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7.</p><p><br></p><p>서당까지 가는 길은 짧았다. </p><p><br></p><p>서당이 가까워질수록 내 마음은 무거워졌다. 간밤에 설이와의 대화가 머리에 떠올랐다. 보내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내가 설이의 앞날을 어떻게 보장해줄수 있단 말인가. 여현의 확고한 태도로 보아 내가 어떻게 소진, 장의의 언변을 동원한다 해도 설이를 소실로 맞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설이는 그냥 이대로 명분이 없는 신분으로 지내야 한단 말인가.</p><p><br></p><p>뒤에서 따라오는 여현의 발자국소리가 저벅저벅 들려온다. 기축옥사와 등등곡, 그리고 곧 들이닥치게 될 왜란과 그전의 내 운명까지 머리속이 한결 혼란스러웠다.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만 최악의 국면을 피할수 있을까. 등등곡, 등등곡이라…</p><p><br></p><p>“오셨사와요.”</p><p><br></p><p>서당앞에 나란히 선 설이와 숙주의 미소가 눈부시다. 상봉의 회포는 다 풀었는지 설이의 눈이 다소 부어있긴 하나 그녀의 밝은 기색으로 보아 뭔가 생각이 굳어진 것 같기도 했다. 하여 나는 삼검불처럼 엉겨붙은 사색의 실마리를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p><p><br></p><p>“소인 서방님의 이 은혜 어떻게 갚을지 모르겠사오나 조금만, 조금만 더 염치없는 부탁을 해도 되겠사옵니까.”</p><p><br></p><p>숙주가 내뒤를 향해 넙적 큰절을 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현의 표정은 담담했다.</p><p><br></p><p>“아이를 찾아오려고.”</p><p>“네.”</p><p>“내가 손을 써보지 않은 줄 아느냐.”</p><p>“서방님.”</p><p>“이혼서를 써주지 않는구나. 은을 준다고 해도, 사람을 찾아 협박을 해도 먹히지 않았다.”</p><p>“이혼서를 가져 무에 합니까.”</p><p><br></p><p>숙주의 말에 여현은 놀란 기색으로 그를 보았다.</p><p><br></p><p>“허면…”</p><p>“역시 샌님이라 어쩔수 없군요.”</p><p><br></p><p>듣다못해 내가 그들의 말을 중단했다. 그리고는 숙주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p><p><br></p><p>“무슨 좋은 방법을 생각했느냐.”</p><p>“네, 아씨. 저는 아이를 훔쳐오겠습니다.”</p><p>“훔쳐…?”</p><p>“그리고는 다시 찾아가 아이를 내놓으라 하겠습니다.”</p><p><br></p><p>여현은 어안이 벙벙해졌고 나는 숙주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p><p><br></p><p>“잘 생각했네.”</p><p>“소인 강호를 떠돌아다니는 몸이라 생각나는 건 다 이런 무뢰배의 행적입니다만…”</p><p>“아니, 좋은 방법이야.”</p><p><br></p><p>나는 숙주의 앞으로 다가가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쿡 쥐어박았다. 그가 움찔하는 게 보였고 나는 웃으면서 그 뒤를 이었다.</p><p><br></p><p>“대신 아이를 내놓으라고 갈 때는 명심해. 아이를 내놓기만 하면 살인죄로 고소하지 않는다고. 그렇지 않으면 그 고얀 놈이 아이를 죽였다고 관가에 고발하겠다고 말이야.”</p><p>“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쪽은 양인인데…”</p><p>“이거 왜 이래? 설이도 양인이야.”</p><p>“네?”</p><p>“뭘 그리 놀라는가. 설이가 시집가기전 내가 설이 노비문서를 없애버렸네.”</p><p>“그게 정말입니까.”</p><p><br></p><p>이번에는 설이가 눈이 휘둥그래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웃었다. 그깟 노비문서, 설사 아직 있다 해도 내가 끝까지 내어놓지 않으면 그만이다. 조선시대는 무슨 법이 이리 허접한가. 양반의 말이 곧 법이 되는 이러한 신분제도에 화를 내기보다는, 이제는 이런 제도를 역이용해야 하겠다는 스멀스멀 생각이 들었다.</p><p><br></p><p>성미 급한 숙주는 그길로 아이 찾으러 떠났고 나와 여현도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설이에게 몇마디 더 주의를 준 후 나는 여현을 따라 귀가의 길에 올랐다. 가마를 부르려는 여현을 제지시킨 이유는, 오래간만에 바깥세상을 본지라 좀 더 이 시간들을 누리려는 생각때문이었다. 여현은 내 고집에 미간을 찌푸렸다.</p><p><br></p><p>“꽤 먼 거리인데 괜찮겠소?”</p><p>“어제도 걸어왔습니다만.”</p><p>“어젠 명월관에서부터 걸어왔고.”</p><p>“아.”</p><p>“정말, 명월관까지는 어떻게 온 것이요?”</p><p>“말을 탔지요.”</p><p><br></p><p>물어보는대로 순순히 대답했을 뿐인데 눈앞의 이 남자의 낯빛이 금세 흐려진다. 내 대답이 뭐 잘못 되었는가. 내가 말을 타는 걸 못본 것도 아니고.</p><p><br></p><p>“누구 말을 탔소?”</p><p>“그거야 광해…”</p><p><br></p><p>아아…광해군과 한 말을 탔었지. 그에게 나는 허균의 신분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뭐. 머리속의 생각이 곧바로 입밖으로 튀어나간다.</p><p><br></p><p>“그게 뭐요. 그전엔 술도 같이 마셨는데.”</p><p><br></p><p>그가 입술을 사려물더니 홱 돌아서서 쥉쥉걸음을 걷는다. 나는 잰걸음으로 급히 따라가서 그의 팔을 잡았다.</p><p><br></p><p>“그렇게 빨리 가지 마세요.”</p><p>“…”</p><p>“나 여기 길을 모른단 말입니다.”</p><p>“어제는 잘도 다니더만.”</p><p>“차림을 보시오. 차림을…어제는 남장 차림이었는데 지금은…”</p><p><br></p><p>그의 시선이 내 장옷으로부터 옥색 치마저고리를 차례로 훑고 지나갔다. 나는 치마자락을 만지작 거렸다.</p><p><br></p><p>“다 설이가 오늘아침 이렇게 입힌 탓이지 뭡니까. 어제 꼴이 그게 뭐냐며…”</p><p>“잘한 거 같소만.”</p><p>“네?”</p><p>“되었소.”</p><p><br></p><p>그는 자신의 소매에서 내 손을 잡아 떼어놓았다.</p><p><br></p><p>“앞장 서시오. 내 뒤에서 걸을 터이니.”</p><p>“그게…더 이상하단 말입니다.”</p><p>“뭣이 이상하단 말이요.”</p><p>“그게 그러니까…”</p><p><br></p><p>현대처럼 내가 마음껏 활개치며 걸을수도 없고 양반 가문의 여인처럼 조신하게 걸으려니 아주 죽을 맛이라는 말은 차마 못꺼내겠다. 주변을 두리번 거렸더니 뭔가 눈에 띄여서 나는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p><p><br></p><p>“저것 보세요. 마차들이 다니면서 말들이 똥을 쌌는데도 주인들은 치우지도 않고…가다가 밟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p><p><br></p><p>눈에 들어오는 대로 말했는데 그게 뭐가 이상한지 여현의 얼굴이 다시 묘하게 일그러진다. 잠시후, 피식 하고 그가 웃었다. 그리고 그의 눈부신 웃음을 보자 가슴속에 미묘한 전율이 스치고 지나갔다. 언제부터인가, 이 남자의 일거수 일투족이 이토록 신경씌이게 된 것은.</p><p><br></p><p>“참 보기 좋습니다.”</p><p><br></p><p>입이라도 한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최준희, 제발 정신차려. 꽃미남을 보고 얼에 빠져있을 나이는 훨씬 지났잖아. 여현이 고개를 기웃했고 나는 그뒤를 덧붙였다.</p><p><br></p><p>“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이 수려한 풍광, 이 따사로운 해빛이…”</p><p><br></p><p>지나가는 마차 한대가 덜컹거리며 하필 길옆의 오물을 내게 들씌우지만 않았다면…말이다.</p><p>……</p><p><br></p><p>“여긴 참 미개합니다!”</p><p><br></p><p>길가 포목점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비단 몇필을 고른 후, 잠시 포목점 내실을 빌려 여현의 겉도포를 벗기며 내가 혀를 찼다. 하도 여현이 빠르게 나를 막아섰으니 말이지 방금전의 똥물세례는 온전히 내가 감당할 몫이었다. 다행이 등쪽에만 오물이 튕기긴 했지만 그 옷차림 그대로 귀가할수는 없는 일이었다.</p><p><br></p><p>“한양을 미개하다고 하는 사람은 부인이 첫사람이요. 자고로 조선은 고도의 문명에 모든 법치와 예의가 집중된 나라…”</p><p>“예예…그러한 곳이 나중에 외국인들에게 더럽고 불결한 나라라고 기록이 됩니까.”</p><p>“왜국? 왜에서 그런 말을 했단 말이요?”</p><p><br></p><p>당췌…대화가 통해야 말이지.</p><p><br></p><p>포목점 주인에게 얻은 반짇고리에서 실과 바늘을 꺼내고 명주에 가위질을 한 후 빠른 속도로 겉도포를 지어내려갔다. 현대에서 최여사가 거액의 교육비를 지원하면서 익힌 재간들이었다. 겉도포는 지어본 적은 없지만 여기 와서 몇번 입어본 결과 대체로 현대의 일부 기성복보다는 쉬운 느낌이었다. 물론 내게서 명장인의 솜씨를 기대한다면 꿈깨라고 해야 하지만.</p><p><br></p><p>도포가 완성되는 동안 여현은 한쪽에 앉아 묵묵히 나를 주시했다. 대충 바느질을 마무리 하고 옷을 한번 턴 후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p><p><br></p><p>“나머지 마무리는 집에 가서 향단에게 부탁하기로 하고 일단은 이걸로 대체해요. 오물로 얼룩진 옷보단 나을 거 아니에요.”</p><p><br></p><p>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쪽을 향해 두팔을 벌렸다. 나는 옷을 들고 어정쩡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옷 한번 만들어줬다고 뭐 저렇게까지 감격할 일인가. 나는 고개를 숙이고 풋 웃어버렸다.</p><p><br></p><p>“고마움의 표시 치고는…”</p><p><br></p><p>아니다. 착각했다. 지금 방안에 떠도는 정적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급히 고개를 들고보니 여현이 의혹 한가득 담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고보니 그의 자세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p><p><br></p><p>“입혀…달라구요?”</p><p>“아까도 부인이 벗겼소.”</p><p>“그건 그렇지만…”</p><p><br></p><p>아까는 잘못 움직이면 오물이 중의에 스며들가봐 급해서 그런 거고…그렇지만 그에게 있어서 나는 엄연히 그의 아내다. 아마 옷을 입혀주는 것도 당연한 처사일터.</p><p><br></p><p>조금 앞으로 다가가서 그에게 도포를 입혀주었다. 밀폐된 공간의 묘한 기류가 조금 신경씌이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남의 공간에서…</p><p><br></p><p>촉.</p><p><br></p><p>설마가 사람을 잡는다.</p><p><br></p><p>나는 황급히 뒤걸음질 쳤다. 나의 한손은 어느새 내 한쪽 얼굴에 얹은 채였다. 방심했다. 옷을 입혀주고 도포 끈을 매어주느라 가까이 밀착한 사이 그가 느닷없이 내 뺨에 입을 맞추었던 것이다.</p><p><br></p><p>그가 팔만 내밀면 잡힐수 있는 거리, 하지만 좁은 내실이라 더이상 뒤걸음질 칠수도 없는 비좁은 공간…나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렸다.</p><p><br></p><p>“이젠 갈..갈까요?”</p><p>“급하지 않소. 집에 사람을 보내어 마차를 불렀소.”</p><p>“설마 포목점 주인을 보냈나요?”</p><p>“그렇소.”</p><p>“아니, 무슨 주인이 장사도 안하고.”</p><p>“하루 판매량 이상의 보상을 주었소. 올때까지 여길 지켜주겠다고도 했고.”</p><p><br></p><p>좋겠다. 집에 돈이 많아서.</p><p><br></p><p>그런데,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눈앞에 있다. 오늘 하루종일 핑크 기류를 뿜어내는 저 남자를 어떡하란 말인가. </p><p><br></p><p>무슨 남자가, 결혼한지 10년도 됨즉한 아내에게 이토록 살틀하고 다정하단 말인가. 난설헌 허초희가 부부의 정이 없어 그토록 슬프고 우울했다는 역사의 기록은 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인 걸까.</p><p><br></p><p>“할 얘기가 있어요!”</p><p><br></p><p>결국 나를 향해 한발자국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크게 소리질렀다. 그가 맑은 시선을 들어 나를 본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상당히 낯설다. 당황하고, 허둥대고, 심란하고, 불안하다.</p><p><br></p><p>그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한걸음 크게 다가오더니 내가 미처 어쩔 사이 없이 내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혔다. </p><p><br></p><p>“종일 수고스럽게 돌아쳤으니 앉아서 숨이나 돌리시오.”</p><p><br></p><p>숨을 돌리는 게 아니라 숨 넘어갈뻔 했다. 이 양반아. 어디서 조련질이나 배워서. 이러니까 명월도 그를 가까이 모시려고 애쓰지 않았던가.</p><p><br></p><p>“무엇이오. 할 말이라는 게.”</p><p><br></p><p>여현이 의연하게 내 맞은켠에 앉았다. 잠시 숨을 고르게 한 뒤 내가 말했다.</p><p><br></p><p>“등등곡 얘기에요.”</p><p>“등등곡?”</p><p>“네, 벽서는 서방님이 제게 약속하신 대로 일을 벌리지 않을 거라고 믿을께요. 하지만 등등곡은 이제 서울 지방에 차츰 유행으로 퍼질 거에요. 그래서 말인데…”</p><p>“등등곡도 그만하라고?”</p><p>“그 반대입니다. 등등곡으로 옥사를 막아보시죠.”</p><p>“자세히 얘기해줄수 있겠소?”</p><p>“등등곡은 가면과 탈을 쓰고 서로의 얼굴과 신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로 진행이 되어왔지만 이제 그 뒤를 이어 이런 두마디를 더 퍼뜨리세요.”</p><p><br></p><p>나는 여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p><p><br></p><p>“국가가 장차 망할 것을 통곡하고, 재상이나 장수가 적임자가 아님을 비웃는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