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ㅡ《청년생활》제4기 <계림문화상> 우수상 수상</p> <p class="ql-block"> 엄마의 빈자리</p><p class="ql-block"> 한 란(寒兰)</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순대 사시오-- 순대 사시오--”</p><p class="ql-block"> 오늘도 아파트단지 대문앞에서 순대 파는 아주머니의 사구려소리가 퇴근하여 집으로 들어가는 내 발목을 잡는다. 나는 한때 아주머니의 단골손님이였다. 엄마는 생전에 순대를 무척 즐겨 드셨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생전에 순대를 얼마나 샀으면 아주머니는 늘 순대그릇옆에 잠자코 앉아 있다가도 나만 보면 얼굴에 희색을 띄우면서 “순대 사세요―”를 웨친다.</p><p class="ql-block"> 엄마가 돌아가신지 벌써 몇년이 지났지만 순대 아줌마는 가끔씩 내 눈앞에 나타나 엄마를 떠올리게 한다.</p><p class="ql-block"> 혼자서 침상에 누워 계시는 엄마 근심으로 퇴근하여 숨이 턱에 닿게 헐레벌떡 집에 들어서는 나에게 어느 날 문득 욕사발이 날아든다. </p><p class="ql-block">“빌어먹을 년, 딸이라는게 혼자서 순대를 사다 먹어?흥! ”</p><p class="ql-block">평생 자식들 앞에서 큰소리 한번 내지 않으시던 엄마였는데 이때는 너무나 생소한 모습이다. 말로만 들어오던 치매가 이렇게 무서운 병임을 나는 엄마를 통해 실감했다. 혼자서 순대를 사다 먹다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날아오는 소리에 억울함을 못 이겨 잠시 멍해졌으나 나는 숨 돌릴사이도 없이 당장 돌아서서 시장에 뛰여가 순대를 사온다. 순대를 썩썩 썰어서 그릇에 담아드리면 엄마는 한그릇 뚝딱 드시고는 “덕분에 잘 먹었소. 흐흐흐흠…”하면서 얼굴에 남실남실 웃음을 피여올렸다. 어린애같은 엄마를 망연히 지켜보고 있노라니 긴장과 피로가 풀려 안도의 숨이 나왔다.</p><p class="ql-block">그로부터 나는 이제 또 언제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한치 눈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불안에 늘 마음을 조이며 살아왔다.</p><p class="ql-block"> 또 어느날에는 누가 자신의 돈을 훔쳐가기라도 할가봐 힐끗힐끗 주위를 살펴보면서 베개 밑에서 꽁꽁 싼 돈지갑을 꺼내 조심조심 헤치신다. “오늘은 마을 아낙네들이 되놀이를 한다오. 이 돈으로 시원한 옥수수국수 한사발만 받아오우.” 하고 일원짜리 지폐 몇장을 내 손에 쥐여 주면서 완곡하게 부탁하신다. 참으로 울다가도 웃을 일이다. 정신이 모호한 가운데도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맘에 걸리시는지 이렇게 에둘러 드시고 싶은 걸 표현하는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일들이 수없이 반복된다. 나도 그 후로는 순대랑, 옥수수국수랑 엄마가 즐겨 드시는 음식들을 사서는 랭장고에 ‘비상용’으로 차곡차곡 넣어두었다.</p><p class="ql-block">엄마는 날에 날마다 로쇠해가고 병세는 날에 날마다 중해가기만 했다. 엄마가 49세 때 아버지는 병으로 갑자기 하늘나라에 가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년만에 생때같은 둘째 오빠가 사고로 25세의 아까운 청춘을 떠나보냈다. 졸지에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때이르게 떠나보낸 설음으로 하여 엄마는 거의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셨다. 나도 어릴 적부터 엄마가 울면 옆에서 같이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엎친데 덮친다고 내가 시집간 지 2년도 안되여 엄마는 중풍에 걸려 거의 이십여년을 반신불수로 고생하셨다. 그 설음이 한으로 남으셨을가! 치매에 걸리신 엄마는 돌아가신지 이십년도 더 되는 아버지와 둘째오빠를 밤낮 하루종일 욕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턱대고 서럽게 목놓아 울기도 하셨다. 한번 울음이 터져버리면 아무리 달래도 아무 효용이 없었다. </p><p class="ql-block"> 어느 한번, 그날도 온종일 넉두리를 하시며 목을 놓아 우시는 엄마를 애기처럼 끌어안고 얼려도, 큰 소리로 화를 내봐도 막무가내였다. 울고 울어 목이 다 쉴 지경이지만 있는 힘을 다해 오열을 토해내신다. 속수무책으로 엄마의 두손을 꼭 잡고 안타까이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엉엉 목을 놓아 함께 울어버렸다. 그러자 꺼이꺼이 우시던 엄마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신다. 엄마는 내 얼굴을 퀭하니 바라보면서 나를 달래주었다.</p><p class="ql-block"> “란아 울지 마, 왜 울어, 울지 마.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p><p class="ql-block"> 그 순간에는 엄마 눈에 당신 딸이 보였던 것이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엄마의 마음 한구석에는 그래도 늘 이 딸이 있었던 것이다. 당신 딸의 눈에서 눈물이 나는게 싫었고 당신 딸이 가슴 아파하는게 너무나도 싫었던 것이다. </p><p class="ql-block"> 밤낮 그칠 새 없는 엄마의 욕설 때문에 남편의 눈치가 보였지만 나는 엄마가 이렇게라도 오래오래 내 곁에 계셔주기를 바랐다. 밤이면 두세번씩 기저귀 갈아드리느라 잠을 설쳐야 했고 엄마의 그칠새 없는 욕소리에 도무지 잠을 잘수 없었다. 이런 나를 보고 동료들은 “선생님, 저희는 선생님처럼 부모를 잘 모실 자신이 없습니다. 정말 효녀가 따로 없습니다.” 하고 치하해 주고 힘을 실어주었다. </p><p class="ql-block">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심 내가 진정 어머니한테 효도를 다하고 있는 효녀라고 자부했다.</p><p class="ql-block"> 그런데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아마도 나를 두고 나온 것 같다. 나는 가도 가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턴넬속에서 하루 이틀, 한달 두달, 한해 두해를 보냈다. 아무리 정성을 다 해 보살펴드려도 결국 턴넬의 끝에는 사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점점 다가오는 그 시각과 더불어 점점 커져만 가는 절망이 내 정신을 지배했고 힘든 간호생활이 튼튼한 내 육체를 허물기 시작했다.</p><p class="ql-block"> 엄마가 돌아가시기 일년전 어느날, 아침상을 치우다 나는 갑자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않고 말았다. 워낙 허리가 든든하지 못했던 내가 몇년간 엄마를 시중하느라 허리에 무리가 갔던 것이다. 갑자기 허리를 삐끗하며 “앗!”하고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쓰러진채 일주일동안 제대로 운신을 할 수 없었다. 돌아눕기도 힘든 상태라 때시걱은 남편이 하는데 엄마 뒤시중이 문제였다. 병세가 전보다 심해진 엄마의 눈에는 이젠 현실속의 것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환각으로 시달리는 엄마였지만 천성이 깨끗한 분이여서 소변 같은 것이 조금이라도 몸에 묻으면 안되였다. </p><p class="ql-block">“란아, 란아, 란아!” </p><p class="ql-block"> 하루에도 여라문번 불러대는 엄마의 소리가 귀를 때리는데 몸은 조금만 움직여도 신음소리가 묻어나온다. 나는 안깐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벌벌 기여서 엄마의 침대가로 다가갔다. </p><p class="ql-block">“엄마, 나도 좀 살기쇼. 이젠 아버지 곁으로 가면 안되겠습니까?”</p><p class="ql-block"> 나는 그만 평생을 두고 후회할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불안에 떠는 엄마의 가슴에, 그리고 내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p><p class="ql-block"> 그래도 엄마는 운명을 앞두고 가끔 정신이 돌아올 때면 내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p><p class="ql-block">“넌 내가 죽어도 절대 울지 마라. 막내인 너를 너무 고생시켰으니 넌 울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날려라. 훨훨 날아서 도문이랑, 상해랑, 일본이랑 다 다니면서 너희들이 사는 모습을 볼 수 있게. ”</p><p class="ql-block"> 그러면 나는 롱담조로 대꾸했다.</p><p class="ql-block"> “우리 집엔 안 와봐도 됨다.언니,오빠네 집에만 가쇼.”</p><p class="ql-block"> 실은 엄마의 치매를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한 못난 딸의 빈정거림이였다.</p><p class="ql-block"> 4년이란 시간을 침상에서 치매로 하루가 멀다하게 사람을 들볶는 엄마를 모시면서 나는 엄마에 대한 안스러운 생각보다도 내가 힘들다는 구실로 엄마에게 랭정할 때가 많았다.헌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시간이 한해 또 한해가 지나감에 따라 후회는 점점 짙어가고 그리움 또한 더욱더 깊어만 갔다. 때론 어디선가 ‘탕’하는 소리가 나도 엄마가 침대를 두드리던 소리처럼 여겨져 덩그러니 남아있는 빈 침대에 눈길을 돌리기도 한다. 때론 너무도 그리워서 엄마가 누워계시던 침대를 어루쓸면서 엄마냄새를 맡아보기도 하지만 이젠 더는 맡을 냄새조차도 없다. 때론 “엄마--”하고 큰소리로 불러 봐도 대답은 없다. 아린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려보기도 하고 글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락서’해보기도 한다. 이것이 빈자리가 주는 아픔일까!</p><p class="ql-block"> 엄마가 누워 계시던 그 방에 지금 92세의 시어머님이 누워 계신다. 뇌출혈로 쓰러져 두달동안 의식이 희미한 시어머님이 이젠 더는 일어날 가망이 없어보인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에 우리는 시어머님을 병원에서 집으로 모셔왔다. 시어머님이 하루를 사셔도 편안하게 집에 있게 해드리고 싶었다. 주위 사람들은 나를 복없는 녀자라고 안스럽게 보기도 하지만 난 마음속으로 친정엄마께 다 못해드린 효도를 미봉할 기회를 주나보다 하고 자기위안을 한다. 시어머님의 입에 한술한술 미음을 떠넣어드리면서도 엄마를 생각했고 누워계시는 시어머님의 손을 쓰다듬으면서도 엄마를 떠올렸다. 시어머님은 기적적으로 의식이 돌아오고 식사도 이전보다 더 잘 하신다. 다만 치매증상이 나타나 기억이 가물가물할 뿐이다. 너무 감사하게도 시어머님은 친정엄마가 그러셨던 것처럼 욕하고 울지는 않으신다. 시어머님은 뇌출혈에 치매가 더해져서 완전 천진한 ‘어린애’로 변해버렸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시는 시어머님은 우리가 출근한 낮에는 주무시고 밤에는 깨여나 우리한테 이것 저것 시중을 들게 한다. 특히 남편이 고생이다. 조금만 침대에서 부스럭소리가 나도 남편은 인츰 일어나 시어머님을 드려다 본다. 낮에는 출근하고 밤에는 어머님을 간호하는라 참 힘 들텐데, 그래도 남편은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시어머님한테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는다. 늘 애기처럼 보듬어주고 시어머님을 웃겨드리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남편에 대한 존경심과 엄마에 대한 죄책감으로 머리가 숙여진다. 나는 왜 그 때 엄마한테 좀 더 살가운 딸이 되지 못했을까. 왜 따뜻하게 안아드리고 어린애처럼 다독여 드리지 못했을가. 왜 치매로 이상한 말씀을 하셔도 가벼운 웃음으로 넘기지 못했을까. 왜 생사를 넘나들며 고통을 겪고 계시는 어머니가 날마다 웃을 수 있게 앞에서 어린애처럼 재롱을 부려 드리지 못했을가. 왜? 왜? 왜!</p><p class="ql-block"> “순대 사시오-- 따끈따끈한 순대 사시오--”</p><p class="ql-block"> 순대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순대를 받아들고 집에 돌아온 나는 썰어서 접시에 담았다. 사실 나는 엄마가 돌아간 후 몇년동안 순대와 옥수수국수엔 저가락을 대기는커녕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순대에 손을 대는 순간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순대에 떨어졌다. 목이 꺽 메여 오늘도 끝내 순대를 먹을 수 없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