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b>평론: </b></p><p><br></p><p><b> </b><b style="font-size: 20px;">사랑시에서 홍용암의 독자적 추구</b><b> </b></p><p><b> ㅡ </b><b style="font-size: 15px;">사랑시집 "술 한잔에 정든 님과 시 한수"를 평함 </b></p><p><br></p><p><b> (중국) 최삼룡</b></p><p><br></p><p><b> </b><b style="font-size: 20px;"> 들어가는 말</b></p><p><br></p><p><b> 홍용암은 생소한 이름이 아니다. 지난 세기 80년대중기, 16세에 시집《꽃무지개》를 출판하여 문단에서 신동으로 불리웠으며 그후 상업에 몸을 담근 후에도 문필활동을 버리지 않고 중국, 조선, 한국에서 50여권의 문학작품집을 창출해냈다.</b></p><p><b> 최근에 한국 <도서출판 바닷바람>에서 출판된 <<사랑시집>>이라고 명명한 시집《술 한잔에 정든 님과 시 한수》에 수록된 117수의 시는 한결같이 사랑을 읊은것이다.</b></p><p><b> 사랑이란 대상을 소중히 여기여 정성을 다하는 마음, 정에 이끌리여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그러한 관계를 말한다.</b></p><p><b> 사랑에는 모성애, 형제애, 종교애, 조국애, 자기애, 운명애, 이성애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시에 있어서 사랑은 주로 대상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을 바탕으로 지고한 사랑에 대한 정신적고양을 추구하는 동인(動因)이 된다. 한편 그 좌절로 인한 외로움과 고통스러움, 물질성, 구속성 등의 내적 갈등을 야기하는 삶의 감옥 또는 업(業)으로 상징되기도 한다.</b></p><p><b> 홍용암의 이 시집에 수록된 사랑시는 한결같이 이성에 대한 사랑을 읊은것으로서 다시 말하면 에로스(Eros) 즉 이성에 대한 사랑을 읊조리였다.</b></p><p><br></p><p><b> 혼자라면 너무나 외로운 삶</b></p><p><b> 그래서 쌍쌍이 짝을 지어</b></p><p><b> 남자는 여자의 사랑을 먹고</b></p><p><b>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먹고</b></p><p><b> 서로가 그렇게 깊이 정든 님</b></p><p><b> 달콤한 사랑을 받아먹으며</b></p><p><b> 고달픈 세상을 헤쳐가거니</b></p><p><br></p><p><b> </b><b style="font-size: 15px;"> ―《남자와 여자》1련</b></p><p><br></p><p><b> 홍용암의 이 시련(詩聯)은 사랑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해석으로 접근할수 있겠다.</b></p><p><b> 여기서 필자는 이성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해석하는 가장 원초적인 그리스신화를 련상한다.</b></p><p><b> 신들이 처음에 인간을 만들 때 남녀가 하나의 몸으로 태여나도록 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하나의 온전한 남성과 하나의 온전한 녀성이 한몸으로 붙어서 태여났다. 오늘날 샴쌍둥이 (聯體胎兒)처럼 몸체가 둘이고 머리가 둘이고 손이 두쌍이고 다리가 두쌍인 인간은 유리한 점이 많았는바 몸간의 교호작용이 더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감정교류, 정서교감이 더 잘 되였으며 두뇌회전이 빠르고 지력도 뛰여나다보니 능력에 대한 자신심이 커지고 나중에는 자신을 탄생시킨 신을 우습게 보기까지 하고 심지어는 감히 신들에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신들은 인간을 괘씸하게 여기게 되며 인간의 능력을 무력화할 방법으로 급기야 인간의 몸을 둘로 나눴다. 이로부터 인간은 갈라져나간 반쪽에 대한 허전감이 생기고 자신의 결핍과 부족과 불완전함을 느끼게 되였으며 온전하고 완전한것이 되려는 욕망이 생기고 결핍과 그 결핍감을 해소하려는 욕구가 생기게 되고 이로부터 자신의 다른 반쪽을 찾아 헤매게 되였으며 그러다가 어쩌다 그 반쪽을 찾으면 어떻게 한몸이 되려고 안깐힘을 쓰는데 이것이 바로 성(性)적인 결합욕구이고 이성적사랑이며 감각적인 에로스다.</b></p><p><b> 우리 민족에는 이 그리스신화를 개괄하는 <<짝>>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남녀 둘이 서로 어울려 한쌍을 이루는 것, 또는 남녀 둘중의 하나를 가리킨다. 짝을 짓다, 짝을 맞추다, 짝을 잃다, 짝 잃은 외기러기... 등 관용어는 바로 이성애를 가장 통속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이다.</b></p><p><b> 이성애란 별게 아니라 갈라져나간 그 반쪽을 찾아 짝을 이루려는 욕망이다.</b></p><p><br></p><p><br></p><p><b> </b><b style="font-size: 20px;"> 1. 이성에 대한 욕망과 짝을 이룬 환희</b></p><p><br></p><p><b> 이제 우리가 홍용암의 시집《술 한잔에 정든 님과 시 한수》의 100여수의 시를 보면 짝을 찾으려는 욕망, 짝을 그리는 마음, 짝을 이룬 환희가 충일되여있는 시적화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b></p><p><b> 여기서 잠간 시적화자에 대하여 설명하고 넘어가야겠다. 소설에 화자가 있는것처럼 시에도 화자가 있다. 텍스트에 <<나>>가 화자로 되여 한 각색을 맡고 직접 나타날수도 있고 텍스트에 <<나>>가 나타나지 않을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나>>, 즉 화자가 참여자로 되는데 대부분 서정시에서는 <<나>>가 나타난다. 후자의 경우는 화자가 텍스트밖에서 전지전능적 시각에서 서술을 진행한다. 그런데 <<나>>가 직접 창조주체, 즉 시인을 대신할수도 있고 <<나>>가 시인이 아닌 다른 존재로 나타날수도 있다.</b></p><p><b> 이제 우리는 시집《술 한잔에 정든 님과 시 한수》의 100여수의 시에는 한결같이 <<나>>가 시적화자로 나타나고 있는것을 쉽게 알수 있는데 특별한 증명이 필요없이 이《나》가 곧 시인 홍용암, 즉 화자가 곧 시인임을 알아낼수 있다. 이 100여수의 시에서 임의로 어느 한수를 골라 읽어보아도 우리는 흘러넘치는 사랑의 욕망, 님의 그리움, 합일(合一)의 환희를 보아낼수 있을것이다. </b></p><p><br></p><p><b> 나는 님을 찾아가리라</b></p><p><br></p><p><b> 나는 님이 그리워 찾아가리라</b></p><p><b> 당신이 이 세상 어디에 있건</b></p><p><b> 모든 걸 제쳐놓고 찾아가리라</b></p><p><b> 당신의 이름표를 손에 들고서</b></p><p><b> 온 지구 방방곡곡 참빗질하며</b></p><p><b> 천방지축 무조건 찾아가리라</b></p><p><b> 드디어 속세에 아니 계시고</b></p><p><b> 혹시 다른 저 세상에 계신대도</b></p><p><b> 빗물처럼 흐르는 그 눈물에</b></p><p><b> 베갯잇이 흠씬 젖어 삭기 전에</b></p><p><b> 밤마다 꿈속에서 당신을 찾아</b></p><p><b> 님의 이름 처절하게 부르다 죽어</b></p><p><b> 간간히 흐느끼며 찾아가리라! </b></p><p><br></p><p><b> 이 시는 님을 찾아 기어이 짝을 이루려는 화자의 굳은 결의를 특색있게 읊조리였다. 우리 민족문화에서 <<님>>은 사모하는 대상이나 애인을 가리킨다. (사람에 따라 <<임>>이라고 쓰기도 한다). 님은 일반적으로 개인이 지니고있는 아름다운 이상형의 상징이다. </b></p><p><b> 우리 민족의 시문학사를 조감해보면 님은 전통적으로 임금이나 국가로 상징되여 <<충신련군지사문학(忠臣戀君志士文學)>>을 형성했으며 또한 님은 종교적으로 절대자를 상징하며 영원한 사랑의 대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b></p> <p><b> 순수 에로스, 즉 이성애에 대한 노래로서 홍용암의 이 시집에 수록된 100여수의 시에서 님은 한결같이 화자가 사모하는 이성적 대상을 가리킨다. 당신이 세상 어디에 있건 모든걸 제쳐놓고 온지구 방방곡곡을 참빗질하며 천방지축 찾아가고 만약 님이 저 세상에 계시더라도 밤마다 꿈속에서 찾아가고 기어이 죽어서라도 찾아가겠다는 화자의 결의야말로 우리의 가슴에 감동적으로 다가온다.</b></p><p><b> 짝을 찾아가겠다는것은 곧 이성애에 대한 욕망의 직접적인 표현인데 이성을 찾아가는 목적은 바로 짝을 지으려는것이다. </b></p><p><b> 여기서 시《불붙는 늦사랑》을 먼저 보기로 하자. <<마침내 찰떡 같이 종일 찰싹/ 한몸인 양 딱― 붙어 있습니다>>, <<다시는 헤어지지 않습니다/ 좀처럼 떨어질 줄 모릅니다>>, <<둘은 서로 굳게 옹근 한 덩이 되어/ 더더욱 억세게 끌어안습니다>>, <<이제부터 이 세상 아무도 그들을/ 영원히 절대로 갈라놓지 못합니다>> 등 이러한 시구는 바로 짝을 찾은 모습, 짝을 이룬 원만한 사랑의 모습에 대한 가장 생동한 시적묘술이라고 하여야 할것이다. </b></p><p><b> 이 시집에는 이와 같이 드디여 짝을 이룬 사랑의 모습을 생동하게 보여준 시가 다수 있다.</b></p><p><br></p><p><b> 그리운 당신만을 기다렸다가</b></p><p><b> 한품에 와락 꼭― 얼싸안는</b></p><p><br></p><p><b> </b><b style="font-size: 15px;">―《작은 부두》5련에서</b></p><p><br></p><p><b> 부두는 날마다 그 배를 붙잡아</b></p><p><b> 품에 꼭 끌어안는 꿈을 꿉니다</b></p><p><br></p><p><b style="font-size: 15px;"> ―《배의 꿈 부두의 꿈》3련에서</b></p><p><br></p><p><b> 당신의 그 허리에 꽁꽁꽁</b></p><p><b> 단단히 비끌어 옭매여두렵니다</b></p><p><br></p><p><b> </b><b style="font-size: 15px;"> ―《내가 다시 배로 된다면》3련에서</b></p><p><br></p><p><b> 정녕 배와 부두는 한몸인 양</b></p><p><b> 날마다 딱― 붙어 있습니다</b></p><p><br></p><p><b> </b><b style="font-size: 15px;"> ―《이제부터 시작인 사랑》6련에서</b></p><p><br></p><p><b> 그래서 몸에 붙은 그림자처럼</b></p><p><b> 우리 둘은 항상 서로 붙어 다닌다</b></p><p><br></p><p><b> </b><b style="font-size: 15px;"> ―《그림자》4련에서</b></p><p><br></p><p><b> 여기서 <<한품에 와락 꼭― 얼싸안는>>, <<품에 꼭 끌어안는 꿈을 꿉니다>>, <<단단히 비끌어 옭매어두렵니다>>, <<날마다 딱― 붙어 있습니다>>, <<우리 둘은 항상 서로 붙어 다닌다>> 등 시구는 드디여 짝을 이룬 장면에 대하여 생동하게 표현하고 있는것이다.</b></p><p><b> 주지하다싶이 짝을 이루는 둘의 환희는 이 정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b></p><p><b> 둘이 하나로 되는것은 무한한 환락이요 환희이며 광희(狂喜), 즉 미친듯한 기쁨이라는 단어로밖에 표현할수 없는 그런 기쁨이며 쾌락이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ㅡ1885)의 말처럼 련애란 그 두사람이 일체(一体)가 되는것이며 한 남자와 한 녀자가 천사가 되여 융합하는것이다. 그것은 천국이다. </b></p><p><b> 현대과학의 연구에 근거하면 뇌의 특징영역이 가동되면 심장에 자극이 오고 배속에서 나비가 날아다니는듯한 느낌을 받는데, 마치 심장에서 나오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뇌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밖에도 방금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신경생장인자 NGF의 혈액수치가 현저히 높아진다고 한다. 이 과정에 관여하는 분자들은 사람의 사회적, 화학적 작용 또는 첫눈에 반하는 현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b></p><p><b> 미국 시러큐스대학과 웨스크버지니아대학은 사랑에 빠지는 시간은 단 0.2초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빠지면 마치 환상에 빠진것 같은 희열이 솟아날뿐만 아니라 뇌의 지적영역에도 변화가 일어난다고 한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의 뇌는 12개 영역이 동시에 작동해 도파민과 옥시토신, 아드레날린, 바소파레신 같은 희열감을 자아내는 화학물질을 방출하는데 이때 걸리는 시간이 0.2초라고 한다. 이로부터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그러나 가장 놀라운 기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b></p> <p><b> 이제 아래에서 보게 되는 홍용암의 사랑시에서 창조된 사랑의 시적장면은 바로 사랑의 기적으로만 해석할수 있을뿐 보통사람의 평상시의 심태로는 전혀 이해할수 없다.</b></p><p><br></p><p><b> 애주가와 병나발</b></p><p><br></p><p><b> 오늘밤 둘이 너무 행복해서</b></p><p><b> 밤새도록 술을 마셔 만취한 님</b></p><p><b> 내게 완전 기대여 휘청거리다</b></p><p><b> 푹 쓰러져 깊이 잠든 그대여!</b></p><p><br></p><p><b> 있는 술을 모조리 굽내고 나니</b></p><p><b> 더 마실 술이 없어 두리번거리다</b></p><p><b>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듯</b></p><p><b> 갑자기 눈이 번쩍 그대를 발견한다</b></p><p><br></p><p><b> 온밤 나와 만취토록 음주하여</b></p><p><b> 몸속에 와인술이 골똑 차 있는</b></p><p><b> 그대도 그 채로 한 병 술이다</b></p><p><b> 옴찔대는 고 입술은 술병마개다</b></p><p><br></p><p><b> 술이 없인 못사는 애주가인 나</b></p><p><b> 눈앞의 좋은 술을 어찌 놓치랴?</b></p><p><b> 자꾸 나를 유혹하는 그 술 한 모금</b></p><p><b> 바작바작 더 타드는 내 목마름 ---</b></p><p><br></p><p><b> 마침내 몸이 점점 후꾼 달아</b></p><p><b> 참지 못해 큰 입으로 병마개 뚝딱</b></p><p><b> 술병채로 벌컥벌컥 들이켜듯</b></p><p><b> 그대를 꼭 껴안고 병나발 분다</b></p><p><br></p><p><b> 이 시《애주가와 병나발》은 짝을 이룬 남녀, 둘의 미친듯한 사랑을 잘 보여주는것으로 인상이 깊다. 시적화자는 짝을 이룬 남자인데 너무 행복한 밤에 밤새도록 술을 마셨는데 만취한 상대를 한병 술이라고 생각하고 꼭 껴안고 병나발 분다. 이 시의 화자는 스스로 애주가라고 칭하는데 애주가든 금주가든 관계없이 여기서 시적화자는 남자다. 짝을 이룬 남자다. 취해서 술병이 돼버린 녀자와 술병을 끌어안고 병나발을 부는 남자, 이 장면을 나타내는 말로 그래 미칠듯한 기쁨, 혹은 미칠듯한 사랑이라고밖에 또 무슨 말이 더 있겠는가?! </b></p><p><b> 짝을 이룬 남자는 님을 위해 형체없이 날아가 입술도 뽀뽀하고 젖무덤도 건드려보기 위해서 바람이 되고싶어하고(시《바람이 되고싶다》), 님이 생각날 때면 달콤하게 키스하듯 그 컵에 커피를 타 마시기 위해 님이 쓰던 일회용종이컵을 영원히 간직하며 (시《내가 주은 일회용종이컵》), 님의 식장 통안에 얹혀서 한집식구가 되고 너무나도 빨고 싶은 님의 입술과 키스하기 위하여 숟가락이 되고싶어한다. (시《숟가락》)</b></p><p><b> 어찌 그뿐이랴! 시《방화범과 화형》에서는 세차게 활활활 사랑의 불을 지른 님에게 화형을 선포하며 오늘밤엔 기어이 그대를 찾아가서 그 화형을 집행하겠다고 하며 시《포로와 무기도형》에서는 자기를 깊이 사랑한 그 죄를 물어 님을 무기도형에 처하고 사랑의 쇠창살감옥에 영영 가두고 새장속의 예쁜 새를 들여다보듯 흔상하면서 사랑하고싶을 때마다 불쑥 뛰여들어가 님의 허리 억세게 끌어안고 그 사랑을 화산처럼 터치우겠다고 하며 시《집돼지의 반란》에서는 그대의 사랑앞에서 한마리의 욕심돼지가 되였다면서 갈수록 받는 그 사랑이 성차지 않아 항의하다가 드디여는 마구 굴에서 뛰쳐나와 집돼지로부터 제멋대로 마구 날치는 야생메돼지로 돌변한다. 그러면서 님의 사랑을 만끽하기 위하여 이렇게 하는 자기를 심술쟁이 날강도라 욕해도 좋다고 한다. 시《신비로운 책과 책중독》에서는 님을 하나님이 선물한 가장 신비로운 책이라고 하면서 그대의 외투, 저고리, 원피스, 브래지어... 지어 팬티까지 그 알몸이 나올 때까지 모두 벗겨버리고 온밤 끌어안고 열독하겠다고 한다.</b></p><p><b> 여기에 그려진 시적장면은 거개가 변태심리학으로만 해석할수 있게 변태적이지만 우리는 어쩔수 없이 짝을 이룬 시적화자의 미친듯한 환희에 자극을 받으면서 어쩔수 없이 감동을 받게 되는것이다. 사랑은 원래 이러한 무아의 경지에 빠져들어갈 때라야만이 그 정상에 오르는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살피면서 계산된 행동만 하는 남자는 영원히 진정한 사랑의 쾌락을 맛보지 못할것이다. </b></p><p><b> 또 어찌 이뿐이랴! 사랑은 홍용암시인에게 있어서는 고독을 해결해주는 령단묘약(靈壇妙藥)이며(시《천성병과 령단묘약》) 무지무지 즐거운 삶의 위안이며(시《사랑과 인생》) 섬과 섬, 즉 당신과 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이며 쪽배이며(시《섬과 섬, 그리고 쪽배》) 해빛같은 달콤한 미소로 다가오는 타래엿이며 (시《엿같은 내 사랑 그대》), 사랑의 전설을 노래하는 사랑시집의 원천이며(시《전설이 된 우리 사랑》) 이 험한 세상의 온갖 풍파 이겨내고 헤쳐가는 감동을 쓰는 시의 첫 독자가 님이며(시《사랑이 있어서 시가 있어서》), 사랑만 곁에 있으면 마음이 든든해지고 세상에 부러울게 하나 없고(시《한심한 세상》), 나와 님과 합친 사랑은 어마어마하게 덩치 큰 이 세상보다도 더 값지며 시인이 세상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는 그 리유이고(시《세상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는 이유》), 시인의 피 흐르는 상처뿐인 마음을 달랠수 있는것은 오로지 사랑의 손길뿐이며(시《남자와 여자》), 님과 함께 있으면 천국이요, 님이 없으면 생지옥이고(시《천국과 생지옥》), 님은 사막에서 길증에 쓰러진 나의 앞에 나타나 나를 소생시키는 옥수(玉水)같은 존재이며(시《소생》), 그대는 달도 없는 새카만 밤길을 걸어가는 나에게 한점 등불이 되어 구원해준 존재이다(시《등잔불》). </b></p> <p><b> </b><b style="font-size: 20px;"> </b></p><p><b style="font-size: 20px;"> 2. 사랑의 아픔, 슬픔, 고픔</b></p><p><br></p><p><b> 수천 년전</b></p><p><b> 수만 년전</b></p><p><br></p><p><b> 높다란 육지에서</b></p><p><b> 싱거운 강물이 흘러내려와</b></p><p><b> 그 고인 물들이 모이고 모여</b></p><p><b> 작은 바다가 된 것을…</b></p><p><br></p><p><b> 어느 날</b></p><p><b> 그 작은 바다가 기슭에</b></p><p><b> 먼저 배가 생기고</b></p><p><b> 뒤이어 부두가 생겨났습니다</b></p><p><br></p><p><b> 이별과 상봉이 너무 잦은</b></p><p><b> 배와 부두가 생겨나면서부터</b></p><p><b> 그들이 흘리는 그 눈물에</b></p><p><b> 바다 물이 급속도로 불어나고</b></p><p><b> 또 짜지기 시작하였습니다</b></p><p><br></p><p><b> 지평선 출렁출렁 바닷물은</b></p><p><b> 배와 부두가 흘린 찝찔한 눈물</b></p><p><b> 그 눈물이 자꾸만 섞여들어</b></p><p><b> 드디어 짜디짜게 돌변하고</b></p><p><b> 망망한 큰 바다로 되었습니다</b></p><p><br></p><p><b> 그래서</b></p><p><b> 육지에서 흘러온 강물은 싱겁지만</b></p><p><b> 바닷물은 짜디짠 눈물입니다... </b></p><p><br></p><p><b> ― 시 《바닷물이 짠 이유》전문</b></p><p><br></p><p><b> 이 시에서 시적화자는 남자로 비유된 부두와 녀자로 비유된 배가 흘린 눈물로 하여 바닷물이 짜게 되였다고 한다. 시인은 극도로 과장된 상상력으로 남자와 녀자의 사랑은 눈물로,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으로만 충만되는것이 아니라 눈물도 동반한다는 사실을 힘주어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b></p><p><b> 사실 인류의 기나긴 력사를 회고해보면, 아니 한번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짝을 찾는 일은 쉽지가 않으며 짝을 이루고서도 그냥 어떤 불안, 아픔, 슬픔을 겪게 된다는것을 알수 있을것이다.</b></p><p><b> 고금중외의 많은 석박사들의 연구결과도 그렇다는 결론을 내린다. <<환희 그 자체는 4분의 3이 슬픔이다>>(A 로우얼《칼날과 양귀비씨》에서), <<기쁨후에 슬픔이 오는것은 하느님의 뜻이다>>(루라우투수《암피트루오》에서), <<가장 달콤한 기쁨을 진동시키는 심금은 가장 깊은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번즈《감미로운 감수성》에서). </b></p><p><b> 이밖에도 사랑은 가장 달콤한 기쁨이요, 가장 처절한 슬픔이다. 사랑속에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언제나 싸우고 있다. 고통이 없는 사랑에는 삶이 없다. 사랑의 기쁨은 순간, 사랑의 고통은 평생이라는 등등 말이 있다. 사실상에서 사랑과 아품은 쌍둥이처럼 붙어다니는것은 어느 한 부류 인간들의 체험만이 아니라 전 인류적인 체험이다. 어째서 이렇게 되는가? </b></p><p><b> 아직까지 사랑에 내내 아픔과 슬픔, 외로움과 고픔이 병행되는가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은 없다. 이것은 마치 뉴톤의 만유인력법칙은 확실히 진리인데 아직까지 그 원인을 해석하지 못하는 인류의 처지와 같다고나 할가? </b></p><p><b> 아무튼 세상 어느 시인이라도 바보가 아니라면 결코 사랑의 기쁨만을 노래하면서 사랑의 아픔과 슬픔을 외면하지는 않을것이다. </b></p><p><b>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바다물이 짠 리유에 대한 홍용암의 과장된 상상력에 대하여 수긍하게 되는것이다.</b></p><p><b> <<뼈아픈 사랑>>, <<까무러지게 아프지만>>, <<나는 한없이 외로운 부두>>, <<한없이 너무 아픈 사랑>>, <<피 흐르는 상처뿐인 이 마음>>, <<언제나 그 속이 텅ㅡ 비어 있다>>, <<그리움에 속이 싹 타서 재가 되었다>>, <<내 가슴이 우는 소릴 들었습니다>>, <<내 가슴엔… 더더욱 시퍼렇게 멍이 들었습니다>>, <<망망한 죽음의 그 사막에서/ 오늘도 나는 외로이 걷고 있다>>, <<뭉클 가슴이 너무 쓰리다>>, <<사랑에서 굶주리며 성장한 나는… 혹심한 영양실조 불행한 아이>>, <<아무도 잘 몰라/ 이 가슴에 꽉 막히도록 쌓이고 쌓인/ 온갖 스트레스, 콤플렉스, 트라우마...>>, <<속으로만 소리없이 간간히 흐느낀다>>, <<구새먹은 너무나 공허한 가슴>>, <<가슴이 싹 타서 풀썩 재가 되고>>, <<상처만 낭자한 갈대>>, <<기실 내가 얼마나 아프고 쓰린지/ 아무도 그 속을 전혀 모른다>>, <<그 꽃처럼 나도 그리 웁니다>>, <<꽃과 함께 서로 꼭 붙잡고/ 펑펑펑 목 놓아 울어버려요>>, <<찬바람 불어오는 이 가을에는/ 계절처럼 추워지는 쓸쓸한 마음>>, <<피 같은 눈물 안으로만 슴배어/ 그 꽃잎이 더더욱 진붉습니다>> 등등.</b></p><p><b> 이런 시구나 시이미지는 사랑에 대한 시인의 절절하고도 심각한 체험을 풋풋하게 나타내고 있는바 여기서 필자는 중세기의 영국의 시인 반필드의 <<사랑이란 광증(狂症)이요, 불꽃이며 천국이며 지옥이다. 그곳은 쾌락과 고통과 슬픔과 후회가 사는 곳이다.>>라는 명언을 상기하면서 사랑의 신비성과 비밀 혹은 사랑의 본질에 대한 시인 홍용암의 깊이있는 이해에 감탄하였다. </b></p><p><b> 사랑이란 원래 이런것이 아닌가! </b></p> <p><b> </b></p><p><b style="font-size: 20px;"> 3. 사랑시에서 홍용암의 독자적 추구</b></p><p><br></p><p><b> 세상에 흔한것이 사랑시다. 사랑시 한두수 써내지 않은 시인이 없으며 아직 시인이란 사회적신분을 가지지 못한 시학도들도 대개 사랑시 쓰기를 즐긴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면 성공한 사랑시는 세상에 많지 않은줄로 알고 있다.</b></p><p><b> 그런데 이번 홍용암의 사랑시집《술 한잔에 정든 님과 시 한수》를 접한 느낌은 좀 달랐다. 왜냐하면 이 시집에서 창조주체의 사랑에 대한 생명체험과 사랑시에 대한 독자적인 추구가 돋보였기때문이다.</b></p><p><br></p><p><b> 첫째, 창작방법</b></p><p><br></p><p><b> 창작방법으로부터 접근한다면 이 시집에 수록된 100여수의 시는 례외없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방법과는 거리를 둔 고전시학에 기초한 사실주의방법이라고 할수 있다. </b></p><p><b> 문학예술에서 사실주의방법이란 한마디로 개괄한다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충실히 묘사하는것이라고 할수 있는데 물론 력사의 흐름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실주의도 많이 변화되였는바 비판적사실주의, 혁명적사실주의, 사회주의사실주의, 혁명적사실주의와 혁명적랑만주의 결합, 주체사실주의, 민족사실주의, 신사실주의 등등 그 류파와 사조도 다양하다.</b></p><p><b> 홍용암의 사랑시를 보아도 큰 틀에서 보면 사실주의라고 할수 있지만 매 한수한수의 시편을 잘 살펴보면 아주 복합적임을 알수 있는바 그것들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이 한편의 평론에서는 불가능하고, 여기서 한두마디 한다면 홍용암의 사랑시는 철저하게 평범한 일상을 영위해가는 보통사람들의 사랑을 읊조리고 있으며 제도와 리념의 속박에서 해탈되고 권세의 핍박, 금전의 유혹 혹은 물질성에 구속되지 않고 사랑이 없는 성애 등 사랑의 타락을 거부하고 사랑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리론을 선양하지 않고 또한 미사려구(美辭麗句)로 포장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사랑표현이 매력적이며 자유롭고 개방적이고 명랑한 심태, 순수한 사랑의 모습, 시정이 무감각적으로 흐르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다. </b></p><p><b> 그리고 아래에서 계속 담론하겠지만 홍용암의 사랑시는 상징법을 아주 활발하게 리용함으로써 총적으로 고전시학에 기초한 사실주의라고 할수 있는 사랑시에 또 다분하게 모더니즘색채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이미지의 창조에서 하나의 대상을 여러가지 시각에서 관조하여 여러수의 시를 창조함으로써 상징의 숲을 이루었다고 하면 좀 과장이겠지만 상징의 큰 덩어리를 이루었다고 할수는 있을것 같다. 례를 들면 배와 부두를 나와 님의 상징으로 읊조린 시만 해도 20여수가 된다. 또 홍용암시인은 시창작에서 상호텍트스성 실험으로서 부분적으로 전통적인 사실주의시에 대한 해체주의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이 시집에 모더니즘 혹은 포스터모더니즘 색채를 부여하고 있다.</b></p><p><b> 그리고 외적인 모습으로 보기와는 다르게 이 100여수의 시를 잘 읽어보면 시인은 내내 자기의 현실적인 삶과 정신존재에 기초하여 시의 진실성과 감화력을 높이고 있는것이 아주 돋보인다. 다시 말하면 시종 자기의 생명체험으로부터 출발하여 시를 쓰고 있다. </b></p><p><b> 홍용암의 시에는 이따금씩 <<고달픈 인생살이>>, <<고달픈 이 세상을 살면서>> , <<이 험한 세상의 온갖 풍파>>, <<더러운 세상>>, <<골치 아픈 이 세상>>, <<너무 힘든 이 세상>> , <<세상이 나에게 등을 돌리니>>, <<헝클어진 한 광주리 같은 복잡한 세상사>>, <<무정한 속세>>, <<황량한 사랑의 사막>>, <<꽃이 없는 쓸쓸한 이 세상>>, <<한심한 세상>> 이같은 시구를 볼수 있는데 우리는 이런 시구에 대하여 사전식 해석에 멈추지 말고 이런 시구가 시에서 일으키는 역할을 시적으로 파악하여야 하며 시인 홍용암의 인생경력 등 여러가지 시각, 다방면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b></p><p><b> 16세에 시집을 낸 신동으로 불리울뿐만 아니라 22세에 장사길에 나서 근 30년간 상업전선에 몸을 담구고 있으면서 중국, 조선, 한국에서 50여권의 저서를 펴낸 홍용암의 인생경력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는바 그의 인생체험은 동년배의 그 어느 누구보다 풍부하고 복잡하며 사회에 대한 안광도 누구보다 심각하여 부정부패와 비정비리, 정치카리스마의 추락과 도덕수준의 하락에 대한 인식 또한 남다를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홍용암의 사랑시에서 이따금씩 보이는 세상에 대한 저주와 인생에 대한 한탄이 충분히 이해되는것이다.</b></p><p><b> 시인의 내적인 생활과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는 홍용암의 사랑시에서 더욱 기특한것은 화자의 저주와 한탄에는 계선을 벗어난 욕설이거나 장황한 설교가 없는것이다. 그대신 세상을 조금 우습게 보는 정신경지의 높이가 있으며 자기의 시정을 공제할줄 아는 성숙된 시적자세가 있다. 분노가 시인을 낳는다는 어느 위인의 어록이 있지만 그것은 전쟁문화심리의 소생인것 같고 아무래도 평화시기에는 분노가 시인을 낳는것이 아니라 사랑이 시인을 낳는다고 해야 할것 같다. </b></p><p><b> 분명한 태도표시는 없지만 시인 홍용암은 사랑시의 특점 혹은 사랑시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면모에 대하여 명확히 리해하고 있는 시인이다. </b></p> <p><br></p><p><b> 둘째, 상호텍스트성 </b></p><p><br></p><p><b> 상호텍스트성(互文性 Intertextuality)이란 근년에 흥기된 새로운 텍스트리론이다. 상호텍스트성이란 결구주의의 우점을 계승하고 해체주의와 포스터모더니즘의 론리중심주의를 파괴하는 전통을 흡수하여 텍스트본신의 단렬성과 불확실성을 강조한다. 이 리론은 현대텍스트리론의 발전방향과 일치하기에 보편적인 중시를 받는다.</b></p><p><b> 이 용어는 프랑스의 크리스테바가 처음 사용했는데 문학적텍스트의 의미와 해석은 어떤 한 작가의 독창성이나 특수성에 귀속되는것이 아니라 기존의 개별적인 텍스트들 및 일반적인 문학적 규약과 관습들에 의존해있다는것이다.</b></p><p><b> <<공개적인 은밀한 인용과 인유(引喩)에 의해서든지 이전의 텍스트가 지닌 특성을 후의 텍스트가 흡수하든지 또는 공통의 문학적규약들과 관례들에 단순히 참여함으로써 어떤 하나의 문학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들의 메아리가 되거나 그 텍스트들과 불가피하게 련결되는 여러가지 방법들을 가리키는데 쓰이고 있다.>></b></p><p><b> 이제 상호텍스트성이란 리론으로 시집《술 한잔에 정든 님과 시 한수》를 조감해보면 시인 홍용암은 사랑시창작에서 상호텍스트성에 상당한 흥취를 보이며 훌룡하게 실천하고 있다는것을 보아낼 수가 있는데 그 가장 대표적인것이 바로 제4집《꿈꾸는 내 사랑》에 수록된 18수의 시편들이다.</b></p><p><b> 이 18수의 시편은 한결같이 백석의 시《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련결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백석의 시《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홍용암의 시집《술 한잔에 정든 님과 시 한수》의 제4집《꿈꾸는 내 사랑》에 수록된 18수의 시는 상호텍스트성이 있다.</b></p><p><br></p><p><b>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b></p><p><br></p><p><b>가난한 내가</b></p><p><b>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b></p><p><b>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b></p><p><br></p><p><b>나타샤를 사랑은 하고</b></p><p><b>눈은 푹푹 날리고</b></p><p><b>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b></p><p><b>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b></p><p><b>나타샤와 나는</b></p><p><b>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b></p><p><b>산골로 가자 츨츨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b></p><p><b>마가리에 살자</b></p><p><br></p><p><b>눈이 푹푹 내리고</b></p><p><b>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b></p><p><b>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b></p><p><b>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b></p><p><b>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b></p><p><b>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b></p><p><br></p><p><b>눈은 푹푹 내리고</b></p><p><b>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b></p><p><b>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b></p><p><br></p><p><b> 백석의 이 시와 홍용암의 시집 제4집에 수록된 18수 시중 어느 한수를 비교해보아도 우리는 두 시의 상호텍트스성을 보아낼수 있다. 물론 백석과 홍용암은 서로 전혀 틀리는 사회에서 거의 70년이란 시간을 상거해있고 국적과 고향이 다르고 가치관과 리상이 다르다. 그러나 광의적 의미에서 백석과 홍용암시인은 언어문자의 사용에서 공통한 문화권에 속하고 있으며 아울러 객관적으로 백석의 시와 홍용암의 시는 상호텍스성이 있는것이다. 하기에 홍용암은 백석의 시를 통하여 백석시인과 자기의 어떤 공통성을 발견하였으며 새로운 시텍스트를 창조하는데 수요되는 시적내용과 시적수법을 발견할수 있었던것이다. </b></p><p><b> 례를 들면 백석의 사랑과 꿈은 역시 홍용암 자기의 사랑과 꿈이였으며 백석의 나타샤는 홍용암 자기의 님이였으며 백석이 세상을 보는 눈은 자기와 비슷하였던것이다. 홍용암의 18수의 시를 분석해보면 확실히 홍용암의 시는 백석시 전통계승이며 백석시의 메아리였으며 역시 백석시에 대한 해체였으며 또한 백석의 시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시적창조였다는 결론을 내릴수 있겠다.</b></p><p><b> 중국조선족시단에서 상호텍스트성에 대한 추구는 물론 홍용암이 최초가 아니다. 필자의 기억에 근거하면 지난 세기 말로부터 몇몇 권위적인 시인들에 의하여 시험이 진행되였으나 그 성과가 미미하였는데 홍용암의 이 18수의 시는 가장 성공적인 시험이였다고 할수 있겠다.</b></p><p><b> 이 시집의 다른 여러수의 시에서도 상호텍스성을 담론할수 있는데,례를 들면 제1집《당신은 배, 나는 부두》에 수록된 20수의 시는 한국의 가수 심수봉의 노래《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와의 상호텍트스성을 담론할수 있는바 편폭관계로 여기서 더 펼치지 않기로 한다. </b></p> <p><b> </b></p><p><b> 셋째, 문화상징성</b></p><p><br></p><p><b> 홍용암의 이 시집은 창작수법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것이 상징법이다. </b></p><p><b> 이 시집의 100여수의 시에서 사용빈도가 높은 단어들로 <<배>>, <<부두>>, <<섬>>, <<님>>, <<꿈>>, <<바다>>, <<술>>, <<달>>, <<갈대>>, <<꽃>>, <<나비>>를 헤아릴수 있는데 이것들 모두가 상징어들인데 그 자체를 넘어서 다른것을 가리키는것들, 다시 말하면 직유나 은유에서 원 관념은 숨고 보조관념만 나타나있는 형태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문제는 이상의 상징어들은 보통상징이 아닌 문화상징어들이란것이다. </b></p><p><b> 상징과 상징시에 대한 개념은 시인들속에서 상식으로 되였기에 더 펼칠 생각이 없지만 문화상징에 대하여 몇마디 더 하기로 한다.</b></p><p><b> 한 민족의 고유한 전통문화속에는 그 민족이 오래동안 공유해온 상징이 있는데 거기에는 자연물이나 인간이 만든 도구 그리고 행동의 규범이 스며있고 합리적 과학적 접근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상적의미가 있는데 이런 사물을 문화상징물이라고 하고 이런 언어를 문화상징어이라고 한다. </b></p><p><b> 이제 홍용암의 사랑시에서 문화상징물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보기로 하자.</b></p><p><br></p><p><b> 첫째, 배와 부두</b></p><p><b> 이 시집의 제1집《당신은 배, 나는 부두》에는 시 20수가 수록되여 있는데 어느 시에나 모두 <<배>>와 <<부두>>가 등장한다.</b></p><p><b> <<배(船)>>는 물위에 떠다니며 사람이나 짐따위를 실어나르게 만든 탈것. 불교에서 배는 피안과 차안을 오가는 매개물로서 무명중생들을 제도하여 해탈에 이르게 하려는 보살정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배는 고난의 바다나 강을 헤쳐나간다는 점에서 실존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 또한 배는 선각자나 혁명가나 님을 의미하기도 하고 삶의 터전을 빼앗기우고 먼 이국땅으로 흘러다니는 류랑민의 처지를 상징하기도 한다.</b></p><p><b> <<부두>>는 항구에서 배를 대여 려객이 타고 내리거나 짐을 싣고 부리는 곳, 부두는 짝을 이룬 남녀의 보금자리로 상징되기도 하고 파도 세찬 바다에 나간 배와 대조되는, 상대적으로 고정되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장소로 상징되기도 하고 부모 곁을 떠나 타향에서 떠돌던 방랑자들이 돌아오는 고향, 쉼터로 상징되기도 한다. </b></p><p><b> 홍용암의 시에서는 배는 사랑의 대상에 대한 닿을수 없는 존재론적 거리를 좁혀주거나 잇게 해주는 매개체의 모습을 상징하기도 하며 때로는 헤여진 남녀의 어느 한짝을 상징하기도 한다.</b></p><p><b> 홍용암의 시에서 부두는 짝을 이룬 두 남여의 보금자리로 상징되기도 하며 헤여진 남녀의 어느 한쪽을 상징하기도 한다.</b></p><p><br></p><p><b> 둘째, 섬</b></p><p><b> 물로 주위가 둘러싸인 작은 륙지, 광란의 바다에 비하여 안전한 피난처로 상징되기도 하고 섬은 무리와 따로 떨어진 개체의 고독과 외로움을 주로 표상한다. </b></p><p><b> 한편 섬은 륙지로부터 떨어져 있어 고립화됨으로써 그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모든것이 떠나버린 뒤에 남는 단독자의 모습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자기만의 성스러운 령역을 표상하기도 한다. </b></p><p><b> 홍용암의 사랑시에서는 섬이 많이는 짝을 이룬 남녀의 상징물로 나타나기도 하며 어렵고 복잡함을 피하여 찾아가는 피난처 혹은 행복의 동산으로 상징된다.</b></p><p><br></p><p><b> 셋째, 술</b></p><p><b> 술은 알콜성분이 들어있는 음료를 통털어 이르는 말. 술은 사람을 취하게 하는 속성상 리성적(理性的) 측면보다 본능이나 감성 령역을 강화함으로 취함에 비롯된 미혹이나 혼돈, 미분화(未分化)를 야기시킨다.</b></p><p><b> 전통적으로 술은 또 도취성과 망각 등이 강조되였다. 절망적인 상태에서 술이나 마시고 도취되여 괴로움을 망각하려고 한것이다. </b></p><p><b> 현대문학에서 술에는 전통적인 친근성과 함께 현대적이며 서구적인 멋이 배여있다. 술은 병리적인 사회적 징후를 내포하기도 한다. 붉은 포도주를 많이 마시는 서구에서는 술을 피와 동일시하며 술은 생명 또는 불멸성의 상징이였다. </b></p><p><b> 술은 또 일상적 인식의 소실을 의미하고 외부조건으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한다. 서구의 여러 나라 사람들은 취하지 않고서는 신들의 세계와 접촉할수 없다고 생각한다. 술은 또 물과 불의 혼합물로서 생명력을 상징한다. 술을 대상으로 하는 노래 혹은 술을 마시면서 하는 노래 즉 사랑노래에는 흥겨움이나 도취 또는 후회, 저주 등 온갖 모순된 감정이 뒤섞인다. </b></p><p><b> 홍용암의 사랑시에서 술은 님과 나 사이를 보다 친근하게 하는 촉매제로 그려지기도 하고 술을 마시면 행복해지고 시가 나온다는 식으로 자아의 생명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b></p><p><b> 그리고 홍용암에게는 님을 술이라면서 노래하는 사랑시가 많은데 이런 시편들에는 사랑하는 님을 자아의 본능이나 왕성한 생명력을 자극하고 마음을 흥분시키고 도취시키는 술에 상징한것이다.</b></p><p><br></p><p><b> 넷째, 달</b></p><p><b> 지구의 유일한 위성, 달은 주기적으로 소멸과 생성을 반복한다는 점으로 그것으로 인해 재생이나 부활을 의미한다. </b></p><p><b> 또 녀성의 주기적 생리현상과 련관되여 녀성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b></p><p><b> 한편 밤의 어둠과 대비되여 위험성과 보호성의 량가적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b></p><p><b> 달은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하며 신비스러움을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시에서 외로움과 그리움, 랭정함과 처연함의 정서를 자아내는 자연물이라 할수 있다. </b></p><p><b>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정서와 감수성은 달의 상상력이라 부를수도 있겠다.</b></p><p><b> 홍용암의 사랑시에서 달은 흔히 명월(明月), 아름다운 님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아름다움과 애욕을 자극하는 자연물로 나타난다.</b></p><p><b> 이밖에도 바람, 꿈 , 나비, 꽃, 갈대… 등 자연물들의 문화상징적 의미를 노래한 시편들도 다수 있으나 편폭관계로 더 펼치지 않기로 한다. </b></p> <p><b> </b></p><p><b> </b><b style="font-size: 20px;"> 나가는 말</b></p><p><br></p><p><b> 여느 시인의 시와 마찬가지로 홍용암의 사랑시에도 부족점이 보인다.</b></p><p><b> 시적 함축과 시적생략이 모자라고 시적구조상에서 산문화경향이 존재하며 한자어의 람용도 있다.</b></p><p><b> 그러나 이 시집은 특색이 보여서 고무적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시에서 시인의 독자적인 추구가 돋보인다. 사랑의 본연에 대한 리해가 남다르며 홍용암의 사랑시에서 끝없는 환희, 미칠듯한 열정, 몰아의 경지에 대한 표현과 피할수 없는 그리움, 외로움, 아픔, 슬픔, 고픔에 대한 관조는 도덕수준이 하강하고 사랑이 없는 섹스가 범람하고 핵심가정이 마구 허물어지는 우리 민족의 삶의 현장과 대조되면서 우리에게 주는 계시가 적지 않으며 고전시학에 기초한 사실주의에 충실하면서도 시적상징에 대한 추구, 특히 민족문화상징물에 대한 파악과 상호텍트스성에 대한 실험은 시단에 마노은 정보를 던져주고 있다고 할수 있다.</b></p><p><b> 홍용암의 사랑시집《술 한잔에 정든 님과 시 한수》를 읽으면서 한달간 진행된 고민을 인제 끝마칠 때가 된것 같다.</b></p><p><b>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한다면 홍용암시인에게 사랑에 대한 시는 여기서 끝날수 없다는것을 귀뜀해주고 싶다. 왜냐하면 사랑은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어야 하고 홍용암시인이 그렇게 소망하는 <<아들딸을 한구들 낳아 길러야 하기>>때문이며 그 와중에 홍용암의 시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되여 더 넓게 더 깊게 더 크게 성장하고 성숙하여야 하기때문이다.</b></p><p><br></p><p><b> 2019년 3월 15일. </b></p><p><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