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차설매

김송철(金松哲)

<p>2020년"어버이 날"에&nbsp;</p><p>&nbsp;&nbsp;</p> <p>&nbsp;&nbsp; 이 세상에 태여나서 두번째로 배운 이름 아버지 , 가끔씩은 잊었다가 찾는&nbsp;그 이름, 우리 엄마 가슴을 아프게도 한 이름, 그래그래도 사랑하는 아버지..</p><p> 세상벽에 부딛쳐 내가 길을 잃을 땐 우리 집앞에 마음을 매달고 힘을 내서오라고 집 잘&nbsp;찾아오라고 밤새도록 기다리던 아버지 내가 시집 가던날 눈시울을 붉히며 잘살아라고 부탁하던 아버지 사랑합니다, 우리 아버지 ㅡㅡ</p> <p>&nbsp;&nbsp; 한국가수 송해와 유지나가 부른"아버지와 딸"이란 노래를 들으며 나는 목이 메고 두눈에선 눈물이 줄 끊어진 구술처럼 줄줄 흘러내립니다. 아마 내일이 부친절이여서 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 지며 아버지와 함께했던 세월이 그토록 애틋하게&nbsp;떠오르는것 같습니다.</p><p>&nbsp;</p> <p> 지금 생각하면 나의 아버지는 참 잘난 남자였습니다. 백칠십오가 넘는 훨씬한 키에 커다란 쌍꺼풀 눈, 곧고 덩실한코,도톰란 입술위엔 이쁜 팔자형 수염을 짧게 깎고 갸름한 얼굴형에 희디흰 피부까지 가져 정말 미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어요. 거기다가 안경을 끼고 스프랑코트까지 척 받쳐 입으면 진짜 그 시대엔 크게 찾 아볼수 없는 멋쟁이 신사였죠. 그래서 의사인 우리 아버지를 따르는 여자들이 너무 많아 우리 엄마속을 무던히도 태웠다고 합니다.</p> <p>  나는 진짜 아버지를 닮지 못했고 미운새끼오리로 태여났습니다. 아마 아버지가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로 못 태여나서 하느님이 나를 곱지 않게 만들었는 모양입니다. 우리 그 멋진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없어서 맨날 한숨을 쉬며 웃음없이 나날을 보냈는데 내가 또 딸로 태여났으니 얼마나 서운하였겠어요. </p><p> 내가 태여나던날 어머니는 통곡하고 아버지는 너무 실망하여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차씨가문의 족보를 책임지고 쓰는 분인데 가문의 맏이로서 대가 끊어진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아들을 기다렸던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첫돌이 다가오니 아버지는 십리도 넘는 논밭에서 등짐으로 찰벼를 져다가 궂은비에 벼를 말릴수 없어 가마목과 구들에 벼를 널어 말려 절구에 쪄서 찰떡을 치고 두부를 앗아 손님들을 청했다고 합니다. 남들이 딸이라고 업신여길가봐 더 정성을 보인것같습니다. 내가 어릴 때부터&nbsp;약해서 자꾸만 앓았는데 아버지는 자신도 의사이지만 어떤땐 내가 잘못되기나 할것처럼 부들부들 떨며 다른 유명한 의사들을 모셔다 보이군 했답니다. 그리고 어디에 놀 러갔다가도 내가 아파한다는 말만 들으면 날듯이 달려와 나에게 침도놓고 약도 먹여주며 나의 배를 만져주며 두손 잡고 걸어보이기도 했습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내가 공부도 잘하고 각 방면에서 우수하게 잘 크니까 아버지는 나를 각별히 사랑하시고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p> <p>&nbsp;&nbsp; 내가 소학교때 세줄배기 대대장표를달고 오니 너무 대견스러워 하시면서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초중에 올라가 공청단에 가입하고 단원 마크를 가슴에 차고 왔을때도 너무 기뻐하시면서 "그래&nbsp;잘했다. 우리 딸이 제일이야, " 하시면서 나의 손을 꼭 잡고 그 넓은 품에 안아 주시는것이였어요. 그러면서 "내가 돈을 많이 벌어 너를 꼭 대학까지 보내겠다.공부만 잘해라."하고 간곡히 부탁하시였습니다. 나는 그때 어린나이였지만 앞으로 꼭 출세해서 아버지를 잘모시고 아들노릇을 해야겠다고 속다짐하군 하였습니다.</p> <p>&nbsp;&nbsp; 아버지는 목단강 ㅡ 발해지역에서 유명한 중의였습니다. 아버지 서재에는 허준의 "동의보감"과 리시진의 "본초강목"등 의서들이 가득찼고&nbsp;커다란 약장에는 여러가자 중약들이 진열되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운 무늬로 된 대추빛침통이 있었는데 약하고 긴침이 있는가 하면 그보다 짧고 좀 실한 침도 있고 납작하고 끝이 뾰족한 침도 있었습니다.. </p><p> 아버지는 선량한 분으로서 환자들을 언제나 웃는 낯으로 대하셨고&nbsp;진맥을 하고는 병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는데 숱한 환자들의 환영을 받았어요. 침도 어찌나 잘 놓는지 팔이 구부러져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가는분도 침을놓으니 그 팔이 제대로 풀리는것도 나의 눈으로 직 접 보았고 어디가 아프면 어디에다 침을 놓아주었는데 모두 효과가 좋아 환자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하여 그 곤난한 시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라며 귀한 쌀이며 채소며 가져왔고 또 설이나 명절이 되면 맛있는 음식을 한 함지씩 이고 오는 분들도 있었습니다.</p> <p>  그런데 문화혁명이 터지면서 개인 소유제는 허용이 되지 않았고 홍위병들이 쳐들어올가봐 성질 급한 어머니는 그 숫한 중약들을 부엌불에 다 때버렸고 아버지의&nbsp;심혈이 슴배인&nbsp;약장들도 낯모를 사람들이 와서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중의사란 간판도 떼여버렸습니다.</p><p> 아, 그때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가요...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을거예요.집에서 아버지의 손때묻은 약장들이 팔려 나갈때&nbsp;눈시울이 붉어진 아버지를 붙들고 우리 엄마와 우리 딸들은 집에 초상이 난것처럼 통곡을 하였습니다.</p><p> 우리 아버지는 칠 남매에 맏이로 태여나서 동생들은 한명도 공부를 못시키면서 맏아들인 울아버자를 3년간 서당에서 공부사켰대요. 그후 아버지는 한편 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한편으로 자습하여 나중 에는 유명한 중의로 우리 고향에선 차의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성공했는데 갑자기 그 사랑하던 사업을 못하게 됐으나 얼마나 통탄할 일이예요.그래도 아버지는 그 정교한 침통만은 버리지 않고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셨습나다. 의사 간판도 떼고 의사질 안한다고 선포했건만 환자들이 줄지어 병보이러 왔어요. 어떤분은 기차를 타고 먼곳에서도 왔고 또 어떤분은 큰 병원에가 검사를 받고도 믿기지 않아 왔고 또 어떤분은 목단강에 있는 소문난 소경점쟁이가 동경성에 있는 차의사를 찾아가면 병이 낫는다고 해서 찾아왔어요. </p><p> 그때부터 아버지는 돈 일전 받지 않고 약처방을 떼여주고 면비로 침을 놓아주었습니다.아버지가 의사사업을 그만둔 때로부터 우리 집엔 수입이 떨어져 그 당당하던 울 엄마는 부끄러움도 마다하고 얼음과자를 팔았고 아버지는 전문 새끼를 꼬고 온집 식구가 동원하여 가마니를 짜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 곱던 아버지의 손은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꿰매느라 볼품없이 거칠어졌습니다.마침 문화혁명이여서 나와 동생이 농촌으로 내려가 일을 하게 되여서야 생계문제가 겨우 해결되였습니다. </p><p> 후에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를 따라 농촌으로 내려와 집을 잡고 우리의 뒤바라지를 해주었어요. 먼 농촌으로 이사왔는데도 아버지를 찾아오는 환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옛날처럼 웃는 낯으로 반갑게 환자들을 대해주고 침도 놓아주며 약 화제도 멋진 글씨체로 적어주었습니다. 환자들이 돈이라도 받으시라고 하면 아버지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시며 "나는 돈을 받지 않아요.그냥 돌아가서 치료 잘하세요."라고 말씀하시며 환자들을 돌려보내군 했습니다.</p><p> 그렇게 평생을 가정을 위하여 환자들을 위하여 노력하고 수많은 생명을 구해준 아버지가 어느 날부터 소화가 되지 않는다며 위와 간사이에 막이 생긴것같다고 아마 수술해야 할 병같다고 말했습니다.&nbsp;의사니깐 자기병을 자기로 진단한거죠. 그래서 내가 위생소의 의사를 데려다 보였더니 아마 암같으니 큰병원에 가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스무살을 갓넘긴 처녀였지만 촌에 가서 돈을 꾸고 안가겠다고 하시는 아버지를 기어코 모시고 당시 비교적 큰 병원인 목단강 홍기병원까지 가서 전문가들을 보이였습니다. 전문가들의 확진에 의 해 아버지는 간암말기로 판정받았습니다.나는 당금&nbsp;하늘이 무너져 내리는것같았고 아버지가 볼가봐 속으로 울며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자신의 병을 아신 아버지는 치료를 완강히 거부하였고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고 견디였습니다.그래도 아버지 에게 있어서 아들과같은 나는 암에 좋다는 약은 다 구해오고 지어는 나의 학생들을 풀어 논밭에 가서 두꺼비까지 잡아다 대접시켰지만 백약이 무효여서 끝내는 병이 발견돼서 석달만에&nbsp;저세상으로 가 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저렇게 빨리 가실줄 모르고 나는 그 며칠 교육계통에서 하는 회의에 갔댔는데 엄마의 말에 의하면 숨지기 전날밤에 나를 찾으며 보고싶다고 하더래요. 아버지는 많은 딸중에서 나를 편애하였고 아들로 생각하고 계셨습니다.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나는통곡하다 졸도하였고 아버지가 나가던 날 우리 딸들이 어찌나 슬피 우는지 온 동네사람들이 다 따라 울었다고 합니다.</p> <p>&nbsp;&nbsp; 아버지가 세상떳다는 말을 듣고 린근의 한족의사들까지와서 아버지의 의서를 달라고 하였습니다.그래서 평생을 그책들을 학습하며 헤아릴수없이&nbsp;많은 생명을 구하게 해줬던 의서들을 내가 책임지고 면목도 없는 의사들에게 울면서 나누어 주었고 아버지의 온기가 슴배여있는 침통은 내가 일년이나 보관하고있다가 아버지 일주기에 제사를 지내면서 아버지의 무덤에 파묻어주었습나다."아버지, 하늘나라에서도 아픈 사람들에게 침을&nbsp;놔주세요"하면서 아버지의 무덤앞에 꿇어앉아 한없이 울었습니다.</p> <p>&nbsp;&nbsp; 아버지가 우리 곁을 떠난지도 몇십년이 돠건만 언제 한번 아버지를 잊어본적이 없고 아버지 생각만해도 가슴이 울컥하고 눈굽이 젖어오는것을 어쩔수 없습니다. 그리고 후회도 많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의&nbsp;손을 잡아본 기억도 없고 아버지의 발을 한번 씻어준적도 없고&nbsp;아버지에게 생일례물도 사준적도 없고 아버지를 사랑한다며 아버지를 꼭 안아 준적은 더구나 없습니다. 더우기 불효한것은 내가 스무살이 넘으니까 시집못갈가봐 매일 근심하는것이 력력한 아버지에게 사위감도 끝내 보여주지못하고 이 딸에 대한 근심과 걱정을 안고 저 멀리 하늘나라로 보낸것입니다.&nbsp;내가 시집 가던날&nbsp;저렇게 멋지고 믿음직한 사위를 아버지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떠나는것이 너무 한스러워 엄마를 붙들고 슬피슬피 울었습니다.지금도&nbsp;나의 아버지 못지 않게 나의 곁에서 맨날 앓는 나를 관심해주고사랑해주고 보호해주는 나의 남편ㅡ셋째 사위를 아버지가 보신다면 얼마나 기뻐하고 아들처럼 생각하며 시름을 놓으시겠어요.&nbsp;</p> <p>&nbsp; 오늘 "아버지날"에 "아버지와 딸"이란 노래를 들으며 눈물로 이 글을 씁니다.아버지, 우리 아버지&nbsp;ㅡ 정말로 사랑했고 존경했던 울 아버지 ㅡ그립습니다. 아버지,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굽어 보시며&nbsp;이 딸에 대한 근심 걱정 하지 마세요.</p><p><br></p><p> 아버지, 사랑합니다.</p><p>2020.6.21&nbsp;&nbsp;아버자 날에..청도에서.</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