고 있다. ‘필요하신 분은 아래로 연락 주세요’. 그리고 실제 사용한 적이 있는 시인의 전화번호를 적어두는 섬세함도 보인다. 이 시에서는 시적 화자의 주관적 정서와 상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품격이라 할 수 있는 내재적 수양과 진실한 마음은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능력을 최우선시하는 시대에서는 ‘쓸모없는 물건’으로 간주된다. 사람을 팝니다 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도전한 시로 읽을 수 있다. 이 시는 물질주의와 능력주의 시스템에서 버림을 받기 전에 스스로를 헐값에 팔아버리려고 하는 시적 화자를 자조적으로 그리고 있다. 외적인 성취를 중시하는 현대사회에서 내재적 가치, 즉 도덕적 능력은 스스로 위축되어 나약한 영혼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를 보아낸 시인은 자</p><p>신을 버림으로써 자신을 구하려고 한다. 광고의 대상이 된 독자는 실제 독자일수도, 내포 독자일수도, 혹은 내적(외적) 피서술자일수도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자신의 내면을 세상에 내보이고 자신을 광고하라고 독자에게 권한다. </p><p>이 시에서 지칭하는 ‘사람’은 시적 화자 자신뿐만 아니라 시를 읽고 있는 독자들도 포함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내면의 자아와 끊임없이 싸우며 성장하는 이 시대의 많은 이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외적 성공보다도 내적 성숙에 있음을 시사한다.</p><p>남철심의 시 세계는 ‘소리’에도 민감하다. 그의 대화적 시에는 특권을 가진 중심적인 시적 화자가 존재하지 않고 암묵적인 발화 주체들의 소리가 공존하고 있다. 때로는 상반되는 다양한 소리의 교차도 등장하여 언어의 다성성(多聲性)을 보여주고 있다. 남철심의 대화적 시에는 흔히 여러 가지 소리가 유동적으로 움직이거나 여러 겹의 소리들이 겹치고 충돌한다.</p><p><br></p><p>내가 먹던 것이 나를 먹겠다고/ 소리를 내어도 소리는 소리가 없다/ 목이 메어서 그걸 좀 달라 달라 하는데/ 빈 가마를 가시며 누가 자꾸 울고 있다 / 그리고 그 시간이다/ 누가 죽어가는 총소리/ 대포 소리/ 문명이 돌아가는 기계 소리/ 그런데 지금 세계는 몇 시쯤이냐?</p><p>—「착각된 시간 6) 전문</p> <p>소리와 시간의 의미는 남철심의 시 세계를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다. ‘누가 죽어가는 총소리’, ‘대포 소리’, ‘문명이 돌아가는 기계 소리’가 들려오는 ‘지금 세계’는 ‘몇 시쯤’일까? 이 물음에 대한 여러 가지 해답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겹쳐있음은 분명하다. 우선 착각된 시간 속에 울려 퍼지는 이 소리들은 아크로니적인 관계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시간이다’라는 표현은 세 가지 소리의 시간적 동일성을 말해주고 있다. 시적 화자의 귀에들리는 여러 소리는 문명의 일탈을 암묵적으로 가리키며 그 사이의 관계성, </p><p>즉 시간적 관계와 질서적 관계를 허용한다. 다음, 총소리, 대포 소리, 기계소리의 나열은 근대 과학기술혁명 이후 새로운 유토피아를 이룰 것이라는 판타스마고리아(fantasmagoria)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먹던 것이 나를 먹겠다고’ ‘소리를 내어도 소리는 소리가 없다’, 이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의미한다. 즉 생명 있는 유기체를 대신하여 생명 없는 무기체</p><p>에 의존하는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면서 근대문명은 인간을 전쟁의 참호 속에 빠져들게 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끝으로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상반되는 소리의 교차, ‘누가 죽어가는 총소리’와 ‘대포 소리’는 ‘문명이 돌아가는 기계 소리’와 동시에 존재한다. 상반되는 소리를 내포한 시 세계는 완결성, 통일성, 논리성 등 모놀로그적 시의 창작기법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대항으</p><p>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산발적인 소리들의 통합을 허락하며 모든 것들이 뒤섞여있는 세계를 그리고자 한 대화적 시로 읽을 수 있다. 다른 한 편의 시 역시 소리에 주목하고 있다.</p><p><br></p><p>물역에 서면 물소리만 들리고 나는 없다/ 내 눈에는/ 꽃이 피는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 바람이 돌아와 눈물을 가려주는 소리/ 잃어버린 날 잊은 듯이 나와 물역에 서면/ 부끄럽지 않게 사람으로 서라고/ 물소리로 돌아와 나를 보는/ 어머님의 눈/ 내 마음의 눈</p><p>—「물역에 서면 8) 전문</p><p><br></p><p>이 시에서는 보이는 세계와 들리는 세계의 통합이 이루어진다. 보이는 세계가 현실성이 지배하는 세계라면, 들리는 세계는 잠재성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본 것이다. ‘꽃이 피는 소리’와 ‘물이 흐르는 소리’는 눈에 보이는 자연 세계를 귀로 들으려 하는 들뢰즈식 논리를 재현한 듯 보인다. 들뢰즈는 보이는 세계보다 들리는 세계가 인간의 정서를 더욱 자극하게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물이 흐르는 소리와 같은 현실적 소리의 세계와 꽃이 피는 소리와 같은 잠재적 소리의 세계는 모두 인간의 풍성한 감각들을 일깨워준다. 시적 </p><p>화자는 꽃이 피고 물이 흐르는 물가에 서서 그 광경을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고 담으려고 한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바람이 돌아와 눈물을 가려주는 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된다. ‘소리’의 세계에 몰두한 시적 화자는 ‘물역에 서면 물소리만 들리고 나는 없다’라고 고백한다. 이는 시각의 세계보다 청각의 세계가 인간의 실존을 더 심층적으로 자극하기 때문이다. 예하면 </p><p>그림을 보고 우는 경우보다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더 많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시의 에필로그에서 시적 화자는 ‘물소리로 돌아와 나를 보는’ 어머니의 눈을 연상한다. 소리의 세계, 즉 청각의 세계가 형태의 세계, 즉 시각의 세계와 상호 통합함으로써 시적 화자는 ‘물소리’로 변해버린어머니의 눈길을 애틋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소리의 세계가 실존을 강하게 뒤흔드는 힘을 갖고 있음을 일러준다.</p><p>이 외에도 남철심은 침전 (2003), 자정 (2004), 아침을 위한 서시(2012), 누구였는지 (2016), 여름날의 고독 (2017), 돌의 생각 (2017), 그</p><p>런데 지금 아침이다 (2017), 진달래꽃 (2018), 무언의 사연 (2018), 소리 없는 소리 (2018) 등 시를 통해 대화와 소리를 다양하게 그려냈다. 대화와 소리의 힘에 주목하였다는 것은 독자의 존재를 항상 염두에 두고 열린 공간에서 시 쓰기를 시도해온 시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p> <p>3. 소외된 타자에 대한 시선</p><p>남철심의 시에서 보이는 연대와 유대가 없는 소외된 타자, 그는 누구인가. </p><p>남철심의 대표작 태여난 곳이 타향이어서 , 이는 타자에 대한 비유 또는 상상을 언어․민족․국가를 수반하는 철학적 견지에서 조명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타자의 신분이 언어적 이데올로기를 어떠한 방식으로 구체화하고 있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언어는 흔히 ‘민족’을 요구하고 ‘국가’를 요구한다. 언어제국주의 시대로부터 보편적 언어의 꿈을 이루려고 한 에스페란토어에 이르기까지 언어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왔다. 그럼에도 언어는 민족과 국가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권력 구조를 유지하는 일에 줄곧 앞장서왔다. 남철심은 타자의 시선과 목소리를 깊이 간직하고 있는 시인이다. 타자의 언어를 논할 때, 타자로 존재하는 이들은 주류언어와 비주류언어의 관계 속에서 세 가지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는 주류언어와 문화를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최대한 모어의 사용을 피하는 일이다. </p><p>다른 하나는 타자로서의 입지를 인정하고 모어의 고유성과 정통성을 보유하고 계승하는 일이다. 마지막 하나는 주류언어와 모어를 동시에 수용하면서 이중언어 혹은 다중언어의 사용을 극대화하는 일이다. 방법론적으로 보면 타자에게 있어서 마지막 상황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일 것이다.</p><p>문제는 주류언어와 모어를 동시에 수용하는 상황이 가져온 현실적 불안과 결핍이다. 1960년대 말에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에서 태어나 역동의 시대를 지나온 남철심은 학창시절 모어인 한국어와 국어인 중국어를 동시에 배워온 세대이다. 1980~90년대의 용정은 조선족 집거지로 언어와 정서, 관습 등 면에서 타자성이 충분히 인정받고 적극적인 형태로 표현되었던 시기였</p><p>다. 따라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국어인 중국어는 단 한 과목으로 편성되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모어인 한국어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즉 그 시대의 조선족 사회는 모어를 통하여 세상을 인지하고 사유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워왔다. </p><p>주류언어인 국어와 비주류언어인 모어의 수용이 동등한 선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세대들이 흔히 겪게 되는 언어의 결핍과 불안감을 남철심은 시를 통해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다.</p><p><br></p><p>태어난 곳이 타향이어서/ 어디에 있어도 우리는 他者/ 사투리투성이의 서투른 모국어에/ 모래알처럼 씹히는 대륙의 말/ 쩌거쩌거(这个)하면서/ 말이 말이 아니되고/ 말로 말을 할수 없는 이 답답함/ 내가 나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도저히 내가 되어주지 않는 영원한 불안/ 태어난 곳이 타향이어서/ 누구를 만나도 우리는 他者</p><p>—「태어난 곳이 타향이어서 10) 전문</p><p><br></p><p>이 시에서는 시인의 자화상 느낌이 진하게 배어난다. ‘태어난 곳이 타향이어서 어디에 있어도 우리는 他者’로 시작되는 시는 ‘태어난 곳이 타향이어서 누구를 만나도 우리는 他者’로 끝을 맺는다. 타향에서 태어난 ‘우리’로 지칭되는 이들은 ‘어디’에서 그 ‘누구’를 만나도 변함없이 ‘타자’로 인식되고 있는 아픈 현실을 담담히 고백하고 있다. ‘사투리투성이의 서투른 모국어’, 이는 연변에서 배우고 사용한 조선어 혹은 한국어가 정작 한국에서는 서투른 언어로밖에 인정되지 않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쩌거쩌거 하면서 모래알처럼 씹히는 대륙의 말’, 이는 국어인 중국어 사용에 있어서 어려움과 부족함을 겪고 있는 조선족 사회의 언어적 현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결국 모어인 한국어도, 국어인 중국어도 그 사용과정에서 결핍과 불안을 느끼게 되는 마이너리티 집단의 언어적 상황을 여실히 묘사하고 있다. ‘말이 말이 아니 되고 말로 말을 할 수 없는 이 답답함’, 이는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영역이 주체</p><p>로서의 영역이 아닌 타자로서의 영역임을 나타낸다. 주류사회로 상징되는 틀안에서 마이너리티 집단은 언어적, 정서적 측면에서 항상 소외되고 분리된다. 따라서 타자는 그 결여와 불안에 대해 답답함을 토로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이를 보면 타자 스스로 늘 하나의 선택만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내가 나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도저히 내가 되어주지 않는 영원한 불안’, 여기서 시인</p><p>은 ‘나’의 자아정체성을 두고 고민한다. 소리쳐서 부르는 나는 누구이며 내가 되고 싶은 나는 또 누구인가. 시적 화자는 내가 나로 될 수 없는 ‘영원한 불안’을 호소한다. 이는 시인이 절실히 느끼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p> <p>탈구조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이 대폭 늘어났다. 타자, 경계인, 이방인, 이주민 등 개념은 더이상 마이너리티의 대명사가 아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세계 곳곳에서 협소한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가 다시 대두하면서 탈구조주의 시대도 이미 지나갔다는 한탄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시를 통해 타자의 언어에 대한 우려와 위기감을 드러낸 시인의 창작 의도를 이 맥락에서 살펴보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보편적 의미에서의 중국어와 한국어를 랑그(langue)라고 가정한다면 조선족 사회가 실제 사용하고 있는 ‘중국어’와 ‘한국어(혹은 조선어)’는 파롤(parole)이 된다. 데리다식의 이해에 따르면 랑그는 사회문화적 시스템 혹은 제도로 작동되고 파롤은 차연(différance)의 폭을 인정하며 모방을 꿈꾸는 것이 보편적인 언어 현상이다. 타자의 언어에 대한 이해는 랑그와 파롤의 관계에 있다. 언어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본위의(egoistic) 것이라는 보편성을 지니기도 한다. 타자는 언어사용에 있어서 일반적인 코드(랑그)를 의식하고 모방하는 과정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표현(파롤)을 전개하고 있다. 데리다 연구를 오랫동안 진행해온 남철심은 랑그와 파롤의 관계 속에서 ‘말이 말이 아니 되고 말로 말을 할 수 없는 이 답답함’을 토로한다. 이 ‘답답함’의 근원은 타자로서의 자아정체성에서 비롯된다. ‘사투리투성이의 서투른 모국</p><p>어’와 ‘모래알처럼 씹히는 대륙의 말’은 상대적인 표현이다. 즉 주류언어와의 관계 속에서 타자는 자신의 언어가 ‘완벽하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타자의 언어 모방, 그것은 결코 온전한 모방이 될 수 없는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차연의 형식에 불과하다.</p><p>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중언어 혹은 다중언어의 문제는 수많은 경계인, 이방인, 이민자 등 마이너리티 집단과 그들을 민족 혹은 국가적 시스템으로 포섭한 주류사회 전원이 직면한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의 언어문제를 단순한 랑그와 파롤의 이항대립 구조로 이해하기보다는 다양한 삶의 문맥에서 사용되는 상이한 성격의 언어(파롤)들로 인지하고 복잡한 </p><p>언어구조의 생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랑그의 잠재적 구속력을 피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의 파롤을 혼란시킬 필요도 없다. 차연이 발생하면 그 차이를 받아들이고 다양한 파롤의 의미생성에 더욱 집중해야 한</p><p>다. 비트겐슈타인의 ‘다양한 언어 규칙’12)이 시사한 바와 같이 언어의 세계에는 다양한 국어(랑그)들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같은 국어를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다양한 삶의 문맥에서 다양한 언어(파롤)들이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모국어 역시 마찬가지로 다양한 언어들을 파생시킨다. 타자의 경험을 통해 이중언어 혹은 다중언어의 사용과정에서 발생하는 ‘답답함’과 ‘불안’을 진솔히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남철심의 태어난 곳이 타향이어서 는 의미 깊다. 다만 이 시에서 보여주는 주류언어와 비주류언어에 대한 이항대립적인 구도에서 벗어나 리좀(rhizome) 형태로 존재하는 다양한 언어와 언어 규칙을 살펴본다면 보다 성숙한 통찰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p><p>남철심의 시는 타자의 이름과 정체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시 추석 달 을 보기로 하자.</p><p><br></p><p>흰옷 입은 엄마는 더 고왔지/ 함경도 사투리 &lt;꾸마&gt;도 좋았지/ 보리밭 머리에 그 웃음도 서늘하고/ 우물가 드레박에 마음도 맑았지/ 부르면 오실 같아 잔 들어 곡을 하니/ 잔 속에 달이 밝고 달 속에 엄마 웃네/ 어머니, 지금은 제 이름을 불러 주소이다/ 옛날처럼 그렇게 제 이름을 불러 주소이다/ 붉은 초롱 높이 걸린 추녀 아래/ 오늘 밤 제게는 이름이 없소이다</p><p>—「추석 달 13) 전문</p><p><br></p><p>이 시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묘사한 듯 얼핏 읽히지만 에필로그를 보면 시인은 타자로서의 ‘이름’의 부재에 주목한다. 사투리 &lt;꾸마&gt;를 즐겨 쓰는 함경도가 고향인 어머니는 흰옷을 즐겨 입는다. 이처럼 시적 화자의 정체성은 어머니의 형상을 통하여 발로된다. 추석 달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부르면 오실 것 같아 잔 들어 곡을 하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적 화자는 어머니에게 청을 한다. ‘지금은 제 이름을 불러 주소이다’, ‘옛날처럼 그렇게 제 이름을 불러 주소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부르는 추모곡을 연상케 하는 </p><p>대목이지만 단순한 추모에 그치지 않는다. 시적 화자는 ‘이름의 부재’를 호소한다. 자아의 신체성과 사회적 이미지를 동일시함으로써 만들어낸 것이 ‘이름’이라면 인간은 이를 매개물로 하여 정체성을 획득한다. ‘이름’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지시(bedeutung, reference)’의 기능이라면 다른 하나는 ‘의미(sinn, sense)’의 기능이다. 시적 화자가 실제 시인이라고 가정한다</p><p>면 지시의 기능을 행사하는 이름은 ‘남철심’이다. 그는 중국 조선족 시인이며, 일본에서 탈구조주의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자이다. 또한 타자 혹은 경계인으로 불리우는 마이너리티 집단에 속하는 이방인이다. 이 모든 것은 ‘남철심’이라는 이름이 행사하는 의미적 기능이다. 정작 시인은 스스로의 ‘이름의 부재’에 호소한다. 그가 불리우고 싶어 하는 이름은 지시적 기능의 이름일까 아니면 의미적 기능의 이름일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름을 부여한 이는 시인 자신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라는 점이다. ‘어머니, 지금은 제 이름을 불러 주소이다’. 시인은 자신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최초의 의미를 생성시킨 이가 어머니임을 알고 있다. 하여 ‘이름의 부재’라는 현실에 직면하였을 때, 원초적인 자아로 돌아가 이름과 의미를 처음 부여해준 어머니를 애타게 불러본다. 에필로그에서 시인은 ‘붉은 초롱 높이 걸린 추녀 아래’에서 ‘오늘밤 제게는 이름이 없소이다’라고 토로한다. 이는 현재 시적 화자가 타자의 </p><p>신분으로 원초의 의미론적 ‘이름’을 상실한 상태임을 시사한다. ‘붉은 초롱’이 걸려있는 공간은 시적 화자에게 타자의 ‘이름’을 선사했고 그와 동시에 원초의 의미론적 기능도 변화를 강요받았다. 시인은 의미적 기능의 이름이 달라지면 그에 따라 지시적 기능의 이름도 변화를 요구받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는 타자로서의 존엄이 부정당하는 과정임을 깨닫고 있다. 함경도가 고향인 어머니에 대한 추모는 결국 현재의 자아를 넘어서 원초의 자아로 회귀하기 위한 기도인 셈이다. 아울러 이는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완성하기 위한 시인의 소망이기도 하다.</p><p>이같이 시인이 토로하는 ‘이름의 부재’는 더 나아가 자아정체성의 혼돈을의미한다. 남철심의 다른 한 편의 시를 보기로 하자.</p><p><br></p><p>만들어진 대로/ 생긴 대로/ 주어진 대로/ 갈 수 있는 길을 가기다/ 돌아서도/ 꿈은 도망가지 않는다/ 별을 볼 수 있는 눈으로/ 그것만은 못 본다/ 그러나 더는/ 크지도 말자/ 세상이 좁아진다</p><p>—「여섯 번째 손가락 14) 전문</p> <p>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여섯 번째 손가락’을 그리고 있다. 정상적인 생체리듬을 파괴하는 작용을 하는 여섯 번째 손가락은 말 그대로 불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만들어진 대로’, ‘생긴 대로’, ‘주어진 대로’, ‘갈수 있는 길을 가기다’라고 여섯 번째 손가락의 존재를 인정하고 격려한다. </p><p>그러나 세상은 불필요한 존재에 호의적이지 않다. 먼 하늘가의 별까지 볼 수 있는 세상의 눈이지만 가까이에 있는 ‘그것만은 못 본다’. 시인은 세상의 눈밖에 난 여섯 번째 손가락을 향해 말한다. ‘꿈은 도망가지 않는다’, ‘그러나 더는 크지도 말자’. ‘여섯 번째 손가락’은 불필요한 존재로 취급되는 타자에 대한 은유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세상의 그 어떤 구조 혹은 체계 속에 갇히게 된다. 인간은 개체로 존재하지만 관계에 의해 규정되고 재정의된다. </p><p>근대에 들어서면서 이데아와 신의 자리에 인간이 놓이게 되지만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의 시대를 겪으면서도 인간의 동일성, 코드화, 주체화, 고착화 등 기준은 여전히 뿌리 깊다.</p><p>오늘날까지 차이의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생성을 가로막는 사회적 시스템은 단 한 순간도 작동을 멈춘 적이 없다. 노마드의 철학자 들뢰즈가 리좀, 발산(divergence),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 등 개념을 제기하여 주체와 대상 사이의 구분을 없애고 특정된 낙인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 지도 거의 반세기가 되어간다. 하지만 현재를 사는 타자는 아직도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여있다. 타자에게 있어서 성장의 공간, 즉 자신의 꿈을 마음껏펼칠수 있는 가능성의 장(場)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더는 크지도 말자’라고 하면서 자신을 고착화시키려고 한다. 에필로그에서 시적 화자는 ‘세상이 좁아진다’라는 표현으로 다섯 개의 손가락과 달리 굳이 존재할 필요가 없는 ‘여섯 번째 손가락’의 스스로의 정지를 권유한다. 시인은 불필요한 존재, 즉 타자의 성장이 기존의 것을 해체시키고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일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시 텍스트는 스스로 성장을 멈추어버리는 일, 차이의 가치를 부정하는 일, 새로운 생성을 막아버리는 일, 그것만이 고착화된 세계에서 ‘불필요한’ 타자가 선택하고 수행할 수 있는 일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p><p>남철심 시에서 보이는 시적 화자는 항상 작고 여리고 소외당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시 낯선 고향 (2017)에서 ‘아무도 닮지 않아 갈 곳이 없는’ 시적 화자는 ‘아무도 없는 고향에 돌아와/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잃는다’. 아무도 닮지 않아 갈 곳이 없다는 표현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타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시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 좁쌀꽃 (2018)에서는 ‘큰 것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야리야리 흔들리는 노오란 좁쌀꽃’이 ‘작아도 가볍잖은 생의 무게를 고스란히 껴안고’ 있는 소외당한 이들을 의인화하고 있다. 주류사회에 내포되지 못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이지만 ‘작아도 가볍잖은 생의 무게’를 지니고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이들에 대한 찬사와 격려를 읽어낼 수 있다.</p><p>이 외에도 남철심은 소외된 타자에 대한 시선을 담은 여러 편의 시를 써냈다. 이 사람은 (2003), 우리에게 하늘이 있습니까 (2007), 내가 돌아오던 날 (2008), 눈 감고 마주 보며 (2008), 다른 사람의 죽음 (2012), 출근(2014), 보이는 것은 (2016), 불안한 예감 (2017), 리좀 (2018), 도망(2018), 별찌 (2019) 등 시를 통해 타자의 언어, 이름과 정체성에 대한 독특한 시 세계를 그려냈다.</p> <p>4. 죽음과 삶의 상징계</p><p>시인 남철심은 스스로 고독한 타자의 삶을 선택했다.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에도,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수여 받은 후에도, 주류사회에 입성할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는 가난한 시인의 길을 고집했다. 남철심의 시 세계를 들여다보면 고독과 비애가 잔잔히 흐르고 있다. 시적 테마와 창작기법은 상이하지만 시 전반에 배어있는 외로운 자아에 대한 묘사는 한결같다. </p><p>타자의 타자성에 직면할 때, 타자는 흔히 고독을 선택한다. 남철심이 고독을 묘사하는 기법은 특이하다. 그는 죽음과 삶의 상징계에 대한 은유를 통하여 자신의 고독을 여실하게 작품에 담아냈다. 그의 죽음에 관한 시 3부작을 보기로 하자.</p><p><br></p><p>① 나 죽으면 바람 불겠지/ 나 죽어도/ 좋은 아침 깨어있겠지/ 부르고 싶은 이름/ 목 메인채/ 노을은 어느새 그리움의 향/ 나 죽으면/ 다시 바람 바람 불겠지</p><p>—「나 죽으면 바람 불겠지 16) 전문</p><p><br></p><p>② 누군가처럼/ 나도 열심히 죽고 있다/ 한번도 욕해보지 못한 입을 다물고/ 생각은 벌써 저쪽으로 가 있다/ 내가 죽어있는 것을/ 누구도 증명할수 없다/ 대신 소리쳐줄 눈꺼풀도 없이/ 황금의 빛발처럼/ 어둠이 오고 바람이 펄럭이고/ 기울어진 문짝 뒤에 숨어서/ 하나도 나를 닮은데가 없는/ 죄꼬만 계집애가 울어줄 때까지/내가 죽어있다는 것을/ 나도 모르고 있었다</p><p>—「죽은 자의 말 17) 전문</p><p><br></p><p>③ 끝내 나는 죽었다/ 남은 그림자는/ 붕대를 감고/ 지팡이에 기대선다/ 발이 지나가는 소리가/ 바람의 꽁무니를 따라/ 지옥까지 들려온다/ 피가 없고 백골이 보이지 않는/ 끝없이 서늘한 세상에/ 나는 서서 식어있다</p><p>—「존재의 무 18) 부분</p><p><br></p><p>죽음을 다루는 시에 있어 고독과 실존의식의 문제, 즉 양자의 경계에 대해 시인은 예민한 자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시적 텍스트에서 ‘죽음’이라는 은유는 실로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에는 분명 시작이 있고 과정이 있으며 마감이 존재한다. 인용 ①은 남철심의 ‘죽음의 시’ 3부작의 시작을 알리는 텍스트로 간주할 수 있다. ‘나 죽으면 바람 불겠지’, 그리고 ‘나 죽어도 좋은 아침 깨어있겠지’, 이는 ‘죽음’을 가정하는 시적 화자의 내면 의식을 ‘바람’과 ‘아침’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인간이 죽음과 화해하지 못할 </p><p>때 죽음은 불안이 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오히려 생존의 양식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죽음’을 가정하는 시적 화자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아침과 바람 부는 날을 떠올린다. ‘죽음’을 앞두고 ‘부르고 싶은 이름’, ‘그리움’의 대상은 누구일까. 이는 시적 화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중요한 원형, 즉 상징계 안에서 만나게 되는 자기(self)의 진정한 모습을 가리킨다. 완성된 인격체로 거듭나기 위하여 인간은 자신의 본성 즉 자기(self)를 깨달아야 한다. </p><p>융이 자기(self)를 인생의 궁극적 목표 혹은 신성한 본성이라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을 가정하는 첫 번째 시에서 시인은 이처럼 원초적 자아에로의 회귀를 내재적 사유의 밑바탕에 깔아둔다.</p><p>인용 ②는 남철심의 ‘죽음의 시’ 3부작의 과정을 보여준 텍스트로 간주할 수 있다. 인용 ②에서 우선 주목할 것은 ‘내가 죽어있는 것을/ 누구도 증명할 수 없다’는 시적 화자의 존재론적 고독이다. ‘누군가처럼 나는 열심히 죽고’ 있지만 ‘생각은 벌써 저쪽으로 가 있다’. ‘나’의 ‘죽음’을 지켜보는 시적 화자의 실존의식은 이미 먼 곳에 가 있다. 존재론적 고독은 세계로부터의 근본적</p><p>인 고립을 의미한다. ‘내가 죽어있다는 것을/ 나도 모르고 있었다’, 이는 무서운 고독과 고립에 대한 시인의 처절한 내적 고백이다. ‘한 번도 욕해보지 못한 입’은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한 삶을 살고 있는 타자의 언어의 부재 혹은 소리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 시에는 자신의 죽음도 의식하지 못한 채, 죽어있는 ‘나’를 발견한 시적 화자의 존재론적 고독에 대한 두려움이 밑바탕에 깔려 </p><p>있다. 시적 화자는 이처럼 상징계 안에서 자신의 ‘죽음’을 경험한다. ‘어둠’, ‘바람’, ‘기울어진 문짝’, ‘죄꼬만 계집애’의 울음, 이 모든 것은 시적 화자의 ‘죽음’을 알려주는 매개물이다. 이를 통해 시적 화자는 잠재되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의 ‘죽음’을 지켜본다.</p><p>인용 ③은 ‘죽음’의 마감을 보여주는 시 텍스트로 읽을 수 있다. 시에서 ‘그림자’, ‘붕대’, ‘지팡이’, ‘발’, ‘바람’, ‘지옥’, ‘피’, ‘백골’, ‘서늘한 세상’ 등</p><p>은 모두 ‘죽음’이라는 시어를 느슨한 매개로 하여 연결되어있다. 이 시어들이 연쇄를 이룬 논리적 이유를 찾기는 쉽다. ‘붕대’, ‘지팡이’, ‘발’, ‘피’, ‘백골’이 조응의 한 축을 이룬다면 ‘그림자’, ‘바람’, ‘지옥’, ‘서늘한 세상’이 한 계열을 이룬다. 즉 실재와 허구의 세상이 교차되어 상호 중화되거나 흡수되고 있다. </p><p>그 속에서 상처의 치유가 절실한 시적 자아는 끝내 ‘죽음’을 맞이했고 ‘서서 식어있다’. </p><p>‘끝내 나는 죽었다’, 남철심의 ‘죽음의 시’ 3부작의 끝을 보여주는 강렬한 첫 구절이다. ‘나는 죽었다’라는 은유는 살아있는 시적 화자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 표현은 데리다식 은유로 해석할 수 있다. -목소리와 현상에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죽음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발언하는데 구조적으로 필수적이다, (중략) ‘나는 살아있다’라는 언표는 나의 죽어있음을 수반하며, 그것의 가능성은 내가 죽어있을 가능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거꾸로도 그렇다. 이것은 포우(E.A.Poe)의 기이한 이야기가 아니라 언어의 평범한 이야기이다. 위에서 우리는 ‘나는 존재한다’에서 출발해서 ‘나는 죽을 자로 존재한다’에 이르렀던 적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나는 죽어있다’로부터 ‘나는 존재한다’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19) 시적 자아는 자신의 내성과 독백</p><p>을 듣는 고독한 주체로 기능한다. 데리다식 논리에 따르면 ‘나는 죽었다’라는 언어표현은 ‘나는 살아있다’라는 의미를 구조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즉 ‘나는 죽었다’라는 말 자체가 살아있음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데리다는 강조하고 있다. 데리다 연구자로 오랫동안 이론공부를 해온시인 남철심은 이를 쉽게 간과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시적 텍스트가 보여주</p><p>는 ‘죽음’은 역설적으로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p><p>바로 이런 점에서 볼 때, 죽음의 철학은 생의 철학을 전제로 한다. 죽음과 생의 상징계를 의미하는 경계선에는 인간의 존재 방식 혹은 생존 양식을 어떻게 형성하느냐는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 죽음의 철학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생의 철학 또한 필수적이다. 따라서 남철시의 시는 ‘죽음’이라는 시어만 다루고 있지 않다. 다음 시를 보기로 하자.</p><p><br></p><p>아침/ 살아있다면 꽃을 보시라/ 온몸으로 피어오르는/ 부드러운 힘의 아름다움을 보시라/ 꽃을 보듯이 스스로를 보시라/ 지상의 유일한 존재의 신비를 느끼시라/ 꽃은 꽃이어서 향기롭듯이/ 당신은 당신이어서 아름다우시라/ 슬픔은 밖에서 흘러드는 물/ 흘러오는 대로 흘러 보내시라/ 남을 보지 않으면 내가 비어지고/ 우주의 </p><p>방대함이/ 내 속으로 흘러드니라/ 살아있다면 나를 보지 말고/ 아름다울 당신을 보시라</p><p>—「살아있는 의미 20) 전문</p><p><br></p><p>이 시는 살아있는 의미 를 되새기는 생의 철학적 사유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선 시는 시작을 의미하는 ‘아침’으로 운을 뗀다. ‘살아있다면 꽃을보시라’, 그리고 ‘꽃을 보듯이 스스로를 보시라’.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인 나 자신을 꽃 보듯이 바라보라고 시적 화자는 권유한다. ‘꽃은 꽃이어서 향기롭듯이’, ‘당신은 당신이어서 아름다우시라’. 이 구절의 함의는 모든 꽃이 저마다 향기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듯이 모든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존재가치와 존엄성을 부여받고 있음을 말해준다. 혹여 슬픈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밖에 흐르는 물 같은 존재일 뿐, ‘흘러오는 대로 흘러 보내시라’고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도 보내준다. 인간은 저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와 같은 존재임을 피력하며 몸속으로 방대한 기운이 흘러든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짐멜의 ‘생의 초월’이나 베르그송의 ‘생의 비약’과 같은 개념이 내포한 생의 철학으로서의 기본적 발상을 엿볼 수 있다. 생을 유지한다는 것은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의 과정이다. 이 시는 자신과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당신’으로 거듭날 것을 권유하고 격려한다. 전반 시에 흐르는 ‘자기생산’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능동적인 삶을 사는 생의 지혜를 전해주고 있다. </p><p>마지막 구절이 특히 인상 깊다. ‘살아있다면 나를 보지 말고/ 아름다울 당신을 보시라’. 즉 인간의 ‘살아있는 의미’는 타자에 대한 부적절한 혹은 강요당한 모방이 아닌 자기 내부로부터의 자발성에 의한 추구임을 보여주고 있다. </p><p>이처럼 시 텍스트는 단 하나의 소중한 존재인 ‘당신’의 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돌이켜볼 수 있는 사색의 공간을 제공해주고 있다.</p><p>이 외에도 남철심은 나 아직 살아있는데 (2002), 우리들의 슬픔 (2003), 무슨 말 (2003), 어쩌다 클래식 (2017), 나무에게 (2018), 벚꽃 늘어진 골목길에서 (2017), 살아남은 자의 비애 (2018), 시인은 죽어라 (2019), 현실에 대한 쟁론의 시 (2020) 등 시를 통해 죽음과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해학적으로 담아냈다.</p> <p>5. 나오며</p><p>타자 혹은 경계인들의 가장 큰 특성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지나치게 민감하다는 점이다. 물론 그럴수 밖에 없는 외재적 환경도 하나의 탐구대상이지만 그보다 민감한 내재적 발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분석이 우선이다. 남철심의 시는 가벼운 듯 보이지만 무엇보다 무겁고, 폐쇄된 공간에서 숨을 쉬는 듯 보이지만 무엇보다 열린 공간을 지향한다. 그의 시에는 고독과 비애가 가득 차 있는 듯 보이지만 그 가운데는 삶에 대한 열망과 간절함이녹아있다. 죽음을 테마로 한 텍스트이지만 생에 대한 열의를 보아낼 수 있고, 대화를 주제로 한 시에서 소리의 부재가 느껴진다. 남철심의 시에 등장하는 시적 화자는 대부분 소외된 타자들이다. 시인은 그들의 고뇌와 상처, 아픔과 번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여리지만 단단한 것, 소외당하지만 강렬한 것, 사라지고 있지만 기억되는 것, 이것이 바로 남철심의 시 세계가 보여주는 타자의 모습, 즉 소외된 타자의 타자성이다.</p><p>남철심이란 시인에게 시작(诗作)은 고통을 덜거나 감내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무상의 슬픔을 유상의 즐거움으로 바꾸는 행위의 일환이다. 시인은 자신의 경험세계의 흔적을 지울 수 없는 숙명으로 알고 있기에 자아정체성을 굳이 감추려 하지도, 지우려 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날 것, 이를테면 불안한 정서와 위기감, 스멀스멀 밀려드는 고독과 절망을 시에 그대로 담고 있다. 그럼에도 결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희망과 신념, 해탈과 변화 등 내재적 초월과 비약을 은유적인 시적 언어로 담담히 표현해내고 있다.</p><p>남철심의 시 세계에 대한 주목은 한국학계에도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오늘날 여전히 한글로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조선족 시인 혹은 소설가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들의 작품활동은 탈경계적인 사유방식과 생활체험을 동반한다. 중국 조선족 문단의 움직임에 대한 깊이 있는 학문적 접근과 이해는 한국학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연구과제이다. 이들의 문학 텍스트는 해외 한국문학의 한 부분이고 소중한 학문적 가치가 있는 자료임에 틀림 없다. 따라서 중국 조선족 문단의 전모를 파악하고 특히 지금까지 관심과 주목을 크게 받지 못한 시인 혹은 작가들에 대한 발굴작업은 더욱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민족학’으로서의 한국(조선)학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조선족 학계의 학문적 정체성 및 조선족 공동체 전반의 문제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뚜렷한 연구성과를 거두었지만 조선족 문단의 작품연구 및 텍스트분석은 아직까지 한국학계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하고 있다. 언어적 혹은 정서적 공동체 내부의 인간적 결속 및 유대감 증진, 그리고 해외 한국학 연구의 다원적 가치체계의 확립을 위하여 한국 내 ‘중국 조선족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p> <p>▌참고문헌</p><p>남철심, 봄이다 , ‘문학이란 무엇인가’, blog.naver.com/hana6872, -중국조선족 시문학선집, 2017년 3월 30일.</p><p>남철심, 사람을 팝니다 , ‘문학이란 무엇인가’, blog.naver.com/hana6872, -중국조선족 시문학선집, 2016년 7월 14일.</p><p>남철심, 착각된 시간 , ‘문학이란 무엇인가’, blog.naver.com/hana6872, -중국조선족 시문학선집, 2020년 2월 27일.</p><p>남철심, 물역에 서면 , ‘문학이란 무엇인가’, blog.naver.com/hana6872, -중국조선족 시문학선집, 2020년 3월 19일.</p><p>남철심, 태어난 곳이 타향이어서 , ‘문학이란 무엇인가’, blog.naver.com/hana6872, -중국조선족 시문학선집, 2014년 9월 18일.</p><p>남철심, 추석달 , ‘문학이란 무엇인가’, blog.naver.com/hana6872, -중국조선족 시문학선집, 2020년 3월 18일.</p><p>남철심, 여섯번째 손가락 , ‘문학이란 무엇인가’, blog.naver.com/hana6872, -중국조선족 시문학선집, 2020년 3월 23일.</p><p>남철심, 나 죽으면 바람 불겠지 , ‘문학이란 무엇인가’, blog.naver.com/hana6872, -중국조선족 시문학선집, 2012년 7월 6일.</p><p>남철심, 죽은 자의 말 , ‘문학이란 무엇인가’, blog.naver.com/hana6872, -중국조선족 시문학선집, 2017년 3월 16일.</p><p>남철심, 존재의 무 , ‘문학이란 무엇인가’, blog.naver.com/hana6872, -중국조선족 시문학선집, 2020년 2월 27일.</p><p>남철심, 살아있는 의미 , ‘문학이란 무엇인가’, blog.naver.com/hana6872, -중국조선족 시문학선집, 2020년 3월 19일.</p><p>미하일 바흐친(Mikhail Mikhailovich Bakhtin), 望月哲男․鈴木淳一 역, -</p><p>도스토예프스키의 시학의 제문제, </p><p>ちくま学芸文庫, 1995.</p><p>미하일 바흐친(Mikhail Mikhailovich Bakhtin), 전승희 외 역, -</p><p>장편소설과 민중언어, 창작과 비평사, 1988.</p><p>질 들뢰즈(Gilles Deleuze), 財津理 역, -</p><p>차이와 반복, 河出書房新社, 1992.</p><p>질 들뢰즈(Gilles Deleuze)․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 宇野邦一 외 역, -</p><p>천 개의 고원(Mille Plateaux), </p><p>河出書房新社, 1994.</p><p>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이영철 역, -</p><p>철학적 탐구, 책세상, 2006.</p><p>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林好雄 역, -</p><p>목소리와 현상, ちくま学芸文庫, 200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