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b>연설문: </b></p><p><br></p><p><br></p><p><b> . </b><b style="font-size: 20px;">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b></p><p><b>ㅡ 전주청년창업자전형모범 사적보고회에서</b></p><p><br></p><p><b> 홍용암</b></p><p><br></p><p><b> 친애하는 전주 각지에서 모여온 광범한 청년 벗들, 일개 보잘것없이 너무너무 평범한 제가 여러분들의 과분한 사랑과 신망과 추대로 오늘 황송스럽게 이 연단에 나서게 된 것을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보잘것없는 저를 이 연단에 내세워주신 여러 청년벗들에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되는 감사를 표시합니다. </b></p><p><b> 저는 1970년 6월 26일(음력) 흑룡강성 동녕현 삼차구향 동방홍촌의 어느 한 극빈한 농가의 칠남매가운데서 막둥이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째지게 가난한 <<특빈호>>집에 밥 달라는 걱정거리 입이 하나 더 불었다고 축복 대신 오히려 기막히고 탐탐하여 부모님들의 무거운 한숨과 개탄만 자아냈습니다. 그랬기에 저를 배속에 임신하였을 때 저의 어머니는 몇 번이고 공사병원에 가서 떨구려고 버스에 올랐다가 동네어른들이 하도 잡아끌어 내리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마지못해 저를 낳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숙명적으로 지지리 찌들리는 가난 때문에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집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군더더기 존재였습니다. </b></p><p><b> 제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가 탄광 일을 하다가 다리를 다쳐 종신불구로 되셨고 설상가상으로 누나가 교통사고로 오른 손목이 뭉텅 끊어진데다가 후에는 또 둘째형이 생산대의 목재실이를 하다가 사고로 생죽음을 당하는 등 큰 횡액을 치러야 했습니다. 게다가 가득이나 병약한 체질에 부득불 온 가정의 중임을 혼자 떠멘 가냘픈 어머님마저 그 정신적 타격을 받아 당하지 못하고 정신분열증이 온데다가 사시장철 아버지와 함께 구들에 드러누워 시름시름 중병을 앓은 장기환자로 전락되다보니 고슴도치 외지듯 점점 더욱 빚만 잔뜩 걸머지게 되어 갈수록 살아나갈 길이 캄캄하였습니다. </b></p><p><b> 하여 워낙 태어나기 전부터 배속에서 떨구느냐 마느냐 말썽이 많았던 저를 부모님들은 끝끝내 제대로 키울 수가 없어서 생각다 못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제가 다섯 살 나던 해에 멀리 수천 리 밖에 떨어진 대흥안영이라는 한 한족마을에 주어버리고 말았습니다. </b></p><p><b> 제가 대흥안영의 어느 한 깊은 산골의 한족마을에 도착한 첫날, 조선아이가 왔다고 도대체 조선족아이가 어떻게 생겼는가 보자고 구경을 온 숱한 동네사람들이 몰려와 저를 빙- 둘러싸고 희한한 참대곰 한 마리를 중간에 놓고 구경하듯 왁작 떠들썩 웃고 훑어보고 만져보며 야단들이였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혹시 저를 잡아먹자고 그러는가 하여 너무도 무서워 오돌오돌 떨기만 하였습니다. </b></p><p><b> 부모님들과 생이별하고 재 다시 상봉을 기약하기도 어려운 수천 리 밖의 조선족이라곤 한호도 없는 산 설고 물 설은 한족동네에 버려진 저의 신세는 그야말로 가련하였습니다. 한족말 한마디 할 줄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저를 보기만 하면 동네아이들은 그 무슨 신기한 놀이감이나 만난 듯 우르르 모여들어 <<꼬리빵즈>>(조선사람을 욕되게 비하하는 말)라고 놀려주며 침을 뱉고 돌멩이를 뿌리고 두들겨 팼습니다. 하여 어쩌다 한번 바깥에 놀러나갔다가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저의 머리와 어깨, 잔등에는 어디라 없이 온통 더러운 가래침과 돌멩이에 얻어맞아 시퍼렇게 멍이 든 상처자국 천지였습니다. 저에게는 같이 놀아줄 친구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 후부터 저는 하는 수 없이 다시는 바깥에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매일 저 혼자 집안에 들어박혀 꽁다리연필을 찾아들고 그림그리기를 하는 것으로 그 지지리 기나긴 동년의 외로움을 달랬습니다. </b></p><p><b> 날마다 저 혼자 해도 그리고 달도 그리고 별도 그리고 꽃도 그리고 나비도 그리고 새도 그리면서 그렇게 몇 년 동안 하도 오래 자꾸 그리다보니 얼마 후엔 조금 미립이 터서 무엇이나 꽤 썩- 잘 그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린 그림을 본 양부모들은 장차 화가가 될 징조라고 여기고 크게 기뻐하면서 저에게 종이와 크레용과 연필을 사다주었습니다. 하여 저는 짬만 있으면 온종일 그림을 그리는데 정신을 팔군 하였습니다. 함께 놀아줄 친구 하나 없는 저에게 있어서 오직 그것만이 지지리 기나긴 동년의 고독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깊은 밤중이면 밤마다 멀리 두고 온 친부모가 너무도 그리워나서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가만가만 소리 없이 혼자 울면서 뜬눈으로 지새운 날들이 그 얼마인지 모릅니다. </b></p><p><b> 그러던 저에게 운명의 조화라고 할까 아니면 하느님이 베푸신 은총이라고 할까 불행 중 큰 행운이 문득 찾아왔습니다. 양어머니의 여동생이 낳은 애를 양부모가 맡아 기르는 바람에 저는 한족마을에 간지 3년 만에 다시 친부모한테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너무도 기뻐서 다시는 친부모님 곁을 절대 떠나지 않으리라 다지고 다지고 또 다졌습니다. </b></p><p><b> 비록 집은 계속 째지게 가난한 때를 조금도 벗지 못하였지만 저는 그래도 친부모의 품이 제일 좋았고 자기가 태어난 가난한 내 고향마을의 거의 무너져가는 오막살이 옛집이 더 좋았습니다. </b></p><p><b> 그런데 3년씩이나 한족마을에 가서 살다나니 그동안 완전히 <<한족아이>>가 되어버린 저는 이번에는 도리어 <<조선말>>을 할 줄을 몰랐습니다. 농촌마을에 있는 조선족소학교 1학년에 붙었지만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과문읽기나 기립발언을 시키기만 하면 자꾸 한족애처럼 혀 꼬부라진 괴상한 발음이 나가 동학들과 선생님들을 수태 웃기군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싼둥빵즈>>(중국사람을 욕되게 비하하는 말)라는 별명을 꼬리에 달고 다녔습니다. </b></p><p><b> 저는 차츰 주변생활에 익숙해졌으며 공부도 썩 잘하였습니다. 특히 그림그리기에 남달리 뛰어난 재주가 있어 학교 미술선생님의 매우 큰 칭찬과 중시, 인정을 받았는데 미술선생님은 제가 이제 크면 꼭 화가로 된다고 늘 고무격려해주었으며 반급 동학들도 모두 저를 <<꼬마화가>>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인지 저의 애초의 첫 이상은 장차 꼭 유명한 화가로 되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하학 후이면 먼저 숙제를 다 한 다음 꼭꼭 그림 한 장씩 그리는 것으로 꾸준히 그 아름다운 화가의 꿈을 무르익혀 나갔습니다. </b></p><p><b> 집이 너무 가난한데다가 애들 또한 많았기에 저의 형제들은 윤번으로 헌옷을 내리내리 물려받아 입었으며 종래로 새 옷을 입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과당시간에도 선생님이 흑판 앞에 나가 쓰는 문제풀이를 시키면 속으로는 분명히 얼마든지 쉽게 풀만한 신심이 있었지만 번마다 번쩍 손을 쳐들었다가 인차 다시 슬그머니 내리우군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덧천을 대어 여러 겹 기울 대로 기운 헌 바지 엉덩이부분의 낡은 천이 너무 삭을 대로 삭아서 구멍이 숭숭 났기 때문에 전에 앞에 나갔다가 개꼴망신, 창피를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무엇보다 그것이 심히 두렵고 싫었던 것입니다. 가끔씩 체육시간을 볼 때에도 또 체육선생님의 요구대로 남들이 다 사서 입은 운동복 한 벌조차도 끝내 갖추지 못하여 더덕더덕 덧기운 헌 바지를 입은 채로 운동장 한쪽 귀퉁이에 홀로 서서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b></p><p><b> 해마다 8, 9월이면 공사운동대회를 사흘 동안 굉장히 크게 진행하군 하였습니다. 온 마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버스거나 최소한 자기 집 자전거를 타고 30리가량 떨어진 공사소재지로 운동구경을 갔지만 저는 혼자 그 먼 길을 타박타박 걸어서 갔습니다. 저한테는 2, 3전씩 하는 얼음과자나 해바라기 씨 한줌을 사먹을 돈도 없었으며 더군다나 다른 집 애들처럼 새 옷을 차려입고 운동구경을 갈 엄두조차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b></p><p><b> 불쌍하고 허약한 부모님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자 저는 짬짬이 폐철덩이, 비닐조박 등을 주어 팔아 모아서는 그 돈으로 모자라는 학용품을 샀습니다. 학교에서 거름을 많이 주어 바치면 <<거름줏기모범>>이 되고 필기장과 연필을 상으로 준다기에 학교로 오갈 때나 방과 후 여가만 있으면 부지런히 길바닥에 널린 마른 소똥, 돼지똥을 주어 바쳐 끝끝내 바라던 필기장과 연필을 상으로 타가지기도 하였습니다. </b></p> <p><b> 소학시절, 반장이며 중대장인 저는 반급에서 중요학과인 조선어, 한어, 수학 등의 성적이 으뜸이었으나 음악(노래)시험성적만은 자신이 없어 번마다 70점을 별로 더 넘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요과목만 시험을 치는 기중시험 때면 언제나 1등을 하였지만 모든 학과목을 다 고루 시험을 보는 학기말시험 때면 늘 꾀꼬리목청인 부반장인 한옥이란 여자애한테 총점수에서 몇 점 뒤져 2등에 물앉군 하였습니다. 승벽심이 생긴 저는 학기말총화에서 <<나는 한옥이를 <타도>하고/ 오늘은 1점 맞고/ 내일은 2점 맞고/ 모레는 3점 맞고/ 장차 새 중국을 건설하겠다!>>라는 즉홍시같은 발언을 하여 한옥이를 크게 노엽혔습니다. 당시 4인무리가 금방 꺼꾸러지고 그들이 내세운 본보기인물이었던 <<백지영웅>> 장철생을 호되게 비판하던 때였는데 한옥이가 그 발언을 그대로 적어 선생님한테 갖다 바치자 그것이 그토록 큰 풍파와 화근을 불러올 줄이야! </b></p><p><b> 학교 지도부에서는 저의 발언내용이 매우 엄중한 반동시라고 점찍고 한차례 전교성적인 전형비판대회를 열고 철저한 사상품덕교양을 진행하였으며 하루아침 새에 저를 반급 학급장, 소년선봉대 중대장직에서 전부 나떨구었습니다. </b></p><p><b> 그 후부터 아이들은 저를 보기만 하면 <<장철생이 온다! 반동시인이 온다!>>, <<핏ㅡ, 그 주제에 시를 쓴다구?! 왝->> 이렇게 빈정대며 놀려주었습니다. 평소에 저를 높이 보며 같이 잘 놀던 친구들도 갑자기 온역이나 피하듯 저를 멀찍이 피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 바로 모든 애들이 어디가나 그냥 저를 빗대고 <<대시인>>, <<가짜시인>>이라고 놀려주는 조롱이였습니다. </b></p><p><b> 저는 점점 우울해지고 성격도 점차 괴벽, 소침, 과묵하게 변해갔습니다. 한편 어느 날 문득 굴뚝같은 반발심이 솟구쳤습니다. <<뭐? 대시인, 가짜시인이라고? 그래 좋다! 그럼 내 이제 진짜 멋들어진 시를 써서 너희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마! 어디 두고 보자...>> 저는 속으로 벼르고 벼르고 또 윽별렀습니다. </b></p><p><b> 그때로부터 저는 동무들과 선생님의 눈길을 피해가며 남몰래 가만가만 시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전에 매일 한 장씩 그려오던 그림공부는 그 후 인차 시 열독, 시 습작으로 바뀌었습니다. 똑마치 귀신에게라도 홀린 듯이 시에만 신경을 썼으며 하학하고 집에 돌아와서 숙제를 마친 후 하는 일이란 그저 시를 수집하고 시를 탐독하고 시를 연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사처로 수소문하여 책을 빌려서는 목마른 사람이 샘물을 들이켜듯 정신없이 내리읽었으며 지어는 길바닥에서 나뒹구는 신문종이마저 주어들고 보다가는 거기에 시구만 있으면 가위로 오려서 두터운 책갈피 속에 붙여두고 보군 하였습니다. </b></p><p><b> 어느 한번은 중국고대 문학가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수록한 책 한권을 얻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이야기속의 주인공들이 더없이 우러르고 돋보이면서 나중에는 그들을 무한히 숭배하고 흠모하는 감정의 싹까지 틔우게 되었습니다. </b></p><p><b> (이백은 얼마나 위대한가? 이하는 일곱 살 때부터 시를 참 멋들어지게 썼다지? 나도 이하처럼 이름난 꼬마시인으로 될 수는 없을까...?!) </b></p><p><b> 처음엔 시 한수만을 발표하여 짓밟히고 우롱당한 인격과 자존심만을 되찾으려던 저의 생각은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점점 커졌으며 때로는 꿈에서마저 자신이 유명한 대시인이 되어 크게 명성을 떨치는 그런 가슴 뻐근한 영광을 지녀보군 하였습니다. </b></p><p><b> 몇 년 후, 저는 동방홍소학교를 졸업하고 마을에서 8리 떨어진 이웃마을 오성초급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다른 애들은 모두 자전거를 타고 휘파람을 불면서 신나게 씽-씽- 학교로 오갔으나 유독 너무나 가난했던 저만은 혼자 해어진 헌 신을 신고 그 훤히 트인 큰길을 제쳐둔 채 지름길인 논둑길을 가로질러 걸어서 다녀야 했습니다. </b></p><p><b> 그러던 어느 날, 학교의 어문선생님이 교과서의 시를 가르치고 작문숙제를 내었는데 <<스켓트를 타지요>>라는 제목으로 시를 써서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꽤나 알심을 들여 시를 써서 바쳤는데 며칠 후 성적발표 때에 보니 다른 애들은 90점, 95점짜리가 여럿이나 되었지만 저의 시는 겨우 85점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방과 후 다른 애들의 그 최우수점수를 맞은 시들을 두루 찾아 읽어보았으나 암만 봐도 저의 시보다 훨씬 못하였습니다. </b></p><p><b>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어디 두고 보자. 난 내 시를 신문에다 뜨르르 발표하여 본때를 보여주고야 말테다!) 반발심이 울컥 치민 저는 집에 돌아오자 바람으로 자신이 평소 수백 수나 써두었던 시 습작수첩에서 동시 3수를 골라 <<흑룡강신문>>에 투고하였습니다. </b></p><p><b>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신문이나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는 것을 하늘의 별따기처럼 여겼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남몰래 묵묵히 습작만을 꾸준히 해왔지 여태껏 섣불리 발표하려는 엄두와 시도는 감히 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수가 몇 달 후 드디어 <<흑룡강신문>>에 버젓이 발표될 줄이야! 시작품과 함께 활자로 또렷이 찍혀 나온 <<홍용암>>이란 이름 석 자에 눈길이 가닿은 순간 저는 너무도 흥분되어 신문을 들고 정신없이 바깥에 뛰쳐나가 하늘높이 두 팔을 세차게 흔들며 목청껏 만세를 불렀습니다. <<야ㅡ! 성공이다 성공!! 내 시가 신문에 났다...>> </b></p><p><b> 그 시각, 저는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신문에 처음으로 발표된 한수의 작은 시 ㅡ 하지만 저로 놓고 말하면 그것은 결코 평범한 한수의 작은 시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피와 눈물로 얼룩진 한 시골아이의 수난의 역사였으며 짓밟힌 인격과 자존심을 되찾고 자기의 존재를 이 세상에 대고 떳떳이 선고하는 소리 없는 외침이었습니다. </b></p><p><b> 그날 저녁, 저는 떨리는 손으로 저의 시 습작수첩에다 이런 시 한수를 정성껏 써넣었습니다. </b></p><p><br></p><p><b> 아, 시여!</b></p><p><b> 못나도 잘나도 너는 내 사랑</b></p><p><b> 나의 생명 시와 같이 울고 웃으며</b></p><p><b> 변함없이 인생의 길 함께 가리라... </b></p><p><br></p><p><b> 그 후부터 저의 시는 <<소년아동>>, <<별나라>>, <<꽃동산>>, <<중국조선족소년보>>, <<중학생신문>>, <<장백산>>, <<도라지>>, <<은하수>>, <<천지>> 등 신문, 잡지 간행물들에 육속 발표되었으며 드디어 16세 때에는 첫 시집 <<꽃 무지개>>까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의해 출판되었습니다. 하여 문단에서 대번에 <<문학신동>>으로 이름을 짜하게 날렸습니다. 그때 저는 이미 1000여수의 시를 습작하였고 각종 문학상만 해도 수차 받았었습니다. </b></p><p><b> 1986년 9월, 동녕현조선족중학교에 입학한 저는 가정의 너무나도 어려운 경제형편을 감안하여 부득불 부지런히 원고를 써서 원고료를 받는 한편 가정교사를 찾아하고 방학간이나 휴식일마다 삯김도 매고 석탄실이도 하고 지어 얼음과자장사까지 하면서 좀씩 돈을 벌어 학비에 보탰습니다. </b></p><p><b> 웬일인지 집안형편인 갈수록 어려워져 공부해나가기가 더더욱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저에게는 장차 유명한 작가로 되려는 아름다운 꿈이 있었기에 백방으로 일전 돈도 아끼고 쪼개어 쓰면서 용케도 간고한 학업을 꾸준히 견지해나갔습니다. </b></p><p><b> 학교 기숙사도 한 칸에 20여 명씩 딱 붙어 자는 제일 눅고 조건이 차한 온돌숙사에 들었고 밥도 딴 애들은 한꺼번에 일곱 냥, 여덟 냥씩 푹푹 타먹었지만 호주머니사정이 빠듯한 저는 부득히 허기진 대로 꾹- 참고 계획적으로 한 끼니에 두 냥, 석 냥씩만 타먹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한 그릇에 20전씩 하는 국도 돈을 아껴 5전어치만 타 먹다보니 건더기라곤 전혀 없이 온통 멀건 국물뿐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득이나 갈대 같은 저의 신체는 여월대로 여위어서 바람이 불면 단박 넘어질 듯 휘청거렸으며 엄중한 영양실조와 빈혈, 신경쇠약으로 고중 3학년 후학기에 와서는 부득불 휴학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b></p><p><b> 휴양기간 또 짬짬이 쓴 101수로 묶은 두 번째 시집 <<나는 시골아이>>가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중학시절에 출판한 책 두 권으로 하여 저는 다시 한 번 <<문학신동>>으로 더욱 큰 소문을 놓았으며 각종 신문, 잡지, 라지오 등 보도매체들에서는 물론 흑룡강성문화청과 흑룡강성문학예술계련합회, 흑룡강성텔레비방송국, 동녕현텔레비방송국에서까지 모모한 간부들과 기자들이 찾아와 <<전정우수문예창작골간 2등상>>, <<동녕현인민정부상>>까지 수여하면서 육속 취재하고 크게 보도하였습니다. </b></p> <p><b> 하지만 복은 쌍으로 오지 않고 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이듬해에는 또 대학시험을 단박 코앞인 이틀 앞두고 느닷없이 덜컥 도진 급성맹장염 때문에 목숨을 건지기 위해 그 즉시에서 수술대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아, 하나님은 왜 나한테만 엄벌을 내리는가...???!) 절망과 고통과 슬픔이 한 가슴을 꽉- 메우면서 가득이나 쓰라린 저의 마음을 한 치의 사정도 없이 무자비하게 순식간 마구 짓뭉개놓았습니다. </b></p><p><b> 갖은 간난신고를 거쳐 이듬해 저는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b></p><p><b> 하지만 가난은 찰거마리처럼 딱- 달라붙어 좀체로 저의 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거의 거의 몰락변두리에 잇닿은 저의 집에서는 뒷바라지는 고사하고 오히려 갈수록 점점 저에게 막중한 정신압력과 경제부담, 고민거리만 더해주었습니다. 돈도 집에서 저한테 부쳐오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제가 평소 애써 아껴 쓰고 남은 원고료 중에서 일부분을 떼내어 집에다 부쳐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b></p><p><b> 저는 방학이면 삯일과 마른 명태, 낚지, 도라지무침장사, 닭구이장사 등을 찾아하였으며 평소에는 의연히 공부하는 한편 가정교사도 하고 부지런히 원고를 써서 원고료를 받는 것으로 극력 완강하게 끈질긴 <<자립공부>>를 견지하여나갔습니다. 그러나 1년 반 후에는 형편이 더더욱 험악해지어 나중에는 저절로 시름 놓고 <<자립공부>>를 해나갈 수 있는 그 한 갈래 마지막 길조차도 완전히 막혀버리게 되었습니다. </b></p><p><b> 방학에 집에 돌아와 보니 쌀독에는 단박 끼니를 해먹을 쌀이 거덜난데다가 아버지, 어머니가 몽땅 드러누워 생명의 경각을 다투면서 시름시름 중병을 앓고 있었고 게다가 빚재촉꾼들이 문턱이 다슬도록 찾아들면서 가장치기까지 해가면서 살벌하게 행패를 부렸습니다. </b></p><p><b> 막다른 골목에 다달은 저에게 있어서 이제 더는 그 무슨 낡아빠진 <<자립공부>>가 아니라 단박 파멸과 몰락의 위기에 직면한 이 무거운 가난뱅이 한 가정을 연약한 두 어깨에 떠메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큰 불덩어리가 완전히 저의 발등에 떨어진 것입니다. 너무 지나친 빚꾼들의 기시와 구박에 견디다 못해 한마디 대꾸하고 대들었다가 귀뺨 한매를 불이 번쩍 나게 얻어맞은 저는 당장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b></p><p><b> <<아, 가난이 원수로구나! 그 개도 안먹는 돈, 그 돈이 뭣이길래 사람을 이토록 못살게 군단 말인가? 돈이 없으면 인격도 없고 존엄도 없고 사람값을 못하는구나! 사람답게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돈, 돈, 돈... 우선 돈을 벌자. 집부터 구하고 보자...>> </b></p><p><b> 극도로 절망에 빠진 저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씽하니 집안에 달려 들어가 이전에 출판하려고 알뜰살뜰 정리하여 궤 속에 깊숙이 건사해두었던 다섯 책이나 되는 시집원고묶음들을 몽땅 마당가에 내어다 휘발유를 친 다음 불을 확- 달았습니다. 그토록 자신의 목숨처럼 애지중지하던 원고묶음이 순식간 활활 타서 한줌의 재로 변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저는 극도의 비애와 허탈과 실의를 느꼈습니다. 그 앞에 꿇어앉아 한동안 대성통곡하고 나니 마지막엔 눈물도 더 나오지 않았습니다. 남은 것은 오로지 잔혹한 운명과 현실에 대한 화산같은 분노와 저주, 악밖에 없었습니다. </b></p><p><b> 저는 두 주먹을 으스러지게 꽉 틀어쥐고 이를 옥물며 속으로 굳게 맹세를 다지고 다지고 또 다졌습니다. (내 꼭 성공하여 돌아오리라! 기어이 돈을 벌어 이 가난한 가정을 구하고 부자로 만들기 전에는 절대로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b></p><p><b> 그 이튿날로 저는 가출해버렸습니다. 문학이고 대학이고 뭐고 그토록 소중히 간직해오던 모든 꿈을 죄다 팽개친 채 그 묘연한 앞길을 전혀 예측하기도 어려운 모험으로 가득찬 상업의 망망대해 속에서 목숨을 내걸고 그 어딘가에 있을법한 구원의 대안을 바라고 필사적으로 자맥질하면서 부평초처럼 끝없이 떠돌기 시작하였습니다. 훈춘, 하얼빈, 심양, 연길... 등 동북삼성 각지를 전전긍긍 정처 없이 떠다니면서 구름 같은 유랑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때 저의 나이는 22세였습니다. </b></p><p><b> 그로부터 어언 장장 1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로지 가난에 도전하여 빈 주먹으로 사회에 진출하였던 저는 그동안 분투에 분투를 거듭하여 일개 가난한 시골소년으로부터 일약 1500여만 원에 달하는 고정재산을 가진 정규적회사의 나젊은 동사장이 되었으며 현재 천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외국어전문학교도 세우고 또 전국 조선족 청년,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청춘극장>>신문도 꾸려 신문사 사장이 되었습니다. 지난해인 2002년에는 연길시위, 시인민정부로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50돌을 맞으면서 평선한 <<연길시10대우수청년>>으로 명명되기도 하였습니다. </b></p><p><b> 저는 시련의 길에서 자신의 피와 땀과 지혜로 자그마한 성취를 거두었지만 단 하루도 돈이 없어 원고를 불태우고 학교마저 중퇴하여야만 했던 나 자신의 불우했던 그 과거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눈물이 나도록 지지리도 어려웠던 그 가슴 아픈 고난의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저의 마음은 지금도 푹- 눈물에 젖군 합니다. 지금도 가끔 저의 주변에서 가난 때문에 그처럼 하고 싶던 공부도 제대로 할 수조차 없었던 어제 날의 제 신세와 비슷한 처경에서 헤매는 빈곤호 학생들을 볼 때마다 저의 마음은 몹시 아파납니다. 하여 저는 지난 몇 년간 생활형편이 어려워 학습에 지장 받고 있는 연변대학, 연변제1사범학교, 연길시제1직업고중, 리화소학교 등 학교의 몹시 곤란한 10여명의 학생들에게 그들이 졸업할 때까지 각각 달마다 꼭꼭 200-300원씩 학비를 이미 대주었거나 현재 계속 대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목전 제 자신이 꾸리는 연길시외국어학교에 와서 공부하는 학생들 중 부모 없는 고아들이거나 가정경제형변이 특별히 곤란한 학생들의 학비는 물론 숙식비까지 전부 면제하여 면비로 공부시키거나 대폭 우대해주어 그들이 안심하고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b></p> <p><b> 이외에도 또 연변인민출판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연변조선족출판일군협회, 연변사회과학원, 연변문학예술연구소,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등 20여개의 단위와 기관들에 수십만원에 달하는 컴퓨터와 칼라프린터기를 사서 무료로 증정하였으며 각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 방송국, 작가협회 등 사회단체들에서 해마다 진행하는 문학연구필회이거나 문화활동, 학술세미나, 문학상시상식, 대중가요창작콩클 등에다도 아낌없이 번마다 후원을 하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교인 흑룡강성 동녕현조선족중학교와 연길시실험중학교, 연길시3중, 태평소학교 등 10여개 학교의 도서실에다도 10여만원에 달하는 도서들을 무료로 기증하였습니다. </b></p><p><b> 최근년간 이렇게 사회를 위해 제가 여러 학교, 기관, 단체, 문화활동 등에 후원, 협찬, 기증한 돈과 기재, 도서 등을 합치면 그 가치가 수백만 원에 달하는데 지금이나 앞으로도 제 힘이 자라는 한 계속 변함없이 적극 지원할 것입니다. </b></p><p><b> 한 사람이 분투하여 사회에서 돈을 번다음 그 돈을 어디다가 쓰는가 하는 것은 십분 중요한 일입니다. 조건이 허락되는한 저는 사회에서 번 돈을(그 한 부분을) 다시 그냥 도로 사회에 환원하여 이 사회의 공익사업이나 자선사업에 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실천, 실현하고자 하는 삶의 가치일뿐만 아니라 인생의 보람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흘러간 과거 가난하고 아프게 살아왔던 사람일수록 자신의 몹시 어려웠던 그 지난날들을 절대로 잊지 맙시다! 그 가난의 고통과 방황과 갈망을... 그때 우리는 얼마나 마음씨 착한 타인이 내밀어주는 사심 없는 지지와 방조, 따뜻한 사랑의 손길이 목마르게 수요되였었겠습니까...?! </b></p><p><b>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빈 손으로 왔다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잠시 어느 만큼한 재부를 소유하게 되지만 나중에 갈 때가 되어 떠나갈 때는 결국 전부 남겨두고 갑니다. 잘사는 사람일수록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절대로 자기가 벌어놓은 그 재부를 단 한 푼도 갖고 가지 못합니다. 그것이 재부입니다. 누구나 스스로 좀만 욕심을 죽이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부 중에서 얼마든지 그 한부분을 떼내어 어려운 사람을 일정하게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 100년, 200년을 살겠습니까?! 사는 동안 더러 가끔씩 어려운 사람을 돕고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고 또 일정하게 공헌, 기여도 하는 것을 저의 인생의 목표와 취지로 삼고 제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b></p><p><b> 재부를 비교적 많이 가지고 있는 우리의 광범한 기업가들이 그렇게 살 것을 바랍니다. 그렇게 부탁드리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이 사회는 보다 좀 더 아름다워지고 공평해지며 더더욱 살기 좋은 지상낙원으로 될 것입니다. 그런 좋은 사회를 건설하는데 저그마한 한몫의 개미 힘이나마 보태려는 것이 지금의 저의 생각이자 좌우명입니다. </b></p><p><b> 가난과 좌절, 역경은 엄청 고달프기는 하나 전승할 수 없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제가 대학 1학년시절에 써두었던, 어쩌면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늘 자기 자신을 위안하고 격려하고 힘을 주기 위해서 자주 읊었던 시 <<이끼>>로 저의 이 연설을 마치려고 합니다. </b></p><p><br></p><p><b> 작은 들을 한번 덮은 잔디 불 같이</b></p><p><b> 흙도 물도 없는 천년 굳은 바위위에</b></p><p><b> 이끼는 파아랗게 돋아나있다</b></p><p><br></p><p><b> 비록 꽃 한 송이 못 피웠을망정</b></p><p><b> 여기도 하나의 생명이 살고 있다</b></p><p><b> 눈물겨운 창생을 목메어 외치며</b></p><p><b> 바위를 태우는 푸르름으로 </b></p><p><b> 이끼는 세차게 활활활 불붙고 있다... </b></p><p><br></p><p><b> 그렇습니다. 저는 이끼였습니다. 어제 날 흙도 물도 없는 천년 굳은 바위위에서 가까스로 뿌리박고 돋아나오며 자라나야만 했던 그 고달픈 이끼 ㅡ 혹시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 중에서 어떤 분들도 아마 지금 이런 <<이끼>>일 것입니다. 그러나 불공평하고 험악한 주변 환경이 그 아무리 어떻게 우리에게 온갖 엄혹한 시련을 들씌운대도 우리는 기어이 죽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시장철 변함없이 더더욱 푸르른 <<이끼>>마냥 영원히 굳세게 살아나갈 것입니다. </b></p><p><b> 여러분, 감사합니다! </b></p><p><br></p><p><b> 2003년 4월 11일</b></p><p><b> 전주청년창업자전형모범 사적보고회에서</b></p><p><b>.</b></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