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문학 批评 *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修行과 방황, 극복의 경계에서 나타난 내면의 흔적들 ㅡ 조광명 시집『좌선, 어느 30대의 아침』을 평함</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김 해 응(中国人民大学)</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 rgb(57, 181, 74);">김해응(金海鹰)프로필:</span></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 rgb(57, 181, 74);">한국학중앙연구원 문학박사, 중국인민대학교 비교문학박사후. 現 중국인민대학교 文學院 부교수. 저서로는 《심연수시문학연구》(한국학술정보),《한국현대시인론》(한국문화사),《茶山的四書經學》(商务印书馆)등 7권이 있고. 30여편의 학술논문과 문학평론을 발표하였으며 <심연수학술연구공로상>(한국,2018), 제38회《연변문학》평론상(2019)을 수상하였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1. 들어가며</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중국조선족문학은 중국문학의 발전과 함께 새로운 문학시대에 들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혁개방이란 시대적 변혁기를 거치면서 많은 시인과 작품집이 배출되었고 시의 문학성과 예술성도 괄목할만한 발전을 가져왔다. 조광명의 시집『좌선, 어느 30대의 아침』은 시인이 90년대에 창작한 시들의 결과물로서, 10여년이란 시간의 창작과 성찰과정을 통해 내면 세계를 여실히 보여준 또 하나의 결실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시인은 자신의 의식이나 감정을 시적 화자를 통하여 언어로 표현한다. 시적 화자는 작품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고 감추어져 있기도 한다. 노출된 작중 화자 즉 현상적 화자인 ‘나’는 스스로의 발화(發話)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며, 독자는 ‘나’의 발화와 관련 상황을 분석하여 작중 화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므로 ‘나’를 어떤 인물로 표현해 내느냐, 그의 입을 통해서 무슨 말을 하게 하느냐 어떤 내면세계를 그려내느냐 하는 것은 시인에게 있어 작품의 성공을 좌우할 만큼 신중하면서도 어려운 작업이다. 시적 자아의 내면이란 주관적이고 직접적인 자기 표현의 공간이기 때문에 서정적 자아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시에서는 시적 자아가 표현하는 주관적인 자기 세계 전체가 내면으로 압축될 수 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조광명 시인은 시집을 제1부 「계(界)의 슬픔」, 제2부 「도시 어부」,제3부「아침, 물이 없다」, 제4부 「지나간 오늘」 로 나누어 10년동안의 성찰과 방황, 극복의 흔적들을 기록하고 또 그 기록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는 내면의 세계를 섬세하게 그려 보여주고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2. 수행과 성찰, 그리고 비움</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좌선이란 앉아서 하는 禪수행을 말한다. 선(dhyana)은 원시불교에서부터 깨달음에 이르는 삼학(불교의 세 가지 학문인 계학(戒學), 정학(定學), 혜학(慧學)의 하나로서 중요시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좌선, 어느 30대의 아침』이라는 시집 제목을 보면 선시집 느낌이 다분하다. 선시는 대체로 불교의 선사상(禪思想)을 바탕으로 하여 오도적(悟道的) 세계나 과정, 체험을 읊은 시로 선의 핵심은 깨달음에 있다.시의 핵심 역시 깨달음에 있는 바, 오직 깨달음을 통해서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고 자기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선'은 마음의 깨달음을 중시하면서 자아와 세계의 본질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풍부한 상상과 심도 있는 투시력을 발휘하여 깊고 미묘한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 이러한 '선'의 입장은 시적 영감을 통하여 사물과 인생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창작의 원리와 일치한다. 즉 시집 제목만으로도 이 시집을 작성한 시인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리차즈(I. A. Richards)는 어조를 의미와 감정, 의도와 더불어 시의 총체적 의미를 형성하는 시적 의미의 하나라 했고, 웰렉(R. Wellek)과 워렌(R. P. Warren)은 내적 형식의 하나라고 했다. 따라서 ‘나’의 이미지가 무엇인지, 어떤 태도와 어떤 목소리(voice)를 가지고 있는지 찾아보는 것은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해명하는 데 있어서의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시집 제목과의 연관성상에서 구체적인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시적 화자의 어조, 이미지, 태도, 목소리 등에 대한 탐구를 통하여 시인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기로 한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화두 없는 아침</p><p class="ql-block">무화두를 화두로,//</p><p class="ql-block">좌선</p><p class="ql-block">마음을 끄시오//</p><p class="ql-block">어머니, 당신의 등잔불은</p><p class="ql-block">아직도 밝으시군요. </p><p class="ql-block">…중략… </p><p class="ql-block">사랑의 뒤안길엔</p><p class="ql-block">배반의 리유가 음모같이 웃는다</p><p class="ql-block">…중략… </p><p class="ql-block">새벽별의 기침소리에</p><p class="ql-block">귀가 열려 때리는 효성</p><p class="ql-block">…중략… </p><p class="ql-block">가난한자의 그릇우에 넘치는 웃음을</p><p class="ql-block">배고픈 강아지는 넘보지도 않고</p><p class="ql-block">…중략… </p><p class="ql-block">심안(心眼)은 아직 열리지 않는가</p><p class="ql-block">내 깨여난 육체여 아직도 잠자고</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좌선 , 어느 30대의 아침」일부</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좌선은 두 다리를 포개는 가부좌(跏趺坐)를 하여 생각 분별을 끊고 정신을 집중하여 무념무상의 경지에 들어가는 불교의 수행방법이다. 시적 자아는 아침부터 “마음을 끄시오"하면서 세상을 잊어버리라고 자신에게 최면을 건다. 그러나 수행의 길은 쉽지 않았다. 육신의 “어머니”가 생각나고 배반한 사랑의 음모가 생각나고 가난한 자의 삶을 관조하고 심지어는 “새벽별의 기침”처럼 미약한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육체는 깨어서 좌선의 흉내를 내고 있지만, 심안(心眼)은 열리지 않고 세상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찬 마음으로 인해 시적 자아의 수행은 위기를 맞게 된다. 특히 결말 시구를 ‘미완’의 느낌을 주는 “내 깨여난 육체여 아직도 잠자고”라고 처리함으로서 좌선 즉 참회가 길어질 것 같은 여운이 지속되는 효과를 독자들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1부「계(界)의 슬픔」에서 시적 자아의 내면 세계는 슬픔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 슬픔은 단순히 좌선의 실패때문만이 아니다. 어쩌면 생과 사의 고민, 이승에서의 허무함과 고독, 내세에 대한 불안 등 다양한 이유때문일 것이다.</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내가 나를 던지면</p><p class="ql-block">그 던져진 나를 안아줄 곳이 도대체 있기나 한 걸가//</p><p class="ql-block">품이고</p><p class="ql-block">가슴이고</p><p class="ql-block">그리고 무덤인</p><p class="ql-block">이 땅</p><p class="ql-block">내가 던져질 곳은 </p><p class="ql-block">그 어디인가</p><p class="ql-block">…중략…</p><p class="ql-block">고개들어 저 하늘이요</p><p class="ql-block">내 마지막 눈길 닦아줄 깨끗한 하늘이</p><p class="ql-block">아직 내겐 한쪼각도 없소//</p><p class="ql-block">내가 나를 던져 내가 나를 건사할</p><p class="ql-block">그 무덤의 곳을 나는 아직 모르오</p><p class="ql-block">(이 세상 어디가 무덤이 아니리오-마는…)</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리유」일부</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품” 하면 1차적으로 “엄마품”처럼 따뜻함이 떠오르는 것이 정석이다. 그러나 이 땅은 “품”이고 “가슴”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느낌이 아닌 차가운 “무덤”이다. 시적 자아는 죽어서 묻혀야 할 안식처를 찾고 있지만 결국은 이 세상 자체가 무덤이라고 역설한다. 즉 시적 자아는 죽어서도 갈 곳이 없는 자신의 한계적인 상황을 역설적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세상의 삭막함을 하소연한다. “나”의 주위에는 그 누구도 없다. 안아줄 곳도 누울 곳도 마지막 눈길 닦아줄 하늘도 묻힐 곳도 없이 혼자이다. 즉 혼자라는 자기 자각에서 시적 자아는 지독한 고독함과 외로움을 느낀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러한 생(生)에서의 슬픔은 1부에서 다양한 “꽃”의 이미지를 통해 많이 나타나기도 한다. “꽃”은 조광명 시에서 높은 빈도수를 보이고 있는 시어이다. 구체적인 작품들로는 「꽃을 찾아」「락화의 계절1」「계(界)의 슬픔」「락화의 계절2」「꽃의 자살」「꽃, 그 죽음밖에서 부르는 만가」「영생」「꽃 가신 뒤길에」「꽃귀신」등이 있다. 1부뿐만이 아니라 시집 전체에서 “꽃”은 중요 키워드라고도 볼 수 있다. 매 작품에서 나타나는 “꽃”의 상징이나 이미지에 대한 파악은 시작품을 이해하는 키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꽃은 예로부터 문학의 중요한 소재로 채용되어 왔다. 시작품에서 꽃은 주로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원형으로서의 이미지 혹은 꽃이 가지고 있는 개별적이고 특별한 상징이나 어떤 이념으로서 사용된다. 조광명 시에서의 꽃은 원형적인 이미지보다는 특별한 상징이나 이념으로 다양하게 쓰였다. </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전략…</p><p class="ql-block">봄이라기 무섭게 기세좋게 피여나는 꽃들을</p><p class="ql-block">불이라기 무섭게 사정없이 태워버리는 봄불//</p><p class="ql-block">…중략…</p><p class="ql-block">꽃의 환호라 하자 </p><p class="ql-block">불의 오열이라 하자//</p><p class="ql-block">도망할수 없는 인연</p><p class="ql-block">그 인연의 품속에</p><p class="ql-block">꽃과 불은 만난게 아닌가 </p><p class="ql-block">생과 사를 즐기는게 아닌가</p><p class="ql-block">한송이 꽃으로도 피여나지 못한 나를</p><p class="ql-block">님아 차라리, 서쪽하늘 황홀한 노을속에 던져버리고//</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영생」일부</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이 작품에서의 꽃의 이미지는 확연하게 드러난다. 곧 삶과 생(生)의 이미지로 서정적 자아와의 동일화이기도 하다. 생명은 환호하며 탄생하지만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불”을 맞이하게 되있는 것이 인생이다. “꽃의 환호라 하자/불의 오열이라 하자/꽃과 불은 만난게 아닌가/생과 사를 즐기는게 아닌가”라는 권유와 강조, 감개의 어조에서 생과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연이기에 생과 사를 순리대로 받아들이라는 즉 시적 자아의 인생에 대한 달관한 태도를 볼 수 있다. “한송이 꽃으로도 피여나지 못한 나”에서 꽃은 이 생에서 뜻대로 살지 못한 자신의 삶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추구하는 가치관에 달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불만족 혹은 부끄러움은 시집 1부의 시종일관된 정서이기도 하다. 아래 또 다른 작품 한 편을 보기로 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꽃은 죽었다.</p><p class="ql-block">사랑하는 나의 꽃은 죽었다.</p><p class="ql-block">죽어 기막힌 꽃의 향기</p><p class="ql-block">그 죽음의 향기 맡아</p><p class="ql-block">…중략…</p><p class="ql-block">한송이 꽃보다 아름답지 못한 나의 시</p><p class="ql-block">살아있는 내 시에서는 왜</p><p class="ql-block">죽음의 냄새가 나는가</p><p class="ql-block">…중략…</p><p class="ql-block">죽음으로 피여나는 꽃이 있다면</p><p class="ql-block">그 꽃으로 태여나자, 나와 그리고 내…</p><p class="ql-block">단 한수의 시(詩)야!</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꽃, 그 죽음밖에서 부르는 만가(挽歌) 」일부 </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살아있는 내 시에서는 왜/죽음의 냄새가 나는가”처럼 강한 자기비판과 자기부정을 하는 시적 자아는 다분히 해체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작품세계와 현실세계, 나아가서 죽음의 세계를 넘나드는 분열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키워드가 되는 “꽃”은 무엇일까? 전체적인 맥락에서 봤을 때 “꽃”은 곧 시적 자아가 추구하는 어떤 아름다운 꿈이나 이상세계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시적 자아는 “죽은 꽃” 즉 실현되지 못한 꿈과 이상은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기에 꽃 또한 죽어서 향기가 더 기가 막히다고 역설한다. 결국 시적 자아에게 있어서 시는 곧 인생의 가치요, 삶의 전부이다. 살아있는 삶에서 죽음의 냄새가 나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죽음을 통해 꽃으로 환생하기를 갈망한다. </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br></p> <p><br></p><p><br></p><p>그리고 나는 아직 보리수아래/</p><p>앉아있다/</p><p>륜회(輪廻)의 바람을/</p><p>합장(合掌)속에 꼭 가두고/</p><p>네이름 비벼 비벼 연기나게/ 기다림의 자세로</p><p><br></p><p>-「보리(菩提)의 바람속에」 일부</p><p><br></p><p><br></p><p>그리고 시인은 삶에 대한 부끄러움, 슬픔과 고독 속에서 윤회의 기대 속에서 참회와 수행을 끊지 않는다. 결국 그동안 자신이 걸어온 삶을 되돌아보며 비우기를 시작한다. </p><p> </p><p>어느날부터인지 죄수인양 고개숙이고 토하기 시작, 열심히 열심히 토해 지금까지요. 30대의 뒤안길 토악질해놓은 오물(汚物), 그건 삶에 대한 내 30대의 해석인지 모르겠소.</p><p>토하려고 먹은건 아닌데 토해낸 오물은 먹은것만큼이나 그득하고, 생의 담즙까지 함께 끄집어올리는 젊음의 토악질을 도대체 나는 멈추지 않소. 토하려고 먹은건 아닌데 토해낸 오물은 먹은것만큼이나 그득하고, 생의 담즙까지 함께 끄집어올리는 젊음의 토악질을 도대체 나는 멈추지 않소…중략…죽어 살아있는 내 이름 석자를 토하오, 살아 죽어있는 내 이름 석자를 토하오 내 이름도 이렇게 더러운 오물일줄을…</p><p><br></p><p>-「어느 30대의 자화상」 일부 </p><p> </p><p><br></p><p>인간의 부끄러움과 괴로움의 근원은 다양하다. 시적 자아는 30여년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면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정의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좌선을 통한 참회로 시작하여 자신의 깨끗하지 못한 삶때문에 죄의식까지 느낀다. 행을 나누는 안정된 정형시의 구조가 아닌 자신의 체험을 묘사한 시적 발화의 문맥으로 서술된 산문식 형식의 채택과 다소 숨가쁜 어조는 ‘멈추지 않는 토악질’을 연상시킨다. 시적 자아의 내면 탐구는 고유한 자기를 찾아가기 위한 몸부림의 시도(試圖)들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현실적 자아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대상을 보는 방식은 ‘둘레를 살펴보기’, ’뒤돌아보기’, ’들여다보기’로 나누어진다. 내가 나 스스로를 볼 때는 ‘들여다보는 것’에 해당한다. 즉 내가 나를 ‘들여다보는’ 행위란 나를 대상화시켜 스스로를 발견해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p><p><br></p><p>시적 자아는 오물을 토하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행위를 함으로 스스로를 발견하려고 애쓴다. 자신을 비춰보는 “오물”은 곧 “거울”의 역할을 한다. 거울은 자아성찰에의 깊이로 향하는 의식의 반영이다. 결국 “오물=30여 년의 내 삶=내 이름 석자=나”는 대등한 것으로 시적 자아는 “오물”에 비친 자아의 추한 모습을 보고 “오물” 이 “나”임을 고백한다. </p><p><br></p><p> </p><p>이제 길,</p><p>서천에로의 꽃길을 너는 보았는가</p><p>외곬으로 뻗은 그 길우에</p><p>너는 무슨 이름 꽃을 들고 오를것이냐//</p><p>아무런 해석도 씌여있지 않은 목탁</p><p>그걸 두드려 너는 심우도를 읽는가</p><p>네가슴을 두드려라</p><p>단 한덩이 진실 검은 피 토할 때까지//</p><p><br></p><p>-「홀로 올라라」 일부 </p><p><br></p><p> </p><p>이러한 “토하기”는 결국 ”비우기”이다. 시인은 출판후기에서도 그 부분을 강조한 바 있다. </p><p> </p><p>“그릇을 비워내는 기분이다. 이 못난 시집으로 내 10여년의 인생도 그대로 비워내며, 비움으로써 다시 채워야 할 내 래일은 어떤 모습일가는 아직 감히 그려볼수가 없다. 그러나 내 나머지 인생도 영원히 시와 함께 할건 이제 숙명적인거니깐 이제 태여날 내 시들에 미리 예쁜 기대어린 사랑을 약속할수 밖에 없다.” (조광명시집출판후기 「그릇을 비우며」 중에서)</p><p> </p><p>시작품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적 자아는 바로 추구하는 인간상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아이다. 자신의 내면세계에 존재하는 참된 자아와 거짓 자아의 내적갈등을 극복하고 성찰을 통하여 자기완성을 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은 치열하기만 하다. 1부의 「비우기」「방생」「눈 오는날의 수행」등의 작품들에서 자신을 비워내는 치열한 노력들이 엿보인다.</p><p><br></p><p>전체적으로 볼 때 제1부 “계의 슬픔”에 실린 시들에서 보여지는 시적 자아의 내면세계는 다양하다. 수행을 통해 참회를 하다가도 욕망과 강한 자아의식이 되살아나기도 하고, 현세의 삶을 괴로워하고 슬퍼하다가 내세의 아름다운 삶을 갈구하기도 한다. 시집 1부에서 대부분 작품들은 삶의 과정과 조건을 다루는 서술적 문체와 감각적 대상과 그 특질을 다루는 묘사적 문체를 위주로 씌여졌는데 그 중 서술적 문체가 좀 더 우세를 차지하는 편이다. 이러한 시들의 미학적 장점은 시적 자아의 내면세계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것이다. 결국 청자인 독자들은 삶과 죽음, 수행과 일탈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p><p><br></p><p> </p><p>3. 도시에 대한 현실인식과 타협</p><p><br></p><p><br></p><p>현실문명의 시대에서 시인은 어떠한 시인이 되어야 하는가? 감성만을 가지고 이상의 표현만을 추구하는 시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인 것을 재현하는 것에 충실할 것인가? 물론 양자의 적절한 결합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아래에 시집 제2부 「도시 어부」에 실린 작품들에 나타나는 시적 자아의 내면세계를 통하여 답을 찾아보기로 한다.</p><p>먼저 시적 자아가 살고 있는 도시는 어떠한 도시인가? </p><p><br></p><p><br></p><p>안개의 고향을 묻지 말라</p><p>그리고 도시는 모른다.</p><p>도적질 하고픈 날</p><p>도시엔 선악과나무가 없고</p><p>부끄러움 모르는데는</p><p>관능이 넘친다</p><p>어둠 그리고 어둠은</p><p>도시의 처마밑</p><p>도적고양이 동공속에 반짝이고</p><p>살찐 옷 뻔뻔스레 껴입은 도시는</p><p>가린것 없이 너무 로골적이다.</p><p><br></p><p>…후략…</p><p><br></p><p>-「안개속의 도시」 일부</p><p><br></p><p> </p><p>시인은 도시의 관능적이고 노골적인 상황을 감각적인 시어들을 통해 윤색하기보다는 아예 “관능이 넘친다” “뻔뻔하다” “노골적이다” 등 직관적인 시어들을 사용하여 직설적인 어조로 도시의 적나라함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도시를 묘사함에 기독교의 성경적 모티프를 작품에 인용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선악과는 성경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결실한 과실로 일명 '금단(禁斷)의 열매'이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움을 알게 된다. 선악과는 인간에게 부끄러움을 알게 하는 가치기준과 같은 잣대이다. 그러나 도시에는 이러한 기준마저 없기에 도둑질과 같은 나쁜 행위가 정당해지고 “도둑고양이”같은 뻔뻔스러운 인간들이 어둠 속에서 거리낌없이 추악한 본능을 드러낸다. 도시는 사람의 판단과 시야를 흐리는 안개와 같은 타락한 기운이 가득찬 에덴동산이다. </p><p> </p><p><br></p><p>옛날이나 지금이나</p><p>가난은</p><p>흔하게 널린 이 세상의 락엽</p><p>…중략… </p><p>가난한자들은 잘사는 사람앞에 </p><p>짐승처럼 머리를 숙여야 하고</p><p>…중략… </p><p>잘살아야겠다는 욕망은</p><p>초불같이 어둠속에서만 녹아내리는 눈물</p><p>…중략… </p><p>가난을 털기 위해 몸부림치는</p><p>가난한자들의 땀우에</p><p>그 땀을 마셔 더 잘살아지는</p><p>살찌는 자들이 있으니</p><p>…중략… </p><p>래일도 가난은</p><p>시대의 부유처럼 흔하다</p><p><br></p><p>—「가난」 일부</p><p><br></p><p> </p><p>시적 화자의 눈에 비친 도시는 욕망이 가득찬 도시일 뿐 만 아니라 빈익빈 부익부의 부조리들이 넘치는 도시이다. 누군가에게 따지는 듯한 시적화자의 분노한 어조에서 불공평한 사회에 대한 불만과 정의를 추구하는 내면이 엿보인다. 시적 화자는 세상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하여 이 도시의 비리를 폭로하고 있다. </p><p>이처럼 비정한 도시이기에 지고지순해야만 할 사랑마저도 값이 없고 추악하다.</p><p> </p><p>음란한 밤아, 파리 한마리의 목숨으로 꺼지고</p><p>밝아오는 아침의 창문에 덕지덕지 붙은 파리똥같은 욕정</p><p>그걸 닦을 손은 아직 걸레 같다</p><p>멀리 팔려갔던 사랑은 아직 귀로에 오르지 않았고</p><p>사랑을 잊은지 오랜 그릇에는 울분 같은 술이 골똑 담겨있다.</p><p>그걸 마실 청춘은 이미 취해 스스로 토한 오물속에 누워있고</p><p><br></p><p>…후략…</p><p><br></p><p>-「사랑의 거리」 일부</p><p><br></p><p> </p><p>사랑의 거리는 원래 아름다운 거리, 행복의 거리여야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시적 화자가 바라본 사랑의 거리는 눈뜨고 보기 조차 힘든 풍경이다. 등가성의 원리라는 예술적 특징으로 묘사된 ‘사랑의 거리’라는 동일한 의미망(意味網)을 가진 시어(詩語)들이 반복된다. 등가성의 반복이라는 차원에서 봤을 때 시인은 사랑의 거리를 묘사하기 위하여 “파리” “파리똥” “걸레” “구토” “오물”…등 동일한 의미망을 가진 혐오유발의 시어들을 열거하여 도시의 타락과 참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적 화자와 마찬가지로 이 욕망의 도시, 타락의 도시를 떠나려는 사람은 없다.</p><p><br></p><p> </p><p>이 큰 그물을 어찌할거나</p><p>그속에서 벗어날 용기를</p><p>도시는 갖고 있지 못하다</p><p>살찐 고기들, 그리고 여윈 고기들은</p><p>모두 동공을 잃었다</p><p>그리고 날개인양 푸득여</p><p>갇힌 운명을 즐기는</p><p>살속에 피속에 흐르는</p><p>찌들은 도시의 생리</p><p>…중략… </p><p>세기의 맨 마지막 푸른 잎이 토해낼</p><p>누런 먼지의 가래침을 향해</p><p>모두 헐떡이며 가는 리유를</p><p>도시는 갖고있다</p><p>…중략… </p><p>그러나 도시의 미련에서</p><p>도망칠 고기는 아직 없다</p><p>…후략… </p><p><br></p><p>—「도시어부」 일부</p><p> </p><p><br></p><p>동일화의 원리 즉 시인이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여서 그것을 내적 인격화하는 이른바 세계의 자아화를 적용하여 내면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실제로는 자아와 갈등의 관계에 있는 세계를 자아의 욕망, 가치관, 감정에 적합한 것으로 만들어 동일성을 이룩하는 작용이다. 시적 자아와 도시라는 세계는 갈등의 관계임에도 시적 자아는 다른 도시인들과 마차나지로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안주하는 “동공을 잃은 고기가 되어 있다. 도시의 모습은 마치 큰 그물처럼 그들의 삶을 옭죄이고 있지만 “살찐 고기든 야윈 고기”든 그 누구도 도시에 대한 미련을 못버리고 있다. </p><p><br></p><p>제2부의 작품들에서 시적 화자의 눈에 비친 도시는 도시인들의 내면세계처럼 닫혀져 있거나 묶여져 있거나 뒤틀려 있는 부조리의 세상이요, 인간들이 살아가는 복잡한 세상의 축소판이다. 이러한 도시에 대한 철저한 현실인식에도 불구하고 시적 화자는 결국 떠나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한다. </p><p><br></p><p><br></p><p> </p><p>4. 방황에서 극복으로, 새로운 자아의 모색</p><p><br></p><p><br></p><p><br></p><p>제3부 「아침, 물이 없다」, 제4부 「지나간 오늘」의 시들은 서정적 자아의 내면세계를 가장 잘 드러낸 부분이기도 하다. 내용과 주제의 유사성 및 상관성에 의해 두 부분을 묶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위에서 보다시피 1부에서 수행과 참회의 형태를 통한 자기성찰에로 나아가는 과정은 자기절제와 속죄의식의 고통스러움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고통이 바로 자기를 절제하게 하고 또한 그 절제의 적극적인 형태로서 속죄의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힘은 자기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가운데 생기게 되며 결국은 자기 각성으로 발전하고 또한 새로운 자아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 시집3부와 4부의 구체적 작품 속에서 시적 자아의 내면 세계의 변화를 추적해볼 수 있다.</p><p><br></p> <p><br></p><p><br></p><p>먼저 3부의 「아침, 물이 없다」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1-5까지 시리즈로 쓰여진 다섯편의 「떠돌이 일기」이다. 유랑은 현실의 삶에서 대안이 보이지 않을 때 선택하는 삶의 방식일 때도 있다. 시적 화자는 작품 속에 현실의 가능성이 부정된 상황에서 유랑과 방황의 여정에 오른다. 그 과정을 통하여 슬픔과 아픔을 망각하고 자아를 자각하려는 성찰의 아픈 노력이 역력하다.</p><p><br></p><p><br></p><p>수많은 꿈이 진렬된 시간의 문안에</p><p>수많은 내가 풍경으로 진렬돼</p><p>나를 두드려 듣는 종소리</p><p>종소리는 간다 세기의 해볕같이</p><p>듣는이 없어도 고독을 향기 풍기며</p><p>듣는이 없어도 자아를 영위해//</p><p>영원한 문을 여닫아</p><p>영원히 시들어 푸르러가는</p><p>길로 동화되는 길우의 사나이</p><p>목청이 있다, 시간의 넓은 마당에</p><p>흙을 부르듯 웨쳐 불러</p><p>나를 동이자 나를 풀자</p><p>그릇과 무덤//</p><p><br></p><p>-「떠돌이일기3」전문</p><p><br></p><p><br></p><p>시집의 전체적 맥락에서 볼 때 시적 자아의 유랑의식은 1부에서의 수행과 성찰, 그리고 비움, 2부에서의 현실인식에서 비롯된다. 자신을 비운 후의 해탈된 정신면모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유랑의 과정에서 “나”를 죽여 “무덤”에 “동이고”, “그릇”을 비워서 나를 풀어가는 과정을 거친다. 1부에서 좌선의 모습, 움직이지 않고 수행하는 정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3부에서는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아를 영위하기 위해 끊임없이 떠도는 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모든 슬픔과 고독을 툭툭 털고 “발에는 거칠것 없다/발에는 길밖에 없다-「떠돌이일기 2」”라고 고백한다.</p><p> </p><p>…전략…</p><p>하늘을 날지 못한 록색갈망</p><p>갇힌 자유가 몸부림친다//</p><p>바다속에 천년 산 거부기</p><p>파도우에 떠오를 때</p><p>병사리는 쪼각쪼각 깨지고</p><p>…중략…</p><p>어느날 밀물과 썰물 뒤</p><p>모래밭에 입 벌린 조개껍데기</p><p>반짝이는 파란 구슬 있었다</p><p>진주는 아니였다</p><p>깨여진 념원의 유리쪼각이</p><p>태양의 미소 안고 반짝이고 있었다.</p><p><br></p><p>—「갈망」일부</p><p><br></p><p> </p><p>“하늘을 날지 못했던 갈망”과 “몸부림치던 갇힌 자유”가 산산히 깨진다. “천년 산 거북이”처럼 묵묵히 수행만 했던 자아가 드디여 껍질을 깨고 나온다. 그동안 추구하던 유리병처럼 아름다운 “염원”도 같이 산산이 깨어졌다. 하지만 태양의 관조를 받아 반짝이는 깨어진 염원의 유리쪼각에서 시적 화자는 희망을 본다.</p><p><br></p><p><br></p><p>3부에서의 방황은 정처없는 유랑이 아니라 1부의 고독과 슬픔을 극복한, 2부의 타락과 타협을 잊은 새로운 자아를 향해 노력하는 극복의 자아이다. 결국 시적 화자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원동력을 찾는다. 아래 두 편의 시를 보기로 한다.</p><p> </p><p><br></p><p>엄마는 태초의 먼 구석에서 기여온다</p><p>엄마는 태초의 먼 구석으로 걸어간다//</p><p>…중략…</p><p>그래도 춤을 믿자 엄마의 치마자락</p><p>그래도 춤을 메치자 엄마의 아픈 기도//</p><p>…중략…</p><p>빈그릇을 들고 높이 웨치실 엄마-어데서 왔소? 어데로 가오?// 밤이 되면 엄마는 날 부른다, 종소리같이-얘야, 어서 와서 밥 먹고 힘 키우렴아//</p><p>그 소리는 시간을 넘고 또 넘어아득한 태초에로 가 닿는다//</p><p>먼 태초적에도 엄마는밥이 되면 나를 불렀다, 종소리같이-</p><p><br></p><p>「아픈 기도」 일부 </p><p><br></p><p>나를 동였던 사상아 이젠 나를 풀자//</p><p>이제 자욱은 땅에 찍혀져진실과 사랑의 시를 쓸게다//</p><p>…중략…</p><p>걸어서 언제까지나 땅인게다</p><p>걸어서 언제까지나 엄마인게다</p><p>나를 떠나 엄마에게로 가는</p><p>생명원초에로의 작업//</p><p>사랑의 깊은 땅에 진실한 절 높이</p><p>엄마의 기도소리 걸어오신다</p><p>걸음에 시의 별이 반짝이신다</p><p>흙으로 빚은 태양은</p><p>태양의 빛갈이 황홀하시고…//</p><p><br></p><p>-「떠돌이일기4」전문 </p><p><br></p><p><br></p> <p><br></p><p><br></p><p>긴 방황의 순간에 시적 화자는 태초로부터 들려오는 부름소리를 듣게 된다. 곧 “엄마”가 부르는 소리이다. 절망의 끝에는 힘과 용기의 원동력이 되는 “엄마”가 있다. 시적 화자에게 과연 “엄마”는 무엇인가? 곧 새로운 출발을 위한 태초로의 회귀인 것이다. 위의 「갈망」에서 보여줬던 “태양의 미소”처럼 마지막 희망을 보게 한 것이 곧 태초로부터 오는 힘이다. 거기에 힘입어 다시 태어난 시적 화자의 새로운 모습과 새로운 시작이다. “엄마”는 먼 태초 적에도 빈 그릇을 듣고 밥을 먹으라고 부른다. “밥”은 곧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에 힘을 북돋아주는 원동력이다. 비우고 새롭게 탄생한 기분으로 살아가는 시적 화자는 곧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꿈꾼다. 그래서 「재생」에서도 “새날의 그늘밖/밝아오느니/깊어가느니/어머니 자궁처럼 깊이…밝게”라고 새로운 자아의 재생을 기뻐 노래한다. 지금까지 산 인생을 마무리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향해 능동적인 자세로 나아간다. 뿐만 아니라 드디여 새로운 자아를 찾게 된다. </p><p><br></p><p><br></p><p>조용히 나의 이름을 불러본다</p><p>별 같은 반짝임을 씹는다//</p><p>저도 몰래 나의 이름을 적어본다</p><p>싫증없는 사랑스러움이 호듯이 웃는다//</p><p><br></p><p>…후략…</p><p><br></p><p>-자아(自我)일부</p><p> </p><p><br></p><p>“나”의 독백적 표현은 시적 화자의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고 ‘나’의 주관적 정조를 나타내는 데 아주 적합하다. 시집 1부의 「어느 30대의 자화상」에서 시적 화자는 “죽어 살아있는 내 이름 석자를 토하오, 살아 죽어있는 내 이름 석자를 토하오 내 이름도 이렇게 더러운 오물일줄을…”이라고 자기 자신에 대한 지극한 혐오와 불만족을 토했었는데 4부에 와서 이처럼 독백적인 표현을 통하여 자신에 대한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드러낸다. 시적 자아는 자신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통하여 내면의 새로운 자기와 만남과 동시에 자아인식 역시 커다란 변화를 보인다. “더러웠던 이름”은 이제 “별”처럼 반짝이고 심지어 사랑스러움이 느껴져 저도 몰래 이름을 적어본다. 보편적으로 인간에게 별은 ‘희망’, ‘순수’, ‘지조’, ‘이상’, ‘지고한 가치’, ‘지향해야 될 이념’ 등을 상징한다. 시적 화자에게 새로운 자아는 곧 희망이고 이상이며 지고한 가치와 지향해야 할 이념인 것이다. </p><p> </p><p><br></p><p>5. 나오며</p><p><br></p><p> </p><p>지금까지 중국조선족 중견작가인 조광명의 시집 『좌선, 어느 30대의 아침』을 대상으로 시적 자아의 내면세계를 살펴보았다. 시작품에서 시적 자아는 자기 문제를 중심에 두고 자신을 토로함과 동시에 이러한 것들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이처럼 시적 자아의 내면을 분석하는 것은 시인과 작품 두 가지를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아주 적절한 문학적 수법이다. 구체적으로 시인의 경험적 자아와 시적 자아의 일치를 표명한 표현론적 관점에 근거하여 시적 자아의 내면세계에 대한 분석과 함께 다양한 시적 자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p><p><br></p><p>삶에 대한 부끄러움, 슬픔과 고독 속에서 윤회를 꿈꾸며 참회와 수행을 끊지 않는 성찰적 자아, 결국 그동안 자신이 걸어온 삶을 되돌아보며 비움을 시도하는 자아, 도시의 추악함을 고발하는 현실인식은 가졌지만 그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타협하는 나약한 자아, 현실의 가능성이 부정된 상황에서 유랑하고 방황하는 자아, 삶의 다양한 고통 속에서 자신을 절제하고 비움을 실천하는 자아, 끝내는 각성하여 새로운 삶을 향하여 능동적인 자세로 나아가는 자아를 보게 된다. 결국 시인은 시적 자아의 다양한 내면 모습에 편승하여 자신 그리고 인간들의 보편적 자아와 삶의 리얼리티를 잘 그려내고 있다. </p><p><br></p><p>객관적으로 봤을 때 기존의 조선족 시인들의 시작품은 평면적이고 통속적이며 문학성, 예술성, 시의 형상화 등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모습을 보여왔다. 그에 비해 조명광 시에서는 우선 기존의 틀을 깨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뿐만 아니라 시의 형상화 단계에서 여러 체험과 이미지가 유기적으로 조직되어있고, 낯설게 하기 이미지, 상징, 패러디, 아이러니와 역설 등등 다양한 표현기법을 통하여 작품을 형상화하고 다양한 예술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 측면에서 볼 때 조광명 시는 조선족시문학의 스펙트럼을 한층 넓히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p><p><br></p><p>이 작품들이 창작된 시기인 90년대 중국문단을 보면 개혁개방 및 시장경제와 더불어 문학의 개인화를 실현했던 시기이다. 그러한 주류(主流)문학의 영향때문인지 조광명의 시들 역시 시적 자아에 몰입하는 개인적 경향의 내면세계를 보여준다. </p><p><br></p><p>물론 일부 작품들은 시어 선택에 있어서 다소 직설적이거나 평이함으로 인해 시적 긴장감이 떨어지는 부분도 없지 않다. 시를 시답게 하는, 좀더 개성적인 시로 만들 수 있는, 좀더 개인적인 문학적 언어 사용이 부족한 점은 아쉽다. 이는 대부분의 시들이 90년대에 창작된 것, 그동안 보였던 조선족시들의 공통특징인 직설화법의 영향, 그리고 시인 개인적인 삶의 경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시인에게 시어의 선택은 자유로운 것이고, 자유로움이란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일상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언어의 방임은 자칫 산문적인 분열을 드러내기 쉽다. 시어의 일상성과 울림을 잘 파악하여 사용함으로 시적 긴장을 야기시키고 시적 상상력이 균형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p><p><br></p><p>2018년 현재는 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다문화 시대, 뉴미디어 시대이다. 저자와 독자의 경계는 무너진지 오래고 문학은 새로운 시대에 진입했다. 1인미디어시대가 도래한 지금 문학컨텐츠는 더욱 다양하게 변모되고 풍성해지고 있다. 위챗, 블로그등 SNS에는 글들이 넘쳐나고 좋은 작품은 바로 비디오, 오디오컨텐츠로 만들어져 전파된다. 흥미로운 것은 시가 짧은 형식 및 함축성 등으로 인해 소통하기 편리한 문학장르로 각광받고 있다. </p><p><br></p><p>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에 조선족 시인들이 나아가야 할 문학적 방향은 어떤 것일가? 작품에서 조선족문학 고유의 특징과 중국문학(중문으로 창작된 주류문학), 한국문학의 영향관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현실참여와 예술성을 어떻게 시 속에 녹일 것인가? 기존 문학을 반추하면서 우리 문학이 걸어온 발전행보를 돌아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앞으로 시문학이 감당해야할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더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 속에서 조광명 시인을 비롯한 우리 조선족의 많은 시인들의 새로운 활약상을 기대해본다.</p><p> </p><p><br></p>