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b>평론: </b></p><p><br></p><p> <b style="font-size: 20px;">한의 가락, 기다림의 미학 </b></p><h1><b>. </b><b style="font-size: 15px;">ㅡ ≪홍용암시작품연구세미나≫ 개막사 </b></h1><p><br></p><p><b> (중국) 조성일</b></p><p><br></p><p><br></p><p><b> 연변사회과학원문학예술연구소,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흑룡강성작가협회 조선족창작위원회,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와 아동문학창작위원회의 공동주최로 연길시 아리랑호텔에서 <<홍용암시작품연구세미나>>를 성황리에 거행하게 되였다.</b></p><p><b> 이 세미나에는 문단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 아동문학작가분들과 연변기업계의 부분적인 인사들이 참석하였으며 흑룡강성의 한춘, 김성우... 등 저명한 작가분들도 참가하였다. 나는 주최측을 대표하여 오늘 이 대회를 둥글게 하여주신 여러분들께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번 이 세미나에 재력적후원을 감당해주신 홍섭치과병원 홍섭원장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b></p><p><b> 홍용암씨는 30살나이의 젊은 시인이며 청년기업가이다.</b></p><p><b> 1970년 홍용암씨는 흑룡강성 한 극빈한 눙가의 칠남매중 막동이로 태여났다. 홍용암씨는 태여나자마자 가난과 불행의 십자가를 등에 업어야 했다.</b></p><p><b> 그가 세상에 왔을 때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하다가 종신불구로 되였고 누나는 교통사고로 잔페가 되고 그후 또 둘째형이 목재부업중 저승으로 갔으며 어머니는 장기환자로 고생하고있었다. 인신사고와 병마로 인한 가정의 어려운 경제적여건때문에 홍용암씨는 다섯살잡던 해에 부모의 슬하를 떠나 산설고 물설은 머나먼 대흥안령의 한족동네 한족집에 가서 3년간 민족기시를 받으며 자랐다.</b></p><p><b> 다시 친부모의 품에 돌아온 홍용암씨는 학교에 입학하여 무시로 덮쳐드는 빈궁속에서도 공부에 열을 올렸고 문학에 눈을 떴다. 남다른 예술적천부를 가진 그는 열다섯살때에 동시 <<해, 달, 별은 내 동무>>를 처녀작으로 신문에 발표하였고 초중 3학년 16살나이에 동시집 <<꽃무지개>>를 출판하였으며 고중 3학년 19세때에는 두번째시집 <<나는 시골아이>>를 출판함으로써 <<문학신동>>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던것이다.</b></p><p><b> <<화창한 봄날 남먼저 일찍 피여 옥같은 단꿈을 무르익히며>> 불같은 열정에 들끓던 홍용암씨는 대학에 진학하자 갈수록 가심화되는 경제난에 전례없는 시련을 겪게 되고 좌절의 심연속에 추락하게 된다. 빈궁으로 인한 <<죽느냐, 사느냐>>하는 인생전장의 판가리판에서 홍용암씨는 자아와의 치렬한 격투끝에 생존을 위해 분연히 대학 2학년때 학업을 버리고 사랑하는 문학마저 팽개치고 적수공권으로 장사의 길에 나섰다. 그때 그의 나이는 만 22세였다.</b></p><p><b> 그후 홍용암씨는 무정함과 모험으로 가득찬 시장경제의 거세찬 바다물결속에서 목숨을 내걸고 어딘가에 있을법한 구원의 대안을 바라고 선후로 훈춘, 할빈, 심양, 연길... 등 동북삼성 방방곡곡을 전전긍긍 정처없이 떠돌면서 구름같은 눈물겨운 류랑생활을 하였다. </b></p><p><b> 돈을 벌기 위한 류랑생활에서 홍용암씨는 실패와 좌절의 쓰디쓴 고배를 맛볼대로 맛보았으며 끝없는 고독과 소외감과 아픔이 따르는 정신적내출혈로 하여 죽을 생각도 여러번 가졌었다. 하지만 그는 이같은 환난과 고뇌속에서도 실의(失意)에 빠지지 않고 이를 이겨내는 지혜와 힘이 있었다. 그는 뼈를 깎아내는 갖은 각고와 초인간적인 인내로 모든 난관을 박차고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창업의 혈로를 개척하였다.</b></p><p><b> 그는 4년간의 류랑생활과 천신만고를 거쳐 끝끝내 희망의 돛대를 잡았는바 1996년 5월부터 자신이 넘어졌던 곳인 연길에다 선후로 자기가 투자하여 연길시외국어학교, 신세기언어양성원, 태평양계산기중심, 코리아정보자문회사, <<청춘극장>>신문사 등을 륙속 일떠세우고 총리사장직을 맡게 되였다. 실력있는 기업가로 변신한 그는 창업의 길에서 커다란 성과를 떠올리게 됨에 따라 사회의 주목을 끌게 되고 세인들의 각광을 받게 되였다. </b></p><p><b> 상술한데서 알수 있는바와 같이 홍용암씨가 걸어온 인생 30년은 <<너무나도 거센 세월의 풍우에/ 짓밟히고 모대기>>면서 <<사무치는 애환과 회한의 피눈물을/ 세차게 쭈룩쭈룩 비줄기로 내리쏟>>던 파란만장한 30년이며 <<그래도 피멍이 든 상처투성/ 불에 탄 거칠은 숯언덕에/ 또다시 꽃밭으로 촘촘히 돋을/ 래일의 그 전경을 굳게 믿>>고 극한 상황과 처절한 싸움을 벌려온 30년이다. 실로 그의 30년은 홀로 <<마음의 오지>>를 찾아나선 <<도보고행승>>의 운명을 련상케 한다.</b></p><p><b> 홍용암씨는 1985년에 처녀작을 세상에 내놓은 때로부터 1992년 22세나이에 잠시 절필한 시기까지 짧디짧은 7년동안에 300여수의 서정시와 가사, 400여수의 동요, 동시, 또 수십편의 소설, 수필, 실화, 평론 등을 발표하였으며 그 사이에 <<꽃무지개>>, <<나는 시골아이>>, <<흰구름이 된 이야기>>, <<려행자>>, <<사슴뿔나무>> 등 도합 5권의 시집을 묶어냈다. 이는 실로 우리를 경탄케 한다.</b></p><p><b> 홍용암씨가 자기의 필명을 백운(白云)이라 한것이나 세번째시집의 표제를 <<흰구름이 된 이야기>>로 단것이나 그의 시세계에 흰구름을 시적상관물로 한 시가 특별히 많은것을 미루어보아 그는 <<흰구름>>에 강한 애착을 가졌다는것을 대뜸 짐작할수 있다. 까놓고 말해서 그의 시적<<성감대>>가 <<흰구름>>에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상 싶다.</b></p><p><b> 시인은 <<흰구름>>에 여러가지 상징적의미를 부여하였는바 그의 시세계에서의 <<흰구름>>은 지난 세월 국토와 고향의 상실로 하여 피눈물나는 떠돌이생활을 영위하였던 <<민들레가족>> ㅡ 백의동포의 삶을 표상하는 상징적기호요, 가난과 시장경제의 험난한 세파속에서 홀로 구름처럼 정처없이 표류하던 자신의 숙명같은 비극적인 신심(身心)을 표징하는 상징적기호요, <<신기루처럼 떠오를 새 기적을 찾아/ 어디론가 자꾸자꾸 훨훨 날아가는>> 자유분방한 넋과 참다운 삶의 지향성을 나타내는 상징적기호라고 생각한다.</b></p><p><b> 따라서 그의 시작품은 구름이 보여주는 <<나그네의식>>과 원격지향, 무상의 흐름우에 보금자리를 잡고있는바 그 흐름속에서 구슬프게 울려나오는 처절한 한의 가락과 애끓는 기다림의 미학이 바로 홍용암씨의 시혼이라고 력점을 찍어본다.</b></p><p><b> 홍용암씨는 이런 시혼을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돋혀내면서 다양한 변주곡들을 창출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변주곡들을 간추려보면 망향의식과 불귀의 정한, 인간의 존재론적의미에 대한 사색, 리별과 그리움의 기다림이라 할수 있는것이다.</b></p><p><b> 어릴 때부터 치렬한 민족의식을 갖게 된 홍용암씨는 우리 가슴속에 고여있는 <<뜨거운 피줄>>을 밝히는데 신경을 세웠는바 그의 적지 않은 시작품은 대대로 내려오며 살아온 <<원 고향>>, 즉 고국산천에 대한 그리움과 가고파도 가지 못하는 불귀의 쓰라린 정한을 묘사하였으며 이 땅에서라도 <<부르는 소리>>에 민감하면서 흰옷을 입고 하얗게 살다가 흰옷을 입고 저승에 가겠다는 민족적인 삶의 의지와 각성을 비장하게 읊조리고있다. 실로 그의 시에 담겨있는 <<아픔에 울고있는 민족>>의 모습과 <<흰옷 입은 서러운 나그네>>의 형상은 우리에게 심각한 정서적충격을 안겨주고있다.</b></p><p><b> 젊은 나이에 특이하고도 기구한 생사체험을 겪었던 홍용암씨는 자기의 시작품을 통하여 평생 잊을수 없는 무서운 기억을 떠올리면서 삶과 죽음, 빈과 부, 인간의 존재와 가치, 인생의 고달픔과 허무 등을 에워싸고 인간존재의 근원적의미를 파헤치고있다. 이런 주제에 바쳐진 사들에서는 혹독한 운명을 인내하며 강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의지가 돋보이고있는가 하면 <<행복하게 못살더라도/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는, 바꾸어 말하면 삶의 본질은 초극에 있다는 시인자신의 삶의 신조를 시종 내비치고있다.</b></p><p><b> 홍용암씨의 많은 시작품들은 사랑의 주제를 천착했고 그 의미의 심연에로 향하는 문을 두드렸다. 그는 사랑의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주요하게 사랑하는 <<당신>>이나 <<님>>과의 리별, 떠나버린 잃어버린 <<당신>>, <<님>>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을 구슬프게 읊조린 남성적인 실련의 문학을 떠올렸다. 이것은 창살이 없는 고난의 감옥에서 완성된 사랑을 할수 없었던 시인의 아픈 력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시인은 사랑에 대한 슬픈 시를 빌어 <<님>>의 부재와 상실의 아픔과 고독의 애한만을 토로하는것에 안주하지 않았다. 시인은 리별이란 만남을 전제로 하고 리별은 만남의 아름다움을 낳는다는것을 믿으며 사랑시의 안자락에 님에 대한 기다림의 미학, 희망의 꽃씨를 깔아준것이 매우 인상깊고 감명깊다. </b></p> <p><b> 홍용암씨의 시의 세계는 그의 젊은날의 정신적초상이자 존재의 거울이요, 그의 정신적격투의 현장기록이자 참회록이라 말할수 있다. 그만큼 그의 시의 뜨거운 현장에는 가난과 시련의 한의 운명론으로 점철된 그의 삶의 <<려행사>>와 고단한 젊음의 표정이 력력히 슴배여있으며 또한 그것이 민족적인 삶과 접목되여 시적일반화를 획득하였다.</b></p><p><b> 그는 시의 소재를 다룸에 있어서 많은 경우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 리별과 상봉, 좌절과 소망, 부귀와 빈천 등 이원(二元)적인 구조속에서 자기가 노리는 주제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내고있다. 그의 서정시에서의 이미지창조를 분석해보면 구름의 이미지, 강의 이미지, 민들레꽃의 이미지, 백색의 이미지 등을 자주 돋혀내고있는것이 특징적인바 이는 민족의 얼과 한의 가락을 울리려는 시인의 뜻에 따른것이라 믿어진다. 따라서 그의 시세계의 밑바닥에는 비애와 그늘진 색조가 비교적 짙게 깔려있다. </b></p><p><b> 그의 시에는 생활체험에 직접 반응한 육성과 같이 꾸밈새없는 언어, 다시 말하면 옷입히지 않은 내심의 저변에서 꾸밈없이 우러나오는 그대로의 말투가 많다. 그만큼 그의 많은 시들은 지적인 고뇌를 소박하고도 투명한 감성으로 노래하였다.</b></p><p><b> 홍용암씨의 서정시 모두가 10대와 20대초반에 창작한 작품인 까닭에 그에 따른 미숙점도 가끔 보여지고있다는것을 지적해야겠다. 그의 어떤 시들은 시적기교가 결핍한 직선적이며 관념적인 표현과 설명적인 진술이 들어있어서 시적형상화에 역행하고있는가 하면 간혹 언어가 잘 다듬어지지 않아 거치른 흠집을 로출시키고있으며 사색의 심도가 옅은 부족점도 더러 보여주고있다. 이는 시인의 더욱 고심한 예술적탐구를 요청하고있다.</b></p><p><b> 모두어 말하면 홍용암씨는 예술적천부를 가진 젊은 시인이며 민족과 삶에 대한 애정과 풀리지 않은 서러움의 생을 장중한 가락으로 읊은 발전중에 있는 시인이며 화장하지 않은 맨 근육질과 같은, 분명 남성적이며 새로운 형이상학적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 그리고 우리 시단에 좋은 시작품들을 선물한 청년시인이다. 우리는 홍용암씨가 창업의 길에서 더 빛나는 금자탑을 구축하기를 바라며 버렸던 붓을 다시 거머쥐고 시심을 불태우면서 21세기의 조선족시단의 창창한 앞날에 더욱 큰 기여가 있었으면 하는 기대를 걸어본다.</b></p><p><b> 우리 주최측에서는 문단의 밑둥에서 힘겹게 솟아나오고있는 애어린 <<민초(民草)>>들을 받들어주며 그것을 21세기의 조선족문단을 떠밀고나갈 거목으로 키우고싶은 욕망에 젖어서 오늘 이 세미나를 열게 되였다. </b></p><p><b> 이번 이 세미나를 위해 적극 론문을 쓰신 여러 학자, 평론가분들께서 자기나름의 시각과 방법론, 자기의 목소리와 억양 그리고 객관적이면서도 실사구시적인 태도에 기대여 홍용암씨의 시작품이 쌓아올린 성과를 충분히 긍정하고 안고있는 문제점들을 따뜻하게 지적함으로써 홍용암씨의 금후의 창작에서 좋은 밑거름으로 되게 하였으면 하는것이 이 나의 희망사항이다.</b></p><p><b> 끝으로 이번 이 <<홍용암시작품연구세미나>>의 원만한 성공을 미리 기원한다!</b></p><p><br></p><p><b> 2001년 3월 24일, 연길에서. </b></p><p><br></p><p><b> (평자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회장이자 연변작가햡회 전임주석임.) </b></p><p><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