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8.</p><p>깊은 담벽으로 겹겹히 둘러싸인 울안, 노비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이곳으로 다시 걸음을 들인다. 무거운 마음만큼이나 발걸음도 무겁다. 송씨부인의 추상어린 얼굴을 마주했을 때는 기어이 한숨이 나온다. 같이 온 여현은 사랑방으로 가버리고 하필 나 혼자 안채 뜰안에 서있다. 아까 문간에 들어섰을 때부터 마당쇠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p><p><br></p><p>“저어, 마님께서 아씨더러 바로 안채로 오시랍시유.”</p><p>“내당에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p><p>“직접 오시라는데유.”</p><p>“알았다.”</p><p><br></p><p>무심코 여현쪽을 보았더니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혼자 사랑채로 향한다. 밖에서와 집안에서 저리 딴판일줄은…괜한 서운함이 밀려오면서 기분이 언짢아지려 한다. 아까 포목점에서부터 그랬다. 내가 무슨 못할 말을 했다고 그는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리더니 마차가 우리를 데리러 올 때까지 일언반구도 없다. 밴댕이 양반이 변덕스럽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내쪽에서 왜 그런지 캐어묻기는 싫었다. 말 안하겠으면 안하라지! 누가 누굴 겁낸다고.</p><p><br></p><p>“그래, 친정엔 잘 다녀왔느냐.”</p><p><br></p><p>나는 시선을 들었다. 그제야 송씨부인의 뒤에서 향단이 손가락을 비틀며 서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 내가 외박을 했으니 저 착한 아이가 친정에 갔다고 둘러댔는 모양이다. 하지만 송씨부인이 누구인가. 그녀는 가마도 없고 따라간이 하나 없이 내가 그 먼 길을 다녀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리 만무하다.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p><p><br></p><p>“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어머님.”</p><p><br></p><p>송씨부인이 매섭게 나를 노려보았다. </p><p><br></p><p>“황송? 지금 전혀 황송한 자세가 아니지 않느냐!”</p><p>“그럼, 제가 무릎이라도 꿇을까요?”</p><p><br></p><p>반문을 했을 뿐인데 송씨부인이 눈을 흡뜨면서 뒷목을 잡는다. 이제 보니 현대의 내 엄마보다도 더 멘탈이 약하다. 고작 이정도 가지고.</p><p><br></p><p>나는 섬돌 아래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자세를 원하면 그리 해주지 뭐. 어차피 겹겹히 옷을 껴입어서 무릎이 아픈 것도 아닌데.</p><p><br></p><p>“저는 친정에 간 것이 아닙니다.”</p><p>“뭐? 뭣이?”</p><p><br></p><p>송씨부인이 꺽꺽거렸고 향단은 안절부절 못하며 나를 향해 눈짓을 했다. 나는 못본 척 시선을 내려버렸다.</p><p><br></p><p>“저는 친정에 간 것이 아니고 명월관으로 갔었습니다.”</p><p>“명…명월관?”</p><p><br></p><p>송씨부인 역시 명월관의 이름은 익히 들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난 듯 그녀가 언성을 높였다.</p><p><br></p><p>“그건! 기방이 아니더냐!”</p><p>“네, 그러하옵니다.”</p><p>“너…너…어찌 사대부 가문의 부인네가…”</p><p>“사대부 가문의 남정들은 쉽게 출입을 하는데 남정을 찾아나선 부인들은 왜 출입을 못한단 말입니까.”</p><p>“네 말인즉슨, 여현이 명월관에 갔다는 거냐?”</p><p>“네. 그것도 한두번은 아닐테구요. 어머님이 왜 모르시는지 저는 그게 더 이해가 안갑니다.”</p><p><br></p><p>서당 김성립이 유독 기방 출입이 잦았다는 소문이 저자거리에 짜한데 송씨부인은 전혀 처음 듣는 듯한 얼굴로 망연하게 나를 쳐다보았다.</p><p><br></p><p>“여, 여현이…”</p><p>“일전에 서방님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접에서 공부를 하셨을 때도 명월관 출입이 잦았다고 들었습니다. 하여 저는 옥당에 계시는 서방님의 전정이 염려되어 어제 명월관에 찾아갔던 거구요. 향단이 말릴가바 친정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선처 부탁드립니다.”</p><p><br></p><p>송씨부인은 우멍한 시선을 들어 나를 보았다.</p><p><br></p><p>“연후엔.”</p><p>“네?”</p><p>“찾아가서 뭐라 하였느냐?”</p><p>“제가 남장을 하였기에 명월관에선 제 신분을 알지 못합니다. 가문을 어지럽히는 일은 없었사오니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저는 다만 명월의 안색을 한번 보고자 함이었으니…”</p><p>“곱더냐?”</p><p>“네?”</p><p>“명월이 말이다. 소문 그대로더냐? 나비같고 꽃 같고 저 하늘의 달도 무색해서 얼굴을 감추어 명월이라 하였다 들었다. 소문대로 곱더냐?”</p><p><br></p><p>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뭐지? 이 반응은…</p><p><br></p><p>“음…글쎄요.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고 취향이라는 게 있어서 감히 단언할 수는 없으나, 무릇 사내라면 누구나 마음이 움직이겠지요.”</p><p><br></p><p>송씨부인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나는 속으로 아차 하고 바로 말을 고쳤다.</p><p><br></p><p>“허나 정숙함에 있어서 어찌 명문가의 처자들을 따라오겠습니까. 서방님 역시 벗들을 따라 소일할 따름이고 굳이 명월관에 머물지는 않았습니다.”</p><p><br></p><p>그래도 송씨부인이 아무 말 없어서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찬찬히 보았다. 평소의 근엄한 표정은 씻은 듯 사라진 채 그녀가 망연한 얼굴이 되어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향단을 쳐다보았더니 상관 말라는 듯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한동안 그린 듯이 앉아있다가 송씨부인이 입을 열었다.</p><p><br></p><p>“들어가보거라.”</p><p>“네에?”</p><p><br></p><p>이번에는 정말 과중한 처벌이 내려지겠거니 했는데 전혀 뜻밖의 말이어서 나는 저도 모르게 또 반문을 했다. 송씨부인은 더 말할 기력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고 향단이 급히 다가와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허리를 굽혀 송씨부인과 인사를 하고 나올 때까지 그녀는 그대로 숙연하게 앉아있었다. 나는 가슴 한가득 의문을 품고 안채를 물러나왔다.</p><p>……</p><p><br></p><p>“참으로 다행이와요.”</p><p><br></p><p>내게 옷을 갈아입히며 향단이 가슴을 내리쓸었다.</p><p><br></p><p>“쉰네는 아씨가 봉변을 당하는가 해서 손에 땀을 쥐었사와요. 어찌 그리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십니까? 평소 같으면 마님께서 언녕…”</p><p>“언녕 뭐? 곤장이라도 치셔?”</p><p><br></p><p>나는 무거운 가채를 내리고 조금 길어진 머리카락을 귀뒤로 쓸어넘겼다. </p><p><br></p><p>“이 집은 이게 문제야. 대감님께선 너그러우신데 마님께서 너무 엄하게 아랫사람을 다스리니 다들 기를 펼 수가 있어야지. 사람은 많은데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하고. 대체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질 않아.”</p><p>“아씨, 아씨님도 조용한 걸 좋아하셨사와요.”</p><p>“나? 나도 그랬다고?”</p><p><br></p><p>거울을 바라보며 내 코를 가리키자 향단이 고개를 끄덕였다.</p><p><br></p><p>“그리고 몇해를 사이두고 두 아기씨를 잃으셨사와요. 집안에 어찌 웃음이 있고 소리가 나겠습니까.”</p><p>“그러니까 서방님이 내당에 오질 않는 거야.”</p><p><br></p><p>나는 거울속의 얼굴을 들어다보며 말했다.</p><p><br></p><p>“부부란 그래. 그 불행이 나 한사람의 슬픔이 아니야. 지아비로서, 아비로서 슬픔도 있었을 텐데 누가 그걸 헤아려주냐 말이다. 나라도 들어오고싶지 않았겠다.”</p><p><br></p><p>문득 등뒤가 조용해져서 나는 고개를 들었다. 향단이 허리를 접은 채 방을 물러나가는 게 보였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거울속의 내 얼굴뒤로 하나의 훤칠한 인영이 다가왔다. 나는 흠칫 놀라 머리를 돌렸다.</p><p><br></p><p>“서방님…”</p><p>“사랑채에서 아버님을 뵙고 바로 안채로 갔는데 당신이 없었소.”</p><p><br></p><p>여현은 얼굴 한가득 의혹을 담고 나를 보았다.</p><p><br></p><p>“대체 무슨 수로.”</p><p><br></p><p>무슨 수로 송씨부인을 구워삶았느냐 하는 그의 못다한 뒷말을 나는 알아차렸고, 그 말뒤에 가려진 그의 걱정어린 마음이 나를 살짝 기쁘게 했다.</p><p><br></p><p>“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명월의 얘기를 조금 더 묻더니 그만 가보라 하더이다.”</p><p><br></p><p>여현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일어나서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의 시선이 내가 벗어둔 가채에 머물렀다가 다시 내 머리에 와 닿았다. 살짝 길어서 귀를 덮긴 했어도 여전히 짧은 내 머리카락에 닿은 그의 눈길에서 깊은 곤혹이 스쳐지나갔다.</p><p><br></p><p>“당신…”</p><p>“아, 이거.”</p><p><br></p><p>나는 손을 올려 이마에 내리드리운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넘겼다.</p><p><br></p><p>“일전에 가위질을 잘못 해서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어머님이 보시고 화내실가바 향단이 이런 가채를 만들어줬구요.” </p><p><br></p><p>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서 나는 그의 앞으로 가서 가채를 들어올렸다.</p><p><br></p><p>“보기 흉하다면 다시 이걸 쓰지요…”</p><p><br></p><p>문득 그가 나의 손목을 잡아 내 행동을 제지시켰다. 평소의 부드러운 행동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완력이 느껴졌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향단이 물러갈 때부터 두근거리던 심장이 드디어 주체하지 못하고 뻐근하게 전율했다. 어찌하란 말인가. 너무 빠르다. 빨라서 아직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은데, 내겐 이 남자를 거절할만한 명분이 없다.</p><p><br></p><p>“서방님…”</p><p>“희.”</p><p><br></p><p>그가 낮게 불렀다. 그의 눈빛이 한결 짙어졌다. 어떡하지…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고 할까? 아니면 달거리가 왔다고 할까? 그보다도 몇일전 그는 분명 내 허락 없이는 날 가까이하지 않는다 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사람이 지금 왜 갑자기 내게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려 드는 걸까.</p><p><br></p><p>“저…저는…”</p><p>“당신 뭐야?”</p><p><br></p><p>그가 나를 잡았던 팔을 확 놓았다. 순간 머리속이 윙 울리면서 나는 깊은 착각에서 깨어났다. 아, 변덕스러운 게 아니라 사이코패스구나, 이 남자.</p><p><br></p><p>“당신이 뭔데 나라가 망하길 바라는 거야? 당신이 뭔데 재상이나 장수가 적임자가 없다고 비웃어?”</p><p><br></p><p>그가 내게로 바싹 다가들었다. 그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고 그의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 </p><p><br></p><p>“술…술 마셨어요?”</p><p>“희, 아무리 그래도 난 당신 믿었어. 어머님이 아무리 당신 헐뜯어도, 저자거리에 그 어떤 해괴한 말이 돌아도, 심지어 당신이 내 앞에서 아무 꺼리낌 없이 손곡선생 말을 했어도 난 당신 믿었어. 당신은, 그래도 당신은 나와 같은 생각인 줄 알았어. 나와 같은 세상을 그리는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p><p><br></p><p>그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았다.</p><p><br></p><p>“어떻게…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가 있어? 조선은…이곳은 정말 당신에겐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드는 나라에 불과한 건가. 마찬가지로 나 김성립도 당신에겐, 만나지는 말아야 할 사람에 불과한 건가…”</p><p>“여현.”</p><p>“난 당신에겐 죽어도 만나기 싫은 사람이었나. 그렇게 당신 찾아 헤맸어도…결국은, 결국은 하늘이 내게 이런 벌을 내리는 건가…”</p><p><br></p><p>갑자기 그의 말이 멎었다. 한껏 움츠러있던 나는 그제야 그를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서안에 두 팔을 올리고 얼굴을 기댄 채 그가 잠들어 있었다. 가까이 가서 손을 얼굴에 갖다 대었더니 불덩이처럼 뜨겁다. 단지 얼굴에 티가 안났을 뿐이지 술을 마신 게 틀림없었다.</p><p><br></p><p>“무슨 남자가 술이 이리 약해…”</p><p><br></p><p>사랑채에 들여 일각밖에 안되었으니 끽해야 김첨대감이 권하는 약주 한잔의 시간이다. 그런데 원체 술에 약하다보니 그 미열에 이리 횡설수설하다 잠든 게 분명했다. 나는 그를 끌어다 자리에 눕히려다가 단념하고 말았다.</p><p><br></p><p>이불을 끌어다 그의 몸에 덮어주고 그로 하여금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취하게 해주었다. 그리고는 서안에 두팔을 올려 얼굴을 괸 채 나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깊히 감긴 두눈, 고르런 숨소리, 살짝 도홍빛이 돌기 시작하는 입술과 유려한 턱선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머리를 흔들었다.</p><p><br></p><p>“정신차려, 최준희.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넌 빨리 현대로 되돌아가야 한다고.”</p><p><br></p><p>그냥 이 생각만 했을 뿐인데, 가슴이 욱신거렸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