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b style="font-size: 18px;"> 사진속의 이 친구는 오늘 내 회억속의 "앞집할머니네" 큰외손자다. 오용이라고 부른다. 그의 집과 우리 집은 농촌에 하방내려가있을 때 앞뒤집으로 살았었다. 그런데 그의 집이 우리 앞집으로 이사올 때에는 그는 이미 길림 어느 학교로 가고 집에 없었다. 그동안 길림화공학원을 졸업하고 북경에서 사업하면서 종종 고향에 다녀갔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나하고는 련락이 없다보니 이때까지 서로 모르고 지냈다. 그렇게 49년이란 세월이 흐른 며칠전 홍영이를 통해 이 친구의 소식을 알게 됐고 오늘 또 이렇게 만났다. </b></p> <p class="ql-block"><b style="font-size: 18px;"> 오용친구하고 난 알고보니 연변1중 동창이였다. 이번에 만나서야 알았다. 그는 3반, 난 2반을 다녔다. 그때 우린 중학교에 입학해서 얼마 안돼 문화대혁명을 겪다보니 한반이 아니고서는 서로 면목을 잘 몰랐다. </b></p> <p><b style="font-size: 18px;"> 오늘 그를 만난 순간 우리 두집이 앞뒤집에서 서로 의지해 살던 나날들이 떠오르며 40여년간 그 누구하고도 하지 못한 두집의 옛이야기를 터놓게 되였다. </b></p> <p><b> 1969년 12월, 우리 집이 해방표자동차에 짐을 박아싣고 연길에서 화룡 서성공사로 하방내려가던 그날 오용친구네는 연변뇌과병원 원장으로 사업하시다가 "6.26전사"로 로과공사병원에 내려가시는 아버지를 따라 로과공사로 갔단다. 몇달후 그의 아버지가 서성공사병원 원장으로 조동하시면서 우리 앞집으로 이사왔다. </b></p> <p><b> 그의 집이 우리 앞집으로 이사올 때는 그는 이미 길림화공학교로 가고 집에는 외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현재 연변병원 신경내과 교수,주임 오광.) 네 식구뿐이였다. </b></p> <p class="ql-block"><b> 오용친구의 본인에 대해서는 그가 방학에 집에 잠간 왔다가다보니 몇년간 앞뒤집으로 살았어도 먼발치에서 희미하게 본 기억밖엔 없다. 낯도 똑똑히 마주본적 없고 이름도 몰랐다. 그저 그의 외할머니가 울 엄마보고 항상 길림에 있는 큰외손자 큰외손자 하시기에 앞집의 큰외손자가 길림 어느 학교에 갔다는것밖엔 몰랐다. </b></p> <p><b> 한번은 내가 집마당 빨래줄에 이불을 볕쪼임시키려고 끙끙거리는데 오용친구가 자기 집 뒤마당에서 왔다갔다하며 뭔가 하는걸 먼발치에서 희미하게 본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이름이 오용인것도 몰랐고 누군지도 몰랐다. 그저 그의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놀러 오셔서 요즘 큰외손자가 방학이 돼서 왔는데 맛있는걸 해먹여야겠다던 말이 떠올라 저 사람이 아마도 앞집 큰외손자겠구나 하고 짐작했을뿐이다.</b></p> <p><b> 또 한번은 내가 방에서 낮잠을 자는데 잠결에 정지에서 울 엄마가 어떤 낯선 목소리의 남자하고 도란도란 얘기하는 소리가 어슴푸레 들려왔다. 오후 학교갈 시간이 다되였는데 정지문으로는 감히 못나가고 골방문으로 살그머니 빠져나갔던 기억이 난다. 저녁에 엄마하고 물으니 앞집할머니네 큰외손자가 인사왔댔단다. 몇년간 앞뒤집으로 살면서 그에 대한 기억은 이것이 전부다. 그저 훤칠한 키에 희여멀쑥한 사람이란 기억밖엔 없다. 그것도 먼발치에서 희미하게 본 기억뿐이다. </b></p> <p><b> 비록 우리 둘의 추억은 없지만 두집의 너무나도 깊은 우정으로 하여 오늘까지도 서성촌에서의 나날을 회상한다면 오용친구네와 우리 집과의 추억이 아주 많은 비례를 차지한다. 그래서 오늘도 오용친구를 보자 반가움과 함께 만감이 교차했는가본다. </b></p> <p><b> 얼기설기 얽힌 두집 인연, 살가운 정 넘치던 두집사이, 정말 잊을수가 없다. </b></p> <p><b> 우리 두집은 연길에서 함께 하방내려온 집이라는데서도 그렇겠지만 앞집할머니와 나의 엄마가 아주 극진한 사이라는데서 더 가까왔는지도 모르겠다. 앞집할머니는 합작사에 뭘 사러 갈 때면 꼭 우리 집에 들리여 "계시오? 합작사에 안가겠소? " 하셨고 돌아갈 때도 꼭 들리여 머리의 임을 내려놓고 반나절 울 엄마와 얘기나누군 했다. 두 로인이 어찌나 재미나게 얘기나누시는지 방에서 숙제하던 나도 저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서 동냥해 듣군 했다.</b></p><p><b> </b></p><p><b> 우리 집마당에는 2, 3백평도 더되는 터밭이 있었다. 부모님들이 알뜰히 가꾼 터밭에서는 봄부터 갖가지 채소들이 싱싱하게 잘도 자랐었다. 엄마는 앞집할머니가 다녀갈 때마다 여러가지 채소를 골고루 한아름 그득 보내군 했다. 그러면 다음날 앞집할머니는 식구들에게 대접하라며 색다른 음식을 사발을 맞덮어 갖고 오시군 했다. 그때 밀가루지지미가 그렇게도 맛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b></p><p><br></p> <p><b> 앞집할머니와 울 엄마사이가 이런가 하면 오용친구의 어머니와 나의 아버지는 연변일보사에서 초창기때부터 함께 편집사업한 동사자란다. 혹가다 마당에서 맞띄우면 아주 례의스레 서로 깍듯이 인사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히 떠오른다. </b></p> <p><b> 부모들 사이가 이러했을뿐만아니라 나의 큰남동생과 오광이도 서성중학교 동창으로 아주 다정하게 지냈다. 한족반에서 조선족애들끼리 말이 서로 통해서인지 사이가 각별했다. 오광이는 방과만 하면 늘 우리 집에 들려 아주 신나게 놀았다. 집으로 돌아갈 때면 몹시도 아쉬워했다. </b></p> <p><b> 세월은 그렇게 흘러 몇년간 우리 두집은 고향 떠나 낯선 곳에서 서로 의지하며 외롭지 않게 잘 지냈다.</b></p> <p><b> 그런데 만남이 있으면 리별이 있기 마련이라더니 어느날 갑자기 앞집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셔서 사위가 투도병원으로 조동해간다고 하셨다. </b></p> <p><b> 그 말씀에 울 엄마는 엉겁결에 앞집할머니의 손을 덥석 잡는것이였다. 마치 당장 떠나기라도 하듯이. 우리 집에 들어설 때면 항상 눈에 실웃음 짓던 인자하신 앞집할머니의 얼굴에도 섭섭해하시는 기색이 력력했다. </b></p> <p><b> 앞집할머니네는 그렇게 떠나갔다. 그후 우리 집은 한동안 고요가 깃들었다. 너무도 고요했다. 적막감이 들기까지 했다. 거진 하루도 빠짐없이 "계시오?" 하시면서 눈에 실웃음지으시던 앞집할머니가 기다려졌고 오광이가 방과후면 내 큰동생과 함께 쌍둥이처럼 책가방메고 우리 집마당에 들어서는것만 같았다. 모든 지나간 일들이 눈앞에서 삼삼했다. </b></p> <p><b> 내 맘이 이렇게 허전한데 울 엄마의 맘이야 오죽했으랴! 우리 집 정지에 앉아서 내다보면 앞집할머니네 집이 바로 보인다. 엄마는 버릇처럼 여름이면 창을 열고 멍하니 앉아서 하염없이 앞집할머니네 살던 집을 내다보군 했다. 그렇게 엄마는 시간가는줄 몰랐다. 내가 지금 울 엄마 그때의 나이가 되고보니 엄마의 그때 그 맘 헤아려진다. 인생황혼에 그렇게 기약없이 헤여졌으니 왜 그렇지 않았겠는가! </b></p> <p><b> 그렇게 몇년이 지나 우리 집도 앞집할머니네 집도 연길로 다시 돌아오게 되였다. 나의 엄만 앞집할머니네가 연길에 돌아왔다는 소문을 풍문에 듣고 내 동생보고 빨리 알아보라고 닥달을 했다. 그런데 청천벽력같은 소식 갖고 올줄이야! 앞집할머니가 세상뜨셨단다. 그 소식 듣고 울 엄마 얼마나 상심해하셨는지 모른다. 실신한 사람처럼 며칠내내 앞뒤집에서 살았던 얘기를 하고 또 하시면서 눈물 지으셨다. 지금만 해도 보고싶으면 진작 찾아보았으련만 그때까지만 해도 련락하기 힘든 세월이라 그렇게 못하다보니 엄마한텐 돌이킬수 없는 한이 맺혔으리라.</b></p> <p><b> 오늘 내가 오용친구를 만나 이 모든걸 회상하는건 단순히 동창 오용친구가 반가워서만이 아니다. 사실 우리 둘만의 추억은 없다. 우리 두집의 추억이고 부모님들의 추억이고 어르신들의 추억이다. 어르신들이 다 나누지 못한 그리움의 이야기를 마저 나누고 어르신들이 못한 지난날의 추억을 하면서 어르신들의 한을 풀어드리고싶어서이다. </b></p><p><b> </b></p><p><b> </b></p><p><b> </b></p> <p><b> 나의 회고를 듣던 그는 몹시 감개무량해하면서 그토록 깊은 추억이 묻어있는 서성마을로 두집식구들이 남긴 발자취를 찾아가보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b></p> <p><b> 그러지 않아도 옛집터를 찾아보려고 해마다 벼르던 난 대찬성이였다.</b></p> <p class="ql-block"><b> 답사는 오용친구의 연변1중 한반동창 홍영이가 배동하기로 했다. 오늘 오영친구를 만나게 된것도, 지난날을 추억할수 있게 된것도, 답사를 가게 되는것도 다 홍영의 열성덕이다. 그가 알심들여 이런 자리 마련해주지 않았더면 나와 오용친구는 어느때까지 모르고 지냈을지 모른다. </b></p> <p><b> 오늘따라 날씨가 2-3급바람에 령상 17도여서 외출하기가 딱 좋았다. 우린 설레이는 맘 눅잦히며 우리의 두번째 고향ㅡ 서성마을을 향해 달렸다.</b></p> <p><b> 가는 도중 룡문교에서 차를 멈춰세웠다. 추억의 룡문교다. 룡문교만 보면 그제날 설한풍이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에 하방내려가면서 "룡문교까지 스쳐지났으니 이젠 나서자란 고향을 영영 떠나는구나" 하며 엄마품에 안겨 흐느껴울던 일이 떠오른다. </b></p> <p><b> 룡문교다리우에서 </b></p> <p><b> 비암산고개마루에서 </b></p><p><b>ㅡ이 고개는 하방내려가던 날 "잘 있으라, 고향아!" 하면서 끊었던 울음을 다시 터뜨리며 넘던 고개다. 그때는 이 고개를 넘어 평강벌에 들어서면 고향과는 영영 리별인줄 알았다. </b></p> <p><b> 그렇게 들어섰던 평강벌을 멀리 바라보며.</b></p> <p><b> 룡문교를 스쳐지나고 비암산고개를 넘어 우린 먼저 모교 서성중학교에 이르렀다.</b></p> <p><b> 청춘의 꿈을 꽃피우며 희망의 나래를 펼치던 모교다. </b></p> <p><b> 오용친구는 이 학교에서 희망의 나래를 활짝 펴고 길림화공학교로 훨훨 날아갔었다. </b></p> <p class="ql-block"><b> 서성중학교는 나에게 있어서 정말 잊혀 안지는 학교다. 1971년, 문화대혁명후 처음으로 고중을 회복하면서 졸업시 학교에서 직접 대학입시에 참가할수 있다는 말이 돌았다. 그때 나의 눈은 반짝 빛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꼭 대학으로 가겠다는 일념으로 난 입을 옥물고 악착스레 공부를 했다. 아마도 그때 내가 이 학교에서 평생의 공부를 다한듯싶다. 죽기내기로 공부했다. 그런데 웬걸, 우리가 졸업할 즈음 대학입시는커녕 몽땅 농촌으로 내려가란다. 학교에서 직접 대학입시에 참가할수 없단다. 기가 막혔다. 너무도 억울했다. 다행히 서성중심소학교에서 한어교원으로 초빙하여 교편을 잡게 되였고 책볼 여가도 있었다. 난 틈만 나면 골을 틀어박고 정신없이 공부했다. 그때 그렇게 악착스레 한 공부가 후날 내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됐고 내 매걸음마다에 밑거름이 되였다. 그래서 난 서성중학교를 청춘의 꿈을 꽃피우며 희망의 나래를 펼치던 학교라 한다. </b></p> <p><b> 서중은 내가 다닐 때만도 4개 학년에 24개 반이 있었고 1200여명 학생이 학교운동장을 메웠었다. 오전에는 매 반급마다 50여명 학생들로 교실이 꽉 찼고 오후면 학교 축구대, 배구대, 롱구대의 뽈을 치고차는 학생들로 운동장이 북적였고 학교문예선전대에서 춤, 노래련습하는 소리가 운동장에 메아리쳤으며 농약반, 의약반, 기계반 등등 써클반활동도 활발히 진행되였었던 학교다.</b></p> <p class="ql-block"><b> 지금은 학생래원이 줄어들어 소학교, 중학교, 한족반, 조선족반 통털어 서성진학교라 이름 짓고 이 교사에 집중돼있단다. </b></p> <p><b> 교수청사에 들어가보려니 학교가 방학이 되여 철대문이 꾹 잠겨있었다. </b></p> <p><b> 별수없이 철바자밖에서 모교청사를 바라보는수밖에 없었다. </b></p> <p><b> 그래도 오용친구는 방법이 있었다. 철바자밖에서 찰칵찰칵하고 학교청사를 핸드폰에 담았다.</b></p> <p><b> 우리는 모교를 떠나 49년전 오용친구의 아버지가 원장으로 계셨던 서성병원 옛건물로 왔다. 여기서 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고있는 오용친구.</b></p> <p><b> 그때는 대문에 불이 일 지경으로 환자들이 들락날락하던 병원이다. 로과에서 금방 이사와서 미처 집을 마련 못한 오용친구네는 한동안 이 병원 한쪽칸에서 지냈단다. 지금은 병원이 새 건물로 이사가고 빈 집만 남았다. </b></p> <p><b> 새로 지은 병원앞에서 묵묵히 추억에 잠겨있는 오용친구. 아버지께서 많은 심혈을 기울이고 고생도 많이 하셨던 병원이라며 맘이 몹시 짠해하였다. </b></p> <p><b> 그때 나도 감기에 걸려 주사 맞으러 몇번 다닌적 있고 또 앞집할머니네 원장님께서 다니신 병원이여서 애착심이 몹시 갔던 병원이다.</b></p> <p><b> 여긴 내가 서성고중을 졸업하고 한어교원으로 초빙돼 교편잡았던 서성중심소학교다. 교수청사는 내가 떠난후 새로 지은 집이다. </b></p> <p><b> 오전에는 학생들에게 한어를 가르치고 오후에는 학교문예선전대 학생들에게 춤을 가르치던 바로 그 학교다. 한창 정열이 끓어번지는 19~ 20살 나이에 참으로 벅찬 나날 많았던 시절을 보낸 학교다. 마당에 들어서니 천진란만한 애들이 반갑다고 재잘거리며 나한테로 달려오는듯했고 현중소학교문예경연에 참가하고저 땀흘리며 춤련습하던 애들의 모습이 눈에 선히 떠오른다. 정말 정많던 학교다.</b></p> <p><b> 지금은 중학교청사로 합병돼가고 무슨 유한회사가 자리잡고있었다. 썰렁했다. 그래도 나의 귀가에선 랑랑한 글소리가 들려오는듯했다... 불현듯 회사건물지기 황둥개의 요란한 짖음소리에 난 그만 추억에서 소스라쳐 놀라 깼다. </b></p> <p><b> 중심소학교에서 나와 우리는 서성마을 중심거리에 들어섰다. 그때만 해도 농촌인구가 많은데다 지식청년, 하방호가족들까지 겹치여 아주 번화하고 일체 차량이 모두 여기로 지나다보니 아주 복잡하고 북적거렸던 거리다.</b></p> <p><b> 우리 집은 마을 서쪽끝에 있고 중학교, 소학교는 모두 동쪽끝에 있다보니 난 4년동안 일요일과 방학을 빼고는 거의 매일과 같이 이 길을 오가며 학교다니고 출퇴근했다. 나에겐 정말 정다운 길이다.</b></p> <p><b> 금방 하방내려온 첫해 일년간 살던 집앞에서. </b></p><p><b> ㅡ 우리 집이 하방내려간 생산대는 채소대로서 한족대였다. 이 집의 주인도 한족이였는데 성이 马씨였다. 한족집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엌간이 있고 방 두개가 동서로 갈라져있다. 우리 두집은 부엌을 같이 쓰면서 주인은 동쪽방에서 우린 서쪽방에서 일년간 함께 살았다. 참으로 화목하게 지냈었다. 지금은 马叔네가 이사가고 주인이 바뀌였다. 문이 잠가져있어서 집안에는 들어가보지 못하고 문밖에서 사진만 찍고 서쪽창문가로 돌아졌다. </b></p><p><br></p><p><br></p> <p><b> 내가 살던 집 서쪽벽에 붙은 창문이다. 우리가 살 때는 유리창문이였다. 한족구들에 앉아 이 창문으로 내다보면 바로 합작사가 보였다. 오늘 이 창문가에 서있느라니 그제날 이 창문으로 합작사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싫컷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b></p> <p><b> 이 길은 우리 집 서쪽창문쪽에 있다. 이 길따라 남쪽으로 가면 우리 채대 채소밭이 있다. 그 밭을 사원들은 南地라 했다. 나의 언니와 아버지는 이 길로 일하러 나가고 집으로 돌아오군 했다. 이 길을 오늘 다시 보니 아버지와 언니 생각이 몹시 난다. </b></p> <p><b> ...이 길은 팔가자로 가는 길이다. 그때 우린 시간만 있으면 이 길로 팔가자로 갔다오군 했다. 그때 나의 눈엔 백화점, 영화관, 목욕탕, 기차역전이 있는 팔가자가 큰 시내로 보였고 팔가자로 간다 하면 어느 대성시로 유람가듯 몹시도 신났었다. </b></p> <p><b> 그리고 이 길 서쪽에 세멘트공장이 있고 길동쪽에 나의 집이 있었다. 나의 집에 앉아서 내다보면 팔가자로 가는 길이 한눈에 보였다. 웬지 팔가자로 가는 길을 내다볼 때마다 공연히 기분이 좋았다. </b></p> <p><b> 오늘 이 길을 다시 걷노라니 팔가자간다고 신바람이 나서 활개치던 그때가 생각난다. </b></p> <p><b> 서성 넓은 벌 한복판에 성산마냥 불쑥 솟아있는 돌산이 있다. 토봉산이라고 한다. 한족말로는 小鼓山이라고 했다. 그 옛날 내가 서성마을에 있을 때만 해도 토봉산기슭으로 옅은 강물이 발목을 적시며 유유히 감돌아 흘렀고 산우에 올라가 사면팔방 둘러보면 여름이면 청파만경 출렁이고 가을이면 황금물결 파도치고 겨울이면 솜이불 펴놓은듯한 60리 평강벌이 한눈에 안겨왔다. 지금 말로 하면 동영상을 보는듯했다. </b></p> <p><b> 내가 서성중심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을 때이다. 소년아동편집부에서 잡지내표지에 발표하겠다며 이 토봉산에서 학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보내달라고 청탁이 왔다. 난 김윤직음악선생님과 함께 학교문예대 학생들을 데리고 이 산에 올라와 사진도 찍고 손풍금반주에 맞춰 노래도 부르며 즐거운 시간 보낸적 있다. 그때 신나게 타는 손풍금소리와 학생들의 노래소리가 저 멀리 벌판에 울려퍼지던 랑만의 순간을 잊을수가 없다. </b></p> <p><b> 오늘 그 추억 더듬고저 토봉산에 왔는데 산기슭으로 큰길이 지나가면서 감돌아흐르던 강은 자취를 감추었고 산도 돌을 까가고 흙을 파가서 그때 그 산이 아니였다. </b></p> <p><b> 아쉬움이 많았다. 그래도 10대시절 이 산에서 올리뛰고 내리뛰며 즐기던 그때를 그리며 추억의 발자취를 찾았다. </b></p> <p><b> 오용친구는 토봉산에 대한 추억은 별로 없단다. 학교를 졸업하고 인츰 길림으로 가다보니 토봉산에 올라와 본 기억도 없단다. 그래도 추억을 찾아 오르내리는 나를 잘도 맞춰줬다. </b></p> <p><b> 고맙기만 했다 .</b></p> <p><b> 우린 추억이 묻어있는 서성촌의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걷고걸어 드디여 오용친구네와 우리가 살던 이도 5대마을로 왔다. 저기 저 이동통신탑이 세워져있는 그쪽에 우리 두집이 마주보며 살던 집터가 있단다.</b></p> <p><b> 정확히 말하면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돌자리가 바로 우리 집터란다. 오용친구의 집은 우리 집 터밭 저기 저 남쪽에 있었다. 우리 두집은 터밭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있었다. </b></p> <p><b> 몇해전에 남동생내외와 함께 왔을 때는 낡은 집터에 새집 지어놓고 누군가 살고있었는데 오늘 와보니 그 집마저 사라지고 지금은 마른 옥수수대가 어수선하게 널려있다. </b></p> <p><b> 방문 서쪽벽에 발방아간이 붙어있어서 방아간집이라 불리우던 우리 집. 오늘도 빈 터에 서있느라니 진종일 쿵쿵하며 울리던 발방아소리가 들려오는듯하다...</b></p> <p><b> 외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숨결이 슴배여있는 옛집터에 묵묵히 서서 회상에 잠겨있는 오용친구.</b></p> <p><b> 그토록 이뻐해준 외할머니의 생각에 오래도록 선자리에서 발걸음 떼지 못하는 오용친구.</b></p> <p><b> 옛집터에서.</b></p> <p><b>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고 바라봐도 어르신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그들이 남긴 추억만이 우리 맘을 무겁게 한다.</b></p> <p><b> 그제날 오용친구네를 떠나보내고 울 엄마가 그들이 살던 집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앉아있던 자리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서 그때 그 엄마의 맘을 헤아려본다. </b></p> <p><b> "엄마, 엄마가 앞집할머니하고 연길에서 다시 만나 하려다 못하고 그대로 품고 간 이야기를 내가 오늘 앞집할머니의 외손자하고 했어요. 그 외손자가 외할머니를 대신해 들어줬어요. 그리고 우리 두집이 다정히 살던 집터도 돌아봤어요. 그러니 엄마도 이젠 답답하던 속 시원히 풀고 편히 쉬세요. 꼭 그러세요."</b></p> <p><b> "엄마, 앞집할머니, 하늘나라에서 만나셨죠? 지금도 마주앉아 해지는줄 모르고 오손도손 즐겁게 얘기나누시고계시죠? 우리 후세들도 늦게나마 만나 어머님들의 옛얘기 하고있어요. 어머님들이 우리 두집에 맺어준 인연, 우리 두집에 남겨놓은 소중한 이야기 우리 후세들이 기억할것입니다. 할머님, 어머님, 부디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세요."</b></p> <p><b> 서성마을에서의 추억을 마치고 우린 투도진으로 향했다. 투도진은 오용친구의 아버지가 투도병원 원장으로 조동하면서 우리 앞집에서 이사간 곳이다. </b></p> <p><b> 40여년 세월이 흐르며 변화가 많다보니 우린 물어가면서 겨우 옛 병원자리를 찾을수 있었다. 원래 투도 서북쪽 산아래에 자리했던 병원은 투도중심으로 이사가고 지금은 영진식품유한회사가 차지하고있었다. 오용친구의 집은 병원울안에 있었으므로 집으로 놀러 오면 병원마당에서 자전거도 타고 바드민톤도 쳤단다. 추억이 있는 병원이고 마당인데 지금은 마당의 높은 다락에 명태가 주렁주렁 한가득 걸려있었다.</b></p><p>......</p> <p><b> 세월은 흘러흘러 어느덧 49년이 지났다. 40여년전 부모님들이 당의 호소받들고 시내의 안온한 사업터를 떠나 간고한 농촌에서 땀흘리며 남기신 발자취를 더듬으며 맘이 몹시 무거워짐을 느꼈다. 세월이 자취없이 흘러 어느덧 우리가 부모님들의 그때 그 나이가 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년세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농촌생활에 적응하려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러나 서로가 보듬어주고 도움이 돼주고 사랑해주는 이웃이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됐고 의지가 됐고 힘이 됐으리라...</b></p> <p><b>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렸을적 뛰놀았던 공원으로 왔다. 무겁던 마음도 풀겸. </b></p> <p><b> 어르신들이 모두 이 세상을 떠나고 모든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려는 오늘, 49년간 서로 소식없이 지내던 하방간부 2세들이 어르신들의 그제날의 발자취를 찾아 추억을 더듬었다. 어깨의 큰 짐을 부리운듯하다. 반세기 가까이 항상 어르신들께 뭔가 해드리지 못한감에 죄스러웠다. 지금은 홀가분하다. 그제날의 두집사이의 소중한 이야기를 털어놓고나니 속이 후련하다. 나도 이젠 홀가분한 맘으로 어르신들을 당당히 만날수 있고 만나서도 할말이 있을것 같다. 할머님, 어머님들이 채하지 못한 그때 그 이야기를 다했다고. </b></p><p><b> </b></p><p><br></p><p><b> 오용친구와의 재회는 기약이 없다. 이제 북경으로 돌아가면 언제 또다시 올는지. 그저 하루하루를 편히 보내기를 기원할뿐이다. </b></p> <p><b> 오늘 추억의 자리를 마련해준 홍영친구, 고마워. 🌷🙏🌷</b></p> <p><b> 최주석님, 댓글 고맙습니다. 주석님께서 일깨워준 토봉산에서의 그제날 흑백사진 찾을수 없네요. 넘 아쉬워요. 항상 저의 미편에 고귀한 말씀 해주시고 지적하여주셔서 진정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b></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